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한 마디



  큰아이를 데리고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가서 ‘이 아이는 제도권학교에 안 보내고 집에서 배웁니다’ 하고 알리면서 서류를 쓰는데, 교무실에 앉아서 서류를 쓰는 동안 이 학교 교사들이 이 학교 아이들한테 “기다려.”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도 집에서 곧잘 아이들한테 “기다려.” 하고 말했는데, 새삼스레 이 말이 가슴을 쿡 찌른다. 털어놓고 말하자면, 집에서 아이들한테 “기다려.” 하고 말할 적마다 스스로 못마땅했다. 왜 이 말밖에 안 떠오를까, 이 말 아니고는 할 말이 없을까, 어릴 적부터 이 말을 어른들이 하면 참 못마땅했으면서 왜 나는 어른 자리에 서서 우리 아이한테까지 이 말을 할까, 온갖 생각이 가로지른다.


  서류를 다 쓰고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여덟 살이 된 큰아이는 “아, 심심해. 뛰놀고 싶다.” 하고 혼잣말을 한다. 미안하구나. 학교라는 데에서는 교무실이나 교실이나 골마루에서나 뛸 수 없단다. 여기는 놀이터가 아니기 때문인데, 놀이터가 아닐 뿐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뛰놀지 못하는 데란다.


  아이들한테 읊는 “기다려.”는 지켜보라는 뜻도 된다. 때와 곳에 따라서는 이러한 뜻이 된다. 그런데, 지켜보라는 뜻이 아니라, ‘너는 아이요 나는 어른이니 너는 어른이 하는 내 말을 들어’와 같은 낌새나 마음으로 이 말을 한다면, 아이들은 마음속으로 못마땅하다고 느끼리라 본다. 기다려야 하기에 기다리라고 말하는 일은 나쁘지 않다. 나쁘거나 좋거나 가를 까닭이 없이, 기다려야 할 때에는 즐겁게 “자, 기다리자.” 하고 말하면 된다.


  곰곰이 생각하니, 아이들한테 “그래? 그럼 지켜보렴.”이라든지 “그렇구나? 아버지가 다른 일을 하느라 손이 없으니 조금 기다리거나 다른 일을 하겠니?” 같은 말을 들려줄 수 있다. “음, 알았어. 아버지가 하던 일을 사이에 끊을 수 없으니, 얼른 마치고 네 말대로 하자.”처럼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여태 이런 말을 아이들한테 제대로 들려주지 않으면서 지낸 셈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나 스스로 생각을 하면서 말해야겠다고 깨닫는다. 무엇이든 교사(어른)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거북한 학교에 가서 교무실 한쪽에 앉아 서류를 쓰면서 새삼스레 나를 돌아본다. 4348.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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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07 07:47   좋아요 0 | URL
윽...!어릴적엔 까부는 아이를 보는 것도 즐거웠는데..지금은 별수없는 나.구나..
할때..그러네요..싫은느낌.

숲노래 2015-01-07 07:55   좋아요 0 | URL
어쩔 수 없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을 새롭게 보면서 배우니,
아하 이랬구나 하고 느끼면
이제부터 새롭게 달라지려고 하면 돼요 ^^
 

자전거가 휘청휘청



  여덟 살로 접어드는 큰아이가 샛자전거에서 발판을 구르면 힘을 제법 잘 받는다. 이제는 큰아이 다리힘이 크게 보탬이 되어 세 식구 자전거마실이 퍽 수월하다. 큰아이가 뒤를 돌아보면서 동생하고 수다를 떨며 놀 적에는 자전거가 휘청휘청 흔들린다. 앞으로 큰아이가 아홉 살이 되고 열 살이 되면 혼자 따로 두발자전거를 탈 테지. 언제쯤일까. 앞으로 언제쯤 큰아이는 자전거 홀로서기를 할까. 큰아이가 홀로서기를 한다면 작은아이는 수레에서 벗어나 샛자전거 자리를 물려받을 테지. 4348.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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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5-01-06 14:01   좋아요 0 | URL
영화한장면 같아요

숲노래 2015-01-06 23:59   좋아요 0 | URL
삶은 날마다 영화와 같구나 싶어요~

수이 2015-01-06 15:55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닮았을 거 같아요_ ^^

숲노래 2015-01-06 23:59   좋아요 0 | URL
아이는 아이답게 멋있게 크리라 생각해요~
 

우리집배움자리 3. 학교 잘 다녀올게요



  큰아이는 학교에 보낼 뜻도 없고, 큰아이 스스로도 학교에 갈 뜻이 없다. 서류로 이 일을 꾸미자니 여러모로 번거롭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의무교육만 외치기 때문에 ‘학교 안 다닐 자유나 권리’가 아예 없다. 집에서 지내면서 삶을 배우고 사랑을 누릴 자유나 권리가 없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이제껏 퍽 많은 이들이 이녁 아이를 입시지옥 의무교육에 집어넣지 않았다. 오십 분 앉히고 십 분 움직이도록 하는 꽉 막힌 틀이 아닌, 몇 가지 교과서 지식만 머리에 집어넣는 틀이 아닌, 시멘트 교실에 가두어 하루 내내 보내도록 하는 틀이 아닌, 홀가분하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배우도록 하는 길을 아이한테 보여준 어버이가 퍽 많다. 오늘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학교에 갈 짐을 챙긴다. 면소재지 초등학교 예비소집일에 맞추어 ‘우리 집 아이’는 ‘학교에 안 보냅니다’ 하는 뜻으로 서류를 쓰러 가는 길이다. 마을 어귀를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버스가 안 온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서 자전거를 탄다. 바람이 모질게 분다. 한참 자전거를 달리는데,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가 한 마디 한다. 바람소리에 묻혀 잘 안 들리지만, “아버지, 바람이, 벼리, 학교 잘 다녀오라고 해요.” 하고 말한다. 그래, 잘 다녀와야지. 너한테는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 문턱에 발을 디디는 날이란다. 아니, 서류 때문에 한 번 더 학교 문턱을 밟아야 할는지 모르지만. 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우리 집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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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연다



  대문을 열려면 키가 커야 한다. 키가 작으면 문고리에 손이 안 닿는다. 문고리에 손이 안 닿으면 방문도 대문도 혼자 못 연다. 키가 자라고 까치발을 할 수 있으면 문고리에 손이 닿는다. 문고리에 손이 닿으니 혼자 씩씩하게 문을 연다. 문을 열고 대문을 나선다. 대문을 나서서 고샅을 달린다. 마을 어귀 빨래터까지 달린다. 빨래터에 손을 담그다가 샘터에 고개를 박고 물을 마신다. 빨래터와 샘터 둘레에서 돋는 꽃과 풀을 바라보고 쓰다듬는다. 이윽고 다시 달려서 집으로 돌아온다. 겨울에도 여름에도 볕은 곱게 드리운다. 언제나 맑으면서 밝은 기운이 퍼진다. 작은아이도 큰아이도 두 어버이도 날마다 새롭게 자란다. 4348.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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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수 있는 날



  네 살에서 다섯 살로 넘어서는 작은아이는 혼자 잠옷으로 갈아입을랑 말랑, 또 혼자 잠을 벗을랑 말랑 하면서 하루하루 보낸다. 가만히 지켜보면 혼자 얼마든지 할 만하구나 싶지만, 작은아이는 어버이나 누나 손길을 기다리곤 한다. 조금만 울면 으레 도와주겠거니 여긴다고 할까. 그렇지만 아이야, 네 옷은 네가 입으렴. 네 옷은 네가 벗으렴. 네가 옷을 벗고 갈아입을 적에 안 도와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네 팔힘을 기르고, 네 몸놀림을 가꾸렴. 네가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너 스스로 한 꺼풀을 벗고 활짝 웃을 수 있어. 잘 보렴. 네 어버이나 누나가 거드는 손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살며시 옷자락 소매만 잡을 뿐이야. 너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단다. 네 아버지가 네 옷자락 소매만 잡으니 아주 수월하게 너 스스로 팔을 빼고 목을 뺄 수 있지? 나머지는 네가 혼자 해내니 그리 기쁘지? 이 느낌과 기쁨을 네 가슴에 깊디깊이 새길 수 있기를 빈다. 네 웃음이 네 삶을 밝힐 수 있는 줄 알아채기를 빈다. 4348.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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