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책읽기


 엊저녁부터 22℃로 떨어진다. 드디어 올해에도 가을이 한복판에 이르는 한편, 머잖아 겨울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저녁나절 방 온도가 22℃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보일러를 한 차례 돌린다.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던 때 22℃는 이제부터 보일러를 적게 때거나 안 때도 된다는 뜻이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22℃는 이제부터 신나게 보일러를 때야 하는 철이 닥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22℃는 온도계를 보기 앞서 내 살갗과 몸으로 먼저 느꼈다. ‘어, 오늘은 저녁부터 퍽 쌀쌀한데. 오늘은 창문을 더 일찍 닫아야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아직 한가위가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꽤 쌀쌀하다고, 좀 서늘하다고 느끼는 저녁바람이 되었다고 느끼면서 온도계를 보았다. 그제까지는 저녁에 24℃나 25℃였고, 한밤에 23℃나 22℃까지 떨어졌다. 이제는 해가 떨어진 저녁부터 22℃가 되었으니, 곧 한밤에 20℃나 19℃까지 떨어지겠지.

 시골에서 살아가더라도 읍내나 시내로 일하러 다니는 사람은 이러한 온도를 잘 못 느끼리라 본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날마다 하늘과 구름과 달과 해와 바람과 나무와 풀을 살필 때에 비로소 이러한 온도를 잘 느끼리라 본다. 두릅나무 작고 하얀 꽃이 한창 흐드러지다가 이제 하나둘 저문다. (4344.9.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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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위 책읽기


 한가위가 다가오면서 밤하늘 초승달조차 몹시 밝다. 그나다란 초승달 밝기가 여느 때 보름달만 하다. 초승달이 먼 멧등성이 너머로 사라지고 난 뒤에는 까만 바닥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한결 눈부시다. 한가위에 다다르면 달이 넘어간 까만 바닥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아주 눈부시겠지.

 가을은, 한가위는, 달은, 별은, 미리내는, 바람은, 풀벌레 노래와 무르익는 열매는, 달력에 없고 책에 없으며 인터넷이나 신문에도 없다. 모든 가을과 한가위와 열매는 푸른 들판과 아늑한 멧자락과 너른 바다에 있다. (4344.9.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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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선


 새 살림집을 찾으러 춘천으로 갔다가 충주 멧골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 얼핏설핏 시끄러이 벅벅대는 라디오를 듣다. 시외버스 일꾼은 웬만해서는 라디오를 틀지 않는다. 시외버스를 타는 사람은 으레 코 자기 마련이라, 잠잘 때에 귀 따갑지 말라며 조용히 다니곤 한다. 그런데 이날 따라 시외버스 일꾼은 라디오를 틀었고, 라디오 소리는 내 귀에까지 들린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들으면서 멀미를 참는다. 이날 내가 탄 시외버스 일꾼은 120킬로미터 가까이 될 듯한 빠르기로 달리면서 찻길을 자꾸 바꾸는 바람에 속이 아주 미식미식 부글부글 끓고 골이 띵하다. 많은 사람 태우고 달리는 길을 좀 보드라이 몰 수 없는가. 좀 귀 안 아프도록 조용히 달릴 수 없는가. 어지럽고 메슥거려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차라리 얼른 생극에 닿기를 바라는데, ‘노동운동가 …… 천만 노동자의 …… 고인 …… 전태일 ……’ 하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창문에서 뗀다. 문득 무슨 느낌이 스친다. 설마, 아니 설마가 아닌 생각 하나가 스친다. 그렇구나. 틀림없이 그렇구나. 이제 어머니 한 분이 당신 사랑스런 아이 곁으로 가는구나. 먼저 떠난 아이가 바란 꿈을 이루려고 온몸과 온마음과 온삶을 바친 넋이 이제 마음을 고이 쉬면서 눈물로 젖는구나.

 창밖을 바라본다. 멀미 기운은 가라앉지 않는다. 머리는 그저 어지럽다. 가을 볕살 받으며 천천히 누렇게 익는 나락이 바람이 흩날린다. 눈물이 핑 돈다. 내 어머니가 머잖아 하늘나라로 간다 할 때에도 이렇게 눈물이 핑 돌겠지. 내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하늘나라로 갈 때에 이처럼 눈물이 젖겠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여든한 살까지 살아갈 수 있으면 앞으로 열 몇 해쯤 뒤가 되겠지.

 세 사람 이름이 나란히 떠오른다. 세 사람은 세 나라에서 많은 이들한테서 어머니라는 이름을 들었으리라. 메어리 해리스 존스, 다나까 미찌꼬, 이소선. 《마더 존스》와 《마더 죤스》, 《어머니의 길》, 《미혼의 당신에게》 네 가지 책은 모두 새책방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고요히 잠든 씨앗은 언제쯤 싱그러이 새잎을 틔울 수 있을까. (4344.9.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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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2-01-05 15:46   좋아요 0 | URL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읽으면서 많이 울었는데...ㅠㅠ
 



 시외버스 책읽기 2


 책을 읽으면서 버스내음이나 버스소리를 잊으려고 하지만, 속이 울렁거리면서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서울에 닿기 앞서부터 바람결이 칙칙하다고 느낍니다. 이곳 서울에서 이 많은 사람들은 무얼 보고 마시고 쓰고 먹으면서 목숨을 이을까요. 이곳에서 살아왔고 이곳에서 살아가며 이곳에서 살 사람들한테는 무슨 빛줄기가 도움이 되거나 쓸모가 있을까요. 아니, 빛줄기를 바라기는 할까 모르겠습니다. 빛줄기를 찾기나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내가 시외버스를 타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책읽기이고 다른 하나는 잠자기입니다. 그러나, 시외버스에서 잠을 자며 몸이 개운한 적이란 없습니다. 시외버스에서 책을 읽으며 머리가 맑아지는 때란 없습니다. 푸른 들판에 드러누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곳이 아니라면 잠을 자더라도 개운하지 않습니다. 푸른 들판 내음과 소리를 맞아들이고 파란 하늘 내음과 소리를 받아들이는 자리가 아니라면 책을 읽더라도 맑거나 밝은 넋이 깃들지 않습니다.

 책을 살짝 내려놓습니다. 한손으로 이마를 짚습니다. 조용히 비손합니다. 부디 나부터, 아무쪼록 내가 먼저, 메마르거나 팍팍하거나 쓸쓸한 곳을 오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내 빛줄기를 놓거나 잃거나 내동댕이치지 말자고 비손합니다. 내가 걷는 길에 내 발자국 고이 아로새기고, 내가 쥔 책에 내 손길 예쁘게 어리도록 하자고 비손합니다. 아나스타시아는 나를 돕고, 나는 아나스타시아를 돕습니다. 옆지기가 나를 돌보고, 나는 옆지기를 돌봅니다. (4344.9.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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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 책읽기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야 사랑을 이루지 못합니다. 목숨을 들이지 않고서야 아이를 낳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목숨을 쏟지 않고서야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마어마하게 따사로운 목숨이 깃든 책 하나를 고맙게 읽습니다. 나 또한 내 목숨을 기울여 쓴 글과 찍은 사진으로 책 하나 일구어 내놓습니다. (4344.9.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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