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앤〉을 보는 마음


 아이와 옆지기와 아버지가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본다. 여러 해째 함께 본다. 여러 해째 함께 보지만, 볼 때마다 이야기에 찬찬히 빨려든다. 엊그제 옆지기가 한 말을 곰곰이 되새긴다.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은 참 빛깔 곱게 그린 작품이라 했다. 그런가? 그런가? 그동안 어렴풋하던 무엇인가 비로소 풀린다. 그렇구나. 빛깔 곱게 그린 작품이기 때문에 여러 해째 되풀이해서 들여다보지만, 이렇게 살뜰히 즐길 수 있구나.

 하루를 지나며 더 생각한다. 어쩌면 오늘날 사람들은 빛깔 고운 사람과 삶과 자연을 잊거나 잃거나 모르기 때문에,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보더라도 그닥 재미나다고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100번이나 1000번쯤 다시 볼 마음을 못 품을는지 모른다. 게다가,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에 담은 빛깔 고운 모습과 삶과 사람들 이야기를 오늘날 새롭게 엮으며 나누려 할 뜻이나 꿈을 못 품을는지 모른다.

 사진기를 들어 만화영화 몇 대목을 찍는다. 문득 옆지기가 엊그제 했던 말을 한 가지 더 떠올린다. 디브이디를 사고 싶다 했는데, 참말 디브이디를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두 사람과 우리 두 아이와 나중에 두 아이가 낳을는지 모르는 새 아이들을 헤아린다면, 살림돈이 빠듯해 빡빡한 하루하루이지만, 조금씩 갈무리해서 〈빨간머리 앤〉 디브이디를 통째로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부디, 내가 돈을 갈무리할 때까지 〈빨간머리 앤〉 디브이디가 남아 다오. (4344.5.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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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머리 앤〉을 그린 마음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은 소설책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소설책 〈빨간머리 앤〉만 있었다 해서 이 만화영화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소설책을 읽으며 살아가던 누군가한테 마음으로 우러나는 사랑이 샘솟을 숱한 다른 책과 수많은 사람들 살가운 이야기가 만날 때에 새로운 책이나 영화나 그림이나 사진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본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새로운 책이나 영화나 그림이나 사진을 빚을 수 있을까요.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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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책읽기


 아스팔트 밑이 어떻게 생겼다거나 어떻게 되었는가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어느 책에서 아스팔트 밑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읽으면 안다 말할는지 모른다. 어느 방송에서 아스팔트를 파헤쳐 밑바닥을 보여준다면, 이 방송을 본 사람은 ‘난 알아요’ 하고 이야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손수 아스팔트 밑을 파헤쳐 보지 않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만지다가 손이 데어 따끔한 느낌은, 손이 데지 않고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골짜기 물과 페트병 먹는샘물과 서울시 아파트 수도물이 저마다 어떠한 맛인가를 책을 읽거나 방송을 본대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자전거를 달리며 맞아들이는 바람과 시골집에서 창문을 열며 받아들이는 바람을 글읽기나 사진읽기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가난하다는 나라 힘겨이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글로 읽거나 사진으로 읽었대서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느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거나 ‘돕고픈 마음’이 된다 할 만할까.

 자동차를 몰 줄 모르면서 자동차 이름을 주워섬기는 일은 자동차를 아는 일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서 자전거문화나 자전거정책을 주워섬기는 일은 자전거를 아는 일이 아닐 뿐더러, 사랑하는 일이 될 수 없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끼곤 한다. 책을 읽었기에 ‘안다’고 말하기 때문에 참으로 무섭다고 느끼곤 한다. 책이란 대단히 무섭다고 느낀다. 책을 읽는 까닭은 내 머리속에 앎조각을 가득 채워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날 한국땅 어느 분이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고 말했다는데, 하루라도 책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내 삶을 옳게 다스리는 새 기운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책을 읽어야 할까. 하루에 몇 쪽쯤 읽어야 책읽기를 했다 할 만한가.

 만 쪽에 이르는 책을 읽으면 책읽기를 한 셈일까. 한 쪽을 겨우 읽으면 책읽기를 못한 셈일까. 한 쪽조차 아닌 고작 한 줄을 읽었으면 책읽기를 안 한 셈일까.

 삼백 쪽짜리 책에서 고작 한 쪽조차 못 읽었으나, 한 줄만 가까스로 읽은 뒤에 이 한 줄에 깃든 이야기를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 곱씹으면서 내 삶을 예쁘게 다스리는 사람은 책읽기를 한 사람인가 안 한 사람인가.

 사람들이 책을 읽고 나서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때에, 언제나 참 슬프구나 하고 느낀다. 책읽기 아닌 지식읽기를 하고서는 마치 책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우쭐거리는 모습은 그저 슬프다. 한 달에 열 권을 읽든 한 해에 백 권을 읽든 뭐가 대단할까.

 나는 한 해에 천 권 책을 장만하고 만 권 책을 읽는다. 어쩌면 더 살는지 모르고, 어쩌면 더 읽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한 해에 책을 백 권이나 열 권만 산다면, 또 한 해에 책을 열 권이나 한 권만 읽는다면 어떠할까. 천 권을 사들이는 사람과 열 권을 사들이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십만 권을 읽는 사람하고 한 권을 읽는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

 누군가는 한 해에 천 사람을 새 동무로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한 달에 백 사람을 새 동무로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날마다 열 사람씩 새 동무를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날마다 100킬로미터를 달릴는지 모른다. 자동차로든 자전거로든. 누군가는 날마다 백만 원을 벌는지 모른다.

 그런데, 책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여행이든 무어든, 얼마나 대수롭다지?

 사랑으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책이 된다. 책읽기란 사랑읽기이다.

 사랑으로 사귈 때에만 비로소 사람이 된다. 사람삶이란 사랑삶이다.

 한 해에 책 만 권을 읽는 사람이 대단하다 여길 수 있고, 논 만 평을 혼잣힘으로 일구는 사람이 대단하다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쌍둥이 아이를 돌보든 다섯 아이를 돌보든 한 아이를 돌보든, 아이 없이 살아가며 이웃 아이를 사랑하든, 모두 똑같은 사랑이고 삶이며 사람이다.

 사랑을 안 담은 책을 백만 권 읽는들 무엇하랴. 사랑이 안 담긴 책을 사랑을 안 실으며 읽고서는 사랑을 싣지 않는 ‘서평’이나 ‘신간소개’나 ‘독후감’ 따위로 끄적인들 무엇하랴.

 새로운 책은 읽을 까닭이 없고, 읽을 보람이 없으며, 읽을 값어치가 없다. 아름다운 책일 때에만 읽을 까닭이 있고, 읽을 보람이 있으며, 읽을 값어치가 있다.

 새로운 판으로 되살리는 옛책이란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구며 아름다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선보였기 때문에 새로운 판으로 되살린다.

 책은 그저 책이고, 사람은 그저 사람이다. 새로운 책이냐 예전 책이냐 하고 따질 수 없다. 새로운 사람이냐 해묵은 사람이냐 하고 가릴 수 없다.

 나는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을 하나도 안 좋아한다. 왜냐하면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은 예전에는 예전대로 권력 해바라기를 했고, 나중에는 또 나중대로 권력 해바라기를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했던 권력 해바라기를 스스로 씻거나 털면서 아름다이 살아갔다면, 예전에 했던 권력 해바라기는 탓하거나 나무랄 까닭이 없다.

 내 둘레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들 아름다운 사람들이 옛날 옛적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마냥 아름다운 사람들이지는 않았다. 저마다 예전에는 이렁저렁 얼토당토않거나 뚱딴지 같다 싶은 모자란 삶을 모자란 줄 모르며 바보스레 지내곤 했다. 당신들 스스로 당신 삶을 천천히 사랑하면서 시나브로 아름다운 길을 깨달아 거듭난다.

 나는 이원수 님 같은 사람을 참 좋아한다. 참으로 바보스럽다 할 만한 시민단체와 ‘진보 껍데기’ 지식인과 기자는 이원수 님을 가리켜 ‘친일 아동문학가’라는 이름표나 꼬리표를 붙인다. 그러나,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친일부역시를 썼대서 이이한테 이런 이름표나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쇠사슬 밤나라에서 이원수 님이 ‘독재부역 문학’을 어느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이원수 님은 ‘반성문’이나 ‘참회록’ 같은 이름을 붙여서 글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이원수 님이 걸어온 삶이나 남긴 문학을 읽으면, 이이 모든 삶과 문학이 곧바로 ‘반성문’이나 ‘참회록’이다. 한때 ‘아름다운 사랑’을 저버린 슬프며 모자라고 못난 짓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며 말도 못하는 몸짓으로 당신 가슴을 후벼파면서 한 줄 두 줄 적바림한 문학을 가만에 손에 쥐어 읽을 때면 늘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이러한 글삶을 일군 이원수 님이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고맙다고 느낀다.

 나는 전두환이나 노태우처럼 바보스러운 이들이 참 바보스러워서 딱하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이들이 모든 권력과 돈과 이름값을 내려놓은 다음, 수수하고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텃밭 쉰 평에 논 삼백 평을 얻어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당신 삶을 꾸린다 한다면, 이들을 좋아할 수 있다. 텃밭에 감자와 오이와 토마토와 당근과 배추와 무와 고추와 가지와 상추와 시금치를 골고루 심어 손수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땀을 흘리는 흙일꾼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이들 지난날 발자국이 어떠했다 하더라도 반가이 맞아들일 수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정책을 끊이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잘난 척하지 말고 힘과 돈과 이름을 송두리째 내려놓으며 흙일꾼이 된다면 즐겁겠다.

 그렇다. 진보이니 개혁이니 혁명이니 변혁이니 하고 신나게 외치기는 하지만, 막상 손수 흙일꾼이 되려고는 안 하는 지식인들은 전두환하고 똑같으며 이명박하고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참말,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똑같은 정당이다. 여기에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그닥 다를 구석이 없다고 느낀다. 아주 똑같은 정당은 아니다. 틀림없이 외침과 삶과 넋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삶과 눈물방울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날마다 두세 끼니 밥을 먹는 사람인 줄을 또렷이 깨달으면 좋겠다. 내가 먹는 밥을 어떻게 마련해야 좋은가를 조금 더 일찍 깨달으면 좋겠다. 스웨덴 정책이나 핀란드 정책도 다 좋기는 좋은데, 내 작은 마을에서 내 작은 손으로 내 작은 삶을 사랑할 수 없다면, 스웨덴 정책이나 미국 정책이나 마찬가지이고 핀란드 정책이나 북녘 정책이나 매한가지이다.

 군대를 키우거나 미사일을 만들거나 경찰을 늘린대서 평화를 지키지 못한다. 도시를 떠나든 도시에서든 내 살림집 앞마당을 텃밭으로 일구면서 차근차근 나 스스로 흙일꾼으로 살아가는 나날을 헤아릴 수 있어야 비로소 평화를 이룬다.

 사랑하는 책읽기란 사랑하는 삶읽기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느냐를 밝힐 때에, 바야흐로 책읽기를 어떻게 즐기며 나눌 때에 아름다운가를 몸으로 배운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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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과 책읽기


 나는 오늘을 살아서 오늘 새로 나오는 책을 헤아릴 수 있고 장만할 수 있으며 읽을 수 있다. 내가 오늘을 살지 못한다면 오늘 새로 나오는 책뿐 아니라 모레 새로 나올 책을 알 수도 장만할 수도 읽을 수도 없겠지. 이뿐 아니라, 이제껏 살아오며 미처 모르는 채 지나온 숱한 책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살피거나 장만하거나 읽을 수 없다. 하루하루 더 목숨을 잇는 일이란 몹시 고맙다.

 날마다 내 눈이 차츰 어두워진다고 느끼지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그닥 힘들지 않다. 글도 쓰고 책도 읽을 수 있는 눈이란 얼마나 고마운가. 둘째를 밴 옆지기 배를 바라보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첫째 아이를 쳐다볼 수 있는 하루란 얼마나 고마우면서 즐거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삶이란, 사랑할 수 있는 삶이며, 살림을 꾸리며 어깨동무할 수 있는 삶이로구나 싶다.

 뒷간에서 꼬물꼬물거리면서 기어다니는 구더기를 본다. 이 구더기들은 곧 파리가 되겠지. 파리가 되면 이 녀석들은 며칠쯤 살아갈까. 파리마다 고작 한 달도 못 산다 하지만, 새로운 파리가 까고 예전 파리는 죽고 하기를 되풀이할 테지.

 맛나게 먹은 두릅나무 새싹 자리에 새로운 싹이 돋는다. 두릅나무 새싹은 어느새 퍽 커다란 잎사귀로 바뀐다. 더 잘리고 싶지 않은 뜻인지 제법 기운차게 뻗는다. 이토록 기운차니까 두릅나무 새싹은 두 차례 잘라서 먹을 수 있다고 했겠지.

 비가 온다. 텃밭 푸성귀도 잘 자랄 테고, 텃밭에서 움트려는 온갖 풀도 잘 자라겠지. 푸성귀 말고 다른 풀은 호미질을 해서 뽑아야 하고, 멧자락이나 숲속에서 자라는 풀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책을 읽는다. 삶과 죽음을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이야기했다는 《돼지가 있는 교실》(달팽이,2011)을 읽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엇갈리는 슬픈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프로메테우스출판사,2011)를 읽는다. 누구나 살아가기에 글을 쓰고 책을 낸다. 누구나 살아숨쉬니까 글을 읽고 책을 읽는다. 살면서 살림을 일구고, 죽으면서 손을 놓는다. 사는 동안 바짝 기운을 내고, 죽는 자리에서는 스스럼없이 기쁘게 주먹을 풀어야겠지. (4344.5.1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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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와 책읽기


 둘째가 태어날 오월을 맞이한다. 곧 둘째가 태어나는데, 나는 우리 살림집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집안을 다스렸는가 헤아린다. 둘째가 오늘 저녁에 곧바로 태어나더라도 우리 살림집은 둘째가 느긋하면서 즐거이 깃들 만큼 알뜰히 다스렸는가 곱씹는다.

 새롭게 함께 살아갈 아이도, 둘째를 낳아 몸을 더욱 제대로 추스를 옆지기도, 동생을 맞이할 첫째도, 이들을 건사하며 집일을 도맡을 아버지도, 이 작은 시골집에서 옹기종기 복닥일 만큼 살림집을 다부지게 다스리는지 생각해 본다.

 아이가 태어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손에 책을 쥘 겨를이란 차츰차츰 줄어든다. 첫째가 태어나던 때에도 이와 같았다고 느낀다. 하루에 책 한 줄 안 읽으면 마음이 무너지느니 어쩌느니 한다지만, 집식구를 살피면서 하루살림을 꾸리자면, 살짝 허리를 펼 틈이 없을 때가 잦다. 어쩌면 책읽기란 ‘있는 사람만 누리는 기쁨’은 아닐까. 지난날 그토록 수많은 책을 사들여 읽던 내 삶이란, 나 또한 ‘무언가 있는 사람’이었다는 소리가 아닐까.

 나한테는 돈이 그닥 있지 않다. 나한테는 그저 실컷 부리는 몸뚱이하고 돈푼 조금 모이면 집살림 아닌 책살림에 보태는 마음가짐만 있었다. 홀로 살아가던 지난날에는 모든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책살림에 들이부었다. 이러니까 돈이 없고 집이 없으며 이름이 없달지라도, 여기에 지식이 없고 가방끈이 없으며 권력 따위가 없을지라도, 얼마든지 내 깜냥껏 ‘책삶을 누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할 만하다.

 이제 나는 내 몸뚱이를 집식구와 함께 살아가는 흐름에 맞추어 부려야 한다. 돈푼 조금 생기면 집살림을 마련하거나 집식구 먹을 여러 가지를 장만하는 데에 보태야 한다. 나로서는 종이에 담긴 사랑넋을 받아먹을 틈바구니가 거의 없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 주지 않는다면, 내 마음밥을 살찌운다는 책읽기를 하나도 못하고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되고 만다. (4344.5.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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