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시외버스에서 읽은 책 2017.11.28.


아침 일찍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가려는 길. 마을 어귀에 할머니 네 분이 모이셨다. 한 분은 면소재지로, 세 분은 읍내로 가신다. 여든 안팎인 나이로 접어들면서 뼈마디 어느 곳도 안 쑤신 곳이 없어서 기어다니신다는 할머니 말씀을 듣는다. 이러면서도 흙일을 쉬지 않으신다. 읍내 병원에 가서 진통제를 맞고 또 일하실 생각이라고 하신다. 옆에 있는 할머니는 이제 그만 일하라고 지청구를 한다. 여태 그토록 뼈빠지게 일했으면 쉴 줄 알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나는 어제부터 몸살을 앓는다. 몸살을 앓지만 경기도의회 공문서 손질을 마지막으로 더 해서 줄거리를 갈무리하는 일까지 더 해낸다. 밤을 샌다. 그러나 밤을 새우며 ‘글손질’만 했기에, 시외버스에서 끙끙 앓으며 쉰 뒤에 서울에 닿아 찻집에 들어 코코아를 두 잔째 들이켜면서 ‘띄어쓰기’ 길잡이글을 적어서 보낸다. 아, 이제 다 끝났나? 오늘은 시외버스에서 《기지 국가》를 먼저 읽는다. 여러 날째 조금씩 읽는 책이다. 매우 아프면서 슬픈 이야기를 다룬 인문책이다. 이제 이런 책이 한국말로 나올 수 있으니 대단하구나 싶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이가 이 책을 알아보려나 싶기도 하다. 나는 《기지 국가》를 2017년 올해 으뜸책으로 삼고 싶다. 150쪽 가까이 읽고서 다른 책을 꺼낸다. 《새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책으로, 이 책을 빚은 분은 오랫동안 ‘자연과생태’ 잡지에 ‘새를 지켜보는 일’을 글하고 그림으로 실었다고 한다. 시외버스에서 진땀을 흘리고 끙끙 앓으면서도 《새를 기다리는 사람》을 거의 다 읽어낸다. 글도 그림도 따스하다. 참 아름답네. 이런 이쁜 글하고 그림을 여태 꽁꽁 숨겼다가 펼치셨네. 아픈 몸을 깨어나게 북돋우는 멋진 책이다. 책에 살그마니 입을 맞추었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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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앨리스 민음의 시 237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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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2


겨울에 외려 반지하집에 햇살이 듭니다
― 반지하 앨리스
 신현림 글
 민음사, 2017.7.21. 9000원


토끼 굴에 빠져든 백 년 전의 앨리스와
돈에 쫓겨 반지하로 꺼져 든 앨리스들과 만났다 (반지하 앨리스)

내 눈물은 빚더미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내 발은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익히고
내 길은 무엇을 잘못했나 살핀다 (사랑 밥을 끓이며)


  시를 쓰는 신현림 님은 언제부터인가 반지하를 떠도는 살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젊은 나이가 아닌, 딸아이를 돌보면서 쉰 한복판을 지나는 나이에 반지하집을 떠돌면서, 삶이란 이렇게 쓴맛 신맛 매운맛인가 하고 느낀다지요.

  시집 《반지하 앨리스》(민음사, 2017)는 꿈나라를 누비는 ‘앨리스’가 아닌 반지하를 떠도는 앨리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앨리스처럼 살고 싶던, 앨리스와 같은 꿈을 키우고 싶던, 궁금한 것도 많고 싱그러운 사랑도 오롯이 품던 한 사람은 매우 고단한 벼랑길이나 가시밭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시도 성서도 안 읽기에
영혼 부패 속도는 더욱 빨랐다
책이 방부제인 줄 모르고, 곰쓸개, 개고기를 찾으며
개소리나 하는 남자는 바다 세탁소를 영영 잊었다
구하지 않으므로 바다는 출렁이지 않았다 (사랑을 잊은 남자)

사내 냄새는 맡고 살아야지 하고는 일하다 잊었다
해를 담은 밥 한 그릇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쌀 한 줌은 눈송이처럼 얼마나 금세 사라지는지
살아가는 일은 매일 힘내는 일이었다 (가난의 힘)


  어떤 이웃님은 어릴 적부터 반지하집에서 태어나 여태 반지하집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이웃님은 마당 있는 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느새 반지하집으로 옮겨서 살 수 있어요. 어떤 이웃님은 한동안 반지하집에서 살다가 마당 있는 집으로 옮겨서 살 수 있고요. 그리고 반지하집조차 못 되는 쪽방에서 사는 이웃님이 있고, 쪽방조차 깃들 수 없어 한뎃잠을 이루는 이웃님이 있습니다.

  반지하집이란 지하집보다는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저는 반지하집에도 지하집에도 살아 보았는데, 반지하집은 그나마 햇살이 반 조각 즈음 들어오면서 하루가 흐르는 결을 느낄 수 있어요. 이와 달리 지하집은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하집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새벽이나 저녁에도 눈이 부시더군요. 마치 두더지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길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은 ‘지하집에 살던 나’하고는 아주 딴 나라에 사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반지하집하고 지하집을 떠돌다가 옥탑집으로 옮겨서 산 적이 있어요. 드디어 낮에 불을 안 켜고 살 수 있구나 싶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비록 여름에는 불같이 덥고 겨울에는 오지게 추운 옥탑집이지만, 환한 햇빛을 누리며 빨래를 널거나 이불을 말릴 수 있으니 참으로 느긋하구나 싶었고, 앞으로는 반드시 마당 있는 집에서 해를 듬뿍 누리자는 꿈을 키웠어요.


금수저인 어린 날 10년이 있었고
지금은 흙수저라고 당신이 말할 때
나는 바람수저라 말한다 (절망의 옷을 벗겨 줘,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3)


  반지하 앨리스가 된 시인 아주머니는 금수저로 어린 날을 보내다가, 흙수저인 오늘날을 보낸다는데, 이녁 삶이란 문득 바람수저와 같다고 느낀다고 밝혀요. 바람수저. 바람수저. 새삼스러운 이름을 혀에 얹어 봅니다. 바람처럼 살아가는 나날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바람이 되어 하늘을 날고, 바람과 같이 온누리를 푸르게 감싸는 숨결을 떠올립니다.

  가진 것이 없기에 빈털털이라 할 수 있지만, 가진 것이 없으니 홀가분하다고 할 수 있어요. 홀가분한 몸이나 살림이나 마음이라면 참말로 바람 같을 터이니 바람수저가 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숱한 길을 걸어 보면서 숱한 마음이 되어 봅니다. 숱한 삶을 치르면서 숱한 눈길을 키웁니다. 숱한 가시밭길을 새삼스레, 늦깎이에도, 힘겹게 걸어야 하면서, 이 삶이란 어떤 바람결인가를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길마다 새롭게 배우며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면서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는 마음이 될 수 있어요.


은행도 없던 시절 시골 약사였던 엄마는
환자 고쳐 버신 돈을 늘 신문지에 싸서 두셨다
통일되면 외가 식구 나눠 주려고 모으셨다

돈은 때로 사람을 찌르는 흉기인데
나누려는 돈은 따스하고 말랑말랑했다

엄마 돌아가신 후 발견한
먼지 가득한, 그 슬픈 돈뭉치 (이산가족을 찾는 긴 여행, 엄마를 기리며)


  포항에서 매우 큰 지진이 났고, 나라에서는 수능 시험을 이레 늦추었습니다. 대학시험을 앞둔 푸름이는 이레 동안 더 마음을 졸여야 했고, 이제 대학시험을 지나면서 홀가분한 벗님이 있을 테고, 오히려 마음이 무거운 벗님이 있을 테지요. 대학교를 눈앞에 그릴 수 있는 푸른 벗님이 있을 테며, 대학교는 그만 더 멀어진 푸른 벗님이 있겠지요.

  고등학교를 마치면서 바로 대학교에 가도 좋은 삶길입니다. 대학시험을 한두 차례나 서너 차례나 너덧 차례 더 치러서 대학교에 가도 좋은 삶길입니다. 그만 대학교 문턱을 밟을 수 없이 사회로 나아가도 좋은 삶길입니다. 대학교를 처음부터 바라보지 않은 채 당차게 새로운 길로 나아가도 좋은 삶길입니다.

  어느 삶길을 걷든 푸른 벗님은 새로운 하루를 배웁니다. 단맛을 보면 단맛을 배워요. 쓴맛을 보면 쓴맛을 배우지요. 단맛 쓴맛 고루 보면서 우리를 둘러싼 숱한 이웃이나 동무를 새롭게 바라보거나 느낄 수 있습니다. 신맛 매운맛까지 보는 동안 우리 곁에 있는 아프거나 슬프거나 외로운 이웃이나 동무를 더욱 깊거나 넓게 살피거나 헤아릴 수 있습니다.


좋은 집에서 살기를 더는 꿈꾸지 않는다
욕조에서 글 쓴 나보코프
부엌에서 글 쓴 하루키
쫓기면서 시 쓴 아흐마토바
창녀촌 아랫방서 글 쓴 마르케스
거울을 가진 그들에게 위안을 갖는다
반지하 방에 살아도
거울 알이 있기 때문이다 (거울 알)


  시집 하나 함께 읽어 봐요. 드디어 대학시험을 마친 푸른 벗님도, 삶에서 벼랑끝에 내몰린 이웃님도, 고단하거나 씁쓸한 살림이 그치지 않아 그저 캄캄한 앞날만 보이는 이웃님도, 아침마다 새로 뜨는 해님을 바라보면서 시집 하나 함께 읽어 봐요.

  마음을 새로 가다듬으면서 시를 읽어요. 마음을 곱게 추스르면서 시를 읽어요. 마음을 찬찬히 북돋우면서 시를 읽어요.

  시를 읽다가 웃음을 지어도 좋고, 눈물을 지어도 좋습니다. ‘나도 내 기쁨이나 슬픔을 시로 써 봐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서 연필을 쥐고 공책을 펴도 좋습니다. 오늘 하루를 가만히 그리면서 함께 시를 읽어요.


당신이 곁에 없어도 당신을 느낀다고 쓰니
식탁으로 햇살 설탕이 쏟아졌다
아무도 없어도 나 혼자가 아니었다
자꾸 창을 열어 보라고 바람이 불었다 (햇살 설탕)


  11월이 저물고 12월이 찾아들면, 햇살꼬리는 더 늘어집니다. 제가 깃든 고흥 시골집 대청마루로 첫겨울 햇살꼬리가 길게 스며들어요. 종이를 바른 문으로 아침볕이 퍼집니다. 여름에는 높던 해가 겨울에는 낮아지면서 온 집안에 아침저녁으로 포근한 볕살을 나누어 줍니다. 겨울에 낮아지는 볕살이기에 대청마루를 거쳐 방문에까지 볕살이 퍼지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 여름에는 반지하집에 그야말로 햇살이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오히려 겨울에는 해가 길게 누우면서 반지하집에도 살몃살몃 햇살이 스미더군요. 추운 겨울에 뜻밖에도 반지하집에 조그마한 햇살이 퍼지며 살짝 포근한 볕까지 퍼져요.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쐽니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습니다. 이 겨울에 모든 이한테 고루 찾아드는 해님처럼, 마음에 빛이 되는 시를 한 줄 읽어 봅니다. 2017.11.27.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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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외버스에서 읽은 책 2017.11.25.


진주에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을 읽는다. 진주문고에서 장만한 책. 진주서 순천을 거쳐 고흥으로 돌아가기에 여러 가지 책을 더 챙겼으나 막상 이 하나만 읽는다. 이 책은 사진가방에 넣었고, 다른 책은 큰 짐가방에 넣었다. 큰 짐가방을 아무 생각 없이 짐칸에 놓고 나서 나중에 알아차렸다. 아차, 책 하나만 달랑 챙겨서 자리에 앉다니! 이런 바보스러운 짓을! 순천에서 고흥 가는 시외버스로 갈아탈 적에는 표를 끊고 시계를 보니 14시 59분. 어라 고흥 들어가는 버스가 1분 뒤에 있잖아? 헐레벌떡 밖으로 나가서 짐칸에 다시 짐가방을 놓고 자리에 앉는다. 다른 책은 꺼낼 겨를도 없이. 세 시간 즈음 시외버스를 달리면서 책 하나만 손에 쥐니 읽을거리가 없어 아쉬웠으나,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에 흐르는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보았다. 책이란 우리 삶에서 어떤 몫을 맡을까? 책은 아픈 마음을 얼마나 달래고, 아픈 마음을 책으로 달랜 사람은 얼마나 새롭게 기운을 끌어내어 하루를 곱게 지을 만할까? 책이 늘 모든 사람을 달래 주리라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숲에서 온 나무로 빚은 책에 흐르는 이야기를 맞이할 줄 아는 마음이라면, 구름을 이끄는 바람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가을잎을 살랑이는 노래도 고스란히 책이라는 대목을 받아들일 만하리라 본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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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밥하면서 읽는 책 2017.11.26.


엊저녁에 큰아이한테 읽힌 그림책 《이상해!》를 아침밥을 짓기 앞서 가만히 되읽어 보았다. 바닷물고기를 사진으로 찍는 이모 이야기를 따라서 아이한테 성평등이란 무엇인가를 매우 부드러우면서 슬기롭게 보여준다. 부드러우면서 슬기롭고, 쉬우면서도 아름답게 들려주는 이야기란 얼마나 멋진가. 어른들 인문책은 으레 딱딱하거나 날카롭다면, 아이들 그림책은 이렇게 따사로우면서 부드러이 이야기꽃을 지피니 늘 새삼스레 놀란다. 저녁을 짓는 동안 시집 《나는 점점 왼편으로 기울어진다》를 읽는다. 저녁밥은 큰아이가 냄비에 불을 올려 주었다. 훌륭하다. 큰아이는 아직 밥물을 잘 맞추지 못하지만, 자꾸자꾸 하다 보면 냄비밥 물을 얼마쯤 맞추어야 하는가를 몸으로 배우리라. 손에 물을 거의 안 묻히면서 저녁을 짓다 보니 느긋하게 시집을 읽을 수 있다. 좋구나. 이런 날도 맞이하네. 그림책 《이상해!》를 보면 맨 끝에 ‘아기 업고 돼지고기튀김을 차려 주는 이모부’ 모습이 나오는데, 이제껏 거의 이런 모습으로 살림을 지어 오다가, 아이들 손길을 받으며 느긋하게 밥을 지으니, 잘 자라는 아이들이 참으로 고맙다. 《나는 점점 왼편으로 기울어진다》에 깃든 삶노래 가운데 ‘열무장수’ 이야기가 살갑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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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해! 모두가 친구 16
나카야마 치나츠 지음, 야마시타 유조 그림, 고향옥 옮김 / 고래이야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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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73


아기 업고 앞치마 두른 이모부가 아리송하니?
― 이상해!
 나카야마 치나쓰 글·야마시타 유조 그림/고향옥 옮김
 고래이야기, 2009.10.25. 9500원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한테 “왜 아버지가 밥을 해?” 하고 묻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할머니 할아버지네에 나들이를 갈 적에 “왜 할머니가 밥을 해?” 하고 묻지도 않아요.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아버지이자 사내인 제가 밥을 합니다. 빨래도 그렇고, 비질이나 걸레질도 그렇지요. 이러면서 아이들이 밥짓기를 거들고, 빨래나 비질이나 걸레질도 아이들이 함께 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랑 같이 김치를 담급니다. 나무를 톱으로 켜서 뭔가를 짤 적에도 다 같이 해요. 힘을 써야 하는 일이라 해서 사내만 하지 않습니다. 집안일이기에 사내가 멀리할 까닭이 없습니다. 바느질도 뜨개질도 다 함께 둘러앉아서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이 “이상해!”라든지 “아리송해!” 같은 말을 외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일이 없네요.


이모는 엄마의 여동생이지만
우리 엄마랑 하나도 닮지 않았어.
내가 물었어.
“이모, 이모, 왜 화장 안 해?
여자인데. 이상해.”
“화장 안 한 얼굴이 예뻐서.” (2쪽)

나는 다시 물었어.
“이모, 이모, 머리가 왜 그렇게 짧아?
남자 같아. 이상해.”
“난 짧은 게 좋아.
바다에 들어갈 때도 편하고.”
우리 이모는 수중 카메라맨이야. (3쪽)


  그림책 《이상해!》(고래이야기, 2009)를 폅니다. 이 그림책은 얼굴에 화장가루를 안 바르고, 머리카락을 짧게 치며,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사진을 찍는 ‘이모’가 아이들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저희 어머니하고 달라도 너무 다른 이모를 보면서 자꾸자꾸 묻습니다. 이러면서 늘 토를 달지요. “이상해!” 하고요.

  그런데요, 무엇이 아리송할까요? ‘이상하다’란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사전을 뒤적여서 ‘이상하다(異常-)’를 찾아봅니다. 한자말입니다. 뜻은 세 가지 나오고, “1. 정상적인 상태와 다르다 2.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르다 3.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다”라 합니다.

  첫째 뜻을 보니 ‘정상하고 다르다’라 하는데, ‘정상(正常)’은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라 하는군요. ‘특별(特別)’은 “보통과 구별되게 다름”을 뜻한대요. 그러니 첫째 뜻은 “여느 자리하고 가를 만큼 다르지 않고 제대로”라는 소리입니다. 둘째 뜻은 ‘색다르다(色-)’라 하고, 이는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보통의 것과 다른 특색이 있다”를 가리킨대요. 셋째 뜻은 “믿을 수 없거나 알 수 없다”를 가리킨다는군요.

  하나하나 살피면 ‘이상하다!’고 할 적에는 ‘다르다!’고 말하는 셈이고, 때로는 ‘제대로가 아니다(정상이 아니다)’라 하는 셈입니다.


이모는 여러 물고기들에 대해 얘기해 주었어.
“보렴, 얘는 흰동가리란다.
흰동가리는 어릴 땐 모두 남자야.”
“뭐라고?”
“그중에서 가장 크게 자란 녀석이 여자가 돼.”“뭐라고? 이상해!”

그때 가장 조그만 흰동가리가 나에게 말을 하지 뭐야.
“너도 크면 여자가 될 수 있어.”
“뭐라고?
아냐. 아냐. 나는 아무리 커도 여자가 될 수 없어.
그러자 흰동가리가 휘익 재주를 넘고는 말했지.
“뭐라고? 이상해!” (9∼10쪽)


  그림책 《이상해!》에 나오는 이모는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속으로 들어갑니다. 아이들은 얼결에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가는데, 바닷속에서 온갖 물고기를 만나요. 아이들은 어느새 물고기하고 말을 섞는대요. 그리고 바다에서 만나는 물고기마다 아이들을 보며 “이상해!” 하고 외친대요.

  바다에서 오히려 아이들이 “이상해!” 소리를 들어요. 아이들은 물고기한테서 “이상해!”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 줄어듭니다. 할 말이 없어요. 아이들은 그동안 집이나 학교나 마을에서 보거나 들은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머리에 심었는데, 이러한 생각이 아이들로서는 뜻밖에도 “이상해!” 소리를 들을 만한 줄 처음으로 느낍니다.

  사회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또는 선입관이나 편견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이들은 처음부터 사회의식이나 선입관이나 편견이 없었으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집이나 마을이나 학교에서 차츰차츰 사회의식이나 선입관이나 편견을 쌓았다고 느껴요.

  자, 생각해 봐요. 여자라면 반드시 화장을 해야 할까요? 여자라면 꼭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야 할까요? 여자라면 어김없이 치마를 둘러야 할까요? 여자라면 집에서 부엌을 지키며 밥만 해야 하나요? 여자라면 집안을 쓸고 닦고 치우는 일을 도맡아야 하나요?

  남자라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남자라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면 안 될까요? 남자라면 치마를 두르면 안 될까요? 남자라면 부엌에는 코빼기도 안 비추어야 할까요? 남자라면 빗자루도 걸레도 안 만져야 할까요?


이모부가 앞치마를 두르고,
아주 맛있는 돈가스를 해 주었어.
아기를 업고 말이야. (31쪽)


  이모하고 바닷속을 한참 누비던 아이들이 이모네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이들은 밥상에 둘러앉습니다. 이모는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모부가 아기를 업고서 맛난 밥을 차려 줍니다. 자, 아이들은 이모부한테 한 마디를 하려나요? 아이들은 아직도 이모나 이모부한테 “이상해!”나 “아리송해!” 같은 말을 하려나요?

  아니면 이제부터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또는 다른 생각을 하거나 새로운 마음을 품으면서, 함께 삶을 사랑스레 짓는 슬기로운 꿈을 품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저는 그림책 《이상해!》를 아이들하고 읽으면서 이 아이들을 업고서 밥을 하던 지난날을 즐겁게 돌아봅니다. 참말로 저는 아이들을 업고 안으면서 밥을 지었고, 아이들을 도맡아 입히고 씻기고 재웠어요. 둘레에서는 다들 저를 보며 “이상해!” 하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빙그레 웃으면서 “누구나 밥을 하면 돼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즐겁게 밥을 하고 살림을 가꾸면 돼요. 함께 짓고 함께 가꾸면 함께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돼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2017.11.26.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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