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빨래터에서 읽은 책 2017.10.20.


한가위를 고흥에서 조용히 지내고서 일산에 마실을 다녀오다 보니, 마을 빨래터에 물이끼가 잔뜩 끼어도 치우지 못했다. 마을에서 우리가 아니면 치울 손이 없으니까. 여러 날 바깥마실을 다녀오느라 고단한 몸을 쉬는 틈틈이 ㄱ도의회 공문서를 손질하는 일을 한다. 딱딱하고 어려우며 일본 말씨나 번역 말씨가 가득한 공문서를 손질하자니 눈알이 돌고 등허리가 결린다. 오히려 몸이 더 힘들달까. 즐거운 이야기가 아닌 딱딱한 이야기를 읽으니까. 머리를 쉬고 마음을 풀어 보려고 빨래터에 간다. 이제 바람이 쌀쌀하다며 아이들은 물에 안 들어간다. 물가에서 소꿉놀이만 한다. 혼자 씩씩하게 빨래터 물이끼를 치우고서 쉬려는데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한 말씀. “빨래터 치우셨소? 빨래터를 치우시는 분한테는 이 물에 사는 님이 복을 내려 주시지. 그만큼 복을 많이 받으시지.” 빨래터 담에 걸터앉아서 《내일 새로운 세상이 온다》를 읽는다. 앞으로 다가올 나날을 아이들이 아름답게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엮은 책이다. 한국에서는 우리 앞날을 바라보면서 어떤 일을 하는가? 썩은 정치였기에 대통령을 촛불로 끌어내렸는데, 새로 대통령이 된 이는 평화와 앞날을 어떻게 그리는가? 사드도 핵무기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가? 일본은 후쿠시마가 터진 뒤로 끔찍한 재난을 아직 겪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오래도록 겪어야 하는데, 한국은 얼마나 걱정이 없다면서 핵발전소를 새로 짓는 공사를 그대로 밀어붙일까? 나라님이 할 일은 ‘일자리 만들기’가 아니다. 일자리는 사람들 스스로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나라를 이끄는 이는 앞으로 이룰 아름다운 평화라는 그림을 그려서 펼칠 줄 알아야지 싶다. 정치하는 이들, 대통령뿐 아니라 작은 지자체 공무원도 《내일 새로운 세상이 온다》를 읽어 보면 좋겠다.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어 있는 중심 - 미완의 시학
김정란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326


아직도 문학평론은 속없이 딱딱하기만 한데
― 비어 있는 중심
 김정란 글
 최측의농간, 2017.9.7. 17000원


내가 문학비평을 시작한 이유는 한국 문학비평가들이 시를 너무나 읽을 줄 모른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나는 단지 시를 잘 읽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6쪽)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고, 1990년대 첫무렵에 고등학교를 다니기까지, 시나 소설이라고 하는 문학은 대학교수나 전문 평론가만 다룰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대학교수나 전문 평론가 아닌 사람 가운데 시를 말하거나 소설을 따지는 목소리는 들을 일이 없었어요. 국민학교라는 곳은 이곳대로 교과서 틀로 동시하고 동화를 재거나 따집니다. 중·고등학교라는 곳은 이곳대로 교과서나 참고서 언저리에서 시하고 소설을 가르거나 자릅니다.

  더욱이 매우 어려운 낱말, 거의 다 한자말이나 영어나 프랑스말을 섞은 비평이나 평론만 있어요.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쉬운 한국말로 시나 소설이라는 문학을 다룬 글은 지난날에 거의 찾아볼 길이 없었어요. 이는 오늘날에도 엇비슷하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을 수수한 삶말이나 살림말로 길어올리는 분은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다고 할 만하다고 느껴요.


언어란 얼마나 저절로 그 지시성 이상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것의 수천 년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18쪽)

여성성의 진정한 의미는 성적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52쪽)

‘잘 먹고 잘 살기’의 신화는 절대적인 물질적 부족은 해결했지만, 그 대신 끝도 없는 상대적 결핍감과, 망가져 치유불가능한 환경을 인간에게 안겨 주었다. (58쪽)


  우리는 시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우리는 동시나 동화를, 소설이나 수필을, 숱한 문학을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시집 앞뒤에 붙은 추천글은 숱한 일본 한자말하고 영어를 뒤섞은 전문 비평이나 평론입니다. 비평이나 평론은 도무지 이 땅에 발을 붙이려 하지 않아요. 집에서 마을에서 가게에서 논밭에서 바다에서 골짜기에서 주고받는 말로는 문학도 평론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여기는 한국 사회 흐름이지 싶어요.

  어쩌면 이런 모습은 속 없는 모습일 만합니다.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시끌벅적하다고 할 만합니다. 속살을 가꾸지 않고 쭉정이만 한들거리는 모습일 수 있어요.


고려 속요의 민중적 명랑성은 조선시대 유교 이데올로기 밑에서 질식해 버린다. 그러나 여성이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이 사회에서도 재능 있는 여성들은 숨어서 조용히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가꾸어 왔다. (122쪽)

80년대에 우리는 지독히 불행했다. 그 불행한 시대에 우리는 다행히도 뛰어난 시인들을 얻었다. 그러면 80년대는 위대한 시대이다. 아니다, 이 말은 거짓이다. 80년대에조차 뛰어난 시를 쓴 시인들은 위대하다, 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 (144쪽)


  김정란 님은 시를 시답게 읽고 싶어서 스스로 시를 비평하는 글을 써 보았다고 합니다. 숱한 교수하고 전문가는 도무지 시를 제대로 안 읽는구나 싶어서 ‘남 탓’을 멈추고서 스스로 시를 말해 보려고 했대요.

  시나 소설을 다룬 비평하고 평론이 어렵다거나 뜬구름을 잡는다거나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낄 분은 꽤 많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아예 비평이나 평론하고는 담을 쌓는 분이 많을 수 있어요. 비평이나 평론은 마치 ‘그들끼리 놀며 텃힘을 부리는 앞마당’일는지 모르지요.

  《비어 있는 중심》(최측의농간, 2017)은 문학은 있되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좀처럼 없는 듯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부터는 속·알맹이·속살을 밝히고 싶은 작은 몸짓을 드러내는 비평책 또는 평론책입니다.


양선희는 거침없이 세계를 벗겨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세계를 벗기면서 자기도 벗는다. 세계는 신비롭지 않다. 시인도 신비롭지 않다. (249쪽)

신화는 인간이 자연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고 있었던 지식의 구조이다. (451쪽)


  비평이나 평론을 읽자면 먼저 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문학을 읽지 않고는 누가 들려주는 비평이나 평론을 함께 느끼거나 헤아리기는 어렵거든요. 그런데 잘 쓴 비평이나 평론이라면, 이 비평이나 평론을 읽고서 ‘이 비평이나 평론을 받은 그 문학이 궁금한걸?’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아니, 비평이나 평론이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면, 아직 어느 문학을 만나거나 읽지 못한 이웃들한테 ‘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멋지거나 사랑스러운 문학을 함께 읽어 보면 어떨까요?’ 하고 손을 내미는 글이어야지 싶어요.

  사람들이 다 읽거나 널리 읽은 작품을 놓고서 쓰는 비평이나 평론을 넘어서, 아직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가까이하지 못한 문학을 비평가나 평론가 스스로 캐내어서 가장 쉬운 말과 아주 부드러운 말씨로 조곤조곤 속삭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비평도 글이에요. 평론도 글이지요. 시나 동화나 소설만 글이 아닙니다. 비평이나 평론도 글이면서 문학이에요. 낯선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는 좀 접어놓고서, 어렵거나 딱딱한 일제강점기 냄새를 풍기는 일본 말씨하고 번역 말씨는 부디 내려놓고서, 싱그러이 살아서 펄떡이는 수수한 삶말이나 살림말을 찾아서 쓰는 글이 비평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따사로운 손길로 보듬는 사랑말로 들려주는 글이 평론이 되어야지 싶어요.


일은 일어난다. 그대가 사물에게 영혼을 부여하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를 조종하는 모든 끈들을 끊어버린다. 우리는 세계 앞에서 작은 초인들로서 일어선다. 배경은 여전히 좌절이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그것을 존재의 상승을 위한 도약대로 사용할 줄 아는 것이다. (467쪽)


  오랜만에 새옷을 입고 《비어 있는 중심》이 다시 태어납니다. 묵은 평론책이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라면 새로운 평론책이 그다지 눈에 안 뜨인다는 소리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직 한국 문학에서 평론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소리일 수 있어요.

  복판이라고 하지만 텅 비어 복판 구실을 못하는 문학이나 평론이 아닌, 복판에서는 복판대로 알맹이 구실을 하고, 바깥이나 언저리에서는 바깥이나 언저리대로 살가운 이야기꽃이 흐드러지는 문학이나 평론이 자랄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아이들 입이랑 몸에서 터져나오는 웃음노래 같은 어린이문학이 깨어나고, 어른들 손이랑 발에서 길어올리는 사랑노래 같은 어른문학이 피어나면 좋겠어요. 비평은 웃음노래를 먹으면서 자라고, 평론은 사랑노래를 마시면서 크겠지요. 2017.10.2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가, 하늘가에서
마틴 프로스트 요가.글,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 사진 / 눈빛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마다 삶이 다르고, 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 누구는 환한 기쁨을 사진으로 찍을 만하고, 누구는 뼛속까지 시린 아픔을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 하늘가에서 요가를 하는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어디에서나 새로운 몸짓을 찾으려 한다. 스스로 하늘이 되려 하면서 하늘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멸의 그대에게 3
오이마 요시토키 지음, 김동욱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731



어떤 너로 살고 싶니

― 불멸의 그대에게 3

 오이마 요시토키 글·그림

 김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2017.8.31. 5500원



“아아, 걔, 린이란 이름이구나. 다행이다. 살았나 봐.” (18쪽)


“모른다는 건 어찌 보면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절망하지 않아도 되니까.” (31쪽)


“네가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 시간은 너라는 인간을 한층 더 깊은 맛을 지닌 인간으로 만들어 줄 소중한 시간이라 이거다.” (44쪽)


“네가 괴물이든 인간이든,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거든. 생각해 봐. 어느 쪽이든 다 너잖아? 모든 걸 드러내고 있는 너나, 꼭꼭 감추고만 있는 너나, 난 어느 쪽이든 다 이상하고 다 좋은데 말이야. 그게 너. 너는 너야.” (128쪽)



  제대로 들여다보기 때문에 마음이 아플 수 있어요. 그런데 제대로 들여다보며 마음이 아픈 터라, 이 아픔을 씻거나 털려고 일어설 수 있지요.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을 적에는 아픔도 살짝 비껴서거나 먼발치에서 볼 뿐이라, 정작 제대로 아프지 않기 마련이니, 이 아픔을 씻거나 털어서 일어날 마음을 끌어내지 못하곤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플 적에 아픔을 볼 수 있는 마음이어야, 기쁠 적에 기쁨을 볼 수 있어요. 슬플 적에 슬픔을 또렷이 마주할 수 있는 몸짓이어야 즐거울 적에 즐거움을 한껏 북돋울 수 있어요.


  만화책 《불멸의 그대에게》 셋째 권에서는 ‘아픔’하고 ‘나(너)’라는 두 가지를 맞대면서 어떻게 마주하려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저 비껴서거나 물러서거나 달아낼 생각인지, 아니면 씩씩하게 맞붙어서 스스로 새롭게 일어서려 할 생각인지 물어요.


  우리는 어느 길을 가면 될까요? 우리는 어느 길에 서며 즐거울까요? 오늘은 좀 고되거나 벅찰 수 있어요. 눈치를 받으면서 괴로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자꾸 꺼리거나 등을 돌리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나아갈 아름다운 새길을 못 보거나 못 만날 수 있습니다.


  나를 바로보고 내 이름을 바로 말합니다. 나를 아끼고 내 삶을 가꿉니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죽지 않아요. 2017.10.2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마당에서 읽은 책 2017.10.18.


장만한 지 얼추 보름쯤 되는 그림책이 마루에 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보름이 지나도록 이 그림책에 눈길을 안 두더니, 드디어 아버지한테 묻는다. “아버지, 이 그림책 봐도 돼요?” “그래. 아직 아버지가 그 그림책에 적힌 말을 안 고쳤지만 보고 싶으면 보렴.” 큰아이가 이렇게 묻기까지 보름을 기다렸네. 어떤 그림책이냐 하면 《오늘은 여왕님 만나는 날!》. 책이름에 웬 ‘여왕님’이라고 고개를 저을 이웃님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이 그림책을 무릎에 얹어서 한 쪽씩 펼치다 보면, 어느새 풍덩 빠져들면서 환하게 웃음을 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집 큰아이도 환한 웃음을 이 그림책에서 마주했을까? 아무렴.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