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눈을 뜨다

 


  책에 눈을 뜨면 책을 알아봅니다. 책에 눈을 못 뜨면 책을 못 알아봅니다. 내가 바라는 모든 책은 어느 밑바닥이나 저 깊은 구석에 숨지 않습니다. 내가 즐겁게 읽을 책은 언제나 내 코앞에 있습니다.


  책시렁을 가만히 살펴보셔요. 쪽종이에 책이름 몇 적어서 헌책방지기한테 여쭈지 마셔요. 꼭 이런 책을 읽어야 하지 않고, 반드시 저 이름나거나 많이 팔리는 책을 장만해야 하지 않아요. 하루키 책이나 조정래 책을 굳이 읽어야 하지 않아요. 하루키 책이나 조정래 책을 읽어도 즐겁지만, 하루키도 조정래도 아닌 내 삶을 밝히는 책을 새롭게 만나서 읽어도 즐거워요. 이제껏 어떠한 이름으로도 나한테 알려지지 못한 새로운 책에 손을 뻗어, 내 마음을 한껏 틔울 이야기를 만나요.


  책이름을 하나하나 훑습니다. 책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어 찬찬히 살핍니다. 이 책도 살피고 저 책도 살핍니다. 이 책도 한 줄 읽고 저 책도 두 줄 읽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야기 담은 책이 있었네,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저와 같이 애틋한 삶 보여주는 책이 있구나, 헤아리면서 읽습니다.


  책에 눈을 뜨며 이야기 한 자락 읽습니다. 책에 눈을 뜨며 삶과 사랑과 꿈을 읽습니다. 책에 눈을 뜨며 지구별 흐름을 읽습니다. 책에 눈을 뜨며 꽃 한 송이를 새삼스레 읽고, 책에 눈을 뜨며 풀 한 포기 비로소 읽습니다. 모든 책들은 우리 삶 밝히는 스승이면서 길동무요 이야기벗이자 옆지기입니다. 4346.8.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방

 


  거룩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책.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즐겁게 누리는 꿈과 기쁘게 밝히는 웃음과 눈물을 감싸안는 책. 이 모든 책을 알뜰살뜰 다스리는 곳이 책방. 책방지기는 책방을 지키면서 돌보고, 책손은 책방을 마실하면서 하루를 누리고. 4346.8.2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헌책방 사이를 걷다

 


  헌책방 사이를 걷는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헌책방이 있다. 조그마한 헌책방이 있고, 제법 넓다 할 만한 헌책방이 있다. 어느 헌책방에나 책이 있다. 어느 헌책방이든 사람들이 많이 자주 찾는 책을 더 도드라지게 꽂아서 보여준다. 사람들이 드물게 찾거나 뜸하게 찾는 책은 안쪽에 깃든다. 널리 이름난 사람들 책이라든지, 학습지와 자습서가 눈에 한결 잘 뜨이는 자리에 놓이곤 하며, 그닥 이름 안 난 사람들 책이라든지, 인문책과 학술책은 안쪽에 조용히 깃든다. 아무래도 손이 많이 탈 만한 자리에 놓인 책은 쉬 팔릴 만한 책이라 할 수 있고, 안쪽에 깃들어 손이 덜 탈 만한 자리에 놓인 책은 두고두고 팔릴 만한 책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책방 안쪽 책시렁에 놓인 책은 이 책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임자를 만난다. 두고두고 새 임자를 기다리던 책인 만큼, 한 번에 알아채는 누군가 있으면 책시렁이 살며시 빈다.


  헌책방 사이를 걷는다. 이 헌책방에 내가 바랄 만한 책이 있을는지, 저 헌책방에 내가 꿈꾸던 책이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헌책방으로 골목을 이룬 길을 걷는다. 오늘은 이곳에 들어가서 책을 누려 볼까. 모레는 저곳에 들어가서 책을 즐겨 볼까. 조그마한 헌책방에서건 널따란 헌책방에서건 한 시간 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책방 크기에 따라 책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 한 권이 내 눈길을 잡아끌면서 내 눈빛을 밝히기 때문이다.


  책을 만나고 싶기에 헌책방골목을 걷는다. 책을 만나려고 이곳에 들러 한동안 책에 파묻힌다. 책을 사귀려고 저곳에 깃들어 한참 책 사이에 섞인다. 시원한 우물물 같은 책을 이쪽 헌책방에서 만난다. 싱그러운 냇물 같은 책을 저쪽 헌책방에서 마주한다. 4346.8.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ppletreeje 2013-08-16 17:21   좋아요 0 | URL
책방 안쪽 책시렁에 놓인 책은 이 책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임자를 만난다.-
글만 읽어도 참으로 좋습니다. ^^

숲노래 2013-08-18 08:35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그냥 스쳐서 걷기만 해서 알맹이를 못 받아먹어요.
책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아요. 그저 스쳐 훑기만 해서는...
 


 헌책방 도서관

 


  도서관이 있어 책을 건사한다. 도서관이 있기에 사람들이 도서관을 찾아가서 책을 만난다. 도서관이 있는 즐거움 누리는 사람들은 책 한 권이 우리 삶터를 어떻게 살찌우거나 가꾸는 밑거름이 되는가를 잘 깨닫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알뜰살뜰 건사하다가 때때로 책을 버린다. 도서관을 한 번 짓고 나서 책 놓을 자리를 더 늘리지 않기 일쑤라, 날마다 늘어나는 책을 좁은 자리에 모두 건사하지 못한다. 책이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만큼 도서관 터 또한 꾸준하게 늘려야 할 테지만, 도서관 건물은 좀처럼 늘어나지 못한다.


  도서관에서 건사하지 못하고 버려야 하는 책은 어디로 가는가. 도서관에서조차 책을 건사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옛책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도서관 한 권에만 모든 책을 한 권쯤 갖추면 될 노릇인가. 서울뿐 아니라 인천에도 부천에도 안산에도 부산에도 통영에도 완도에도 해남에도 영암에도 광주에도 화순에도 …… 어느 고을 어느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날마다 태어나는 아름다운 책을 알뜰살뜰 건사할 자리를 넉넉히 마련할 때에 책빛이 환하지 않을까.


  도서관에서 버린 책이 헌책방으로 들어온다. 도서관에서 헌책방에 곧바로 책을 가져다주는 일은 없다. 도서관에서 버린 책은 고물상이나 파짓간으로 간다. 헌책방 일꾼은 고물상과 파짓간을 돌면서 ‘버려진 책’을 ‘되살릴 길’을 찾는다. 헌책방이라 하더라도 ‘모든 버려진 책’을 모조리 되살리지 못한다. 헌책방은 도서관보다 건물 크기가 작고, 헌책방 헛간 또한 모든 버려진 책 옮길 만큼 크지 못하다.


  그렇지만, 헌책방 일꾼은 이녁이 건사할 만큼 건사한다.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책’을 바라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찬찬히 쓰다듬는다. 책을 즐기고 누리는 사람들이 ‘이 사랑스러운 책’을 기다리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보듬는다.


  헌책방은 도서관이다. 헌책방은 도서관 구실을 한다. 헌책방은 도서관이 해내지 못하거나 맡지 못하는 몫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책은 도서관에서 따사로이 품을 때에 밝게 빛나고, 책은 헌책방에서 끝까지 지켜 주면서 새롭게 빛이 난다. 4346.8.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헌책방 놀이터

 


  아이들이 헌책방 골마루를 휘저으면서 뛰어논다. 1층 아닌 2층에 깃든 헌책방인데, 아래층에 쿵쿵 울리겠구나 싶으면서도, 아직 많이 어리니 뛰어놀려 할밖에 없으리라 느낀다. 고작 여섯 살 세 살 아이들더러 책상맡에 얌전히 앉아서 꼼짝하지 않으면서 책을 들여다보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짓이 되겠는가. 아니, 아홉 살 어린이한테도, 열두 살 어린이한테도 뛰지도 달리지도 놀지도 뒹굴지도 만 채 여러 시간 책상맡에서 못 움직이게 한다면 어찌 될까.


  어른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어른더러 책상맡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있어 보라 하자. 어른더러 책상맡에 조용히 앉아서 하루 여덟 시간 꼼짝않고 있으라 해 보자.


  공부는 책상맡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문도 책상맡에서는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공부는 몸을 써서 움직이는 삶터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학문은 몸과 마음을 기울여 살아가는 마을과 숲과 들과 바다와 멧골에서 태어난다.


  책을 쓴 사람들은 온몸 부딪혀 일군 이야기를 책에 담는다. 더러, 온몸 안 부딪히고 책상맡에서 쏟아낸 글을 엮은 책도 있을 텐데, 사람들이 즐기고 반기며 사랑하는 책을 곰곰이 살피면, 글쓴이(글)나 그린이(그림)나 찍은이(사진)는 하나같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우리 누리를 누볐다고 할 만하다.


  여행을 하지 않고 여행책을 쓰지 못한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온 나날이 없이 소설책을 쓰지 못한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한테서 배운 나날이 있을 때에 교육책이든 육아책이든 쓸 수 있다. 숲을 누비고 풀과 꽃과 나무를 사랑하면서 곁에서 오래오래 지켜본 사람이 자연그림책을 그리고 자연사진책을 내놓는다. 책상맡에서는 무슨 책을 쓸 수 있을까? 처세책이나 경영책조차 책상맡에서 써내지 못하기 일쑤이다.


  그러면, 책을 읽는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읽을까? 책상맡에서 쓰지 않은 책을 책상맡에서 책는 모습은 아닌가? 책상맡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책을 책상맡에서 읽으며 머릿속에 지식만 담지는 않는가?


  아이들이 신을 벗는다. 신을 가지런히 벗고는 맨발로 발바닥 새까매지도록 뛰어논다. 나는 아이들 몰래 신을 집어든다. 땀과 땟물 흐르는 신을 물로 헹구고 빤다. 다 헹구고 빤 신을 제자리에 살짝 갖다 둔다. 4346.8.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후애(厚愛) 2013-08-06 15:10   좋아요 0 | URL
헌책방 놀이터 정말 좋네요.^^
책들만 보면 너무 반가워요.ㅎㅎ

숲노래 2013-08-06 17:10   좋아요 0 | URL
아이들한테는 어디나 놀이터가 돼요.
도서관에서는 이렇게 못 노니
헌책방에 퍽 좋은 곳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해요.

appletreeje 2013-08-06 16:32   좋아요 0 | URL
깨끗한 헌책방 바닥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책들이 참 보기 좋습니다~
벼리와 보라와 함께살기님의, 가지런한 신발들처럼요~~^^

숲노래 2013-08-06 17:14   좋아요 0 | URL
하나는 책방 아이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