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의 비밀 알맹이 그림책 37
공문정 글, 노인경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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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는 놀이를 다루네. 아이가 밥 한 접시를 앞에 놓고서 얼마나 신나게 꿈나라를 누비는가를 그리네. 그런데 밥은 어머니만 짓는구나. 아버지가 짓는 밥도 나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짓는 밥도 나오며, 아이가 손수 짓는 밥도 나오면 한결 재미나리라 생각해 본다. 아무튼 빛결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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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최종규 글.사진, 사름벼리 그림 / 스토리닷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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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누리신문 오마이뉴스에 올리려고 씁니다.

시민기자 가 손수 쓴 책을

다른 사람 소개 아닌 스스로 소개하는 꼭지가 있어요.

아마 어쩌면 아무래도

글쓴이가 글쓴이 책을 가장 잘 말할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하고 짝꿍책입니다.

이 글을 너그러이 읽어 주시면서

두 가지 책을 넉넉히 사랑해 주시면 좋겠어요.

모두 고맙습니다.

모두 사랑해요! 


+ + +


살림하는 아버지가 사랑을 아이한테 가르쳐요

[책이 나왔습니다] 아이랑 살며 배운 사랑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참말로 쓰고 싶은 책을 드디어 썼습니다. 2017년 한 해에만 다섯 권에 이르는 책을 썼는데, 이 가운데 12월 첫무렵에 태어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스토리닷, 2017)은 지난 열 해를 통틀어 가장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새로 짓는 길을 걷기에, 언뜻 보기로는 저한테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2016)이나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2017)이나 《읽는 우리말 사전 1·2》(2017) 같은 책이 더없이 뜻있는 책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하고 살림을 함께 지으며 살아온 지난 열 해를 통틀면서 다른 어느 책보다 ‘아이들을 만나서 삶을 새롭게 바라보고 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걸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여느 ‘육아일기’를 쓸 마음은 없어요. 제가 쓰고픈 이야기는 ‘살림노래’입니다. 고된 육아나 힘겨운 집안일 이야기가 아닌, 아이를 낳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보듬고 돌보는 동안 새롭게 배운 이야기란 늘 노래처럼 제 삶을 곱게 북돋아 주는구나 하고 느껴서, 이 이야기를 살림노래를 쓰고 싶었어요.



이 땅 모든 사내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보세요, 우리 사내들, 이녁은 김치를 먹나요 안 먹나요? 김치를 먹는다면, 그대는 김치를 담그나요 안 담그나요? 김치를 먹는 그대들은 김치를 담글 줄 아나요 모르나요? 김치를 좋아하는 그대는 소매 걷어붙이고 즐겁게 김치를 담그는가요 안 담그는가요? (31쪽)


집 바깥자리에서 큰 이름을 드날린다고 하더라도 집 안자리에서 살림을 거느리지 못할 적에는 반토막이 된다고 느끼며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밥하기도 배우시고 김치 담그기도 배우시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그보다 저 스스로 이런 안살림을 차근차근 잘 익혀서 해 보고 나서 말씀을 여쭙자는 마음입니다. (39쪽)



  저는 김치를 담근 지 몇 해 안 됩니다. 아마 큰아이가 일곱 살 무렵까지 김치를 안 담그고 살았지 싶습니다. 이제는 틈틈이 김치를 담가요. 지난날에는 제가 매운김치를 못 먹기 때문에 안 담갔다면, 이제는 ‘안 매운김치’를 담그면 되는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아 김치를 담급니다.


  참 더디게 깨닫지요? 매운김치를 못 먹으면 안 매운김치를 담그면 되었을 텐데요. 그리고 제가 김치를 못 먹더라도, 찬국수를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곁님이나 아이들을 더 헤아리는 살림이라면 훨씬 진작부터 김치 담그기나 살림짓기를 더 씩씩하게 했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러면서 배운 대목이 있어요. 왜 사내라는 사람은 이렇게 핑곗거리가 많아서 뭐를 못 하거나 뭐를 안 하는가를 가만히 되새겼습니다. 저를 낳은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지은 살림을 되새기면서, 학문으로는 훌륭할는지라도 집안일은 한 가지조차 못하던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았어요.


  우리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저는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곧잘 적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아버지는 ‘남이 해 주는 밥’만 먹고 사신 터라, 스스로 밥을 지을 줄 모르십니다. 이뿐 아니라 혼자서 라면을 끓여서 드실 줄도 모르셨어요.



아이들한테 하나하나 맡겨 봅니다. “자, 작은 도마를 꺼내고 작은 칼을 꺼내 보세요. 한 사람씩 오이를 썰어 봐요.” “누나가 오이를 썰면 동생은 토마토를 썰어 봐.” “스스로 먹을 만큼 주걱으로 밥을 푸세요.” “어머니 수저를 누가 챙겨 줄까?” “밥상을 펴면 행주로 잘 닦아 주세요.” (43쪽)


저희가 아이들한테 물려주려고 하는 땅은 그냥 땅이 아닌 ‘숲 보금자리’나 ‘보금자리 숲’입니다. 숲이 될 보금자리, 또는 보금자리가 될 숲을 아이들이 물려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차근차근 가꾸지요. (52쪽)



  흔히들 말하기를, 밥은 못 할 수 있더라도 어떻게 라면도 못 끓이느냐고 물을 만해요. 이때에 저희는 아이들을 보며 새삼스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많이 어릴 적에는 밥은커녕 라면도 못 끓여요. 아이들은 밥상에 버젓이 밥하고 국하고 반찬이 있어도 손수 수저를 챙겨서 밥을 먹으면 배가 안 고프다는 대목을 모르기 일쑤입니다.


  아직 아이들은 매우 어리고 철이 덜 들었기에 코앞에 있는 먹을거리를 못 알아봐요. 게다가 노느라 바쁘고, 놀이가 좋은 나머지, 배고픈 줄을 늘 잊기까지 합니다. 이는 어른도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내로라하는 숱한 ‘남성 지식인·남성 정치인·남성 고위 공무원’ 가운데 밥할 줄 알거나 김치 담글 줄 아는 사내는 몇이나 될까요? 아기가 울 적에 어떻게 안아서 달래며 자장노래를 불러야 하는가를 아는 사내는 몇이나 될까요? 천기저귀를 어떻게 접어서 아기 샅에 대어야 아기가 좋아하는가를 몇 사내쯤 알까요? 천기저귀나 행주나 걸레는 어떻게 삶고 말려야 하는가를 몇 사내쯤 알려나요?



제가 열한 해째 곁님 핏기저귀를 삶고 헹구면서 살아온 바탕에는 이런 뜻이 있어요. 비록 저 한 사람 몸짓이라 하더라도, 작은 한 사람 몸짓으로 살림을 조금씩 가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 집 두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손으로 가꾸거나 지어서 흙을 보듬는 살림을 물려받을 수 있을 테고요. 시골에서도 서울에서도 기저귀 빨래가 따사로운 볕을 받고 싱그러운 바람을 쐬면서 눈부시게 춤추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집집마다 빨랫줄을 걸고서 즐겁고 아름답게 옷살림을 다스리는 새로운 모습을 그려 봅니다. (77쪽)



  그렇다고 제가 이 모두를 처음부터 잘 알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저한테 아이들이 찾아오기 앞서까지 ‘머릿속 성평등주의자’로 살았어요. 아이들이 찾아오고 나서는 ‘머릿속 성평등주의자’를 몽땅 내려놓았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온몸으로 사랑님’이 되어야 한다고 깨달았어요.


  곁님 어머니한테서 천기저귀 접기를 배웠습니다. 마을 할머니한테서 천기저귀를 얻었습니다. 곁님한테서 핏기저귀를 삶아서 말리고 건사하는 길을 배웠습니다. 바깥에서 밥을 사다 먹거나, 이웃집에 마실하여 밥을 함께 먹을 적에는 으레 어깨너머로 반찬하기를 살피거나 이모저모 여쭈면서 집에서 스스로 해 보곤 했어요.


  제가 못 먹는 밥이 있더라도 아이들이 맛을 볼 수 있도록 지어서 차려야 하는구나 하고 배웠어요. 저는 참말 못 먹지만 아이들은 맛나게 잘 먹는 반찬이 있네 하고 깨달으면서,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거나 물려줄 적에 서로 즐겁고 슬기로운가를 비로소 헤아렸습니다.



대학 교육 네 해에 들일 돈으로 책을 사서 읽는다면, 거의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어요. 엄청나답니다.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돈을 스스로 책방에 가서 책을 골라서 읽고, 이렇게 읽어서 모은 책으로는 저마다 마을도서관을 열 수 있지요. 네 해에 걸쳐 사오천만 원에 이르는 돈으로 책을 읽어서 모아 두었으면, 앞으로 이 책으로 헌책방이나 마을책방을 열 수 있기도 해요. 마을도서관도 열 수 있지만, 스물네 살 젊은이 나름대로 새롭고 재미나게 멋진 책방을 열 만해요. (83쪽)



  아이들을 낳아서 돌보는 어버이로, 아버지로, 어른으로 살기 앞서, 저한테는 늘 한 가지만 있었어요. 혼자서 오랫동안 살면서 책만 사고 책만 읽고 책만 건사했습니다. 곁님이나 아이들이 저한테 오기 앞서인 2007년 봄에 인천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열었는데요, 이 사진책 도서관은 이제 ‘사전 짓는 책숲집 + 숲놀이터’로 거듭난 모습으로 전남 고흥에서 잇습니다만, 예전에는 그저 책만 아는 어리보기였습니다.


  그래도 책 한 가지에 사로잡힌 채 살면서 배우거나 얻은 깨달음도 있어요. 이를테면 대학교 졸업장을 거머쥐지 않고도 책으로 얼마든지 삶이나 사회를 배울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장만으로도 스물여섯 살에 ‘국어사전 집필을 도맡는 편집장’ 일을 했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나 단체에 아무런 줄이나 끈조차 없었지만, 2003년 여름에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는, 이오덕 어른을 기리면서 쓴 원고종이 1000장에 이르는 글 하나를 쓴 터라, 이 글이 징검돌이 되어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하고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았지요. 스물아홉 살 적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아닌, 오직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갈고닦은 앎 하나로 국립국어원에서 강사 노릇도 해 보았고, 한글학회나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글문화연대나 경기도청에서 맡기는 ‘공공언어 순화’ 같은 일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터라, 어떠한 졸업장이나 자격증도 부질없는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 새롭게 길을 닦으면서 살아가면 되더군요. 스스로 깊고 넓게 파헤치면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슬기로운 몸짓이 되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고요.



저는 갓 스물이 넘을 무렵 ‘스무 살까지 학교를 다니며 배운 모든 것은 아무 쓸모가 없네’ 하고 느꼈어요. ‘스무 살까지는 학교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을 쓸모없이 가르쳤구나 하고 몸으로 아로새긴 나날이었네’ 하고도 느꼈어요. 저로서는 스무 살 적부터 0살이라고 생각했어요. 스무 살 나이를 모두 버리고, 그때부터 스스로 0살이니 처음부터 모조리 새로 하자고 다짐했어요. (105쪽)



  곁님을 만나서 함께 살림을 짓는 동안 날이면 날마다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은 주제에 어쩜 이 쉬운 살림은 이다지도 모르느냐는 꾸지람에 지청구에 나무람에 …… 참으로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스무 살부터 마흔 살까지는 책으로 배운 살림이었다면, 마흔 살부터는 스스로 0살이라 여기면서 살림으로 살림을 배우자는, 온몸으로 손수 짓는 살림길을 걸으면서 새롭게 살림을 배우자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합니다.


  요즈막에는 곁님이 저를 나무라면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마디 해요. “자, 자, 너무 성을 내지 말고, 가만히 돌아봐요. 내가 좀 어리보기라서 느즈막하게 달라지지만, 지난 열 해를 돌아보면 나는 한 걸음씩 스스로 고치면서 나아가는 삶이에요. 오늘은 아직 어리숙하게 하느라 못 바꾸거나 못 고쳤지만, 틀림없이 모레에는, 모레에 안 되면 다시 더 지내고서, 그때에도 또 못 바꾸거나 못 고치면 그다음에는 바꾸거나 고치려고 늘 마음하고 몸을 써요. 느긋하고 너그러이 기다려 봐요. 우리, 서두르지 말고 하나하나 즐겁게 바꾸거나 고쳐요.”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집에서 ‘밥짓는 사내’로 삽니다. 밥을 손수 지어서 아이들한테 열 해째 먹이는 살림을 꾸리는데, 이러는 동안 늘 ‘밥말’을 들려줍니다. ‘밥말’이란 밥하고 얽힌 말이나 이름입니다. 부침개를 할 적에 ‘부침개’가 뭔지 알려주고, ‘부침(부치다)’하고 비슷하지만 다른 ‘지짐(지지다)’을 알려줍니다. 또 ‘볶음(볶다)’을 알려주며, ‘무침(무치다)’이나 ‘데침(데치다)’이나 ‘버무림(버무리다)’을 알려주지요. (113쪽)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은 ‘우리 집안 책’이 되기를 바라면서 썼습니다. 저 스스로 제 삶과 살림과 사랑을 다시 새기면서 첫마음이 되려는 뜻으로 썼어요.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이 궁금하다고 물어보면 언제나 선뜻 기쁘게 내어줄 책으로 썼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보여줄 책으로, 곁님 어머니하고 아버지한테 보여줄 책으로, 그리고 온 이웃님한테 보여줄 책으로 썼어요.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새롭게 배우면서 기쁨으로 살림을 짓는 길을 걸으려 한다는 뜻을 담아서 썼어요.


  비록 아직 어설프거나 어정쩡하거나 어수룩한 대목이 많으나, 지난 열 해를 이렇게 배우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열 해 동안 더욱 씩씩하고 신나게 한 걸음씩 내딛으면서 배우려는 마음이라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일하고 놀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배우고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말마디를 귀기울여 듣고 하나하나 따라하며 배웁니다. 아이들은 여느 때 여느 사랑을 나누는 어버이와 둘레 어른 삶을 받아먹으며 저희 꿈과 이야기를 빚습니다. (125쪽)


어떤 분이 묻더군요. “어떻게 같은 영화를 서른 번이나 백 번을 볼 수 있어요?” 저는 그분한테 되물어요. “어떻게 백 번이나 이백 번쯤 볼 만한 영화를 즐겁게 안 보고, 딱 한 번 보고 그칠 영화만 자꾸자꾸 보시나요?” (131쪽)



  곁님한테서 듣는 꾸지람 가운데 하나는 ‘왜 자꾸 책을 더 사요?’입니다. 곁님은 늘 말합니다. ‘한 번 보고서 덮을 책은 그만 사자’고요. ‘한 번 아닌 백 번을, 아니 천 번을, 아니 날마다 새로 읽으면서 날마다 새로 배울 수 있는 책 하나만 있으면 넉넉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고개 숙여 대꾸하지요. “그대 말이 참말 맞아. 그대 말대로야. 그래서 나도 생각해 보았어요. 앞으로 내가 지으려는 새로운 사전을 다 짓고 나면, 이제는 책을 이렇게 끝도 없이 사들이는 몸짓은 그치려고요. 꼭 열 해까지만 이렇게 할게요. 열 해 뒤에는 사뭇 달라지리라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든 제 어릴 적을 돌아보든, 새로운 만화책이나 만화영화가 더 재미있지 않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를 참말로 끝도 없이 다시 보고 또 봅니다. 볼 때마다 재미있고 새로우니 자꾸 보고 다시 볼 수 있어요. 볼 때마다 배울 수 있기에 언제나 즐겁게 볼 수 있어요. 볼 때마다 나를 깨우치고 북돋우기에 활짝 웃으면서 새삼스레 볼 수 있어요.



제가 살아가며 얻는 목숨(밥)은 흙에서 얻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흙으로 집을 지어서 살아야 제 목숨을 옳게 건사할 만합니다. 그러면 저는 제가 밥을 삼을 터를 이루는 흙하고 같은 흙으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쓰레기를 파묻는 흙땅이 아니라, 목숨이 살아숨쉴 흙땅이어야 합니다. 내 하루하루 살림에서 쓰레기를 내는 삶이 아니라, 꿈을 낳고 사랑을 피우는 삶이어야 합니다. 덜 쓰고 아끼는 삶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누리며 착하게 꾸리는 삶입니다. (223쪽)



  아이들이 아침에 상냥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봅니다.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그래, 우리 이쁜 아이들도 잘 자고 일어났을까? 밤새 즐거운 꿈을 꾸면서 하늘을 날았을까? 지난밤에는 어떤 꿈을 꾸었니?” 서로 묻고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따스히 안습니다.


  이제 두 아이(2017년으로 큰아이는 열 살, 작은아이는 일곱 살입니다)는 모두 스스로 밥을 지을 줄 압니다. 갑작스레 두 아이가 밥을 잘 짓더군요. 아홉 살 여섯 살이던 때에는 두 아이가 밥을 안 짓거나 못 지었어요. 열 살 일곱 살로 접어든 2017년에 참말로 갑작스레 밥을 지어내요. 큰아이는 손수 반죽을 하고 부풀려서 빵도 굽지요. 작은아이는 누나한테 질세라 달걀삶기를 해 보았고, 이제 제법 잘 삶아냅니다. 설거지도 걸레질도 비질도 제법 야무집니다. 아직 아이들 아귀힘이나 팔힘으로는 빨래가 만만하지 않으나, 빨래를 마친 옷가지를 잘 널고 잘 걷어서 잘 갭니다.


  요새는 일부러 아이들한테 감 깎기를 시키곤 해요. “오늘은 누가 감을 이쁘게 깎아 보려나?” 하고 묻습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감 한두 알을 깎느라 십 분 이십 분 넉넉히 씁니다. 반듯한 칼질하고는 아직 멀지만, 손수 칼을 쥐고서 깎고 썰고 접시에 곱게 놓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나도 잠자리에 누우려다가 물 한 모금 마시려고 부엌으로 가는데 부엌 바닥에 뭔가 하얗게 있는 듯해요. 허리를 숙여서 부엌 바닥을 짚는데 어라 아무것도 안 집힙니다. 아니, 별빛이 집히네요. 달빛하고. (270쪽)



  저는 온누리 이웃 어버이나 어른한테 살며시 말을 건네고 싶어요. 이웃 푸름이하고 어린이한테도 가만히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책 하나를 슬며시 건네면서 말을 걸고 싶어요. 손수 지은 밥이 가장 맛있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어요. 손수 지은 살림을 손수 고쳐서 쓰면 늘 웃음꽃이 피어난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밤에 쉬 마렵다고 아버지를 깨우는 아이를 이끌고 쉬를 누이고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누우려다가 부엌에서 달빛을 주워 보셨나요? 마실길에 다리가 힘들다는 아이를 품에 안으니 어느새 새근새근 곯아떨어져요. 어버이 품에 제 온몸을 맡긴 채 꿈나라로 빠져드는 아이 가슴에서 내 가슴으로 스미는 따스함을 느껴 보셨나요? 갓난쟁이일 무렵 하루에 마흔 장 남짓 오줌기저귀에 똥기저귀를 내놓던 아이가 어느새 씩씩하게 커서 밥도 짓고 국 끓이기를 배우는 대견한 모습을 보셨나요?


  살림짓기는 사랑짓기라고 생각해요. 살림하기는 사랑하기라고 생각해요. 아직 살림에 등을 돌린 이웃 사내한테 여쭈고 싶어요. 바깥일을 줄이면서 집안일을 함께 배우면서 해 봐요. 온 집안에 사랑이며 평화가 흐른답니다. 어설프거나 어리숙한 사내하고 사느라 고단한 이웃 가시내한테 여쭈고 싶어요. 조금 더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차근차근 알려주고 가르치면서 어깨동무를 해 봐요.


  어릴 적부터 살림짓기를 배운 적도 어깨너머로 구경한 적도 없는 철없쟁이 사내가 슬기로운 어버이로 거듭나려면 적어도 열 해는 지내야지 싶습니다. 열 해가 흘러야 멧골도 들도 냇물도 바뀌어요. 살림하는 아버지는, 또 살림하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가르칩니다. 아이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을 똑똑히 깨닫고는 마음으로 사랑씨앗을 심으면서 새롭게 배우고 가르쳐요. 2017.12.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넋/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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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외버스에서 읽은 책 2017.12.21.


밤 한 시에 일어나서 새벽 다섯 시에 살짝 삼십 분만 눈을 붙였다. 마실길에 나서려고 이모저모 챙기고 움직이느라 밤샘을 한 셈일 텐데, 아침 일찍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에 가서 서울 가는 시외버스에 오르니 소나기잠이 쏟아진다. 와, 잠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는 말을 오늘 비로소 느끼네 하고 생각하면서 한 시간쯤 느긋이 쉽니다. 한 시간 뒤에 일어나서 책을 폅니다. 과학잡지 《에피》 둘째 권입니다. 이런 잡지가 있는 줄 둘째 권이 나오고서 알았습니다. 과학을 말하려는 잡지라 하는데, ‘동물실험’을 두고서 살짝 줄타기를 하는 모습이네 하고 느낍니다. 섣불리 함부로 동물인권을 밟지 않겠다는 뜻은 보이되, ‘실험 모델’이 되는 동물을 놓고서는 그야말로 차갑게 기계로만 바라보는 이야기가 곳곳에 흐르거든요. 노래하는 새가 어떻게 언제부터 노래하는가를 살피려고 뇌에 실험기구를 박은 사진을 보고 흠칫 놀랐는데, 저만 놀랄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꼭 이렇게 해야만 노래하는 새를 제대로 깊이 파고들 만할까요? 숲에 깃들어 새를 이웃으로 지켜보면서 깊이 파고드는 길은 없을까요? 꼭 실험실에 가두어서 24시간 사진기로 찍으면서 살펴야만 학문이나 과학이나 연구가 될까요? 이론이나 학문은 저하고는 도무지 안 맞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끼면서, 그래도 마지막 쪽까지 다 읽고서 책을 덮습니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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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 김지연 사진 산문
김지연 지음 / 열화당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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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읽기 361


일흔 할머니가 들려주는 사진꽃 이야기
― 감자꽃
 김지연 글·사진
 열화당, 2017.12.5. 16000원


사과나무 과수원을 서성거리는데 주인이 왔다. 주인은 표정 없이 떨어진 사과를 광주리에 담았다. 새벽부터 낯선 곳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더니 떨어진 사과 몇 알을 건네주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 상큼한 사과 맛이 있을까? (13쪽)

요즈음 나 자신에게 되묻고 있다. ‘나는 밥값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사진을 하는 동안, 세상사에 발을 담그고 살면서 세삼 ‘밥값’도 제대로 못 하는 사진가는 아닌지 반문해 본다. (21쪽)


  사진기라는 기계는 평등하면서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다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이 기계를 손에 쥐는 사람은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할머니도 젊은이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값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서, 더 돈을 치르면 해상도가 더 빼어난 기계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대학교 사진학과라든지 사진밭 여러 어른 뒷줄에 서서 이름을 펴기도 합니다.

  곰곰이 따진다면 사진밭뿐 아니라 어느 밭을 보든 매한가지입니다. 호미 한 자루는 누구한테나 평등합니다. 누구나 호미 한 자루로 밭을 일굴 수 있어요. 연필 한 자루는 모두한테 평등해요. 누구나 연필 한 자루로 글을 여밀 수 있지요. 그렇지만 어버이한테서 땅을 물려받지 못하면 다른 이 땅을 빌려서 부쳐야 합니다. 글밭도 글밭 여러 어른 뒷줄이 있어서, 이 뒷줄에 살그머니 서는 사람이 있어요.


나락을 거침없이 삼키고 흰 폭포처럼 위용있게 쌀을 뿜어내는 정미소는 어린 나에게 정말 대단한 존재로 다가왔다. 그러나 절대로 무너지는 날이 없을 줄 알았던 그 정미소가 이제는 시골 면사무소 뒤에서 납작이 엎드린 채 길가로 난 큰 문을 걸어 잠그고 안채 마당에서 소소한 창고로 쓰이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23쪽)

“언제 또 봬요.”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글씨요…….” 주인은 말꼬리를 흐린다. 우리가 언제 또 만날 수나 있겠어요. 정미소도 그렇다. (39쪽)


  사진책 《감자꽃》(열화당, 2017)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을 여민 분은 쉰 줄이라는 나이부터 사진기를 손에 쥐었고, 이 사진책을 일흔 줄 나이에 선보인다고 합니다. 아주머니라 이를 만한 나이에 사진길을 걷자는 생각을 했고, 할머니라 이를 만한 나이에 새로운 사진책을 여밉니다.

  사진책 《감자꽃》에 실은 글이나 사진은 스무 살이나 마흔 살 즈음에도 쓰거나 찍을 수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쩌면 어떤 분은 스무 살이나 마흔 살에도 이 사진책에 깃든 글만큼 사진만큼 이야기를 엮을 수 있겠지요. 사진기는 평등하거든요. 그런데 사진기만큼 평등한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나이와 발걸음입니다.

  삶길을 걸어온 나이에 맞추어 글 한 줄에 얹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삶길을 지핀 발자국에 맞추어 사진 한 장에 담는 이야기가 살며시 달라요.

  스무 살 젊은이가 정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눈길은 쉰 살 아주머니가 정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눈길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적에 정미소를 늘 쳐다보면서 살다가 아주머니 나이를 지나 할머니가 된 분이 사진기를 손에 쥐어 담아낼 이야기를 서른 살 젊은이가 담아낼 수 없겠지요.


나는 감자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는 감자꽃을 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나 이쁘고 곱던지,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감자꽃을 묶어서 부케처럼 만들어 할머니 손에 쥐여 주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43∼44쪽)

면내에는 물론 읍내에도 미용실이 한두 군데밖에 없던 시절인지라 여자애들도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면서 컸다. 예전에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9쪽)


  사진 찍는 김지연 님은 전북 진안에서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을 꾸리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전북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을 꾸립니다. 늦깎이로 사진길을 걸었다 할 만하고, 어느새 할머니 나이에 이르는데, 이즈막 할머니 나이에 감자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해요. 감자밭에서 감자꽃을 따서 버리는 시골 할매 곁에서 감자꽃을 주섬주섬 그러모아서 ‘감자꽃다발’을 엮습니다. 감자알처럼 투박하면서 살가운 시골 할매 손이란, 짐짓 쓸모없다고 여겨 버리는 감자꽃 고운 꽃송이처럼 따사롭고 푸진 손이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흙짓는 시골 할매나 할배 손에 꽃다발을 안긴 일은 없지 않을까요. 흙빛을 닮은 시골 할매나 할배 손에 작은 들꽃 한 송이를 가만히 건넨 일도 없지는 않을까요.


정읍의 눈 내리는 벌판을 걷노라면 마치 꿈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 바람도 없는데 하염없이 눈이 쌓이고 또 쌓인다. 행여 길을 잘못 들어도 별로 당황스러울 것이 없다. 인가가 멀리서 보이는 국도에서 버스를 내리면 작은 시내가 흐르고 그 옆으로 방천길이 마을로 이어진다.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곳에 간판도 창문도 없는 오래된 이발소가 있다. (55쪽)

우연한 기회에 동네 할머니 방의 문지방 위에 걸린 오래된 가족사진을 찍게 되면서 ‘낡은 방’ 연작을 시작했다. 이 사진을 찍게 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아, 오래된 방에는 이렇게 가족의 역사가 가훈처럼 붙어 있었구나. 자식을 낳고, 그들이 자라고, 결혼을 하고, 아이의 돌이나 부모님의 환갑을 기념하는 사진들을 찍고, 그것을 모아서 문지방 위나 벽에 온통 걸어 두고 늙은 부모는 살아가고 있었구나.’ (83쪽)


  사진책 《감자꽃》은 감자꽃 같은 사진하고 글이 어우러집니다. 어쩌면 감자꽃은 덧없을는지 모릅니다. 사진책 《감자꽃》에 흐르는 사진하고 글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스쳐서 지나갈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자알에서 뿌리가 돋고 줄기가 오르며 잎이 나기에, 이러면서 꽃이 피기에, 또 꽃이 지거나 꽃을 따기에, 시나브로 감자알이 굵습니다. 꽃내음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꽃이 피지 않는 풀이나 나무란 없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 삶이나 살림이란 없습니다.

  비록 그늘진 자리에서 겨우 자그마한 꽃송이를 바들바들 떨면서 터뜨리더라도, 이 자그마한 꽃송이를 고작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접어야 하더라도, 모든 풀이며 나무이며 사람이며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꽃피우는 곡식이랑 열매를 먹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꽃피우는 사랑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입니다.


‘자영업자’ 작업을 하면서 삼산이용원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주로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술 한 잔씩을 하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늘 같은 말로 ‘사진도 못 찍는 사진사’라는 인사는 빼놓지 않았다. (121쪽)

“꽃시절은 언제였어요?” “나는 존(좋은) 시절도 없었어”라는 대답이 들려오는 순간, 아차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147쪽)


  누구나 꽃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꽃길을 걸으려면 우리 삶이나 마을이나 나라는 어떤 길로 거듭나야 할까요.

  우리는 꽃날을 누리지 못한 채 저무는 삶일까요. 우리한테 꽃날이 찾아오려면, 아니 우리가 꽃날을 지어서 꽃잔치를 즐기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으면 될까요.

  사진책 《감자꽃》은 일흔 할머니 나이를 걸어갈 키 작고 몸집도 작은 사진님 한 사람이 조곤조곤 일구어 온 사진밭을 차곡차곡 보따리 풀 듯이 보여줍니다. 숱한 정미소를 보여줍니다. 숱한 이발소를 보여줍니다. 숱한 마을지기를 보여줍니다. 숱한 시골가게를 보여줍니다. 숱한 마을이웃을 보여주고, 숱한 꽃송이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작고 여린 사진님 한 사람 눈에 뜨였기에 사진으로 깃들 수 있는 모습이라 할 만합니다. 크고 단단한 이들은 쳐다보지 않거나 아랑곳하지 않던 모습이라 할 만합니다. 낡은 방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빈 방을 어떤 눈길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낡은 방에 빼곡한 낡은 사진에 깃든 마음을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요? 이제 빈 방이 되어 버린 자그마한 터가 한때 숱한 아이들이 바글바글 복닥이면서 씩씩하게 자라던 보금자리인 줄 읽을 수 있을까요?


오늘 또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외로울까 봐 이쁜 새악시들 사진을 걸어논 거요?” 할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벽에는 ‘꽃시절’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나는 괜히 가슴이 뿌듯했다. ‘아, 꽃시절.’ (158쪽)


  꽃가루가 꽃가루 아닌 모랫바람으로 온나라를 휩쓰는 오늘날입니다. 꽃비가 내려도 자동차 유리창에 떨어지면 귀찮거나 성가시거나 싫다고 여기는 오늘날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꽃을 멀리하지 않았을까요? 감자꽃뿐 아니라 사람꽃도 멀리하고, 삶꽃이나 사랑꽃도 멀리하지는 않았을까요?

  꽃을 멀리하다 보니 어느새 꽃길하고도 멀어지고 꽃날도 잊고 말지는 않을까요? 스스로 꽃사람인 줄 잊으면서 그만 꽃벗이나 꽃이웃까지 잊지는 않을까요?

  사진님 한 사람이 쉰 줄부터 일흔 줄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이 꽃길이었는지 흙길이었는지 가시밭길이었는지 구름길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사진길을 걸었겠지요. 사진님 한 사람이 쉰 나이부터 일흔 나이에 이르도록 일군 사진이 꽃사진이었는지 흙사진이었는지 가시밭사진이었는지 구름사진이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저 수수히 살아온 나날을 적바림한 사진이었겠지요.


꽃가루 황사로 범벅이 되고
오월은 장미대선으로 분주하고
꽃비는 더러운 차창 위에 모로 눕고
와이퍼는 호들갑을 떠는 금요일 밤
집에 돌아와 미역국에 찬밥을 말아 먹는데
내가 오늘 생일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175쪽)


  사진을 놓고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놓고 아트라 해도 됩니다. 사진을 디자인해 볼 수 있을 테고, 사진에 이런 이론이나 저런 사상이나 그런 주의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사진을 어떻게 바라보든 사진으로 이야기를 지피다 보면 어느새 꽃 한 송이가 피어나서 향긋한 바람을 일으킬 만하다고 봅니다. 바로 ‘사진꽃’입니다.

  우리는 사진예술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하지 싶어요. 우리는 사진꽃 한 송이를 자그맣게 피울 수 있어도 넉넉하지 싶어요. 대단한 사진축제라든지 엄청난 사진페스티벌이라든지 놀라운 사진박물관을 세우지 않아도 되리라 봅니다. 들꽃 같은 사진이야기를 피우고, 마을꽃 같은 사진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가볍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진꽃이 맺는 씨앗 한 톨을 오래오래 바라보아도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일흔 할머니가 앞으로 아흔 할머니로 걸어가는 길목에서 피워낸 작은 사진책 《감자꽃》을 곱다시 덮습니다. 2017.12.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비평/사진읽기/사진넋)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사진가 김지연 님한테 여쭈어 얻었습니다
* 서학동사진관 모습은 제가 찾아가서 찍었습니다
* 찻잔을 쥔 손은 사진가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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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왕님 만나는 날! 국민서관 그림동화 116
새러 퍼거슨 글, 로빈 프레이스 글래서 그림, 김영선 옮김 / 국민서관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79


어른으로서 아이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나요
― 오늘은 여왕님 만나는 날!
 새러 퍼거슨 글·로빈 프레이스 글래서 그림/김영선 옮김
 국민서관, 2010.11.15. 


당신을 초대합니다.
일요일에 여왕님과 함께 차를 마시러 오세요.
따끈한 빵이랑 달콤한 과자도 준비되어 있어요.
최대한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것 잊지 마세요! (4쪽)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라면 늘 돌아볼 대목이 있어요. 바로 우리 어버이 스스로 아이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입니다. 또는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여기느냐입니다. 아이를 ‘무엇’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아이를 함부로 마주하거나 거칠게 다룰는지 몰라요. ‘무엇’이니까요.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여길 적에는 조금 더 부드러울 수 있으나, 아직 사랑으로 마주하기에는 먼 몸짓이리라 느낍니다.

  아이란 누구일까요? 아이란 어떤 목숨이거나 숨결일까요? 아니, 아이란 어떤 님일까요? 아이는 어떤 사람이면서 어떤 사랑이거나 꿈일까요?

  예부터 숱한 분들이 아이를 바라볼 적에 ‘하느님’으로 여기라고 이야기해요. 종교로 치는 하느님이 아닌, 그저 해맑고 아름다운 하늘님인 하느님으로 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는 하늘님(하느님)도 되고, 별님이나 해님이나 꽃님도 됩니다. 숲님이나 바다님이나 무지개님도 될 테지요.


“루비, 다른 사람이랑 차 마실 때는
 꽥꽥 소리 지르지 마라. 그런데 잠깐…… 여왕님이라고?” (5∼6쪽)

“루비, 다른 사람이랑 차 마실 때는
 차례를 잘 지키는 게 좋을 거야. 그런데 잠깐…… 여왕님이라고?” (9∼10쪽)


  그림책 《오늘은 여왕님 만나는 날!》(국민서관, 2010)을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 그림책은 아이가 어느 날 글월 하나를 받는 대목으로 엽니다. 아이는 한창 ‘공주님 소꿉놀이’를 하는데, 우체국 일꾼이 글월을 건네고, 아이가 문득 글월을 열다가 “여왕님과 함께 차를 마시러 오세요”라고 적힌 글을 읽고는 깜짝 놀라요. 기뻐서 마을이며 학교이며 집안이며 온통 들쑤시고 다니면서 여왕님이 나를 불렀다고 들떠서 웃고 춤추고 노래합니다.

  우리로 치면 어느 날 대통령이 한번 만나자고 글월을 띄운 셈이라고 할까요. 아이로서는 대단히 기쁘고 설레겠지요. 폴짝폴짝 개구지게 뛰고 구르면서 여기저기에 외치고 다닙니다. 둘레에서 사람들은 이 아이를 바라보면서 “얘야, 다른 사람이랑 차 마실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단다 하고 하나씩 일러 주는데, 이렇게 일러 주다가 “그런데, 여왕님이라고?” 하면서 화들짝 놀라요.


“루비, 다른 사람이랑 차 마실 때는 공손하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좋을 거야. 그런데 잠깐…… 여왕님이라고?” (15∼16쪽)

“루비, 다른 사람이랑 차 마실 때는 
 말해도 좋을 때와 아닐 때를 잘 구별하렴. 그런데 잠깐…… 여왕님이라고?” (17∼18쪽)


  그림책 《오늘은 여왕님 만나는 날!》을 가만히 되읽으면 개구쟁이인 아이한테 ‘때로는 다소곳할 줄 알아야 한다’는 몸짓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참말로 저마다 한 가지씩 아이한테 귀띔을 해요. 아이는 이런 귀띔이나 도움말을 잘 듣는지 안 듣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이 마음에는 그저 하나, 여왕님 만나기만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왕님을 어디에서 만날까요? 아이가 만나는 여왕님은 누구일까요?

  마무리를 다 밝히면 싱거울 수 있지만, 이 그림책을 놓고는 마무리까지 밝혀도 될 만하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책을 아이하고 함께 읽는 어버이라면 아이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 적에 아이가 기쁘게 배우면서 무럭무럭 자라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여왕님을 어디에서 만나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우리가 어버이로서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대목을 배울 수 있으면 좋아요.

  이제 마무리를 밝혀 본다면, 아이를 부른 여왕님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가 여왕님이라니, 싱거운 마무리일까요? 얼핏 보면 싱겁지요. 그런데 할머니는 온 집안을 마치 궁궐처럼 꾸미셨어요. 그저 아이하고 차 한 잔 마실 생각인데 말이지요.

  할머니는 아이를 불러서 “차 마실 때 어떠한 몸짓을 하면 더욱 즐겁고 재미난가” 하는 대목을 오랫동안 익혔습니다. 게다가 궁궐 역사까지 익혔어요. 할머니 집을 궁궐처럼 꾸미고, 또 할머니 스스로 왕관을 하나 마련해서 썼답니다. 아이한테도 작은 왕관을 마련해 주어 씌워 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 여왕님하고 공주님이 되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차를 마셔요.

  곧 돌봄이란 배움이란 사랑이란 삶이란 살림이란 이야기란 꿈이란 노래란, 이렇게 부드러우면서 따사롭고 즐거운 하루라고 하는 줄거리를 다룬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버이 스스로 아이하고 똑같이 하느님이 되려는 몸짓일 적에 참다이 가르치고 슬기롭게 배우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하루를 짓는구나 싶어요.

  그림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 봐요. 수수한 어버이인 우리 스스로 ‘나는 하느님이지’ 하고 생각하면서 아이를 ‘너도 하느님이야’ 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서로 하느님이 되어 밥상맡에 앉을 수 있다면, 서로 하느님으로서 집안일을 하고, 함께 놀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즐거우면서 아름다울까요? 2017.12.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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