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 2011.3.4 - 창간호
교육공동체벗 편집부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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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잡지 ‘우리교육’과 새 잡지 ‘오늘의 교육’
 [책읽기 삶읽기 57] 교육공동체벗 펴냄,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



 “진보적 교육 담론은 지금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어야 한다(8쪽).”는 이야기를 내걸며 새로 나오는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를 읽습니다.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은 또다른 교육잡지 《우리교육》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아는 사람은 그닥 안 많고,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뿐더러, ‘진보적 대중지’라 하는 언론매체에서조차 이러한 이야기를 기사로 다루지 않았습니다만, ‘(주) 우리교육’이라는 출판사에서 ‘잡지 우리교육’이 더는 돈이 안 된다고 여겨 이 잡지를 ‘전교조 회원 기관지’로 바꾸려 하면서 잡지를 만들던 일꾼을 모두 쫓아낸(정리해고) 일이 있습니다.

 마땅한 일이지만, 정리해고는 대통령이나 공공기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커다란 회사에서만 하는 정리해고는 아닙니다. 노동조합에서도 정리해고를 할 만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 해서 정리해고를 못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해고를 하는 나라’이니까, 이러한 나라에서 전교조 또한 ‘정리해고를 하는 권력’을 누렸을 뿐이라 할 만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 하더라도 돈이 안 되는 사업이라면 얼른 접어야 할 노릇일 테니까요. 교사 노동조합이든 아니든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샘솟을 까닭이 없으니까요. 그예 돈을 퍼붓기만 하는 잡지라 한다면 마땅히 그만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잡지 우리교육’이란 무엇이며, ‘(주) 우리교육’이란 또 무엇일까요.


.. 오늘날 대한민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사실상 ‘여관’이다.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 관리자들은 어쨌든 모든 아이들을 깨워서 수업 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을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교육행정을 펼쳐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순간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므로 그들은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 오늘날 아이들의 이러한 일탈과 저항을 학교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익히 지켜보았다시피, 학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저, 학칙의 처벌 규정을 턱없이 강화하고, 자퇴나 전학을 권고하거나 퇴학시키거나 아니면 아이들을 학교 바깥 기관에 떠넘기는 것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다 ..  (17, 21쪽)


 “진보적 교육 담론”을 다루겠다는 새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진보적 교육 담론”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보적 교육 담론”이 아니라 “보수적 교육 소론”이라 하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여깁니다.

 교육, 곧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이란 진보나 보수하고 아랑곳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라서 더 좋은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보수라서 아주 나쁜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쉰 해만에 새롭게 빛을 보는 교육소설 《인간의 벽》(이시카와 다쓰조 씀,양철북 펴냄,2011)을 읽을 때에도 곳곳에 나옵니다만, 1950년대에 일본 교직원노동조합인 일교조가 지키려 하는 배움터란 ‘진보 교사가 진보 학생을 일구는 배움터’가 아닙니다. 일교조 여느 교사들이 지키려 하던 배움터란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이 살아갈 올바른 사람으로 배우거나 가르칠’ 터전입니다.

 진보가 옳대서 진보라는 길을 갈 까닭이 없습니다. 옳은 길을 가다 보니 진보와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착하게 살아가다 보니, 이 삶이 진보와 만나기도 할 뿐입니다.

 페스탈로치이든 야누쉬 코르착이든 ‘진보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현배이든 성내운이든 이오덕이든 ‘진보 교육’을 외친 적이 없습니다. 나라 안팎 훌륭한 교육자들은 한결같이 ‘옳은 배움길’을 이야기하고, ‘착한 배움길’을 온몸으로 살아냈습니다. 《이 여자 이숙의》(삼인 펴냄,2007)에 나오는 이숙의 님 또한 ‘진보’라는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페스탈로치와 야누쉬 코르착과 최현배와 성내운과 이오덕과 이숙의 어느 누구도 ‘민주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말마디, 그러니까 구호로 떠드는 민주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바르며 착하고 아름다이 살아내는 ‘참배움’만을 조용히 읊었습니다.


.. 전공과목을 가르치는 목적은 전공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습득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유로이 사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최근 학문은 대부분 영어권 국가가 주도하고 있고, 전공 용어를 한국어로 바꾸면 제대로 뜻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게 강의를 영어로 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 카이스트에서 강의하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태도는 은연중에 드러나 왠지 이걸 물어 보면 바보 취급을 받을 것 같은 불안감을 갖게 하여 학생들이 자유롭게 질문을 던질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 ..  (119, 120쪽)


 나는 생각합니다. 옛 교육잡지 《우리교육》이든 새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이든 ‘진보’도 ‘민주’도 ‘평화’도 ‘평등’도 말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잡지라 한다면, 말 그대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이야기를 말하면 넉넉합니다. 가르치거나 배우는 이야기는 입으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교실 안쪽에서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살아내는 배움이고 살아가는 가르침일 뿐입니다.

 교사가 되든 어버이가 되든, 입으로 아무리 옳고 바른 소리를 읊는다 하더라도, 삶으로 고스란히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느 하나 옳고 바르게 배우지 못합니다. 옳고 바르다는 책을 천 권쯤 읽었기에 옳고 바르게 살아가겠습니까. 옳고 바른 책을 구백구십구 권쯤 읽었기에, 구백아흔여덟 권쯤 읽었기에, 구백아흔일곱 권쯤 읽었기에 …… 오백한 권쯤 읽었기에, 오백 권쯤 읽었기에, 사백아흔아홉 권쯤 읽었기에 …… 아흔아홉 권쯤 읽었기에, 아흔여덟 권쯤 읽었기에, 아흔일곱 권쯤 읽었기에 …… 다섯 권쯤 읽었기에, 네 권쯤 읽었기에, 세 권쯤 읽었기에, 옳고 바른 가르침과 배움을 ‘안다’거나 ‘산다’고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옳고 바르다는 책은 한 권조차 안 읽어도 됩니다. 나부터 옳고 바르게 살아가면 됩니다. 옳고 바르게 살아왔다는 훌륭한 교육밭 어르신을 아무도 몰라도 됩니다. 나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면 됩니다.

 “진보 교육 담론”이든 “보수 교육 소론”이든 부질없습니다. 어떠한 목소리이든 아름답지 않습니다. 따스한 땀방울과 사랑스러운 손길과 믿음직한 눈동자이면 넉넉합니다. 왜냐하면 ‘가르침과 배움(교육)’이거든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한테는 더 많은 돈이 있으면 더 많은 물건을 사거나 더 큰 집을 장만해서 더 많은 놀잇감을 사들이며 더 넉넉히 누린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돈이 있더라도 참다운 사랑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더 많은 물건을 사들여서 누린다지만 착한 손길이 없으면 어찌하나요. 더 큰 집에서 떵떵거리며 자가용 씽씽 몬다지만 고운 마음이 없으면 무슨 보람이 있나요.

 아이는 돈을 먹지 않습니다. 아이는 사랑을 먹습니다.

 어른도 돈을 먹지 못합니다. 어른도 사랑을 먹습니다.


.. 교대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대충’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대충’이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대충 해”라는 말이 돌아온다. 미술 과제가 재미있어서 “나 어제 미술 했어. 은근 재밌더라.”라고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대충 해.”였고, 물리 과제가 너무 어려워 물어 봤을 때도 대답은 설명 대신 “대충 해.”였다. “이건 어떻게 할까?” “이건 뭐야?” “재미있지 않아?” “네 생각은 어때?” 이 모든 것의 대답은 대부분 “대충 해.”로 돌아왔다. 특히 과제를 할 땐 ‘대충’이 정석이었다. 잘하려고 너무 ‘오바’하지 말고, 과제도 아닌 것에 관심 갖는 그런 ‘오바’하지 말라는 얘기다 ..  (183쪽)


 나는 다시금 생각합니다. 옛 교육잡지 《우리교육》이 잘 안 팔리면서 빚을 자꾸 지고 말았다면, 옛 교육잡지인 《우리교육》 스스로 사랑을 잃거나 사랑하고 등돌리거나 사랑하고 멀어진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주식회사 우리교육은 ‘스스로 잃거나 버리거나 놓거나 등돌린 사랑’을 다시금 찾아서 북돋우도록 힘써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교육잡지를 빚으려 하는 분들이라면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어버이·교사·이웃)’으로서 착한 사랑과 참다운 사랑과 고운 사랑을 되찾으면서 아끼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이 ‘담론’만 있으면, 사랑은 없는데 ‘진보’라는 옷만 걸치면, 사랑하고는 동떨어진 채 ‘교육’만 들먹인다면, 참배움도 참사랑도 참사람도 참말도 참나라도 참꿈도 참길도 이루어질 수는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교육》이 지식조각에 얽매이는 잡지이기보다는 참말과 참사랑을 바탕으로 참배움과 참삶을 차근차근 보살피어 어루만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호에는 딱딱하거나 어려운 말로만 이루어진 지식조각 글이 너무 많습니다. (4344.5.8.해.ㅎㄲㅅㄱ)


―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 (교육공동체벗 펴냄,2011.3.1./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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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마을 하진이 보리피리 이야기 8
박형진 지음 / 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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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삶얘기를 들려줄 때에
 [책읽기 삶읽기 56] 박형진·박지훈, 《갯마을 하진이》(보리,2011)


 아이가 하루하루 자라며 어른이 됩니다. 아이일 때에는 동무들끼리 왁자지껄 떠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홀로 가슴에 묻으며 지내는 이야기가 있곤 합니다. 어른이 되어 글을 쓰는 일을 하다 보면, 어린 날 겪거나 살아낸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따로 글을 쓰지 않더라도 내가 낳아 키우는 아이한테 내 어린 나날을 말로 들려주곤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로 살아가면서 저 살아가는 나날을 어른한테든 동무한테든 이야기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로 살아온 저 예전 나날을 아이한테든 어른 동무한테든 이야기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아이들은 ‘아이로서 저희 어린 나날’을 이야기하는 일이 드뭅니다. 아이들은 ‘아이로서 저마다 보내는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어른들은 ‘어른으로서 저희 어른 나날’을 이야기하는 일이 드뭅니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기 앞서 어리던 지난 나날’을 이야기합니다.

 왜 어른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한테 ‘어제를 살았던 이야기’만 들려주는가 아리송합니다. 왜 어른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하고 나누려 하지 못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른 누구나 어린이 나날을 보냈’으니까, ‘오늘 어린이로 살아가는 이들 앞’에서 ‘너희보다 먼저 그때를 겪은 만큼 어른 얘기를 귀담아들으’라는 뜻으로 당신들 옛이야기를 들려줄는지요. ‘난 이런 사람이야’ 하고 무언가를 뽐내려는 뜻이 될는지요. ‘너희는 이런 일 겪지 못했지? 너희는 이런 일 겪을 수도 없지?’ 하는 마음이 될는지요. ‘예전에는 이렇게 가난하며 힘들게 살았단다. 그러니 너희는 요즈음 얼마나 걱정없고 좋게 살아가는지 아니?’ 하는 넋이 될는지요.


.. 나는 이리저리 굽기만 하던 제비 다리를 영숙이한테 내밀었다. “싫어, 너 먹어. 나는 참새 고기도 먹기 싫은디…….” “야, 이리 줘! 내가 먹으께. 느들은 둘이 맨날 바지락만 캐다 처먹어라, 흐흐흐.” 용제가 짓궂게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  (59쪽)


 바닷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박형진 님이 쓴 《갯마을 하진이》를 읽습니다. 박형진 님이 당신 고향에서 보낸 어린 나날을 글 몇 자락으로 만납니다. 버스를 탈 때에 어떤 느낌이었는가를 헤아리고, 처음 새끼를 꼬던 느낌을 곱씹으며, 하나둘 사라지듯이 바닷마을을 떠나는 동무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던 느낌을 생각합니다.

 새조개를 캐던 모습을 떠올리고, 고구마밥 말고는 없는 낮밥에 배를 곯다가는 웃 형님들한테 시달리는 동무를 걱정하는 마음을 살피며, 땔나무를 하다가 낫에 손가락이 베면 얼마나 아팠을까 하고 가눕니다.

 온통 쓸쓸하거나 허전하기만 하던 어린 나날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랑 너랑 하나도 다르지 않은 어린 나날을 함께 보내던 동무들이 복닥복닥하면서 쓸쓸함이나 허전함을 달랬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난한 어버이들만큼 가난한 아이들이고, 힘겨운 어버이들만큼 힘겨이 부대껴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너른 바다와 함께 살아가지만 너른 바다 품을 고이 껴안기 힘든 살림입니다. 넉넉한 갯벌과 함께 살아숨쉬지만 넉넉한 갯벌 가슴을 살뜰히 부둥켜안기 벅찬 살림입니다.

 집집마다 아버지와 어머니 되는 분들은 바지런히 바닷일을 하고 갯일을 하며 밭일을 했을 텐데, 왜들 이렇게 고달프거나 고단해야 했을까요. 바다에서 애써 잡은 고기들을 내다 팔면서 왜 살림이 넉넉해지지 못하고, 갯벌에서 갯것을 캐서 내다 팔 때에 왜 살림이 펴지 못했을까요.

 글을 쓴 박형진 님 또한 ‘하얀 쌀밥이 맛나’고 ‘누런 보리밥은 맛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난날을 살던 어른들은 으레 이런 이야기를 오늘날 아이들한테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들은 ‘보리밥을 파는 밥집’에 따로 찾아가 퍽 비싼값을 치르면서 보리밥을 맛나게 사다 먹습니다. 돌이켜보면, 쌀밥을 먹든 보리밥을 먹든, 어린 나날 끼니를 안 굶거나 조금만 굶거나 때때로 굶는다 하더라도 밥을 먹을 수 있었다면 몹시 고마운 살림이라 할 만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밥을 먹으니 고마우면서 좋은 나날이지, 보리밥을 먹는대서 슬프거나 아쉬운 나날이지 않습니다. 쌀밥을 먹는대서 기쁘거나 좋은 나날이지 않습니다.

 글쓴이 어머님은 당신 언니가 조카들하고 혼자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여그넌 없는 것잉께(18쪽)” 하고 말하면서 “마른오징어 스무 마리, 국물 새지 말라고 비료 포대에 싸서 고무줄로 묶은 황석어와 중하젓 한 자루, 참기름 한 병, 고사리와 취나물 뜯어 말린 것, 더덕 캔 것(16쪽)”을 풀어놓는다고 합니다. 가끔가끔 언니네에 찾아가서 이런 보퉁이를 풀어놓는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바닷마을에서 살아가며 쌀밥을 먹기를 바라는 일은 엉터리입니다. 바보라 할 테지요. 바닷마을에서는 바닷마을에 흔하거나 너른 먹을거리를 먹어야지요. 둘레가 온통 논뿐인 마을에서야 쌀밥을 먹는다 하지만, 쌀밥 말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얻어서 먹을까요. 부자가 고깃국을 날마다 먹을까 모르겠습니다만, 고깃국을 날마다 먹든 자주 먹든 더 좋은 밥살림이 아니에요. 하얀 쌀밥을 마음껏 먹는대서 더 좋은 나날이나 살림이 되지 않아요. 밥 한 그릇을 받아들며 얼마나 고마우며 즐거운가를 느끼거나 나눌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나날입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저는 어린 나날 쌀밥을 먹었는지 보리밥을 먹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만(아마 쌀밥을 먹었겠지요), 집에서 차려 주는 쌀밥은 언제나 ‘정부미 쌀밥’이었습니다. ‘일반미 쌀밥’은 명절 때에, 때로는 생일 때에 구경해 보았다고 떠오릅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버이 두 분 다 살아서 밥을 얻어먹는다는 나날이 좋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버이 한 분이 안 계신다든지, 정부미 쌀밥도 버거워 잡곡밥만 먹는다든지 대수롭지 않습니다. 집에 어떤 슬픔이 있든, 저마다 어떤 아픔이 있든,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개구지게 얼크러지며 놀면서 하루하루 살아내며 무럭무럭 컸으니까요.


.. “불깡통 헐라고 내가 숨겨 논 깡통이 하나 있음게 너는 호멩이(호미)나 하나 갖고 와라, 너는 여잔게 니 호멩이 있잖여?” 용제가 말하며 영숙이를 보았다. “호멩이는 뭣 헐라고?” “호멩이가 있어야 바지락을 캐잖여?” ..  (51쪽)


 요즈음 아이들은 너나없이 자전거를 타며 놉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인라인이든 무어든 어렵잖이 얻어서 즐깁니다. 놀잇감이나 먹을거리로 근심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기도 할 테지만, 이와 맞물려 놀잇감이든 먹을거리이든 근심하는 아이들 또한 많겠지요. 도시이든 시골이든, 어느 한쪽에서는 자전거이든 스케이트이든 무어든 마음껏 누리면서 논다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어두운 땅밑 단칸방에서 쪼그리며 울는지 모릅니다. 어느 한쪽에서는 영어 그림책이니 영어 과외이니 한다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퍽 어린 나이부터 바깥일을 하면서 돈을 벌거나 집안일을 하면서 더 어린 동생을 돌볼는지 모릅니다.

 이야기책 《갯마을 하진이》라 한다면, 참말 ‘갯마을’에서 살아가는 하진이다운 어린 나날 이야기를 듬뿍 실어서 들려줄 때에 훨씬 나았겠다고 느낍니다. 또는, 굳이 어린 나날 이야기를 들추지 않아도 되니까, ‘어른 하진이’로 살아가는 기쁨과 보람을 조곤조곤 들려주어도 좋겠어요. ‘오늘을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또 ‘어제를 살아온 어린이’로서, 어른 삶과 어린이 삶을 차근차근 오가면서 두 나날이 당신한테 얼마나 아름답거나 기쁜 삶이며 보람인가를 들려주면 좋겠습니다.

 어린 나날 자취를 너무 성기게 담은 《갯마을 하진이》라고 느낍니다. 이것저것 온갖 이야기를 주워담는다 해서 좋은 이야기책이 되지 않아요. 다문 한 가지, 새조개를 잡는 이야기라든지, 미영을 감는 이야기라든지, 꼭 한 가지 이야기만을 훨씬 깊이 잡아채면서 옛날은 옛날대로 즐겁고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즐거울 이야기로 엮는다면 좋겠어요. 이 이야기책을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갈 아이들한테 들려줄 생각’이라면,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며 이 이야기책을 읽을 아이들 또한 스스럼없이 바닷마을로 찾아와 미영을 감거나 갯벌에서 뒹굴며 살아갈 기운을 낼 수 있게끔, 또는 도시에서만 복닥이더라도 도시라는 또다른 삶터를 사랑하고 아끼는 넋을 북돋울 수 있게끔, ‘어른 하진이’로서 남달리 보여주거나 들려줄 사랑과 믿음을 이 작은 책에 깃들일 노릇 아닌가 싶습니다.

 한 가지 덧붙여, 《갯마을 하진이》에 그림을 많이 넣었는데, 그림이 하나같이 그닥 사랑스럽거나 따스하거나 재미나거나 포근하지 못하구나 싶습니다. 아이들 얼굴이 모두 똑같습니다. 사내아이라 하든 계집아이라 하든 똑같아요. 게다가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는 아이들 얼굴이며 몸이며 너무 포동포동합니다. 그림 빛깔 느낌은 퍽 보드라우면서 예쁘다 할 수 있습니다만, 싱그럽거나 시원스럽다고 느끼기 힘듭니다.

 아이들이 읽을 책에 그림을 많이 넣어도 좋습니다만, 제대로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면 굳이 많이 안 넣어도 됩니다. 아이들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날개를 펴도록 도울 만큼만 그림을 넣으면 됩니다. 더 많이 실을 그림보다는 이야기 한 꼭지에 그림 하나만 넣어도 되니까, 이야기 꼭지마다 ‘가장 깊이 살피며 가장 사랑스레 보여줄 모습’ 하나를 가장 살가우면서 맑고 싱그러이 담는다면 좋겠습니다. 1968년을 살던 ‘갯마을 하진이’ 그림이어야 할 텐데, 그림을 보아서는 1968년일는지 2008년일는지 2028년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그림마다 아이들한테 무엇을 느끼도록 이끌려는지 잘 읽히지 않습니다. 눈길이 머무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길이 사랑스러워지는 그림을 담아야 비로소 ‘어린이책에 싣는 그림’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4344.5.3.불.ㅎㄲㅅㄱ)


― 갯마을 하진이 (박형진 글,박지훈 그림,보리 펴냄,2011.4.20./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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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벽 1 - 거대한 슬픔
이시카와 다쓰조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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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사람은 울타리를 세우지 않아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75] 이시카와 다쓰조, 《인간의 벽 (1)》(양철북,2011)



- 책이름 : 인간의 벽 1
- 글 : 이시카와 다쓰조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11.3.30.)
- 책값 : 14000원



 (1) 사랑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이를 줄세우지 않습니다. 어버이로서 집에서건 교사로 학교에서건 아이를 줄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바라볼 때에 시험성적이 어떻다고 따지거나 무슨 좋은 재주가 있다거나 얼굴이 어떻게 예쁘다 하면서 줄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른이라면 언제나 따스하면서 보드랍게 손을 내밀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사랑하는 손길이기에 따스합니다. 사랑어린 몸짓이기에 보드랍습니다.

 누구나 사랑받을 때에 즐겁습니다. 누구나 사랑받지 못할 때에 괴롭습니다.

 누구라도 사랑할 때에 기쁩니다. 누구라도 사랑하지 못할 때에 갑갑합니다.

 아이한테든 어른한테든 삶을 잇도록 이끄는 힘은 사랑입니다. 밥그릇에 사랑을 담고, 말마디에 사랑을 담습니다. 눈빛에 사랑을 싣고, 손길에 사랑을 싣습니다. 때로는 회초리에도 사랑을 깃들일 수 있겠지요. 온몸 가득 사랑인 사람이라면 손에 무얼 쥐거나 놓더라도 사랑이 되겠지요. 온몸 가득 감싸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면 손에 김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을 들었어도 차갑거나 메마릅니다. 돈이 없더라도 사랑이 있으면 배부르고, 돈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배고픕니다.


.. 아이들을 민주시민으로 키워 내려면 먼저 선생 자신이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 시노다 선생의 눈물은 오열로 바뀌었다. 더 따라 부르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을 더 아름답게, 밝게 살고 싶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 그것만이 행복이며 삶의 보람이다 … “선생 본인이 아이들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다면 결국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거든요.” ..  (120, 212∼213, 219쪽)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사람이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나 사랑을 못 나누는 사람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나눔이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일이란 서로를 꾸밈없이 받아들이며 아낌없이 돌볼 수 있는 매무새입니다. 틀에 가두지 않을 뿐더러 틀에 갇히지 않는 사랑입니다. 좋은 길이니까 어서 오라 부르지만, 좋은 길이니까 억지로 밀어넣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착한 길입니다. 착하지 않으면서 사랑길을 걷지 못합니다. 사랑길을 걷는데 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길은 착하게 일구며 즐기는 어여쁜 내 삶길인 셈입니다.

 사랑하기에 착하고, 착하기에 바릅니다. 바르기에 따뜻하며, 따뜻한 만큼 넉넉합니다. 넉넉한 흐름으로 보드라운 결과 무늬를 아끼고, 보드라이 아낄 줄 알면서 신나게 즐기거나 나눕니다.

 지식을 가르치려는 교과서만 있는 학교라면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고, 지식은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식을 다스리거나 익혀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채 지식을 다스리거나 익힐 때에는 슬픕니다. 사랑하고 살아갈 동무랑 이웃이랑 살붙이를 헤아리면서 다스리거나 익힐 지식입니다. 내 밥그릇을 키우거나 단단히 거머쥐려고 다스리거나 익힐 지식이 아닙니다.


.. 수신 과목이 사라지고 도덕이라는 독립된 학과도 없지만 선생들은 굳이 그런 과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과서였다 … “요즘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는 오늘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부모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훌륭하게 자란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개성이 부족한 아이일수록 시키는 일은 잘합니다 …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 혼자서는 생각할 줄도 모르는 사람, 개성도 없고 신념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모나 선생이 시키는 건 무조건 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아이들은 커서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겁니다.” … 이 사람은 월급 때문에 일하는 선생이 아니다.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선생이 아니다. 교육의 참된 의미를 알기에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안으려고 한다 … 교육을 걱정하는 사와다 선생의 열정은 지금 이 교무실에서는 오히려 고독하게 느껴졌다. 동료 교사들에게서 외떨어져 자기 혼자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다 ..  (118, 227, 327, 330쪽)


 사랑으로 가득한데 돈이 없어 쪼들린다면 퍽 힘들 만합니다. 그래요, 퍽 힘들 테지요. 그렇지만, 힘든 살림살이를 견디거나 버티거나 이기거나 받아들이는 기운은 사랑입니다. 돈이 더 있거나 돈이 넘치기 때문에 즐거운 삶이 되지 않아요. 돈이 더 있거나 돈이 넘칠 때에는 사랑을 잊습니다. 돈에 따라 흐르는 삶이 될 때에는 사랑이란 하찮거나 보잘것없습니다. 말 그대로 돈이 좋은 나날일 테니까요.

 돈이야 벌면 됩니다. 돈이야 얻으면 됩니다. 돈을 생각하기 앞서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난 보금자리에서 누구하고 어떻게 새 하루를 보낼까 하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사랑할 사람이 짊어지거나 느끼거나 품에 안은 여러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한테 가장 모자란 곳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가장 힘들거나 가장 바라는 대목이 무엇인가를 돌아봅니다.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걷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걸어, 내가 걷는 이 길에 무엇이 있고, 내가 걷는 이 길을 따라 어떤 삶이 있는지를 헤아립니다. 찬찬히 찬찬히 등허리를 주무르고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아픈 이한테 도움이가 되고 튼튼한 이한테 길동무가 됩니다.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나부터 믿습니다. 믿고 손을 내밀 수 있게끔 나부터 믿으면서 손을 내밉니다. 믿고 가만히 바라볼 수 있도록 나부터 믿으면서 가만히 바라봅니다. 믿고 이야기할 수 있게끔 나부터 사랑스레 믿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 교사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아이들의 인격이 달라진다. 위험하고도 무서운 이야기다. 그런데 학부모들은 이 같은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만큼 학교와 교사를 믿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게으르기 때문이다 … 현재의 학교 제도에서는 이 아이를 다른 아이들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아이에게 매달리는 것이 선생의 마음이다 … 선생은 사랑이 아이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아이의 변화된 마음이 아이의 행동을 새롭게 이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덕교육이 아닐까 … “그럴까요?” 시노다 선생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 사람은 아이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아이들 마음속에 추함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질투심도, 허영심도, 교활함도 있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느냐, 추함을 발견하느냐 하는 것은 교육자와 비교육자를 구분하는 오직 하나뿐인 근거다 ..  (217, 325, 340, 341∼342쪽)


 저쪽에서 내 뒷통수를 후려갈기는데 내가 얌전히 참을 수 있겠느냐 할 만합니다. 저쪽에서 내 발을 밟고는 아무 거리낌이 없는데 내가 뿔이 안 날 수 있겠느냐 할 만합니다. 저쪽에서 자꾸 딴죽을 걸거나 가로막는데 내가 골이 안 나겠느냐 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면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사랑을 하고 싶으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생각을 하자면 내 몸을 움직여 내 삶을 건사할 노릇입니다.

 가는 말이 곱다지만 오는 말은 안 고울 수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곱지 않은데 오는 말만 곱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어찌 되든 가는 말이 고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는 말이 고울 때에만 가는 말을 곱게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 안 따라 준대서 아이들한테 윽박지르는 사람이라면 교사라 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 말을 잘 안 듣는대서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손찌검하는 사람이라면 어버이라 하기 힘듭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리거나 작거나 아프거나 다친 가슴을 들여다보아야 교사요 어버이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며 차츰 단단해지거나 슬기롭게 거듭나거나 아픔이 여물기를 바라는 마음결로 아이들을 보드라이 어루만져야 할 교사요 어버이예요.


.. 이 그림에는 ‘우’를 주고, 저 그림에는 ‘양’을 준다. 과연 이런 평가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는 작품이 아니다 … 담임선생이라면 이 그림에 점수를 매기기 전에 학생이 행복하지 않은 까닭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학생의 마음을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점수를 매기는 것 따위는 교육이 아니다. 58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구별하는 것은 교육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 시노다 후미코는 50∼60장이 되는 그림을 앞에 두고 어떻게 채점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다. 기계처럼 우열을 정하는 것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채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교는 교사에게 아이들을 채점하라고 명령한다. 교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마음을 ‘우’와 ‘양’으로 구별한다. 월급을 받는 ‘피사용인’의 숙명이다 ..  (185, 187, 191∼192쪽)


 누구한테든 따로 교과서로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에는 굳이 교과서나 교재가 없어도 됩니다. 온누리 모든 사람과 흙과 나무와 바람과 햇볕이 교과서이고 교재이며 책입니다.

 봄날 햇볕은 수우미양가로 나뉘지 않습니다. 겨울날 찬바람은 가양미우수로 가르지 않습니다. 입맞춤을 수우미양가로 살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마음결과 손길과 눈길은 가도 양도 미도 우도 수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스러운 마음결이거나 손길이거나 눈길입니다.

 우리 집 아이는 언제나 우리 집 아이입니다. 우리 학교 아이는 노상 우리 학교 아이입니다. 저마다 고운 아이요, 누구나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하나하나 착한 삶이요, 모두 고마운 목숨입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사랑을 즐기고 사랑을 나눌 씩씩한 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거나 도울 어른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제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를 숫자나 점수로 따지거나 재지 않도록, 오직 사랑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얼싸안도록 이끌거나 도울 어른으로 지내야 합니다.

 지식을 가르칠 어른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치며 삶을 나눌 어른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며 갖출 지식을 아이들 스스로 깨닫도록 보드라이 알려주거나 물려줄 어른입니다. 가르쳐야 한다면 사랑스러운 삶 한 가지입니다. 배워야 한다면 믿음직한 꿈 한 가지입니다.


 (2) 울타리


 울타리가 높은 곳이라면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울타리가 있어야 하느냐 없어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울타리가 높은 곳에서는 숨이 막힙니다.

 멀디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멀디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밥을 먹고 살림을 꾸리며 지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람이 있건 없건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제 삶터를 돌보았습니다. 대한민국·조선·고려·신라·백제·고구려·가야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들이 살았고, 저마다 제 살림살이를 조용히 일구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들은 땅바닥에 금을 긋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땅이고 저기부터는 너희 땅이라고 금을 긋습니다. 그러나 풀·나무·짐승·물·햇볕·바람은 금으로 그어 나눌 수 없습니다. 두루미는 한국에만 살지 않고 일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백두산부터 이어졌다는 멧줄기는 휴전선이 있대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남북녘에만 백두산 멧줄기가 아니라, 중국땅으로도 이어지는 백두산 멧줄기입니다.

 햇볕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똑같이 내리쬡니다. 바닷물은 이곳에서든 저곳에서든 같은 바닷물입니다. 음성군과 진천군 사이, 서울시와 인천시 사이, 제주시와 서귀포시 사이, 길그림책에는 금이 또렷하게 갈린 사이사이에는 무엇이 있으려나요. 벽이나 울타리 하나로 마주한 이웃집하고 우리 집은 사이에 무엇이 있으려나요.


.. 게으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선생이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은 1년 동안 재난을 겪는다. 그 재난이 평생토록 아이들의 인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다 … 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과정이야말로 지식과 사물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 마음의 교류 없이 초등학교 교육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일본의 군대에 도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물론 질서는 있었지요. 강제적이고 계급적인 질서는 있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은 없었습니다.” … “당신은 원래 중학교 선생이잖아요.” “그게 뭐.” “요즘엔 아무리 봐도 선생 같지가 않아요.” … “당신은 진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마음이 없어요. 당신이 말하는 조합은 선생들의 조합 아닌가요? 당신은 이미 선생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위원장이 되겠다고요?” … 이 남자에게는 이기심만 있을 뿐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없다. 애정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견뎌 냈을지도 모른다. 겐이치로는 부정한 마음 같은 것이 있다 ..  (107, 183∼184, 231, 315, 316쪽)


 예나 이제나 정부란 부질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이건 어느 살림집이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여 집안에 쟁여 놓을 때에 즐거운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집식구가 즐거이 밥을 먹고 즐거이 하루하루 맞이하지 못한다면, 엄청나게 쌓은 돈이건 오십만 원 즈음 쌓은 돈이건 똑같이 덧없습니다. 정부가 정책을 잘 꾸린대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정부는 여느 사람들이 보태는 돈으로 먹고사는 무리이지, 정부가 여느 사람들을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이룬 돈으로 길을 닦든 공항을 만들든 군대를 키우든 경찰을 두든 합니다. 여느 사람들이 흙을 일구어 거둔 곡식으로 대통령이 밥을 먹든 군인이 밥을 먹든 공무원이 밥을 먹든 합니다.

 공무원이 없어도 나라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공무원이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없대서 민주주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느 농사꾼이나 여느 노동자가 없을 때에 나라 또한 없어집니다. 여느 농사꾼이나 여느 노동자가 없다면 민주주의란 싹트지 않습니다.

 투표권이 민주주의이지 않습니다. 다수결이든 만장일치이든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나 스스로 일구는 내 살림살이입니다. 내 논밭을 알차게 일구는 삶이 민주주의입니다. 내 보금자리를 깨끗하게 돌보는 삶이 정치입니다.

 지역자치란 마을자치입니다. 지역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는 얘기는 마을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는 얘기입니다. 마을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 할 때에는, 마을 지도자가 있어 슬기롭게 이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집에서 저마다 다 다른 길로 저마다 다 다르게 착하며 사랑스러이 살림을 일군다는 뜻입니다. 지도자이고 공무원이고 정부이고 대통령이고 하나도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대수로운 한 가지라면, 나 스스로 내 살림을 얼마나 알차고 아름다이 일구면서 내 하루를 사랑하느냐입니다. 내 집이 평화요 평등이요 통일이요 민주요 꿈이면 됩니다.


.. 가난한 집 아이를 위해 나라에서 대신 교과서를 사 주겠다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교과서를 사 줬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 마음 놓고 교과서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국가는 의무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 “초등학교에서는 야간 수업이 허용되지 않아요.” “정식으로 허용되지 않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는 아이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졸업장은 못 받아요.” 교장이 다시 말했다. “졸업장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배울 기회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어른으로 자라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졸업장은 받지 못해도 그 아이에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와다 선생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 “방금 이치조 선생님은 장기 결석자는 우리 같은 평교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문부성이 해결해 줄까요.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요. 규칙이나 제도만 만들어 낼 뿐이에요. 예산은 어디에도 없어요.” ..  (172, 331, 334쪽)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하지만, 오늘날 교육이란 교육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육이란 오직 졸업장 따기입니다. 졸업장을 딸 때에 시험성적이 잘 나온 성적표를 받아쥘 졸업장 따기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학교 가운데 ‘사랑이 숨쉬는 어린이’를 ‘착하고 해맑으며 싱그러이’ 이끌어 ‘아름다우면서 올바른 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돕겠다고 하는 데는 없습니다. 허울이야 교육이지, 모두 아이들을 틀에 박힌 기계처럼 다루거나 내몰기만 합니다. 수없이 많은 지식조각을 아이들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에 집어넣기만 하는 학교이고 교육인 오늘날입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좋으며 즐거울까요. 어른들은 무엇을 가르쳐야 좋으며 즐거울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자라야 기쁘며 반가울까요.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무엇을 보여주며 살아야 기쁘며 반가울까요.

 즐거움이나 기쁨은 성적표도 졸업장도 교육도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아닙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은 내 삶입니다. 참다이 교사 노릇을 하겠다는 이라면, 아이들이 하나하나 맑게 생각하고 밝게 뛰놀면서 제 결과 무늬를 찾도록 지켜보거나 거드는 길동무 노릇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옳게 어버이 노릇을 하려는 이라면, 아이가 늘 웃고 떠들면서 작은 몸뚱이에 튼튼한 힘살이 붙도록 따순 밥을 먹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도록 힘쓰는 살림꾼 노릇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제도권학교도 대안학교도 교육이 아닙니다. 모두 울타리입니다. 참다이 배움터 구실을 하자면 참다이 삶터 구실을 해야 합니다.


.. 굳이 말한다면 사회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아이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 걸까 …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학문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쳐 본들 과연 몇 명이나 그 핵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 네안데르탈인이라든가, 쥐라기, 숭문토기 같은 고고학적인 전문 용어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외울 뿐이다 … 구체적인 지식을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중학교 입학시험에서는 구체적인 지식만 알아본다. 얼마나 많이 외우고 있는지가 당락을 결정한다 … 아이에게 구도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조화로운 색채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것은 예술 교육의 일부다. 그러나 도베 유조가 그린 불이 난 그림이나 와다 고스케가 그린 불길한 자화상은 예술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아이들의 마음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비극이다. 그 비극이 여과 없이 표현된 한 편의 슬픈 시다. 이것은 아이들의 하소연이며 고백이다 ..  (149∼150, 190∼191쪽)


 돈을 벌자면서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돈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돈을 벌자면서 쓴 글이란 문학이 아닙니다. 돈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었으면서 예술이라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돌이킨다면, 돈을 벌자면서 썼기에 문학인지 모릅니다. 돈이 되도록 그리거나 찍었기에 예술인지 모릅니다. 살아가며 내 웃음과 내 눈물을 담아서 쓰는 글과 그리는 그림과 찍는 사진은 ‘문학도 문화도 예술도 아닙’니다. 그예 내 삶입니다.

 삶이 될 때에 비로소 글이라 하고 그림이라 하며 사진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삶이 되지 않고 돈이 되거나 힘(권력)이 되거나 이름값(명예)이 된다면 모조리 ‘문학·문화·예술’이라는 허울(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으랴 싶어요.

 삶이 될 때에 시나브로 배움이거나 가르침입니다. 곧, 삶이 되지 않고 돈이 되거나 힘이 되거나 이름값이 되도록 이끈다면 한낱 ‘교육’이 될 뿐입니다. 어느 교사이고 어버이이고, 아이들이 돈을 더 잘 벌도록 가르칠 수 없습니다. 돈을 더 잘 벌 일자리를 찾도록 아이들을 내모는 사람이라면 교사도 아니요 어버이도 아닙니다. 돈을 잘 벌 만한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성적표를 손에 쥐도록 닦달하는 사람은 교사일 수 없고 어버이일 수 없습니다. 교사나 어버이라 한다면, 교사와 어버이부터 사랑스레 살아가면서 아이들 누구나 사랑스레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단 한 번도 정기 승진이 실시되지 않았다. 교사는 권리마저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 치과 의사는 교사가 성직이라고 했다. 성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두고 교사의 권리를 무시한 채 완벽한 교육만 요구한다. 비좁은 교실에 정원 50명을 훨씬 웃도는 60명 가까운 아이들이 어깨를 맞댄 채 앉아 있다. 운동 장비도, 과학 교재도, 시청각교육에 필요한 설비도, 도서관도 제대로 갖춰 놓지 못하고 있다 … 이렇게 모인 교사들의 모습은 박봉에 시달리는 노동자일 뿐이었다. 더구나 여교사는 더 어둡고 초라해 보였다. 기업이나 관공서의 여직원들과 견주면 복장은 형편없었다. 머리 모습에도, 비옷에도, 신발에도 가난이 흠뻑 배어 있었다. 바로 그 여성들이 도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일본의 의무교육은 가난한 청년과 가난한 여성들이 유지해 왔다 … 교사라는 직업의 성격을 따지기 전에 그들은 분명 노동자였다. 노동자가 아닌 존재로 취급받을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선생들은 공장 노동자보다 더 무거운 마음의 부담을 강제로 짊어지고 세상의 비판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  (382, 396∼397쪽)


 착하게 살아가며 착한 마음밭을 함께 나눌 어른과 어린이입니다. 사랑스레 지내며 사랑스러운 마음자리를 서로 나눌 교사와 학생입니다. 믿음직하게 어깨동무하며 믿음직한 마음씨를 같이 맞잡을 어버이와 아이입니다.

 사람이 되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은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돈이 되거나 이름값이 되거나 힘이 되는 길 또한 하나입니다. 교육입니다.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람답게 이끌고 싶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을 바란다면 교육을 할 노릇입니다.

 내 삶을 바탕으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바라보며 껴안을 때에는 사랑입니다. 교과서와 교재에 따라 성적표를 마련하고 시험을 치르려 하면 교육입니다.

 콩 세 알을 심어 한 알은 사람이 먹고 한 알은 짐승이 먹으며 또 한 알은 어찌저찌 흙으로 돌아간다면 사랑이고 삶입니다. 콩 세 알 모두 사람만 홀로 차지하며 먹으려 한다면 교육입니다. 종이 한 장을 맞들 때에 삶이고, 종이를 똑바로 들라고 시킬 때에 정치입니다.


 (3) 삶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야기책 《인간의 벽》 1권을 읽습니다. 《인간의 벽》 1권에는 “거대한 슬픔”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습니다. 큰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몹시 슬프다는 소리입니다.

 무엇이 그리도 슬프기에 사람들이 울타리를 높직하게 쌓을까요. 아니, 사람들은 어이하여 울타리를 높직하게 쌓고, 이렇게 높직하게 쌓은 울타리는 왜 사람들을 슬프게 할까요.


.. 그 어린 마음을 겪어 보는 기쁨은 저학년을 담당하는 선생만이 느낄 수 있다 … 아이들은 애정에 민감하다. 누군가 자신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아주 기뻐한다 … 한마디뿐인 선생의 짧은 말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  (12, 154쪽)


 사람이 스스로 쌓은 울타리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가며 이루는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니, 사람으로 태어난 고마운 목숨을 참말 고맙게 여기면서 사랑을 나누어야 그야말로 사람일 텐데요.

 어린이도 어른도 사랑이 가장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학생도 교사도 사랑일 때에 가장 힘이 나고 아름답습니다. 아이도 어버이도 사랑으로 마주할 때에 애틋한 꿈결을 누립니다.

 가난한 아이들한테 장학금을 주어도 아이들은 활짝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한테 장학금 아닌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자리라면 아이들은 언제나 스스럼없이 활짝 웃습니다.


.. 힘 앞에는 도리가 없다는 논리가 지난 1000년 동안 일본 사회를 지배해 왔다 … 윗사람이라는 계급의식이 부모들의 마음속에서 쉽사리 사라질 리 없다. 도쿠가와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감정이다 ..  (166, 220쪽)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하지만,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며 나눌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고이 보듬고자 하는 꿈을 담은 이야기책 《인간의 벽》은 조곤조곤 속삭입니다. 서로서로 어떻게 태어난 목숨이고, 서로서로 어떻게 자라는 목숨이며, 서로서로 어떻게 부대끼는 목숨인가를 살몃살몃 들려줍니다.

 주의주장이나 강요나 교육이나 이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인간의 벽》입니다.

 참배움을 나누려는 교사한테 길잡이가 될 만한 《인간의 벽》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야기를 펼치는 《인간의 벽》입니다.


.. 시노다 선생은 목 언저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으로 모래밭 위에 서 있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바닷가 동굴에 사람이 살고 있다 … 가나야마에게 과연 학교가 필요할까. 학교보다 생활이 먼저가 아닐까. 학교보다 생활이 먼저인 아이를 억지로 학교에 데려가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아버지와 아들을 마주하자 시노다 선생은 가슴이 쓰려 왔다. 이토록 가난이라는 것이 지독할 줄은 몰랐다. 이 가정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것이라고는 건강뿐이다. 오직 건강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다 … 아키오는 아마 학교에 오지 않을 테다. 공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만 할 수 있다. 가난한 아키오에게 공부는 사치품일 뿐이다 ..  (353, 355, 357쪽)


 모든 교사는 어른입니다. 모든 어버이는 어른입니다. 모든 학생과 어린이(와 푸름이)는 아이입니다. 어른 앞에 선 아이요, 아이 앞에 선 어른입니다.

 물지게를 지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밥숟깔을 뜨면서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아기를 업고 논둑길을 걸으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아 나무가 부러지거나 풀이 뽑히곤 합니다. 그런데, 나무가 부러지건 풀이 뽑히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싹이 돋아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새로운 풀이 돋습니다.

 지구별에서 숲이 모조리 사라질는지 모릅니다. 지구별에서 숲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사람뿐 아니라 모든 짐승이나 목숨이 나란히 사라지겠지요. 지구별은 숨을 거둘 수 있고, 지구별은 모든 생채기를 천천히 삭이거나 씻으며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비가 오기에 흙땅에 골이 패여 냇물이 흐릅니다. 바람이 불기에 모래바람이 날리고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햇볕이 내리쬐기에 새싹이 기운을 얻어 한결 푸른 빛깔을 뽐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받는 사랑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자랍니다. 사랑과 함께 지식을 받아들이면 사랑과 함께 받아들인 지식을 예쁘게 나누겠지요. 사랑은 없이 지식만 맞아들이면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홀로 쇠밥그릇을 챙기겠지요.


.. “부모 세대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아니잖아요. 부모 세대와 다르게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우려고 고생하는 거잖아요.” … 획일적인 의무교육은 이 아이에게도 영어를 가르치고,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고, 대수와 기하학을 가르칠 것이다. 미술 수업은 일 주일에 한 시간 정도. 아사이 요시오는 자신에게 없는 재능 때문에 절망해야 한다. 자신이 타고난 재능은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다. 표현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모든 어린이는 개성과 능력에 따라 교육되며” 하고 어린이헌장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의무교육은 모든 아이를 똑같이 교육한다. 아사이 요시오는 의무교육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의무교육을 마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열등의식만 자랄 뿐이다. 사회에 들어서기도 전에 패배자라는 절망을 맛본다 … 결국 아이를 만드는 것은 교과서가 아니다. 교사도 아니다. 친구도 아니다. 가정이다. 교육의 기본은 부모다. 교사는 다만 도와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자녀 교육의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만큼 부모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  (143, 241, 261쪽)


 모든 고추포기가 똑같은 크기 똑같은 숫자 똑같은 부피로 고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모든 볍씨가 똑같은 키 똑같은 알맹이 똑같은 굵기로 벼 열매를 맺지 않아요. 봉숭아 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봉숭아는 모두 다릅니다. 돼지 한 마리가 낳는 새끼이든 고양이 한 마리가 낳는 새끼이든 다 다른 생김새이고 다 다른 모습이며 다 다른 삶이자 목숨입니다.

 스무 아이라 하든 예순 아이라 하든, 줄을 착착 맞추어 책상 앞에 앉았다 하더라도 다 다른 아이자 삶이자 목숨이자 사랑입니다. 다 다른 아이를 다 똑같은 책걸상에 앉히고 다 똑같은 급식을 먹이며 다 똑같은 교과서로 다 똑같은 교대 수업을 받은 교사한테서 다 똑같은 지식을 머리속에 담도록 하는 학교란, 말 그대로 학교가 되어 아이들한테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쥐어 줍니다. 이 졸업장이나 자격증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도록 하느냐 하고 가르는 잣대가 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고, 열 손가락 모두 다 다른 크기와 생김새로 다 다른 노릇을 합니다. 호미를 쥐든 자판을 두들기든 젓가락을 쥐든 사랑하는 사람을 쓰다듬든, 다섯 손가락 더하기 다섯 손가락은 모두 다른 구실을 합니다.

 이야기책 《인간의 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자리에서 모두 다른 삶을 꾸립니다. 누군가는 사랑과 믿음으로 웃음과 눈물을 아끼려 합니다. 누군가는 돈과 이름과 힘으로 더 큰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지식으로 울타리를 쌓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기쁘고, 사랑이 없기에 슬픕니다. 사랑받는 보람을 느끼기에 예쁘며, 사랑받는 고마움을 모르기에 가엾습니다. (4344.4.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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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책인가 봅니다, 제게 참 좋은 리뷰고요~
여러가지 말들에 아침부터 가슴 뭉클합니다.

그중 오늘 아침은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나부터 믿습니다.'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구요~^^

숲노래 2011-04-28 12:09   좋아요 0 | URL
'츠보이 사카에'라는 분이 쓴 교육소설과 함께 이시카와 다쓰조 님 교육소설은 '교육 고전'일 뿐 아니라, 무척 훌륭한 '문학'이기도 해요. 우리 나라에서 교사와 부모들이 이러한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곰곰이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을 찾아보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나는 닭 생생 푸른 교과서 6
장-클로드 페리케 지음, 얀 르브리 외 그림, 최인령 옮김 / 청어람주니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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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부터 모르는 ‘닭고기’ 이야기
 [책읽기 삶읽기 54] 장 클로드 페리케·얀 르브리·장 올리비에 에롱, 《나는 닭》(청어람주니어,2008)



 꽤 예전부터 어른책보다 어린이책이 더 많이 나옵니다. 어른책만 내던 적잖은 출판사들은 어린이책을 함께 내는 틀로 바꾸곤 했으며, 어린이책을 내는 출판사를 따로 새끼회사로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한테 읽힐 마땅한 책이 없다며 아쉽게 여기거나 안타까이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이들한테 읽힐 책이 대단히 많은 나머지 추리거나 가리거나 솎거나 골라야 합니다. 좋다고 할 만한 책을 추려서 책이름과 간기와 겉그림만 단출히 그러모은 ‘권장도서목록’만 하더라도 두툼한 책 하나가 될 만큼 이 나라 책마을은 달라졌습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해마다 새로 나오는 책이 대단히 많습니다. 어린이책은 어른책보다 훨씬 많이 나옵니다만, 어린이책이든 어른책이든 새로 나오는 책이 퍽 많습니다. 한 해만 지나도 여러 갈래 여러 이야기를 파고드는 여러 가지 책이 새로 태어납니다. 지난날에는 한 권조차 없던 이야기가 이제는 여러 권 되기도 하고, 지난날에는 아무도 다루지 않던 이야기를 오늘날에는 퍽 자주 다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른책에서 깊이 있게 살피거나 돌아보는 책은 차츰 줄어든다고 느낍니다. 어린이책에서 깊이 있게 살피거나 돌아보는 책을 한결 찬찬히 헤아리거나 곱씹는 어른책이 좀처럼 못 나오는구나 싶습니다.


.. 시대가 바뀌면서 다른 모습의 닭들이 생겨났어. 농부들이 좋은 닭만 골라 키웠기 때문이야. 유럽 사람들은 작은 닭만 보다가, 19세기 중반 아시아에서 건너온 큰 닭을 보고 감탄했어. 곧 유럽의 닭과 아시아의 닭을 교배해서 종자 개량에 들어갔지 … 오늘날에는 알을 얻기 위한 닭과 고기를 얻기 위한 닭을 분리해서 사육해. 알을 더 잘 낳거나, 살이 더 많이 찌도록 품종을 개량했거든 … 고기를 얻기 위한 닭의 사육시설에는 물통, 먹이통, 그리고 배설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해. 하지만 그 수가 하도 많아서 한 마리당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이 책을 펼친 크기 정도야. 게다가 닭들이 서로 물어뜯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리의 끝을 잘라 버려. 야외에서 기르는 닭도 부리를 잘라 버릴 때가 있어. 사육기간은 다양한데, 표준 닭은 35일 내지 40일째에 목표 무게인 2킬로그램에 도달해. 때로는 너무 빨리 성장해서, 약한 발로 몸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어 ..  (12, 34, 36쪽)


 《나는 닭》이라는 이야기책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어린이책으로 나온 《나는 닭》이라는 이야기책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닭 한삶을 헤아리는 데에 길잡이가 될 만큼 잘 빚은 알찬 책’이라 할 만합니다. 어린이들은 이 책 하나로 닭 한삶을 차근차근 짚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른책으로 ‘닭 한삶’을 알뜰히 다룬 이야기책으로는 무엇이 있다 할 만할까요. 아니, 어른들은 닭 한삶을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돌아보거나 생각하는 일이 있기나 하는지요. 닭고기를 밥으로도 먹고 술안주로도 먹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닭고기를 사 주는 어른들은, 닭튀김이니 백숙이니 닭곰탕이니 닭꼬치이니 훈제이니 숯불구이니 하면서 즐기는 어른들은, 흔히 값싸게 먹는 닭 한 마리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가게에 들어오는지를 알기는 할까요.


.. 병아리는 6개월이면 어른 닭이 돼. 그때부터 수평아리는 수탉, 암평아리는 암탉이 되어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아 … 암탉은 하루에 몇 번씩 알을 굴려서 골고루 따뜻하게 해 줘. 하루 종일 끈기 있게 알을 품고 있다가, 한 번씩 둥지에서 나와 먹이나 물을 먹고 배설을 해 … 닭을 비롯한 꿩과의 새들은 날기보다는 땅에서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고, 땅바닥에서 먹이를 찾아. 닭은 아직 이런 습성이 남아 있어서 흙만 보면 단단한 발가락으로 땅을 헤치며 먹이를 찾곤 해. 닭은 흙이나 모래 목욕을 즐기는데, 먼저 땅을 파 모래나 흙이 깃털 속으로 들어가게 해. 그런 뒤에 푸다닥 털면 피부와 깃털 속에 있던 기생충이나 불결한 것들이 함께 떨어져서 깨끗하게 돼 ..  (29, 33, 66쪽)


 예나 이제나 학교에서는 ‘달걀이 몇 일이 지나야 깨어나는가’를 배웁니다. 앎조각으로 배웁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떠올리는 사람이 있으나, 나이가 들어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닭》이라는 책에도 나오지만, 달걀이 깨려면 세이레가 걸립니다. 스물하루가 걸려요.

 《나는 닭》이라는 책에는 ‘사람들이 먹는 고기가 되는 닭’을 며칠 만에 길러내는지도 밝힙니다. “표준 닭은 35일 내지 40일째에 목표 무게인 2킬로그램에 도달해” 하고 들려줍니다. 여기에, 병아리가 어른 닭으로 ‘자연스럽게 자라기’까지는 얼마쯤 걸리는 지도 알려줘요. 여섯 달이 걸린다고도 알려줍니다.

 한국사람은 항생제와 촉진제를 써서 서른닷새보다 더 빨리 고기닭을 만들곤 합니다. 한국사람은 고기닭 한 마리를 아주 값싸게 팔기도 합니다. 아예 다 익혀서 그냥 돈만 내면 값싸게 사먹을 수 있는 닭을 이름난 큰 회사에서 널리널리 팔곤 합니다. 2011년 3월까지 한국에 있는 ‘닭고기 체인점’이 만육천 곳이 넘는다 하는데, 동네에서 조그맣게 하는 곳까지 치면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들 닭고기집에서 다루는 닭고기란 한 가게에서 한 마리만 팔아도 날마다 만육천 마리는 가볍게 넘겠지요.

 나라안에 손꼽히는 닭고기회사는 하루에 삼십만 마리이니 사십만 마리이니를 고기닭으로 다룬다고 합니다. 하루에 삼십만 마리를 다루는 닭고기회사가 세 곳이라면 날마다 백만 마리를 웃도는 닭이 고기가 된다는 소리이고, 날마다 백만 마리가 넘는 병아리가 새로 태어나 닭우리에서 자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닭이란, 사람한테 잡아먹히도록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태어나서 어마어마하게 많이 죽어야 하는 목숨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먹는 달걀은 닭고기보다 훨씬 많겠지요. 한국에서는 하루에 달걀이 몇 알쯤 사람들 입으로 들어갈까요.


.. 시골에서 암탉은 매우 소중해.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달걀을 낳아 주거든. 달걀을 낳지 못하면 닭을 요리해 먹을 수 있어 ..  (13쪽)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집에서 닭을 칠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닭을 칠 만한 널따란 마당을 마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트 툇마루에 닭장을 두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원하며 어여쁜 꽃밭은 마련할 테지만 닭우리를 두거나 닭을 풀밭에 풀어서 키우는 도시사람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기만 하지 않던 지난날에는, 시골집 어디에서나 닭을 풀어서 키웠고, 달걀을 때때로 고맙게 얻어서 먹었으며, 닭고기는 더욱 고맙게 여기며 잡아서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고부터는 닭을 치는 사람은 더 돈을 벌고자 더 좁은 우리에 더 많은 닭을 집어넣고 더 빨리 길러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적은 돈으로 더 큰 닭을 더 맛나게 먹고픈 꿈을 키우며 돈만 치릅니다. 닭 한 마리 어떻게 자라거나 죽는가를 아는 도시사람은 몹시 드물어요.


.. 집약적 사육장에서는 닭의 사료에 항생제를 첨가해. 항생제를 먹인 닭은 많이 먹지 않아도 살이 빨리 찌거든. 그러나 항생제는 세균의 저항력을 키워서, 항생제에도 죽지 않는 슈퍼박테리아가 생겨나게 할 위험이 있어 ..  (40쪽)


 아이들은 《나는 닭》을 읽으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곱씹어 봅니다. 닭은 어떤 짐승이고, 닭과 사람은 서로 어떤 역사를 이었으며, 더 크고 맛있다는 고기닭을 만들려고 사람들이 어떻게 ‘품종 개량’을 했는가를 알 수 있을까요. 고기닭을 만든다며 항생제를 쓴다는 대목이 한 줄 깃들기는 하지만, 정작 닭우리에서 어떤 항생제를 쓰고, 이 항생제 성분이 무엇이며, 이 항생제가 사람몸에 어떻게 파고드는지는 한 줄이건 한 낱말이건 다루지 못합니다. 고기닭한테든 고기소한테든 고기돼지한테든 먹이는 항생제를 알려면 《항생제 중독》(시금치,2005) 같은 책을 따로 사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고기짐승한테 먹인다는 항생제 이야기를 다루는 어린이책은 아직 따로 없구나 싶습니다. 항생제 이야기를 살뜰히 다루는 어른책 또한 몇 없습니다. 어른들부터 너무 바쁜 나머지 항생제를 쓰건 말건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아이들 또한 어른 못지않게 너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이 책 저 책 지식쌓기 하려고 읽기는 하지만, 아이 스스로 제 삶으로 삭이기까지 차근차근 톺아보기란 몹시 힘듭니다.

 이야기책 《나는 닭》은 어른들부터 모르는 닭고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이러한 이야기책은 어른책으로 읽기보다 어린이책으로 함께 읽어야 ‘어른 스스로 이 나라와 사회 흐름을 읽을’ 수 있다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한결 쉬운 말과 더 차근차근 풀어낸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책이야말로,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이 함께 즐기면서 배울 이야기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더 생각합니다. 이야기책은 이야기책으로 그치는 책일 수 없습니다. 책을 읽으며 새기는 이야기는 앎조각이 아닌 삶으로 녹이도록 되새길 때에 뜻과 보람이 있습니다. 앎조각만 쌓으려 한다면 앎조각을 더 많이 쌓은 사람이 더 훌륭하거나 좋은 사람이 되겠지요. 삶으로 녹이도록 되새기며 살아가려 한다면, 책을 한 권만 읽었든 백 권을 읽었든 만 권을 읽었든, 나 스스로 착하며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착하며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테지요.

 책을 읽는다고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사람이 똑똑합니다. 집에서 닭을 치는 사람이라면 굳이 《나는 닭》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4344.4.25.달.ㅎㄲㅅㄱ)


― 나는 닭 (장 클로드 페리케 글,얀 르브리·장 올리비에 에롱 그림,최인령 옮김,청어람주니어 펴냄,2008.7.2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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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일공일삼 6
페터 헤르틀링 지음, 페터 크노르 그림, 박양규 옮김 / 비룡소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으로 오롯이 우뚝 서기
 [푸른책과 함께 살기 69] 페터 헤르틀링, 《할머니》(비룡소,1999)



- 책이름 : 할머니
- 글 : 페터 헤르틀링
- 옮긴이 : 박양규
- 펴낸곳 : 비룡소 (1999.3.10.)
- 책값 : 6500원



 (1) 집식구로 살아가는 나날


 집에서 둘째를 낳으면 내 나이 마흔이 될 무렵 이 아이가 네 살이 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첫째가 올해에 네 살이니, 첫째는 세 해 뒤에 일곱 살이 되겠지요. 일곱 살이 될 첫째는 집일을 얼마나 도우면서 제 어버이 어깨짐을 덜 수 있을까 어림합니다. 아이가 어버이 몫을 떠맡는 짐꾼이나 심부름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집일을 찬찬히 거들지 못한다면 어버이로서 몹시 고단하거나 힘들밖에 없겠다고 느낍니다. 나이를 먹는 일, 나이를 먹으며 몸을 쓰는 일, 나이를 먹으며 아이와 부대끼는 일을 새삼스레 뒤돌아봅니다.

 여느 아버지들은 집일을 잘 모릅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앞날까지도 이 나라 여느 아버지들은 집일을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님 같은 사람들 말고, 땅을 일구며 조그맣게 조용히 살아가던 여느 살림집 아버지들은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짚을 얹은 작은 흙집에서 온식구 복닥이며 지내던 곳에서 여느 아버지는 집일을 얼마나 돌보거나 알거나 챙겼을는지 궁금합니다. 예나 이제나 아버지들은 모든 집일을 그저 어머니한테만 맡기면서 바깥일만 했을는지 궁금합니다.

 집식구가 걱정없이 지내거나 느긋하게 지내거나 즐겁게 지내자면 집일을 잘 다스리고 집살림을 잘 꾸려야 합니다. 일과 살림을 알뜰히 북돋아야 합니다. 밥은 밥대로 챙기고 옷은 옷대로 건사하며 집은 집대로 돌봐야 합니다. 사람이 집안을 이루며 살아갈 때에는, 무엇보다 밥·옷·집을 옳게 거느려야 합니다.

 돈을 번대서 집일을 하거나 집살림을 하는 삶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일은 그저 돈벌이입니다. 돈을 벌기에 집일이나 집살림을 어느 한 사람한테 떠넘기는 일은 집식구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로지 돈벌이에만 마음을 쏟는 나머지, 정작 돈을 버는 까닭과 뜻을 잃는 슬픈 모습이에요.

 안타깝게도 참으로 많은 아버지들이 돈벌이에만 매달리며 막상 집일과 집살림에 등돌리거나 잊습니다. 아버지가 되는 날까지 아들을 키운 어버이들 또한 사내아이한테 집일과 집살림을 옳게 물려주거나 가르치지 못한 탓도 있을 테지만, 사내아이 스스로 집일과 집살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받아들이거나 배우려 하지 못한 탓도 큽니다.


.. 할머니는 돈이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당신의 몇 푼 안 되는 연금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가끔 불평을 했다. 그러나 사실 할머니는 불평하기보다 언제나 즐겁게 사는 편이다 … (칼레 어머니와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함께 돌아가시자) 할머니만은 그러지 않았다. 금세 눈물을 거둔 할머니는 칼레가 없는 사이 삼촌들과 숙모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어쩔 거냐? 살아 나가야지. 어쨌든 살아야 해. 칼레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같이 살면 돼. 삼촌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연세에요! 그러자 할머니가 그 삼촌을 비웃으면서 호통을 쳤다. 그럼 네가 칼레를 키울 거냐?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도 마라! … 관심 없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옷값이 그렇게 비싸니 내가 어떻게 테니스를 칠 수 있겠니? ..  (7, 10∼11, 78쪽)


 남자와 여자, 또는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이루는 사랑이란 서로를 깊고 넓게 헤아리면서 따사로이 보듬는 일입니다. 보드라운 살결을 쪼물딱쪼물딱한대서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기울이고 마음을 쓰며 마음을 쏟을 때에 사랑이 피어납니다.

 첫눈에 반하는 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첫눈에 얼굴이나 겉모습이나 느낌이나 생김새에 반한’ 일일 뿐입니다. 첫눈에 반한 뒤로 사랑이 싹틀 수 있으나, 첫눈에 반했대서 착하거나 참다운 사랑으로 흐르지는 않아요.

 슬픈 노릇이지만, 오늘날 퍽 많은 사람들이 착하거나 참다운 사랑에 따라 짝을 찾거나 사귀지 못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한 집안을 이루어 제금나거나 새 보금자리를 꾸린다면서 집일이나 집살림을 어떻게 건사해야 좋으냐를 놓치거나 아예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집일만 알거나 집일을 조금 거든대서 집살림이 되지는 않는데, 그나마 집일에조차 손을 놓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스스로 삶을 일구지 못하고, 내 손으로 삶을 가다듬지 못하며, 서로서로 삶을 북돋우지 못하는 셈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쌓는 시험기계로 클 노릇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만큼 사람값을 하도록 삶을 깨닫고 살림을 배우며 집일을 거드는 튼튼한 어른으로 클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무나 양파를 썰 줄 모르면서, 김치를 썰 줄 모르면서, 파나 마늘을 다질 줄 모르면서, 감자나 당근을 갈 줄 모르면서, 미역국이나 된장국 하나 끓일 줄 모르면서, 죽이나 밥을 할 줄 모르면서, 볶음이나 조림을 할 줄 모르면서, 학교에서 시험성적 잘 받으면 무슨 보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걸레를 빨아 집안을 치울 때에 일을 거들 뿐 아니라, 제 잠자리는 제 손으로 치우고 깔며, 제 옷가지는 어버이 손에 맡길 노릇이 아니라 저 스스로 빨고 개어 건사할 줄 알아야 씩씩한 푸름이가 되고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 칼레가 할머니를 도우려고 물건을 하나하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가게 주인들은 화를 냈다. 더러운 손으로 오이를 자꾸 만지지 말아라. 그러면 할머니는 점잖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저 오이를 칼레 손만큼 자주 씻어 주었나요? 할머니는 이렇게 멋진 유머를 할 줄 알았고, 그 점이 칼레 마음에 쏙 들었다 … 칼레는 할머니가 부모님보다 가난하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만약 네 고아 연금을 받게 된다면 형편이 조금 나아질 텐데. 공무원들이 일처리에 늑장을 부리니 말이야. 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 생각은 통 안 한다니까… (복지과 아동 상담원이) 두 달에 한 번씩 찾아오고 싶고,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돕고 싶다고도 했다. 할머니는 조금 화가 풀려 친절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지금까지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러기엔 이젠 너무 늦었어요. 칼레도 이제 미운 일곱 살이 아니니 괞찮아질 거요 ..  (19, 21, 68∼69쪽)


 아이들은 ‘좋다 하는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부터 ‘좋다 하는 책’을 가까이할 수 있으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한테 좋다 하는 책을 읽히려는 어버이라면 어버이부터 좋다 하는 책을 가까이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가 받아들이거나 받아먹을 좋은 마음밥이라면 어버이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이 나란히 먼저 받아들이거나 함께 받아먹을 일이라고 느껴요.

 좋다 하는 책을 아이한테 쥐어 주거나 읽어 주는 어른이라면, 좋다 하는 책이 왜 좋은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하는 책은 ‘이 책에 담긴 알맹이를 쓰거나 그리거나 엮거나 일군 사람’부터 스스로 좋다 할 만한 삶을 일구어야 태어납니다. 좋다 할 만한 삶에서 좋다 할 만한 앎이요, 좋다 할 만한 앎을 좋다 할 만한 넋과 좋다 할 만한 손길로 보듬어 좋다 할 만한 이야기로 빚습니다. 좋다 할 만한 이야기를 좋다 할 만한 땀방울을 들여 좋다 할 만한 책으로 엮어 내놓습니다.

 좋다 할 만한 책이라면, 이러한 책을 장만해서 즐기려는 사람들 또한 좋다 할 만한 삶을 꿈꾸면서 스스로 좋다 할 만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좋다 할 만한 사람으로 살 때에 ‘좋다 할 만한 이야기’를 좋다 할 만한 넋으로 아로새기면서 나부터 좋다 할 만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한편, 내 아이와 이웃 아이한테 좋다 할 만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책은 지식으로 머리속에 가둘 수 없어요. 책은 오직 내 삶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 전쟁이 끝나기 직전, (칼레 아버지는) 공군 보조병으로 전선에 불려 갔지. 그러곤 폭탄을 터뜨려야만 했어. 그토록 어린 아이들이 대포를 쏘아야 했다니! 야, 재미있었겠다. 칼레가 불쑥 말했다. 재미라고? 너희들은 장난감 총을 들고 전쟁놀이를 하기 때문에 진짜 전쟁이 재미있겠다고 하는 거냐? 그래도 진짜 전쟁을 좋아하는 아이는 없을걸. 전쟁이 나면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지니까 ..  (35∼36쪽)


 아이한테는 돈을 더 물려주다고 해서 사랑이 싹트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사랑을 물려주어야 사랑이 싹틉니다.

 고운 옆지기한테도 돈을 더 벌어 준대서 사랑이 싹트지 않습니다. 돈을 더 벌어 주면 돈이 싹틉니다. 사랑이 싹트자면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돈이 없거나 모자란 살림살이라 하지만 알콩달콩 오순도순 복닥복닥 재미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을 못 물려주’지만 ‘사랑을 아낌없이 물려주’는 삶이에요. 돈이 많거나 넉넉한 살림살이라 하지만 따분하고 메마르며 썰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은 실컷 물려주’지만 ‘사랑은 조금도 못 물려주’는 삶이겠지요.

 돈이 넉넉해서 예쁜 옷도 입고 자가용도 몰며 맛나다는 밥을 마음껏 사다 먹는다 해서 아이나 어른이 모두 즐거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돈이 늘 쪼들려 바깥밥은 엄두를 못 내고 밥상 반찬 가짓수 또한 몇 안 된다지만 밥상머리에서 실컷 이야기꽃을 피운다면 아이나 어른이나 나란히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서로서로 집식구로 사랑할 노릇이에요. 다 함께 집식구로 집일을 거들어야지요. 나란히 어깨동무하면서 집살림을 알뜰히 꾸리는 나날입니다.


 (2) 할머니와 살아가는 아이


 이야기책 《할머니》(비룡소,1999)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할머니》라는 이야기책에는 할머니 한 사람과 어린이 한 사람이 나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잃은 ‘칼레’라는 어린이는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다른 피붙이들은 칼레라는 어린이를 건사하려는 마음이라기보다 칼레라는 짐덩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를 놓고 걱정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도 있고 몸도 있기에, 어린아이 하나를 내내 돌보며 건사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할머니한테는 돈이나 몸(체력·건강)은 없어도 마음(사랑·믿음)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당신한테 없는 돈이나 몸으로 아이를 맡아서 돌보려 하지는 않습니다. 당신한테 알뜰히 있는 마음으로 아이를 아끼며 보살피고 싶습니다.


.. 할머니는 학교 들어가기 전에 칼레를 다시 유치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우리 둘이 집에서 서로 적응하는 편이 더 낫다. 칼레는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곧 괜찮아졌다. 할머니와 함께 하루를 보내노라면 항상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 칼레는 할머니가 옛날얘기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이십 년 전, 혹은 사십 년 전에 겪은 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처음 기차를 탔을 때나 결혼식 때 어떤 옷을 입었는지, 잔치 음식으로 무엇이 나왔는지도 훤히 알고 있다 … 할머니는 이미 본 옛날 영화들은 꼭 다시 보려고 한다 ..  (17∼18, 34, 104쪽)


 할머니는 아이한테 책을 읽어 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아이한테 책을 사 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아이한테 자가용을 태워 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아이한테 자전거를 사 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오로지 이야기꽃만 피울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늘 당신 몸으로 ‘살림하며 꾸리는 삶’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노상 당신 손으로 빚은 밥을 차려서 내놓고, 당신 손으로 아이 옷을 빨아서 입힙니다.

 아이는 이제 처음으로 ‘돈이 아닌 사랑’으로 이루어진 ‘무언가 다른 날’을 시나브로 맞아들입니다. 영화 〈아이 앰 샘〉에 나오는 계집아이는 ‘돈으로는 채울 수 없는 사랑’을 알기 때문에 ‘몸이 아픈’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어 해요. 지능이 늘 제자리에 머물어 이제 나(딸아이)보다 지능이 낮고 만 아버지인 줄 진작에 알아채지만, 제 아버지가 잠자리마다 읽어 주는 ‘닥터 수스 그림책’을 무척 재미나게 들으면서 좋아합니다. 제 아버지는 저한테 더없이 큰 사랑을 나누는 멋진 집식구이거든요.


.. 칼레는 삼 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학교 생활이 순조롭지 않았다. 할머니가 숙제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가끔은 설명을 못할 때도 있었다. 이런 엉터리 같은 것 때문에 머리가 다 아프네. 뭣 땜에 이런 것을 배워야 하지. 불쌍한 녀석들. 칼레도 동감이었다. 칼레는 할머니에게 숙제를 도와 달라는 말도 많이 하지 않고, 숙제도 반 정도만 하기로 결심했다 … 칼레야, 열 살이면 벌써 생각할 줄 아는 나이지. 나이에 비해 넌 많은 것을 겪기도 했고. 할미가 지금 하는 말을 잘 생각해 봐. 난 이미 일흔이 넘었어. 아무도 내 나이를 그렇게 보는 사람은 없지만, 너보다 내가 예순 살이 더 많다는 걸 상상할 수 있겠니? 아니오. 칼레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  (62, 121쪽)


 이야기책 《할머니》에 나오는 할머니는 그야말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한테도 이름이 있을 테지만, 칼레한테든 다른 사람한테든 학교 교사한테든 공무원한테든, 할머니는 그저 할머니입니다.

 아마 오늘날이나 지난날이나 앞날에 이르기까지, 여느 살림집에서 어머니는 늘 어머니이겠지요. ‘칼레 할머니’이듯 ‘아무개 어머니’일 테지요.

 학교에서 교사는 교사입니다. ‘어른 아무개’가 아닌 ‘교사 아무개’이거나 ‘무슨 과목 교사 아무개’입니다.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는 이들은 ‘저마다 맡은 교과서로 아이들한테 교과서 지식을 물려주는’ 몫을 맡습니다. ‘교과서에 담긴 지식이 다 다른 아이들 삶에 어떻게 스며들거나 파고들어 다 다른 아이들 삶을 북돋울까를 헤아리는’ 몫은 맡지 않습니다.

 맨 처음부터 학교라는 곳이 사랑보다 지식으로 세워졌는지 알쏭달쏭하고, 맨 처음부터 교사라는 사람이 사랑보다 지식으로 꽁꽁 얽매였는지 아리송합니다. 왜 학교에서는 ‘지도’를 하고 ‘교육’을 하며 ‘학습’을 시키고 ‘평가’를 할까요.

 밥먹기에는 지도나 교육이나 학습이나 평가란 없습니다. 밥을 더 잘 먹거나 맛나게 먹는 길이란 없습니다. 흙을 일구어 벼를 거두든 감자를 거두든 꽃을 보든, 더 잘 일구거나 멋지게 일구는 길이란 없습니다. 흙을 일구는 일이란 겨루기(실적 경쟁)가 아니니까요.

 다달이 300만 원을 버는 일자리가 다달이 250만 원을 버는 일자리보다 더 나은 일자리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다달이 200만 원을 버는 일자리가 다달이 150만 원을 버는 일자리보다 더 좋은 일자리인지 아리송합니다. 다달이 100만 원을 버는 일자리가 다달이 50만 원을 버는 일자리도 더 아름다운 일자리인지 궁금합니다. 다달이 50만 원을 버는 일자리가 다달이 버는 돈이 없는 집살림보다 더 사랑스러운 일자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돈을 버는 일자리가 되어야 좋은 삶인지 고개를 갸웃갸웃합니다. 돈을 벌지 않는 삶자리는 좋지 않은 삶이거나 어여쁘지 못한 삶인지 고개를 기우뚱해 봅니다.


.. 칼레는 이제 늙은 사람들이 두렵지 않았다. 비록 답답하기도 하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이지만, 양로원도 세상의 한 부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와 칼레는 서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할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에 모아 놓은 가축처럼 살아야 하다니, 끔찍한 일이야. 모두들 저렇게 늙어서 … 나도 그 노인들과 다를 바 없어. 단지 양로원에 살지 않고 내 집에서 손자와 함께 산다는 것만 다를 뿐이지. 그래서 나이든 것도 달라 보이는 거야. 나이든 사람들끼리만 살면서 삶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나이 먹은 게 끔찍하지 ..  (101, 102쪽)


 이야기책 《할머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여러 가지 삶을 다루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할머니를 섬기거나 좋아하자는 이야기라든지, 어버이를 잃었다는 불쌍한 아이 이야기를 담은 《할머니》는 아닙니다. 저마다 다 다른 삶이 있다고 속삭이면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은 이대로 예쁘고, 기쁜 결대로 사랑하며 꾸리는 길을 즐거이 찾아 돌보자는 이야기를 담는 《할머니》입니다.


 (3) 한 사람으로 오롯이 우뚝 서기


 누구나 한 사람으로 오롯이 우뚝 서야 합니다. 망아지이든 새끼 사슴이든 송아지이든, 갓 태어난 날부터 제 다리로 씩씩하게 일어섭니다. 새끼 짐승은 갓 나는 자리부터 네 다리를 툭툭 털며 비틀비틀 걷습니다.

 ‘새끼 사람’이라 할 아기는 갓 날 적부터 걷지 못합니다. 참 오래도록 돌보고 아끼며 사랑해야 합니다. 겨우 걸음마를 떼었다지만 어른 말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또 오래도록 말을 가르치고 옹알이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새끼 짐승이든 새끼 사람이든, 제 어미나 어버이가 보여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고스란히 따릅니다. 새끼를 낳은 짐승이라면 새끼가 찬찬히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어미답게 살아갑니다. 아기를 낳은 어른이라면 아기가 천천히 보며 익힐 수 있게끔 어버이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이들은 책으로 배우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좋은 책’으로 배우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화로 배우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노상 ‘내 어버이 삶’을 바라보며 배우거든요.


.. 할머니는 의자를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섰다. 여보슈, 당신은 내 연금이 얼만지 알 거요. 거기 적혀 있을 테니까. 아이 하나가 하루에 얼마나 먹어대는지, 바지나 양말은 얼마나 잘 떨어지는지, 아이 밑에 들어가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시오? 내가 재벌이나 공장 주인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아니면 뭐요! … (텔레비전에) 아이와 함께 사는 연금 생활자의 얘기라든가 고아 연금에 대한 얘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보고 있지? ..  (31, 106쪽)


 공무원이 되면 다 똑같아진다고 합니다. 군인이 되어도 다 똑같아집니다. 경찰이 되건 국회의원(정치꾼)이 되건 다 똑같아집니다. ‘보고 배울 웃사람이나 이웃’ 삶자락을 고스란히 따르기 때문에 똑같아집니다.

 집에서 일과 살림을 거뜬히 즐길 뿐더러 아름다이 살아가는 어버이라 한다면, 아이는 제 어버이 결을 따르면서 살아갑니다. 꽃을 사랑하는 어버이 곁에서 꽃을 사랑하는 아이입니다. 흙을 북돋우는 어버이 곁에서 흙을 북돋우는 아이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어버이 곁에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예요.

 살아가는 대로 살아갈 아이입니다. 살아가는 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예요. 어버이 되는 사람은 더 넓은 집이나 더 높은 이름값이나 더 많은 돈이 아닌, 어버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으로 맺으며 활짝 웃을 만한 보금자리에서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이는 책이나 돈이나 지식이나 아파트나 자가용이나 학력을 물려받을 때에 즐거울 삶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판과 멧자락에서 지저귀는 새가 무슨 새인지 모르는 어버이 곁에서는 새소리를 모르는 아이가 자라날 뿐입니다. 바람소리를 느끼지 못하고 구름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어버이 곁에서는 날씨와 자연을 모르는 아이가 클 뿐입니다.

 아이가 일찍부터 영어를 썩 잘 한다든지, 무슨무슨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들어갔대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착하거나 참답거나 어여쁜 넋과 마음밭이 살찌우지 않는다면, 하나도 기뻐할 수 없습니다.


.. 사람들은 가끔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게 어떤지 물었다. 칼레는 이 바보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칼레는 할머니와 같이 사는 생활 말고는 다른 어떤 생활도 알지 못한다. 어쩌다 할머니와 싸우기도 하지만 칼레에게는 할머니가 최고였다 ..  (46쪽)


 어른은 어른대로 한 사람으로서 오롯이 우뚝 서야 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한 사람답게 오롯이 우뚝 서야 합니다. 저마다 슬기롭고 아리따운 꿈과 땀을 누려야 합니다. 서로서로 따뜻하며 너그러운 품으로 껴안아야 합니다.

 사랑은 돈으로 이루지 못하고, 돈은 사랑을 꽃피우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굶는다지만, 사랑이 없으면 메마르고 맙니다. 돈이 없으면 동냥을 할 수 있으며, 돈이 없으니까 이웃한테서 밥을 얻을 수 있습니다. (4344.4.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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