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과 책읽기


 장마철 첫날, 음성 장마당에 수레를 단 자전거를 끌고 다녀온다. 아이를 태우고 함께 다녀오고 싶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틀림없이 비가 퍼부을 듯해서 혼자 나가기로 한다. 고뿔이 나서 한동안 자전거를 안 태웠기 때문에, 또 몸이 아파서 바깥에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한 터라, 아이는 서럽디서럽게 운다. 바깥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한참 듣다가 장마당 마실을 갔다.

 음성 읍내에 닿기 무섭게 빗줄기가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를 쫄딱 맞는다. 집식구 먹을거리를 가방과 수레에 실은 채 비를 맞으며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다. 나는 여태껏 얼마나 오랫동안 자전거 안장에서 살았을까.

 나한테 자가용이 있어 읍내 장마당에 휙 다녀올 수 있다면, 가고 오는 데에 고작 십 분쯤 걸리리라. 나한테 자전거가 있어 읍내 장마당에 땀 뻘뻘 흘리며 낑낑거리는 데에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나는 자전거를 타기 때문에 자전거에 앉은 채 길에서 흘리는 겨를이 길까?

 빗물을 혀로 핥으며 더 생각한다. 자가용을 모는 이들이라면 읍내 장마당 다녀오는 데에 얼마 걸리지 않을 테지만, 다른 곳을 돌아다니느라 외려 자동차 걸상에 훨씬 오래 앉은 채 보내리라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추스른다. 아이와 옆지기가 먹을 밥을 차리기 앞서, 몸을 씻는다. 내 몸을 씻어 땀기를 가신 다음, 둘째 갓난쟁이를 씻기고, 네 살박이 첫째를 씻긴다. 이런 다음 아이와 옆지기가 먹을 밥을 차린다. 부산을 떨다가 문득 생각한다. 나는 집안일을 하는 데에 얼마나 기나긴 겨를을 들이면서 살아가는가. 밥을 차리는 데에, 설거지를 하는 데에, 빨래를 하는 데에, 집안을 쓸고 닦는 데에, 아이를 돌보는 데에, ……. 이와 함께, 이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옆지기한테는 얼마나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가를 곱씹는다.

 이모저모 따지니, 하루 가운데 책읽기에 들일 만한 겨를은 아예 없다. 책읽기를 할 틈이 생길 수 없다. 1분이라도 등허리를 펴고 자리에 누워 한숨을 돌려야 겨우 다음 일을 할 만하구나 싶다.

 깝깝한가? 고단한가? 괴로운가? 슬픈가? 서운한가?

 아이와 옆지기가 새근새근 잠든 깊은 밤에 깨어 똥오줌기저귀 일곱 장과 이것저것 빨래하는 동안 다시금 생각한다. 나는 고작 서너 해 이렇게 아이키우기로 온삶을 바친다지만, 내 어머니와 옆지기 어머님은 당신 아이들 보살피는 데에 온삶을 쏟았다. 나는 이것저것 하면서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지만, 내 어머니와 옆지기 어머님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또 내 어머니를 낳아 돌본 어머니와 옆지기 어머님을 낳아 보살핀 어머님은 어떤 삶이었을까. 당신들은 얼마나 오랜 나날을 집안일을 하면서 보내야 했을까.

 참말, 집안일을 하면서 책읽기를 할 수는 없다. 집안일로 온몸 기운이 쏘옥 빠져나가고 눈코 뜰 사이 없는 터라, 책읽기를 생각할 틈바구니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일에 매인 채 살아가면,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거나 물려줄 수 있을까. 아이들은 ‘일만 하는’ 어버이를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까.

 더없이 고되지만, 1분 더 쉬기보다는 1분이라도 말미를 내어 책을 펼치자고 다짐한다. 고작 하루에 1분이더라도 수첩에 글을 끄적이자고 다짐한다. 아이는 책을 펼치거나 글을 끄적이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책 읽어?” “공부해?” 하고 묻는다. 아버지는 “응, 책 읽어.” “그래, 공부해.” 하고 말한다.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책을 읽거나 글을 끄적이는 놀이를 한다고 시늉한다. 저랑 더 기쁘게 놀아 주지 못하는 어버이인 탓에 말을 잘 안 듣거나 말썽을 피우곤 하지만, 아이는 참 착하다. 예쁘다. 이 착하고 예쁜 아이는 앞으로 제 삶을 빛내거나 밝히는 고운 책을 스스로 즐거이 찾아내어 맞아들일 수 있기를 빈다. 이러면서 집안을 돌보는 일과 살림이 무엇인지를 슬기롭게 깨달아 어깨동무할 수 있기를 바란다.

 힘겨운 나날이 이어지는 어버이로서, 아픈 옆지기가 집일이나 집살림을 거의 거들지 못하는 나날을 늘 맞이하는 어버이로서, 우리 집 아이들이 한손에는 걸레나 호미나 빨래비누를 쥐고, 다른 한손에는 책이나 연필이나 물감을 들기를 비손한다. (4344.6.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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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똥벌레 책읽기


 첫째 아이 오줌을 몇 시에 누일까 생각하다가 한 시 십 분에 누인다. 두 시쯤 누일까 싶기도 했으나, 엊저녁 여덟 시에 누이고 재웠기에 두 시까지는 좀 힘들 듯해서 한 시에 누인다. 한 시에 누이면서 조금 걱정스럽다. 이 아이가 때때로 다시 잠들지 않고 몇 시간을 잠자리에서 노래부른다든지 종알거린다든지 발로 바닥을 콩콩 찧는다든지 하기 때문이다.

 아이 오줌그릇을 들고 텃밭으로 나와 뿌린다. 도랑 옆으로 개똥벌레 한 마리가 키큰 소나무를 오르내리며 난다. 한 마리는 도랑 옆에 가만히 앉아서 쉰다. 깊은 밤 개똥벌레 하얀 빛은 퍽 멀리서도 알아볼 만하다. 그렇다고 책을 읽을 만큼 밝지는 않은데, 먼 옛날이라면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밤이었을 테고,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밤에 개똥벌레를 백 마리쯤 잡아서 창호지에 넣었으면, 종이에 적힌 글을 그럭저럭 읽을 만할 수 있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불빛 없는 시골자락에서는 반달만 떠도 길이 훤하게 보이니까. 반달부터 보름달까지는 참말 밤에도 달빛에 기대어 책을 읽을 수 있다.

 기지개를 켜고 집으로 들어간다. 마당에 서서 휘 둘러보고 들어가려는데 앞쪽에서 개똥벌레 한 마리 날아온다. 이 녀석은 내가 선 줄 모르고 내 쪽으로 날아올 테지. 가느다랗게 깜빡이는 작은 불똥이 내 눈앞을 스친다. 아주 작다. 모기나 파리보다는 조금 크지만 잠자리나 나비보다 훨씬 작다. 이 작은 개똥벌레 꽁무니에서 하야스름한 불똥이 피었다가 진다. 아이는 어김없이 노래를 부른다. 두 시 십사 분. “벼리야, 밤에 다들 자는데 노래부르면 안 돼지.” 둘째 아이 기저귀를 열 장쯤 빨아서 두 방에 나누어 널며 이야기한다. 장마 첫날, 밤에 비가 멎었기에 겨우 기저귀 빨래를 해서 말리려 한다. 첫째 아이는 목소리를 낮추어 노래를 부른다. 이러다가 노래를 그치고, 아버지보고 “이불 덮어 주세요.” 하고 말하더니 손과 발로 바닥을 콩콩 툭툭 두들기며 논다. (4344.6.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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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사람


 사진은 사람입니다. 찍는 사진은 찍는 사람 얼굴입니다. 보여주는 사진은 보여주는 사람 눈빛입니다. 나누는 사진은 나누는 사람 사랑입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나라밖으로까지 ‘출사’를 다니고, 누군가는 가난하다는 동네로 ‘출사’를 다닙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출사를 하며 찍는 사진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사진으로 찍으려는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스스럼없이 찍는 사진만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 할 수 있고, 취미로 야구를 즐긴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취미는 취미이지, 취미가 사진이거나 야구가 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살아가야 사진이고, 야구로 살아가야 야구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되어야 사진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프로 야구선수가 되어야 야구라는 소리 또한 아닙니다. 내 삶을 사진으로 맞추면서 사진하고 한몸이 될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는 소리입니다. 내 삶을 야구와 맞물리면서 야구하고 한마음이 될 때에 바야흐로 야구라는 소리입니다. 아이키우기일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이고, 살림살이를 꾸릴 때에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사진’의 ‘사’ 자도 모르는 주제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진하고 한몸이 되지 않을 때에는 전문 사진쟁이가 되든 취미 사진쟁이가 되든 사진하고 동떨어질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프로이든 아마이든 대단하지 않고, 직업이든 취미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이 사진길을 걷느냐 아니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진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진에는 사진기를 쥐어 살아가는 사람들 말과 넋과 꿈과 삶과 생각과 매무새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 또한 착하게 찍습니다. 사진만 착하게 찍고, 삶은 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과 삶이 다르면서 사진만 착하게 군다면, 겉과 속이 다른 매무새는 어김없이 사진에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여느 사람이 쉬 알아채지 못할 뿐입니다. 거꾸로 사람은 착한데 사진은 안 착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안 착하지만 사람이 착할 수 없습니다. 사진이 착하지 않은 사람은 당신 삶 또한 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쁘장한 모습을 찍는대서 예쁘거나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슬프거나 고단한 삶자락을 찍는대서 밉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사진에 서리는 기운과 넋과 마음과 꿈과 뜻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착함과 나쁨이에요.

 사진은 사람이고 다시 사람이며 또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가려는 길에 걸맞게 내 사진기를 장만하고 내 사진감을 찾으며 내 사진솜씨를 냅니다. 더 낫다는 장비로 틀림없이 더 낫다는 사진을 얻을 수 있겠지만, 더 엉성하다는 장비로도 얼마든지 더 낫다는 사진을 얻을 수 있어요.

 질감이 더 보드라울 때에 더 나은 사진이 아닙니다. 초점이 잘 맞거나 흔들림이 없을 때에 더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밝거나 환하거나 맑은 웃음이 피어나야 아름다운 사진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깃들일 때에 비로소 좋은 사진이고 착한 사진이며 참다운 사진입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하루를 곱씹습니다. 나 스스로 흐뭇하면서 기쁘게 맞이하는 하루일 때에 내가 즐기는 사진이 어떠한가를 헤아립니다. 나 스스로 괴로우면서 힘겨울 때에 내가 이루는 사진이 어떠한가를 되뇝니다.

 더 하거나 덜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모습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내 삶 그대로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내 사진입니다.

 사람이고 사진이면서 삶입니다. 오늘 먹은 밥이 오늘 찍는 사진입니다. 오늘 내 살붙이하고 마주하는 모습이 오늘 내가 마주할 사진입니다. 내 아이랑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아이를 바라보며 찍는 내 사진입니다.

 사진기를 쥐기 앞서 내 됨됨이를 다스려야 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하기 앞서 내 살림살이를 보듬어야 합니다. 사진기로 바라보기 앞서 내 삶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려는 내 나날인가를 돌이키면서, 내가 손에 쥔 사진기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려 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는대서 아이가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낸대서 아이가 더 많이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가 머리속에 이런 앎조각이나 저런 앎부스러기를 더 채운대서 더 슬기롭지 않습니다. 아이는 저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어른)를 바라보면서 삶을 배우고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빚으려는 사람들은 사진기를 쥘 때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모든 발자국과 손길이 그러모여 사진삶으로 이루어집니다.

 배우려 하기에 배우지 않습니다. 살려고 하기에 살아냅니다. 가르치려 하기에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살아가려 할 때에 살아갑니다.

 큰소리로 꾸짖는 일은 큰소리로 꾸짖는 일입니다. 사랑도 아니지만, 가르침도 아닙니다. 몽둥이나 회초리를 드는 일도 몽둥이나 회초리를 드는 일이지, 사랑이나 가르침이 되지 않아요. 몸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몸으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합니다. 한마음 한몸 한삶이어야 합니다. 아이키우기일 때이든 책읽기일 때이든 사랑나누기일 때이든 사진찍기일 때이든, 한결같이 한마음 한몸 한삶이어야 합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는 사진이고, 사진으로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4344.6.1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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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책읽기


 누가 어느 책을 깎아내린대서 내가 어느 책을 읽을 때에 좋은 알맹이나 줄거리나 빛줄기가 스러지거나 옅어지지 않는다. 누가 어느 책을 추켜세운대서 내가 어느 책을 읽을 때에 얄궂은 속살이나 겉치레나 허울이나 껍데기가 사라지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읽는 책이요, 책은 책 그대로 책이다.

 누가 나를 깎아내리는 말을 한대서 내가 깎이거나 낮추어지지 않는다. 누가 나를 추켜세운대서 내가 올라가거나 높아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나일 뿐, 둘레 사람들 어떠한 말에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다. 나로서는 내 삶을 사랑하면서 늘 착하며 참다이 걸어갈 한길을 돌아볼 노릇이다.

 겉이 아닌 속을 읽을 책이고, 겉치레가 아닌 속치레를 할 삶이며, 입에 발린 사랑이 아니라 따스히 껴안는 사랑을 나눌 일이라고 느낀다. 부질없는 말을 일삼을 때에는 부질없는 삶에 스스로 얽히고 만다. 맑은 말로 맑은 넋을 키우며 맑은 삶을 일구면 된다. 밝은 글이 깃든 밝은 책을 알아보며 밝은 꿈을 가꾸면 된다. (4344.6.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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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이름과 책읽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을 펼쳐 읽다가 문득 책날개에 적힌 해적이를 들여다본다. “1952년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났고, 목포교육대학과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라는 대목이 첫 줄에 나온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이야기야 으레 적을 만하지만, 어느 대학교를 마쳤다는 이야기를 꼭 적어야 했을까 궁금하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해에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이야기도 굳이 안 적을 만하다만, 사랑을 어떻게 받고 꿈을 어떻게 키우며 삶을 어떻게 일구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함께 곁들인다면, 나란히 적어도 괜찮을 나이요 고향이라고 본다. 그런데 대학교 이름은 왜 밝혀야 할까. 대학교 이름을 밝힌다면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 이름은 안 밝혀도 될까.

 발자국을 찬찬히 밝히려 한다면 학교이름 적는 일이야 대수롭지 않다. 그렇지만, 몇 줄 안 되는 책날개에 학교이름을 적느라 한두 줄이나 두어 줄을 흘린다면, 정작 책쓴이 삶을 더 깊이 돌아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셈이 아닐까.

 학교가 사람을 얼마나 가르칠까. 학교는 사람을 어떻게 가르칠까. 학교를 다닌 사람은 무엇을 배울까. 학교에서 사람은 어떤 사랑과 꿈과 삶을 배울까. 학교는 사람한테 무슨 책을 읽힐까. (4344.6.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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