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책읽기


 감자를 어떻게 싹을 틔운 다음 어떻게 골을 마련하고 어찌저찌 심는가부터, 감자가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우다가는 꽃을 하얗거나 보랗게 피우는가를 거쳐, 감자알이 굵도록 하려면 어떻게 손을 보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호미질을 하며 캐는가를 보여주어야 잘 빚은 ‘감자 그림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보여주면 어딘가 아쉽습니다. 잘 캔 감자를 잘 씻어서 밥을 안칠 때에 굵으스름한 녀석을 골라서 함께 쪄서 먹는 맛이라든지, 물로 삶아서 먹는 맛이라든지, 스탠냄비에 물 없이 작은 불로 오랫동안 구워서 먹는 맛이라든지, 삭정이를 모아서 불을 지펴 구워 먹는 맛이라든지, 감자를 저마다 맛나게 먹는 이야기를 함께 담을 때에 비로소 아름다이 빚은 ‘감자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이한테 보여줄 만한 잘 빚은 ‘감자 그림책’은 퍽 드뭅니다. 이 가운데 가장 나은 책이라면 이오덕 님 시를 그림을 곁들여 엮은 《감자를 먹으며》(낮은산,2004)가 하나 있을 텐데, 이 그림책은 사람 몸짓이나 몸뚱이를 옳게 못 그렸고, 글쓴이 이오덕 님 얼굴빛이라든지 삶을 제대로 삭이지 못했어요. 이오덕 님은 그림책 겉장에 나오듯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며 땀흘리기를 좋아하셨다지만, ‘안경을 끼고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지’는 않았어요. 안경을 낀 때는 퍽 나이든 뒤요, 몸이 나빠진 뒤라, 이때에는 텃밭에 쪼그려앉아 일할 만한 몸이 아니었습니다. 글쓴이 삶을 곰곰이 더 살핀다면 이러한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그렇지만, 《감자를 먹으며》라는 그림책에 글을 쓴 분이 어떠한 삶인지를 모르더라도 감자 한 알을 아끼면서 좋아하는 이야기를 따사로이 즐길 만하다고 여깁니다. 우리 아이가 이 그림책을 펼칠 때에는 글쓴이 몸이나 삶이 어떠했다는 대목을 알 턱이 없고 헤아릴 까닭이 없어요. 오직, 감자를 즐겁게 먹으며 아끼는 손길을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다만, 아이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 이오덕 님 다른 책을 찬찬히 찾아서 읽는다면, 이 그림책 그림에서 무엇이 잘못되거나 모자란가를 쉬 깨달으리라 봅니다. 나중에 알아채거나 느낄 이야기를 일찍부터 가르치거나 알려주지는 않아도 돼요.

 그나저나, 아이하고 무슨 감자꽃 이야기를 나누어야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림책으로 아이한테 감자꽃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는지 곱씹어 봅니다. 마땅한 ‘감자꽃 그림책’이 없는 터전을 탓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텃밭에 감자를 심어 잎이 돋고 꽃이 피며 알이 흙속에서 굵는 한살이를 몸으로 느끼도록 하면 될까 하고 어림해 봅니다.

 집 앞 마당에서 노는 아이를 불러 텃밭에 핀 감자꽃을 보여줍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말하지 않아도 꽃을 함부로 따지 않습니다. 살며시 쓰다듬으며 예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두 살이던 때였나, 아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꽃 앞에서 “아이, 예쁘다.” 하고 말하며 쓰다듬는 손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도 이러한 손길을 따라하며 배웠습니다. 아이는 두 살 적 배운 손길을 네 살에 잊지 않습니다. 앞으로 스무 살이나 마흔 살에는 어떠할는지 헤아립니다. 그무렵에는 한결 따사로우면서 넉넉한 젊은이로 이 땅에 두 다리 튼튼하게 디딜 수 있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4344.6.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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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즐거움


 옆지기가 문득 말한다.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이에요.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아니까.” 그렇지만 나는 몰랐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늘 누리지만, 내가 누리는 이 즐거움이 하늘이 내린 고마운 선물인 줄 생각한 적이 없다. 옆지기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책을 읽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구나 하고 깨닫는다.

 바쁘니까 책을 못 읽는다는 사람, 힘들기에 책을 안 읽는다는 사람, 가난하기에 책을 살 돈이 없다는 사람, 돈이 많아서 흥청망청 놀고먹느라 책을 등지는 사람, 시험에 붙어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었기에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사람, 공무원이나 교사로 일하면서 책을 읽어야 하는 뜻을 모르는 사람 …… 이 수많은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선물 가운데 한 가지를 놓치는 셈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이란, 삶을 읽는 즐거움이다. 내 삶을 읽고 내 동무 삶을 읽으며 내 이웃 삶을 읽는 즐거움이 고스란히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못난 책이나 잘난 책이란 없다. 사랑스러운 책이랑 사랑이 없는 책 두 갈래만 있다. (4344.6.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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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드니까 책읽기


 아이들이 책을 읽습니다. 어른들이 책을 장만해서 아이들 손에 쥐도록 하니까 아이들이 책을 읽습니다. 어른들이 책을 장만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책을 읽지 못합니다. 책을 만드는 어른이 있기에 어린이는 책을 찾아서 읽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은 어른이 만듭니다. 어른들이 읽을 책도 어른이 만듭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책만들기라는 일 때문에 바쁘거나 힘듭니다. 그렇지만 내가 만드는 책에만 마음을 쏟느라 다른 책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만드는 책은 내가 만드는 책대로 꼼꼼히 살피거나 찬찬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책은 다른 사람이 만든 책대로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기쁘게 아로새겨야 합니다. 다른 좋은 책을 찾아서 읽기 때문에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지난날대로 교사 노릇 하기 참 벅찼다고 합니다. 갖가지 공문서를 써야 하고, 아이들한테 돈을 거두어야 할 뿐더러, 남자 교사는 밤새워 학교를 지켜야 했습니다. 이러면서 일삯은 몹시 적었습니다.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교사 구실 하기 꽤 힘겹다고 합니다. 지난날만큼 공문서를 써야 하지 않을 뿐더러, 아이들한테 돈을 거두지 않는데다가, 이제 학교를 밤새워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면서 일삯은 꽤 많습니다. 그렇지만, 교사로서 교사답게 일하는 터전이 안 된 지난날하고 견주어 이모저모 나아졌대서 교사 구실이 수월할 수 없습니다. 교사 구실이 수월하지 않은 까닭은 교사가 교사다움을 돌볼 수 있게끔 언제나 새로 배우거나 새로 가다듬으며 새로 태어나도록 이끄는 얼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사뿐 아니라 여느 어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 서서 무언가를 몸소 보여줍니다. 입으로 떠들며 가르치지 않더라도 모든 어른은 모든 어린이 앞에서 몸소 삶을 보여줍니다.

 어른이 어린이한테 보여주는 삶은 아름다울 수 있으나, 구지레할 수 있습니다. 시커먼 돈을 뿌리거나 집어삼키는 어른만 구지레하지 않습니다. 말과 삶이 다르거나 말이 거칠거나 막된 어른 또한 구지레합니다.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운 길하고 동떨어진 어른이라면 모두 구지레해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책을 읽으라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어른들 스스로 책을 읽는 일이 몹시 드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읽히는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조차 제대로 읽기는 읽고 나서 읽으라고 책을 내밀까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일곱 살이 되고 열 살이 되며 열다섯 살이 되다가는 스무 살이 될 무렵, 이러한 나이에 걸맞게 차근차근 읽으며 받아들일 만한 책을 ‘어른으로서 먼저 살뜰히 읽’는가요. 아이들이 즐거이 읽을 만한 책을 하나하나 살피거나 가려서 알뜰히 갖추었는가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나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모두 힘듭니다. 바쁘고 힘들며 벅찹니다. 그래, 더없이 바쁘기 때문에 책을 읽습니다. 더없이 바쁜 터라 내 삶을 사랑하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그지없이 힘들기 때문에 책을 읽습니다. 그지없이 힘든 터라 내 삶을 아끼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배우면서 거듭나는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아이들 앞에서 사랑스럽거나 믿음직한 어른이라 할 만합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배우지 않을 뿐더러 거듭나지 않는 어른이라 한다면, 아이들 앞에서 어른이나 교사라는 이름표를 스스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4344.6.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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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당개 책읽기


 서당개 세 해면 글을 왼다 했습니다. 서당 곁에서 글 외는 소리를 가만히 듣기를 세 해째 지내면 개조차 저도 모르게 서당글을 줄줄 왼다는 소리입니다. 이런 서당개 책읽기를 들며 곧잘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배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서당개 책읽기는 책읽기가 아닙니다. 서당개 글외기는 배움 또한 되지 않아요. 뜻이나 느낌이나 생각이 없는 채 기계처럼 줄줄 욀 뿐입니다. 사랑이나 마음이나 꿈이 없는 채 똑같이 따라할 뿐입니다.

 서당개가 논밭개로 바뀐다면, 논밭개는 세 해 뒤에 호미질을 할 줄 알는지 궁금합니다. 논밭개가 바다개로 바뀌면, 바다개는 세 해 뒤에 낚시질이나 그물질을 할 줄 알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서당개 책읽기란 아주 무섭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서당 곁에서 지내는 개조차 세 해가 지나면 ‘좋은지 옳은지 바른지 착한지 참다운지 고운지’를 가리지 않고 글을 외기 때문입니다. 서당개가 외는 글이란 얼마나 좋거나 옳거나 바르거나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울까요.

 서당에서 제아무리 좋거나 옳거나 바르거나 착하거나 참답거나 곱다 하는 글을 읽힌다 하더라도 서당개는 좋은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옳은 넋이나 바른 매무새나 착한 얼이나 참다운 길이나 고운 몸가짐을 익히지 못해요. 서당 곁에서 세 해 지난 뒤에 글을 외는 개는 다른 곳에 가면 이내 다른 곳에서 흐르는 글에 익숙해집니다. 다른 곳에서 흐르는 글이 궂은지 뒤틀린지 모자란지 그릇된지 어긋난지 따지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서당개처럼 키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서당개가 아닌 집개가 아닌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부터 스스로 옳은 길을 걸으면서 옳은 길을 아이가 느끼며 함께 웃고 울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부터 좋은 일을 흐뭇하게 하면서 아이 또한 곁에서 좋은 일을 흐뭇하게 고 조막손으로 조물락조물락 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살아갈 뿐입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나날에 앞으로 맞아들일 일이나 놀이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버이 되는 사람이나 어른 되는 사람이나, 또는 교사나 교수나 강사 같은 자리에 서서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서당개 책읽기를 시키면 안 됩니다.

 아이들은 곁에서 지켜보거나 구경한대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제 몸에 걸맞게 일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희 몸뚱이에 알맞게 일손을 나누어 맡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몸을 움직여 스스로 겪거나 치러야 배웁니다. 눈으로 지켜보거나 귀로 듣는대서 배울 턱이 없습니다.

 서당개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당개는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서당개는 서당글에 길들여졌을 뿐입니다.

 서당개와 같이 길들여지는 오늘날 아이들을 바라보면 참으로 무서울 뿐 아니라 슬픕니다. 학원에 길들고 영어에 길들며 한자에 길들고 수많은 지식교육 그림책과 동화책에 길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더없이 무서우면서 슬픕니다. 왜 아이들하고 함께 삶을 나누지 못하는 어른이 되려고 하는가요. 왜 어버이와 교사 되는 이들은 당신 어버이와 교사 삶부터 참다이 사랑하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길을 느끼지 못하는가요.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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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삶



 사진은 사진기를 써서 이룬 열매를 일컫습니다. 그렇지만, 사진기를 써서 이룬 열매를 모두 사진이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틀림없이 사진이라 할 테지만, 속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사진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밥을 하면 다 밥이 되겠지만, 밥을 하다가 그만 간장인 줄 알고 염산을 부었다든지, 된장인 줄 알고 흙을 넣으면 어떻게 될는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밥이라 할 테지만, 이러한 밥은 아무도 먹지 못합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얻을 때마다 방사능이 나옵니다. 이 방사능을 막으려고 원자력발전소는 시멘트를 아주 두껍게 바릅니다. 그러나 시멘트벽을 아무리 두껍게 한들 모든 방사능을 막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원자력발전소는 큰도시에서 무척 떨어진 곳에 마련합니다. 이른바 두메나 시골에 마련합니다. 방사능은 아주 조금만 새더라도 사람과 들판과 물 모두를 죽일 수 있습니다. 방사능에 젖으면 아기를 낳을 때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죽거나 팔다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흔히 가볍게 쓰는 전기라 하지만, 전기는 흔히 가볍게 쓸 만하지 않습니다. 너무 아슬아슬하게 다루면서 쓰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두메나 시골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도 괜찮은 곳일까 궁금합니다. 두메사람이나 시골사람은 방사능덩어리를 곁에서 떠안으면서 살아야 할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쓰는 전기를 왜 도시에서 안 만들고 두메나 시골에 발전소를 짓고, 길디긴 전깃줄을 드리워 도시로 가져가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은 말 그대로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습니다. 다만, 사진을 찍으면서 놀이를 즐기려 한다면, 이들은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놀이를 한다’고 해야 옳습니다.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 사진쟁이 앞에서 ‘사진기를 들고 놀’ 때에도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놀이’라 하거나 ‘모델’이라 하겠지요.

 멋스러이 보이는 사진을 노리는 분들이 퍽 많습니다. 사람들이 멋스러이 바라보기를 바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도 멋스러이 느끼고픈 사진을 노린다 할 만합니다. 이분들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사진찍기’를 한다 여길 텐데, 속으로 본다면 ‘멋부리기’를 하는 셈입니다. 멋부리기는 멋부리기이지 사진찍기는 아니에요. 사진찍기는 멋부리기가 아니라 사진찍기입니다.

 사진을 찍어 그러모은 다음 사진잔치를 마련하는 분이 많습니다. 저도 사진잔치를 스무 차례 가까이 했습니다. 사진잔치를 마련할 때에는 그동안 내가 걸어온 사진길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앞으로 걸어갈 사진길을 새롭게 살펴보려는 뜻입니다. 땀흘려 찍은 사진을 이웃한테 선보이면서 내 이웃이 내 사진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맑아지거나 흐뭇해지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 이웃이 내 사진을 바라보며 좋아해 주거나 사랑해 주기를 빌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사진으로 내 삶을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내 밥그릇을 비우면서 끼니를 때울 때에 내 몸을 북돋우고 내 삶을 이을 마음이지, 내가 내 밥그릇을 비우면서 내 이웃이 배가 부르리라 여길 수 없어요. 내 사진잔치는 오로지 내 사진길을 밝히거나 채우는 잔치마당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잔치를 마련하면서 ‘내가 맞아들여 나를 북돋우는’ 뜻이 아니라 ‘남한테 내보여 남한테 평가(값매김)를 받으려’ 하는 이가 꽤 많습니다. 전시관마다 수많은 사진잔치를 꾸준히 잇고, 신문과 잡지와 방송마다 새로운 사진잔치를 알립니다. 사진잔치는 왜 알리고 어떻게 알리며 누구하고 나누는 자리일까요.

 사진은 삶입니다. 사진은 바로 내 삶입니다. 내가 찍는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삶입니다.

 내 삶이 겉치레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거들먹거리거나 자랑하려는 매무새라 한다면 내 사진 또한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여주거나 멋스러이 보여주려는 매무새가 되고 맙니다.

 내 삶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에 맞추어졌다면, 내 사진 또한 돈을 벌 만한 사진찍기로 기울어집니다. 내 삶이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듯이 ‘역사에 남을 사진 한 장’을 꾀하는 데에 맞추어졌으면, 내 사진 또한 이름값을 높이거나 얻거나 누리는 데로 치우칩니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살며, 살아가는 대로 바라보고, 바라보는 대로 살다가, 사진기를 쥐어 사진 한 장 찍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하고 왜 어떻게 살림을 꾸리는 한 사람일까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는 사랑을 바라는 사람인지 돈값을 꾀하는 사람인지를 가만히 되뇝니다. 나는 꿈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는 착하게 살고픈 사람인지, 나는 어여쁜 살림살이를 아끼고픈 사람인지 찬찬히 곱씹습니다.

 멋부리는 삶은 그럴듯하겠지만, 따사로운 삶은 아름답습니다. 이름있는 삶은 빛나겠지만, 너그러운 삶은 참답습니다.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 글 한 줄, 만화 한 쪽, 노래 한 가락, 춤 한 사위, 어느 곳에서나 예쁜 넋이 어리는 예쁜 삶이 고마우면서 반갑습니다.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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