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둥이 고래
코랄리 소도 글.그림, 조은수 옮김 / 도미솔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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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76


물결 거슬러 헤엄치는 놀이를 즐기는 고래
― 큰둥이 고래
 코랄리 소도 글·그림/조은수 옮김
 도미솔, 2016.5.15. 1만 원


  우리는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바닷속에서 어떤 물고기가 어떤 헤엄을 치면서 어떤 하루를 누리는가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라면 우리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쯤으로만 여기지 않나요? 바닷물고기가 저마다 즐겁게 헤엄을 치면서 저마다 신나게 하루를 짓는 줄 조금도 못 헤아리지는 않나요?


여긴 아주 드넓은…… 바다. (1∼2쪽)


  그림책 《큰둥이 고래》(도미솔, 2016)에는 책이름처럼 고래 한 마리가 나옵니다. 고래 가운데에서도 제법 커다란 고래인 ‘큰둥이’ 고래가 나와요.

  큰둥이 고래는 아주 드넓은 바다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가를 살짝 익살맞게 보여줍니다. 헤엄도 치고, 먹이도 잡고, 갈매기하고 놀며, 때로는 남극까지 가로질러서 펭귄하고도 논대요.

  참말일까요? 참말 고래는 갈매기하고 놀다가 펭귄하고도 놀까요?

  아마 우리는 알 수 없겠지요. 우리가 고래처럼 바다에서 살지는 않으니 알 길이 없겠지요. 더욱이 바다나 고래를 살피는 학자는 바다살림이나 고래 한살이를 파헤치려고 애쓸 테지만 ‘고래가 즐기는 놀이’라든지 ‘고래가 부르는 노래’라든지 ‘고래가 짓는 웃음’은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을 수 있어요.


여긴 정말 멋진…… 남극. (9∼10쪽)


  그러고 보면 우리는 고등어를 맛나게 먹더라도 ‘고등어 헤엄짓’을 모릅니다. ‘고등어 놀이’가 무엇인지를 몰라요. 오징어나 문어가 어떻게 헤엄을 치고 물살을 가르면서 ‘노는가’ 하는 대목은 아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새우가 바다에서 숱한 물고기한테 먹이가 되기는 합니다만, 이 새우한테 어떤 헤엄짓이나 놀이가 있는가를 생각하지도 않을 테고요.


이건 꽤나 힘이 드는…… 믈결을 거슬러 헤엄치기. (13∼14쪽)


  그림책 《큰둥이 고래》에 나오는 큰둥이 고래는 여러 놀이 가운데 ‘물결 거슬러 헤엄치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참말로 민물고기나 바닷물고기 가운데에는 물결이든 물살이든 거슬러서 헤엄치려고 하는 모습을 곧잘 보여주는데, 우리는 이들 물고기가 왜 이렇게 헤엄을 치는지를 모릅니다.

  어쩌면, 참말로, 물고기는 물살 거스르는 놀이를 한달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모르는 헤엄치기를 즐기고,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못한 놀이를 여러 물고기하고 즐거이 할는지 모릅니다.

  작은 풀벌레한테도 놀이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잠자리나 참새한테도 놀이가 있을 테고요. 갈매기나 물총새한테도 놀이가 있을 테며, 고래나 상어한테도 놀이가 있겠지요.

  저마다 다른 터전에서 저마다 다른 놀이를 즐기는 숨결이라고 할까요. 큰둥이 고래도, 새우도, 상어도, 갈매기도, 펭귄도, …… 그리고 우리 사람도, 어린이도 어른도 저마다 즐겁게 놀이를 하면서 하루가 아름답다고 할 만해요. 함께 웃고 놀면서, 서로 어우러지고 놀면서,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는 놀이를 나누면서 새롭게 하루를 짓는다고 할 만하지요. 2017.12.11.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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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철학 - 문재인 정부에 보내는 한 철학도의 물음
황광우 지음 / 풀빛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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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33


청소년이 촛불을 들자 나라가 바뀌다
― 촛불 철학
 황광우 글
 풀빛, 2017.6.30. 16000원


  ‘청소년헌장’을 정부에서 막 내놓을 즈음을 떠올립니다. 1990년이지 싶은데, 그때 중학교 3학년이던 저는 청소년헌장이 막 나온 일을 놓고 학교에 따졌습니다. 나라에서 청소년헌장을 내놓았다고 하는데 왜 우리(청소년)한테 그 헌장 줄거리를 안 알려주느냐고 물었어요. 신문이나 방송에 청소년헌장을 내놓았다는 말만 있을 뿐 정작 줄거리가 무엇인지 적힌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학교에서는 중3이 고등학교 입시 공부를 안 한다며 꾸지람만 했습니다. 담임 교사도 다른 교사도 그저 제 머리통을 출석부로 때리거나 비아냥거리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꾹 참고서 한 달 가까이 청소년헌장 줄거리를 찾아서 알려 달라고 하니, 나중에 되어서야 딱 이레만 건물 문간에 종이로 옮겨적은 청소년헌장을 붙여놓았습니다. 이레 뒤에는 떼어서 없애더군요.


실업과 시험 사이에서 우리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다. 25만 명이 공무원 시험에 몰렸다. 경쟁률이 50대1이다. 한 명의 합격자를 위해 49명이 낙오되어야 하는 이것은 시험이 아니다. 죽음의 행진이다. (9쪽)

독재집단이 국민을 꼬신 당근, 그것은 성장이었다. 박정희는 성장이라는 전쟁의 맨 선두에 서서 이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 행세를 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박정희가 선택한 전략은 불귱형 성장전략이었고 … 박정희와 그의 군부집단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구실삼아 대한민국을 거대한 병영으로 바꾸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았고, 교사들은 독재자의 지침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독재의 충직한 하인이 되었다. (22, 23쪽)


  ‘애버트 인권상’을 받은 촛불잔치를 떠올립니다. 숱한 사람들이 골골샅샅 촛불을 들고 모인 자리는 촛불모임일 수 있고, 촛불집회일 수 있으며, 촛불혁명일 수 있습니다. 얼마 앞서 독일에서 애버트 인권상을 한국 촛불한테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제 마음속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촛불잔치를 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총이나 칼이 아닌 촛불을 들었어요. 주먹다짐이나 발길질이 아닌 노래를 불렀습니다. 촛불 한 자루를 두 손으로 고이 쥐고서 노래 몇 마디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는 뜻을 빌었지요. 그래서 이러한 자리에 모인 우리들이 저마다 ‘잔치’를 했구나 싶어요. 즐거운 잔치라고 할까요. 어두컴컴하고 갑갑하며 고단한 나날에도 즐겁게 모여서 어깨동무를 한 잔치마당이었다고 느낍니다.


만일 전두환 정권이 농민의 정권이었다면, 우선적으로 농어민의 애간장을 녹이는 농가 부채를 탕감했을 것이다. 만일 전두환 정권이 노동자의 정권이었다면, 말로만 산업전사라 공치사할 게 아니라 최소한 산업재해로 불구가 된 노동자의 복지에 앞장섰을 것이다. (66쪽)

전두환 시절에도 그렇게 많은 전경들이 새까맣게 깔리지 않았는데,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 밑에서 1750명의 노동자가 일터를 잃고 전경이 공장을 점거하는 폭압이 자행되고 있었다. (174쪽)


  황광우 님이 쓴 《촛불 철학》(풀빛, 2017)이라는 책을 새삼스레 읽었습니다. 우리가 두 손 모아 뜻을 밝힌 촛불이란 무엇이었을까 하고 돌아본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우리가 촛불 한 자루를 들고서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짚고, 우리가 촛불 한 자루를 들고서 이 땅에 새롭게 심기를 바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를 다루는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삼성이 벌여온 뇌물 공여의 테이프에 의거하여 비리를 폭로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였다. 더욱 노회찬 의원은 법사위 소속 의원이 아니던가? 그런데 노 의원이 관련 인물을 공개하자, 검찰은 오히려 노 의원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여 버렸다. 고소한 이는 고교 동창 황교안. 잡으라는 범인은 잡지 않고 잡으라고 신고한 의원만 족친 애꿎은 사건이었다. 결국 삼성 X파일에 담긴 검사의 실명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노회찬 의원은 대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MB 정권하에서 말이다. (155쪽)


  오랜 독재정권을 몰아낸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정치 지도자도 예전 독재자하고 엇비슷하게 전투경찰을 끌어모아서 노동자를 억눌렀습니다. 새롭게 나라를 가꾸겠다고 한 정치 지도자도 ‘삼성 장학금’을 받은 일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안타까우나 우리 민낯입니다.

  정치 우두머리를 바꾸었대서 나라가 바뀌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투표 하나만으로는 나라가 아름답게 설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나라를 바꾸려면 정치 우두머리 한두 사람이나 몇몇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 줄 우리 스스로 뒤늦게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촛불이란, 나라를 바꾸려면 우리가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깨달은 몸부림이지 싶습니다. 마을과 집과 고을도 함께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은 몸짓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요.


알고 보니 베트남전쟁은 광기에 찬 미국인들의 침략전쟁이었고, 박정희는 달러 몇 푼을 받으면서 우리의 젊은이들을 미국의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팔아먹은 것이었더구나. 그것이 자주 독립의 자세이고, 인류 공영에 이바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래시계 세대들은 기만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강자에게는 굽실대고 약자에게는 으르렁거리는 노예근성을 베트남 땅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262쪽)


  《촛불 철학》을 쓴 황광우 님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 터무니없다 싶은 일을 낱낱이 적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 저런 뜬금없는 일, 그런 바보스러운 일 들을 가만히 읽다 보니, 모두 하나로 맞물리는구나 싶어요.

  무엇인가 하면, 나라에서는 청소년을 입시에 가두거나 옥죄려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도 아이가 청소년 즈음 되면 이제 더는 책을 안 읽히고 입시학원이나 입시교재만 곁에 둡니다. 나라도 여느 사람들도 청소년이 생각을 새롭게 지펴서 삶을 새롭게 갈고닦는 길하고 등지도록 내모는 얼거리예요. 사회에 눈을 감고 입을 닫으며 귀를 막도록 내몬다고도 할 만해요.

  그런데 촛불잔치에 누가 모였을까요? 골골샅샅 촛불잔치에 어떤 사람이 잔뜩 모였을까요? 바로 청소년입니다. 입시공부가 아닌 삶짓기를 헤아린 청소년이 참으로 많이 모였어요. 서울에서뿐 아니라 전라도 고흥 같은 자그마한 시골에서까지 시골 청소년이 저희끼리 푼푼이 돈을 모아서 버스를 빌려 서울 광화문까지 달려가곤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참으로 희한한 나라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해마다 20조여 원을 투입하고 있고,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해마다 자식들 학비로 20조여 원을 부담하고 있는데도, 교육 문제 하나 제대로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답답한 현실이다. (305쪽)


  전남 고흥은 요즈막에 ‘경비행기 시험장’을 군 행정에서 끌어들이려고 하는 일 때문에 몸살을 앓습니다. 다른 지자체에서는 갯벌을 다시 바다로 돌리는 일에 마음이며 힘이며 돈을 쓰지만, 고흥에서는 갯벌을 메운 땅을 다시 바다로 돌리는 일에는 마음도 안 쓰는데다가, 이 자리에 ‘경비행기 시험장’을 끌어들이겠다며 벌써 100억이 넘는 돈을 썼다고 하며, 더욱 어마어마한 돈을 쓰려 한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시골 군인 고흥에서는 아주 작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서 촛불을 들거나 1인시위를 합니다. 나라뿐 아니라 작은 지자체도 아름답기를 바라기 때문에 촛불을 들거나 1인시위를 합니다. 돈에 휘둘리는 정책이 아닌, 즐겁고 아름다운 제살림을 찾기를 바라는 뜻에서 작은 두 손을 모아 촛불을 들거나 1인시위를 합니다.


지금 180만 명이 무엇 때문에 군사적 대결을 벌이고 있는가? 러시아의 남침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요, 일본의 북침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무언가? 그것은 같은 동포들끼리 서로의 목을 향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군대에서 그 추운 겨울밤 새벽 2시에 경계근무를 설 때, 왜 나는 이 무모한 대결의 노예로 서 있어야 하는지 치를 떤 적이 있다. (349쪽)


  우리 사회가 민주하고 평화를 바라보려면 어른도 어른대로 민주하고 평화를 생각해야 하지만, 어린이하고 청소년이 민주하고 평화를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입시하고 대학교만 바라보는 물결이 아니라, 제 삶을 바라보고 제 고장을 바라보며 제 꿈을 바라보는 물결이 일렁여야지 싶습니다.

  작은 지자체 시골 청소년이 굳이 서울로 나아가지 않아도 작은 시골자락에서 꿈을 지피며 펼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서울 청소년이 서울을 벗어나 작은 시골에 깃들어 새롭게 꿈을 키울 수도 있어야지 싶습니다. 끝없는 다툼질을 내려놓고, 새롭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찾을 수 있어야지 싶어요.

  이야기책 《촛불 철학》은 우리 어른들한테 한 가지를 묻습니다. 이 나라가 참말 민주나 평화가 맞는지 묻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켜보거나 헤아리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 청소년한테 한 가지를 물어요. 청소년마다 꿈이 무엇이고 사랑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느냐고 물어요.

  촛불 한 자루를 든 모든 사람이 함께 받은 인권상이란, 민주도 평화도 꿈도 사랑도 늘 우리가 스스로 짓고 가꾸며 찾을 수 있다는 대목을 잘 밝혀 주리라 봅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나라에서도 자그마한 촛불잔치가 퍼지기를 빕니다. 아름다이 어깨동무하는 기쁜 잔치가 퍼지기를 빕니다. 대학교에 가지 않고도, 고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치고도, 모든 젊고 푸른 벗님이 꿈하고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싱그러운 마을을 바랍니다. 2017.12.11.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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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마당에서 읽은 책 2017.12.10.


어젯밤에는 그냥 잤다. 개수대에 가득한 빈 그릇을 보고서 설거지를 할까 살짝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빈 그릇을 쓴 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설거지를 하기를 바라 보았다. 새벽이 되어 부엌을 들여다보니 빈 그릇이 그대로. 아무도 안 건드렸구나. 이 빈 그릇을 모조리 그대로 두면 아침에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들 그릇이나 수저를 모두 지저분한 채 두어도 아이들은 저희 그릇이나 수저를 설거지할 생각을 안 할까? 설거지를 마치고, 쌀을 씻어서 불리고, 미역을 끊어서 불린다. 해가 갈수록 난날(생일)이라는 날짜가 가물가물하다. 내가 난 날도, 곁님이나 아이들이 난 날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 형이 난 날도, 곁님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이 난 날도, 동무들 난날도 모두 잊는다. 몸을 얻어 이 땅에 나온 날은 하루뿐일 터이나, 우리는 날마다 아침에 새롭게 깨어나기에 난날이란 삼백예순닷새 내내라고 느낀다. 설거지를 한창 할 즈음 새끼 고양이가 운다. 마당을 보니 겨울비가 내린다. 고흥에 살면서 아이들한테 눈을 보여주기 매우 어렵다. 한겨울에도 으레 찬비가 내릴 뿐이다. 마루에 앉아서 아이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이 일어나면 고양이밥은 아이들이 손수 주라고 이야기할 생각이다. 눈 아닌 비를 보면서 그림책 《눈이 사뿐사뿐 오네》를 읽어 본다. 비를 보면서 눈 이야기 그림책을 넘긴다. 투박한 그림결이 겨울 곡성 시골마을 눈밭하고 잘 어울리는구나 싶다. 다른 고장에는 눈송이가 날리려나? 다른 고장은 눈잔치를 누리려나? 눈발이 날리는 고장에서는 길고양이도 무척 춥겠구나.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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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시인에게 - 김명환 시집 마이노리티 시선 4
김명환 지음 / 갈무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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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4


‘ㄱ절’을 하며 기름밥 먹는 이웃
― 젊은 날의 시인에게
 김명환 글
 갈무리, 2017.10.27. 7000원


나는 보았습니다
파란 청바지에 빨간 머리띠
코레일 직접고용을 외치던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친구들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해고하던 문자메시지와
그 아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몰려가던
경찰들을 보았습니다
코레일의 해고가 정당하다는
법원의 판결문을 받고 울고 있는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친구들을 보았습니다 (어느 KTX 여승무원의 이야기)


  저는 어릴 적에 ‘배꼽 인사’라는 말을 몰랐습니다. 아마 집이나 마을마다 쓰는 말이 달랐을 테지요. 제가 어릴 적에 우리 마을 동무들하고 놀던 때 쓰던 말하고,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학교에서 만난 다른 마을 동무들이 쓰던 말이 달랐습니다. 조금 더 커서 다른 고장 또래를 만나니 또 서로 쓰는 말이 다르더군요. 도드라지는 사투리가 아니더라도 서로 쓰는 말이 다른 줄 나이가 들면서 새삼스레 느끼고 배웠어요.

  그러면 저는 ‘배꼽 인사’라는 말을 모르면서 어떤 말을 알았느냐 하면 ‘ㄱ으로 절하기’를 알았습니다. 우리 집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이웃 할머니나 아주머니나 할아버지도, “얘가 참 ㄱ으로 절을 잘 하네.” 하고 얘기했습니다. 학교에서도 ‘ㄱ으로 절하기’라고 들었어요.


조국아, 대한민국 군대야
너희가 용병이냐
일당 20만 원 받고 파업노동자 목숨줄 끊기 위해 투입된
내 어린 후배들아 아들보다 젊은 후배 군인들아
가다오 나가다오 (가다오 나가다오)


  시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갈무리, 2017)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절하기’가 떠오릅니다. 절 가운데에서도 선 채로 허리를 꺾는 ㄱ으로 절하기, 이른바 배꼽절이 떠오릅니다.
  좀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고속철도 여승무원이라든지, 큰가게 일꾼이라든지, 크지 않더라도 온갖 가게나 밥집이나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손님을 맞이하면서 참말로 아이도 어른도 허리를 꺾어서 절을 하곤 합니다.

  어릴 적을 떠올리면, 둘레에서 어른들이 손님이 왔다며 허리를 꺾어 절을 하는 곳은 드물었습니다. 마을 푸줏간이든 약국이든 빵집이든 구멍가게이든 거의 고개만 까딱하거나 입으로만 인사를 할 뿐이었어요. 어른하고 어른 사이에서 허리를 꺾는 ㄱ절을 하는 때라면, 학교에 장학사나 누군가 높다는 사람이 올 적입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백화점이나 커다란 가게에서였지요. 인천에서 서울로 어버이 손을 잡고 가끔 작은집에 마실을 갈 적에 작은아버지가 어떤 으리으리한 곳으로 이끌어 주면 그곳에 있는 어른 일꾼은 어린이한테도 ㄱ절을 했습니다. 저는 늘 깜짝 놀라서 그분들한테 ㄱ맞절을 했습니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할까요. 그냥 가볍게 손짓을 해도 좋을 텐데 왜 저렇게 어른 일꾼이 어린이한테도 ㄱ절을 해야 하는지 아리송하곤 했습니다.


저녁노을 타면
세상이 시 아닌가요 (압해도에 가면)

나이 오십에
자전거를 배웠다
초등학교 졸업하도록
자전거 못 타는
자식놈이 답답해서 (자전거)


  어느덧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이 땅에 정규직 말고 비정규직이 있으며, 노동조합이 허울뿐인 데가 많을 뿐 아니라, 헌법에도 나오는 노동삼권을 제대로 못 누리는 사람이 많은 줄 하나둘 알아차립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나 아저씨는 우리 이웃일 수 있고, 때로는 어머니나 아버지일 수 있는데, 일터에서는 몸이 매인 채 고분고분하기만 해야 하는 줄 깨닫기도 합니다.

  서로 이웃이라면 조금 더 부드러이 느긋하게 일해도 좋을 텐데 싶습니다. 서로 한집 사람이라면 한결 푸근하면서 넉넉하게 일해도 좋을 텐데 싶습니다. ‘손님’이란 말도 ‘고객’이란 말도 똑같이 높임말이지만, ‘고객 + 님’이라는 겹말을 쓰도록 시키는 회사나 사회 얼거리입니다. 높이려는 뜻은 나쁘지 않으나 겉치레가 덧치레나 겹치레가 되면서 듣는 사람으로서도 매우 거북한 자리가 생기곤 합니다.


월부로 양복을 맞춰 입고 정종을 사들고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서울 가서 성공했다고
졸졸 쫓아다니는 마을 꼬마녀석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는 창수는
늦게 취해 돌아온 날이면 불쌍한 자기 몸뚱아리가
정말 지긋지긋한 기름밥이 뱃속에 가득 차서
파란 쇳조각이 꾸역꾸역 기어나오는 기계처럼
털털거리는 기계처럼 생각된다고 쓸쓸하게 웃었지만 (우리들의 꿈)


  조금 더 따뜻한 사회로 달라진다면 겉치레나 덧치레나 겹치레는 잦아들 수 있을까요. 조금 더 느긋한 사회로 거듭난다면 어린이한테까지 ㄱ절을 해야 하는 일터는 사라질 수 있을까요.

  조금 더 가볍게 일하면서, 조금 더 살갑게 서로 이웃인 줄 느끼면서 마음을 쓰는 사회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라는 사슬을 끊고서, 일하는 사람 누구나 제몫을 받고 제살림을 꾸릴 수 있는 길을 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자꾸 신분이나 계급을 가르려 한다면,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일삯을 나누려 한다면, 이리하여 모든 사람이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푸대접이나 따돌림을 안 받는다고 여기고 만다면, 매우 갑갑하거나 답답할밖에 없습니다.

  고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쳤어도 똑같은 일꾼으로 지낼 수 있어야지 싶어요. 초등학교만 마치거나 초등학교조차 안 마쳤어도 똑같은 사람으로서 제 권리하고 참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지 싶어요. 서울에 살든 시골에 살든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대목을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나무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을
버리지 않으며
한겨울 속에서도
잎새를 떨구고
죽음의 빛깔로 말없이
생명을 키우며
어둠 속에서도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


  기름밥 먹는 일꾼이 기름밥보다 사랑밥을 먹고 웃음밥을 먹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작은 시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라고 느낍니다. 참말로 우리 모두 사랑밥 먹는 이웃이 되기를 빌어요. 웃음밥에 노래밥을 함께 먹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어깨춤을 지을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빌어요. 이 겨울에 찬바람을 먹으면서도 속으로 새로운 움을 키우는 나무 같은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서로 나무가 되고 함께 숲이 되어 이 땅을 푸르게 가꾸는 알뜰한 한 사람이 되기를 빕니다. 2017.12.10.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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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밥하면서 읽는 책 2017.12.9.


《엄살은 그만》은 밥하면서 읽기에 좋은 책일까? 어쩌면 밥상을 차려서 아이들하고 둘러앉아서 이 책에 흐르는 이야기를 하기에 좋다고도 할 만하다. 배고파서 죽을 동 살 동을 하던 사람 이야기가 흐른다. 배가 고파 죽을 노릇이지만 이웃이나 동무한테 밥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고, 스스로 고픔을 달래고 풀꽃을 뜯어먹고, 냇물을 퍼서 마시면서 하늘바라기만 하던 사람 이야기가 흐른다. 배고파 죽을 노릇이지만 이웃이나 동무는 이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단다. 이이 스스로도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을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그 찢어지게 가난한, 더욱이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아이가 나중에 이름난 모델이나 배우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배고프고 가난해서 어릴 적부터 늘 하늘만 올려다보며 살았다는 글쓴이는 눈이 3.0이라고 한다. 2.0이 아닌 3.0이라니. 하늘을 그렇게 올려다보며 살았다면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모저모 헤아려 보면, 이 책은 “엄살은 그만”이 아닌 ‘엄살’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 채 자란 사람이 스스로 삶을 지어낸 이야기라고 할 만하지 싶다. 생각해 보라. 가난하거나 배고픈 사람 가운데 누가 엄살을 부리는가. 엄살은 돈이 많거나 배가 부를 적에나 나온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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