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이야기 3
타니카와 후미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559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 솔로 이야기 3

 타니카와 후미코

 한나리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5.9.15. 6000원



  아이들이 언제나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사랑해요” 하고 속삭입니다. 어머니하고 아버지도 아이들한테 늘 “사랑해” 하고 노래합니다. 한집에서 함께 사는 우리는 마음으로뿐 아니라 입으로도 ‘사랑’을 늘 나누면서 하루를 열고 닫습니다.


  노래를 부를 적에도 ‘사랑’이라는 말마디가 으레 깃듭니다. 밥을 지을 적에도 사랑으로 짓자고 생각합니다. 마실을 다닐 적에도 함께 누리는 사랑이라고 돌아봅니다. 가볍게 소꿉놀이를 할 적에도 서로서로 아끼는 사랑으로 함께 웃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이 땅에서는 어느 일이든 사랑으로 하는구나 싶습니다. 살붙이끼리만이 아니라, 동무끼리만이 아니라, 이웃끼리만이 아니라, 누구하고라도 사랑스러운 숨결을 나눌 적에 즐거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서로 아끼면서 돕는 마음이 흐른다면 다투거나 싸울 일이란 없으며, 다투거나 싸울 일이 없을 적에는 군대나 전쟁무기가 있어야 할 까닭이 없어요.



‘그에게는 작고 귀여운 여자친구가 있는데. 좋겠다. 나도 쓰담쓰담 받고 싶다. 소름 돋아. 서른이 넘은 여자가 이 모양이라니. 이건 중학생만도 못한 수준이야.’ (10∼11쪽)


‘뭐,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입니다. 고탄다를 많이 좋아했고, 요령 없는 나의 최선. 고탄다, 고마웠어. 덕분에 생각났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래, 이런 기분이었어.’ (20∼21쪽)



  타니카와 후미코 님이 빚은 만화책 《솔로 이야기》(대원씨아이,2015) 셋째 권을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삶을 가꾸는 사람들이 저마다 ‘홀로’ 사랑을 꿈꾸는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책입니다. 다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혼자’ 살지는 않아요. 학교를 다니거나 회사를 다닙니다. 집에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제 자매가 있습니다. 이웃도 많고 동무도 많아요. 그저 ‘이성친구’나 ‘애인’이라 할 사람이 없는 채 ‘홀로’인 이들이 이 만화책에 고개를 살며시 내밉니다.



‘추억을 담뿍 담은 이 옷은 그냥 티셔츠가 아니었다.’ (26쪽)


“그때 말이야, 그 쇼핑백을 버렸단 걸 알게 됐을 때 엄청 충격 받고 망연자실했는데, 한편으론 조금 안도했어.” (40쪽)



  곰곰이 헤아려 보면, 사람들은 으레 “혼자셔요?” 하고 묻습니다. 짝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말일 텐데, 짝이 없다고 하더라도 혼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혼자셔요?” 하고 묻는 사람하고 마주보며 함께 있으니까요.


  게다가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짝 없는 외톨이’라 하더라도, 이녁이 깃들어서 사는 집을 짓거나 손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톨이라 하더라도, 이녁이 입은 옷을 지은 사람과 가게에서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톨이라 하더라도, 이녁이 혼자 찾아가서 밥을 사다 먹는 가게가 있고, 온갖 먹을거리를 마련해서 가게에 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버스나 기차를 모는 사람이 있고, 택시나 비행기를 모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무원이 있고, 의사도 청소부도 있습니다.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할 뿐인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함께 있습니다. 내가 하나하나 이름을 살피지 못할 뿐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터전을 함께 일구면서 삽니다.



‘유일하게 오로지 야마다만이 내 편이었고 정말 기뻤기에, 그게 사랑이든 사랑이 아니든, 다음엔 내가 유일한 야마다 편이 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60쪽)


‘인생에서 이런 장면이 몇 번째인 걸까. 몇 번씩 반복되는 건 내 잘못인 걸까? 일방적으로? 귀신한테까지 이런 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난 나름 노력하고 있는데, 어째서?’ (71쪽)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예쁩니다. 마음을 따스하게 기울여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가슴속에 품으니 예쁘지요. 짝사랑이어도 예쁘고, 풋사랑이어도 예쁩니다. 불타는 사랑이든 차가운 사랑이든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되기에, 나부터 나를 한결 아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되면서, 나부터 나를 새롭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조금씩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차근차근 기쁘게 아침을 엽니다. 부풀거나 설레는 가슴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기에 얼굴에 기쁜 웃음이 피어납니다. 들뜨거나 신나는 가슴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니 온몸에 기쁜 숨결이 고루 흐릅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는 오래 살아. 사랑 받으면서.” (76쪽)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젠가는 결혼도 하고 싶고, 새로운 곳에서 살아 보고도 싶어. 그 언젠가가 언제인데? 언젠가는 언제지? 지금인지도 몰라.’ (90∼91쪽)



  만화책 《솔로 이야기》는 ‘홀몸’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정작 ‘혼자’가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줍니다. 손을 맞잡고 나들이를 다녀야 ‘혼자 아닌 삶’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줍니다.


  살을 섞거나 입을 맞출 만한 누군가가 있어야 ‘혼자 아닌 몸’이 아닙니다. 먼발치에서 서성이더라도, 손을 잡을 만한 누군가가 없더라도, 따사롭게 피어나는 그윽한 꿈으로 웃음지을 수 있는 하루를 연다면 누구나 ‘함께 있는 넋’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거든요. 사랑은 바로 내가 나한테서 끌어내거든요. 나를 내가 스스로 아낄 수 있을 때에 사랑이 되거든요. 남이 나를 좋아해 주기에 사랑이 싹트지 않아요. 내가 나부터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아껴서 제대로 삶을 짓는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 싹틉니다. 내가 나부터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나부터 나를 제대로 아끼지 못한다면, 남들이 아무리 나를 좋아해 준다고 한들, 나는 나부터 믿지 못하니 다른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못해요.



“마, 마스미, 너 뭔가 빠뜨린 거 없니?” “응? 없는데? 짐은 가방뿐이었고, 생활비도 잘 챙겼고.” “그, 그거 말고. 어제 뭔가 받고 싶었던 사람이 저기서 시무룩해져서 있는데.” “아, 미안, 미안 아빠. 진짜 미안해.” (138쪽)



  말 한 마디에서 사랑이 태어납니다. 따스한 기운을 듬뿍 실어서 들려주는 말 한 마디에서 사랑이 자랍니다. 기쁜 웃음을 곱게 담아서 가만히 노래하는 목소리에서 사랑이 퍼집니다.


  아이들이 연필을 손에 쥐고 하얀 종이에 ‘사랑’이라는 글씨를 그립니다. 나도 연필을 손에 쥐고 하얀 종이에 ‘사랑’이라는 글씨를 그립니다. 크레파스를 꺼내어 빛깔을 입힙니다. ‘사랑’이라는 글씨 둘레에 알록달록 무지개 그림을 그립니다. 언제나 사랑을 떠올리고 가슴에 담자고 생각하면서 사랑 그림을 방 한쪽에 붙여놓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이 그림을 바라봅니다. 4348.10.4.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꼴찌, 동경대 가다! 19 (신장판) - KBS 드라마 '공부의 신' 원작
미타 노리후사 지음, 김완 옮김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56



‘시험공부’만 하느냐 ‘삶을 배우려’ 하느냐

― 꼴찌, 동경대 가다! 19

 미타 노리후사 글·그림

 김완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2010.1.4. 4500원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는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가 하고 돌아보면 이것저것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리 기쁘거나 새롭다고 할 만한 일은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늘 같은 자리만 맴돌아야 했던 나날이었네 하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이런 중·고등학교 여섯 해였어도, 기찻길을 밟고 두어 시간 거닐던 일은 자주 떠오릅니다. 이제 옛날 그 기찻길은 몽땅 사라졌지만 하루에 한두 대 지나가는 오래된 기찻길이 있었고, 자율학습 따위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으레 그 기찻길을 따라서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천 걸음 떼기나 만 걸음 떼기를 하며 혼자 놀았습니다. 이렇게 한참 기찻길을 밟고 걸으면 어느새 무거운 짐이 훌훌 사라지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다시 시험공부를, 대학 입시 공부를 붙잡습니다.



“내 콤플렉스는 내 자신에 대한 거야. 난 고등학교를 중퇴했잖아? 난 곤란하면 금방 도망쳐 버리는 약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서 자기혐오에 빠지는 거야. 하지만, 입시에서든 뭐든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 강해질 수 있고, 더 유리하댔어.” (18∼19쪽)


“그래서, 오늘은 뭐 할 거야?” “그게 문제야. 시간은 남아돌고,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으려나. 하지만 참 신기해. 작년 이맘때는 할 게 없어도 아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라니.” (40쪽)



  미타 노리후사 님이 빚은 만화책 《꼴지, 동경대 가다!》(랜덤하우스코리아,2010) 열아홉째 권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이 만화책은 모두 스물한 권이고, 책이름에서 말하듯이 ‘학교 꼴찌’인 아이가 일본에서 동경대에 붙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학교 꼴찌’를 하던 아이라 하더라도 동경대학교에 붙도록 시험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러면, 어떤 이는 이 만화책을 참고서 삼아서 ‘나도 서울대에 한번?’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말 그렇지요. 서울대학교라고 해서 아무나 못 가는 곳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일 테니까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공부가 무한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시험공부는 유한하구나. 그걸 알고 나니 얼마나 공부하면 좋을지 점점 보이게 되고, 약점을 극복하는 게 재미있어졌어. 마치 공부란, 정해진 크기의 판 위에서 하는 오셀로 게임 같아. 아직 칸을 전부 채우진 못했지만, 이기는 법을 알게 돼 돌을 놓을 때마다 게임판의 색이 순식간에 바뀌는, 그런 느낌이 너무 좋아.’ (46∼47쪽)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붙은 뒤 ‘대학교는 중·고등학교하고 다르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다른 모습’은 대학교에 없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오직 시험공부만 해야 하던 학교 얼거리인데, 대학교에서도 똑같이 시험공부만 해야 하는 얼거리입니다.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바라보는 시험공부요,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바라보는 시험공부인데, 대학교는 회사와 공공기관을 바라보는 시험공부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학교는 놀고 먹는 시험공부입니다. 한쪽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술잔치이고, 한쪽에서는 도서관에만 처박히는 시험공부입니다. 대학교조차 도서관이 ‘책 읽는 곳’이 아니라 ‘시험공부에 사로잡히는 곳’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시험공부만 시키는 나라에서 대학교가 제대로 설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내가 바보스럽다고 할 만합니다. 이 나라 교육이 제대로 섰다면, 중·고등학교 푸름이한테 시험공부만 우악스럽게 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한창 마음이 자라야 할 푸름이한테 삶을 가르쳐야 마땅한 중학교요 고등학교입니다.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 따위로 아이들을 길들이거나 괴롭히려는 중·고등학교가 아닌, 삶과 사랑과 사람을 슬기롭게 보여주면서 가르칠 줄 알아야 하는 중·고등학교여야 하지요.


  고등학교를 마치는, 또는 대입 시험을 치른, 앳된 젊은이는 손쉽게 술하고 담배를 손에 쥡니다. 술하고 담배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술하고 담배일 뿐입니다. 다만, 고등학교까지 학교나 사회나 마을이나 집에서 아이들한테 술하고 담배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어른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대학교는 어떠할까요? 대학교 교수나 선배라는 사람은 술이나 담배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거나 가르칠 수 있을까요?



“큰맘 먹고 뒤로 물러나라. 거시적인 시점에서 수험에 임하기 위해 보다 높이, 위에서 보는 거야. 점점 높이, 기왕 하는 김에, 일본 상공에서, 지구 밖에서, 그리고 우주에서.” (69∼71쪽)


“그래서 어쨌는데 하는 얘기일 뿐이지.” “그래서 어쨌는데?” “설령 실전에 약한 타입이래도,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 말이야. 그렇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실전에 강해지도록 트레이닝해서 자기개혁을 하면 되는 것뿐이거든.” (119쪽)



  만화책 《꼴지, 동경대 가다!》는 훌륭하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으며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있습니다. 꼴찌이든 아니든 누구나 동경대에 가려고 하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꼴찌이든 일등이든 동경대에 못 들어가는 까닭은 ‘동경대’라고 하는 곳을 제대로 알거나 살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동경대에 왜 들어가려고 하는가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나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려고 애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화책에서도 흐르는 이야기입니다만, 동경대에 가든 안 가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동경대에 가야 한다면 가야 할 뿐입니다. 들어가면 되지요. 한국에서 서울대에 굳이 가야 할까요? 한국에서 대학교에 굳이 가야 할까요? 더 생각해서,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꼭 마쳐야 할까요? 중학교나 초등학교를 구태여 다녀서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할까요? 대학교 졸업장뿐 아니라 초등학교 졸업장이 반드시 있어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만할까요?



“넌 슛을 열 개 다 넣으려 했기 때문이야.” “슛 열 개를 다.” “반대로 난 어떻게 이겼을까? 그건 처음부터 대략 여섯 개만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대략 여섯 개.” “일곱 개 넣으면 승리는 거의 확실하고, 다섯 개로도 어떻게든 비길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어. 그래서 처음 두 번은 빗나가도 당황하지 않았지. 반대로 넌 아무 대책도 없이 시합을 시작했을걸? 어때?” (154∼155쪽)



  삶은 졸업장으로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 삶은 은행계좌나 아파트 크기로 잴 수 없습니다. 삶은 얼굴 생김새나 몸매 따위로 따질 수 없습니다. 삶은 밥그릇이나 나이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삶은 오로지 삶으로 마주하면서 바라봅니다. 삶은 오직 사랑으로 가꿉니다. 삶은 오직 스스로 아름답게 일어서는 웃음꽃으로 기쁘게 돌볼 수 있습니다.


  시험공부를 하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에 꼭 붙어서 어떤 일을 하겠노라 하는 꿈이 있으면 시험공부를 신나게 하고 기쁘게 하며 재미나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시험을 마쳤으면 새로운 마음과 몸이 되어서 ‘삶 배우기’로 나아가면 돼요.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일구면서 저마다 다른 기쁨을 누리려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다 다르면서 모두 뜻있고 값있으면서 아름다운 삶을 지으려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삶을 가르치고 배울 때에 즐겁습니다.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러운 너와 내가 만나서 어깨동무를 하면 아름답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고 두 걸음을 뻗습니다. 세 걸음을 디디고 네 걸음을 폴짝 뛰어오릅니다. 배우는 길은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지만, 시험공부에 얽매이는 길은 괴롭고 따분하며 힘듭니다. 우리는 어느 길을 걸어야 할까요? 4348.9.2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의 꽃 10
오시미 슈조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557



깨어나고 싶은 어린 버러지

― 악의 꽃 10

 오시미 수조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6.25. 4500원



  오시미 수조 님이 빚은 만화책 《악의 꽃》(학산문화사,2014)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러지’ 이야기입니다. 온누리 모든 것이 온통 ‘버러지’일 뿐이라고 느끼는 아이가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온누리 모든 것이 버러지로밖에 안 보이는 아이도 스스로 버러지예요. 너도 버러지이고 나도 버러지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어찌저찌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멍하니 집에서 나오고, 그저 멍하니 학교에 가서 자리에 앉으며, 다시 멍하니 집으로 돌아오고, 언제나처럼 멍하니 버러지한테 잡혀먹는 꿈에 사로잡힙니다.



‘죽는다. 죽어간다. 할아버지는 죽어가는 거야.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서 죽어간다. 원래는, 나도 그랬다. 나는 이 마을을 떠나,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다. 이 마을, 이 마을은 대체 뭘까?’ (20∼21쪽)



  스스로 버러지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러지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내가 스스로 버러지라서 내가 나쁘거나 좋지 않습니다. 내 눈에 네가 버러지로밖에 안 보이더라도 네가 나쁘거나 좋지 않습니다. 그저 버러지일 뿐입니다.


  그러면, 버러지란 무엇일까요? 이제 중학생 티를 살짝 벗어나서 고등학생이 되는 아이들은 어떤 버러지일까요?


  바로 ‘어린 버러지’입니다. 단출하게 줄여서 ‘아기 버러지’요 ‘애벌레’입니다. 새롭게 깨어나고 싶은 애벌레입니다. 꼬물꼬물 기는 몸짓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애벌레 삶은 끝내고, 어떤 모습으로든 새롭게 깨어나고 싶은 애벌레입니다.



“난 나나코를 잡을 수 없었어. 난 너희를 쫓아냈어.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난 어떡해야 했던 거지? 난 내내 버려졌어. 이 마을에 갇혀서는 내내.” (76쪽)



  《악의 꽃》 열째 권에 나오는 사내 아이는 몸부림을 칩니다. 이제 더 ‘옛 굴레’에 얽매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 생각에 사로잡혀서 앞으로는 한 발짝도 못 떼는 바보스러우며 우스꽝스러운 제 모습을 떨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을 탓할 일이 없습니다. 남을 탓할 까닭이 없습니다. 남을 탓할 수 없습니다. 바뀌는 사람도 나요, 안 바뀌는 사람도 나입니다. 바뀔 사람도 나요, 바꾸도록 힘을 쏟는 사람도 나예요.


  아무도 나를 가로막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를 해코지하지 않으며,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오직 내 마음이 나를 좀먹습니다. 오직 내 마음이 나를 들볶습니다. “나쁜(악) 녀석 같은 꽃”은 바로 내가 내 마음에 심었지, 남이 내 마음에 심지 않았어요. 나쁜 녀석이라는 생각은 바로 내가 나한테 한 말이지, 남이 나한테 한 말이 아닙니다.



“도키와. 축하해. 하지만, 지금의 난, 이 소설을 읽을 수 없어.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118∼119쪽)



  한 걸음을 새롭게 내딛을 수 있어야 사랑을 합니다. 한 걸음을 새롭게 내딛을 때라야 삶을 짓습니다. 한 걸음을 새롭게 내딛는 몸짓이라면 이제부터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랑하고 삶하고 사람을 생각하기에 ‘버러지’로 남을 수 없습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똑같아요. 그냥 버러지로 살 수 없습니다. 나도 너도 서로 버러지인 채 살 수 없습니다. 나도 너도 버러지라고 하는 몸을, 애벌레라고 하는 몸을, 철없고 바보스러운 몸을, 이제는 훌훌 내려놓고 ‘새로 깨어나는 숨결’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이제는 애벌레 아닌 나비가 되어야지요. 꼬물꼬물 기는 삶이 아니라, 눈부시게 훨훨 나는 삶으로 피어나야지요.



“너무 이기적이잖아. 난 소설을 읽어 달라고 햇을 뿐이라고. 나랑은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그저 토해내고 싶었던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뭔데?”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 이대로 네겐 계속, 아무 말도 않고 지내려고 했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걸 떠넘기는 건 이기적인 거라고. 하지만 과거는 지울 수 없어. 돌고 돌아 내 앞을 가로막아.” (132∼134쪽)



  만화책에 나오는 사내 아이는 ‘옛 굴레’를 끌어안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좀 두렵습니다. 아직 혼자서는 못 할 듯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가장 가깝고 마음이 맞는 벗님한테 찾아가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앙금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이야기를 합니다. 짐을 나누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곁에서 손을 잡아 달라고, 곁에서 지켜보아 달라고,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을 테니 사랑스러운 눈망울로 이 길을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걷자고, 비로소 말문을 열고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 ‘아직 앳된 버러지’인 세 아이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갈까요? 어설프고 철없는 버러지인 세 아이는 앞으로 저마다 어떤 삶을 지을까요? 그리고, 이 세 아이를 둘러싼 수많은 다른 ‘철없고 여린 버러지’인 아이들은 먼먼 앞날에 저마다 어떤 삶을 지을까요? 눈물겨우면서 웃음꽃이 피는 삶입니다. 4348.9.2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의 꽃 1
오시마 슈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554



열네 살 푸름이는 왜 ‘버러지’가 되어야 했을까

― 악의 꽃 1

 오시미 수조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1.7.25. 4500원



  나는 내가 다닌 중학교라는 곳을 거의 떠올리지 않습니다. 1980년대가 저물면서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 한국 사회에서 중학교는 대단히 재미없는데다가 메말랐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닌 중학교만 참으로 재미없고 메말랐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닌 중학교는 제법 재미있었을 수 있고, 즐겁거나 아름다웠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다달이 치르는 시험에서 1점이 떨어질 때마다 몽둥이로 한 대씩 때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번 받은 점수에서 1점이라도 떨어지면 안 되었고, 98점에서 97점이 되든, 100점에서 99점이 되든 똑같이 몽둥이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보충수업은 모든 학생이 학교에 돈을 바치면서 들어야 했고, 자율학습은 조금도 자율이 아닌 채 밤 열 시까지 교실에 갇힌 채 꼼짝을 할 수 없는 고문하고 같았습니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생각할 만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곳에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옳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나카무라, 꼴등! 0점이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너! 답란이 전부 빈칸이라니!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래서야 어디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 “시끄러워. 버러지 주제에.” “버, 감히 선생님에게 버러지라니, 너, 이 녀석!” (10∼11쪽)


“카스가는 늘 책을 읽고 있더라. 왜? 그것도 좀 이상한 책. 아무도 모르는 그런 거. 재미있어?” (38쪽)



  오시미 수조 님이 빚은 만화책 《악의 꽃》(학산문화사,2011) 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여러 아이들은 저마다 재미없거나 따분하거나 고단한 하루를 보냅니다. 또는 저마다 재미있거나 즐겁거나 새로운 하루를 보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하니까 학교에 갑니다. 학교에 다니는 웬만한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학교에 보내니까 학교를 다닙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느덧 집에서 어머니나 아버지하고 말을 거의 안 섞고, 학교에서는 따돌림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을 씁니다.


  무슨 재미일까요. 무엇에 재미를 붙여야 할까요. 학교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줄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예비 사회인’으로서 뭔가를 배우는 셈일까요. 아이들은 숙제를 꼬박꼬박 하고 시험도 알뜰히 잘 치러야 할까요.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으면 모범생이고, 50점 안팎인 점수를 받으면 말썽꾸러기이며, 0점 언저리에 맴돌면 골칫거리인 셈일까요.



“망상만이라면 몰라도, 그걸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녀석은 위험하단 말이야. 범죄잖아, 완전히. 진짜 깬다니까.” (62쪽)


‘할 수 없어, 자수 따위. 보들레르, 악의 길은, 이렇게도 고통스러운 것이었구나. 하지만 자수하지 않으면, 나카무라가 떠들 테니, 훨씬 더 최악의 사태가! 아아아, 하하하하! 어째서 나만 이런 수난을, 하하하!’ (63쪽)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주인공 사내인 ‘카스가’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아무런 재미를 붙이지 못합니다. 카스가라는 아이는 보들레르 책을 늘 끼고 사는데, 보들레르 책뿐 아니라 ‘교과서 아닌 책’을 마을 헌책방에서 꾸준히 장만해서 ‘교과서보다 아끼면서 읽’습니다. 교과서나 진도나 시험에는 거의 마음을 안 쓰지만, 교과서 아닌 책에는 온통 마음을 쏟아서 하루를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카스가는 어느 날 어떤 일을 하나 벌입니다. 같은 반에 있는 예쁜 가시내 체육복을 몰래 훔치지요. 처음부터 체육복을 훔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문득 혼자 들어갔고, 교실 뒤쪽 바닥에 떨어진 체육복 주머니를 보았으며, 그 주머니가 카스가가 마음에 들어 하던 가시내 체육복인 줄 알아차립니다. 처음에는 체육복을 만져 보기만 하려고 했으나, 카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웃도리 안쪽에 체육복을 집어넣고 학교를 빠져나왔습니다. 제 넋을 차렸을 적에는 벌써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누가 이 모습을 보았을까요? 누가 카스가라는 아이 마음을 읽었을까요? 카스가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갈까요? 카스가는 이제 이 일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카스가, 난 말이지, 훨씬 오래 전부터 근질근질 좀이 쑤셨어. 몸 속 저 아래 깊은 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뭔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 이 세상 전부, 내 부글부글 속에서 버러지가 돼 버리면 좋겠어.” (104∼105쪽)



  카스가는 체육복을 돌려주려고 하지만 끝내 돌려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체육복을 훔치는 모습을 다른 아이가 보았습니다. 카스가가 교실에서 앉는 자리에서 바로 뒤에 앉는 나카무라라는 아이가 보았습니다. 나카무라는 학교에서 아무 재미를 못 붙이는 아이 가운데 하나인데, 카스가가 저지른 짓을 문득 본 뒤에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일어나는 것이 있었다고 해요. ‘너도 나도 다 같이 버러지가 되어’ 그야말로 실컷 썩어문드러지는 길로 굴러떨어지자고 카스가한테 말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나이라면 이제 열너덧 살입니다.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너도 나도 버러지’라고 하는 생각을 마음에 품어야 했을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같은 반 동무 체육복을 몰래 훔치면서 스스로 부들부들 떠는 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보내야 했을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어찌하여 마음이 괴로운 동무를 더 괴롭게 몰아붙이면서 스스로도 더 괴로운 삶이 되려고 할까요. 열너덧 살인 아이는 스스로 끌어들인 이 소용돌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다 벗겨버리겠어. 네가 쓰고 있는 거죽을 내가 몽땅 벗겨버릴 거야. 알았으면 어서 입어. 네가 훔친 사에키 체육복.” (198∼199쪽)



  나비가 되려면 허물을 수없이 벗는 애벌레를 거쳐서 번데기가 되어야 합니다. 번데기로 무척 오랫동안 고요히 잠을 자면서 온몸을 녹여야 합니다. 애벌레였던 몸을 몽땅 녹이지 않으면 나비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번데기에서 고요히 잠들어 오랫동안 온몸을 모조리 녹인 애벌레일 때에 비로소 나비라는 새 몸으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카스가나 나카무라 같은 아이들은 아직 ‘애벌레’입니다. 말 그대로 ‘버러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벌레이든 버러지이든 ‘아기 벌레’예요. 아직 철이 들지 않았고, 철을 모르며, 철부지로 이것저것 부딪히는 아이들입니다.


  두 아이를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도 아직 철이 들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지 못했고, 마음을 깨지 못했어요. 그러니 이런 잘못이나 저런 말썽이라고 할 만한 짓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아직 어느 것도 제대로 모르니까요.


  두 아이는 저마다 거죽을 벗어야 합니다. 남이 벗겨 주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스스로 벗어야 합니다. ‘바보스레 저지른 짓을 자수하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죽도 벗고 허물도 벗어야 해요. 학교에 얽매이지 말고, 굴레나 사회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하고픈 일을 찾고, 스스로 나아가려는 길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화책 《악의 꽃》에 나오는 두 아이 카스가와 나카무라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 ‘썩어문드러지는 길’로 굴러떨어지려고만 합니다.


  쓸쓸하며 안타까운 노릇일 수 있지만, 오늘 이 아이들은 이 길에 서면서 한 걸음을 내딛겠지요. 괴롭고 힘들지만 한 걸음을 내딛겠지요. 바보스러운 어른이 아닌 새로운 어른이 되기를 바랄 테니까요. 굴레에 가두는 사회가 아닌, 굴레를 떨치는 삶을 바랄 테니까요. 4348.9.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련님』의 시대 1 - 나쓰메 소세키 편 세미콜론 코믹스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540



너울치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지식인’

― ‘도련님’의 시대 1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가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2.10.26. 11000원



  세키가와 나쓰오 님이 글을 쓰고, 다니구치 지로 님이 그림을 그린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는 일본 정치와 사회와 문화에서 크게 너울을 치던 무렵을 그립니다. 다만, 이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일본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크게 너울치던 때에 ‘글 쓰는 사람’으로 살던 여러 사람 이야기를 빌어서 ‘일본에 어떤 너울이 쳤는가’ 하는 실마리를 풉니다. ‘메이지’라고 하는 물결이 잠들면서 서양 문화와 문명으로 일본이 크게 달라지는 모습을 나쓰메 소세키나 모리 오가이나 이시카와 다쿠보쿠 같은 사람을 빌어서 그립니다.


  아마 한국에서도 ‘한국 사회 개화기’를 그무렵 ‘글 쓰는 사람’을 빌어서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 개화기에는 어떤 ‘글 쓰는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수 있을까요? 최남선이나 이광수나 서정주 같은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만할까요? 심훈이나 윤동주나 김유정 같은 사람을 빌어서 이야기를 빚을 만할까요? 주시경이나 김두봉은? 이효석이나 김동인은? 모윤숙이나 나혜석은? 홍명희나 김교신은?



“무턱대고 서양 흉내를 내려고 해도 그게 그리 쉬운가. 흉내를 낸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13쪽)


‘일본인은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을 좋아한다. 그 전통은 메이지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21쪽)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를 이끄는 일본 작가는 아무래도 ‘나쓰메 소세키’입니다. 〈도련님〉이라는 작품을 빚은 사람이 바로 나쓰메 소세키이고, 이 만화책을 이끄는 이름도 ‘도련님’입니다. 이제껏 일본은 도련님(메이지 시대) 같은 나라요 사회요 문화였으면, 앞으로는 도련님은 저만치 뒤로 물러서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앞으로는 샌님 같은 도련님이 아닌, 씩씩하고 밝으며 다부진 새로운 젊은이가 일어선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일본 사회에서 ‘저무는 메이지 시대’를 마지막으로 기리면서 고이 떠나 보내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면서도 떠나 보내야 하는 옛 시대를 아쉽게 그리워하는 책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메이지’나 ‘근대’나 ‘개화’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라든지 조선 시대라고도 어느 한때를 나누곤 합니다만, 이렇게 ‘시대를 가르는 잣대’는 어떤 사람 눈길일는지 생각해 봅니다.


  집에 ‘하인’을 두면서 지내는 사람들로서는 ‘천황’이 바뀌거나 정치·사회 얼거리가 바뀔 적마다 여러모로 소용돌이를 겪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인 자리에서 사는 사람’은 천황이 바뀌든 서양 군인이 들어오든 식민지 사회가 되든 언제나 똑같이 ‘하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소작농은 조선 사회에서도 소작농이었고, 개화기에도 소작농이었으며, 식민지 사회에서도 소작농이었어요.


  바깥에서는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너울을 친다지만, 막상 ‘나라를 버티거나 받치는 바탕’이 되는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한테는 어떠한 너울도 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도련님’이 흔들거리는 모습을 살며시 보여준다고 할 텐데, 이와 달리 《오싱》 같은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깊은 멧골에서 살다가 읍내로 식모살이를 나온 ‘오싱’한테는 ‘너울치는 사회’는 아무것도 아니며 느낄 수조차 없는 대목입니다.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기저귀를 빨아야 하는 어린 오싱한테 근대나 개화란 무엇일까요?



“소설은 말이야. 체념했던 일에 거창하게 미련을 부리거나, 머리로 뀌는 방귀 같은 거야.” “머리로 뀌는 방귀. 음,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피가 끓는 성격이라곤 하지만 교사니까 다소 지식은 갖추고 있고, 결말에선 악당을 던져버려야 속이 후련하겠지.” (46쪽)


‘소세키의 병은 근대사회에서 비로소 자아에 눈뜨게 된 일본인의 고민, 또는 서구를 증오하면서도 서구를 배워야 했던 일본 지식인의 딜레마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52쪽)




  너울치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지식인’을 재미나게 보여준다고 할 만한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입니다. ‘도련님(지식인)’ 눈높이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도련님 자리에서 사회를 맞이하며, 도련님 걸음걸이로 새로운 사회로 접어듭니다.


  이리하여, 도련님은 늘 도련님으로 있습니다. 도련님은 하인이 어떤 삶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도련님은 인력거꾼이 어떤 살림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도련님은 소작농이나 시골 농사꾼이 어떤 마을을 꾸리는가를 하나도 모르고 조금도 알려 하지 않습니다.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에서 ‘소세키 마음’을 들어서 말하는 대목처럼, 너울치는 사회에서 일본 지식인은 “근대사회에서 비로소 자아에 눈뜨게 된 일본인의 고민, 또는 서구를 증오하면서도 서구를 배워야 했던 일본 지식인의 딜레마(52쪽)”를 품습니다. 너울치는 사회에 발맞추어 제자리(지식인 자리, 또는 도련님 자리)를 지키는 데에는 마음을 쓸 줄 알지만, 이웃이나 둘레를 살피는 눈길은 매우 얕습니다.



“보기 드문 권총을 소지하고 계신데 그 총은 매우 부정확한 물건입니다.” “네?” “회전식으로 하시죠. 아이버 존슨 사의 총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표적도 잘 골라야죠.” “뭐가요?” “작년에 조선국을 보호화, 대놓고 말해 속국화하려고 애쓴 건, 야마가타 님이 아니라 이토 님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174쪽)



  《‘도련님’의 시대》를 보면 ‘안중근’이라는 사람이 살몃살몃 나옵니다. 일본사람은 안중근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한국에서 바라보는 안중근 ‘의사’와 달리, 일본에서는 ‘암살자’나 ‘살인자’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일본 사회에서 수많은 지식인은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며 군국주의로 뻗는 일을 기뻐했을 수 있고, 전쟁으로 얻어들인 재산(그러니까 이웃나라한테서 빼앗은 재산)으로 일본 사회를 북돋운다면서 반길 수 있습니다.


  만화책 《‘도련님’의 시대》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듯이 여러 목소리를 골고루 들려주지도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웃(남)’ 일에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스스로(도련님 스스로) 살아남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몸짓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끙끙 앓을 뿐입니다.



‘소세키뿐만 아니라 메이지의 지식인들에게 아시아는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구를 규범으로 삼은 근대화의 파란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요동치는 자아의 확보에 매달렸다.’ (176쪽)




  도련님은 못 이깁니다. 도련님은 시대에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지식인은 아무것도 못 이기고 아무것도 못 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저 너울에 따라 흔들리면서도 안 넘어지려고 용을 쓸 뿐입니다.


  그러면, 도련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너울치는 사회에서 어떻게 안 넘어질 수 있을까요? 바로 도련님 둘레에서 도련님을 지켜 주는 수많은 하인과 소작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로 치자면 수많은 노동자가 사회와 나라와 정치와 경제를 떠받칩니다. 수많은 비정규직이 이 나라를 지켜 줍니다.


  커다란 기업이나 재벌이 이 나라를 버티거나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와 농사꾼’이 이 나라를 버티거나 먹여살리지요. 다국적기업이 한국에서 잇속만 챙기고 빠져나간들, 몇몇 재벌기업이 수출을 못한들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회와 공장과 회사와 식량을 버티도록 밑바탕에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다만, ‘밑바탕 사람들 목소리’를 귀여겨듣거나 눈여겨보는 도련님(지식인)이 매우 드물거나 거의 없을 뿐입니다. 너울치는 사회에서 도련님은 흔들리지만, 밑바탕 사람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제몫을 씩씩하게 합니다. 전쟁이 터지든 식민지가 되든 농사꾼은 봄이면 씨앗을 심습니다. 농사꾼이 씨앗을 심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굶어서 죽어요. 전쟁이 터지든 식민지가 되든 어머니는 아기한테 젖을 물립니다. 어머니가 아기한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새로운 어린이가 자라지 못하고, 새로운 어린이가 자라지 못하면 한 나라나 사회는 곧바로 무너져서 사라지겠지요.



“어차피 도련님은 못 이겨. 시대라는 것에 질 수밖에.” (224쪽)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지식인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서 ‘밑바탕’을 볼 줄 알았다면, 또 이녁 스스로 밑바탕이 되는 삶을 조금이라도 가꾸어 보았다면, 그리고 이녁 스스로 손에 호미나 낫이나 기저귀를 쥐고서 ‘살림 가꾸기’를 해 보았다면, 사회가 아무리 너울치더라도 스스로 튼튼하게 서거나 씩씩하게 살아가는 길을 한결 슬기로이 헤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넘쳐나는 새 지식을 마주하면서 넘쳐나는 새 지식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놓고 망설이기만 하니까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넘쳐나는 새 문명을 맞닥뜨리면서 옛 문명을 차마 놓기 어려우니까 몸이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아기는 늘 아기이니, 어머니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기를 살뜰히 보살핍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바뀌어도 농사꾼은 늘 봄에 씨앗을 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둡니다. 고이 흐르는 삶을 바라보는 사람은 흔들릴 일이 없습니다. 고이 흐르는 삶과 사람과 사랑을 바라보지 않는 ‘도련님(지식인)’ 자리에만 머문다면 언제나 흔들리면서 휩쓸리는 가랑잎 같은 모습이 됩니다. 4348.9.1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