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 한 개 보리피리 이야기 1
박선미 글, 조혜란 그림 / 보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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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장 즐겁습니다
 [책읽기 삶읽기 21] 박선미+조혜란, 《달걀 한 개》


 어린이한테 이 나라 어른들 지난 삶자락을 들려주는 이야기책 《달걀 한 개》를 읽다. 《달걀 한 개》라는 이야기책은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작은 마을 백산에서 197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던 한 사람이 달걀이란 먹을거리를 놓고 겪거나 부대낀 삶을 담는다. 어떤 이한테 1970년대는 까마득한 옛날일는지 모르지만, 나이 서른을 넘은 사람한테는 그다지 먼 옛날이 아니고, 나이 마흔을 넘은 사람한테는 어렵잖이 떠올릴 어린 나날일 테고, 나이 쉰이나 예순을 넘은 사람한테는 어린 동생이나 아이를 돌보며 보내는 나날일 테지. 흔히 옛날이야기라 하면 범이 담배 피워 물던 이야기라든지 고려나 조선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바로 하루가 지난 어제 이야기만 하여도 옛날이야기가 될 수 있다. 지난해에 겪은 이야기 또한 옛날이야기라 할 만하다. 멀디멀어 아주 까마득해야만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옛날이야기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옹기종기 모여 오순도순 살아온 이야기이다.

 살아온 이야기는 기쁠 수 있고 슬플 수 있다. 웃음이 넘치던 지난 삶일 수 있고 눈물이 가득한 지난 삶일 수 있다. 기뻐 웃음이 넘치던 삶이라 하여 아름다운 삶이라고 여길 수 없고, 슬퍼 울음이 가득한 삶이라 하여 못마땅하거나 어설픈 삶이라고 여길 수 없다. 기쁘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 배만 부른 볼꼴사나운 이야기일 수 있고, 슬프다 하지만 뭇사람들 가슴을 저미는 촉촉한 이야기일 수 있다.


.. 병아리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여름쯤이면 마당이 그득해. 다른 집은 닭을 장에 내다 팔아서 돈벌이가 된다는데, 아야네는 그걸 한 마리 팔 새가 없어. 배 타는 삼촌 오면 고아 줘, 공부하러 간 오빠 오면 한 마리 잡아야지, 고모가 친정 오면 한 마리 해 먹이고, 또 돌아갈 때 보따리에 한 마리 묶어 보내야지, 큰 손 왔다고 상에 올려, 실한 놈은 키워서 씨암탉 해야지 ..  (24∼25쪽)


 내가 떠올릴 수 있는 1970년대는 조각조각 잘린 몇 토막 이야기이다. 다닥다닥 촘촘히 붙은 집들로 이루어진 인천 골목동네에서 놀던 일, 심부름하러 구멍가게에 달려 내려갔다가 달려 올라온 일, 겨울날 몹시 추웠다고 떠오르는 달삯집에서 네 식구가 쪼르르 모여 이불 돌돌 말아 자던 일, 어린 형하고 더 어린 내가 시멘트 담이 퍽 높구나 싶은 골목 한켠에 서 있던 일, 5층짜리 아파트 동네로 짐차를 타고 살림집 옮기던 일 ……. 고모 댁에 찾아갔을 때에 방에 다락이 있어 나무계단을 타고 다락에 올라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뒹굴던 일이 살짝살짝 떠오른다.

 《달걀 한 개》를 읽으면 “아야는 흰자만 까 먹고 노른자는 사탕 녹여 먹듯이 입에 넣고 굴리면서 아껴 아껴 먹었어(44쪽).” 하는 대목이 있다.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나도 달걀을 마음껏 먹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차츰차츰 좀더 자주 먹을 수 있었다고 느끼나 해를 거스를수록 드물었다고 느끼며, 충청도 시골집으로 방학 때마다 찾아올 적에는 닭장에서 한 알 고맙게 꺼내어 먹는 달걀이란 더없이 드물며 소담스러운 밥거리였다고 느낀다. 입이 짧은 나한테 외할머니가 날달걀 하나를 톡 깨서 밥에 풀어 주던 일은 오래도록 떠오른다. 이제 와 헤아리면 내 몸에는 삭인 밥거리들, 이를테면 동치미나 김치국물이나 찬국수물이 받지 않는다. 이제는 매운김치를 건드리지도 못하지만 맵지 않은 김치라 하더라도 삭인 밥거리인 만큼 잘 안 맞는다. 사람들은 으레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는다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김치처럼 삭인 밥거리가 몸에 안 맞는 사람이 없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기도 하는데, 삭인 밥거리 못 먹는 사람이야 마땅히 있을밖에. 아주 어릴 때하고 푸름이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나한테 찬국수를 사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느끼는데, 아마 내가 떠올리지 못해서 그렇지, 아버지가 바깥밥 먹자며 식구들이 신포시장이나 동인천으로 마실을 나와 함께 찬국수를 먹다가 내가 크게 탈이 나는 바람에 나한테는 더는 안 사 주었을는지 모른다. 나한테는 따로 만두를 사 주거나(찬국수집에서는 으레 만두를 함께 파니까) 다른 뜨거운 국물을 사 준다. 오랜 동무가 내 몸을 잘 모르는 가운데 찬국수 잘하는 집이 있어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해서 억지로 한 그릇 먹은 다음 한 주 내내 배앓이를 하며 괴로운 적이 있다.

 《달걀 한 개》를 쓴 박선미 님은 달걀 노른자를 살살 녹여서 먹었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에 달걀 노른자를 살살 녹여서 먹었다. 박선미 님처럼 흰자를 먹을 때에는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이 꼴을 지켜보며 꾸짖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 맛있는 먹을거리를 금세 먹어치울 수 없는 노릇.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어린 딸아이랑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전철간에서 으레 어르신들이 아이한테 사탕을 먹으라 건네주는데, 아이는 사탕을 받으면 늘 오래오래 낼름낼름 돌리며 녹여 먹는다. 길에서 얼음과자를 하나 사 줄 때에도 베어 먹는 법이란 없다. 얼음이 녹아 줄줄 흐르는 데에도 혀로 날름날름 핥아 먹는다. 그만큼 맛나고 좋다는 뜻일 테지.


.. 여자 아이들이 물을 이고 와서 솥에다 붓고, 달걀을 조심 조심 조심 …… 한참을 넣었어. 소금도 몇 줌 넣었나? 불을 때는 아이들은 코끝이 시커매진 것도 모르고 열심이야. 학교 밭에서 일할 때는 요리조리 빠져서 선생님한테 야단을 듣던 남자 아이들도 부지런히 삭정이를 주워 오고. 달려오다 넘어져 무르팍이 까지고 ..  (40쪽)


 이야기책 《달걀 한 개》에 나오는 시골학교 선생님은 몸이 퍽 여렸나 보다. 크게 병치레를 하고 일어나니까 마을사람마다 선생님 어여 몸 추스르라며 달걀을 보내 왔다는데, 선생님은 “아이구, 이 귀한 거를, 너거나 하나 더 먹이지. 엄마한테 잘 묵고 어서 낫겠다고 말씀디리라(39쪽).” 하고 얘기하더니, 얼마 뒤 아이들을 모두 모아 놓고는 “자아, 인자부터 달걀 삶아 먹는 공부를 할 끼다(39쪽).” 하면서 마을 어른들이 내어 준 달걀을 알뜰히 그러모아 한꺼번에 삶아서 아이들한테 골고루 나누어 준다. 이때 아이들 모습이 참 재미나다. 여느 때에는 개구쟁이에 말썽쟁이였다지만, 선생님이 ‘달걀 삶아 먹는 공부’를 하자니까 스스로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삭정이를 주워 오고 물을 길어 오고 불을 때며 함께 달걀 삶기를 했다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공부를 이렇게 아이들 스스로 신나게 할 수 있게끔 교육 얼거리를 짠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대학바라기가 맨 첫째로 눈길을 둘 일이라 할지라도, 아이들과 살아숨쉬는 공부를 하면서 숨돌리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학교에서 함께 맛난 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나무그늘에서 쉬기도 하며, 나무열매를 따먹는 날을 맞이하기도 하는 가운데, 흙과 바람과 해와 물과 풀을 가슴으로 살포시 껴안도록 이끌어야 비로소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서로서로 살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그나저나, 이 책에 붙은 이름은 왜 “달걀 한 개”일까. 달걀을 셀 때에는 ‘한 알’ ‘두 알’ 하고 세야 옳지 않나. 올바로 말하자면 “달걀 한 알”이다. 그나마 “계란 한 개”라 하지 않으니 낫다 할 만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들한테 우리 어른들 살갑던 삶자락을 곰곰이 되씹도록 이끌어 주고자 하는 책이라 한다면, “달걀 한 알”이라고 책이름을 고치고, 책에 깃든 서너 대목에서도 “한 개”를 “한 알”로 고쳐야 마땅하다. 또는 “달걀 하나”라 해 볼 수 있겠지. ‘알’로 세기도 하지만 그냥 ‘하나 둘 서이 너이’ 하기도 하니까. 아니면, 책이름을 “달걀 이야기”라 해 보아도 된다. 말 그대로 달걀하고 얽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 알’만 갖고 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달걀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는 만큼 “달걀 이야기”라고 책이름을 고쳐도 잘 어울린다.

 왜 책이름을 따지느냐 하면, 《달걀 한 개》란 뭐 대단한 이야기책이 아닐 뿐더러, 아주 거룩한 이야기책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달걀 한 개》는 여느 사람들 여느 자리 수수한 이야기책이다. 이리하여 이 책에 깃든 말마디라든지 이 책에 붙이는 이름은 가장 수수한 자리를 찾아들어야 한다. 학교 문턱을 오래 밟았든 한 번도 밟지 못했든, 시골 농사꾼이든 도시 회사원이든, 똑똑한 어린이이든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오는 어린이이든, 누구나 손쉽고 즐거우며 살가이 마주하여 읽도록 글월 눈높이를 맞출 뿐 아니라, 가장 바르면서 곱고 착한 말씨로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임금님 달걀’이나 ‘대통령 달걀’도 아닌 ‘시골사람 달걀’ 이야기 아닌가. 조금 더 말결을 보듬으며 가다듬는다면 좋겠다.

 책끝에 ‘추천글’을 쓴 윤구병 님이 “그 입담에 스며 있는 건강한 교육관, 인생관도 퍽 대견합니다”라고 적는데, 어른들이야 윤구병 님이 박선미 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줄 알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겠거니 생각할 테지만, 이 책을 읽는 어린이한테는 둘 다 똑같은 ‘어른’이다. 한 어른이 다른 어른한테 ‘대견하다’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훌륭합니다’라든지 ‘알뜰합니다’라든지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해야 알맞다. 어른책에서도 말 한 마디 어설피 하면 안 되지만, 어린이책이라면 말 한 마디 더더욱 곱씹고 살피면서 해야 한다. 이밖에 박선미 님 말투에서 바로잡을 대목을 한두 가지 들어 본다면, 6쪽과 14쪽과 29쪽에 ‘것’을 너무 자주 쓴다. “소리질러 대는 게 자주 들리거든(6쪽)”은 “질러대는 소리가 자주 들리거든”으로 바로잡고, “알에서 모두 잘 깨어 나온 거거든(14쪽)”은 “알에서 모두 잘 깨어 나왔거든”으로 바로잡으며, “침 삼키는 것도 조심하면서(29쪽)”는 “침 삼키기도 잘 살피면서”로 바로잡으면 좋겠다. ‘조심’ 같은 한자말이야 익히 쓰기는 하는데, 예전 어르신들은 이 말을 안 썼다. 늘 ‘살피다’라는 말을 썼다. 사람들이 어른들을 떠나 보낼 때에 요사이는 “조심해서 들어가셔요.” 하는 말을 곧잘 하는데, 예전 어르신들은 노상 “살펴 들어가셔요.”나 “살펴 가셔요.” 하고 말했다. 《달걀 한 개》같이 옛날이야기를 구수히 들려주려는 책이라 할 때에는 ‘살피다’ 같은 낱말을 잘 갈무리해 주면 좋겠다. 10쪽에서 “너무 급한 나머지”는 “너무 바쁜 나머지”로 다듬고, 25쪽에서 “실한 놈”은 “통통한 놈”이나 “살찐 놈”으로 다듬으며, 30쪽에서 “머리가 아주 복잡해”는 “머리가 아주 어지러워”나 “머리가 너무 어수선해”로 다듬어 본다. 마지막으로, 54쪽을 보면 글쓴이가 따로 적바림한 글이 있는데, 이 글에서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선생님이 되었어.”라고 했다. 이 대목은 아주 틀렸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일컬어 ‘선생님’이라 말할 수 없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일컬을 때에는 ‘교사’라 해야 알맞다.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교사가 되었어”라든지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있어”라든지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처럼 고쳐야겠다.

 알뜰하고 알찬 이야기책 《달걀 한 개》인 만큼 곁다리라 할 만한 글투와 글쓰기를 이렁저렁 짚어 본다. 이런저런 글투와 글쓰기를 더 가다듬거나 추스를 수 있을 때에 이 이야기책은 훨씬 빛이 나면서 고운 물이 들리라 생각한다. ‘입말로 생생하고 재미나게 풀어써’서 어린이문학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과 즐겁게 나눌 좋으며 곱고 착한 말’을 ‘살아숨쉬는 기운을 살며시 불어넣으며 한결 따스하고 사랑스레 펼칠’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장 즐겁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 스스로 신나게 나눌 수 있을 때에 가장 즐겁다. 남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 너머로 구경하거나 호박씨를 까는 이야기보다, 나 스스로 내 온몸 바쳐 힘차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나눌 수 있으면 참으로 즐겁다. 문학이란 바로 삶에서 비롯한다.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또 판타지라 하든 공상과학이라 하든 뭐라뭐라 하든 삶에서 비롯하거나 삶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문학이란 없다. (4343.11.2.불.ㅎㄲㅅㄱ)


― 달걀 한 개 (박선미 글,조혜란 그림,보리 펴냄,2006.5.3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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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헤아리며 카르페디엠 4
로이스 로리 지음, 서남희 옮김 / 양철북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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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내가 살가운 벗일 때
 [푸른책과 함께 살기 61] 로이스 로리, 《별을 헤아리며》


- 책이름 : 별을 헤아리며
- 글 : 로이스 로리
- 옮긴이 : 서남희
- 펴낸곳 : 양철북 (2003.3.14.)
- 책값 : 9000원


 (1) 좋은 벗


 좋은 벗을 만날 때하고 달갑잖은 사람을 만날 때 똑같기란 힘듭니다. 누구한테나 서글서글하거나 살가이 마주할 수 있으며, 좋은 벗님한테 한결 따사로우며 넉넉하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좋은 벗이란 서로 마음을 활짝 열면서 어깨동무하는 사람입니다. 달갑잖은 사람이란 서로 마음을 꽁꽁 닫아걸며 쳐다보기 싫은 사람입니다. 내가 너한테서, 네가 나한테서 뭔가를 얻어내거나 등을 후리거나 할 뜻이 없을 때에 좋은 벗으로 사귑니다. 무언가 내 배를 채을 꿍꿍이로 사귀려 할 때에 달갑잖은 사람이 됩니다.


..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억양이 어색한 덴마크말이었다. ‘3년이나 되었으면서……. 우리 나라를 점령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우리 말을 저렇게 못하다니.’ 안네마리는 속으로 그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  (12쪽)


 오래도록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 해서 좋은 벗이 되지 않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좋은 벗이 될 수 없지도 않습니다. 열 해를 알고 지낸 이가 다섯 해를 알고 지낸 이보다 살가운 사이가 되지 않습니다. 스무 해에 걸쳐 얼굴을 늘 마주보았다 해서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챈다거나 마음 깊은 자리가 어떠한지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스치는 손길에서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손바닥과 손가락에 아로새겨진 굳은살을 보면서, 발바닥에 박힌 꾸덕살을 보면서, 얼굴에 온통 파인 주름살을 보면서 한 사람 삶을 헤아립니다. 손톱에 밴 흙때를 들여다보면서, 두툼하거나 하이얀 손가락을 보면서,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면서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나 스스로 당신한테 좋은 벗이 되고자 할 때에는 나 스스로 좋은 삶을 일굴 노릇입니다. 좋은 삶이란 돈을 많이 버는 삶이 아니요, 좋은 삶이란 이름을 떨치는 삶이 아니며, 좋은 삶이란 큰힘을 거머쥐는 삶이 아닙니다. 좋은 삶이란 내 깜냥과 그릇과 몸에 걸맞게 즐거이 일구는 나날이 쌓이며 이루어집니다. 좋은 삶이란 내 손으로 차근차근 갈고닦으며 돌보는 마음밭입니다. 가슴으로 끌어안는 삶이요, 두 다리로 씩씩하게 선 삶이며, 두 팔로 얼싸안는 삶일 때에 바야흐로 좋은 삶으로 이어갑니다.


.. “단추 가게가 뭐 어때써? 단추 가게가 무슨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잖아? 히르슈 아줌마는 좋은 분이고, 사무엘도 좀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아무한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애야.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도 없지, 뭐. 안경을 벗으면 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때 문득 안네마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만약에 히르슈 아줌마네가 단추를 팔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 ..  (37쪽)


 좋은 벗하고 마주한 자리에서는 절로 좋은 말이 샘솟습니다. 좋은 벗님하고 손을 맞잡으며 일을 할 때에는 좋은 꿈이 시나브로 피어납니다. 좋은 벗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동안 좋은 일을 좋은 넋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자꾸자꾸 좋지 못한 쪽으로 기우는 까닭이란, 나 스스로 나부터 좋은 마음이지 못할 뿐 아니라, 서로서로 궂은 꿍꿍이를 키우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참말, 국가보안법부터 4대강이라고 하는 토목건설까지 우리 삶을 어느 만큼 좋은 쪽으로 이끈다 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법은 누구한테 도움이 되는 틀이고, 의사라는 자리는 얼마나 돈을 벌어들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교사는 얼마나 거룩한 일꾼이며, 어버이 되는 사람은 어떤 마음씨여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고요히 솟아오르는 좋은 말을 나누면서 내 사랑스러운 벗님과 좋은 삶을 꾸릴 수는 없는 노릇인지 궁금합니다.

 좋은 벗하고 좋은 밥 한 그릇 조촐히 나누려는 매무새로, 좋은 벗하고 좋은 술 한 잔 기쁘게 나누려는 몸가짐으로, 좋은 벗하고 좋은 책 한 권 즐거이 나누려는 몸짓으로, 좋은 벗하고 좋은 길을 두 손 맞잡으며 걸으려는 모양새로 좋게좋게 살아가면 아름다웁지 않나 궁금합니다.

 나한테 더 있는 힘을 쏟고, 나한테 더 있는 돈을 바치며, 나한테 더 있는 사랑을 들입니다. 나한테 덜 있는 힘을 얻고, 나한테 덜 있는 돈을 받으며, 나한테 덜 있는 사랑을 채웁니다. 하루하루 고맙게 살아갑니다.


.. “설마 군인들이 버터까지……, 그 말이 뭐더라……, 재배치하는 건 아니겠죠?” 엄마는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단다.” 하고 대답했다.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그래. 모든 농부들의 버터를 걷어다가 자기네 군대의 뱃속에다 갖다 넣는 거지! 삼촌이 이렇게 조금이라도 숨긴 것을 알면 아마 당장에 총을 들고 달려올 거다!” ..  (91쪽)


 세 살짜리 우리 딸아이를 번쩍 안아 어르는 일곱 살짜리 언니를 바라봅니다. 일곱 살짜리 이웃 언니는 세 살짜리 어린 동생하고 신나게 놀아 줍니다. 말을 받고 손을 잡으며 예쁘게 감싸안습니다. 세 살짜리 우리 딸아이는 언니한테서 받는 따스함을 자그마한 몸뚱이로 잘 삭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따스함을 고이 건사해서 저보다 세 살 어릴 동생한테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랑을 받았기에 다시금 사랑을 물려준다기보다, 사랑을 받으며 사랑이 얼마나 따스한가를 새삼 깨닫습니다. 따로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더 너른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자리에서 새롭게 사랑을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언제나 사랑이라는 씨앗은 고요히 잠들어 있으니까요. 내 마음속에서 잠자는 씨앗을 살짝 깨워 내 좋은 벗님하고 나눌 사랑으로 이을 때, 내 하루하루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우며 고운 빛깔로 물든다고 느낍니다.


 (2) 궂은 벗


 어린 나날, 둘레에는 으레 좋은 벗과 궂은 벗이 있었습니다. 좋은 벗은 좋은 벗대로 마음이 여리고, 궂은 벗은 궂은 벗대로 마음이 여립니다. 모두 작은 사람 작은 아이이거든요.

 동무들한테 짓궂게 구는 녀석이 마음 깊은 데까지 몹쓸 생각이나 버릇으로 젖어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짓궂은 동무녀석네 집에 놀러가 보면 이 짓궂은 동무녀석 또한 집에서는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집에서건 동네에서건 참으로 작은 아이랍니다. 고만고만한 또래에서는 주먹으로 을러대거나 구지레한 못난 짓을 저지를지라도, 덩치 큰 형이나 언니 앞에서는, 또 어버이나 동네 어른 앞에서는 더없이 자그마한 아이입니다.


.. 안네마리는 빙긋 웃으며 어둠 속에서 동생을 꼭 껴안았다. 덴마크 아이들은 누구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이름난 이야기꾼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도 바로 덴마크사람이다 ..  (22쪽)


 하루를 더 살고 새 하루를 다시 살면서 헤아립니다. 이제까지 만나거나 스친 숱한 궂은 벗들 가운데 딱하거나 안쓰럽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국민학교 때라든지 중·고등학교 때라든지 군대에서라든지 회사에서라든지 길에서라든지 …… 수없이 많은 짓궂은 사람을 스칩니다. 까닭없이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돈에 눈이 멀어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생각을 안 하며 막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된 짓을 하는 어른 가운데 당신 집에 토끼 같은 아이를 애틋하게 돌보는 사람이 있기 일쑤입니다. 아니, 제아무리 막되게 산달지라도 제 아이 앞에서까지 막되게 살지는 못하기 마련입니다. 바깥에서 여린 사람을 들볶을지라도 겉으로 우쭐거리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어설픈 허울을 쓰면서 어줍잖게 제 살을 갉아먹는 셈입니다.

 청소당번이면서 몰래 내빼는 괘씸한 동무들은 늘 있습니다. 몰래 내뺀 녀석을 담임한테 일러바칠 수 있습니다. 한 번쯤 일러바칩니다. 그러나, 일러바치고 나서 뉘우칩니다. 괘씸한 녀석이 우락부락한 선생들한테 얻어터지며 쫄아드는 가녀린 모습을 보니, 몰래 내빼며 혀를 쭉 내밀던 그 짓궂은 모습이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예 불쌍하고 여린 동무입니다. 아마 무슨 일이 있겠지요. 그냥 귀찮거나 번거로와서 더 뛰어놀고 싶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청소당번을 내빼지 않은 얌전한(?) 내가 동무녀석 몫을 더 해 주면 됩니다. 혼자서 교실을 쓸고 닦으며 치우더라도 삼십 분이면 다 해낼 수 있습니다. 청소당번을 맡은 동무들이 모조리 내뺐을지라도 그러거나 말거나 나 스스로 천천히 책걸상을 치우면서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면 됩니다. 청소당번 어느 누구도 칠판을 안 지우고 지우개를 안 털어 놓았다 한들, 내가 청소당번이 아니라 한들, 조용히 일어나서 나 스스로 치우고 지우고 털어 놓으며 깔끔히 마무리지어 놓으면 됩니다. 꼭 당번이 하란 법은 없으며, 당번이 안 하더라도 손가락질하거나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하고, 할 만한 사람이 하면 되니까요. 길에 떨어진 꽁초를 밟아서 끄거나 골목에서 뒹구는 비닐봉지를 주워서 쓰레기통으로 옮기는 일은 ‘꽁초를 버린 사람’이나 ‘쓰레기 버린 이’ 스스로 할 때에 가장 낫겠지요. 그러나, 버려진 꽁초나 쓰레기를 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치워 줄 수 있습니다. 이곳까지 청소부를 불러서 치우라 하지 않아도 돼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국민학교 때에 몇 차례 ‘당번이 아니면서 칠판을 지우고 지우개를 터는 동무’를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어, 야, 너 당번 아니잖아?” “당번이 아니어도 지워야 하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동무 옆에서 함께 거듭니다. 동무는 씨익 웃습니다. 저도 따라서 웃습니다. 동무녀석은 요 깜찍한 짓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제 어머님한테서 배웠을까요, 제 아버님한테서 익혔을까요, 동네 어르신한테서 받아들였을까요. 당번 노릇을 하지 않은 동무는 참 짓궂지만, 이 짓궂은 동무가 있어 한결 고운 동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얄궂은 동무가 있기에 더욱 착한 동무를 깨닫습니다.


.. “내 단짝 친구였던 헬레나가 저 집에 살았지. 그 집에 가서 가끔 같이 밤을 새우기도 했어. 그 친구가 주말이면 더 자주 우리 집에 왔지만. 시골이 도시보다 더 재미있는 것 같아.” 엄마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  (77쪽)


 궂은 벗 때문에 학교 가기 싫은 적이 잦았습니다. 조그마한 학교 울타리에서 무슨 힘다툼을 한다며 툭하면 여린 아이를 괴롭히거나 주먹질을 하거나 주머니를 터는 동무들이 참 못마땅하며 밉살스러웠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대학바라기 공부만 죽어라 하는 가운데 이런 공부라면 굳이 학교라는 데에 안 나오더라도 홀로 할 만하다고 느꼈습니다. 따분하며 재미없는 교과서와 시험지만 푸느라 햇살 밝은 날에도 어두컴컴한 시멘트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한다면, 어떠한 동무이건 착하거나 밝거나 고운 마음결을 지키기 만만하지 않겠다고 느꼈습니다. 우중충한 옷을 ‘학교옷’이랍시고 입혀 놓으니까 저마다 다르며 고운 동무들은 빛을 잃습니다. 까까머리가 되도록 머리카락을 밀어 버리니, 볼썽사납게 죄수 차림이 됩니다. 군대와 학교와 감옥이란 똑같은 불지옥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고 느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지 못하는 군대요 학교요 감옥입니다. 저절로 궂은 사람으로 굴러떨어지도록 내모는 군대이며 학교이며 감옥이라고 느낍니다. 숲에서 뒹굴고 논밭이랑 벗삼으며 삶을 살찌우는 슬기를 깨우치도록 하는 곳이 학교여야 할 텐데, ‘학교’라는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쇠사슬이 된다고 느낍니다. 토박이말 사랑으로 외치는 ‘배움터’가 아닙니다. 이름 그대로 배우는 터가 되어야 할 배움터입니다. 이름 그대로 보금자리나 집터가 되어야 하고, 나눔터가 되어야 하며, 살림터가 되어야 합니다. 참다운 놀이터야 하고 즐거운 일터여야 합니다. 너그러운 쉼터여야 하고, 반가운 만남터여 하며, 기쁜 새터로 자리잡을 노릇입니다.

 궂은 벗이란 처음부터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사람들 마음밭에는 사랑스러운 씨앗과 함께 구질구질한 씨앗이 나란히 있어, 오늘날 이 땅 학교와 군대와 감옥은 사람들 마음밭에서 구질구질한 씨앗이 우람하게 커지도록 부추긴다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사회에서도, 회사에서도, 전철이나 버스에서도, 길거리에서도 …… 사랑스러운 씨앗이 올망졸망 돋아나게끔 이끌지 못하거든요.


.. 여기서부터는 덤불이 너무 자라 오솔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키 큰 블루베리 덤불 옆에 감춰진 오솔길 입구를 찾아냈다. 늦여름에 그 달콤한 블루베리를 따려고 얼마나 자주 여기서 멈춰 섰던가! 입과 손은 금방 퍼렇게 물들곤 했다. 그러고 집에 가면 엄마가 늘 웃으셨다 ..  (139쪽)


 평화는 평화를 부릅니다. 전쟁은 전쟁을 찾습니다. 고운 벗은 고운 벗을 부릅니다. 궂은 벗은 궂은 벗을 찾습니다. 그런데 평화는 전쟁을 평화로 바꿀 줄 알며, 고운 벗은 궂은 벗을 고운 벗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전쟁 또한 평화를 전쟁으로 끌어당길 줄 알며, 궂은 벗 또한 고운 벗을 궂은 벗으로 사로잡을 줄 압니다.


 (3) 평화문학 《별을 헤아리며》


 전쟁 이야기를 다룬 문학 《별을 헤아리며》를 읽습니다. 책을 찬찬히 읽으며 마지막 쪽을 덮습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이 문학을 일컬어 으레 ‘전쟁문학’이라 말할 수 있겠다 싶으면서 어딘가 찜찜합니다. 글쎄, 모두들 ‘전쟁문학’이니 무어니 하고 말하는데, 이러한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다른 전쟁문학을 놓고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별을 헤아리며》와 같은 문학을 가리킬 때에는 ‘평화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어울리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전쟁 때문에 아프고 힘겨운 나날을 그리니까 ‘전쟁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곰곰이 살펴보면 전쟁통에 평화를 꿈꾸는 삶을 그리기에 ‘평화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살펴보면 전쟁이건 아니건 언제나 평화롭게 살아가며 평화로운 사람들과 평화로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기에 ‘평화문학’이라는 이름이 아니면 안 어울리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 전쟁은 언젠가는 끝난다. 헨리크 삼촌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정말이었다. 전쟁은 거의 2년이나 지나서 끝났다. 안네마리는 열두 살이 되었다 … 거의 2년 동안 이웃들은 탈출한 유대인들을 위해 화분도 돌봐 주고 가구의 먼지도 털어 주고 촛대도 닦아 주었다. 엄마도 엘렌의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해 주었다. “친구란 그렇게 하는 거야.” 엄마가 말했다 ..  (164∼165쪽)


 전쟁문학으로 《별을 헤아리며》를 읽을 때하고, 평화문학으로 《별을 헤아리며》를 받아들일 때에는 크게 다릅니다. 평화문학인 《별을 헤아리며》라 한다면, 작품에 나오는 ‘딱하거나 안쓰러운’ 독일 병사들한테 당신들이 얼마나 바보스러우며 어리석은가를 깨닫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당신들 독일 병사한테도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있고 고마운 어머니가 있으며 믿음직한 벗이 있음을 깨닫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당신들 독일 병사 고향마을에도 맑은 해가 돋아나고 밝은 달이 비추며 너른 들판에 아름답고 구수한 곡식이 익는 줄을 깨닫도록 손길을 내밀 수 있어요.

 평화란 사랑입니다. 평화는 해코지가 아닙니다. 평화란 호미이자 쟁기입니다. 평화는 무기가 아닙니다. 평화란 믿음입니다. 평화는 따돌림이 아닙니다. 평화란 나눔입니다. 나한테 있는 돈이든 힘이든 무어든 스스럼없이 이웃과 나누는 마음이 평화입니다. 남한테 있는 돈이든 힘이든 빼앗으려 하거나 가로채려 하거나 후려치려 하는 마음은 평화일 수 없습니다.

 평화문학 《별을 헤아리며》는 좋은 벗으로 사귀는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아끼며 사랑하는가를 찬찬히 그립니다. 좋은 벗으로 언제까지나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이들이 당신들 하루를 어떻게 빛내거나 일구는가를 알뜰히 그립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그리고, 참다이 어깨동무하는 기쁨을 그리며, 곱게 사귀는 멋을 그립니다. 밤하늘을 달과 함께 빛내는 별 하나는 모든 사람 가슴에 고즈넉히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별을 잘 알아채고, 누군가는 이 별을 죽는 날까지 못 알아챕니다. 별을 알아채는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별을 못 알아채는 사람은 전쟁에 눈이 멉니다. (4343.10.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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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테리 트루먼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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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나날이기에 힘들며 고마운 삶
 [푸른책과 함께 살기 58] 테리 트루먼,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 책이름 :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 글쓴이 : 테리 트루먼
- 옮긴이 : 천미나
- 펴낸곳 : 책과콩나무 (2009.6.20.)
- 책값 : 9800원


 (1) 아픈 몸으로 고구마밭 함께 캐며


 요 며칠 몸이 무척 힘들다고 느끼지만, 곰곰이 따지면 요 며칠만 몸이 무척 힘들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저보다 어린 사람한테는 제 나이가 많고 저보다 늙은 사람한테는 제 나이가 적으나, 저 또한 더 늙은 쪽으로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니까요. 한창 젊을 때라기보다 훨씬 젊을 때처럼 고단함을 쉽게 훌훌 털며 새 기운을 내며 일할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머리로가 아닌 몸으로 느낍니다.

 어제와 그제 고구마밭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그제는 일손을 거들지 않으려 했으나 그냥 거들었습니다. 이른아침부터 아이하고 복닥이며 밥하고 빨래하고 밥 먹이고 하다가 한숨 돌리며 쉴 무렵이 낮 두어 시입니다. 이런 흐름을 이웃사람이라 해서 잘 헤아리지는 않고, 이런 흐름을 애써 말해 준들 잘 헤아려 주기란 어렵습니다. 흔히 하는 말이란 ‘왜 남자가 집안일을 하느냐?’이니까요.

 ‘왜 여자가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느냐?’고 묻기 어렵습니다.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적게 배운 사람 앞에서건 많이 배운 사람 앞에서건 똑같습니다. 흔한 텔레비전 연속극을 들여다보셔요.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오로지 여자입니다. 뻔하디뻔하게 여자들만 집안일을 도맡습니다. 지식인이건 지성인이건 가리지 않고 여자들만 집안일을 하도록 그립니다. 남자들은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수다를 떱니다.

 돈 좀 있는 살림이라면 집일을 맡아 주는 ‘도움이 아줌마(밥어미)’를 부립니다. 어찌 되었든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 우리 부모님은 10년 전에 나 때문에 이혼했다. 나의 출생이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아빠가 이혼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그렇다고 누나나 형도 아니다. 바로 나다. 아빠는 내 상태를 견디지 못했고, 그래서 떠나야만 했다 ..  (9쪽)


 생각이 있다는 남자 지식인이나 지성인 가운데 스스로 밥하고 빨래하며 쓸고닦는 밑살림을 즐겁게 하면서 다른 큰살림을 짊어지는 이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남자 지식인이나 지성인들 입에서 살림살이 꾸리는 이야기는 거의 튀어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 글쟁이 가운데 집안일 하는 ‘즐거움과 고단함’을 스스럼없이 적바림하여 나누는 사람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꾼들은 으레 ‘서민 경제’를 들먹입니다. 예나 이제나 ‘서민처럼 살아 보지 않’으면서 서민 경제를 북돋우겠다고 외칩니다. 서민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처럼 가난한 집에서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지 않고서 서민 경제를 북돋우는 길을 어떻게 찾아서 나누려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이제까지 서민 경제를 지키거나 북돋운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인이나 지성인들은 으레 개혁이나 진보를 외칩니다만, 개혁이란 무엇이고 진보란 어떻게 이루나요.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자그마한 사람들 삶자리를 건드리지 못하면서 펼친다는 개혁과 진보란 어떤 일이 될는지요.

 어쩌다 툭툭 내뱉는 ‘서민 경제 살리기’로는 가난한 여느 사람 살림살이를 북돋우지 못합니다. 어쩌다 툭툭 내뱉지조차 못하는 ‘집안일과 집살림 이야기’라면 이 나라 지식인과 지성인이란 뜬구름 잡으려고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달밖에 없습니다.


.. 상당히 확신하건대, 아빠가 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거다. 좋은 소식은, 아빠가 그러한 계획을 세운 이유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나쁜 소식은, 아빠의 동기가 얼마나 대단하든 내가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 내 고통을 끝낸다고? 그 말을 듣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아빠가 무슨 권리로 나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대체 아빠가 무슨 권리로 내 고통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품는단 말인가? 내 곁을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 아빠는 내가 정말로 죽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20, 67, 72쪽)


 힘든 몸을 움직여 고구마밭에서 줄기를 걷고 고랑을 삽으로 판 다음 호미로 고구마 씨알을 캐면서 생각합니다. 고구마 한 알을 얻기까지 ‘걷이’를 할 때에만 이와 같은 품과 땀과 겨를을 내놓아야 하는데, ‘걷이’뿐 아니라 ‘심기’와 ‘가꾸기’와 ‘돌보기’까지 헤아린다면, 고구마 한 알을 어떻게 맞아들이며 어찌어찌 즐겨야 좋을까 하고.

 힘든 가운데 힘을 꽤 쓰니 저녁에는 까무룩 곯아떨어집니다. 힘들도록 뛰어논 아이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며 밤새 칭얼거립니다. 아이는 칭얼거리며 고단하다고 드러냅니다. 어른은 곯아떨어지며 고달프다고 보여줍니다. 애 아빠는 고달프면서도 기저귀를 갈아야 합니다. 이듬날 아침이면 금세 새 기운을 얻어 일찍부터 깨어나는 아이랑 다시금 새롭게 복닥이며 놀아야 합니다.

 참말 예전 사람들은 숱한 농사일을 하며 숱한 딸아들을 거느리는 집살림을 어찌 일구었을까 궁금합니다. 요즘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이나 시사나 교육이나 정치나 자질구레한 데에 눈길을 안 두고 집과 마을 둘레에서 조촐하게 살아갔으니 수많은 아들과 살붙이랑 복닥이면서 얼마든지 집살림을 잘 꾸렸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곳저곳 눈길을 많이 두면서 돈을 참 많이 벌어야 한다고 얽매이니까 집살림은 집살림대로 엉망이며, 농사일을 할 마음을 못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고단하고 버겁지만, 하고 보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농사일은 아니에요. 우리 살붙이 먹고살 푸성귀와 곡식과 열매를 얻을 땅은 그렇게까지 넓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집식구 즐길 먹을거리는 자그마한 땅으로 넉넉합니다. 더 많이 누리려 하니까 더 많이 벌어야 할 뿐입니다. 옛날에는 소작삯을 많이 떼어야 했으니 몹시 힘겹게 농사를 지어야 했고요.


.. 내가 죽은 뒤, 혹시라도 누군가는 아빠의 시 〈숀〉을 읽게 되겠지. 내가 죽고 일 년 뒤, 어쩌면 이 년, 아니면 이백 년 뒤가 될까? 시를 읽고 감동에 젖은 그 사람은 어쩌면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누구를 알게 될까? 그들은 무엇을 알게 될까? 그 시에는 시인인 시드니 E.맥다니엘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특별 주석이라도 달려 있을까? 그 독자는 아빠나 나를 조금이라도 더 잘 알게 될까? ..  (139∼140쪽)


 몸이 꽤 튼튼했다면 고구마밭에서 고구마를 더 빨리 캐내어 더 빨리 일을 끝마치자고 생각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몸이 퍽 튼튼했으면 서울이든 다른 도시이든 볼일 보러 마실을 간다고 길을 나서느라 고구마밭 일손 거들기란 아예 안 했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해롱거리는 몸이라 집에서 더 힘들게 아이랑 복닥입니다. 비틀거리는 몸이기에 지난날 어머님들이 몸이 아플 때에도 어김없이 집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으며 하루하루 살아낸 나날이 어떠했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하루를 살고 이틀을 살며 고마운 날들뿐입니다.


 (2) 코 훌쩍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림이란 둘도 없는 고마움이라고 느낍니다. 젊음이란 대단한 고마움이라고 여깁니다. 늙음이란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고운 목숨 물려받으며 어린 나날을 뜻깊고 사랑스레 보냅니다. 이러한 어린이 나날은 참으로 고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또는 이웃한테서 보살핌을 받으면서 푸른 나날을 무럭무럭 자라며 젊은이로 우뚝 섭니다. 이와 같은 젊은이 나날은 무척 고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른 자리에 들어서면서 당신 어버이가 당신한테 했듯이 당신 피와 살과 뼈를 깎아 아이들한테 새 목숨을 물려줍니다. 당신이 사랑을 받아 왔든 미움을 받아 왔든 당신 아이들한테 새 삶을 이어주면서 당신과 당신 아이들이 꾸릴 새 나날을 함께 일굽니다. 이 늙은이 나날이란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 모릅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햇수는 열두 해이고, 대학교까지 다닌다면 열여섯 해인데, 대학원을 더 다닌다든지 대학교를 좀 오래 다닌다면 스무 해쯤 학교를 다니기까지 합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다닌다면 스물다섯 해나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고, 나라밖으로 더 배우러 다녀온다면 서른 해 안팎을 배움터에서 지새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움터를 드나드는 동안 집에서 머무르거나 보내는 나날은 줄어듭니다. 집에서 먹고잔다지만 정작 하루 가운데 집에 있는 동안은 얼마 안 되고 으레 배움터에서 지새웁니다. 새벽나절 별을 보며 학교에 가서 밤나절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오늘날 수험생이잖아요. 중학생 때부터. 어버이랑 함께 살아간다지만, 가만히 따지면 어버이란 이름이나 허울뿐입니다. 아이들이 사귀는 사람이란 바로 교과서이고, 책이며, 지식입니다.


.. 내 방식대로 인생을 경험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오로지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만 인생을 경험하다 보면 무언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 된다. 달리는 사람을 보기는 했지만 막상 달릴 때 다리가 어떤 느낌일지 도대체 알 리가 없다. 야구공을 던질 때 팔의 느낌은 어떨까? 손가락으로 연필을 잡을 때는? 누군가와 입맞춤을 할 때 입술과 입술이 닿는 느낌은 어떨까? ..  (16쪽)


 사람 목숨이 꽤 늘어 일흔이나 여든은 아무것 아니라 하는데, 이 가운데 1/3이든 1/4이든 꼭 반토막이든 학교 울타리에서 지새우는 오늘날 사람이 되었습니다. 학교 울타리 바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복닥이며 어깨동무하는 나날은 몹시 줄었습니다. 아니, 학교 울타리 바깥에서 사람들과 처음으로 어울리거나 복닥이며 어깨동무할 ‘나이’가 자꾸자꾸 높아만 갑니다.

 열 살부터 사회살이를 부대껴야 한다고 슬픈 삶일 수 없습니다. 열 살부터 사회살이를 겪는다고 기쁜 삶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삶입니다. 다만, 열 살부터 사회살이를 마주하는 사람하고 스무 살부터 사회살이를 마주하는 사람이랑 서른이나 마흔 살부터 사회살이를 복닥이는 사람은 사뭇 다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회살이를 꾸밈없이 맞아들여 나와 내 이웃을 고루 살피려는 매무새는 옅습니다. 학교 울타리에서 보내는 햇수가 길면 길수록 학교 울타리에서 내 머리속에 집어넣은 지식에 따라 더 움직이고야 만다고 느낍니다.


.. 발작을 하며 경험하는 웃음의 순간들이 나에게는 진정한 행복처럼 느껴진다. 나는 왜 그런 행복을 좀 즐기면 안 되나? ..  (49쪽)


 예부터 슬기를 깨우친 어른들은 한결같이 ‘생각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생각을 해야겠지요. 그러면, 생각이란 무엇이고 생각이란 어떻게 하며 생각이란 누구랑 어디에서 하는 가운데 이러한 생각들로 내 삶을 어찌어찌 일구어야 좋을까요. 머리를 굴리는 일이 생각이 되나요. 머리를 쓰면 생각하기가 될는지요.

 집살림은 어머니라는 자리에 서는 여자가 도맡을 일이 아닙니다만, 예나 이제나 어머니라는 여자들만 집살림을 도맡고 있는데요, 집살림을 도맡은 어머니들은 날마다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아침밥 낮밥 저녁밥을 어찌 차리는가, 밥과 반찬은 어떻게 마련하나, 쌀을 어느 만큼 푸고 불리나, 봄에는 무얼 하고 겨울에는 무얼 하며 아침과 저녁은 어떻게 차리면 좋을까, …… 집구석 어디에 먼지가 쌓이고, 마룻바닥이나 방바닥을 쓸고닦는 데에 어느 만큼 걸리며, 아이들을 어떻게 뛰놀도록 내보내며, 아이들 주전부리는 또 어찌어찌 마련하는데다가, 아이들한테 무슨 심부름을 시키고 무슨 일을 맡기며 밤에는 어떻게 재우나, …… 나날이 무럭무럭 크는 아이들 몸에 걸맞게 어떤 옷을 지어 입히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좋으며, …… 이웃집 살림살이는 어떠하고 우리 집 살림살이는 어떠하며, 길손이나 동냥하는 거지한테는 어떻게 대접하고, …… 텃밭과 논밭은 어찌어찌 돌보며, 나물은 어느 만큼 언제 뜯어서 삶고 무치고 볶고 데치고 말리고 해야 하며, 명절과 제사는 언제 돌아오는지, 아이들과 어른들 난날은 언제이고, …….

 살림이란 옷과 밥과 집입니다. 차례를 따진다면 옷·밥·집이라기보다 밥·집·옷이 되지 않으랴 싶은데, 차례가 이리 되든 저리 되든 우리들은 옷과 밥과 집을 모두 알뜰히 건사할 때 비로소 살림을 한다고 말합니다. 옷·밥·집을 건사하지 못하면 살림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설거지 좀 한다거나 밥 한번 했다거나 걸레질 몇 번 했다고 살림을 했다 말할 수 없어요. 아이랑 몇 시간 놀아 주었다느니 아이한테 그림책 몇 번 읽어 주었다느니 하면서 아이키우기를 했다고 우쭐댈 수 없고요.

 살림이란, 여자만 한다거나 남자가 거든다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살림을 건사할 일입니다. 내 옷과 내 밥과 내 집을 내 몸과 마음을 써서 가다듬으며 붙잡을 수 있어야 비로소 우뚝 서는 ‘어른’ 한 사람입니다.

 시집장가를 간다 해서 어른이 아니고, 사랑놀이를 홀가분하게 즐기거나 술담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나이라 해서 어른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어른이 아니며, 아이를 둘이나 셋쯤 낳았다고 어른이 되지 않아요. 어른은 “살림할 줄 알며, 살림을 즐거이 하는 사람”만을 일컫습니다.


.. 내가 기침을 하다가 아빠 얼굴에 밥과 으깬 채소를 한입 가득 뱉어 내자, 아빠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아빠는 나한테 점심을 먹이던 중이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 묻은 침과 음식 찌꺼기들을 닦아 내며 아빠가 투덜거렸다. “도무지 적응이 안 돼.” 아빠는 건너편 주방 벽으로 숟가락을 내동댕이쳤다. 아빠의 입에서 또다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짓은 애기들이나 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넌…… 어휴, 젠장!” ..  (69쪽)


 아이가 코를 훌쩍입니다. 아빠도 코를 훌쩍입니다. 아이에 앞서 아빠부터 코가 나쁩니다. 어쩌면, 아빠를 낳은 어머니(아이한테는 할머니)부터 코가 안 좋았는지 모르며, 할머니를 낳아 기른 어버이부터 코가 궂었을는지 몰라요. 아이는 가을로 접어들고부터 늘 코를 훌쩍입니다. 아빠 또한 노상 코를 훌쩍입니다. 아이는 아직 스스로 코를 시원하게 풀지 못합니다. 코에 소금물을 넣어 준 다음 엄마나 아빠가 풀어 주어야 하고, 면봉으로 살살 코딱지나 콧물을 빼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아이는 코훌쩍임이 그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이지만 도시와 견주어 맑은 바람과 물만으로는 몸이 금세 튼튼해지지 않습니다. 한 해를 살고 두 해를 살며 열 해와 스무 해를 보내야 여리거나 아픈 몸이 비로소 제법 튼튼하거나 퍽 단단하게 거듭나리라 봅니다.

 그러나 한결 맑은 물과 바람과 햇살과 곡식을 받아들인다 해서 언제나 튼튼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시골에서도 여린 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노상 골골 앓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한결 맑은 물과 바람과 햇살과 곡식으로 내 몸과 마음을 한결 맑고 밝으며 싱그럽게 다스릴 수는 있다고 느낍니다. 여리고 아프지만, 여리고 아픈 내 몸을 고이 껴안으면서 내 삶을 맑고 밝으며 씩씩하게 일구며 하루하루를 즐길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만약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줄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고, 반대로 진정한 나 자신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 ..  (83, 84쪽)


 코를 훌쩍이는 아이를 품에 안습니다. 어제 읍내에 마실을 가며 사 온 능금을 반토막으로 잘라 껍질을 벗겨 건네고, 아이가 까까 사 달래서 쥐어 준 뻥과자 한쪽을 건넵니다. 물을 끓여 따숩게 마시도록 합니다. 아빠도 따뜻한 물을 한 잔 천천히 마십니다.

 아빠는 아빠 일을 조금 하고 싶어 어린이 만화영화를 하나 셈틀에 걸어 놓습니다. 슬슬 아이가 배고플 무렵이라, 두부를 썰고 김에 밥을 말아 아이 입에 넣어 줍니다. 아이는 밥과 두부를 냠냠 받아먹으면서 만화영화를 들여다봅니다. 아빠는 살짝 숨을 돌립니다. 나란히 밥을 먹고 나란히 놀며 나란히 일을 한다면 가장 좋겠지요. 아직은 어렵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느긋이 지낼 수 있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우리 식구가 도시에서 지낸다면 달삯을 치르느라 무척 버거워 그저 꿈만 꿀 테지만, 시골집에서는 달삯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이제부터 꾸준히 살림돈을 추슬러 본다면 돈 몇 푼 더 벌려고 도시로 볼일 보러 오가는 일을 줄이면서 시골집에서 밭이랑 논이랑 일구며 오순도순 조용히 지낼 날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아주 똑똑한 탓에 너무 바보스러운 아빠들


 푸른문학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를 읽습니다. 이 작품은 ‘줄거리 읽기’에 눈길을 둘 까닭이 없기에 줄거리를 말씀드리자면, 책이름 그대로 ‘아빠가 나를 죽일까 걱정하는 아이’ 눈높이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작품 끝자락을 보면 ‘아빠는 끝끝내 나를 죽이고야 마는구나’ 하는 실마리를 남긴 채 맺습니다.


..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나는 바보천치다. 의사들이 내가 왜 멍청한지 엄마 아빠한테 설명하고, 엄마 아빠가 친구들한테 설명하는 말을 수억 번도 넘게 들었다. 그들은 내 뇌가 작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한다 … 내 손을 붙잡아 점자판에 대 보는 사람도, 가슴에 대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려 보려는 사람도 없다 … 나는 바보가 아니며 이 쓸모없는 몸뚱이 안에 진짜 내가 있다는 사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난 단지 이도저도 아닌 어딘가에 갇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안다면,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알게 된다면 과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하고 이따금 정말로 궁금해진다 ..  (10, 12, 18쪽)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를 이끌어 가는 목소리는 ‘장애를 앓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아기였고, 나중에는 어린이였으며, 죽을 무렵에는 푸름이입니다. 이 사람이 아기였을 때에는 장애가 있으리라 여기지 않습니다. 나중에 어린이가 될 무렵 아빠랑 엄마 되는 사람은 ‘아이한테 장애가 있군!’ 하고 느끼는데, 엄마는 아이한테 장애가 있건 없건 똑같이 사랑하지만 아빠는 아이한테 장애가 있기 때문에 ‘다르게 사랑하려’ 합니다. 이를테면 ‘안락사’입니다.


.. 열네 해를 사는 동안 아빠가 내 앞에서 내 이름을 소리내어 부른 게 전부 해서 열여섯 번이다 … 아빠의 눈에 내가 식물인간이라면, 식물인간이라면, 나는 절대로 삶을 즐기거나 생산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 지체라는 말은 ‘느리다’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단지 느린 부류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한데,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똑같은 방식과 똑같은 속도로 처리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정상인들이 우리를 저능아라고 하니까 우리는 저능아가 되는 거다 ..  (29, 39, 59쪽)


 푸른문학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에 나오는 어머니는 집안살림을 도맡습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아버지는 집안살림을 거의 하지 않을 뿐더러 잘 모릅니다. 아버지 되는 분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두루 알려진 시인이며 작가이자 지식인입니다. 어머니 되는 분은 그예 ‘어머니’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을 잇습니다. 시인이든 아니든 작가이든 아니든 지식인이든 아니든, 아이 하나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라 한다면 집안살림을 함께 해야 합니다. 밥을 마련하든 옷을 장만하든 집을 짓는 어버이 된 사람은 어버이 당신과 아이가 함께 살아가도록 살림을 꾸려야 합니다.

 앤서니 브라운 님이 빚은 그림책 《돼지책》을 보면 ‘아주아주 커다란 일’을 하는 남자들(아버지와 아들들)은 집안살림을 도무지 안 할 뿐 아니라, 눈길조차 안 두고, 알아야 할 까닭이 없다고 여기지만, 모든 권리와 권력과 물질을 누립니다. 푹신한 걸상에 몸을 기대어 “엄마!(또는 여보!)” 하고 부르면 밥이 나오고 옷이 나오며 주전부리가 나옵니다. 아침에 ‘아주아주 커다란 일’을 하고자 일터(또는 학교)에 가서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오면 집은 늘 말끔하며 가지런한데다가 코를 건드리는 맛난 냄새가 집안을 감돕니다. 옷을 벗어 아무 데나 휙휙 던져 놓아도 이듬날 옷을 챙겨 입으려고 옷장을 열면 보송보송 잘 마르고 개킨 채 알뜰살뜰 놓여 있습니다. 밥 걱정 옷 근심 집 끌탕이란 한 번도 하지 않는 “버르장머리없는 돼지들”이에요(돼지한테는 안 된 말씀입니다만).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이자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나’를 끝내 죽이려 드는 아빠라는 사람 또한 “버르장머리없는 돼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집안일이란 모르며 살림살이 또한 생각하지 않는데다가 ‘다른 사랑’을 하고자 할 뿐입니다. ‘다른 사랑’이란, 한자말로 하자면 ‘다양성을 살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을 다르게 보는’ 사람, 또다른 한자말로 하자면 ‘차별을 하는 사랑’입니다.


.. “당연히 보수는 전부 다 지급될 겁니다. 오늘 밤 내가 따로 할 일이 없으니까, 난 그냥 좀 돕는 것뿐이니까요.” “와, 그러면 좋겠네요.” “그럼 거래가 끝난 겁니다.” 평생을 통틀어 아빠 혼자서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빠가 나를 돌보겠다며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뭐, 거래가 끝났다고? 내가 끝난 거래란 말인가? ..  (151∼152쪽)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좋다고 하는 책을 더 많이 읽어도 괜찮을 테지만, 좋다고 하는 책이라 해서 굳이 더 안 읽어도 괜찮습니다. 좋은 책을 많이 읽어 ‘온누리에 이런저런 좋은 책이 있답니다’ 하고 떠들기 앞서, 좋은 책은 한 가지조차 모르지만 ‘우리 아이를 사랑하고 이웃 아이를 우리 아이처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삶’을 꾸리면 몹시 아름다워요.

 좋은 책 한 권에 깃든 좋은 속살을 받아먹으며 내 마음밥을 살찌우는 일은 틀림없이 즐겁습니다. 이와 함께, 좋은 책 한 권이 얼마나 좋은가를 까맣게 모르지만, 내 코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깨달으며 따사롭고 넉넉하게 껴안을 수 있을 때에도 대단히 즐거워요.

 이리하여, 저로서는 아무리 돈 많이 준다고 하는 일터라 할지라도 아침저녁으로 오가며 달삯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돈은 거의 못 벌어 살림이 쪼들린다 할지라도 아이랑 엄마랑 아빠가 올망졸망 복닥이며 하루를 길면서 짧게 느끼며 보내는 이 삶이 반갑습니다. (4343.10.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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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일공일삼 10
피에르 루키 글, 퓌그 로사도 그림, 김화영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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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들한테는 재미있을는지 몰라
 [책읽기 삶읽기 17] 피에르 루키,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1991년에 ‘민음사의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열 번째로 나온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를 읽다. 아니, 읽다 읽다 끝내 못 읽고서는 덮고야 말다. 이 책은 ‘민음사의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던 다른 책하고 마찬가지로 비룡소 출판사로 이름을 바꾸어 새 판으로 다시 나왔다. 2000년에 새로 나온 판은 번역을 손질했을까. 나는 헌책방에서 1991년판을 만나서 읽는다. 120쪽이 채 안 되는 어린이책인데 70쪽까지 읽고는 더 읽지 못한다. 조금 더 읽으면 끝인데, 도무지 따분하고 재미없어서 읽을 수 없다. 끝까지 읽고 나서 ‘이 책은 이렇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더 좋겠지. 그러나 이렇게까지 읽을 수 없게끔 쓴 작품이 있다니 슬프다.

 책날개에는 “최고의 샹송가수인 조르쥬 브라상스는 엉뚱하면서도 달콤한 세계를 펼쳐 주는 작가, 작사가, 작곡가로 피에르 루키를 극찬했다”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아마 나라밖 프랑스에서는 널리 사랑받을는지 모른다. 퍽 좋은 작품인데 번역이 좀 얄딱구리할는지 모른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썩 재미있게 못 즐긴다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같은 출판사에서 이무렵 함께 내놓은 《초록색 엄지소년 티쭈》라든지 《노랑 가방》이라든지 《아이와 강》이라든지 《내일은 맑을까요》 같은 작품은 참 신나게 잘 읽었다.

 섣불리 말할 수 없으나, 다른 이들한테는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다 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나한테까지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을 수는 없다. 거꾸로, 내가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다고 느끼는 작품을 다른 이들이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게 여길 수는 없다.


.. 아버지는 부족한 게 없을 만큼 행복하다. 그런데도 그게 아닌지 기어코 연극을 하겠다는 것이다! ..  (12쪽)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시계수리공 아빠 이야기를 적바림한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이다. 줄거리로만 살핀다면 갖가지 시끌벅적한 일을 일으키며 터무니없다 싶은 꿈을 꾸며 ‘조용하고 아늑한’ 집안에 큰 물결을 일으키는 못 말리는 아빠 삶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줄거리를 펼쳐 보이는 ‘말하는 이 눈높이(아이 눈높이로 이야기합니다)’가 어중간하고, 집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새앙쥐 이야기는 좀 어설피 끼어들었다. 뭔가 아기자기한 맛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딘가 생뚱맞거나 뚱딴지 같다 싶은 아빠 몸짓과 말마디가 톡톡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번역 탓이라 해야 할까. 번역이 맛깔스럽거나 신바람이 난다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빼어나며 재미난 작품이라 할 만할까.

 김화영 님은 어린이책도 곧잘 우리 말로 옮겼는데, 이분이 옮긴 어린이책 글줄은 썩 내키지 않는다. 프랑스 어른문학은 모르겠으나 프랑스 어린이문학 번역은 ‘어른문학 번역과는 아주 다르게’ 해야 한다고 느낀다. 《아이와 강》이라는 작품도 김화영 님이 옮겼는데, 이 작품 번역도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손꼽히는 숱한 번역쟁이들은 어른문학이 어린이문학보다 훌륭하거나 높다고 생각하는 굴레를 털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린다기보다 어른문학 번역쟁이는 아무도 못 말린다고 해야 할까. 어린이를 사랑하면서 어린이 마음이 되고, 어린이 눈높이에서 동무 어린이랑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신나게 뛰노는 몸가짐으로 어린이문학을 살갑고 따스하며 가만가만 어루만질 수 있는 ‘철이 퍽 없는’ 개구쟁이 번역쟁이를 만나고 싶다. (4343.10.15.쇠.ㅎㄲㅅㄱ)


―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피에르 루키 글,김화영 옮김,1991년:민음사+2000년:비룡소/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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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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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 아닌 좋은 사람 되고픈 삐삐
 [책읽기 삶읽기 9]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삐삐’를 생각하면 ‘말괄량이’라는 이름이 퍼득 떠오른다. 삐삐 하면 척 하고 “말괄량이 삐삐”가 된다. 스물여섯 달이 거의 차고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갈 우리 집 딸아이를 볼 때면 으레 ‘말괄돼지’라는 낱말이 튀어나온다. 언제나 딸아이 스스로 하고픈 대로 하려 들고, 주는 밥은 안 먹으려 하기에. 신나게 노래부르며 춤추는 녀석은 밥 안 먹는 돼지요 마음껏 뛰노는 말괄량이이다.

 대한민국 이 나라에는 스웨덴말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있다. 나는 다섯 학기를 다니다 그만두었으나 네덜란드말을 가르치는 대학교 학과 또한 있다. 이탈리아말과 포르투갈말과 체코말과 유고말 또한 함께 가르친다. 그러나, 이탈리아말 학과를 나와 이탈리아 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은 더러 보았으나, 스웨덴말 학과를 나와서 스웨덴 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는 사람은 아직 못 본다. 버젓이 포르투갈말 학과가 있으며 포르투갈말 학과 교수들이 있는데에도 포르투갈 문학을 포르투갈말로 된 책에서 옮기지 못한다. 이는 네덜란드 문학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네덜란드말-한국말 사전이 있으면 무엇하나. 네덜란드말 학과 교수가 있으나 무엇이 다른가.

 삐삐 이야기를 쓴 분은 스웨덴사람이다. 그렇지만 1982년에 종로서적에서 나온 《말괄량이 삐삐》(김인호 옮김) 말고는 스웨덴말에서 한국말로 옮긴 책이 더 없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다른 문학도 똑같다. 이분 문학을 스웨덴말에서 한국말로 옮기는 번역쟁이는 찾아보지 못한다. 예나 이제나 ‘스웨덴말에서 독일말로 옮긴 책’을 바탕으로 옮길 뿐이다.


.. 스웨덴에 그림같이 멋진 작은 마을이 있었다. 판판한 돌이 깔린 거리에 마당 있는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을 찾아온 사람이면 누구나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볼 때, 볼거리가 많은 마을은 아니었다 ..  (9쪽)


 나는 꿈을 꾼다. 누군가 네덜란드말 학과를 마친 젊은이 가운데 ‘안케 드브리스’ 문학이나 ‘안니 M.G.슈미트’ 문학이나 ‘리타 페르스휘르’ 문학을 네덜란드말로 된 책에서 우리 말로 옮겨 주기를. 하다못해 《안네 일기》라도 네덜란드책에서 우리 말로 옮기기를. 그리고 제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어린이문학을 스웨덴말을 배우는 학생과 스웨덴말을 가르치는 교수가 힘과 슬기를 모두어 스웨덴말로 된 책에서 우리 말로 옮겨 내기를.

 그러고 보면 덴마크사람 한스 안데르센 문학을 덴마크말에서 우리 말로 옮긴 적이란 없다. 노르웨이 문학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테지. 핀란드 문학은 어떻고.

 이디쉬말을 쓰는 사람들 문학은 어떻게 옮기는가. 베트남 문학은, 라오스 문학은, 스리랑카 문학은, 티벳 문학은 …… 우리는 어떠한 말로 된 책을 바탕으로 한국말로 옮겨서 읽는 셈일까.


.. 아니카는 삐삐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누가 삐삐한테 화를 내는 것이 싫었다 ..  (30쪽)


 모르는 노릇이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를 제대로 옮겨 낸 판으로 읽기는 힘들겠다고 느낀다. 우리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아가씨가 되고 아줌마가 되며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말괄량이 삐삐는 노상 독일책에서 옮겨서 읽을밖에 없는 이 나라일 뿐이라고 느낀다.

 삐삐 이야기책을 내놓아 그렇게 많이 팔고 돈을 많이 번 출판사는, 이제라도 독일책이 아닌 스웨덴책을 바탕으로 다시금 새롭게 옮길 마음이 있을까. 스웨덴말 학과가 있는 대학교는 누구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같은 분들 문학을 대학교 돈이라든지 나라에서 얻는 돈이라든지 들여 이제라도 꼼꼼하며 알차게 새롭게 옮기도록 땀을 흘릴 뜻이 있을까.


.. 삐삐는 토미와 아니카를 즐겁게 해 주려고 사다리를 내려갈 때 항상 물구나무를 서서 내려갔다 ..  (78쪽)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읽는다.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인문책방 〈이음책방〉에 마실을 갔다가 이 책이 눈에 번쩍 뜨여 집어들어 읽는다. 첫판은 1996년 6월 15일에 나왔고, 고침판은 2000년 11월 15일에 처음 냈으며, 내가 산 판은 2010년 4월 10일 45쇄이다. 고침판은 45쇄인데 첫판으로는 얼마나 많이 찍었을까. 헌책방을 찾아가도 이 책은 어렵잖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이음책방〉이 잘 되기를 빌면서 부러 이 책을 〈이음책방〉에서 7000원을 꼬박 치르며 장만한다.

 1982년 종로서적판 《말괄량이 삐삐》를 읽고 나서 1996년에 시공주니어에서 내놓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겹쳐 읽다가 참말 갑갑해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삐삐 이야기를 장만하여 읽을 생각을 오래도록 접고 지냈다. 독일책에서 옮겼기 때문에 번역이 떨어진다 할 수는 없다. 삐삐 책은 나라안에서 손꼽는 번역모임에서 우리 말로 옮겼다. 이분들이 번역을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틀에 매여 있다. 이분들이 옮긴 책은 어느 책이나 어슷비슷하다. 글을 쓴 사람에 따라 다른 넋과 삶과 말이 보이지 않는다. 하이타니 겐지로 책이라면 하이타니 겐지로 맛과 냄새가 나야 하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책이라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맛과 냄새가 나야 한다. 삶과 삶터와 삶자락이 다른데 우리 말로 옮겨진 글월 매무새는 거의 똑같다.


.. 토미와 아니카네 반 친구들이 모두 부두로 나와서 친구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러움도 섞인 눈물이었다. 내일이면 친구들은 평소처럼 학교에 가야 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지리 숙제가 남태평양의 섬들을 죄다 공부해 가는 것이었다. 토미와 아니카는 한동안 숙제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  (96쪽)


 나는 아름다운 외국 문학을 아름다운 번역으로 읽고 싶다. 이 아름다운 외국 문학 하나에 온마음을 쏟은 따뜻하고 넉넉하여 사랑스러운 책을 가슴에 안고 싶다. 낱말 하나하나를 더 살뜰히 고르는 번역문학을, 말투 하나하나를 더욱 살가이 어루만지는 번역문학을 마주하고 싶다.


.. 토미와 아니카의 엄마가 지금 두 아이를 본다면 얼마나 깜짝 놀랄까? 둘의 창백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와 건강한 모습뿐이었다 ..  (100쪽)


 씁쓸한 번역 이야기는 이제 집어치우자. 아름다운 어린이문학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이야기하자.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짚을 수밖에 없다. 삐삐 이름은 ‘삐삐 긴양말’이지 ‘삐삐 롱스타킹’이 아니다. 삐삐는 ‘영어를 모르’는 북쪽 나라(스웨덴) 어린이이다.


.. 이윽고 삐삐가 꿈을 꾸듯이 말했다. “얘들아, 파도 소리 좀 들어 봐. 내가 전에 ‘쿠르쿠르두트 섬이 너무 좋아서 영원히 살고 싶어질지도 몰라’라고 했던 말 기억나?” ..  (110쪽)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에 나오는 삐삐는 쿠르쿠르두트 섬에서 함께 놀다가 물에 빠진 토미를 살리며 상어를 번쩍 들며 말한다. “(상어를 보며) 부끄럽지도 않니(122쪽)?” 토미를 뭍에 건져 놓고는 엉엉 울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 상어가 아침도 못 먹고 배고파할 것이 가엾어서(123쪽).”

 ‘뒤죽박죽 별장’에서 삐삐랑 함께 노는 토미와 아니카는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173쪽).” 하는 말을 절로 내뱉는다. “그리고 어른들은 놀지도 않아. 후유, 어른이 되는 건 너무 끔찍해(174).” 하는 말을 한숨과 함께 뱉어 낸다.

 1948년에 나온 어린이문학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인데, 온누리에 손꼽히는 문화복지 나라 스웨덴조차 어른들은 따분하고 답답하며 재미없다는구나. 2010년 스웨덴은 1948년 스웨덴과 견주어 좀 즐거워졌을까. 좀 홀가분해졌는가. 좀 재미있어졌나.

 2010년 대한민국하고 1948년 대한민국은 어떠할는지 궁금하다. 경제성장에 목을 매는 이 나라는 차츰차츰 살기 좋을 뿐 아니라 즐거운 나라라 할 만한지 궁금하다. 삐삐와 토미와 아니카가 살아가는 작은 마을은 ‘관광지’가 아닐 뿐더러 ‘관광할 만한 유적이나 박물관’조차 변변하게 없으나 “그림같이 멋”지며,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참 살기 좋”다고 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더 많은 돈이나 더 높은 이름값이나 더 센 힘이란 부질없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착하거나 참되거나 고운 삶이 빛난다.

 누가 누구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까닭이 없다. 누가 누구보다 큰 집에서 살아야 할 까닭이 없다. 누가 누구보다 잘난 대학교에 들어가야 할 까닭이 없다. 학교를 안 다니고 빵집에서 일꾼으로 지내더라도 손가락질할 사람이 없다. 구멍가게를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아 이어간다 하더라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교사나 경찰이나 공무원이나 시장쯤 되어야 무언가 뜻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는다. 곰셉을 잘하건 못하건 그리 대수롭지 않다. 모두들 아름다운 삶을 바란다. 다들 사이좋은 이웃을 생각한다. 다만, 어린이일 때에는 그토록 신나게 뛰어놀면서 막상 어른이 되면 뭐 그리 바쁘고 힘든지 아이들하고 놀 겨를을 못 낼 뿐 아니라 어른들끼리도 제대로 놀지 못하고 만다.


.. “삐삐가 아주 외로워 보여. 아, 토미. 지금이 아침이면 좋겠어. 그러면 당장 삐삐한테 달려갈 텐데!” ..  (180∼181쪽)


 삐삐는 외롭다. 그리고, 삐삐가 외로워 보인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니카뿐이다. 삐삐는 제 한삶을 신나며 알차게 보내고 싶지만, 삐삐처럼 내 한삶을 신나며 알차게 보내고픈 동무나 이웃이 몹시 드물기 때문에 외롭다. 다들 돈·이름·힘(재산·명예·권력)에 얽매여 참된 내 삶을 껴안거나 어루만지지 못하니까 삐삐는 쓸쓸하다.

 그러나 삐삐 곁에는 토미와 아니카가 있으니까. 쿠르쿠루두트 섬 아이들이 있으니까. 거의 모든 아이들과 어른들은 다람쥐 쳇바퀴에 갇혀 있으면서 다람쥐 쳇바퀴인지 안 느끼면서 바보걸음을 한다지만, 마음을 나누며 사랑과 믿음으로 어깨동무하는 동무가 있어 삐삐는 외롭거나 쓸쓸하지만 또다시 기쁘게 웃으며 새 하루를 맞이하니까.

 어른이 되기 싫은 삐삐는 틀림없이 어른이 안 되겠지. 삐삐는 어른이 아닌 좋은 사람이 되겠지.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벗이 되며 좋은 이웃이 되는 삐삐일 테지. 좋은 사랑을 나누고 좋은 믿음을 베풀며 좋은 웃음과 눈물로 얼싸안는 삐삐로 살아갈 테지. (4343.10.13.불.ㅎㄲㅅㄱ)


―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롤프 레티시 그림,햇살과나무꾼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6.6.15./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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