치하야후루 16
스에츠구 유키 글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86



기쁨을 누릴 수 있을 적에 아름답게 웃지

― 치하야후루 16

 스에츠구 유키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2.9.25. 4500원



  ‘카루타(かるた/carta)’를 하는 아이들이 나오는 만화책 《치하야후루》는 2015년까지 스물일곱째 권까지 한국말로 나옵니다. 앞으로 이 만화책이 몇 권까지 나올는지 모르나 꽤 오랫동안 더 나오리라고 느낍니다. 나는 처음에 ‘카루타’가 뭔가 하는 마음에 이 만화책을 읽었고, 고등학교를 다니며 새로운 삶과 꿈을 바라보는 아이들 몸짓이나 삶을 잘 그리는구나 싶어서 이 만화책을 보다가, 권수가 늘면서 대회에 나가서 솜씨를 겨루는 흐름으로만 나오기에 더 읽을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곰곰이 살피면, 적잖은 일본 만화는 ‘전국 대회’에 나가서 이기려고 하는 몸짓이 ‘긴 연재만화’를 이루는 뼈대나 줄거리가 되곤 합니다. 초밥 이야기이든, 라면 이야기이든, 피아노 이야기이든, 노래나 악기나 야구나 축구 이야기이든, 참말 일본 만화는 전국 대회를 무척 좋아하는구나 싶어요.


  그렇다고 전국 대회가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참 온갖 놀이를 놓고도 전국 대회를 벌이는구나 싶어서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제기차기나 공기놀이로도 전국 대회를 하는 셈이라고 할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하모니카 전국 대회’라든지 ‘피리 전국 대회’도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그림 대회나 글쓰기 대회가 있고, 바둑 대회와 장기 대회가 있듯이 오목 대회도 재미있을 테고, 농구 대회나 배구 대회를 겨룰 만합니다. 다만 우리 삶을 이루는 수많은 놀이나 운동이나 솜씨를 놓고서 꼭 대회까지 치러서 겨루어야 하는지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타이치, 나한테 팀이란 오직 ‘타이치와 치하야’뿐이었다.” “말하고 보이 부끄럽네. 됐다, 치아라. 그거랑은 상관없지만, 난 대학은 도쿄에서 다닐라 칸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 어느 학교 칠 건데?” “추천받을 수 있는 학교. 내일 개인전에 우승하고 도쿄애 갈 거다.” (17∼18쪽)



  한국에 윷놀이 대회나 제기 대회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연날리기 대회나 자치기 대회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고무줄 대회라든지 땅따먹기 대회가 있을까요? 이런 대회까지 누군가 열 수 있습니다만, 대회를 열어서 ‘전문가’가 나오도록 하기보다는 여느 삶자리에서 즐겁게 누리면서 웃음꽃을 피울 때에 그야말로 ‘즐거움’이요 ‘기쁨’이 되리라 느낍니다. 빵 굽는 솜씨나 밥 짓는 솜씨를 겨루는 전국 대회가 있어도 재미있을 테지만, 솜씨를 겨루는 대회보다는 마을살이를 즐겁게 밝히는 조촐한 잔치마당이 있을 적에 한결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어떤 대회가 있으면 ‘대회에 나가려는 생각’에 오랫동안 어느 한 가지 일이나 놀이만 합니다. 처음에는 재미난 놀이나 일이었을 수 있지만, ‘대회에 나가려고 하’면, 이때부터 사뭇 달라져요. 처음에는 배구나 축구나 야구나 농구도 재미있게 했어도, 대회를 앞두고는 ‘훈련’이나 ‘연습’으로 바뀝니다. 이제껏 그냥 재미나게 놀다가 대회 때문에 ‘꼭 이길 수 있도’록 작전을 짜고 계획을 세우지요.


  작전 짜기나 계획 세우기도 이 나름대로 머리를 쓰면서 북돋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밥 먹고 연습과 훈련만 하면서 온 하루를 보낸다면? 연습과 훈련으로 온 하루를 보낼 뿐 아니라 기나긴 해를 보낸다면? 축구 전문가나 야구 전문가로 아이들을 키운다면? 그러니까 만화책 《치하야후루》에 나오는 아이들이 ‘카루타 전문가’가 되어 오직 카루타 한 가지만 아주 빼어나게 잘 하는 어른이 된다면?



‘왼손으로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즐거운 듯이. 그러고 보면, 처음 치하야에게 한 장을 뺏겼을 때도, 왼손이었지. 재미있겠다. 얼마나 즐거울까. 치하야와 하는 카루타는.’ (83∼85쪽)


“쓰는 손을 다쳐서 힘들겠네. 나도 오른손으로 할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109쪽)



  바둑을 잘 하는 사람은 하루 내내 바둑만 생각하겠지요. 아니, 바둑 전문가가 되어 바둑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라면 하루 내내 바둑만 생각하겠지요. 노래를 잘 불러서 노래로 먹고살 수 있습니다. 이른바 전문 가수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노래만 잘 부르면 되고, 밥은 못 짓거나 살림은 못 하거나 사랑은 영 모르거나 이웃은 하나도 헤아리지 못하거나 동무는 조금도 못 만나도 될 만한지 궁금합니다. 어느 한 가지를 잘 하기에 다른 여러 가지는 못 할 수 있습니다만, 잘 하는 한 가지만 해야 할는지, 아니면 스스로 새로운 삶과 살림을 찾거나 살피는 길은 안 걸어도 될는지 가만히 물어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만화책 《치하야후루》를 가로지르는 줄거리나 이야기는 그리 나쁘지 않지만, 권수가 이어지면서 ‘전국 대회로 더 깊이 빠지는’ 흐름은 썩 재미있지 않다고 할까요. 더 빠르고, 더 날렵하고, 더 매서우며, 더 힘센 ‘특급 선수’로 거듭나는 모습이 되어야 비로소 ‘성장 이야기(성장만화/성장소설)’라고 해야 할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퀸이랑 만났는데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지? 어떻게? 보고 싶다. 아라타와 시노부의 결승전.’ (153쪽)


‘같은 급인 상대를 다섯 번 연속으로 이기는 걸, 왜 지금까지 못했을까?’ (165쪽)



  기쁨을 누릴 수 있을 적에 아름답게 웃습니다. 기쁘게 배우고 어우러질 적에 그야말로 환하게 노래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카루타 놀이’가 태어났을 적에는 그야말로 재미나게 놀고, 기쁘게 어우러지며,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려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카루타 놀이에 쓰는 ‘백 장짜리 카드’는 그냥 카드가 아니라 ‘짤막하게 읊은 노래를 적은 종이’입니다. 사랑을 노래하고 숲을 노래하며 삶과 마을과 꿈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깃든 종이예요.


  어느모로 본다면 ‘노래종이’나 ‘시를 적은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루타라는 놀이를 즐기면서 노래(시)를 더 깊이 살피고, 카루타라는 놀이를 여럿이 둘러앉아서 하는 동안 노래(시)를 더 넓게 돌아보면서, 참말로 도란도란 이야기잔치를 누리는 셈이라 할 만해요.


  한국에서도 이런 놀이를 해 볼 수 있을 테지요. 종이를 백 장이든 이백 장이든 쉰 장이든 마련해서, 이 종이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짤막하게 적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뺏거니 나누거니 하면서 놀 만합니다. 노래 한 마디로 꿈을 키우고, 놀이 하나로 웃음을 북돋웁니다. 글 한 줄로 사랑을 가꾸고, 이야기잔치를 열어서 기쁨을 한껏 살찌웁니다. 4348.12.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12-27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과 애니 때문에 우리 한시와 하이쿠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서요..물론 언어의정원도 거기 한 몫 했고요.
좋은 소개 잘 읽고 가요!^^

숲노래 2015-12-27 01:48   좋아요 1 | URL
카루타라고 하는 놀이가
일본 사회에서 `옛 시`를 즐겁게 익히면서
쉽게 부를(읊을) 수 있도록 빚었다고 합니다.

이런 놀이는 우리 스스로도 재미나게 살려서
아이들하고 새롭게 즐길 만하겠구나 하고 느껴요.

[그장소] 2015-12-27 01:51   좋아요 0 | URL
백인 백수 ㅡ라는 데에서 온 거죠..대회가 계속되면 앞에서 시를 읊는 장인이 특유의 목소리를 돋궈서
낭송하고 그 시의 속도에 맞춰 카드를 날리고하죠..
우리도 그런 좋은 놀이를 좀 만들면.. 저도 바라곤 ㅡ했었어요..
 
천재 유교수의 생활 29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67



산타 할아버지 월급은 누가 줄까?

― 천재 유교수의 생활 29

 야마시타 카즈미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1.1.25. 4500원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로운 삶을 지켜보고 바라보고 겪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자랍니다. 어른들도 날마다 자랍니다.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 날마다 새로운 일을 하고 살림을 가꾸고 사랑을 나누고 이것저것 보듬으면서 자랍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이런 어른대로 자라고, 아이가 없는 어버이는 이런 삶대로 자랍니다. 아이들도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기도 하고, 제 어버이한테서 아무 사랑을 못 받으며 자라기도 합니다.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날마다 새롭게 배우면서 새롭게 자라려는 생각으로 사는 유교수 이야기를 다룹니다. 스물아홉째 권을 읽으면, 마을에서 거짓말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이를 마주하는 유교수가 나오고, 대학 건물에서 무척 오랫동안 숨어 지내는 제자를 마주하는 유교수가 나오며, 만년필을 잃어버린 채 허둥거리는 유교수가 나오다가는,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은 유교수가 나옵니다. 유교수는 이런 삶을 거치면서 이러한 대목을 배우고, 저러한 삶을 지나는 동안 저러한 대목을 배웁니다.



“근데 그게 말짱 거짓말이었대요!” “그 소년은 왜 거짓말을 해야만 했던 거요?” (7쪽)


“힐끔힐끔 보는 사람은 믿을 수 없죠.” “그건 너의 주관이지. 힐끔 본다고 해도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고 본단다. 그걸 뭉뚱그려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건 너무 폐쇄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구나.” (15쪽)



  누군가는 고개를 안 돌리고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모로 하며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홱 돌리고, 누군가는 고개를 가만히 돌립니다.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고, 누군가는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저마다 생각과 삶과 마음이 다릅니다. 저마다 다른 생각과 삶과 마음에 따라 이야기도 다릅니다.


  힐끔힐끔 본다고 해서 제대로 못 보지 않습니다. 언뜻 스치면서 본다고 해서 잘못 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보면서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이고, 따사로운 눈길로 보는 듯했으나 정작 속으로는 딴 꿍꿍이가 있기도 해요.


  그러니까 겉모습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겉만 살피거나 헤아려서는 어떤 곳에서도 참을 가리지 못하지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거짓이라는 것을 확실히 입증해야 한다. 증명하려면 공부가 필요하지.” (19쪽)


“나는 이 세상에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인간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지는 거니까. 나는 이 필터를 어떻게 갈고닦을 것인지에 관해 가장 관심이 많지.” (41∼42쪽)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나오는 유교수는 어떤 천재일까요? 깊이 생각할 줄 알거나 곰곰이 돌아볼 줄 알기에 천재일까요? 오래도록 생각할 줄 알고, 한 번 듣거나 겪은 일은 잊지 않기에 천재일까요?


  그런데 유교수는 집에서 밥을 지으면 설거지를 할 줄 모릅니다. 맨 처음에는 밥조차 지을 줄 몰랐습니다. 유교수는 자동차를 몰 줄 모릅니다. 유교수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유교수는 아기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를 모르고, 아기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도 몰라요.


  유교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하고 맞부딪힐 적에 내빼지 않습니다. 모르는 일을 해야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끝까지 생각합니다. 다만, 혼자 끝까지 생각하느라 아무 일도 못 하기 일쑤요, 둘레에서 그 일을 도맡아서 해치우지요. 답답해 보이니까요.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은, 자네도 마찬가지 아닐까? 햇빛 속에서 단순하게 생각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수식도 있다네. 나는 그걸 보고 싶어.” (74∼75쪽)


“아무튼 일단 여기 앉아라. 아직 네 어머니와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잖니. 소리내서 말을 하라는 게 아니야. 그냥 보기만 하면 된다.” (184쪽)



  어느 모로 보면 어리숙한 몸짓이 꽤 많은 유교수이지만, 유교수가 유교수일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삶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유교수한테 가장 걸맞고 알맞으며 들어맞는 길을 스스로 찾아서 씩씩하게 걷기 때문에 유교수한테는 유교수 삶이 가장 즐겁습니다. 그리고 유교수는 ‘새롭게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언제나 새롭게 배우기로 나서려고 해요. 새롭게 배우지 않는다면 스스로 이 땅에서 살아갈 뜻이 없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나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읽는 내내 오늘 이곳에서 내가 누리려 하는 ‘새롭게 배우기’란 무엇인가 하고 되새깁니다. 밥 한 그릇을 지어서 아이들하고 먹을 적에 새로운 마음이 되는지, 설거지를 하거나 비질을 하면서 새로운 몸짓이 되는지, 자전거를 타거나 들길을 걸을 적에 새로운 눈길이 되는지 가만히 헤아립니다. 책 한 권을 읽을 적에도 ‘다른 책’만 읽는지, 아니면 똑같은 책을 놓고도 ‘새롭게’ 읽는지 되새깁니다.



“하나코가 열심히 일했으니까 산타 할아버지는 좋은 선물을 많이 주실 거야.” “산타 할아버지는 월급을 누가 줘요? 산타 할아버지는 일 많이 하니까 세상에서 제일 부자여야 하잖아요.” “산타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선가인 자선사업가로 미루어 생각해야 할까. 아니, 애초에 …….” “할아버지도 몰라요?” (137∼138쪽)



  그나저나 천재 유교수한테도 때때로 막히는 길이 있습니다. 어느 때인가 하면, 이녁 손녀하고 마주할 때입니다. 손녀는 아직 스스로 잘 몰라서 유교수한테 스스럼없이 묻고, 유교수는 슬기롭게 대꾸하기도 하지만, 여태 한 번도 생각하거나 겪은 적이 없어서 우물쭈물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산타 할아버지는 월급을 누가 줘요?” 같은 말에 유교수는 할 말을 잃습니다. ‘바른대로 논리를 찾으려’고 하니, 그야말로 산타 할아버지라고 하는 넋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놓고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산타 할아버지가 있는가 없는가부터 따져야 할 터인데, 산타 할아버지는 ‘있다’는 쪽으로 생각하기로 한 유교수이기에 손녀한테 “산타 할아버지는 좋은 선물을 많이 주실 거야” 하고 말했는데, 손녀가 되물은 말 “산타 할아버지는 월급을 누가 줘요?”를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가를 놓고 머리가 아파요.


  자, 산타 할아버지한테는 누가 월급을 줄까요? 산타 할아버지가 이녁 스스로 월급을 줄까요? 산타 할아버지가 받을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가 스스로 줄까요? 천재 유교수 할아버지는 아마 이 수수께끼를 놓고 논문이나 책 한 권을 써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렇게 물을 적에는 실마리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유교수 할아버지는 아이를 돌본 적이 없어서 실마리 찾기를 못 합니다.


  아이가 ‘산타 할아버지 월급’ 이야기를 물으면, 아마 웬만한 여느 어버이라면 이렇게 대꾸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게 말야, 산타 할아버지는 누가 월급을 줄까?” 아이한테 이렇게 되물으면 뜻밖에도 아이들은 저마다 다 다른 슬기로운 생각을 열어서 재미난 대꾸를 해 줍니다. 4348.12.2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5-12-2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산타 할아버지는 월급 받지 않는다는 것에 한표합니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거든요. ㅎㅎ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

숲노래 2015-12-26 01:15   좋아요 0 | URL
네, 산타 할아버지한테는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창조하실 테니 월급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겠지요. 유교수 님한테는 그러한 개념을 생각하기는 아직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도 34권을 보면 유교수 님도 이제는 그분 아버님이 `삶에서 사람이 창조하는 사랑`이라는 대목에 한 발자국 다가선 듯도 하지만, 아직 `직관`이라는 세계하고는 좀 떨어져서 지내시니까요 ^^

재는재로 2015-12-25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한표요15년크리스미스도지나가고있네요좋은마스지내시고계신가요 좋은연휴되시기를

숲노래 2015-12-26 01:16   좋아요 0 | URL
아이들하고 놀고 아이들을 재우고 하면서 오늘이, 아니 어제가 25일이었구나 하고 이제 비로소 느낍니다 ^^;;; 하루가 참으로 빨리 지나갔네요. 재는재로 님도 늘 아름다운 하루로 마무리 지으셔요 ^^
 
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 페코로스 시리즈 2
오카노 유이치 글.그림,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583



아이를 돌보고 어버이를 보살피는 기쁨

― 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

 오카노 유이치 글·그림

 양윤옥 옮김

 라이팅하우스 펴냄, 2015.12.5. 12500원



  나는 두 어버이한테서 태어났습니다. 두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으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이윽고 몸이 많이 자란 뒤에 짝님을 만나서 새롭게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낳으면서 나도 새삼스레 어버이가 됩니다.


  나를 낳은 두 어버이는 저마다 다른 두 어버이한테서 태어났습니다. 두 어버이는 또 다른 두 어버이한테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두 어버이는 자꾸자꾸 이어집니다. 먼먼 옛날부터 서로 아끼고 보살피며 어깨동무하는 사이로 지내는 두 어버이는 언제나 고운 사랑으로 아이를 낳아 돌보았습니다.



‘나가사키 비탈진 돌계단에는 시장 다녀온 어머니들이 멀거니 서 있는 포인트가 있다. 마침맞게 어른어른 햇볕을 가려 주는 바람 통하는 길. 어머니도 어린 아와 남동생을 데리고 이곳에 멀거니 서 있곤 했다. 술주정 심한 아버지에게서 도망칠 때도.’ (5쪽)




  만화책 《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라이팅하우스,2015)를 읽습니다. 이 만화책을 빚은 오카노 유이치 님은 어머니를 대단히 아끼거나 돌보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녁 어머니가 다기 아기로 돌아가듯이 거의 아무것도 못하면서 요양시설에서 지낼 적에 ‘어머니 기저귀’를 갈아 준다든지, ‘어머니 밥’을 차려 준다든지 하지 못해요. 《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를 빚은 오카노 유이치 님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녁 나름대로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요양시설에서 모시는 일에다가 어머니하고 지내는 삶을 만화로 그리는 일입니다.


  옛날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 만해요. 옛날에는 제 어버이가 늙으면 어느 딸아들이든 집에서 늙은 어버이를 모시며 살았으니까요.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는 아이를 돌보고, 어른으로 자란 아이는 다시 늙은 어버이를 보살피면서 살림을 짓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주고받았어요.


  그런데 만화책 《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는 어떻게 널리 사랑받는 책이요 만화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요? 만화를 그린 오카노 유이치 님은 그저 요양시설을 찾아갈 뿐이고, 똥이고 밥이고 돌봄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지만, 이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떻게 사람들 마음을 찬찬히 건드릴 수 있을까요?



“미쓰에, 어디 갔었어?” “앗, 히로코.” “저기가 나가사키야.” “가고 싶다. 여기(아마쿠사) 계속 있다가는, 애보기와 밭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히로코, 나랑 나가사키에 가자.” ‘아하, 엄니가 지금 아마쿠사에 가 있구나. 어머니 속에는 보물상자가 있고, 그 보물상자 안에 깜빡 들어선 것 같은 그런 묘한 순간들이 있다.’ (12∼13쪽)


‘요양시설에 어머니를 찾아가 딱히 하는 일 없이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의 신비로운 느낌.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의 이 신비한 따뜻함.’ (46쪽)




  어버이가 아이를 돌볼 적에는 더 나은 시설이나 문화를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돌보며 언제나 사랑으로 어루만집니다. 반찬이 김치 한 조각만 오르는 밥상이라 하더라도 어버이는 아이하고 사랑을 나누는 밥상맡에 둘러앉습니다. 따순 밥 한 그릇으로 오붓하게 삶을 지으려고 하는 어버이예요.


  요양시설에서 지내는 늙은 어버이를 마주하는 오카노 유이치 님은 아마 한동안 아주 바빴으리라 느껴요. 스무 살이 넘고 서른 살을 지나는 동안 스스로 꿈을 키우려고 매우 바쁘게 지냈으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이처럼 ‘아이가 꿈을 찾아 달리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어버이예요.


  이리하여 아이(오카노 유이치)는 어버이 곁에서 딱히 다른 하는 일은 없이 손만 맞잡는다든지, 함께 꾸벅꾸벅 졸며 해바라기를 한다든지, 어머니가 문득 들려주는 옛날 옛적 어린 삶 이야기를 가만히 받아들입니다. 뭔가를 더 해 주는 삶은 아니요, 뭔가를 더 해 주지도 못하는 삶이라 할 텐데, 이런 삶이라 하지만 아이와 어버이 사이를 잇는 사랑이라는 끈을 늘 차분히 돌아보면서 한 칸 두 칸 만화를 그려 넣습니다.



“할머니가 나예요?” “그렇구먼, 늙어 버린 미쓰에란다. 앞으로 너는 많은 일을 경험할 게야. 전쟁도 겪을 것이고, 원자폭탄 떨어진 도시로 시집가서, 술주정 남편 때문에 고생도 숱하게 하고, 큰아들은 대머리 번들번들.” “할머니는 얼굴이 참 고우세요. 좋은 일이 많았던 얼굴이에요.” (67쪽)


“엄니, 봄이 오면 쓰요시도 걸을 수 있어?” “하하, 아니야. 쓰요시 걸음마는 좀더 기다려야 해.” “그때도 아부지는 술 취해서 다 뒤집어엎을까?” “후유. 그 술버릇은 못 고쳐.” (81쪽)




  어버이는 아이를 돌보면서 기쁩니다. 날마다 새롭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거든요. 아이는 어버이가 보살펴 주니 기쁩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랑을 받을 수 있거든요.


  어버이는 날마다 밥을 새로 짓고, 옷을 새로 갈아입히고, 이야기를 새로 들려주면서, 어버이 스스로 새로운 마음이 됩니다. 아이는 날마다 밥을 새로 받고, 옷을 새로 갈아입으며, 이야기를 새로 들으면서, 아이 나름대로 새로운 숨결로 거듭납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고단하면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고단한 기운을 물려받습니다. 아이를 돌보다가 문득 한숨을 쉬거나 거친 말이 새어나오면 아이는 이런 한숨이나 거친 말을 문득 듣고는 마음속에 앙금으로 쌓습니다. 아이를 돌보며 빙글빙글 웃는다면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웃음을 물려받아요. 힘들다 싶은 일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어버이라면, 어버이는 아이한테 노래하는 기쁨을 물려줍니다.



“미쓰에 언니, 내가 먼저 오게 됐네.” “후사코, 죽어 버렸니?” “언니는 천천히 와도 괜찮아.” (142쪽)


“언니, 마음껏 울어.” “후사코.” “날이 따뜻해져서 이 간지럼나무에 잎사귀가 가득해지면 간지럼 먹이러 오자, 언니.” (143쪽)




  만화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두 아이를 돌보며 지나온 발자국을 되짚습니다. 어버이로서 내가 문득 골을 부리면 아이들은 나한테서 곧장 골부림을 물려받아서 골을 부립니다. 어버이로서 내가 즐거이 노래하고 춤을 추면 아이들은 어느새 활짝 웃음꽃을 터뜨리면서 나를 둘러싸고 신나게 춤을 춥니다.


  어버이인 내가 얌전하면 아이들도 얌전합니다. 어버이인 내가 수다쟁이가 되면 아이들도 수다쟁이가 됩니다. 어버이인 내가 꽃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면 아이들도 꽃을 상냥하게 쓰다듬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돌멩이를 함부로 뻥뻥 차면 아이들도 돌멩이를 함부로 뻥뻥 차요.


  아마 나는 우리 어버이한테서 골부림이나 짜증을 물려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대로 우리 아이들한테 골부림이나 짜증을 다시 물려줄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골부림이나 짜증을 물려주었어도 이를 삭히고 달래어 웃음과 노래로 바꿀 수 있어요. 우리 아이들도 저희 어버이한테서 기쁨을 물려받을 수 있고, 좀 바보스러운 대목도 슬기롭게 가다듬을 수 있어요.



“엄니, 잠 깨셨어요?” “먼 데까지. 먼 데까지 잠을 잤어. 엄청 먼 데까지 잠을 잤어.” (155쪽)



  아이들하고 함께 꿈을 꿉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노래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삶을 사랑하면서 손을 맞잡고 춤을 춥니다. 만화책 《페코로스, 어머니의 보물상자》는 책이름에 드러나듯이 ‘대머리가 된 늙은 아들’이 더 늙은 어머니가 살며시 열며 보여주는 보물상자 같은 숱한 이야기를 가만히 받아들여서 누린 하루를 들려줍니다.


  살짝 늙은 수수한 대머리 아저씨가 폭삭 늙은 어머니한테서 보물상자를 엿보고, 이 보물상자를 살뜰히 아낍니다. 오늘 나는 조용한 시골에서 조용한 살림을 가꾸면서 왁자지껄 개구지게 노는 아이들한테서 새로운 보물을 느끼고 내 마음속에서 새로운 보물상자를 끌어내어 사랑스러운 씨앗을 심는 하루를 누립니다. 우리한테는 저마다 다른 보물상자가 있고, 이 저마다 다른 보물상자에는 저마다 다르면서 고운 이야기가 물씬 흐르리라 생각합니다. 4348.12.1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는재로 2015-12-1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권도 감동적이었지만 이번권도 감동적입니다 전권은 군데군데 글로 되어 만화부분의 비율이 좀 적었지만 이번책은 만화부분의 분량이 대부분이라 더 어린시절의 이야기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참
아버지는 솔직히 술에 취해 저런행동을 하는인간이라니 그래도 저런 아버지에게 헌신한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대공습의 피해를 보여주면서 반전의 정신까지 그려낸 감동적인 글이에요 나라는 달라도 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어디든 마찬가지 같아요

숲노래 2015-12-17 11:33   좋아요 0 | URL
네, 이번 책은 한결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그리고 아프면서 따스한 이야기가 잔잔히 흘렀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러한 사랑을 받아 태어났고, 또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테지요 ^^
 
테즈카 오사무 이야기 3: 1960 ~ 1976
반 토시오, 테즈카 프로덕션, 아사히 신문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583



‘만화 그리는 하느님’은 어떤 꿈을 꾸었나

― 테즈카 오사무 이야기 3, 1960∼1976

 반 토시오·테즈카 프로덕션·아사히신문사

 김시내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3.9.25. 11000원



  아이들은 만화책을 좋아합니다. 어른도 만화책을 좋아하지요. 아이들은 만화책에서 ‘무엇이든 마음껏 할 수 있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자그마한 아이가 커다란 어른을 한주먹으로 누르기도 하고, 가볍게 뛰었는데 구름을 뚫고 달이나 토성까지 닿기도 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기는 사이에 몸을 잊으면서 아득한 꿈나라를 누비고, 언제 어디에서나 새랑 노래하고 나비하고 춤추는 기쁜 놀이를 누려요.


  만화가 아니라면 이러한 꿈이나 놀이나 사랑을 맛볼 수 없을까요? 어쩌면 오늘날 사회에서는 꿈도 놀이도 사랑도 뒤로 처지거나 짓눌리는지 모릅니다. 오로지 성장이나 개발만 앞세우는 사회에서는, 전쟁무기하고 군대를 없애지 않으려는 어른이 너무 많은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놀거나 신나게 꿈꾸기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테즈카 오사무는 학위논문을 위해 우렁이 정자의 스케치 등을 그렸습니다. 일하는 틈틈이 나라 의과대학 연구실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1961년 1월 29일에 학위를 땁니다. 테즈카 오사무는 의학박사가 된 것입니다. (11쪽)


“테즈카 선생님은 드디어 애니메이션을 시작하셨구나.” “선생님의 꿈이었으니까.” “개인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다니, 보통 일이 아니라고.” “선생님의 애니메이션에는 흥미가 가지만 말이야.” (19쪽)



  《테즈카 오사무 이야기》(학산문화사,2013)는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 님 삶을 돌아보는 만화책입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이 이 땅을 떠난 지 스물 몇 해가 흐른 요즈음, 테즈카 오사무 님이 어떤 만화를 어떻게 그렸는가를 만화로 되짚어요.


  테즈카 오사무 님 곁에서 만화를 도운 사람들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이녁한테서 원고를 받으려고 며칠 동안 밤새워 기다리던 출판사 편집자들이 이야기를 거듭니다. 테즈카 오사무 님이 손수 쓴 글에서도 이야기를 따옵니다.


  그러면, 일본뿐 아니라 지구에서 ‘만화를 그린 하느님(만화의 신)’이라는 이름을 얻은 테즈카 오사무 님은 왜 만화를 그렸을까요? 스스로 기쁨이 넘쳐흘렀기에 만화를 그렸습니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달으면서 전쟁 소용돌이를 일으켰어도 총검을 버리고 펜대를 쥐면서 화장실 벽에다가 만화를 그렸지요. 의학 공부를 하다가 만화를 그렸으며, 끝내 의사로 가는 길을 그만두고 만화가로 가는 길을 걸었어요.



‘만화영화에 그만큼의 수고와 품질을 논하는 것은 ‘돈벌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우선 인건비가 들고, 제작 기간이 너무 길다. 그리고 개봉하면 ‘뭐야, 어린이 만화잖아’라며 어른들은 비웃는다.’ (34쪽)


“아야미 씨, 내일 방송은 취소하죠! 이런 일은 계속 해 나갈 수 없어요!” “방송을 취소한다고 하면, ‘매주 TV 애니메이션 따위 역시 불가능하잖아!’ 이런 소리를 들을 거예요. 그리고 더 이상 스폰서도 붙잡지 못하고, 누구도 TV 애니메이션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56쪽)



  스스로 아이하고 같은 마음이 되어 만화를 그리려 한 테즈카 오사무 님한테는 가슴에 늘 품은 꿈이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책으로 빚는 만화’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로 빚는 만화’입니다. 이리하여, 첫째 꿈인 ‘책으로 빚는 만화’를 엄청나게 그리면서 돈도 엄청나게 모으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씩씩하게 ‘애니메이션 회사’를 차립니다. 누가 도와줘서 차리는 애니메이션 회사가 아니라 ‘만화를 그려서 번 돈을 고스란히 쏟아붓는’ 애니메이션 회사이지요.


  만화를 그리면 ‘돈을 쓸 일이 없다’고 하기에, 그림삯을 차곡차곡 모아서 건물을 짓고 일꾼(애니메이터)을 둡니다. 한때 400∼500 사람에 이르는 일꾼이 있었다는데, 이들은 모두 테즈카 오사무라는 ‘만화 하느님’이 빚은 만화에서 얻는 그림삯으로 만화영화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만화책을 잇달아 선보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만화영화를 빚으려고 온힘을 쏟습니다. 애써 마무리지은 만화영화도 어디에선가 빈틈이 보이면 모두 버리고 새로 빚기로 합니다. 이런 손길하고 땀방울이 모여서 〈아톰〉이 만화영화로 태어났고, 이 만화영화 하나는 일본뿐 아니라 지구별 만화영화 흐름을 크게 바꾸었다고 합니다.



시험에 합격한 애니메이터 지망생들은 3개월 정도 걸리는 양성 기간에 들어갑니다. 양성을 위한 작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미술대학 애니메이션과라든가 전문학교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현장의 빡빡한 일정을 완화하려면 인재를 늘릴 수밖에 없다, 신인 육성에는 선배들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76쪽)


만들면 팔린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제작된 조악한 작품의 범람이 돼서 시청자가 TV 애니메이션에 고개를 돌리게 하지는 않을까.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테즈카 오사무는 급격한 붐의 일그러진 일면을 경계했습니다. (94쪽)



  죽는 날까지 펜대를 놓지 않고 잠을 미루면서 만화를 그린 테즈카 오사무 님한테는 그림삯(돈)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새로운 이야깃감을 생각해 내려고 하는 삶이었고, 새로운 만화책을 선보여 아이들한테 꿈하고 사랑 두 가지를 들려주려고 하는 넋이었습니다. 언제나 마감을 아슬아슬하게 맞추면서 만화를 그리면서도 ‘새로운 연재’를 자꾸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고 싶은 만화가 자꾸자꾸 떠오르기 때문이에요. 이런 이야기도 그리고 저런 삶도 그리며 그런 노래도 만화로 그리고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도 이와 같아요. 아이들은 언제나 놀고 싶어요. 어제 하던 놀이를 오늘도 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운 놀이를 찾아내어 누리고 싶습니다. 오늘 밤이 저물어 잠자리에 들 때에는, 어제오늘 누린 놀이에다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아침에 새롭게 누리고픈 놀이를 꿈으로 그리지요.


  꿈이 있기에 한길을 걷고, 꿈을 새로 가꾸며 다시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는 셈입니다. 꿈을 돌아보면서 기운을 차리고, 꿈을 되새기면서 언제나 즐거이 거듭나는 삶이라 할 만합니다.



테즈카 오사무는 앞의 말처럼 소년만화에 집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무렵 소년만화에는 나가이 고 씨의 〈파렴치 학원〉이 등장하였고, 성교육을 다시 재점검하자는 사회 풍조도 있어서 귀엽게 살짝 야한 묘사는 소년만화에서 극히 평범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만화가들은 종래 소년만화의 성에 대한 터부를 확실히 무너뜨렸습니다. 1955년 전후의 악서추방운동을 겪은 만화가는 이것 때문에 매우 복잡한 심경이 되었습니다. (139쪽)



  다른 수많은 만화가하고 테즈카 오사무 님 만화에서 무척 크게 다른 대목이 여러 가지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로 ‘소년만화를 그리는 테즈카 오사무 님’ 이야기에서는 ‘귀엽게 살짝 야한 묘사’가 조금도 없습니다. ‘안 귀엽게 제법 야한 묘사’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구태여 이런 기법까지 끌어들여서 인기나 지지도를 얻어야 한다고 여기지 않은 테즈카 오사무 님이고, 아이들이 꿈이나 사랑을 생각하도록 온힘을 쏟는 이야기를 만화로 빚고 싶은 테즈카 오사무 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질지 아닐지를 제쳐두고, 제게는 그리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66쪽)


데즈카 오사누는 1976년부터는 대형 출판사 만화상의 심사위원직을 전부 사임했습니다. 이유는 심사하는 것보다는 심사받는 쪽에 서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게도 다른 작가들처럼 만화상을 받을 정도의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정열 같은 것이 있다. 만화가는 연령을 불문하고 신인도 경력이 있는 사람도 다 함께 뒤엉켜서 작품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181쪽)



  어떤 만화가 재미있을까요? 재미있게 빚은 만화가 재미있습니다. 어떤 만화가 ‘귀엽게 살짝 야할’까요? 이런 마음으로 이런 기법을 쓰면 만화가 이러하겠지요. 어떤 만화가 즐거울까요? 즐거운 꿈을 즐겁게 그리는 만화가 즐겁습니다. 그러면, 어떤 만화가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까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가슴에 담고서 이야기에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실으려고 온힘을 쏟는 만화가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습니다.


  만화책 《테즈카 오사무 이야기》는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 님한테 바치는 책이라 할 수 있으면서, 만화를 그린 하느님이라 할 테즈카 오사무 님 발자국을 돌아보는 책이 되고, 만화책을 즐기는 사람들한테 ‘만화는 어떻게 그리는가?’ 하고 알려주는 책이라 할 만합니다. 그리고, 만화를 그리려는 뜻을 품은 젊은이한테 ‘만화를 그리는 마음과 몸짓과 넋’을 어떻게 다스릴 때에 오래도록 기쁜 숨결이 되어 만화를 그릴 수 있느냐를 알려주는 길잡이책이기도 합니다. 4348.12.1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의 꽃 11
오시미 슈조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581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주저앉는다
― 악의 꽃 11
 오시미 수조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10.25. 4500원


  어느 아이든 처음에는 밤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밤을 무서워하는 까닭은 어른들이 아이한테 ‘밤이 무섭다’는 얘기를 들려주거나, ‘밤이 무섭다’고 하는 줄거리가 깃든 책이나 영화나 무언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밤이 무서운 줄 모르던 티없던 아기가 ‘밤이 무섭다’고 배우면, 이제는 밤에는 집에 틀어박혀서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삶으로 지내야 할까요?

  아니면, 온누리에는 ‘낮만 있다’는 거짓말을 해야 할까요? 온누리에 낮만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아이한테 낮만 보여주면 될까요? 아이는 낮에만 움직이도록 하면 될까요?

  그러면, 낮은 얼마나 어떻게 낮이고, 밤은 얼마나 어떻게 밤일까요? 낮하고 밤은 저마다 어떤 구실을 할까요? 밤은 왜 있고, 낮은 어떻게 있을까요? 눈으로 보는 사람하고 눈으로 못 보는 사람한테 낮이나 밤은 무엇일까요?


“사와는 그냥 놔줬으면 좋겠구나. 그 아이, 지금 아주 평온해. 나와 둘이서. 그러니. 미안하다.” “그래도, 잠깐만 얘기할 수 없을까요?” (14∼16쪽)

“아빠는? 그 후로 넌, 어떻게 살아온 거야?” “까먹었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딴 거.” (27∼28쪽)


  오시미 수조 님 만화책 《악의 꽃》(학산문화사,2014) 열한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열한 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악의 꽃》 열한째 권은 마지막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른 고장으로 떠난 어버이는 ‘이녁 아이한테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든 덮으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한 해가 흐르고 세 해가 지나며 열 해가 간다면 옛일은 아물거나 잊히리라 여기지요. 그러나, 아이는 어른하고 달라요. 어릴 적에 마음에 아로새긴 이야기나 일이나 생각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기 마련입니다.

  아이는 스스로 일어서려고 합니다. 아이는 스스로 맞서려고 합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떠난 고장으로 혼자서 돌아가려 합니다. 이때에 아이 곁에서 동무 하나가 함께 가기로 해요. 두 아이는 옛 아이를 찾으려고 옛 고장으로 가고, 세 아이는 한자리에 모여서 마음속에 맺힌 앙금이 무엇인지 똑똑히 새삼스레 마주합니다.

  아이는 일어서야 합니다. 아이는 스스로 일어서야 합니다. 아이는 ‘되든 안 되든’ 스스로 일어나서 씩씩하게 한 걸음을 새로 내딛어야 합니다.


“그때 왜 날 떠밀었어?” (37쪽)


  《악의 꽃》에 나오는 아이는 새로운 고장에서 새로운 동무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느낍니다. 예전에 살던 고장에서는 늘 답답하고 까마득하면서 어지럽기만 했습니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마음을 터놓을 사이로 지낼 만한 동무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는 새로운 고장에서 살다가 ‘이렇게 환하고 밝은 곳이 다 있네’ 하고 느꼈고, 이러면서 이 아이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깊은 어둠을 어떻게든 또렷이 마주하면서 풀어내지 않으면 ‘앞으로 살고 싶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이 될 수 없는 줄 깨닫습니다. 무척 아프고 힘든 줄 알지만, 무척 아프고 힘들기 때문에 더더욱 꿋꿋하게 맞서야 하는 줄도 알아요.


“잘됐네. 그렇게 모두들 자기가 갈 길을 선택하는 거지.” “그럼, 나카무라, 넌?” (47쪽)

“나카무라, 난 아무것도 잡을 수 없어.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도, 닿았다 생각하면 어느새 멀어져 가. 도달했다 생각했는데, 다시 시작돼. 그래서, 그래도, 난 기뻐. 네가 사라지지 않아서.” (65∼67쪽)


  시간이 흐르면 다 아문다고 하지만, 이는 어느 모로 맞으면서 어느 모로 틀립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면 다 누그러질 수 있습니다만, 그냥 딱지가 얹을 뿐이지, 생채기는 사라지지 않거든요. 생채기를 기쁜 웃음으로 다스리려는지, 아니면 생채기를 느낄 적마다 슬픈 눈물로 다시 아파할는지, 이 대목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앞으로 어른이 되고 늙어서 죽는 날까지 그저 아프고 또 아프기를 바란다면 생채기 앞에서 고개를 홱 돌리면 돼요.

  그렇지만, 아이가 앞으로 다시는 아프지 않으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생채기 앞에서 똑똑히 마주서야 합니다. 다친 자리는 제대로 다스려야 낫지, 다친 자리를 안 쳐다보고 고개를 돌린 대서 나을 수 없습니다. 아픈 자리는 ‘아프구나’ 하고 느끼면서 다독여야 찬찬히 낫지, 아픈 자리를 안 쳐다보고 눈을 감는 대서 안 아플 수 있지 않습니다.


“아, 그거 나도 읽었어. 그런데 내 머리론 뭐가 좋은지 모르겠더라.” “아, 나도 중학교 때 읽고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전혀 다른 책처럼 재미있어.” “헤에, 그런가? 그런데 중학생이 《악의 꽃》을? 빠르네.” “아니, 빠르고 늦고는 상관없지 않나?” (100∼101쪽)

“아니, 적어도 난, 재밌어, 네 소설. 상 받으면 좋겠다.” “응, 뭐, 전에 쓴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렇지 않아. 그건 최고였어.” (115쪽)


  스스로 일어서려 하기에 일어섭니다. 스스로 등돌리려 하기에 등돌립니다. 스스로 맞서려 하기에 맞섭니다. 스스로 바보스러우려 하기에 바보스럽습니다. 스스로 사랑스러우려 하기에 사랑스럽습니다. 스스로 꿈을 꾸려 하기에 꿈을 꿉니다. 스스로 걸으려 하기에 한 발짝씩 내딛습니다. 스스로 노래하려 하기에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아이답게 새로운 숨결로 꿈꾸고 노래하는 삶을 지을 수 있어야 아이로 웃을 수 있어요. 아픔도 눈물도 언제나 웃음으로 삭히면서 고이 노래할 수 있는 나날일 적에 아이가 맑고 튼튼히 자라요. 넘어진 뒤에 일어나야 다친 데가 낫습니다. 넘어졌대서 그냥 넘어진 채 울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안 될 테지요.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두 아이, 또 세 아이는, 그리고 여러 아이는, 한 해 두 해 흐르면서 비로소 새로운 숨결을 마십니다. 열 살에는 열 살대로 삶을 바라보았고, 열두 살에는 열두 살대로 삶을 바라보았으며, 열여섯 살에는 열여섯 살대로 삶을 바라보다가, 스무 살과 서른 살에는 또 이 나이대로 새로운 눈길로 새로운 숨결을 마시는 삶으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아이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씨앗으로 심어서 피울 꽃이란 무엇인가를 그야말로 아이들 스스로 씩씩하게 ‘삶을 똑바로 마주하’는 동안 하나씩 슬기롭게 깨닫습니다. 4348.12.9.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