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책읽기


 이른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쉬지 않고 뛰어노는 아이를 바라본다. 둘째가 태어날 날을 손꼽으면서 마무리지을 온갖 집일을 건사한다. 모처럼 일요일 햇살이 아침부터 포근하면서 바람이 조용하다고 느껴, 지난겨울 아이가 입던 두툼한 겉옷 세 벌을 빨기로 한다. 한 벌씩 빨아 마당 빨랫줄에 넌다. 오늘은 한 벌만 빨고 이듬날에 또 한 벌, 모레에 다시 한 벌을 빨까 생각했지만, 모레이든 글피이든 날이 좋으리라고는 알 수 없다. 오늘 몰아서 다 해야 마음이 홀가분하다.

 생각해 보면, 이듬날이든 모레이든 글피이든 다른 빨래를 해야지. 둘째가 태어날 때에 누일 깔개를 찾고, 겨우내 덮은 이불과 깔개를 빨아야지. 내 겉옷과 옆지기 겉옷도 빨아야지. 빨래만 헤아려도 아직 다 끝마치려면 멀었다. 어느 한 가지도 미룰 수 없다. 빨래 한 가지만 하더라도 무척 많은데, 집일을 하느라 아이하고 못 놀기 일쑤일 테지만, 아이는 이제 혼자서 마당 이쪽에서 저쪽으로 신나게 달음박질을 치며 소리치고 논다. 세 살 적까지만 하더라도 빨래하는 아버지 곁에서 물놀이를 했음직한 아이가, 물놀이보다 더 재미난 뜀박질을 찾은 듯하다. 마당 한쪽 끝에서 민들레 노란 꽃송이나 냉이 하얀 꽃송이를 뜯는다. 날마다 뜯고 또 뜯어도 꽃은 흐드러진다. 아이가 날마다 수십 송이씩 꺾는다 하더라도 날마다 수백 수천 송이씩 새로 피고 진다.

 우리 식구가 인천에서 살던 때에는 아버지가 날마다 골목마실을 여러 시간 하는 동안 아이는 골골샅샅 누비면서 골목꽃을 구경했다. 골목꽃을 구경하며 걷던 때에는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골목이웃이 애써 어여삐 키우는 꽃을 함부로 꺾을 수 없다. 공무원이 찻길에 심는 꽃은 그다지 꺾을 만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골목길 틈바구니에서 자라는 민들레나 개불알꽃이나 냉이꽃이나 망초꽃은 먼지를 듬뿍 뒤집어쓰곤 해서 고운 빛깔이 또렷하지 못하다.

 멧자락 시골집에서는 들꽃이나 들풀이 먼지를 뒤집어쓸 일이 드물다. 아니, 먼지를 뒤집어쓸 일이란 없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고 나부끼며 춤춘다. 바람결에 따라 뒤집어지는 나뭇잎이 반짝거린다. 도시에서는 아래쪽 나뭇가지를 모조리 잘라내어 나무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옳게 살피기 힘들다. 멧골짝에서 자라는 나무를 굳이 가지치기 하는 사람이란 없다. 이럴 겨를도 없고, 이렇게 한대서 누가 돈을 주지도 않지만, 숲속 나무를 가지치기할 까닭부터 없다.

 나뭇잎이 어디에서 돋아 어떻게 흐드러지는가를 고스란히 들여다본다. 아이가 나뭇가지를 꺾거나 나뭇잎을 뜯거나 꽃잎을 딴대서 걱정할 일이 없다. 꺾거나 뜯은 잎과 가지는 흙한테 돌려주면 된다. 흙한테 돌려주면 흙이 살아날 거름이 될 테고, 나무한테 돌아가는 밥이 되겠지.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아이한테 자연그림책은 거의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자연그림책이건 시골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가 읽도록 엮거나 쓰거나 만들지 않으니까. 어떤 자연그림책이건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갈 아이가 읽도록 엮거나 쓰거나 만드니까.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어른한테 생태환경을 다룬 책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생태환경책이건 시골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어른이 읽도록 엮거나 쓰거나 만들지 않으니까. 어떤 생태환경책이건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갈 어른이 읽도록 엮거나 쓰거나 만드니까.

 옆지기와 아이와 내가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던 때를 돌이킨다. 이무렵 장만해서 읽던 자연그림책 가운데 몹시 아름다우면서 가슴으로 촉촉히 젖어들던 책이 얼마 안 된다고 떠오른다. 그때에는 도시내기였지만, 도시내기 눈으로 들여다보더라도 자연그림책을 너무 지식으로만 다루기 때문에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자연을 사랑스레 마주하면서 나 스스로 사랑스러운 자연으로 녹아들도록 이끄는 자연그림책은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어른으로서 읽던 생태환경책도 매한가지이다. 왜 어른 스스로 생태와 환경이 몸으로 녹아드는 삶이 되는 이야기를 담는 생태환경책을 엮거나 쓰거나 만들지 못할까.

 나는 인문책을 가까이하지 못한다. 오늘날 한국땅 인문책은 거의 모두 지식책에 머물기 때문이다. 사람들 삶을 착하거나 따스하거나 아름다이 돌보는 나날을 적바림하는 인문책은 너무 드물어, 인문책이 그닥 손에 잡히지 않는다.

 4대강을 반대해야 하거나 88만 원 세대를 달래야 하거나 입시지옥을 걱정해야 하거나 재벌 권력과 교회 권력을 꾸짖어야 하거나 이명박을 나무라며 진보정치를 꿈꾸어야 하는 책은 인문책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책은 모두 지식책이라고 느낀다. 4대강은 지식이 아닌 삶으로 살피면 이런 통계 저런 수치란 모두 부질없다. 더욱이, 4대강뿐 아니라 작은 도랑과 실개천은 어떠하고. 얕은 멧자락이나 너른 들판은 어쩌지? 사람들은 4대강에 파묻혀 정작 내 보금자리 자그마한 숲과 들과 멧골이 파헤쳐지며 사라지는 모습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88만 원 세대만 있겠는가. 50만 원 어린이와 40만 원 어버이도 있다. 모두들 대학교 졸업장 때문에 다투니까 입시지옥인데, 모두들 대학교에 안 가면서 사람답게 살아가자고 다짐하면 된다. 재벌 회사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하면서 내 작은 마을에서 내 작은 일거리를 찾아서 조용히 살아가면 된다. 예배당 십자가가 아닌 마음속 하느님을 믿으며 섬기면 된다. 이명박을 나무란다지만 내 살림집에서 내 살림살이를 사랑스레 일구지 못한다면 진보도 개혁도 번혁도 이루지 못한다.

 아이는 꽃을 꺾어 머리에 핀하고 함께 꽂아 달라고 내민다. 아이 머리에 꽃을 꽂아 준다. 아이는 머리에 꽂은 꽃이 떨어지는 줄 느끼지 못하면서 신나게 달음박질을 치며 논다. 몇 시간쯤 달음박질을 치며 놀다 보면 머리에 꽂던 꽃이 어찌 된 줄 모르지만, 꽃이 사라진 줄 알면 새로 꺾어서 한손에 쥐며 또 달음박질을 친다.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고, 아버지는 운전면허가 없으며, 어머니는 장롱면허이면서 둘째를 밴 몸이라 적성검사를 받으러 갈 겨를이 없다. 자동차 없는 널따란 마당과 숲 사이에서 골짜기 물소리를 들으면서 마음껏 논다. 저녁나절에는 모두 지쳐서 아이한테 그림책 한 권 읽어 줄 기운조차 없이 곯아떨어진다. (4344.5.1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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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가락 책읽기


 아이가 책을 읽는다. 아버지가 그림책을 집어들어 펼치면 저도 함께 읽겠다면서 아버지 무르팍으로 파고든다. 책을 읽는 아버지 곁에서 아이는 책을 읽는 아이가 된다.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고 자전거를 탈 낌새를 보이면 아이는 금세 알아챈다. 자전거를 타는 아버지 둘레에서 아이는 자전거를 함께 타는 아이가 된다. 부엌으로 가서 밥을 할라치면 아이는 어느새 부엌으로 쪼르르 따라온다. 마늘을 빻거나 달걀을 풀거나 반죽을 하거나 다지거나 채 썬 푸성귀나 나물을 냄비에 부을 때에, 아이는 옆에서 제가 하겠다고 나선다. 밥상을 세워 다리를 펴려 하면 아이는 이때에도 제가 하겠다고 먼저 붙잡는다. 텃밭으로 가려고 호미를 쥐면 아이는 부리나케 쪼르르 달려와서 저한테도 호미를 달라며 부르다가는 아버지 곁에서 흙을 쫀다.

 아이가 책을 읽는다. 아버지가 그림책 아닌 글책을 읽으니, 글책은 그닥 볼거리가 없으니 제 그림책을 펼쳐 읽는다. 아이는 책을 읽을 때에 그림책을 무릎에 올려놓는다. 그림책 끄트머리에는 으레 아이 발가락이 뽀롱 나온다. 아이는 그림책을 보면서 발가락이 가만히 있기도 하지만, 꼬물꼬물 꼼지락꼼지락 하기도 한다. 깊이 빠져들 때에는 발가락이 얌전하고, 종알종알 떠들며 책장을 넘긴다든지 앞뒤가 궁금해서 요모조모 들출 때에는 발가락이 춤춘다.

 한참 책을 넘기고 펼치고 하더니 손가락으로 하나를 짚으며 나한테 묻는다. 나보고 같이 들여다보라며 부른다. 아이는 맛난 먹을거리를 혼자 먹지 않고 나눈다. 아이는 좋은 볼거리를 혼자 보지 않고 부른다. (4344.5.1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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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머리 앤〉을 보는 마음


 아이와 옆지기와 아버지가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본다. 여러 해째 함께 본다. 여러 해째 함께 보지만, 볼 때마다 이야기에 찬찬히 빨려든다. 엊그제 옆지기가 한 말을 곰곰이 되새긴다.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은 참 빛깔 곱게 그린 작품이라 했다. 그런가? 그런가? 그동안 어렴풋하던 무엇인가 비로소 풀린다. 그렇구나. 빛깔 곱게 그린 작품이기 때문에 여러 해째 되풀이해서 들여다보지만, 이렇게 살뜰히 즐길 수 있구나.

 하루를 지나며 더 생각한다. 어쩌면 오늘날 사람들은 빛깔 고운 사람과 삶과 자연을 잊거나 잃거나 모르기 때문에,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보더라도 그닥 재미나다고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100번이나 1000번쯤 다시 볼 마음을 못 품을는지 모른다. 게다가,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에 담은 빛깔 고운 모습과 삶과 사람들 이야기를 오늘날 새롭게 엮으며 나누려 할 뜻이나 꿈을 못 품을는지 모른다.

 사진기를 들어 만화영화 몇 대목을 찍는다. 문득 옆지기가 엊그제 했던 말을 한 가지 더 떠올린다. 디브이디를 사고 싶다 했는데, 참말 디브이디를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두 사람과 우리 두 아이와 나중에 두 아이가 낳을는지 모르는 새 아이들을 헤아린다면, 살림돈이 빠듯해 빡빡한 하루하루이지만, 조금씩 갈무리해서 〈빨간머리 앤〉 디브이디를 통째로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부디, 내가 돈을 갈무리할 때까지 〈빨간머리 앤〉 디브이디가 남아 다오. (4344.5.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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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머리 앤〉을 그린 마음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은 소설책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소설책 〈빨간머리 앤〉만 있었다 해서 이 만화영화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소설책을 읽으며 살아가던 누군가한테 마음으로 우러나는 사랑이 샘솟을 숱한 다른 책과 수많은 사람들 살가운 이야기가 만날 때에 새로운 책이나 영화나 그림이나 사진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본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새로운 책이나 영화나 그림이나 사진을 빚을 수 있을까요.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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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책읽기


 아스팔트 밑이 어떻게 생겼다거나 어떻게 되었는가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어느 책에서 아스팔트 밑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읽으면 안다 말할는지 모른다. 어느 방송에서 아스팔트를 파헤쳐 밑바닥을 보여준다면, 이 방송을 본 사람은 ‘난 알아요’ 하고 이야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손수 아스팔트 밑을 파헤쳐 보지 않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만지다가 손이 데어 따끔한 느낌은, 손이 데지 않고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골짜기 물과 페트병 먹는샘물과 서울시 아파트 수도물이 저마다 어떠한 맛인가를 책을 읽거나 방송을 본대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자전거를 달리며 맞아들이는 바람과 시골집에서 창문을 열며 받아들이는 바람을 글읽기나 사진읽기로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가난하다는 나라 힘겨이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글로 읽거나 사진으로 읽었대서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느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거나 ‘돕고픈 마음’이 된다 할 만할까.

 자동차를 몰 줄 모르면서 자동차 이름을 주워섬기는 일은 자동차를 아는 일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서 자전거문화나 자전거정책을 주워섬기는 일은 자전거를 아는 일이 아닐 뿐더러, 사랑하는 일이 될 수 없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끼곤 한다. 책을 읽었기에 ‘안다’고 말하기 때문에 참으로 무섭다고 느끼곤 한다. 책이란 대단히 무섭다고 느낀다. 책을 읽는 까닭은 내 머리속에 앎조각을 가득 채워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날 한국땅 어느 분이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고 말했다는데, 하루라도 책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내 삶을 옳게 다스리는 새 기운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책을 읽어야 할까. 하루에 몇 쪽쯤 읽어야 책읽기를 했다 할 만한가.

 만 쪽에 이르는 책을 읽으면 책읽기를 한 셈일까. 한 쪽을 겨우 읽으면 책읽기를 못한 셈일까. 한 쪽조차 아닌 고작 한 줄을 읽었으면 책읽기를 안 한 셈일까.

 삼백 쪽짜리 책에서 고작 한 쪽조차 못 읽었으나, 한 줄만 가까스로 읽은 뒤에 이 한 줄에 깃든 이야기를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 곱씹으면서 내 삶을 예쁘게 다스리는 사람은 책읽기를 한 사람인가 안 한 사람인가.

 사람들이 책을 읽고 나서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때에, 언제나 참 슬프구나 하고 느낀다. 책읽기 아닌 지식읽기를 하고서는 마치 책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우쭐거리는 모습은 그저 슬프다. 한 달에 열 권을 읽든 한 해에 백 권을 읽든 뭐가 대단할까.

 나는 한 해에 천 권 책을 장만하고 만 권 책을 읽는다. 어쩌면 더 살는지 모르고, 어쩌면 더 읽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한 해에 책을 백 권이나 열 권만 산다면, 또 한 해에 책을 열 권이나 한 권만 읽는다면 어떠할까. 천 권을 사들이는 사람과 열 권을 사들이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십만 권을 읽는 사람하고 한 권을 읽는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

 누군가는 한 해에 천 사람을 새 동무로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한 달에 백 사람을 새 동무로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날마다 열 사람씩 새 동무를 사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날마다 100킬로미터를 달릴는지 모른다. 자동차로든 자전거로든. 누군가는 날마다 백만 원을 벌는지 모른다.

 그런데, 책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여행이든 무어든, 얼마나 대수롭다지?

 사랑으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책이 된다. 책읽기란 사랑읽기이다.

 사랑으로 사귈 때에만 비로소 사람이 된다. 사람삶이란 사랑삶이다.

 한 해에 책 만 권을 읽는 사람이 대단하다 여길 수 있고, 논 만 평을 혼잣힘으로 일구는 사람이 대단하다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쌍둥이 아이를 돌보든 다섯 아이를 돌보든 한 아이를 돌보든, 아이 없이 살아가며 이웃 아이를 사랑하든, 모두 똑같은 사랑이고 삶이며 사람이다.

 사랑을 안 담은 책을 백만 권 읽는들 무엇하랴. 사랑이 안 담긴 책을 사랑을 안 실으며 읽고서는 사랑을 싣지 않는 ‘서평’이나 ‘신간소개’나 ‘독후감’ 따위로 끄적인들 무엇하랴.

 새로운 책은 읽을 까닭이 없고, 읽을 보람이 없으며, 읽을 값어치가 없다. 아름다운 책일 때에만 읽을 까닭이 있고, 읽을 보람이 있으며, 읽을 값어치가 있다.

 새로운 판으로 되살리는 옛책이란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구며 아름다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선보였기 때문에 새로운 판으로 되살린다.

 책은 그저 책이고, 사람은 그저 사람이다. 새로운 책이냐 예전 책이냐 하고 따질 수 없다. 새로운 사람이냐 해묵은 사람이냐 하고 가릴 수 없다.

 나는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을 하나도 안 좋아한다. 왜냐하면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은 예전에는 예전대로 권력 해바라기를 했고, 나중에는 또 나중대로 권력 해바라기를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했던 권력 해바라기를 스스로 씻거나 털면서 아름다이 살아갔다면, 예전에 했던 권력 해바라기는 탓하거나 나무랄 까닭이 없다.

 내 둘레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들 아름다운 사람들이 옛날 옛적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마냥 아름다운 사람들이지는 않았다. 저마다 예전에는 이렁저렁 얼토당토않거나 뚱딴지 같다 싶은 모자란 삶을 모자란 줄 모르며 바보스레 지내곤 했다. 당신들 스스로 당신 삶을 천천히 사랑하면서 시나브로 아름다운 길을 깨달아 거듭난다.

 나는 이원수 님 같은 사람을 참 좋아한다. 참으로 바보스럽다 할 만한 시민단체와 ‘진보 껍데기’ 지식인과 기자는 이원수 님을 가리켜 ‘친일 아동문학가’라는 이름표나 꼬리표를 붙인다. 그러나,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친일부역시를 썼대서 이이한테 이런 이름표나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쇠사슬 밤나라에서 이원수 님이 ‘독재부역 문학’을 어느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이원수 님은 ‘반성문’이나 ‘참회록’ 같은 이름을 붙여서 글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이원수 님이 걸어온 삶이나 남긴 문학을 읽으면, 이이 모든 삶과 문학이 곧바로 ‘반성문’이나 ‘참회록’이다. 한때 ‘아름다운 사랑’을 저버린 슬프며 모자라고 못난 짓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며 말도 못하는 몸짓으로 당신 가슴을 후벼파면서 한 줄 두 줄 적바림한 문학을 가만에 손에 쥐어 읽을 때면 늘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이러한 글삶을 일군 이원수 님이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고맙다고 느낀다.

 나는 전두환이나 노태우처럼 바보스러운 이들이 참 바보스러워서 딱하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이들이 모든 권력과 돈과 이름값을 내려놓은 다음, 수수하고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텃밭 쉰 평에 논 삼백 평을 얻어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당신 삶을 꾸린다 한다면, 이들을 좋아할 수 있다. 텃밭에 감자와 오이와 토마토와 당근과 배추와 무와 고추와 가지와 상추와 시금치를 골고루 심어 손수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땀을 흘리는 흙일꾼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이들 지난날 발자국이 어떠했다 하더라도 반가이 맞아들일 수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정책을 끊이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잘난 척하지 말고 힘과 돈과 이름을 송두리째 내려놓으며 흙일꾼이 된다면 즐겁겠다.

 그렇다. 진보이니 개혁이니 혁명이니 변혁이니 하고 신나게 외치기는 하지만, 막상 손수 흙일꾼이 되려고는 안 하는 지식인들은 전두환하고 똑같으며 이명박하고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참말,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똑같은 정당이다. 여기에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그닥 다를 구석이 없다고 느낀다. 아주 똑같은 정당은 아니다. 틀림없이 외침과 삶과 넋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삶과 눈물방울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날마다 두세 끼니 밥을 먹는 사람인 줄을 또렷이 깨달으면 좋겠다. 내가 먹는 밥을 어떻게 마련해야 좋은가를 조금 더 일찍 깨달으면 좋겠다. 스웨덴 정책이나 핀란드 정책도 다 좋기는 좋은데, 내 작은 마을에서 내 작은 손으로 내 작은 삶을 사랑할 수 없다면, 스웨덴 정책이나 미국 정책이나 마찬가지이고 핀란드 정책이나 북녘 정책이나 매한가지이다.

 군대를 키우거나 미사일을 만들거나 경찰을 늘린대서 평화를 지키지 못한다. 도시를 떠나든 도시에서든 내 살림집 앞마당을 텃밭으로 일구면서 차근차근 나 스스로 흙일꾼으로 살아가는 나날을 헤아릴 수 있어야 비로소 평화를 이룬다.

 사랑하는 책읽기란 사랑하는 삶읽기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느냐를 밝힐 때에, 바야흐로 책읽기를 어떻게 즐기며 나눌 때에 아름다운가를 몸으로 배운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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