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15] 쪽지가 왔습니다

 손전화로 쪽지가 왔을 때에는 언제나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라는 소리가 울립니다. 손전화로 전화가 온다든지 단추를 누른다든지 할 때에 노래나 소리를 따로 담을 수 있다지만, 쪽지가 왔을 때에는 어쩌는 수 없이 손전화에 딸린 소리가 나도록 할밖에 없습니다. 한자말 ‘도착’을 영어로 하면 뭐가 되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그나마 ‘메세지’ 아닌 ‘문자’라 해 주어도 좋겠으나, 이마저 바라기는 참 어렵습니다. ‘쪽지’ 아닌 ‘쪽글’까지 바라지조차 못합니다. 고작 “쪽지가 왔습니다”라는 말소리 하나라도 좋으니, 제발 손전화에 살가운 말마디를 담아 준다면, 인터넷도 하고 텔레비전도 하며 영화를 보는 한편 뭣도 하고 뭣도 한다는 손전화 귀퉁이에 쪽글 알림말을 알뜰살뜰 여미어 마련해 놓는다면 얼마나 고마울까요. 할매 할배이며 어머니 아버지이며 차츰 눈이 가물어 가는 분들이 보기 좋도록 큰 글월판 손전화를 내놓기도 하는데, 아주 어린 아이들도 함께 쓰는 손전화라 한다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곱고 바르며 사랑스러운 말과 글을 들으며 전화기를 쓸 수 있게끔 마음을 기울이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4343.8.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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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27] 씨앗콩

 올 칠월에 멧기슭에 깃든 시골집으로 들어오면서 늦깎이 텃밭 일구기를 했습니다. 칠월에야 씨앗을 심어 무엇을 언제 거두느냐는 소리를 들었지만, 조그마한 옥수수랑 아욱이랑 갓이랑 무랑 요모조모 얻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콩을 거두는데, 조금 더 일찍 따야 했으나 이래저래 다른 일 때문에 젖히거나 잊은 채 지냈습니다. 거름 한 번 제대로 내지 않고 텃밭을 일구었으니 참말 엉터리 텃밭농사였습니다. 그러나 땅이랑 햇볕이랑 비랑 바람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람들 엉망진창 텃밭에도 고운 손길을 내밀어 콩알이 제법 열렸고, 이듬해 다시 심을 씨앗콩을 어느 만큼 갈무리하도록 선물을 베풉니다. 콩밥을 한다면 고작 두어 끼니 먹으면 그만인 콩알이지만, 씨앗콩으로 삼는다면 텃밭 두어 고랑쯤 알뜰히 심을 만큼 됩니다. 얼마 안 되는 콩이기에 다른 농삿집처럼 콩줄기를 뽑아 마당에 죽 펼쳐 놓고 도리깨로 두들겨 콩알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냥 밭도랑에 쪼그려앉아 콩꼬투리를 하나하나 따서 두 손으로 톡톡 열어 한 알 두 알 꺼냅니다. 처음에는 이 일을 혼자서 다 하다가는, 아빠 곁에 나란히 쪼그려앉은 아이한테 ‘아빠가 벌려 놓은 꼬투리’에서 알 꺼내는 몫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이는 스물여덟 달에 첫 씨콩 갈무리를 함께합니다. (4343.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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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팔월에 써둔 글이네요. 아직 책살림을 시골로 다 옮기기 앞선 때 겪은 일을 고스란히 살려서 '밥그릇' 이야기를 적어 보았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말 16] 밥 한 그릇

 인천 골목동네 살림집을 충주 산골마을로 옮겼습니다. 아직 다 옮기지 못한 책짐 때문에 홀로 인천으로 와서 책을 묶고 나르며 쌓는데, 밥때가 되면 밥을 사 먹어야 합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무렵 김밥을 사러 시내로 나갑니다. 시내에서 김밥과 보리술을 장만한 다음 도서관으로 돌아옵니다. 김밥을 먹으며 아까 이곳으로 오던 길에 밥집 안쪽에 붙은 차림표를 본 일을 떠올립니다. 밥집에 혼자 들어가서 사 먹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는데, 어느 밥집이든 차림표가 아닌 ‘메뉴(menu)’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 차림표에 적힌 글월은 ‘공기(空器)밥’입니다. “공기에 담은 밥 한 그릇”이라 ‘공기밥’이라 하겠지요. 그런데 ‘공기’란 무엇인가요. 우리한테 ‘공기’란 무엇인지요. 혼자이든 여럿이든 밥집에 가면 으레 “여기 밥 한 그릇 주셔요.” 하고 말씀드리지만, 이런 제 말을 알아듣는 밥집 일꾼은 아직 못 봅니다. 모두들, 누구라 한들 ‘공기밥’이랑 ‘밥공기’가 익숙할 테니까요. “밥 한 그릇”이라는 말을 다 알기는 하여도, 밥집에서는, 아니 밥집이 아닌 ‘식당(食堂)’이니까 그러할는지 모르는데, 저절로 ‘공기밥’입니다. (4343.8.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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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26] 작은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날, 어머니가 큰마음 먹고 저한테 ‘다달 학습지’ 하나를 받아서 주었습니다. 웅진아이큐라는 데에서 나오는 학습지였고, 이 학습지에 곁달린 이야기책에는 “큰 마음 작은 아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학습지는 제대로 안 풀면서 “큰 마음 작은 아이” 이야기책은 알뜰히 읽고 즐겼습니다. 어느 날 이 이야기책 이름을 “큰 아이 작은 마음”이라고 잘못 말해, 형은 이 이름을 갖고 동생을 오래도록 놀렸습니다. 학습지를 만들던 어른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노릇은 없으나, 어찌 되었든 아이들이 몸은 작아도 마음은 크다는 뜻을 나누고프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엉뚱하게도 저는 몸은 크면서 마음은 좁은 아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벌써 스물 몇 해가 흐른 지난일인데 오늘까지 이때 일은 잊히지 않습니다. 저는 예나 이제나 ‘작은사람’, 곧 ‘작은이’이면서 ‘큰마음’이고프기 때문인지 모르며, 이제는 제법 ‘큰사람’, 곧 ‘큰이’가 되었으나 아직까지 ‘작은마음’에 머물거나 갇히거나 옭매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꼭 큰마음이라 해서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작은이 작은마음, 곧 작은사람 작은넋이어도 얼마든지 아름답습니다. 크든 작든 내 결대로 살아가며 곱게 여미면 좋습니다. (4343.11.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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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25] 글읽기

 이오덕 선생님은 ‘글쓰기’라는 낱말 하나 새로 일구었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이 낱말을 일구기 앞서까지는 모두들 ‘글짓기’만 했습니다. 글을 짓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 쥐어짜거나 독재정권 입맛에 맞추는 틀에 박힌 글을 반공이니 효도니 충성이니 하며 쏟아낼 때에는 참으로 슬픕니다. 밥을 짓듯이 글을 지을 수 있고, 집이나 옷을 짓듯이 글을 지을 수 있다는 테두리에서 똑 떨어져 나간 ‘글짓기’라는 낱말은 그예 죽은 낱말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이 죽은 말에서 아이들이 홀가분할 수 있도록 ‘글쓰기’라는 낱말을 예쁘게 일구었습니다. 밥짓기 집짓기 옷짓기 삶짓기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에 비로소 ‘글짓기’ 또한 제자리를 찾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서는 앞으로도 까마득한 일이 될는지 모르는데, 그래도 밤하늘 보름달과 나란히 반짝거리는 밝은 별을 헤아리면서 ‘글쓰기’하고 ‘글짓기’가 곱게 어울릴 앞날을 손꼽아 봅니다. 글을 쓰듯 삶을 쓰기 마련이기에 ‘삶쓰기’를 함께 곱씹고, 삶을 쓰듯이 삶을 읽기에 ‘삶읽기’를 바라다가는, 아하, 책도 삶도 글도 사람도 다 참답게 읽으며 껴안아야 아름다운 길이기에 ‘글읽기’부터 옳게 가누도록 내 매무새 다스려야겠구나 싶습니다. (4343.11.2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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