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시 사외보 <책이 열리는 나무>에 싣는 글입니다.
여름호가 진작에 나왔는데
글은 이제야 올리는군요~

..

말넋 33. 제빛을 읽고 제말을 합니다
― 여름에 먹고 마시는 숨결


  글에 눈을 뜬 일곱 살 아이는 글이 보일 때마다 읽으려고 합니다. 글을 읽는 아이는 그저 읽습니다. 지식이나 사상이나 철학으로 읽지 않습니다. 아이 눈에 보이는 대로 글을 읽습니다. “2시 20분”이라 적힌 글이 있으면 일곱 살 아이는 “두 시 스무 분” 하고 읽습니다. 아마 여느 어른이라면 모두 “두 시 이십 분”이라 읽겠지요. 일곱 살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녔다면, 또 앞으로 학교를 다닌다면, 이렇게 읽을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사회에서는 “2시”를 “두 시”로 읽고 “20분”을 “이십 분”으로 읽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때를 가리키는 숫자를 왜 ‘하나 둘 셋’과 ‘일 이 삼’으로 갈라서 읽을까요? 우리는 왜 이처럼 읽을까요?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중국과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는 예전에 “두 시 스무 분”처럼 읽었고, 돈을 셀 적에도 “1달러”를 “한 달러”로 읽었습니다. “2달러”라면? 마땅히 “두 달러”로 읽었어요. 그렇지만 이제 중국과 일본에서도 “두 시 스무 분”이나 “두 달러”처럼 읽는 사람이 많이 사라졌어요. 왜냐하면 중국에도 일본에도 ‘남녘 연속극과 영화’가 많이 퍼졌어요. 남녘에서 쓰는 말투가 중국과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 말투에 스며듭니다.

  저는 여덟 살에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 때를 “두 시 이십 분”처럼 읽도록 가르칠 적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여쭈었습니다. 왜 그렇게 읽느냐고 여쭈었어요. 1980년대 첫무렵입니다. 그무렵 학교에서 교사는 이런 물음을 바보스러운 말로 여겼습니다. 대꾸할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며,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만 했어요. 오늘날 학교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초등학교와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숫자읽기를 가르치면서 어떤 낱말과 말투를 보여주거나 알려줄는지 궁금합니다.

  노정임·안경자 님이 쓴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라는 책을 읽다가 “잎의 모양은 식물마다 다 달라. 우리나라에는 600여 종의 식물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데(96쪽).”와 같은 글을 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 어른들 말투가 이렇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잎의 모양은 식물마다 다 달라”처럼 말합니다. 어느새 이런 말투로 딱딱하게 굳습니다. 이러한 글은 틀림없이 한글입니다. 다만, 겉보기로는 한글이요, 속보기로는 한국말은 아니에요.

  한국말로 옳게 쓰거나 말하려면 “잎은 식물마다 모양이 다 달라”처럼 다듬어야 합니다. 토씨 ‘-의’를 넣어 “잎의 모양은”처럼 쓰는 글은 한국말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더 살핀다면, “잎은 풀과 나무마다 모양이 다 달라”처럼 다듬을 만하고, “잎은 풀과 나무마다 다 달라”처럼 더 다듬을 만해요.

  책에 나온 글을 더 들여다보면 “600여 종의 식물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데”와 같은 글도 “식물이 600여 종이 산다고”로 다듬어야 알맞습니다. “한 권의 책”이나 “한 잔의 커피”는 한국말이 아니에요. 영어 번역 말투입니다. 한국말로 바르게 가다듬으면 “책 한 권”이고 “커피 한 잔”입니다. “600여 종의 식물”은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껍데기만 한글일 뿐입니다. “식물 600여 종”이라 적어야 올발라요. 더 살필 수 있으면 “풀과 나무가 600여 가지”로 다듬고, “풀과 나무가 600가지 남짓”으로 다듬습니다. 이 글월을 통째로 다듬어 “우리나라에는 풀과 나무가 600가지 남짓 있다고 알려졌는데”로 적을 수 있으면, 비로소 옹글다 싶은 한국말이 됩니다.

  유월 문턱에 감꽃을 바라봅니다. 감꽃은 오월에 피고 유월에 집니다. 유월에 지는 감꽃은 칠월에 무르익어요. 팔월에는 감알이 어떤 빛이 될까요? 집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으면 날마다 새롭게 감잎과 감꽃과 감알을 살필 수 있어요. 감을 잎과 꽃과 알로 헤아릴 만합니다. 감나무에서 감알을 하나 톡 따서 먹으면, 단단한 씨앗을 봅니다. 감씨예요. 그러니까, 풀과 나무는 네 가지로 묶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잎과 꽃과 알과 씨예요. 더 들여다보면, 잎이 돋기 앞서 싹이 터요. 싹은 씨앗이 흙에 드리운 뒤 바깥으로 내놓는 첫 잎사귀나 줄기입니다. 나무라면 한해살이 아닌 여러해살이인 터라, 싹이 튼다기보다 눈이 터져요. 나무에 있는 눈은 겨울눈이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풀이라면 ‘싹·잎·꽃·알·씨’로 흐르는 삶이고, 나무라면 ‘눈·잎·꽃·알·씨’로 흐르는 삶입니다.

  여름이면 우리들은 밭에서 나는 오이를 먹고 토마토를 먹습니다. 매화알도 살구알도 복숭아알도 노르스름하거나 발그스름하게 영급니다. 오얏알은 아예 빨갛디빨갛게, 빨갛다 못해 검붉게 익습니다. 매화알은 으레 푸른 빛깔일 때에 따서 효소를 많이 담지만, 매화알을 매화나무에 그대로 둔 채 바라보면 노르스름하면서 바알간 빛이 도는 열매로 익습니다. 잘 익은 매화알을 먹으면 ‘매화알이 푸를 적에 따서 효소로 담가 먹는 까닭’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매화알은 매화알대로 맛이 있어요. 다만, 매화알은 살구맛도 오얏맛도 아닙니다.

  곧, 매화알은 매화빛과 매화내음으로 매화맛입니다. 살구알은 살구빛과 살구내음으로 살구맛입니다. 눈썰미가 밝은 분이라면, 매화잎과 살구잎과 복숭아잎이 어떻게 다른지 쉬 알아챕니다. 능금잎과 배잎이 어떻게 다른지 곧 알아챌 테고요. 눈썰미가 어둡다면 감잎과 모과잎과 뽕잎을 못 알아봐요. 무화과잎을 못 알아보는 분도 있어요. 다 다른 나무에서 다 다른 잎을 알아본다면, 잎빛과 잎무늬와 잎결을 모두 다르게 읽을 수 있어요. 나무마다 다른 빛과 무늬와 결을 읽는다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적에 ‘오동잎빛’과 ‘마삭줄꽃빛’을 말하거나 ‘능금꽃내음’과 ‘멧딸내음’을 말할 수 있어요. 나무마다 다른 빛과 무늬와 결을 못 읽으면, 숲에서 들려주는 빛을 말이나 글로 담아서 나타내지 못해요.

  그나저나 수박은 언제 익을까요? 참외는 언제 익나요? 모두 여름에 익어요. 비닐집에서 키우면 봄에도 수박과 참외를 맛보는데, 해와 바람과 비를 머금는 수박과 참외는 여름빛이 무르익을 때에 제맛입니다. 여름에 여름을 먹는 제맛을 안다면, ‘제빛’을 찾고 ‘제말’을 하며 ‘제삶’을 가꾸는 ‘제길’을 걷겠지요.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읽는 만큼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살아갑니다. 4347.5.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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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 산하어린이 127
이영옥 지음, 박재동 그림 / 산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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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58


 

스스로 좋아하는 삶

― 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

 이영옥 글

 박재동 그림

 산하 펴냄, 2005.6.22.



  엊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드러누우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온몸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고 여겨 그대로 곯아떨어졌습니다. 아이들도 곧장 곯아떨어집니다. 아이들한테 부채질을 해 주고 이마를 쓰다듬다가 괜히 미안합니다. 몸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더라도 노래를 부르면 어느새 이런 소리가 사라질 테니까요. 삐걱삐걱 소리가 아닌 보드라운 노랫소리로 내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면, 아이들도 즐거이 꿈나라로 날아갈 테니까요.



.. “재동아, 엄마는 밭에 간다. 아기 혼자 마당에 있으니, 잘 좀 데리고 놀아라.” 어머니가 방에 있는 재동을 향해 외쳤다. “예.” 재동은 건성으로 대답만 하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방바닥을 도화지 삼아 넘실거리는 모양이 얼마나 신비한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림 안 그릴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화가님께서 그림을 안 그리다니? 아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장판에는 그리지 말거라.” ..  (11, 15쪽)



  엊저녁 마을 어디에선가 기계소리가 자꾸 들립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는 모두 잠들 때인데, 누군가 늦은 밤에 두어 시간 즈음 기계를 돌립니다. 낮이나 저녁에는 무엇을 하다가 왜 해 떨어진 밤에 기계를 돌릴까 아리송합니다. 그렇게 밤에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는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밤에 아이들을 재우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았습니다. 풀벌레는 몇 가지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우는지 귀를 기울입니다. 풀벌레 노랫소리 사이로 개구리는 몇 마리나 살아남아서 노래를 부르는지 귀여겨듣습니다. 마을마다 농약을 와장창 뿌리기 앞서, 이른여름에는 그야말로 개구리잔치였습니다. 우리 집 풀밭뿐 아니라 마을 모든 논에서 엄청나게 많은 개구리가 우렁차면서 시원하게 노래잔치를 열었습니다.


  마을마다 농약을 뿌리니, 또 항공방제까지 하니, 개구리가 거의 모두 죽습니다. 우리 집 풀밭에만 몇 마리 남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개구리 노래를 못 들어요. 농약 때문에 죄 타죽거든요.


  밤에 잠을 재우며 아이한테 ‘개구리가 노래하는 소리’를 알려주고 싶지만, 참 어렵습니다. 늘 듣는 소리여야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일곱 살 아이가 문득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 왜 책에는 개구리가 개골개골 운다고 나와?” 그러게 말야. 네가 듣기로도 개구리는 ‘개골개골’ 하지는 않잖아?



.. 재동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상남도의 자그마한 시골마을 모래골이었다. 밤나무들이 울창한 산을 둘러서 있고, 맑은 물줄기가 띠처럼 마을을 감싸고 흐르며, 모래가 솜처럼 부드럽고 폭신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재동은 이 모래골의 앞산과 강가의 모래를 정말 사랑했다 … 해마다 봄이면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려 운동장을 하얗게 덮곤 했는데, 선생님은 반장인 재동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꽃잎을 쓸어 내라고 했다. ‘참 이상해. 어른들은 저리도 아름다운 걸 왜 쓸어 내라고 할까?’ ..  (17, 18쪽)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누릴 적에 환하게 웃습니다. 스스로 안 좋아하는 삶을 누리면 얼굴을 찡그리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가꿀 적에 맑게 노래합니다. 스스로 안 좋아하는 삶을 보내야 하면 노래가 터져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서 해야 공부가 됩니다. 대학교에 가야 하거나 시험점수가 높게 나와야 한대서 아득바득 이를 갈면, 오직 한 가지만 남습니다. 미움이 남습니다. 여기에 짜증이 붙습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한 공부로는, 대학교에 들어간들 제대로 대학교를 누리지 못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하는 공부로는, 높은 점수가 나와도 못마땅합니다.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요. 우리는 왜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낼까요. 우리는 왜 낮에는 일어나서 움직이고 밤에는 눈을 감고 잠드는가요. 잠을 깨는 아침은 어떤 하루인가요. 어제와 똑같은 날인가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삶인가요.



.. 재동은 마음이 무거웠다. 어떤 어른들은 만화라면 무조건 나쁘게만 여기고, 만화방에 드나드는 학생을 불량한 학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만화방 주인의 아들인 자기가 그런 내용의 포스터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선생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 학교에서 소풍 갔다 온 날에는 친구들과 둘러앉아 도시락 먹는 삽화를 넣었고, 시골에 가는 날에는 버스를 운전하는 아저씨나, 고향의 커다란 소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렇게 영화와 만화와 글쓰기에 미쳐 있는 동안 재동의 학교 성적은 완전히 밑바닥이 되고 말았다 ..  (57, 81쪽)



  박재동 님이 걸어온 길을 조곤조곤 밝히듯이 풀어낸 《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산하,2005)를 읽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책은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습니다. 무척 멋진 책이라고 느끼는데,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이 책이 오래오래 길이길이 두고두고 읽히기는 어렵구나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찾아 씩씩하게 한길을 걸어간 사람들 이야기가 한국에서는 좀처럼 못 읽히는구나 싶습니다. 학교 공부가 아닌 삶빛을 찾으려는 사람들 이야기는, 졸업장이 아닌 사랑빛을 찾으려는 사람들 이야기는, 아직 한국에서는 머나먼 이야기일는지요.


  이 책은 판이 끊어졌으나, 박재동 님은 오늘도 만화를 그립니다. 이 책은 이제 도서관과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나, 박재동 님은 오늘도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스스로 가장 즐거운 일을 하면 됩니다. 스스로 가장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 됩니다. 스스로 가장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삶을 아름답게 가꾸다 보면, 시나브로 사랑이 환하게 피어납니다.



.. 재동은 멀리 고깃배가 지나가고 갯벌에서 어린 소녀가 조개를 캐는 모습을 캔버스에 옮겼다. 정학 때문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선생님, 그까짓 그림이 뭐냐고요? 그것은 제 인생 전부입니다.’ … 한 달에 한 번씩 우체국에 가서 어머니가 부쳐 준 돈을 찾아 들고 올 때마다, 재동은 그게 어머니의 피와 땀이라고 생각했다 … 미술실을 놔두고 왜 걸핏하면 학생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수업을 하느냐는 불만 섞인 말을 들을 때마다, 재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술 수업은 미술실에서 그림이나 그리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고 못마땅했다 ..  (98, 112, 122쪽)



  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옵니다. 곧 동이 틀 텐데, 개구리 노랫소리가 외줄기로 울립니다. 어디에서 우는 개구리일까 헤아려 봅니다. 개구리는 어디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 저녁에 풀개구리 한 마리를 우리 집 섬돌에서 보았습니다. 어제 낮에 참개구리 한 마리를 우리 서재도서관 귀퉁이에서 보았습니다. 우리 집 꽃밭에도 참개구리가 몇 마리 삽니다. 아마 뱀도 한두 마리쯤 우리 집 풀밭에 있을 수 있습니다. 며칠 앞서 골짜기에서 도룡뇽을 한 마리 보았고, 돌 사이를 헤엄치는 가재도 여러 마리 보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가재를 냉큼 건져올려 끓는 물에 넣고 냠냠짭짭 먹었을 테지만, 이제 가재를 잡지 않습니다. 부디 이 가재가 새끼를 많이 거느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걸어가거든요.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길은 ‘푸른 숲’입니다. 아이와 함께 그림놀이를 할 적에 언제나 ‘푸른 숲’을 그립니다. 내가 즐겁게 읽는 책은 으레 ‘푸른 숲’을 다룹니다. 우리 집이 푸른 숲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푸른 숲내음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내 눈빛이 푸른 숲빛으로 해맑을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7.8.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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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시 걸 3
야스다 히로유키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64



쓸쓸한 사랑

― 스시걸 3

 야스다 히로유키 글·그림

 김진수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4.8.15.



  짝사랑은 쓸쓸하지 않습니다. 한쪽이 외곬로 하는 사랑을 가리켜 짝사랑이라 하지만, 짝사랑에는 이녁을 헤아리는 따순 기운이 있습니다. 이 기운은 언제나 내 마음을 들뜨게 하고 즐겁게 이끕니다. 예쁜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닌데 사랑이라고 잘못 생각할 때에 쓸쓸한 사랑입니다. 마음은 하나도 안 움직이지만 입으로는 사랑이라고 말할 적에 쓸쓸한 사랑입니다. 설레는 마음이나 기쁜 마음이나 따순 기운이나 고운 빛이 흐르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사랑인 척할 적에 쓸쓸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로 하지 않아도 사랑입니다. 말로 떠들거나 글로 쓰기에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선물을 건네거나 잔치를 베푼다고 해서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아낄 때에 사랑이 됩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 때에 사랑이 됩니다. 마음으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빙그레 웃음지을 때에 사랑이 됩니다.



- ‘똑같은 자랑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지만, 휴대폰도 검사하지만, 싸우다가 밤길에 날 혼자 버려두고 간 적도 있지만, 섹스도 10분만에 끝나지만, 그 사람이라 다행이다. 이런 날 선택해 줬으니까.’ (5쪽)

- ‘아마도 이 아이는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 하지만 이상한걸. 그날부터 난 계속 행복했는데?’ (12쪽)

- “넌 옛날부터 그랬었지. 툭하면 멍이 들거나 얼굴이 퉁퉁 부어서 학교에 왔는데도, 절대 아빠를 나쁘게 얘기하지 않았거든.” “아, 그거야 내가 잘못해서 맞은 거니까. 물론 좀 심할 때도 있었지만. 전부 날 위해서였는걸.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 “그 초밥 꼬마는 아마 거짓말쟁이인 너한테 가르쳐 주러 온 걸 거야. 네가 숨기고 있는 진짜 마음을.” (14∼15쪽)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몰아넣으면서 이를 ‘아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어버이가 많습니다. 아이들을 놀지 못하게 하면서, 아이들 손에 참고서와 문제집만 쥐어 주면서, 아이들을 학원에 옭아매면서, 이를 사랑이라고 잘못 여기는 어버이가 많습니다.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건지지 않고 교과서 수업만 하면서 이를 ‘학생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많습니다. 아이들 머리카락 길이나 치마 길이를 따지면서 이를 사랑인 줄 아는 어른이 많습니다. 아이들한테 ‘하지 말 것’만 잔뜩 늘어놓으면서 이는 모두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떠벌이는 어른이 많습니다.


  놀지 못하면서 살아야 하는 아이들은 어떤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즐겁게 놀면서 노래하지 못하면서 몸이 커진 아이들은 어떤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


  즐거움이나 꿈은 성적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쁨이나 사랑은 은행계좌에 적히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이나 노래는 졸업장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따스함과 너그러움은 전쟁무기로 밝히지 못합니다.



- ‘종종 집안을 돌아다니던 파리잡이 거미가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게 귀여워서 몇 시간이나 쫓아다녔다. 엄마에게는 그냥 해충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40∼41쪽)

- ‘옆집 하야카와 할머니는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는 지렁이를 손으로 만져도 야단치지 않았고, 쪼글쪼글한 손을 질릴 때까지 만지게 해 줬다.’ (42∼43쪽)

- ‘사랑받고 있지만 나는 무척 쓸쓸하다. 평범한 가족의 지극히 평범한 평화로운 풍경. 그것을 남몰래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이 작디작은 할머니다.’ (54쪽)





  야스다 히로유키 님 만화책 《스시 걸》(대원씨아이,2014) 셋째 권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만화책 《스시 걸》은 셋째 권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이야기를 더 잇지 않는구나 싶어 아쉽지만, 그동안 읽은 세 권으로 마음이 포근합니다. 힘겹거나 아프게 살아가는 사람한테 조그맣게 빛이 되어 준 예쁜 벗님을 이야기하는 만화란 참으로 사랑스럽습니다.



-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상한 걸까. 휴일에는 가끔 도시락을 싸들고 반나절 동안 신사에 놀러가거나, 한방약이나 수상한 화석을 구경하거나, 충동적으로 만두를 잔뜩 만들어서 아무에게도 나눠 주지 않고 혼자 먹어치우거나, 가오리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왜 다들 이러지 않는 걸까. 오히려 신기하다.’ (57∼59쪽)

- ‘나는 즐겁고 기분 좋은 일들만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61쪽)

- ‘여전히 남자에도 결혼에도 흥미는 없다.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꼭 인간만은 아니니까.’ (72쪽)



  입으로는 “괜찮다” 하고 말하더라도 누구나 얼굴에 “안 괜찮다”는 빛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입으로는 “좋아” 하고 말하더라도 누구나 얼굴에 “안 좋다”는 빛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렇잖아요. 한식구라면 낯빛을 보면서 다 알아요. 동무라면 낯빛을 읽으면서 다 압니다. 이웃이라면 낯빛을 헤아리면서 다 알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으로 사귑니다. 우리는 서로 지식으로 사귀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졸업장이나 자격증으로 사귀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숨결로 사귑니다.





- ‘놀라웠다. 세상에 이렇게 온화한 남자가 있을 줄이야.’ (79쪽)

- ‘왠지 마음이 놓였다. 이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들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이 집에는 넘쳐나니까.’ (82쪽)

- ‘그 접시에 담은 요리는 마치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맛있어졌습니다. 오늘은 뭘 만들어서 그 접시에 담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117쪽)



  생각해 보셔요. 돈 때문에 사귀는 사이라면 얼마나 거북할까요. 이름값 때문에 가까이하는 사이라면 얼마나 못마땅할까요. 권력 때문에 눈치를 보아야 한다면 얼마나 고단할까요.


  신분이나 계급이 높기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면 얼마나 지칠까요. 주먹질 때문에 꼼짝을 못하면서 손바닥을 비벼야 한다면 얼마나 짜증스러울까요. 돈을 빌려주면서 마음에 생채기를 입힌다면 얼마나 쓰라릴까요.


  사랑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프게 하지도 않고, 미움이나 따돌림을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로지 보드라운 산들바람과 같이 찾아옵니다. 사랑은 늘 오직 포근한 햇볕처럼 온누리를 비춥니다.





- “당연한 거야. 물고기는 살아 있으니까.” (136쪽)

- ‘전갱이 한 마리를 위해 우는 아이라. 이 녀석은 훌륭한 장인이 되겠구나.’ (138쪽)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골짜기를 다녀오는 길에 전깃줄에 앉은 제비를 두 마리 만납니다. 안타깝지만 꼭 두 마리입니다. 우리 마을에도 이웃 여러 마을에도 제비가 매우 드뭅니다. 해가 갈수록 제비가 줄어듭니다. 왜냐하면, 해가 갈수록 마을마다 할매와 할배 나이가 더 들면서 농약을 더 많이 치기 때문입니다. 마을마다 한동안 ‘친환경농업’ 바람이 불었습니다만, 새마을운동 때부터 오랫동안 길든 농약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에 엄청난 농약을 엄청나게 뿌립니다. 이 탓에 제비는 농약에 맞아 죽어요. 때로는 자동차에 부딪혀 숨을 거둡니다. 중국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한국까지 씩씩하게 찾아온 제비이지만, 애써 알을 낳아 새끼를 까고 날갯짓까지 가르쳐 주었으나, 이 제비들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일이란 너무 어렵습니다. 도시에는 아예 가지 못하는 제비요 시골에 드문드문 남은 제비입니다만, 즐겁고 힘차게 날갯짓을 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이 나라에서 제비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제비가 이토록 고단한 나날을 누리다가 죽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오늘날 이 나라 도시에서는 제비가 까맣게 잊혔고, 시골에는 늙은 할매와 할배만 남으니 제비하고 동무를 삼을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제비가 이렇게 힘겹게 버티다가 죽는지 모릅니다.


  여느 때에 제비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주 드뭅니다. 여느 때에 개구리나 뱀이나 사마귀를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여느 때에 잠자리나 나비나 도룡뇽을 돌아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무척 드뭅니다. 여느 때에 매나 소쩍새나 꾀꼬리를 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드뭅니다.


  온통 쓸쓸한 나라입니다. 그예 쓸쓸한 사회입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저 쓸쓸하기만 하니, 내 이웃과 동무도 쓸쓸한 빛에 갇힐는지 모릅니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쓸쓸한 빛만 떠오르니, 아름답거나 즐거운 사랑하고는 자꾸 멀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요즈음 ‘도깨비’하고 놀 줄 아는 아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4347.8.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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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산호초
미리엄 모스 지음, 강이경 옮김, 에드리언 캐너웨이 그림, 박종영 감수 / 서돌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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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17



여기는 어디인가요

― 여기는 산호초

 미리엄 모스 글

 에드리언 캐너웨이 그림

 강이경 옮김

 서돌 옮김, 2008.7.5.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나무를 이야기합니다. 구름을 바라보는 사람은 늘 구름을 이야기합니다. 풀벌레를 바라보는 사람은 노상 풀벌레를 이야기합니다. 자동차를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자동차를 이야기하고, 아파트를 바라보는 사람은 늘 아파트를 이야기하며, 신문을 바라보는 사람은 노상 신문에 나오는 사건·사고를 이야기합니다.


  숲을 바라보며 살기에 숲빛을 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살기에 하늘빛을 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살기에 바다빛을 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바라보는 대로 마음에 빛 한 줄기를 품습니다. 더 좋거나 더 나쁜 빛은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가꾸는 빛이요, 스스로 일구는 빛입니다.



.. 오랜 세월 서서히 만들어진 눈부신 산호와 수없이 많은 작은 생명으로 가득한 곳 ..  (4쪽)





  이 도시가 저 도시보다 좋지 않습니다. 이 시골이 저 시골보다 낫지 않습니다. 작은 도시이건 커다란 시골이건 스스로 살아가는 터전일 뿐입니다. 어느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건 스스로 돌보면서 보듬는 삶자리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숨을 쉬는 모든 목숨을 살리는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모든 목숨은 숨을 거둡니다. 바람이 불기에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푸르게 우거진 숲에서 푸른 바람이 불어 매캐한 도시를 보듬습니다. 매캐한 도시를 떠돌던 바람이 푸르게 우거진 숲으로 날아가면, 매캐한 기운을 푸르게 우거진 숲이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다독입니다.


  예전에는 어디에서나 한여름에는 풀벌레 노래잔치였습니다. 그야말로 풀벌레 나라였다고 해도 될 만했습니다. 이러면서 개구리도 노래잔치를 벌였어요. 한여름 밤은 귀를 살짝 기울이면 밤새 아리따운 노래가 가득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도시에서는 풀벌레도 개구리도 멧새도 노래할 수 없습니다. 풀벌레와 개구리와 멧새가 깃들 흙땅이 거의 모두 사라집니다. 시골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뿌려대는 농약 때문에 풀벌레와 개구리와 멧새가 죽습니다.



.. 부드럽게 흔들리는 바다, 맑은 산호 밭을 노니는, 물고기들이 잔치를 벌이는 곳 (7쪽)




  미리엄 모스 님이 글을 쓰고, 에드리언 캐너웨이 님이 그림을 그린 《여기는 산호초》(서돌,2008)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나는 이 그림책을 헌책방에서 장만합니다. 새책은 벌써 판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고운 빛이 흐르는 예쁜 그림책이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하고는 걸맞지 않아 쉬 판이 끊어졌지 싶습니다. 고운 빛이 흐르는 예쁜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들은 고운 빛하고 등지며 예쁜 삶터를 가꾸는 길하고는 엇나가기에 이 책을 알아보는 손길이 얼마 없지 싶습니다.


  참으로 마땅하지요. 산호초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무 데나 있지 않겠지요. 지저분한 바다에 산호초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쓰레기를 날마다 엄청나게 쏟아붓는 도시가 곳곳에 있으면 산호초가 자랄 턱이 없습니다.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바닷가마다 때려짓는데 산호초가 숨쉴 턱이 없습니다. 해군기지와 둑 공사와 4대강사업 따위가 춤을 추니 산호초가 살아남을 턱이 없습니다.


  만화영화 〈폰효〉에도 잘 나옵니다만, 사람들 스스로 온통 쓰레기더미인 터전에서 살아가니, 뭍에도 바다에도 쓰레기만 넘실거립니다. 쓰레기차가 하루라도 쓰레기를 안 치우면 어떻게 될까요? 청소부가 하루라도 쓰레기를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소각장에서 하루라도 쓰레기를 태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들은 눈부신 문명이나 문화를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쓰레기와 나란히 있으면서 날마다 어떤 쓰레기를 얼마나 버리는지 모르는 채 쳇바퀴를 돕니다.



.. 바다가 산처럼 높이 솟아올라, 사납게 부서지며, 산호초를 산산조각 내는 곳 ..  (21쪽)




  여기는 어디인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어디인가요. 도시는 도시대로 쓰레기 나라입니다. 시골은 시골대로 쓰레기 누리입니다. 시골에서는 마을 할매와 할배가 농약병과 비료푸대를 아무 데나 버립니다. 못 쓰는 가전제품을 논도랑에도 버리고, 뒷산이나 앞산 기슭에 짐차에 싣고 와서 퍼붓곤 합니다. 시골 아이들이건 도시 아이들이건 과자 빈 껍데기나 음료수 빈 깡통을 아무 데나 버립니다.


  땅에서 스스로 거둔 먹을거리를 손수 갈무리해서 먹을 적에는 쓰레기가 없습니다. 가게에서 돈을 치러 무언가 장만하면 곧바로 쓰레기가 나옵니다. 돈으로 무언가를 사고팔 적에 어김없이 쓰레기가 나옵니다. 스스로 삶을 짓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쓰레기 굴레에 갇힙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우리 보금자리인가요. 우리 마을인가요. 우리 나라인가요. 우리 지구별인가요. 우리 누리인가요. 우리 우주인가요. 아니면, 남이 사는 터인가요, 내가 사는 터인가요.


  인천 앞바다에 조기가 다시 찾아올 날은 언제쯤이 될까 궁금합니다. 서울 시내 골골샅샅 제비가 다시 찾아갈 날은 언제쯤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어디에서나 무지개와 미리내를 마음껏 올려다보다가 개똥벌레 불꽃춤을 구경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이 되려나 궁금합니다. 4347.8.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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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8 - Vol.9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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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83



예쁘게 찍는 사진 한 장

― 사진잡지 《포토닷》 9호

 포토닷 펴냄, 2014.8.1.



  사진잡지 《포토닷》 9호를 읽습니다. 대구에 문을 연 ‘아트도서관’ 소식을 짤막하게 읽습니다. 몇 군데 신문에도 아트도서관 소식이 나왔는데, 한국에 사진과 얽힌 책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데가 거의 없는 만큼, 이러한 소식은 짤막한 기사가 아닌 깊이 들여다보는 취재로 다루면 한결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호에서는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다음 호에서는 아트도서관을 찬찬히 이야기하는 글과 사진을 다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잡지이기에 사진과 얽힌 여러 가지 소식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상을 받은 이들 소식이 나오고, 사진전시회 이야기가 흐릅니다. 눈여겨볼 만한 작가들 이름과 작품을 보여줍니다. 아무래도 사진잡지이니 사진 이야기와 사진가 소식을 다룰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사진 이야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사진가 소식은 무엇을 다루어야 ‘사진가 소식’이 될까요.


  “정경자(40)의 사진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느낌 있는 사진’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감성 그리고 뭔지 모를 슬픔이 그녀의 사진 곳곳에 묻어 있다(김소윤/42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정경자 님 사진을 ‘느낌 있는 사진’이라 말하는데, 우리가 보는 모든 사진에는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이 없다면? 느낌을 못 받는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진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을 느끼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빛을 못 느끼는 사진이 있다면? 사진을 읽으면서 빛을 못 느낀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요, 이야기를 읽는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이야기를 느끼거나 읽을 수 없다면, 이때에도 사진이 아니라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사진을 읽는 사람 가슴속에 느낌이나 빛이나 이야기가 없다면, 사진을 찍은 이가 아무리 느낌과 빛과 이야기를 담았더라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 못지않게 사진을 읽는 사람도 느낌과 빛과 이야기를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창작(찍기)과 비평(읽기)은 서로 나란히 느낌과 빛과 이야기로 어우러진 사랑입니다.


  “때로는 사진이 작가를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골똘해진다(최연하/58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잡지이기에 언제나 ‘보기(바라보기)’를 생각합니다. 사진이란, ‘보고 느껴서 찍으며 이야기를 빚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사진을 읽을 적에는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어떤 이야기로 빚으려고 사진을 찍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 사진을 읽을 때에는 저 사람이 어떤 꿈을 어떤 노래로 엮으려고 사진을 찍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바라보고, 사진을 마주하면서 사람(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을 마주합니다.


  “세피아 톤은 촛불에 그슬린 과테말라 성당의 벽면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마야인들이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가 시간이 지나면 세피아 톤과 비슷한 색상으로 변해 간다(루이스 곤잘레스 팔마/67쪽).”와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사진은 눈을 떠서 찍으며, 사진은 눈을 떠서 읽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진을 바라볼 적에 무지개빛, 까망하양, 이렇게 두 갈래를 살피는 한편, ‘다른 결’, 그러니까 ‘세피아 톤’이든 무엇이든 생각합니다.


  빛결에는 어떠한 숨결이 깃들까요. 세피아 톤을 마음에 담는 이녁은 어떠한 이녁 숨결을 사진 한 장에 살포시 담아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요. 사진을 찍을 때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지개빛을 쓰지는 않는가요. 사진을 찍으며 넓게 돌아보지 않고 까망하양을 쓰지는 않는가요.





  사진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무지개빛이 감돌면, 까망하양으로 사진을 찍어도 언제나 무지개빛이 살포시 드러나면서, 이 사진을 읽는 이들도 무지개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까망하양과 같은 기운이 서리면, 무지개빛으로 사진을 찍어도 늘 까망하양 기운이 그윽히 나타나면서, 이 사진을 읽는 이들도 까망하양을 느끼곤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알아보자면 첫째는 사진촬영을 위해 앵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국유림의 나무를 무단으로 잘라낸 사진작가 장국현에 관한 것이다(곽윤섭/73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알아보니, 장국현이라는 분이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는다면서, 가장 큰 금강송(대왕송) 둘레에서 자라는 다른 금강송(신하송), 이를테면 220년을 묵은 금강송까지 베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금강송은 네 그루에 6000만 원, 그러니까 한 그루에 1500만 원이라는 값을 한다는데, 금강송을 열한 그루를 베어낸 장국현이라는 분한테 법원은 500만 원 벌금을 내라고 했다고 해요. 그리고, 장국현이라는 분은 취재기자한테 “이제 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고 말했으며, 이분은 금강송을 찍은 사진을 한 장에 400∼500만 원에 팔았다고 합니다.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쓸쓸하면서 슬픕니다. 장국현이라는 분은 어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이처럼 몹쓸 짓을 했을까 싶은데, 이녁이 신문사나 방송사와 만나서 하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잘못했다’고 느끼지는 않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다 ‘들통이 나서 법원에 갔고 벌금을 내는구나’ 하고 느끼지 싶습니다.




  이녁이 사진을 찍는 솜씨가 대단하거나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찍는 넋이나 몸가짐이나 마음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 싶습니다. 재주가 있다고 해서 남을 해코지해도 되지 않고, 솜씨가 있다고 해서 엉터리 짓을 해도 되지 않습니다. 보기에 그럴듯한 그림을 빚는 일이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이야기를 짓는 사진을 선보일 때에 사진찍기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한다. 사생활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잘 다져져야 그것을 사진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같다(장유진/77쪽).”와 같은 이야기를 함께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이야기’를 잘 할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 나를 바라볼 적에 옳고 바르며 아름답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이웃과 마을과 지구별을 바라볼 적에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눈길(바라보기)을 다스릴 때에 비로소 사진으로 삶을 풀어내리라 느낍니다.


  가만히 보면, “보자기 뒤집고 쓰고 찍는 게 무슨 예술이냐며 사진을 천대하고 예술로 인정 않는 세력과 투쟁해 온 40년의 시간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작 내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었어요. 95세에 처음 개인전을 여는 작가는 세계에서 제가 아마 유일할 거예요(이명동/10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아직 한국에서는 사진이 예술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라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지 못하던 한국 사회에서 삶을 꾸리고 사진을 찍은 터라, 나무 한 그루를 찍으려고 다른 나무를 수없이 몰래 베는 일이 되풀이될는지 모릅니다. 삶을 가다듬지 않고 사진만 찍을 때에는 삶도 사진도 제 빛을 못 찾을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예쁘게 찍을 노릇입니다. 빛을 예쁘게 담을 뿐 아니라, 마음을 예쁘게 가누면서 찍을 노릇입니다. 사진으로 찍을 이웃을 예쁘게 마주할 뿐 아니라, 사진을 찍는 내 삶을 예쁘게 돌볼 노릇입니다.





  “앵글도 좋고, 노출도 정황했다고 편집장이 타고난 사진가라고 말해 줘 얼마나 우쭐했었는지. 운이 좋았겠지만 말이다. 노을이 질 때 다시 찍으면 좋겠다고 해서 아침 첫차를 타고 다시 내려가 하루 종일 건물을 노려보고 있다가 노을이 질 무렵 소중한 한 컷을 담아서 올라왔다. 그 사진이 그 달의 잡지에 실렸다.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 프리랜스 사진가로 다시 ‘건축과 환경’의 사진을 찍으면서 잡지를 통해 내 사진의 색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김용관/114, 116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김용관 님은 풋내기인 이녁한테 ‘좋은 말’만 들려줄 뿐 아니라, 풋내기가 찍은 사진을 잡지에 덜컥덜컥 실으면서 기운을 북돋운 선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용관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 보면, 김용관 님 둘레에서 ‘이 사람이 어떤 일에든 바지런하면서 알뜰하더라’ 하고 느낀 뒤에 사진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사진을 배운 적이 없으나, 사람됨이 바르고 예쁘겠구나 싶어, 덥석 사진기를 맡긴 셈이라고 할까요. 사진을 찍는 솜씨나 재주는 앞으로 차근차근 키우면 되니, 무엇보다 ‘사진을 마주하는 넋’이 튼튼히 서도록 둘레에서 이끌었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란에서 개발독재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깊은 질곡, 어두운 이면에 왜 정작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부재한가(진동선/122쪽)?” 하고 외칠 수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온갖 아픔과 수렁과 굴레와 쳇바퀴가 그득그득 이어진 한국 사회입니다. 올곧게 한길을 걸어간 사진가를 찾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진가뿐 아닙니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쓴 사람 가운데, 대학교수를 하거나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맡은 사람 가운데, 공무원이 되거나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 가운데, 어두운 나날을 슬기로운 빛을 밝히면서 걸어간 사람을 얼마쯤 손으로 꼽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아이들한테 거친 말을 하지 않으며, 아이들을 대학입시 노예로 몰아세우지 않은 여느 교사는 그야말로 드뭅니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지난날대로 너무 벅차고 힘들었으니, 올곧게 한길을 걷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어요. 안타깝지만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참모습입니다. 옛모습은 털고, 이제부터 새로운 넋이 되어 한길을 올곧게 걸어가면 됩니다. 옛사람이 얽매였던 수렁이나 굴레는 살며시 내려놓고, 오늘을 가꾸는 우리들이 새로운 빛을 가꾸면 됩니다.




  “화각과 화질과 해상도가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진을 찍는 우리들은 왜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해야 할까요. 우리들이 찍을 사진은 ‘더 나은 사진’이어야 할까요. 그래서 ‘세계 사진 역사’에도 이름을 걸쳐야 ‘사랑받는 사진가’가 될는지요. ‘매그넘 회원’이 되거나 ‘외국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외국 사진잡지에 소개되’거나 ‘사진 한 장에 제법 비싸다 싶은 값을 받고 팔아’야, 어깨에 힘을 줄 만한 사진가가 될 만할는지요 …… ‘인기 사진가’라 손꼽을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그야말로 ‘인기 사진가’입니다. 다만, ‘인기’를 얻는 사진가일 뿐입니다. 인기를 얻는다고 해서 이분들 사진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따사롭거나 착하거나 참답지는 않습니다 …… 마음이 있는 사람은 사진기를 처음 쥔 날에도 사진빛을 느낍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진기를 쉰 해 넘게 쥐었어도 사진빛을 느끼지 못합니다 …… 작가 대접을 받아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최종규/151∼15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서 아름다운 넋이 되어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가 되려는 사진이 아니라, 작품으로 비싸게 팔려는 사진이 아니라, 내 마음을 살찌우고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는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사진잡지 《포토닷》 9호 첫머리에 실린 “아이들을 꼭 귀엽게 촬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다 귀여운 것도 아니다. 부모에게조차 자신의 아이는 항상 귀엽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아이들은 귀엽기만 하다는 ‘편견’에 반기를 든다. 그래서 그 사랑스럽고도 얄밉기도 한 아이들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담아 부모와 어른들은 ‘미운 7살’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고, 또 아이들은 그 표현에 부합하는 몫을 충실히 해내면서 성장해 간다(이철승/32쪽).”와 같은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합니다. 이야기가 어쩐지 얄궂습니다. 아이들을 꼭 귀엽게 찍을 까닭이 없다는데, 아이들을 귀엽게 안 찍을 까닭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여움’이란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마음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귀엽게 느꼈으면 귀엽게 찍으면 됩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안 귀엽다고 느꼈으면 안 귀여운 그대로 찍으면 됩니다.


  이철승 님은 “모든 아이들이 다 귀여운 것도 아니다” 하고 말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왜 다 안 귀여울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귀엽지 않다면, 아이들 탓일까요?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이들이 안 귀여울까요? 아이들을 착하고 참답게 사랑하지 않을 적에 아이들이 안 귀여운 모습으로 ‘끔찍한’ 모습이 되지 않나요?


  아이들을 어머니 아버지가 살뜰히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종일반으로 집어넣고, 집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지 않다가, 초등학교뿐 아니라 온갖 학원에 몰아넣고서는, 어느덧 대학입시 노예가 되도록 닦달하는 오늘날 우리 어른들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이 나라 아이들은 ‘미운 일곱 살’ 소리를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미운 일곱 살이 되어야 할까요. 아이들이 미운 일곱 살이 되도록 닦달하거나 몰아붙인 우리 어른들 모습을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학원에 얽매이고 텔레비전에 길들며 문제집과 교과서 숙제에 짓눌리는 아이들은 일곱 살이 아닌 열네 살에도 ‘죽은 얼굴’입니다. 그렇지만, 즐겁게 뛰놀고 마음껏 노래하는 아이들은 일곱 살이건 열네 살이건 ‘살아서 숨쉬는 얼굴’입니다.




  《포토닷》 9호에 최연하 님이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골똘해진다” 하고 들려준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 사회를 제대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 모습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내 모습을 제대로 보고 이웃 모습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어른을 제대로 보고 아이들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사람을 재거나 따지면 그릇된 길로 갈 뿐입니다. 아이들을 아이들 결대로 바라보고, 아이들 숨소리와 눈빛을 사랑스럽게 북돋우는 길로 함께 걸어가지 않는다면, 거의 모든 여느 사진가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미운 일곱 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장국현이라는 분은 나무를 함부로 베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제주섬 오름에서 사진을 찍던 김영갑 님은 라면스프 하나를 며칠 동안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서 오름과 하나가 되고 비바람하고 한몸이 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온갖 장비를 이끌고 찾아가야 놀랍거나 멋진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장비는 사진기 하나만 있어도 됩니다.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이웃하고 한마음이 되고 한몸으로 움직일 때에 아름다운 빛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예쁜 넋일 때에 예쁜 빛이 우리 앞에 환하게 솟아납니다. 4347.8.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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