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키는 쓰레기 전사 - 2002년 뉴질랜드 어린이 도서상 수상작 독깨비 (책콩 어린이) 8
샌디 매케이 지음, 전경화 옮김, 한지선 그림 / 책과콩나무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별을 지키지 않아도 돼요
 [푸른 책과 함께살기 70] 샌디 매케이, 《지구를 지키는 쓰레기 전사》(책과콩나무,2010)



- 책이름 : 지구를 지키는 쓰레기 전사
- 글 : 샌디 매케이
- 옮긴이 : 전경화
- 그림 : 한지선
- 펴낸곳 : 책과콩나무 (2010.6.10.)
- 책값 : 9800원


 (1) 도시와 쓰레기


 쓰레기가 말썽거리가 된 지 얼마나 되었나 더듬으면,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백 해는 안 되었을 테며, 아직 쉰 해조차 안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쉰 해 앞서면 1960년대인데, 이무렵에도 우리 나라에서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을까요. 1970년대에는 어떠했을까요. 1980년대에는 또 어떠한가요.

 모든 쓰레기는 도시에서 태어납니다. 모든 쓰레기는 시골에 버립니다. 도시에서 생긴 쓰레기를 도시에서 다루는 일이란 없습니다. 서울 강남에서 만든 쓰레기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치우는 일이란 없습니다. 서울 신촌에서 생기는 쓰레기를 서울 신촌바닥에서 태우는 일이란 없어요.

 서울사람이 마시는 물 또한 서울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서울사람이 버리는 물 또한 서울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서울사람이 누는 똥오줌 또한 서울에서 치우지 않습니다. 서울사람이 쓰는 물건은 서울에서 만들지 않습니다. 서울 종로나 혜화동에 자동차공장이 서는 일은 없습니다. 서울 명동이나 충무로에 정유공장이 서지 않습니다. 서울 송파나 목동에 발전소가 서지 않습니다. 서울 봉천동이나 노량진에 제철소가 들어설 일이란 없습니다.

 서울은, 또 부산은, 또 대구는, 그리고 대전은, 도시 한복판에 공장을 두거나 발전소를 두거나 쓰레기를 다루는 곳을 두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땅 큰도시 가운데 인천만 공장이며 쓰레기 다루는 곳이며 발전소이며 제철소이며 비료공장이나 밀가루공장이나 유리공장이나 화학공장을 한복판에 버젓이 둡니다. 울산은 처음부터 공장동네였고요. 그런데 인천도 새로 만든다는 도심지에는 공장이 없습니다. 오로지 높은 건물과 아파트와 가겟집뿐입니다. 높은 산이나 건물에서 내려다보면 불빛이 번들번들할 뿐입니다.


.. “우리 나라(뉴질랜드)에서 매년 가정용 쓰레기가 얼마나 많이 버려지고 있는지 알고 있나? 자그마치 3500만 톤이다. 가정마다 1톤짜리 트럭에 해당하는 분량의 쓰레기를 버리는 셈이지.” “아이고머니나.” 바이런이 빈정대듯 조그마한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럼 이 쓰레기가 전부 어디로 가느냐. 누구 아는 사람?” “쓰레기장으로 보내요, 선생님.” 착한 척하기 대장인 라이언이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다. “그럼 그 다음엔 어떻게 하지?” “태워요. 아님 땅에 묻던가.” ..  (10쪽)


 쓰레기 걱정은 도시사람이 해야 합니다. 쓰레기를 만드는 도시사람 스스로 쓰레기를 걱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도시사람은 쓰레기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끝없이 쓰레기를 쏟아내는 도시사람이면서, 막상 이 쓰레기를 걱정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척척 길에 내놓으면 된다 여기거나, 아무 봉투에나 대충 담아 버리면 된다 여기거나, 그냥 아무렇게나 내던지거나 어지르면 청소부가 알아서 치우겠거니 여기거나, 아예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시골에는 청소부가 없습니다. 시골에는 쓰레기차가 다니지 않습니다. 시골사람은 쓰레기를 딱히 만들지 않으나 굳이 만들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비료와 농약을 써서 더 빛깔 좋게 더 크게 더 많이 곡식을 뽑아내야 하지 않다면 비료봉투이든 농약병이든 나오지 않아요. 요즈음에야 막걸리병이며 소주병이 나오지만, 지난날에는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서 마셨습니다. 술병이 시골자락에 나뒹굴 까닭이 없어요. 그런데 소주병은 깨끗이 씻어 간장을 담는다든지 참기름을 담는다든지 하는 데에 씁니다. 큼직한 맥주병은 한둘쯤 남겨 반죽을 밀 때에 씁니다. 도시사람들 먹여살리느라 하는 수 없이 비닐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이 비닐쓰레기가 해마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도시사람 때문에 나와야 하는 쓰레기’ 말고는 시골사람 쓰레기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돈을 버느라 바쁘고 돈을 쓰느라 다시금 바쁜 사람들이 쓰레기를 빚습니다. 도시에서 더 큰 돈을 벌어들이려고 애쓰며 더 돈을 실컷 쓰고픈 꿈을 꾸는 사람들 때문에 쓰레기가 끊이지 않고 자꾸 태어납니다.


.. 사람들은 왜 자진해서 굶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고작 작은 사이즈의 옷을 입기 위해서 말이다 … 누나는 종이 1톤을 만드는 데 열일곱 그루의 나무가 들어간들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며, 안 그럼 모델 수업료를 무슨 수로 버느냐고 말했다. 게다가 그 일은 운동도 된단다. 새로 산 다이어트 책에 따르면, 빨리 걸으면 한 시간에 560칼로리를 태울 수 있어서 좋다는 거다 ..  (23, 85쪽)


 도시에서 짓는 아파트는 그야말로 쓰레기덩어리입니다. 도시에서 짓는 아파트를 적어도 쉰 해나 예순 해쯤이라도 버티는 일은 없습니다. 으리으리하게 짓는 아파트인데 서른 해가 지나지 않아 허뭅니다. 그러고는 다시금 으리으리하게 짓습니다. 허문 아파트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쓰레기는 모두 어디로 보내야 하지요? 이 쓰레기는 어떡하지요?

 도시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도시에만 아파트를 지어서는 돈이 모자라니까, 시골구석까지 아파트를 지어댑니다. 이제 시골자락마저 도시내기 돈놀이에 휘말립니다. 시골자락 어디에도 쓰레기덩어리가 잔뜩 올라섭니다.

 쓰레기 아닌 삶을 생각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쓰레기 낳는 도시물질문명이 아니라, 쓰레기 없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기란 몹시 힘듭니다.

 초등학교에 간들 쓰레기 걱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쯤 된다 해서 쓰레기가 왜 말썽인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학교에 가면 무언가 달라질까요. ㅅ이나 ㅎ처럼 커다란 회사에 들어가면 쓰레기를 어떻게 맺고 풀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려나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는, 아니 9급 공무원이든 8급 공무원이든, 공무원 자리를 꿰차는 사람이나 학교에서 교사 일을 맡는 사람은 쓰레기를 어떻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가요. 나라돈을 거두어들여 나라살림을 꾸린다는 사람들은 어떤 쓰레기를 새로 만들고 어떤 쓰레기를 어디에 치우는 정책을 마련하는지요.


.. 아빠는 구운 콩 요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빤히 보는 앞에서 캔을 재활용이 아닌 쓰레기봉투 안으로 홱 던지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  (147쪽)


 ‘착한도시’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도시 가운데에는 착한살림 착한사람 착한꿈 착한일 착한놀이를 어우르면서 아름다운 살림터가 되려는 곳이 있는지 모릅니다.

 착한도시라고 못 태어나란 법이 없습니다. 다만, 착한도시는 돈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착한도시는 손바닥으로 태어나고 발바닥으로 태어납니다. 손바닥으로 쟁기와 호미를 쥐는 사람들 힘으로 착한도시가 태어납니다. 발바닥으로 골목을 걷고 길을 오가는 사람들 기운으로 착한도시가 태어납니다.

 언제까지나 돈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하기만 한다면 착한도시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내 살림집 평수 넓히기에만 얽매인 채 내 보금자리에 텃밭 하나 일구려 힘쓰지 않는다면 착한도시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버스가 시원시원 다닐 수 있도록 한대서 착한도시가 되지 않습니다. 땅밑을 달리는 전철길이 촘촘히 생긴대서 착한도시라 하지 않습니다. 전기로 수도물을 길어올려 흐르도록 하는 물줄기가 도시 한복판에 있대서 착한도시하고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착하게 살아가려고 해야 착한집이요, 착한집이 모여 착한마을이며, 착한마을이 하나둘 어우러질 때에 비로소 착한도시입니다.

 착하게 꾸리는 삶이란 돈을 버는 삶이 아닙니다. 돈은 돈대로 벌 수 있으나 돈만 버는 삶이 착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삶이 더없이 참다우면서 아름다울 삶일 때에 착한 삶입니다. 내 손으로 흘리는 땀이 내가 발을 디딘 흙을 기름지게 북돋울 때에 착한 삶입니다. 똥오줌이 좋은 흙거름이 되듯이, 내 삶이 내 삶터에서 좋은 밑거름이 될 때에 바야흐로 착한 삶이에요.


 (2) 《지구를 지키는 쓰레기 전사》라는 책


 어린이와 푸름이가 읽을 만한 환경책 《지구를 지키는 쓰레기 전사》를 읽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살아가는 어른 한 사람이 ‘이대로 지구를 두면 나도 이웃도 모두 슬픈 구덩으로 굴러떨어지겠다’고 느끼면서 쓴 환경책을 읽습니다.

 이제 지구별 어느 곳에서든 쓰레기가 골칫덩어리가 된 만큼, 이와 같은 환경책이 안 나올 수 없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만큼은 ‘한국 삶터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슬기롭게 거듭나려는 움직임’을 살뜰히 담은 환경책이 거의 안 태어납니다.


.. 공을 잡으러 가려고 막 길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자가용 한 대가 모퉁이를 돌아 달려왔다. 엄청난 속도였다. 처음에 나는 그 차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차가 속도를 늦추더니 머리를 빡빡 민 어떤 멍텅구리가 자동차 문을 열고는 쓰레기를 밖으로 던졌다.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을 싼 종이와 콜라 캔 두 개, 담뱃갑 하나, 그리고 밀크셰이크 용기처럼 보이는 쓰레기가 공원 안으로 휙 날아왔다 … 기업은 왜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보다 자기 기업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  (14, 114쪽)


 환경책은 ‘지구가 아파해요!’ 하고 외치는 책이 아닙니다. 환경책은 ‘한 사람이 버리는 쓰레기는 한 해에 이만큼이나 돼요!’ 하고 떠벌이는 책이 아닙니다.

 환경책은 내 삶을 돌아보는 책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꿈꾸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되짚을 때에 환경책입니다. 내가 오늘 어떻게 먹을거리를 얻어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집안을 쓸고닦는가를 헤아리도록 할 때에 환경책입니다.

 과자를 사먹지 말아야 한다고 외쳐야 환경책이 되지 않습니다. 소시지나 햄이 얼마나 나쁘다고 외친들 환경책이 되지 않습니다. 과자이든 소시지이든 햄이든 먹고 싶다면 먹을 수 있어요. 내 손으로 과자를 구울 수 있고, 내 손으로 소나 돼지나 닭을 잡아 고기를 얻어 소시지이든 햄이든 만들 수 있습니다.


.. 사람들이 버린 물건들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다. 아빠와 난 약간 손만 보면 되는 근사한 접의자 두 개, 조각이 약간 떨어져 나간 수제 체스 세트 하나, 아빠가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한 라디오 한 대를 건졌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말이다 ..  (51쪽)


 모든 먹을거리는 목숨입니다. 우리는 다른 목숨을 먹으면서 내 목숨을 잇지, 목숨 아닌 기계나 화학약품을 먹으면서 내 목숨을 잇지 않습니다.

 물에 온갖 화학약품이나 조미료를 타서 음료수를 만든다지만, 이 음료수는 물이 없으면 만들 수 없습니다. 밑바탕은 물입니다. 물이 있고서야 음료수이든 술이든 태어납니다.

 염화나트륨이든 무슨무슨 조합식으로 짜거나 달거나 시거나 매운 맛을 낼지라도, 감자를 심고 거두어 손질하거나 고구마를 심고 거두어 손질하지 않고서야 과자 한 봉지 태어나지 않습니다.

 남이 소나 돼지를 잡아 주니까, 남이 흙을 일구어 곡식과 푸성귀를 얻어 주니까, 게다가 남이 우리 입맛에 맞게 요모조모 꾸미고 볶으며 지져 주니까, 그저 우리는 돈만 치르면 되니까, 자꾸자꾸 쓰레기가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내 몸을 움직이지 않는 삶일 때에 쓰레기가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내 몸을 움직이는 삶이라면 쓰레기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 나는 엄마에게 나이가 들수록 말이 너무 거칠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냉소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집 파는 일을 하게 된 다음부터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요리에도. 엄마는 오로지 집을 팔고 수수료를 받는 일만 걱정했다. 열대 우림의 반이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엄마의 관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 그들은 지구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걱정하는 거라곤 자기들 재산과 고급 가구뿐이다. 장담하건대 그들은 재활용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  (104, 177쪽)


 《지구를 지키는 쓰레기 전사》라는 책에는 아주 깊거나 몹시 대단하다 할 만한 이야기가 담기지 않습니다. ‘흔한’ 선진국 ‘흔한’ 도시 ‘흔한’ 도시내기 아이와 어른이 쓰레기 하나를 놓고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가를 재미난 이야기 살점을 붙여서 보여줍니다.

 한국땅에서는 멀디먼 뉴질랜드 이야기까지 찾아서 읽지 않고 우리 둘레만 돌아보더라도, 열대 숲이 사라지건 말건 돈 돈 돈 노래만 부르는 사람을 어디에서나 쉽게 만납니다. 옆집에서도 만나지만 우리 집에서도 만납니다. 옆 동네에서도 만나겠지만 우리 동네에서도 만납니다. 텔레비전이든 인터넷이든 책이든 무엇이든, 한결같이 돈 돈 돈 노래만 부릅니다. 돈굴리기 잘하도록 한다는 책이나 신문은 불티나게 팔립니다. 돈이 된다 안 된다 하는 이야기만 여기저기에 가득합니다.

 돈이란 곧 쓰레기입니다. 돈이 된다는 이야기란 곧 쓰레기를 많이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을 번다면 쓰레기를 번다는 뜻이고, 돈을 쓴다면 쓰레기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집살림을 하는 사람은 돈을 벌지 않는다지만, 가만히 보면 쓰레기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자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지만, 아이를 집에서 돌보면서 아이랑 함께 놀고 노래하며 책을 읽히거나 그림을 함께 그리면 돈을 쓰지 않습니다. 돈을 벌지도 못하지만 돈을 쓰지도 않습니다. 아이를 대학교에 보내자며 학원에 넣는다든지, 아이 대학교 배움값을 대야 한다든지 하자면, 어버이는 늘 돈벌이에 허리가 굽습니다. 아이는 대학교에 들어갈 시험공부로 머리를 가득 채울 뿐, 집에서 제 어버이와 삶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아이를 대학교까지 보내지 않는다든지, 애써 아이가 더 높은 학교에서 더 많은 지식이나 졸업증이나 자격증을 따도록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어버이 자리에 선 사람은 아이하고 날마다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함께 살림을 꾸리고 함께 일을 하며 함께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돈벌이는 삶이 아닙니다. 돈벌이는 사랑이 아닙니다. 돈벌이는 살림이 아닙니다. 돈벌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예배당도 짓는다지만, 돈이 없으면 너른 들판이나 방 한켠에서 믿음어린 비손을 올리면 됩니다. 돈이 있어야 맛난 밥을 사먹는다든지 자가용을 굴린다지만, 돈이 없으면 텃밭과 논을 일구어 내 밥상을 차리거나 두 다리나 자전거로 다니면 됩니다.

 그러니까, ‘쓰레기 전사’ 노릇을 하는 아이는 지구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냥 쓰레기를 줄일 수 있을 뿐입니다. 쓰레기 전사는 쓰레기를 줄이지, 쓰레기가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밑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쓰레기를 줄이자고 외치는 운동이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환경운동도 훌륭합니다. 다만, 환경운동은 쓰레기 줄이기가 아니요,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자는 운동입니다. 내 밥, 내 집, 내 이웃, 내 터, 내 바람, 내 햇살, 내 숲을 사랑하며 아끼자는 운동일 때에 시나브로 환경운동이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지구를 지키지 않아도 되니까, 내 밥상과 내 동무와 내 삶을 아름다이 보듬을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4344.3.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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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집 1 - 큰 숲 속의 작은 집
로라 잉걸스 와일더 지음, 가스 윌리엄즈 그림, 김석희 옮김 / 비룡소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흙을 일구는 마음을 사랑하면서
 [푸른책과 함께 살기 68] 로라 잉걸스 와일더, 《초원의 집(1)》(비룡소,2005)



- 책이름 : 초원의 집 (1)
- 글 : 로라 잉걸스 와일더
- 그림 : 가스 윌리엄즈
- 옮긴이 : 김석희
- 펴낸곳 : 비룡소 (2005.9.25.)
- 책값 : 9000원



 (1) 봄맞이


 시골집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밤과 낮으로 오줌그릇을 비울 때에 감나무 밑으로 갑니다. 작은 텃밭을 일굴 때에 쓰려고 모은 거름통 셋이 꽉꽉 들어차기도 했고, 아이가 눈 똥과 오줌을 잘 모아서 감나무한테 줍니다. 예부터 감나무 둘레에는 개를 묶어, 개가 누는 똥과 오줌이 고스란히 거름이 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감나무는 우리 집 아이 똥오줌을 좋은 밥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겠지요.

 골목집에서 살았더라도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 똥오줌은 거름으로 쓰일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똥이며 오줌이며 그저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로 다루고 쓰레기로 버려지며 쓰레기로 여깁니다.

 집에서 먹고 남은 찌꺼기라든지 밥집에서 남기는 찌꺼기 또한 도시에서는 고스란히 쓰레기입니다. 그나마 개라도 키운다면 개밥으로 삼을 만하지만, 도시에서 개밥을 ‘사람이 먹고 남은 밥’으로 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사료를 줍니다. 더구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면, 이들 개와 고양이가 누는 똥오줌은 사람이 누는 똥오줌과 마찬가지로 그예 쓰레기일 뿐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틈이 없습니다.

 모든 먹을거리는 흙에서 얻는데, 막상 우리들 사람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흙한테서 얻기만 하지, 흙한테 무엇 하나 제대로 살가이 돌려주는 일이란 없습니다. 아니,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 먹을거리를 흙한테서 고맙게 얻는 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생각하도록 이끄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생각해 보았자 어찌저찌 삶을 바꾸지 않습니다.


.. 아빠 혼자 눈 덮인 숲에서 추위를 견디며 온종일 돌아다녀도 사냥감을 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겨울이 오기 전에 되도록 많은 식량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아빠는 사슴 가죽을 조심스럽게 벗긴 다음, 가죽에 소금을 뿌려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래야 가죽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그 일이 끝나면, 고기를 잘게 토막내어 널빤지 위에 펼쳐놓고 소금을 뿌렸다 … 냄새가 고소했다. 부엌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 벽난로에서 새빨간 불꽃을 내며 타고 있는 히코리나무 냄새, 그리고 탁자 위에 할머니의 반짇고리와 나란히 놓여 있는 정향나무 열매 냄새로 집안이 온통 향기로웠다 ..  (11, 128쪽)


 봄이 가까이 다가온 멧골자락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파랗습니다. 춥디춥던 겨울날에는 이 파란하늘이 손·귀·코·발 모두 시리도록 하는 파랑이었습니다. 차츰 날이 풀리는 요즈음에는 이 파란하늘이 살랑살랑 보드라운 바람을 싣는 파랑입니다. 아직 눈이 남은 데가 많으나, 이 눈이랑 얼음도 한두 달 사이에 모조리 녹거나 마르겠지요. 언제 눈이 있었느냐는 듯이 온 들판과 멧자락에는 푸른 새싹이 가득할 테지요. 아이 손을 붙잡고 멧길을 오르내리면서 봄풀과 봄나물을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들 옷차림이나 가게에서 내놓는 물건에서 떠올리는 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살림집 곁에서 늘 바라보거나 마주하는 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봄은 날씨로 찾아옵니다. 따순 날씨가 봄입니다. 봄은 달력 숫자나 백화점 ‘봄맞이 에누리’가 아닙니다. 보드라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씨가 봄입니다.

 봄은 내 살결로 느낄 때에 봄입니다. 겨우내 입던 두툼한 옷을 한 벌씩 벗을 때에 바야흐로 봄입니다. 봄은 내 발바닥으로 느껴야 봄입니다. 집에서 맨발로 돌아다녀도 발이 시리지 않는구나 하고 느낄 때에 봄입니다. 봄은 내 손으로 느껴야 봄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에 손이 차갑거나 시리기만 하지 않고, 조금씩 시원하다고 느낀다면 비로소 봄입니다.

 봄이기에 봄꽃을 봅니다. 봄이라서 봄나들이 즐깁니다. 봄일 때에 봄옷을 입고, 봄인 만큼 드디어 두꺼운 이불을 북북 비비거나 꾹꾹 밟아 빨면서 길다란 빨랫줄에 바지랑대 걸쳐 널면서 봄햇살로 보송보송 말립니다.


.. 황량한 숲과 쌓인 눈과 매서운 추위 속에서 오로지 그 작은 통나무집만 따뜻하고 아늑하고 편안했다 … 이제 같이 놀 사촌들이 온 것이다! … “좋은 생각이 있는데, 우리 밖에 나가서 사진을 찍자.” 그러나 엄마는 로라가 밖에서 놀기에는 너무 춥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라가 실망하는 것을 보고는, 잠깐이라면 밖에 나가서 놀아도 좋다고 말했다. 엄마는 로라에게 외투를 입히고, 벙어리장갑을 끼우고, 모자 달린 케이프를 두르고, 목에는 다시 머풀러를 두른 뒤에야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로라는 무척 즐거웠다. 그렇게 신나게 논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오후 내내 로라는 앨리스와 엘라와 피터와 메리와 함께 눈밭에서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사진은 이런 식으로 찍었다. 아이들은 각자 나무 그루터기 위로 올라간 다음, 다 함께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루터기에서 푹신하게 쌓인 눈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얼굴이 눈 속에 파묻히도록 곧장 엎어졌다. 그런 다음, 떨어질 때 생긴 자국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일어났다. 그러면 눈밭에는 다섯 개의 구덩이가 생겼다. 그 구덩이들은 머리며 팔이며 다리며 그밖의 모든 것이 네 소녀와 한 소년의 모양과 거의 똑같았다 ..  (39, 64∼65쪽)


 그래도 봄빨래는 찬물로 하기 어렵습니다. 이월을 지나 삼월과 사월을 맞이하더라도 시골물로는 손이 꽁꽁 얼어붙습니다. 도시처럼 물관을 흐르는 물이 아니라 땅밑에서 흐르는 물은 여름에도 손이 시리도록 차가우니까, 늦겨울이나 이른봄에는 뜨뜻하게 덥혀서 빨래를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는 시골이든 도시이든 어디에서나 빨래기계를 씁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늘 똑같다 싶은 빨래입니다. 빨래를 한대서 철을 느낄 수 없겠지요.

 햇살이 따스합니다. 낮에 집안 문을 다 열어 햇살이 들어오도록 하는데 방온도가 15도입니다. 이부자리를 걷어 마당에 넙니다. 겨울볕이 제법 길게 이어집니다. 빨래를 마칠 때까지 해가 기울지 않습니다. 새로 한 빨래를 널고 다 마른 빨래를 갤 때까지 햇살이 남습니다. 언제 추위가 그토록 길었던가를 떠올리기 힘들 만한 날씨입니다. 추운 날을 지냈으니 따순 날을 맞이하는 셈이라지만 해마다 새봄을 앞두면 몹시 새삼스럽습니다. 추위에 얼어죽으란 법이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올해에도 어찌저찌 살아남았네 하고 느낍니다. 이제는 조금 기지개를 켤 만한가 돌아봅니다. 다시금 따사로운 이 날씨에 내 마음이 얼마나 따사로운가 헤아립니다.


.. “난 싫어! 일요일이 싫어!” 그러자 아빠가 책을 내려놓고 엄격하게 말했다. “로라, 이리 와.” 로라는 자기가 볼기 맞을 짓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질질 끌면서 아빠에게 갔다. 그러나 아빠는 안쓰러운 눈길로 잠시 로라를 바라보다가, 번쩍 들어서 무릎에 앉히고 꼭 껴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로라를 안지 않은 팔을 메리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 주마.” … 예쁜 조약돌을 발견하면 로라는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예쁜 조약돌이 너무 많았고, 새로 발견한 조약돌은 아까 주운 것보다 더 예뻤기 때문에, 로라의 호주머니는 금세 조약돌로 가득 찼다 ..  (84, 162쪽)


 사람은 목숨입니다. 목숨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날과 날씨를 느낄 수 있는 데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날과 날씨를 느끼지 못하거나 느낄 수 없는 곳에서 지내는 사람이 될 때에는 마음이 메마르거나 차가워지고 맙니다.

 공무원을 깎아내리려 한다기보다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가엾다고 느껴서 하는 말인데, 날과 날씨하고는 아랑곳하지 않는 시멘트집에 갇힌 채 지내는 사람들은 갇힌 마음과 갇힌 말입니다. 이는 공무원만이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학생도 매한가지입니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은 환한 낮에도 불을 켠 곳에서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은행 일꾼이든 공무원이든 출판사 일꾼이든, 하나같이 한낮에도 불을 환히 밝힌 데에서 일을 합니다. 낮에는 낮이기에 햇볕과 햇빛과 햇살을 머금으면서 일할 수 있어야 내 사람됨과 목숨됨을 느낄 텐데요. 내 사람됨과 목숨됨을 느끼지 못하면서 어떻게 내 이웃과 동무가 나와 똑같은 사람됨과 목숨됨이 아름다운가를 느낄 수 있나요.

 봄부터 가을까지는 해랑 마주하면서 흙빛을 닮을 사람입니다. 내 살빛이 흙빛을 닮으면서 내 마음 또한 흙을 닮을 사람입니다.

 시멘트나 쇠붙이는 봄이든 겨울이든 똑같습니다. 다를 바 없습니다. 흙은 봄과 겨울이 다르고, 여름과 가을 또한 다릅니다. 흙은 죽은 물건이 아닌 산 목숨입니다. 산 목숨이 숱하게 오글거리는 목숨덩어리입니다. 사람은 죽은 세포 아닌 산 세포가 수없이 모여 이루어진 목숨붙이입니다. 추위를 이기며 한결 튼튼해질 목숨밭입니다.


 (2) 사람맞이


 서울마실이나 인천마실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지칩니다. 힘들기 돌아다니니 몸이 힘들 테지만, 복닥이거나 부대껴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함께 지칩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름다운 목숨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둘레에 복닥이거나 부대끼는 사람들 누구나 아름다운 넋이며 숨결이지만, 내 한몸 살아남도록 용을 써야 하다 보니까 자꾸 거칠어지거나 메말라지고 맙니다.

 생각할 일입니다. 생각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사람들은 더더욱 생각할 일입니다. 내가 낳아 키우는 아이를 발로 차거나 가방으로 쳐서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아이를 깔아뭉갠다든지, 아이가 앉는 조그마한 걸상에 어른이 함께 앉는다며 엉덩이를 디밀어 밀어젖힐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보는 앞에서 침을 퉤 뱉거나 거친 말을 거리끼지 않고 내뱉을 수 있나요. 아이가 듣는 자리에서 돈이 어떻고 정치나 사회가 어떻고 하면서 시끄러이 떠들 만한지요.

 저부터 그닥 잘 하는 어버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저부터 우리 아이하고 한결 사랑스러우면서 살가운 나날을 일구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시골집에서 호젓하면서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합니다. 새벽 네 시 반 즈음부터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 대여섯 시 무렵이면 들리는 멧새들 날갯짓 소리와 지저귐 소리를 듣는 보금자리를 좋아합니다. 겨우내 물이 얼어 밥하고 설거지할 물을 날마다 길어 날라야 하니 버겁지만, 이럭저럭 한겨울 보냈습니다. 이제는 날이 폭하니까 우리 집 물도 녹아 주었으면 하지만, 삼월이나 되어야 물이 녹을는지 알쏭달쏭합니다. 그래도 길어 나른 물로 아이 손발과 낯과 똥꼬를 씻기고 이를 닦입니다. 길어 나른 물로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밥을 짓습니다.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합니다. 설거지도 하고 행주도 빱니다.

 날마다 일거리 그득그득하니까 쉴 겨를이라든지 느긋하게 책장 넘길 틈이 없습니다. 일거리가 아니더라도 신나게 뛰놀고픈 아이를 바라볼 때면 아버지 하고픈 대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이는 제 아버지 책을 가로채서 억지로 덮으며 함께 놀자고 잡아끌 줄을 압니다.


.. 로라는 아빠가 하는 일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 잠시 후 로라는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떼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돼지의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도축 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볼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아서 아주 바쁜 날이었다 … 로라는 메리보다 어렸기 때문에 먼저 목욕을 했다. 토요일 밤에는 샬럿과 함께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로라고 목욕을 끝내고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아빠가 목욕통의 물을 비우고 다시 깨끗한 눈을 채워서 메리의 목욕물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메리가 목욕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다음에는 엄마가 담요 칸막이 뒤에서 목욕을 했고, 그 다음에는 아빠가 목욕을 했다. 일요일을 위해 모두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  (11, 17, 82쪽)


 이제 첫째는 제법 자란 만큼 아이한테 손이 가는 일이 퍽 줄어듭니다. 아이한테 손이 가는 일이 줄었다 해서 한갓지다는 소리가 아니라, 조금은 숨돌릴 겨를이 있다뿐입니다. 저녁에 아이를 재우고, 밤에 오줌기저귀를 갈며 생각합니다. 곧 둘째를 낳아 네 식구 북적거리는 살림집이 된다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보낼 나날이 되겠지요. 네 식구 먹을 밥상을 날마다 차리는 일이란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네 식구 입을 옷가지를 건사하는 일이란 어떠할까 하고 가누어 봅니다. 네 식구가 함께 마실을 갈 때에는 짐을 얼마나 꾸려야 하나 곱씹어 봅니다.

 고작 두 아이라 하지만, 바로 두 아이인 터라 마실하는 짐은 어른이 져야 합니다.두 아이랑 다녀야 한다면 두 아이가 내놓을 옷 빨래를 살펴야 합니다. 먼 옛날에는 마실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니까 짐 꾸리는 걱정은 거의 안 했을 텐데, 오늘날에는 마실 다니는 사람이 많으니까, 짐 꾸릴 생각만으로도 끔찍해서 그예 자가용을 장만하고 말겠구나 싶습니다.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놀며 집에서 어울리는 삶이라면 바쁘기는 된통 바쁘지만 짐 꾸리거나 아이 데리고 다니는 걱정이 없습니다. 밖에서 일하고 밖에서 놀며 밖에서 어울리다가 잠만 집에서 자는 삶일 때에는, 똑같이 바쁘지만 여기에 짐 꾸리거나 아이 데리고 다니는 근심까지 져야 합니다.

 유치원이나 유아원이나 어린이집 시설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애 아빠나 애 엄마는 자가용을 몰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어느 어버이가 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어린이집을 드나드나요. 자전거로 저잣거리를 다니거나 어린이집을 오가는 한국 어버이는 몇 사람쯤 될까요.

 도시라는 곳은 시설이나 문화나 환경이나 교육이나 제도가 잘 갖추어졌다고들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시골에서는 도서관이나 책방 하나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도서관이나 책방이 있더라도 버스 타고 나가기란 힘들고, 차편도 적으며, 품과 겨를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시설이나 문화나 환경이나 교육이나 제도를 누리자면 어찌해야 할까요. 시설이나 문화를 누린다지만, 시설이나 문화를 누리는 만큼 무엇을 잃거나 잊는지를 느낄 수 있는가요. 손꼽히는 대학교에 보내기 좋은 학군이라 하지만,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아이들을 손꼽히는 대학교에 보내려는 어버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요.


.. 엄마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로라와 메리는 엄마를 이것저것 거들었다 … 설거지를 끝낸 다음에는 바퀴 달린 침대를 바람에 쐬었다. 그 일이 끝나면, 로라와 메리는 침대 양 옆에 서서 이불을 반듯하게 펴고 침대 발치와 양 옆으로 이불자락을 쑤셔넣고, 베개를 두드려서 제자리에 놓았다. 그러고 나면 엄마가 바퀴 달린 침대를 큰 침대 밑으로 밀어넣었다. 이 일이 끝나면 엄마는 그날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날마다 그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엄마가 빵을 만드는 토요일이면, 로라와 메리는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한 개씩 받아서 작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  (20, 30, 35쪽)


 즐겁게 받은 고운 목숨 하나입니다. 내 목숨 하나 고마우면서 즐겁고, 네 목숨 하나 고마우면서 즐겁습니다. 서로서로 이 땅에서 즐겁게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다 함께 이 누리에서 고마이 사귀며 만나야 합니다.

 ‘목적’을 세워서 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업적’을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실적’에 따라 걷는 길이나 꿈이 아닙니다.

 꽃을 피우려고 씨를 내거나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으려고 잎을 틔우거나 가지를 뻗지 않습니다. 목숨이란 공식이나 방정식이 아닙니다. 목숨이란 삶이면서 죽음입니다. 고맙게 살다가 고맙게 죽는 목숨입니다. 고맙게 살다가 고맙게 죽는 목숨이기에 즐거이 살면서 즐거이 죽음길을 걷습니다.


.. “그때는 여자애들도 그만큼 착하게 굴어야 했나요?” 로라가 묻자, 엄마가 말했다. “여자애들은 더 힘들었지. 일요일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줄곧 꼬마 숙녀처럼 굴어야 했으니까. 여자애들은 사내애들처럼 썰매를 타고 놀 수도 없었단다. 여자애들은 집안에 얌전히 앉아서 수를 놓아야 했지.” …날씨가 풀리자마자 로라와 메리는 맨발로 뛰어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처음에는 장작더미 주위와 뒤뜰만 뛰어다닐 수 있었다. 이튿날은 더 멀리까지 뛰어갈 수 있었다. 곧이어 로라와 메리의 구두는 기름칠을 한 뒤 신발장에 치워졌고, 로라와 메리는 온종일 맨발로 뛰어놀았다. 밤마다 로라와 메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발을 씻어야 했다. 치맛단 아래로 드러난 발목과 발은 갈색이 되었고, 얼굴도 갈색으로 그을렸다 ..  (92, 147∼148쪽)


 우리 시골집에서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와 둘째 돌보는 몫 또한 아버지가 맡습니다. 첫째로도 등허리가 휘니까 둘째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며 씻기고 재우며 놀리고 가르치며 키우는 나날이란 그지없이 고달픕니다. 그렇지만 어느 어버이라도 이 고달픈 나날을 짊어졌으며, 고달픈 욱씬거림을 웃음꽃 하나로 잊습니다.

 참 놀랍지요. 100만 원을 주거나 100억 원을 준다고 싱긋방긋 웃음꽃을 피울까요. 고작 젖 한 번 물리거나 기껏 손 한 번 맞잡으며 춤을 출 뿐인데 아이들은 웃음꽃을 피웁니다. 꾸지람을 듣고 울다가도 이내 방글거립니다. 졸리면서 안 잔다고 투정을 부리다가도 곱게 새근새근 곯아떨어집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댔지만, 웃는 낯에 시름을 씻습니다. 한 사람이 고운 목숨으로서 스스로 또다른 목숨을 곱게 낳아 키우는 일이란 뼈와 살과 피를 온통 발라내는 삶입니다.

 사랑이란 뼈와 살과 피를 모조리 발라낼 때에 이루어지지 입발림이나 돈치레로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삶이란 내 뼈와 살과 피를 아낌없이 발라낼 때에 일구지, 깨작거리는 손짓으로는 일구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맞이해서 사랑하는 삶이라 할 때에는 나 스스로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몸을 바치는 고운 목숨이 되면서, 이 목숨을 내 사랑이한테서 고스란히 선물받는 목숨이 되어야 합니다.


 (3) 이야기책 《초원의 집》 1권 “큰 숲 작은 집”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모두 아홉 권으로 이루어진 완전번역판에 붙은 이름은 《초원의 집》이지만, 이 이름은 한국에 번역된 연속극에 붙은 이름입니다. 더구나 “초원의 집”이라는 연속극 이름조차 일본사람이 영어를 옮겨 적은 이름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이런 이름을 쓸 까닭이란 조금도 없습니다. 일본말을 한글로 적는다 해서 우리 말이 되거나 우리 이름이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이름을 붙여야지요. 아니면 아예 미국사람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미국말로 붙인 이름으로 쓰든지요.

 가만히 보면, 한국사람은 참 어리석은데 어리석은 줄조차 느끼지 못하거나 살피지 못할 만큼 매우 어처구니없습니다. ‘산도’라는 과자이름은 일본사람이 붙인 이름입니다. 일본사람은 ‘샌드(sand)’라 말하지 못하니까 ‘산도’라 했고, 이 이름이 고스란히 ‘ㅋㄹㅇ산도’가 되었으며, 나중에 ‘ㅋㄹㅇ샌드’로 이름을 고쳤습니다만, 사람들이 영 알아봐 주지 않고 과자가 덜 팔리니까 다시금 일본 과자이름 그대로 ‘ㅋㄹㅇ산도’로 돌아갔습니다.

 일본사람이 붙인 “草原の家”가 아닌 우리 말 이름으로 “멧골집”이나 “두메집”처럼 이름을 붙이면, 산도라는 과자이름처럼 잘 알아보거나 널리 사랑해 주지 못할 한국사람이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름을 옳게 알아보지 못한대서 옳지 못한 이름을 끝까지 붙잡을 수 없어요. 오늘 어른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익숙한 대로 쓴다지만, 오늘 어린이인 사람은 앞으로 어쩌지요. 오늘 어린이인 사람들은 오늘 어른인 사람들이 익숙한 대로 ‘잘못된 말과 삶과 이야기’도 잘못된 대로 멋모른 채 다시금 길들거나 익숙해져야 할는지요.

 더욱이,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살던 집은 “들판(초원)에 있던 집”이 아닙니다. 깊디깊은 숲속에 있던 집, 곧 두메집입니다. 멧골집입니다.


.. 하루나 한 주일, 아니 한 달 내내 북쪽으로 걸어가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나무뿐이었다. 집도 없고, 길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 언덕에는 여우굴이 있었고, 사슴들은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 하루는 밤중에 아빠가 로라를 침대에서 안아올려, 늑대를 볼 수 있도록 창가로 데려갔다. 늑대 두 마리가 집 앞에 앉아 있었다. 늑대는 털북숭이 개처럼 보였다 … 로라는 아늑한 집, 아빠와 엄마, 난롯불과 음악이 먼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게 기뻤다. 지금은 지금이니까 결코 잊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절대로 먼 옛날일 수 없다 ..  (7, 8, 9, 222쪽)


 “큰 숲 작은 집”에서 살던 사람들 이야기가 ‘왜’ 큰 숲 작은 집인가를 처음부터 또렷하게 제대로 알아야 이 책 《초원의 집》 아홉 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냥 옛날 옛적 이야기를 다루는 《초원의 집》이 아닙니다.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웠지만 힘들기는 참말 힘들었으나 언제나 맑고 밝으면서 즐겁던 나날인 “큰 숲 작은 집”입니다.

 전기는커녕 겨울에는 물 한 그릇 쓰기조차 힘들 뿐 아니라, 물이 없으니 눈을 녹여서 써야 하는 멧자락 작은 집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조차 아주 멀디멀리 떨어졌습니다. 식구들끼리 놀고 일하며 복닥여야 합니다. 옷과 밥과 집 모두 식구들 스스로 장만해야 합니다. 돈으로 사지 못하고, 돈이란 쓸모없습니다. 흙을 일구든 사냥을 하든, 모든 일을 시골집에서 스스로 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이 그칠 새 없으면서, 일이 그칠 새 없을지라도 네 식구가 알콩달콩 살아갑니다. 영화이든 책이든 컴퓨터이든 자동차이든 한 가지조차 없으나 늘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낮에는 해와 구름을 보고 밤에는 달과 별을 봅니다. 봄부터는 맨발로 살고, 살결은 늘 흙빛입니다. ‘들판에서 한갓지게 드러누워 양들 울음소리를 듣는’ 삶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숨막히지만 스스로 숨막으며 살아가지 않는 나날을 보내는 조촐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 메리는 자기가 로라보다 나이가 많으니가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로라는 자기가 더 작으니까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똑같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근 찌꺼기는 아주 맛있었다 … 집에 돌아가면 그 사탕을 어딘가에 잘 간수하여 영원히 간직할 작정이었다. 사탕이 너무 예뻐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 로라는 제 쿠키를 딱 절반만 먹었고, 메리도 제 쿠키를 딱 절반만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동생 캐리에게 주려고 남겨두었다. 집에 도착하면 로라와 메리는 캐리에게 반쪽짜리 쿠키를 하나씩 주었고, 결국 캐리는 온전한 쿠키 한 개를 먹게 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았다. 로라와 메리는 다만 캐리와 공평하게 나누어 먹고 싶었을 뿐이다 ..  (33, 164, 167쪽)


 오늘날 잣대로 보자면 아무것 없는 삶일 수 있으나, 아무것 없어도 넉넉한 삶입니다. 오늘날 잣대로 보자면 양말 한 켤레 신 한 켤레 마련하자면 품이 얼마나 많이 드는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만, 알뜰히 마련한 양말 한 켤레는 알뜰히 신습니다.

 두메자락 멧골집 사람들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아니, 쓰레기라는 낱말을 모르겠지요. 무엇을 ‘버린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알뜰히 건사해서 알차게 씁니다. 물 한 방울과 풀잎 하나에 어떠한 우주가 깃들었는지를 삶으로 알고, 살결로 느낍니다.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깨닫고, 정보가 아닌 마음으로 나눕니다. 학벌이 아닌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며, 정치나 파벌이 아닌 믿음으로 사람을 사귑니다.


.. 포동포동하고 하얀 두 팔을 드러내고 맑은 물속에서 옥수수 낟알을 문지르거나 비벼대는 엄마는 정말 예뻐 보였다. 두 볼은 빨갛게 물들었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는 반짝반짝 빛났다. 엄마는 예쁜 드레스에 물 한 방울 튀긴 적이 없었다 ..  (204∼205쪽)


 요리 보나 조리 보나 하나같이 도시로만 몰려들어 도시에서 돈벌이 하나만 붙잡는 사람들한테 “큰 숲 작은 집” 이야기가 읽히기란 어렵습니다. 이런 책을 읽는다 해서 두메자락 멧골집 삶을 헤아리거나 알아채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두메자락 멧골집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살아가지 않고서야 이 책 이 조고마한 이야기에 스민 눈물과 웃음을 맞아들이기 힘듭니다.

 살아가지 않고는 알 수 없거든요. 살아갈 때에 알거든요.

 밥이 익으며 솔솔 피어나는 내음은 밥을 하는 사람만 압니다. 다 차린 밥상을 받는 사람은 ‘밥 익는 내음’을 모릅니다. 지식이나 학문으로 알아낼 수 없습니다.

 쌀을 일거나 씻어 불릴 때에 맑은 빛깔 쌀알이 차츰 하얀 빛깔로 바뀌는 모습은, 다 차린 밥상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정보로도 인터넷 찾아보기로도 캐낼 수 없습니다. 쌀알이 천천히 불면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쌀로 거두기 앞서 논자락에서 햇살을 받으며 노랗게 익을 때 벼포기가 들려주는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미스터 초밥왕》이라는 만화에서는 ‘초밥 잘 빚는 아이’가 여름날 무논에서 벼 익는 느낌까지 살리면서 초밥을 빚는다고 나옵니다만, 이런 느낌이란 스스로 겪을 때에 떠올리는 느낌이지, 누구한테서 이야기로 듣거나 책으로 읽는다 해서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요즈음 도시사람한테는 ‘맛있게 먹으면 그만’인 밥그릇이리라 봅니다. 《초원의 집》 이야기책 아홉 권 또한 ‘재미있게 읽으면 끝’인 소설이리라 생각하겠지요.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도시사람이 재미있게 읽으라’고 이런 글을 썼다고는 느낄 수 없습니다. 그예 당신 지난 삶자락이 아주 즐거우면서 좋았기 때문에, 아주 즐거우면서 좋았을 뿐 아니라 힘들며 춥고 고단하기도 했던 모든 이야기를 갈무리해서 당신부터 즐거이 돌아볼 이야기 한 보따리 꾸렸다고 느낍니다.

 다만, 《초원의 집》을 읽었으니까 시골로 가서 흙을 일구며 살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텃밭농사나 꽃그릇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곧, ‘흙을 일구는 마음’과 ‘흙을 만지는 손길’과 ‘햇살을 받는 살결’과 ‘햇볕을 고맙게 여기는 넋’과 ‘바람을 맞이하는 볼’과 ‘바람을 반기는 입술’과 ‘냇물에 담그는 발’과 ‘시리면서 시원한 물을 알아채는 몸’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내 삶을 차분히 가다듬는다면, 누구나 어디에서든 내 하루하루를 내 나름대로 아리따우면서 즐거이 누린다는 이야기를 건넨다고 느낍니다. (4344.2.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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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가 나를 키웠어요 - 여자 축구 MVP 여민지의 꿈과 도전 이야기 명진 어린이책 18
여민지 지음, 이지후 그림, 이혜경 구성.정리 / 명진출판사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축구스타 성공스토리’일 수 없는 ‘여민지 일기’
 [책읽기 삶읽기 37] 여민지, 《일기가 나를 키웠어요》


 축구선수 여민지 님은 발등으로 공을 톡톡 차는 훈련이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그저 공차기를 좋아하며 무럭무럭 컸습니다. 공차기를 하도 좋아하다 보니 축구선수가 되는 길을 걷고, 초등학생 때부터 ‘합숙 훈련’을 하면서 지냅니다. 공을 차는 선수는 하루라도 공 느낌을 잃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날마다 삼천 번쯤 ‘발등으로 공 튕기기’를 한다는데, 여민지 님은 이를 악물며 오천 번을 했다고 합니다. 성장통에다가 경기를 하다가 다치는 바람에 수술을 여러 차례 했으나, 꿋꿋하게 다시 일어서면서 오늘날처럼 한국에서 널리 이름난 선수로 우뚝 섭니다.

 이제 여민지 선수 움직임은 마치 연예인 움직임마냥 ‘실시간 인터넷 중계’가 되는 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여민지 님인데, ‘고향 방문 기사’가 뜨고, ‘연예인과 커플댄스 추는 방송’에 나오며, ‘청와대에서 불러 여러 운동선수와 함께 대통령을 만나’는 한편, 요즈막에 새로 펴낸 책 ‘출판기념 사인회’를 하기까지 합니다.


.. 일 주일 동안 훈련하면서 느낀 점 : 먼저 이론 공부. 많은 지식. 경게 대한 것을 많이 알게 되었고,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패스의 질과 테크닉 등 모든 훈련이 머리와 몸에 조금씩 터득한 것 같고, 원래 하던 운동과 달리, 다른 새로운 운동을 해서 재미있었고, 새로운 것도 많이 배웠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앞으로 하루하루가 아주 소중할 것이다. 감독 선생님께서 계속 계속 훈련시킬 것을 연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배워서 하나하나씩 더 알고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지적해 주시는 점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리고 운동 시간에 집중력을 갖고 집중해야겠다 ..  (20쪽)


 여민지 님은 퍽 일찍부터 ‘축구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여민지 님한테 축구를 제대로 가르친 초등학교 축구감독이 그날그날 훈련하며 익힌 여러 가지를 ‘잘 한 대목과 잘 못한 대목’을 살피어 일기로 적어 보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축구를 하는 사람이니 아주 마땅히 축구일기를 써야 합니다. 야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야구일기를 써야 할 테지요.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일기를 씁니다. 운동선수 아닌 여느 초등학생이라면 ‘생활일기’를 씁니다. 곧,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는 일기예요. 운동선수로서는 날마다 운동 경기나 훈련을 하니까 ‘운동일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아 일기를 안 씁니다. 일기를 안 쓰더라도 머리와 손과 몸과 마음으로 잘 갈무리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머리와 손과 몸과 마음으로 잘 갈무리하기 힘들기 때문에 글과 종이를 빌어 일기를 씁니다.

 지난날부터 이 땅에서 집살림을 도맡던 어머님들 가운데 ‘살림일기’를 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자한테 글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더러, 글을 배운 여자는 살림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예나 이제나 온갖 집살림은 몸에서 몸으로 고이 이어집니다. 어디 종이나 책에 적어 놓은 이야기는 없는데, 손맛에서 손맛으로 손길에서 손길로 손품에서 손품으로 고스란히 이어옵니다.

 밥을 할 때에 쌀 몇 그램에 물 몇 그램을 넣어 불을 얼마만 한 크기가 되도록 장작을 얼마만큼 넣어 몇 분 동안 끓여서 뜸은 몇 분을 들이는가 같은 잣대가 적힌 일은 한 차례도 없습니다. 밥솥은 크기가 어떠해야 하고, 밭솥은 어떻게 닦아서 건사해야 한다는 이야기 또한 한 차례조차 적힌 일이 없습니다. 걸레질은 어떻게 하고, 힘은 어떻게 주며, 바닥에 어떻게 꿇어앉아 어디부터 어디를 닦아야 하느냐 또한 ‘살림일기’ 같은 데에 적힌 적이 없고, 양반이나 지식인이 살림살이를 눈여겨보며 적바림해 준 적 또한 없어요.

 생각해 보면, 가장 훌륭한 일기란 ‘글일기’ 아닌 ‘몸일기’라 할 만합니다. 몸에 아로새겨서 몸으로 곧장 움직이도록 이끄는 일기야말로 가장 아름답다 할 만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축구만 생각하는 선수라면, 아주 마땅히, 모든 축구 훈련과 경기를 머리와 몸에 아로새기겠지요. 꼭 축구일기를 써야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되지 않고, 축구일기를 안 쓰면 축구를 못하는 바보가 되지 않습니다.

 여느 자리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어린이나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기를 꼬박꼬박 쓴대서 하루를 슬기롭게 돌아보거나 가만히 뉘우치지 않습니다. 일기를 건너뛰거나 거른다 해서 하루를 엉터리로 보내거나 하나도 못 떠올리지 않습니다.

 삶을 읽을 줄 아는 눈매가 맨 먼저입니다. 삶을 사랑하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내 삶을 아끼듯 내 이웃 삶을 아끼는 몸가짐으로 이어가도록 되새기자며 일기를 씁니다.

 《일기가 나를 키웠어요》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여민지 님이 이름난 선수가 되었기에 이 일기책이 사랑받을 만하지 않습니다. 여민지 님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든지 그닥 이름없는 선수로 마무리했다면, 이 일기책을 누가 눈여겨보거나 값있거나 뜻있다 했으려나요.

 되레, 여민지 선수한테는, 치르는 경기마다 족족 잘못투성이에다가 골은 못 넣으며 지기만 했다면, 이러는 가운데 일기를 참으로 꼬박꼬박 쓰면서 스물을 넘기고 서른을 맞이하며 마흔까지 나아갔다면, 한결 값있으면서 멋있는데다가 뜻있다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일기는 자서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기는 성공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기는 자랑이나 광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기는 그저 일기입니다. “일기가 나를 키웠어요”가 아니라,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면서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돌본 어버이와 동무와 선생님들이 나를 키웠어요”라 말해야 올바릅니다.


- 낙하지점 찾아가서 점프헤딩으로 높게 멀리 클리어하고, 그 동작까지 연결한다. 킥타이밍에 물러났다가 볼이 짧으니깐 다시 올라서면서 heading 클리어. (29쪽)
- pude up 후 발목을 이용해서 in side, out side로 강약을 조절하면서 tuch. pude up 후 v자 형식으로 방향 바꿔 가면서 sole 으로 drak back. (32쪽)
- 오늘 내 play는 전혀 마음에 드는 play를 하지 못했다. 볼소유도 못하고 자꾸 뺏기고, 상대에게 걸리고 잘 풀리지 못했다. (34쪽)


 여민지 님 일기를 보면, 온통 영어투성이입니다. 나중에 나라밖 여자축구단에서 뛰고픈 꿈으로 영어를 배우려고 영어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낱말만 영어로 적는다 해서 영어 공부가 되지 않아요. 참말 영어 공부를 하자면 ‘문장을 송두리째 영어로 적어야’ 합니다. 영어 공부 아닌 ‘축구일기’ 쓰기라 한다면, 일기에 섣불리 영어를 드러내어 적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기야, 남한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혼자서 돌아보는 글이니, 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여민지 님 마음입니다. 그런데, 축구란 어떻게 하는 경기인가요. 이 일기책에도 나오지만, 축구는 혼자서 펼치는 운동일까요, 운동장에서 뛰는 열한 사람과 뒤쪽에 물러나 앉은 감독들하고 후보선수가 함께 펼치는 운동일까요. 일기를 어떠한 글로 적어야 아름다운가를 여민지 선수 스스로 슬기롭게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다시금 생각하면, 여민지 선수 둘레에서 축구를 가르치거나 삶을 나누는 어른들이 모조리 영어를 아무 데에서나 함부로 쓰니까, 여민지 선수처럼 어린 사람은 이런 어른들 말투를 그대로 받아들일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이 ‘play’를 말하니까, 여민지 선수도 따라서 익숙해집니다.

 《일기가 나를 키웠어요》를 덮으며 한 가지를 더 생각합니다. 이 일기책은 여민지 선수가 쓴 일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앞쪽에는 여민지 선수 일기 가운데 몇 쪽을 통째로 옮겨서 사진으로 붙였고, 뒤쪽 5/6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나와 신춘문예에 소설이 뽑힌’ 분이 ‘구성·정리’를 했습니다. 뒤쪽 5/6 또한 여민지 선수가 쓴 일기에 담긴 줄거리라 하지만, 뒤쪽 이야기는 여민지 선수 목소리나 숨결이 아닙니다. 뒤쪽 5/6은 ‘일기 아닌 성공담’을 보여주는 위인전이 되고 맙니다.

 여민지 선수 일기를 책으로 묶은 명진출판사는 “제2의 반기문, 제2의 오바마를 키웁니다”라는 목표를 내걸며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을 만든다고 책 앞머리에서 밝힙니다. 곧, 이 일기책 《일기가 나를 키웠어요》는 “제2의 박지성” 뜻을 이룬 ‘축구스타 여민지’를 다룬 책이요, “제2의 여민지”가 태어나도록 하겠다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앞으로 여민지 님처럼 공을 잘 차면서, 공차기 하나로 좋은 뜻을 이루는 어린이와 푸름이가 하나둘 태어나는 일은 반갑습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합니다. 여민지 님을 축구선수로 키워 온 감독님이나 코치님들은 여민지 님한테 ‘공만 잘 차면 된다’고 했던가요. 김은정 코치님이 여민지 선수한테 했던 이야기(110∼111쪽)를 떠올린다면, 《일기가 나를 키웠어요》라는 책은 짜임새나 얼거리나 만듦새 모두 슬프며 안타깝습니다. 여민지 선수는 ‘잘난’ 축구선수가 아니라 ‘씩씩한’ 축구선수요, ‘이름난’ 대표선수가 아니라 ‘축구를 하며 즐겁게 놀 줄 아는’ 푸름이입니다. (4344.1.27.나무.ㅎㄲㅅㄱ)


― 일기가 나를 키웠어요 (여민지 글,이혜경 구성,이지후 그림,명진출판 펴냄,2011.1.15./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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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리 홀 원작,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박선영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답게 가꿀 내 고마운 삶
 [푸른책과 함께 살기 64] 멜빈 버지스, 《빌리 엘리어트》



- 책이름 : 빌리 엘리어트
- 글 : 멜빈 버지스
- 옮긴이 : 정해영
- 펴낸곳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07.2.9.)


 

 (1) 아이와 함께 살기


 아이가 “아빠, 쉬 마려.” 하고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누운 아이를 일으켜세웁니다. 다리를 왼손으로 모으고 오른손으로는 엉덩이 아래에 팔을 넣어 아이를 안아 올립니다. 기저귀를 풀고 바지를 내려, 잠자는 방 옆에 놓은 변기에 앉힙니다. 어두운 방에서 쉬를 하는 아이는 아빠를 안습니다. 쉬를 다 눈 다음 기저귀천으로 밑을 닦습니다. 다시 안아서 잠자리에 누이고, 기저귀를 다시금 채웁니다. 간밤에 오줌기저귀를 한 장도 갈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며칠에 한 번쯤 오줌기저귀 없는 밤을 맞이합니다. 그렇지만, 오줌기저귀를 갈지 않는 만큼 새벽에 꼬박꼬박 오줌 누이기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오줌 누이기를 안 하더라도 기저귀 갈기는 해야 합니다. 기저귀에 오줌을 누어 기저귀를 갈든, 부시시 일어나 오줌을 누이든 어버이로서는 똑같은 일입니다. 아이가 오줌을 꼬박꼬박 가릴 수 있다면, 기저귀 빨래 하나는 훨씬 주는 만큼 집일이 한 가지 주는 셈입니다. 석 돌째 될 올해에 밤오줌을 뗄 수 있을까 꿈을 꿉니다. 오늘과 이듬날과 또 이듬날, 잇달아 밤오줌을 가린다면 비로소 기저귀를 뗄 수 있겠지요. 이렇게 여러 날을 보낸 다음 기저귀천을 두 장 이부자리에 깔아 놓고 보내면서 오줌을 누지 않고 아버지를 불러 오줌을 누자고 한다면, 이제 아버지도 빨래일을 조금 덜 만하겠지요.


.. 어쨌든 저 소녀들은 분명 다르다. 만일 저 애들이 다른 곳에서 저런 꼴로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엄마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테고 다들 어린 창부라고 손가락질해댈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발레고, 따라서 걔들이 엉덩이를 살짝 내보인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애들을 바라볼 때마다 어쩐지 내가 무례하고 추잡한 늙은이가 된 기분이다 … 그리고 참 쉬워 보였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는 할 수 있지 싶었다. 그래서 문득 저애들이 이토록 뻔한 일에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  (43, 44쪽)


 오뉴월에 둘째가 태어나기에, 첫째가 이에 앞서 밤오줌까지 떼어, 첫째 기저귀 빨래가 없기를 애타게 비손합니다. 두 아이 기저귀 빨래를 하자면 기저귀 빨기 하나만으로도 눈코를 못 뜨지 않겠느냐 걱정합니다.

 그러나, 애 한둘 두엇 서넛 너덧 ……을 키우던 지난날 어머님들을 돌아보면, 애 둘이야 아무것 아니라 할 만합니다. 걱정하기에 앞서 받아들일 삶이고, 걱정하기보다 즐거이 여길 삶입니다.

 오줌을 쌌으니 갈아 주고 빨래를 합니다. 배가 고플 때에 밥을 차려 줍니다. 아침저녁으로 씻기고 옷을 틈틈이 갈아 입힙니다. 심심하지 않게 함께 놀며, 꾸준히 책을 함께 읽어 주며, 이것저것 자잘한 집일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킵니다. 아버지 곁에서도 놀고 어머니 곁에서도 놉니다. 함께 마실을 하거나 자전거를 탑니다.

 크게 근심하지 않아도 다섯 살이 되고 열 살이 되면 밤오줌 걱정이란 없겠지요. 때때로 이불에 쉬를 할 때가 있을 텐데, 이렇게 쉬를 하면 빨면 됩니다. 모든 삶에는 뜻이 있고, 모든 일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손이 많이 가야 한다고 벅차기만 하거나 고단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더 마음을 쏟기 마련이요, 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 옲는 사랑이 아닌 몸으로 껴안는 사랑입니다. 겉핥는 사랑이 아닌 속으로 부둥켜안을 사랑이에요.


.. “근데, 완전 얼간이가 된 기분이야.” “어차피 넌 얼간인데, 그렇다고 뭐가 달라져.” 마이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빌리, 솔직히 네가 멋져 보여. 난 네가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그건 참 뭐랄까 …….” “뭔데?” “거칠진 않지만 …… 남자다워 보여.” “남자답다고? 별 희한한 말을 다 듣네. 어쩼거나 그건 여자 애들이 하는 거잖아.” ..  (57∼58쪽)


 어제 아침, 멸치볶음을 하면서 멸치를 헹구지 않고 그냥 했더니 몹시 짭니다. 멸치 헹구기를 하자면 얼마나 품이나 겨를을 써야 한다고 이 일을 건너뛰어, 반찬 먹는 식구들 입맛을 버리도록 했는지, 참 딱합니다. 겨울날 찬물로 헹구기를 하면 손이 얼어붙습니다만, 푸성귀를 헹굴 때에도 똑같이 손이 얼어붙으니, 그냥 언손으로 한 번 더 헹구면 됩니다.

 오늘 아침에는 무슨 반찬을 새로 할까 아직 생각해 놓지 못했습니다. 엊저녁부터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직 마땅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음, 식빵과 달걀과 치즈와 봄동이 있으니, 달걀을 부치고 치즈와 봄동을 속으로 삼아 빵 두 쪽을 위아래로 싸 볼까?

 늘 같은 밥에 같은 국만 끓이는데, 아침을 먹인 다음 빨래하고 물 길으러 다녀온 다음에, 저녁을 마련할 때에는 밀가루반죽을 해서 수제비이든 칼제비이든 끓여 볼까?

 혼자 밥 차리고 치우기 힘들다면,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한테 아주 작은 한두 가지 잔일이라도 맡기면서 차츰차츰 집일에 익숙하도록 이끌어야겠지요. 아이가 훨씬 어릴 적에는 그저 아버지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며 따라하는 놀이였으면, 이제부터는 놀이를 넘어 일로 접어드는 섬돌을 밟는다 할 테니까, 아이 스스로 ‘아버지를 도왔다’고 느끼도록 할 만큼 일을 시켜야겠구나 싶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그릇을 모시 천으로 닦는 일을 아이한테 맡겼더니 빙글빙글 웃으면서 아주 신나게 해 줍니다. 책을 나른다든지 무어를 나를 때에도 꼭 옆에 붙어서 저도 같이 나르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혼자 후다닥 옮기면 금세 끝이지만, 이렇게 혼자 해 버리면 아이로서는 심심합니다. 아버지로서는 더디 걸리며 손이 많이 가면 더 고단할 수 있지만, 일을 더 천천히, 한결 느긋하게 하면서, 아이가 차분히 ‘일 거들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울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아버지는 이렇게 일을 거드는 아이 모습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멋없이 ‘v 그리기’를 하는 사진만 찍어대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함께 어우러지며 부대끼는 삶을 사진으로 고맙게 담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다 하면 한식구끼리도 말을 섞을 일이 줄고, 다 같이 하자면 식구들끼리 말을 섞을 일이 잦습니다.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울 살림살이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습니다. 즐거우면서 신나는 집안일이 되도록 애쓰면서 도란도란 오붓하게 살아가면 넉넉합니다.


.. 나는 정말로 무서웠다. 학교 건물 앞에 서자마자, 나는 ‘아차! 실수했구나’ 싶었다. 아무도 학교가 그런 곳이라고는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춤추는 것만 생각했었다. 그제애 왜 토니 형이 그처럼 화를 냈는지 알 것 같았다. 춤추는 게 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상류층의 세계였다. 그건 높은 사람들의 세계였고, 누구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의 세계였다. 그런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상류층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리고 상류층이 될 생각도 없었다 … (230쪽)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삶이 아닌, 아이와 어깨동무하는 삶입니다. ‘양육 의무’나 ‘부양 의무’ 따위가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구태여 아이 머리속에 이것저것 쑤셔넣는 지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시나브로 받아들일 삶이 되도록 하는 하루하루입니다.


 (2) 시골에서 함께 살기


 지난해 12월 첫머리부터 멧골자락 우리 집 물이 얼었습니다. 달포가 지나도록 날씨는 꽁꽁 얼어붙어 물이 녹지 않습니다. 멧골집으로 들어온 첫 해부터 이만저만 고단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모기장이 없어 여름날 애먹고, 겨울에는 집안을 따뜻하게 하는 데에 어찌저찌 마음을 쏟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거의 생각조차 않고 살아왔지만, 혼자 꾸리는 삶이 아니라 여럿이 한식구가 되어 함께 꾸리는 삶이니, 이제부터 제대로 생각하고 살피며 곱씹어야 합니다.

 집 바깥에 바람막이 노릇을 할 문을 새로 한 겹 대든 무어를 하든 어찌 되든 돈이 들겠지요. 돈은 돈대로 들 터이나, 돈에 앞서 어떻게 뚝딱뚝딱 해야 하느냐 하는 일손이 듭니다. 나 스스로 일손을 들여야 하고, 둘째를 낳기 앞서 이 일을 마쳐야 합니다. 날이 풀려 따스해질 삼월이나 사월에 집고치기를 해야 합니다. 어느새 일월이 저무는 만큼 곧장 이월이요, 삼월과 사월도 눈앞입니다.


.. 할머니도 나랑 같이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한다. 아빠는 요즘 노래가 다 쓰레기 같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걸 신경 쓰기엔 너무 늙었다 … 뭐, 식구들 앞에서 주책을 부릴 수 없다면 어디서 부린단 말인가? 할머니가 원하면 온종일 음악을 듣고 춤추게 내버려 둬야 한다 … 할머니가 왜 거기에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할머니가 무엇을 하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접 물어 봐도 할머니는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본다. 어쩌면 어릴 적에 뛰놀던 곳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았으니까. 80년 동안. 오, 세상에! 80년이라니. (14, 17∼18쪽)


 지난 하루와 이틀과 사흘 들을 곰곰이 돌아보니, 집에 물이 언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어찌저찌 살기는 잘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집에서 물을 못 쓰니 집에서 씻고 치우고 하기란 퍽 힘듭니다. 개수구를 씻거나 뚫기도 벅찰 뿐더러, 무엇 하나 수월히 넘길 만한 일이 없습니다.

 시골살이를 할 사람들이 시골살이를 찬찬히 보듬지 못한 탓인데, 아이 어머니가 몸을 건사하기 힘들어 이런 일을 같이 헤아리지 못한다면, 아이 아버지가 한결 슬기롭고 차분히 이 일을 건사해야 합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낼 집부터 느긋해야 이 일을 하든 저 놀이를 하든 제대로 합니다. 집에서 물을 못 쓰니,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러 멧길을 걸어 웃집까지 다녀옵니다. 날마다 이렇게 오가는 길에 아이는 즐겁게 따라나섭니다. 아이로서는 아버지가 날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이 일이라기보다 저랑 같이 겨울날 찬바람 쐬면서 즐기는 마실일는지 모릅니다. 여러모로 고단한 겨울날이지만, 달리 보면 내가 여태껏 얼마나 어리석게 살았는가를 뼛속 깊이 아로새기면서, 아이하고 더 오래 제대로 깊이 사귀면서 집식구 몸앓이랑 마음앓이를 옳게 짚으라는 뜻입니다.


.. “나도 기회만 있었으면 무용수가 될 수 있었어.” “장모님은 가만 좀 계세요!” 아빠가 뒤로 돌아서 할머니에게 고함쳤다. 젠장! 할머니에게 그렇게 소리치다니. 나는 펄쩍 뛰어올라서 아빠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아빠, 미워! 아빤 나쁜 놈이야!” … 나쁜 놈! 발레는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건데, 그걸 못하게 하다니.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  (92∼93쪽)


 밥을 하니까 살림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빨래를 하기에 살림꾼이라 할 만합니다. 아이를 돌보는 만큼 살림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그러나 밥만 한대서 살림꾼이 되지 않아요. 밥만 하는 사람은 밥쟁이입니다. 빨래만 한다면 빨래쟁이입니다. 아이돌보기란 어떠한 삶일까요. 어떻게 하는 일이 아이돌보기이고, 돌봄을 받는 아이는 어떠할 때에 즐겁게 받아들이려나요.

 시골집에서 밥쟁이로 남을 내 삶인지 살림꾼으로 거듭날 내 삶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멧골자락에서 빨래쟁이로 한삶을 보내려 하는지 살림꾼으로 한삶을 누리려 하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아이하고 어머니 아버지에다가 둘째 아이가 어엿하게 시골사람으로 시골마을을 아낄 삶으로 나아갈는지, 어영부영 바빠맞은 하루를 보내느라 눈코 못 뜨며 보내는 삶으로 허둥댈는지 알뜰살뜰 돌아보아야 합니다.


 (3) 춤과 삶과 일


 문학책 《빌리 엘리어트》를 읽습니다. 영화를 소설로 옮긴 작품인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이 작품을 영화로 본 사람이 많을 테고, 앞으로 이 영화를 볼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사랑받을 작품이요, 길이길이 이야기될 작품입니다.

 문학책 《빌리 엘리어트》는 청소년문학으로 여길 수 있고, 그냥 문학으로 여겨도 됩니다. 어찌 되었든 문학책입니다.

 영화로 볼 때면 한두 시간 가만히 지켜보면서 가슴이 젖어들 만하고, 책으로 읽을 때면 같은 대목을 되읽고 곱읽으며 새삼스레 가슴이 뭉클할 만합니다. 영화읽기를 할 때에는 낯빛과 몸짓과 삶터 하나하나를 아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가슴이 젖어듭니다. 책읽기를 할 때에는 온삶을 머리로 그리는 가운데 내가 꾸리는 내 삶은 어떠한가를 나란히 맞대 놓으면서 내 길을 걷는 좋은 꿈을 꿉니다.


.. 내 말은, 대체 탄광 동네에서 발레 따윌 해서 뭘 하겠냐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도대체 어떤 탄광 말인가? … 하지만 난 광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사 광부가 된다 해도,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어째서 우리는 발레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단지 전에 해 본 사람이 없는 거다. 그뿐이다. 따라서 일단 내가 하고 나면,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도 우리 중에 한 사람이니까. 남자들이 모두 아빠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단지 춤춘다는 이유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  (51, 91쪽)


 ‘빌리 엘리어트’는 춤꾼이 아닙니다. 그저 춤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춤을 출 때에 어쩐지 새 기운이 샘솟으면서 아름다운 땀방울을 흘리는 아이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전문 춤꾼’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전문 춤꾼이 안 되고 ‘광부’가 될 수 있습니다. ‘광부로 일하면서 춤을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탄광마을에서 춤을 선보이면서 이웃 ‘탄 캐는 일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될 만하고, 다 함께 춤추기를 즐기면서 ‘춤추는 탄광사람들’ 무대를 마련할 수 있어요.

 어느 길로 가든 빌리한테는 빌리 삶입니다. 춤을 추어도 좋고 안 추어도 되는 빌리 삶입니다. 다만, 빌리는 퍽 어린 날, 빌리가 걸어갈 길에서 ‘춤이란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억지로 하는 춤이 아닌, 돈을 바라보는 춤이 아닌, 이름을 드날리려는 춤이 아닌,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춤입니다. 몸과 춤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 아빠는 아빠대로 내가 춤추기 때문에 계집애 같다고 생각했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내가 당당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계집애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  (88쪽)


 계집애가 추는 춤을 춘다고 계집애 같다 할 수 없습니다. 계집애가 추는 춤을 추기에 더없이 사내애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사내애가 하는 일을 하기에 훨씬 계집애 같다 할 만합니다. 어떠한 일이든 ‘사내가 할 일’과 ‘계집이 할 일’이 따로 나뉘어지지 않거든요. 아기씨를 내놓는 일이란 사내만 할 수 있고, 아기씨를 받아 아기를 낳는 일이란 계집만 할 수 있습니다. 아기한테 젖 물리기도 계집만 하겠지요. 그러나, 이 일을 뺀 모든 일은 사내와 계집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으로서 할 일입니다.

 빌리가 깨달은 춤추기란 ‘계집애만 추는 춤’이 아니라, ‘춤추며 흘리는 땀방울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는 춤’입니다.


..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엄마가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다. 엄마는 아빠와 형이 그렇게 싸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다 ..  (134쪽)


 어느 누구라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아름답게 살도록 목숨을 선물받았다고 느낍니다. 어느 누구라도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꿈으로 빛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돈을 많이 벌 때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크고 멋진 집에다가 빠르며 예쁘장한 자동차를 갖추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얼굴을 뜯어고쳐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노래를 잘한다거나 머리가 똑똑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아름답습니다. 엉겅퀴는 엉겅퀴라서 아름답습니다. 우리 집 앞에 우뚝 선 두릅나무는 두릅나무라서 아름답습니다. 콩새와 박새는 콩새와 박새라서 아름답습니다. 개구리는 개구리이기 때문에 아름다워요.

 저마다 제 길을 씩씩하게 걸어갈 노릇입니다. 저마다 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일입니다. 저마데 제 길을 튼튼하게 걸어가면서 따스함과 넉넉함을 사랑할 삶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춤 하나를 붙잡을 뿐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열면서 춤하고 사귈 뿐입니다. 빌리는 빌리 삶을 사랑하면서 춤하고 하나가 될 뿐입니다. 춤을 추면서도 밥을 먹어야 하고, 춤을 춘 다음에도 옷을 입어야 하며, 춤을 추기 앞서도 잠을 자야 합니다. 살림꾼이면서 한 아이요 바야흐로 어른으로 자라나며 오늘은 멋스러운 춤을 선보이는 빌리입니다. (4344.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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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인권 수첩 - 개인의 자유와 지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인권 교과서 세상이 보이는 지식 3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지음, 안미라 옮김 / 양철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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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권과 인권을 여는 작은 문
 [책읽기 삶읽기 36]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청소년 인권 수첩》



 청소년한테는 사람으로서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담은 《청소년 인권 수첩》을 읽다.

 더없이 마땅한 소리이기 때문에 굳이 ‘청소년 인권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지없이 마땅한 인권을 인권다이 다루지 않으며 섬기지 않는 우리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같은 책이 나올밖에 없고 읽힐밖에 없으며 읽을밖에 없다.

 《청소년 인권 수첩》이라는 책이 우리한테 들려줄 이야기는 오로지 하나이다. 책 첫 대목에 나온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자유와 권리는 은수, 현수, 정아, 윤기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자유이자 권리이다(12쪽).” 두 줄이야말로 이 책이 다루는 고갱이이다. 누구나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꾸려야 한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펼치면서, 저마다 좋아하는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 스스로 그리 옳거나 바르게 살아가는 매무새를 익히지 못한 만큼, 이런 말을 하면서 꼬리말을 달아야 한다. 내 권리를 아주 마땅히 누리는 만큼, 내 이웃은 내 이웃으로서 권리를 아주 마땅히 누려야 한다. 나 혼자만 누린다는 권리가 아니라, 누구나 저마다 다 다른 권리를 마음껏 누려야 한다.

 그러니까, 남을 해코지하는 일은 권리가 아니다. 남을 따돌리는 짓 또한 권리가 아니다. 남을 해코지하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등치거나 속이는 짓은 모두 ‘폭력’이다.


.. 우리가 어떤 물건이든 최대한 싼 가격에 사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말도 안 되게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인권이 짓밟히는 환경에서 일을 한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쉽사리 폭력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그 책임은 여성들에게 돌려지곤 한다 … 사람들의 생각이 다른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그 생각 대문에 때때로 처벌을 받기도 한다면 그 사회는 참 ‘무서운’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국민들을 좀더 쉽게 다루기 위해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  (72, 177, 153쪽)


 ‘권리’와 맞선 낱말은 ‘폭력’이다. 권리와 폭력이란 종이 앞뒤와 같달 수 있다. 권리라 여기지만 막상 폭력이 될 수 있고, 폭력에 기울던 슬픈 사람이라지만 언제라도 권리로 돌아올 수 있다.

 물건 하나를 더 값싸게 사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폭력이 될 수 있는 줄 잊는 사람들이다. 더 값싼 물건을 찾는 일이란 권리이다. 그러나, 내가 더 값싸게 사들이고 싶어서 ‘권리 아닌 폭력을 휘두르며 값싸게 파는 장사꾼’한테 홀리거나 이끌린다면 나 또한 폭력을 저지르는 셈이다.

 쌀 한 말을 사다 먹을 때에도 ‘더 값싼 쌀’을 바라는 나머지, 농사짓는 이들 스스로 화학농을 짓고야 만다. 땅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곡식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찌우는 거름을 내는 유기농을 하도록 이끌자면 ‘더 값싼 쌀’이 아니라 ‘제값 치르는 쌀’을 사서 먹어야 한다.

 책 한 권을 산다 할 때에는, 출판사부터 ‘인터넷책방에서 깎아서 팔고 적립금 쌓을 돈까지 헤아리는 책값 부풀리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책을 사 읽는 사람은, 출판사가 책값 부풀리기를 안 하리라 믿으면서 제값을 치르며 사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출판사-책방-독자, 여기에 출판사와 책방을 잇거나 책방과 독자를 잇는 배달 일꾼과 창고 일꾼들이 저마다 제몫을 찾을 수 있도록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런 데에 마음을 쓰지 못한다면, 다른 데에도 마음을 쏟지 못한다. 날마다 밥을 받아먹으면서, 날마다 먹는 내 밥을 누가 어떻게 차리는지 생각이나 하는가. 여남평등이니 남녀평등이니 떠들어도, 오늘날에도 집에서 밥 차리는 몫은 ‘어머니’나 ‘밥어미’와 같은 여자들한테 주어진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아들내미 스스로 밥을 차리는 일이란 아주 드물다. 서로 함께 차리는 일은 더욱 드물다. 알고 보면, 내 살림집부터 ‘내 권리’뿐 아니라 ‘어머니 권리’와 ‘할머니 권리’가 서로 고른 자리에서 넉넉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니, 다른 데에서도 참다운 권리란 무엇인지를 못 보거나 모른달 수 있다.


.. 학생회가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다. 학생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일 년마다 학생회장과 반장을 뽑는 일뿐이다 … 성적으로 서열화하는 교육은 평등과 인격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기보다는 차별과 배제를 가르친다. 학교에서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 자연에 대한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  (195∼196, 206쪽)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청소년 인권 수첩》을 읽지 않아도, 청소년이면 누구나 청소년이 얼마나 권리를 못 누리는지를 살갗으로 받아들인다. 학교라는 곳에서 청소년이 누리는 권리란 없다. 청소년은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의무만 있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라는 의무만 짊어지는 청소년이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지 못하겠다면, 직업훈련원이나 상고나 공고 나와서 하루빨리 회사원이나 노동자가 되어 돈벌이를 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질 청소년이다.

 《청소년 인권 수첩》은 매우 마땅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리하여, 자칫 따분하다든지 알맞지 않다든지 하는 샛길로 흐를 수 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하는 것들이다(25쪽).” 같은 대목이나, “지식은 힘이고 인간은 누구나 지식을 습득해 ‘힘을 축적’할 권리가 있다(61쪽).” 같은 대목은 옳지 않다. 이 책을 쓴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니라 독일사람이다. 독일이라면 학교라는 곳이 한국처럼 ‘입시지옥제조기’는 아닐 테니까,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한국땅에서 학교는 대학입시에 쓸모있는 시험문제만 골라서 가르치고야 만다. 사람이 사람다이 아름답게 살도록 돕는 슬기를 일깨우거나 나누지 않는다. 교사들 스스로 교과서나 문제집을 내던지면서 ‘푸름이 삶과 넋을 푸르고 또 푸르게 보살피도록 온힘을 쏟는 일’이란 몹시 드문 일이 되고 말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는 ‘더 아름다운 삶을 더 너른 지구별에서 누리거나 마주하도록’ 돕고자 가르치는 학과목이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란 ‘세계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세일즈맨이 되어야 하니까’ 가르친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영어로 된 좋은 영화나 문학이나 연극이나 노래’를 알뜰히 즐기거나 누리도록 이끌지 못한다. 더구나 한글로 된 영어사전은 영어사전답게 나온 적이 없다. 영어사전 말풀이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엉터리로 쓰도록 내몬다. ‘my = 내’가 아니라 ‘my = 나의’로 풀이할 뿐 아니라, 바르면서 알맞고 고운 우리 말을 살피지 못하는 영어사전이다. 이런 영어를 배우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얼마나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한국땅 한국 학교는 한국 아이들한테 한국말부터 옳게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말부터 옳게 가르치지 못하는데, 한국 아이들은 무슨 지식을 배우고 무슨 삶을 읽을 수 있는가.


.. 우리가 부모님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면 기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어서 집안 살림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전거를 이용하면 날마다 공기 중으로 배출하는 유해 물질의 양과 석유 사용량이 엄청 줄어든다는 것이다 ..  (240쪽)


 독일책만 고스란히 옮겼다면 《청소년 인권 수첩》은 퍽 부질없는 뜬구름 이야기로 흘렀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랑 훌륭한 가르침을 담았을지라도, 우리 터전을 살뜰히 굽어살피지 못한다면 안타깝다. 《청소년 인권 수첩》은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는 분이 한국땅 푸름이들 삶을 돌아보는 글을 곳곳에 많이 넣었고, 푸름이 스스로 풀고 맺을 즐거운 삶 이야기를 가만히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즐거운 삶’이 참말로 즐거운 삶이 되도록 조금 더 마음을 쏟아 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부모님 자동차를 안 타고 내 자전거를 탈 때에는 공기를 더 깨끗하게 하도록 돕기도 하겠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기쁨과 보람과 아름다움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동안에는, 자동차를 탈 때에는 ‘그저 지나치던’ 마을과 골목과 터전을 더 느리게 바라볼 수 있고, 자전거조차 타지 않으면서 두 다리로 걷는다면 더 천천히 내 삶터를 껴안을 수 있다.

 다만, 자전거도 싱싱 달린다든지 걷기를 하면서도 잰걸음만 걷는다든지 하면 자동차 탈 때랑 똑같다. 곧, 두 다리로 걷든 자전거를 타든 자동차를 타든, 내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가다듬을 수 있느냐이다. 푸름이뿐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인데, 내 삶을 나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거나 아낄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네 인권은 오늘부터 새삼스럽게 다시 태어난다. 내 삶을 나 스스로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내 이웃이나 동무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좋은 삶을 꾸려야 한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삶이 아니라,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길을 찾으며 내가 아주 즐거울 길을 여는 삶이어야 한다.

 삶 없이 지식만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삶은 없이 ‘인권 지식’만 차곡차곡 쟁여 놓는들 우리 터전이 얼마나 나아지겠는가. 내가 디딘 삶터를 제대로 깨우쳐 내가 꾸리는 오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청소년 인권’과 ‘사람 인권’을 바로보는 문을 열 수 있다. (4344.1.25.불.ㅎㄲㅅㄱ)


― 청소년 인권 수첩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글,안미라 옮김,양철북 펴냄,2010.12.21./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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