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 - 상식의 탄생과 수난사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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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사람 뼈다귀를 만지작거린대서
 [책읽기 삶읽기 48] 폴 콜린스, 《토머스 페인 유골분실사건》(양철북,2011)



 ‘토머스 페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토머스 페인 유골분실사건》이라는 이야기책은 토머스 페인이라는 사람이 죽고 나서, 이이 뼈다귀가 어떻게 돌고 돌아 이제 어디에 얼마나 흩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우리 나라로 친다면, 다산 정약용 님 무덤을 누군가 파헤쳐서 뼈다귀가 이리저리 흩어졌다는 줄거리를 다루는 셈입니다. 또는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무덤을 파헤쳐 뼈다귀를 요모조모 빼돌린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셈입니다.

 서양사람도 참 할 일이 없지, 뭣하러 뼈다귀를 파내어 이 뼈다귀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울까 궁금합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뼈다귀를 파낸 발자취를 좋는 이야기책까지 쓴다니, 그야말로 한갓진 삶이 아닌가 할 만하기도 합니다. 학문이나 문학이 갈 데까지 가면서, 이렇게까지 부질없다 싶은 대목까지 다루어야 하는가 싶기도 해요.

 그러나 곰곰이 헤아려 본다면, 서양사람은 한국땅에 들어와 무덤파기를 꽤나 즐겼습니다. 일본사람은 이들 서양사람한테서 배우며 한국땅 옛무덤 파헤치기를 퍽이나 즐겼습니다. 서양사람은 이집트 옛임금 무덤만 파헤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역사책에도 또렷이 적히듯이, 서양사람은 한국땅에서 옛나라 옛임금 무덤을 찾아내어 파헤치며 보배를 빼돌리려 했어요.


.. 때로 잊고 지내던 경건함이 이들을 다시 찾아오곤 했다. 페인이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들과 좋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끝없이 찾아와 페인을 괴롭혔다. 페인이 이단적 주장을 철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싶어 찾아왔다 ..  (24쪽)


 영국에 있다는 대영박물관은 무덤파기 따위를 하면서 긁어 모은 다른 나라 보배를 쑤셔넣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무덤파기뿐 아니라 숱한 싸움을 일으켜 이웃나라라든지 먼나라를 무너뜨리거나 짓밟으면서 보배를 빼앗았습니다.

 영국하고 이웃한 프랑스도 영국하고 똑같은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프랑스와 이웃한 독일이라든지 네덜란드도 그닥 다르지 않습니다.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이래서 다르지 않아요. 이탈리아나 그리스는 어떠했을까요. 스웨덴이나 터키는 어떠했을까요.

 저마다 이름과 힘과 돈이 드높을 때에는 어김없이 이웃나라나 먼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일본도 매한가지였으며, 중국 또한 다르지 않아요. 이 나라 한국도 잘 살피면, 지난날 고구려 때에 멀디먼 곳까지 땅을 넓히려고 창과 방패를 앞세워 깊디깊은 마을까지 찾아가서 싸움을 일으켰습니다. 아니, 고구려가 나라밖으로 땅을 넓히기만 했는가요.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도 난 듯이 죽이고 죽는 싸움을 오래도록 벌였습니다.

 군대가 있을 때에 사이좋게 어깨동무한 적이란 없습니다. 군대가 있는 나라가 평화를 사랑한 적이란 없습니다. 군대를 두는 임금이나 권력자가 사람들을 따스히 사랑하거나 어여삐 아낀 적이란 없습니다.

 오늘날 남녘땅에도 군대가 어마어마합니다. 북녘땅에도 군대가 무시무시합니다. 남북녘 권력자는 저마다 군대를 아주 크게 북돋우면서 막상 이 나라 사람들 여느 살림살이에는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 피땀을 그러모아 더 센 힘과 더 큰 돈과 더 높은 이름을 탄탄한 울타리로 쌓아올립니다.


.. 페인은 가장 터무니없는 주장부터 시작한다. ‘모든 왕은 불합리하다.’ 페인은 군주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인 고귀한 혈통을 부인하여 이런 주장을 펼친다 … 페인이 쓴 모든 글은 모든 왕, 모든 불합리한 권위, 전 세계의 크고 작은 폭군 모두를 공격하는 글이었다 … 페인은 정중한 토론을 벌이지 않는다. 그런 전통은 필요없으니 합리적인 이유를 대라고 한다 … 페인이 미국에 제시한 것은 완전한 재탄생, 죽은 과거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 《영국 재무 제도의 몰락》은 영국 정부가 국외 탐험에 돈을 대기 위해 마구잡이로 통화를 발행해 빚이 계속 늘어 가고 있음을 비난했다 … 정부는 국내의 지지와 외국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37, 39, 40, 58쪽)


 토머스 페인이라는 사람은 무슨 일을 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토머스 페인이라는 한 사람 뼈다귀를 놓고 이런 문학책 하나까지 나온다 한다면, 이이는 여느 수수한 사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미국 역사이든 영국 사회이든 뒤흔들었다고도 하는데, 이이가 걸어온 길을 찬찬히 되짚으면서 이이가 밝히려 했던 빛줄기를 느끼는 일을 대수로이 여겨야 한다는 뜻에서 이 같은 문학을 빚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토머스 페인이 남긴 발자국이나 빛줄기를 찬찬히 살피거나 짚거나 돌아보는 동안, 이 한 사람이 지키려 하던 뜻을 오늘날 사람들은 얼마나 지키거나 돌보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니, 토머스 페인이라는 한 사람 뼈다귀도 어디로 흩어졌는지 아리송할 뿐더러, 토머스 페인이라는 한 사람이 외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아로새기는가 또한 아리송합니다. 아니, 민주도 평화도 사랑과 평등도 자유도 어디로 꼬리를 감추는지 아리송합니다.

 미국은 끝없이 새 무기를 만들며 새 전쟁을 크게 터뜨리려 합니다. 미국한테 문화 식민지·경제 식민지·정치 식민지처럼 나뒹구는 한국땅 또한 엄청난 돈과 품을 들여 ‘미국이 만든 새 무기’를 자꾸자꾸 사들일 뿐 아니라, 너무도 많은 전쟁무기를 건사하느라 나라살림이 삐걱댈 만하다 합니다. 그나마 남녘땅 사람들은 자연을 아주 깡그리 무너뜨리며 버티니까 북녘처럼 사회나 정치가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남녘 삶터가 북녘 삶터처럼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남녘땅 자연을 온통 파헤치며 도시살림을 북돋우기 때문이요, 이웃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자원을 마구 갖다 쓸 뿐 아니라 이주노동자 피땀을 울궈먹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 사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며 ‘낮은 자리 여느 수수한 사람’끼리 어깨동무를 못하도록 가로막으면서 서로서로 싸우도록 내몰기 때문입니다.


..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단순한 몸짓,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마감일에 쫓겨 허둥지둥 쓴 글. 이런 것들이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고, 그 말을 한 당사자는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몸짓, 그 말 한 마디가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감동받은 사람이 사실은 자기를 다른 방향으로 보내 줄 무언가를 목 빼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144쪽)


 미국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바른 생각’을 못합니다. 일본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착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중국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고운 꿈’을 품지 못합니다.

 토머스 페인이라는 사람은 ‘상식’이 없는 미국사람을 일깨우려고 애썼다는데, 한국땅에서는 ‘상식’이 없는 한국사람을 일깨우거나 이끌거나 어루만지려는 목소리나 움직임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이나 환경운동이나 교육운동은 있어요. 그렇지만 ‘상식’은 없습니다. ‘삶’이 없고 ‘살림’이 없습니다. ‘사랑’이 자취를 감추고, ‘사람’이 모습을 숨깁니다.


.. 늘 그런 식이지 않은가? 토머스 페인의 유해조차도 수 세기 동안 띄엄띄엄 반쯤은 기억되고 반쯤은 잊힌 채로 있었다. 토머스 페인의 뼈가 어디로 떠돌았는가에 대한 진짜 이야기도 있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도 많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페인의 무덤을 파낸 적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252∼253쪽)


 한국땅에서는 ‘토머스 페인 읽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한 사람을 읽기가 어렵기 앞서 ‘상식 읽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래서 ‘토머스 페인 읽기’를 잘 한다고 여기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미국사람 스스로 ‘상식 읽기’를 거의 안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산업이란 ‘군산복합체 산업’입니다. 전쟁무기를 만들거나 전쟁터 군인으로 일하는 산업이 가장 발돋움한 미국입니다. 그러면 한국은? 한국에는 군인이 몇 사람이나 되지요? 군인하고 얽힌 회사나 가게나 일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한국 정부가 국방비로 쓰는 돈은 얼마나 되나요? 직접 세금으로 쓰는 국방비 말고 여러모로 뒤따르는 국방 예산은 얼마나 되려나요?

 친환경무상급식을 너나없이 외칩니다만, ‘친환경 먹을거리’를 마련하려는 농사꾼은 한국땅에서 어떤 대접을 받습니까. 친환경 먹을거리는 도시 아닌 시골 논밭에서 일구어야 하는데, 오늘날 한국땅은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얼마나 많이 새로 닦으며, 얼마나 많은 아파트가 쏟아집니까. 도시는 얼마나 커지고, 도시사람은 얼마나 돈에 목말라 돈벌이에 미친 듯이 달겨드는지요.

 온통 돈에 목마른 한국사람들인데, 아니, 돈에 미쳤다 할 만한 한국 어른들인데, 한국 아이들이 학교에서 친환경무상급식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알쏭달쏭할 뿐더러, 친환경무상급식을 한대서 무엇이 나아지거나 좋아질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교육이 엉터리인데 급식 하나 한대서 무엇이 거듭나려나요. 무엇보다 교육이 없이 입시지옥만 있는데, 급식 노래를 부른대서 무엇이 달라지려나요.

 미국이든 한국이든 ‘토머스 페인 삶’이 아닌 ‘토머스 페인 뼈다귀’만 들여다보는 눈높이와 눈썰미와 눈길에서 이야기가 비롯했다가 이야기가 끝납니다. 죽은 사람 뼈다귀는 끝내 찾을 수 없고, ‘산 사람이 슬기롭게 어루만질’ 알맹이 또한 끝끝내 알아볼 수 없습니다. (4344.4.12.불.ㅎㄲㅅㄱ)


― 토머스 페인 유골분실사건 (폴 콜린스 글,홍한별 옮김,양철북 펴냄,2011.2.25./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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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파랑새 청소년문학 7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예령 옮김, 박형동 그림 / 파랑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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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를 왜 학교에 보내는가
 [책읽기 삶읽기 49] 르 클레지오,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파랑새,2003)



 우리 집은 시골마을 멧골자락에 있습니다. 우리 살림집이 깃든 멧골자락 위쪽에는 멧골학교인 이오덕학교가 있습니아. 이 멧골학교 이오덕학교에서는 여섯 살 어린이부터 열네 살 푸름이까지 복닥복닥 어우러지면서 학교살이를 합니다. 올해로 네 살 난 우리 아이는 지난주부터 혼자서 집부터 학교까지 걸어 올라가 언니 오빠하고 놀곤 합니다.

 나와 옆지기는 우리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우리 아이를 학교에 넣을 마음이 없습니다. 어느 학교이든, 학교라는 데가 삶과 꿈과 사랑과 믿음을 배우거나 나눌 만한 터전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괜찮다 싶은 배움터는 ‘아이를 대학교에 넣을 생각이 없도록 맞춘 틀’에 따라 지식을 가르치는 곳에서 머뭅니다. 한국땅에서 대학교는 대학교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굳이 대학교에 갈 까닭이 없습니다. 한국땅에서 대학교가 대학교 노릇을 안 하는데 이런 곳에 큰돈을 들이면서까지 젊은 나날을 보내야 한다면, 아이들은 누구나 젊은 삶과 꿈과 사랑과 믿음을 어여삐 펼칠 수 없습니다.

 ‘88만 원 세대’이니 ‘한 해 등록금 천만 원’이니 하기 때문에 대학교가 말썽거리일 수 없습니다. 대학교는 이름 그대로 ‘큰 배움터’ 몫을 안 하니까 말썽거리입니다.

 학교라는 곳은 ‘배움터’입니다. ‘배우는(學) 터(校)’인 학교입니다. 애써 토박이말로 풀어서 써야 하는 이름 ‘배움터’가 아니라, 삶을 삶 그대로 또렷하게 바라보며 환하게 살펴야 하니까, 이름 그대로 곱씹는 배움터입니다.

 교과서 지식이든 책 지식이든, 온갖 지식을 머리에 넣는 일이 배움이나 가르침이 되지 않습니다. 밥하기 지식이란 밥하기 지식이지 밥하기 삶이 되지 않습니다. 지난날 ‘실과’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교과서로 지식을 외우도록 시켜서 시험문제 풀이를 하는 일이란 배움이나 가르침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그저 ‘시험’입니다. ‘입시’예요. 실과가 실과 노릇을 하자면, 아이들이 수업 때에 손수 밥을 하고 반찬을 하며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급식을 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밥때에 스스로 밥을 해야 합니다. 남이 해 주는 밥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을 아이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어린 아이라면 제 어버이나 다른 어른이 밥을 차려 주어야겠지요. 그렇지만 여느 학교에 들 나이라면, 적어도 설거지는 손수 해야 하며, 밥상을 스스로 차릴 줄 알아야 하고, 열 살 무렵이면 스스로 밥을 해야 합니다. 무상급식도 좋고 친환경무상급식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상급식이건 무슨무슨 급식이건, 급식은 교육, 곧 배움이나 가르침이 되지 않아요. 질서나 통제나 관리는 될 테지만, 배움이나 가르침이 될 수 없는 급식입니다. 아이들은 내가 먹는 밥이 누가 농사짓거나 길러서 내가 얻을 수 있으며, 이 먹을거리를 어떻게 손질하거나 다루어 고맙게 먹는가를 몸으로 부대끼며 깨우쳐야 합니다. 날마다 두세 끼니 먹는 밥을 차리느라 날마다 어느 만큼 품과 땀과 겨를을 들여야 하는가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밥을 차렸으니, 고맙게 밥을 먹습니다. 고맙게 밥을 먹었으니, 즐겁게 설거지를 합니다. 설거지를 마친 다음에는 밥을 먹은 곳을 치워야겠지요. 늘 옷을 입으며 살아가니까 내 옷을 내가 빨아야 합니다. 저녁이면 언제나 잠자리에 드니까 이부자리는 내가 개거나 마련하는 한편, 아침에 이불을 털거나 말리는 몫 또한 나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이불빨래 또한 아이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학교버스에 태우는 일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버스가 아닌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스스로 타며 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배우러 다니는 일이란, 집과 학교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러 다니는 일이 아닙니다. 내 살림집(보금자리)과 배움집(학교) 사이에 놓인 숱한 이웃과 마을과 자연을 두루 맞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가는 길’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학교 둘레나 집 둘레에는 ‘나쁜 가게나 시설이나 공장’이 있어서는 안 돼요. 우리 스스로 ‘나쁜 가게나 시설이나 공장’을 집이나 학교 둘레에 마련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처음부터 나쁜 가게나 시설이나 공장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공장이 없으면 물건을 어떻게 쓰느냐 할 텐데, 끔찍한 환경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쓰레기를 낳으며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물건을 안 쓰거나 적게 쓰면서 수수하고 예쁘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옳고 좋은 우리 터전입니다.


.. 밖을 내다보니 햇빛이 환했다. 몸을 조금 숙이자 한 조각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 륄라비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바위 틈에는 아무도 없었다. 륄라비는 계속 제 갈 길을 갔다. 바위를 기어오르고, 다시 내려가고, 갈라진 틈새를 뛰어넘고, 그렇게 해서 마침내 다다른 곶의 끝자락에서 륄라비가 발견한 것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고원과 그리스식 집 한 채였다 ..  (7, 31쪽)


 청소년문학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를 읽습니다. 르 클레지오 님이 쓴 청소년문학이라 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청소년 ‘륄라비’는 둘레 어른이나 동무 누구한테도 딱히 말하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은 륄라비는 학교에서 지냈더라면 느낄 수 없던 ‘눈부신 햇살’을 느낍니다. 학교에 머무는 동안 느낄 수 없는 ‘바다와 자연과 길’을 느낍니다.

 학교를 다니는 거의 모든 아이들은 ‘눈부신 햇살’을 비롯해서 구름이나 달이나 바람이나 흙이나 풀이나 꽃이나 나무나 개구리나 참새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거의 모든 아이들은 교과서와 문제집과 참고서만을 느끼며 맞아들여야 합니다. 교사와 칠판과 교과서만을 바라보아야 하고, 창밖을 바라본다든지, 졸려서 엎드려 잔다든지, 딴생각을 하느라 꿈결을 헤매는 일을 할 수 없는 학교입니다. 시험문제를 잘 풀어 등수가 높은 아이일 때에 사랑받는 학교요, 꿈과 마음씨가 아름답대서 사랑받는 학교가 아닙니다.


.. 차창을 닫은 신형 자동차 속 사람들의 표정이 자못 바빠 보인다 … 륄라비는 자신의 모든 눈으로 모든 곳을 바라보았다 … 륄라비는 먼지 때문에 눈을 반쯤 감고 성큼성큼 거리를 걸었다 ..  (14, 46, 74쪽)


 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돈을 법니다. 학교를 나와서 돈을 버는 일자리를 얻습니다. 학교를 나오며 돈벌이를 찾습니다.

 고마운 목숨을 얻어 태어난 아이들은 갓난쟁이와 어린이와 푸름이를 거쳐 젊은이로 무럭무럭 크는 동안 아름다움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믿음이라든지 나눔이라든지 꿈이라든지 느끼기 어렵습니다. 손수 흙을 일군다든지 맨발로 흙을 밟는다든지 싱그러운 봄바람과 차가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든지 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날에는 예닐곱 살부터 지식 외우기를 했다면, 오늘날에는 두어 살부터 지식 외우기를 하고, 아이들은 먼 뒷날 ‘돈을 얼마나 잘 많이 크게 벌어 돈을 얼마나 잘 많이 크게 쓰면서 물질문명을 누리는가’에 따라 길들여지기만 합니다.


.. 이곳엔 저 혼자뿐이지만, 전 아주 재미있게 놀고 있어요. 이제 학교엔 가지 않을래요. 이미 결심했으니 다 끝난 얘기예요.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 때문에 감오에 가게 된다고 해도요. 따지고 보면 감옥이 학교보다 나쁠 것도 없고요 … 륄라비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륄라비가 말했다. 고함을 지른 것도 아닌데, 교장은 마치 륄라비가 그러기라도 한 듯 매우 강경한 어조로 대응했다. “그 녀석 이름을 대라!” “전 사귀는 남자 친구 같은 거 없어요.” ..  (28, 85쪽)


 학교에 가지 않기로 했던 륄라비는 다시 학교에 갑니다. 다시 학교에 간 륄라비는 (아마 예전에도 비슷했으리라 느끼는데) 그닥 사랑받지 못합니다. 주어진 틀에 맞추어 주어진 지식을 얻으려 하지 않은 륄라비이기 때문입니다. 시키는 틀에 스스로를 맞추지 않은 륄라비는 어른들이 시키는 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삶도 사랑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제 삶을 일구는 길을 가르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이들이 저마다 아끼며 사랑하는 길 또한 가르치지 못합니다. 참사랑이든 짝사랑이든 풋사랑이든 무슨무슨 사랑이든, 사람이 살아가며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나날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그동안 어떤 학교를 왜 다녔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어떤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과서를 조금 더 훌륭하거나 예쁘거나 멋지거나 좋게 엮으면 학교교육이 나아질까요. 한 반 아이들 숫자를 더 줄여 교사 한 사람이 맡을 아이를 줄이면 학교교육이 좋아질까요. 교사들한테 달삯을 더 주고 자질구레한 행정서류를 줄이면 학교교육이 거듭날까요.

 교육노동자라 하는 교사는 얼마나 ‘교육 + 노동’을 사랑하는 길을 걷는지 궁금합니다. 교사 자리에 선 어른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말하거나 보여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교과서에 갇힌 지식을 넘어서며 내 삶을 스스로 일구며 사랑하는 길을 아이들하고 스스럼없이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청소년문학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학교에 가지 않기로 다짐했던 아이 륄라비가 한동안 학교 바깥에서 맴돌며 지낸 나날을 짤막하게 들려줍니다. 이러다가 학교로 돌아가 어른들한테서 시달리는 모습을 살짝 곁들입니다. 이러며 끝맺습니다. 더도 덜도 없습니다. 륄라비한테 삶이란 무엇일까요. 륄라비를 둘러싼 어버이와 교사 같은 어른한테 삶이란 무엇인가요.

 무언가 살포시 짚을 듯 말 듯하면서 끝내 아무런 실타래를 건드리지 못하며 마무리지은 청소년문학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어른들부터 그닥 재미나거나 신나게 살아가지 않기에, 아이들한테 재미나거나 신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어렵습니다. 어른들부터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나날을 북돋우지 않는데, 아이들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나날을 북돋우겠습니까. 지식과 학력에 따라 돈과 계급을 나누는 사회 틀거리에 그저 몸을 맞추는 어른들부터 아주 뻔한 굴레에 길들여졌는데, 아이들이 스스로 굴레를 풀거나 홀가분하게 날아오르기란 몹시 힘듭니다. 갑갑한 사회에 갑갑한 푸름이입니다. 답답한 학교에 답답한 소설입니다. (4344.4.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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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 - 나도 작가 2
이현희 지음 / 나라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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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도시내기 푸름이 삶이란
 [푸른 책과 함께살기 72] 이현희,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나라말,2008)



- 책이름 :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
- 글 : 이현희
- 펴낸곳 : 나라말 (2008.11.28.)
- 책값 : 8000원


 요즈음 사람들은 너나없이 도시에 모여서 살아갑니다. 시골마을 작은 집에 모여서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은 무척 적습니다. 어린이와 푸름이일 때에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더라도, 스무 살이 넘으면 으레 시골마을을 벗어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일자리를 알아보곤 합니다. 스무 살 싱그러운 나이부터 싱그러운 흙을 맨발로 디디며 푸른 들판처럼 푸른 마음이 되는 젊은이는 아주 드뭅니다.

 초등학교이건 중학교이건 고등학교이건, 아이들한테 시험공부를 가르치지 ‘홀로 우뚝 서며 제 살림을 일굴 한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 학교라 하더라도 요즈음에는 ‘일제고사’라는 이름으로 성적 매기기에 휩쓸릴 뿐, 막상 시골마을 아이들이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좋을까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 아이들한테 시골사람이 되도록 가르치지 못하기만 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시골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부터 시골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시골 어린이를 가르친다지만, 집만 시골일 뿐, 따지고 보면 읍이나 면에 있는 아파트에서 지내며 학교를 오가는 공무원 노릇만 하는 교사는 아닌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와 똑같이 시골에서 살면서, 도시에서와 똑같이 시골 어린이를 가르치려 하지 않느냐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교사라면 으레 도시내음 묻어나는 이야기로 도시내기로 살아갈 길을 가르치겠지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교사라면 마땅히 시골내음 묻어나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골내기로 살아갈 길을 가르쳐야 할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도시에서대로, 시골에서는 시골에서대로 어린이와 푸름이 하나하나를 참사람으로 마주하기 힘듭니다. 똑같은 학교옷에 가두고, 똑같은 머리길이와 똑같은 지식과 똑같은 매무새와 똑같은 말씨가 되도록 꽁꽁 얽어맵니다.

 저마다 다른 어린이와 푸름이가 저마다 다른 꿈과 뜻을 품으면서 살아가도록 돕지 못하는 학교입니다. 아이들이 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아이는 국문학을 하고 싶을 테고, 어떤 아이는 기계공학을 하고 싶을 테며, 어떤 아이는 사진학을 하고 싶겠지요. 그런데 국문학을 하고 싶은 아이나 기계공학을 하고 싶은 아이나 사진학을 하고 싶은 아이나 똑같은 시험문제에 똑같은 교과서에 똑같은 지식에 휘둘려야 합니다. 일찌감치 좋은 짝을 만나 사랑스러운 아이를 쑥쑥 낳아 예쁘게 키우고픈 꿈을 키울 수 있는데, 집안 살림꾼이 되겠다는 어린이나 푸름이를 ‘그렇구나, 참 좋은 꿈이구나.’ 하고 말하며 북돋울 교사는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 나는 밥을 지을 줄 모른다. 쌀과 물을 얼마만큼 넣고 몇 분 간 끓여야 하는지, 약한 불, 중불, 센 불 중 어느 불에 밥을 지어야 하는지 모른다. 나는 밤에 혼자 자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언니와 같은 침실을 쓰며, 언니가 수련회에 가기라도 하면 엄마 옆에서 자곤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덜 자랐다. 혼자서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언제까지나 열 살 어린애로 남을 수는 없는데……. 엄마는 아직도 밤에 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마음을 놓고 주무신다. 나만 남겨 두고 외출하실 때면 가스 밸브를 잠그고 나가신다. 가끔 어린아이 취급을 그만해 달라고 말씀드리면 엄마는 웃어넘기거나 서운해 하신다. 엄마, 나도 어른이 되기 싫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엄마의 작은 딸은 이번 여름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고, 사랑니를 발견했어요 … 하지만 고등학생에게는 성적표 한 장이 전부일 때가 많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 나는 또다시 찔끔거린다. 점점 ‘기계’가 되어 가는 언니가 안쓰러워서, 그런 언니를 닮아 가는 내가 싫어져서 ..  (16∼17, 38, 101쪽)


 청소년이 쓴 청소년소설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나라말,2008)를 읽습니다. 이 청소년소설을 쓴 푸름이는 이제 푸름이가 아닌 대학생입니다. 푸름이 나이에 소설을 쓸 수 있다니 대단하구나 싶습니다. 앞뒤로 꽉 막힌 대한민국 학교 틀거리에서 소설쓰기에 마음을 쏟을 수 있으니 놀랍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대단하거나 놀랍다는 대목 말고는 소설로 읽을 삶과 눈길과 사랑과 사람내음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설이든 시이든 수필이든 쓰려면 말을 잘 배우고 살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 푸름이 나이일 때에 썼기 때문에 ‘우리 말이 무엇이고, 우리 말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우리 말을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망가뜨리는가’까지 짚기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른들조차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매만지며 소설쓰기를 하지는 못하니까요. 여느 때에 쓰는 여느 말투로 소설쓰기를 하는 일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라는 소설을 쓴 이현희 님은 여느 때에 어떠한 여느 말을 쓰는가요. 책이름부터 “나의 열여덟”이라 말하는 모습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내 열여덟”이 아닌 “나의 열여덟”이란 얼마나 소설다운 말마디요 글이름이 될 수 있을까요.

 혹시나, 역시나, 자세히, 당황, 성인용, 설명, 열여덟의 내게는, 건조, 의식적, 과학적, 별다른, 눈을 가진, 7개월, 가족, 외할아버지의 방, 거실, 민기에게로, 호기심, 미소, 앞니만큼의 가치, 영원히, 불편, 지극정성, 소외되기 시작했다, 순간, 분명, 소외당하고 계셨다, 낙엽이 떨어져, 웃고 있는, 표정, 이유, 피곤해진다, 섭리, 피한다, 민기의 재롱, 중앙, 더 이상, 엄마의 철없는 남동생, 나이를 먹는 것, STOP 버튼, 딸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 느끼신 걸까, 확인, 계속, 취급, 발견, 방황, 교화, 일부, 오전, 제한적, 평범한, 소란스레, 항상, 사실, 서서히, 대체, 충분히, 존재하는 걸까, 성장해야, 조르고 있다, 선생님들의 첫사랑 얘기, 다른 행동을 취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노트, 속한다, 고온, 세상 속에서, 일단, 장소, 완벽한, 단지, 유쾌한, 잠시, 투명하게 변해, 그때의 나도, 14년간의 색이, 연애, 사소한 순간, 색(色), 심각한 단어, 바꾸든 간에, 기억할게, 속성, 충동적, 빠른 비트의 노래, 볼륨, 진심으로, 벤치, 그의 시선, 굉장히, 정확하게, …… 이런저런 말마디는 교과서에 다 나오고 둘레 어른 누구나 쓰며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어렵잖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마디를 문학에 넣는 일이 나쁘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을 하면서 써야 할 글이고, 생각을 가누며 빛낼 문학이며, 생각을 돌보며 꾸릴 소설입니다. 내가 문학으로 담는 낱말 하나 말씨 하나가 어떠한 얼거리와 뿌리이며 흐름인가를 짚어 말느낌과 말빛과 말결을 북돋울 수 있어야 합니다.

 소설이나 시나 수필이라 해서 ‘우리 말이 아리따이 빛나는 글꽃’이 되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학은 밑바탕으로 ‘우리 말이 아리따이 빛나는 글꽃’이 되도록 다스려야 하면서 ‘글쓴이 넋과 삶을 아리따이 나누는 글선물’이 되도록 가다듬어야 하니까요. 우리 말이 아리따이 빛난대서 좋은 문학이 아니라, 우리 말이 아리따이 빛나지 않고는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프랑스문학은 프랑스말이 아리따이 빛나는 밑바탕을 깔고, 미국문학은 미국말이 아리따이 빛나는 밑바탕을 깝니다. 이 밑바탕으로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숨결로 펼쳐요. 번역이 힘들면서 번역이란 새로운 창작이 되는 까닭은 ‘문학이란 말로 빚는 꽃’이기 때문에, 기계처럼 다른 나라 말로 적바림한대서 번역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말로 새롭게 펼쳐야 하는 번역이니까 번역은 새로운 창작하고 똑같은 일입니다. 번역을 잘 하는 사람은 창작을 잘 하는 셈이고, 번역을 못 하는 사람은 창작을 못 하는 꼴이에요.

 어떠한 글이든 글이 글다워야 합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글은 한국사람 글다운 멋이 있어야 합니다. 껍데기만 한글이래서 우리 말이 되지 않아요. stop을 스탑이라 적는대서 우리 말일 수 없어요. “민기의 재롱”이나 “엄마의 철없는 남동생” 같은 말투를 어른들이 으레 쓴다 하더라도, 이런 말투를 쓰는 어른들 스스로 우리 말투를 제대로 살펴 올바로 쓰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니까 잘못이지, 이러한 잘못된 말투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 옳다 할 수 없으며, 이러한 말마디로 문학을 하는 일은 썩 아리땁다고 느끼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보다 “나는 밥을 지을 줄 모른다”라는 이야기에 기운이 탁 빠집니다. 자랑하려고 쓴 말이 아니요,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며, 뭔가 대단한 말이 아닙니다. 아마 요즈음 어느 어린이나 푸름이라 하더라도 밥할 줄 아는 사람은 몹시 드물겠지요.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밥을 하라고 맡기거나 시키는 어른은 없는지 모릅니다. 학교에서 배울 지식이 많으며, 남들하고 겨루는 시험공부 싸움터에서 지면 안 되니까, 아이들 스스로 밥을 해서 차리도록 이끌 어른이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아이들이 쌀을 씻어 냄비에 안치려 할 때에 ‘이 녀석아, 이럴 겨를 있으면 영어 낱말 하나라도 더 외워야지!’ 하면서 부엌에서 쫓아낼 어른만 있지 않겠습니까.

 이현희 님은 내 열여덟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한테나 열여덟은 아름답습니다. 열여덟 나이인 푸름이 스스로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제대로 모를 뿐입니다.

 밥을 못하더라도 아름답고 밥을 잘하더라도 아름답습니다. 그 나이에 잘한다면 잘하는 대로 아름답고, 그 나이에 아직 못하면 앞으로 잘하면 되니까 아름답습니다.


.. 점심을 먹고 이를 닦으면서 거울을 본다. 물에서 방금 건져낸 늘어진 행주처럼 오전 시간을 보냈다. 4·5·6교시 수업을 듣고 청소를 하고, 7교시 수업을 듣고 저녁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집에 가면 하루가 끝날 터였다. 어제도 그랬으니까 내일도 그럴 테지 … 난 분명 성장해야 하는데, 날 성장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 많은 교과서들도, 그 두꺼운 문제집들도 날 자라게 하지는 못한다 …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올 수 있는 행복한 수요일이다. 집에 가서 공부해야지. 정석, 교과서, 문제집을 가방 가득 쑤셔넣는다. 하지만 그토록 힘들게 짊어지고 온 것들 중에 들춰 보는 책은 막상 몇 권 되지 않는다. 그 많은 책들을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은 채 다음날 고스란히 학교에 되가져가는 것이다 ..  (19, 20, 36쪽)


 남자이든 여자이든 똑같습니다. 남자 푸름이이든 여자 푸름이이든 부엌에 깃들 겨를이란 없습니다. 부엌뿐 아니라 빨래기계 앞에 머물 겨를은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손빨래까지 바라기는 어렵겠지요. 적어도 제 옷가지라도 빨래기계에 넣어 돌린 다음, 제 손으로 빨래기계에서 꺼내어 빨래대에 널고, 다 마른 빨래를 푸름이 스스로 개어 옷장에 차곡차곡 넣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밥을 먹는 자리에서 어버이한테 고맙다고 말할 뿐 아니라, 나한테 밥이 되어 준 모든 푸성귀와 곡식과 고기한테 고맙다고 말할 줄 아는 푸름이는 몇이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고맙게 먹은 밥그릇이기에 스스로 설거지를 하고 밥상을 행주로 닦으며 뒷일을 거드는 푸름이는 있기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쌀을 씻어 냄비에 안치는 겨를은 몇 분 안 걸립니다. 밥그릇을 설거지하는 겨를 또한 몇 분 안 걸립니다. 이 몇 분 동안 시험공부를 더 한다면 남보다 시험점수가 더 잘 나올는지 모릅니다. 집과 학교 사이를 두 다리로 천천히 걸어다니지 말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태워 주는 자가용을 타야 ‘공부할 겨를’이 더 늘어날는지 모릅니다만, 천천히 내 동네를 거닐면서 내 동네를 느끼고 내 동네이웃을 마주하며 인사하는 일만큼 대단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시간쯤 걸어서 학교를 가고, 한 시간쯤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대서 남하고 견주어 떨어질 시험성적이라면, 하루 두 시간을 더 참고서나 자습서를 파고든대서 시험성적이 더 잘 나올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흔히 시험공부를 공부라고 일컫지만, 시험공부는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공부란 나와 내 삶과 내 터전을 배우는 일입니다. 제대로 말하자면 배우기라 해야겠지요. 배우는 일, 곧 배우기란 시험문제를 외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학교와 학원은 모조리 ‘시험문제 외기’가 마치 공부라도 되는 양 몰아세웁니다. 참다운 공부라 할 이야기를 밝히거나 나누지 않으면서, 거짓 공부나 껍데기 공부를 참공부라도 되는 듯 밀어넣습니다.


.. 다른 사람에게 내 고민이나 슬픔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이 언제였더라? … 나는 그들이 꺼내는 ‘사귀자’는 말의 가벼움이 너무 싫다. 그들은 그런 말을 했다. “쉽게 하는 말 아니야. 한참을 고민했어. 난 진지해.” 하고. 정말 진지하게 날 좋아했다면, 친구로 지내자는 내 부탁 아닌 부탁을 어쩜 그리 쉽게 무시할 수 있니  ..  (33, 46쪽)


 푸름이로 지내는 동안 푸른글, 그러니까 청소년소설을 쓴 일은 대단하거나 놀랍습니다. 오늘 이 나라에서 푸름이로 지내며 푸른글을 쓰자면 어쩔 수 없이 갑갑하거나 갇히거나 겉핥기에서 맴도는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는 아름다운 글이 되기 힘든 한국 삶터요, 즐거운 문학이 되기 힘든 한국 터전이며, 빛나는 글이 되기 어려운 한국 학교입니다.

 어쩌면,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가 아름다운 글이나 즐거운 문학이나 빛나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틀에 박히게 살아가며 틀에 박힌 삶과 이야기를 쏟아낼밖에 없는데, 틀에 박히지 않는 넋이나 말이나 이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렇게 바라는 사람이 잘못이지요.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푸름이일 뿐더러, 하나도 아름다울 수 없게끔 꽉 막힌 채, 그냥 꿈으로만 아름답겠지 하고 노래하는 푸름이인데, 이러한 삶으로 머리로 그리는 문학이란 얼마나 문학다울 수 있겠습니까.


.. 머릿속으로 엄마에게 예쁜 옷을 입혀 본다. 상상이 잘 안 된다. 옛날 사진처럼 뿌옇고 희미하다. 내가 아는 엄마는 지극히 평범한 주부 또는 아줌마이며, 앞치마를 두르고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집안일을 하는 모습만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진다. 내가 아는 엄마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  (93쪽)


 이현희 님은 시금털털하게 제 삶을 보여주고, 제 넋을 밝히며, 제 말을 털어놓습니다. 이래저래 꾸미면서 제 모습 아닌 모습을 보여주려 하거나 제 넋 아닌 넋을 선보이려 하거나 제 말 아닌 말을 덧붙이려 했다면 짜증스러웠으리라 봅니다. 문학이란 겉치레나 껍데기일 수 없으니까요. 문학이란 잘나도 못나도 고스란히 내 얼굴을 보여주면서 내 손으로 빚는 글꽃이니까요.

 못생겼다 할 꽃이란 없습니다. 못생겼다 할 글꽃이란 없습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슬픈 꽃이고, 아프면 아픈 대로 아픈 글꽃입니다.

 푸름이 이현희 한 사람은 제도권 시험지옥 울타리에서 아파하는 그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자락에 제 빛나는 나날을 갈무리합니다. 무엇이 빛나는지 모르고, 무엇을 빛내야 하는지조차 모르지만, 아무튼 제 빛나는 나날을 글로 적바림합니다.

 열다섯에 열다섯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달아야 마땅하지만, 열다섯에 열다섯 삶을 깨닫지 못하며 스물다섯을 맞이한다면, 스물다섯에도 스물다섯은 얼마나 스물다섯답게 아름다운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부디 천천히 내 나이를 어림하며 내 삶을 사랑해 주면 좋겠습니다. 열여덟은 열여덟대로 아름답고, 열아홉은 열아홉대로 아름답습니다. 열여덟은 한 해뿐이고 열아홉도 한 해뿐입니다. 스물여덟이고 서른아홉 또한 한 해뿐입니다. 모든 나이는 그날그날 오직 나한테 딱 한 번만 주어지는 나날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로 지내는 나날은 이러한 나날대로 예쁘고, 어머니이기 앞서 아가씨였거나 푸름이였을 때에는 이러한 나날대로 예쁩니다. 어머니 지난날을 떠올릴 수 없다면, 내 오늘날 또한 헤아리지 못합니다. 나를 나 그대로 바라볼 때라야 내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 또한 내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 그대로 헤아립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넋으로 살아가며 어깨동무하는 한솥밭 길동무임을 몸으로 느껴 주면 고맙겠습니다. 스스로 삶을 넓혀야 넋이 넓어지고, 스스로 삶을 넓히며 넋이 넓어지도록 해야 말과 글과 이야기 또한 시나브로 넓어집니다. 한국땅 푸름이들이 스스로 삶을 넓히기 힘들다지만, 멀리멀리 여행을 다니거나 책을 많이 읽는대서 삶이 넓어지지는 않습니다. 삶을 넓히는 길은 바로 내 가슴에 있고 내 작은 집에 있으며 내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바라보아야 하고 깨달아야 하며 부둥켜안아야 합니다. (4344.3.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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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대장 높은 학년 동화 1
이원수 지음, 원혜영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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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가 푸름이로 살면서 어른이 되는 길
 [푸른 책과 함께살기 73] 이원수, 《골목대장》(한겨레아이들,2002)


- 책이름 : 골목대장
- 글 : 이원수
- 그림 : 원혜영
- 펴낸곳 : 한겨레아이들 (2002.6.14.)
- 책값 : 7000원


 (1) 어린이·푸름이·어른


 아기로 자라는 나날은 다섯 해입니다. 어린이로 보내는 나날은 고작 일곱 해입니다. 푸름이로 지내는 나날은 기껏 여섯 해입니다. 열아홉 해째부터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셈입니다. 열아홉이든 스물아홉이든 아흔아홉이든 똑같이 어른 삶입니다.

 어른으로 살아갈 나날은 참으로 길디길지만 아기를 지나 어린이와 푸름이로 살아가는 나날은 너무 짧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나 소나 닭 같은 짐승을 살펴보면, 어린 나날이나 푸른 나날은 훨씬 짧습니다. 참으로 금세 어른 짐승으로 우뚝 자랍니다.

 다만, 짐승이 어린 나날을 지나 어른 나날이 되는 동안을 사람하고 견준다면, 여느 짐승이나 여느 사람이나 그닥 다르지 않습니다. 비슷하게 어린 나날을 거치고 비슷하게 어른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짐승하고 사람은 한 가지에서 다릅니다. 짐승은 누구나 어린 나날을 끝마치면 저 스스로 먹이를 찾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짝을 찾습니다. 새끼를 낳으면 어느 짐승이든 제 새끼를 먹이며 보살피고 지킬 뿐 아니라, ‘어린 어른짐승’이 ‘어린 새끼짐승’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쳐야 할 온갖 삶과 슬기와 이야기를 고스란히 물려주거나 가르칩니다.


.. 큰오빠인지 하는 청년이 집에 온 후로 집안은 확실히 달라졌다. 그 전에는 평화롭기만 하던 집안에 그 군인 생활을 하고 왔다는 큰오빠란 사람은 희수(개)나 미미(고양이)나 가리지 않고 발길로 차는 게 버릇이었다. “이놈의 개는 왜 이리 덤벼? 그런다고 좋아할 줄 알구?” … 꽃나무뿐이 아닙니다. 하루는 개울가에서 개구리들을 잡아 가지고 장난을 했습니다. 민수는 개구리를 잡아 쥐고 꼬챙이로 눈을 찔렀습니다. 개구리는 두 눈을 찔려 장님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아무리 말 못하는 개구리라도 아픈 건 사람이나 다를 리가 없습니다 … (꿈속에서) 다른 개구리가 말을 했습니다. “대장님, 우리 동무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었으니까 민수도 장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 “옳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두 개구리가 모두 찬성을 했습니다. “이의 없는가?” 대장 개구리가 물으니까 장님 개구리가 말을 했습니다. “대장님, 장님이 되니까 세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갑갑해서 못살겠으니 민수는 장님을 만들지 말고 나쁜 장난을 한 손을 잘라 주세요. 장님은 너무 갑갑합니다.” 민수는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습니다. 눈을 빼지 말라고 한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손을 잘라 주라는 것도 여간 무섭지 않았습니다 ..  (11, 60, 69쪽)


 한국땅에서는 어린이와 푸름이로 살아가며 열아홉를 지난 이들 가운데 열아홉 해째부터 스스로 삶을 일구는 사람이란 대단히 드뭅니다. 서양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살피면, 푸름이 나이부터 저 혼자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른 아시아나 중남미도 엇비슷합니다. 한국땅 어린이와 푸름이만큼은 이제 어른으로 살아야 할 무렵에 참답게 어른으로 살아가지 못하거나 어른으로 살아내지 않습니다.

 나이는 미성년자를 벗어났대서 술과 담배와 사랑놀이를 마음껏 즐길 뿐, 참으로 어른다이 구는 어른이란 몹시 드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었다는 젊은이들은 길바닥에 침을 직직 뱉습니다. 젊은 사내들은 다리를 쩍쩍 벌리며 걷거나 전철 같은 데에서도 다리를 쩍 벌리며 앉습니다. 젊은 사내이든 계집이든, 젊은내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으레 욕이거나 거친 말입니다. 사랑스럽거나 따스하거나 믿음직한 말이라든지 매무새라든지 낯빛이라든지 몸짓이라든지 손길이라든지 눈길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만히 따지면, 이제 막 열아홉이나 스물이 된 젊은이만 이러하지 않습니다. 지난해나 그러께에 열아홉이나 스물을 지난 젊은이도 매한가지입니다. 세 해 앞서나 다섯 해 앞서 열아홉이나 스물을 지난 젊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해나 스무 해 앞서 열아홉이나 스물 나이를 지난 젊은이도 똑같습니다.

 더 따지면, 서른 해나 마흔 해 앞서 열아홉 나이나 스물 나이를 지난 젊은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쉰 해 앞서나 예순 해 앞서도 엇비슷하겠지요.

 어른답지 못한 모습으로 어른이 된 사람들이 짝을 찾아 사랑놀이를 나누다가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돌봐야 좋은가를 깨닫거나 배우지 못한 채 아이만 먼저 덜컥 낳습니다. 아이를 낳은 다음 어떻게 애 어머니를 보살펴야 하거나 애 어머니로서 몸을 어찌 다스려야 하는가를 스스로 익히지도 않으나 둘레에서 찬찬히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애 아버지가 할 몫을 깨닫거나 배우려는 사내도 매우 드뭅니다. 이제 아이까지 딸렸으니 더 돈을 잘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할 뿐, 어버이 노릇이 무엇인지 살피지 못하고, 어버이 구실을 돌아볼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돈을 더 벌어야 한다지만, 어떤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벌어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톺아보지 못합니다.


.. 아무리 밥을 먹여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주인집 아들이라 하더라도 미워하고 구박하는 사람에게 꼬리 치고 아양을 떠는 건 비굴하다 … 온갖 새들이 제 맘대로 하늘을 날아 숲속에서 들로, 들에서 산으로 훨훨 돌아다니는데, 새장 속에 갇혀서 한평생을 살아온 앵문조는, 사람에 비하면 감옥에 갇힌 죄수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 새장 안에서 자라서, 넣어 주는 모이와 물을 먹으며 편히 살아온 우리 앵문조는 바깥 세상의 많은 적과 싸워 나갈 힘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이를 구할 줄도 모르고, 추운 겨울이 오면 얼어죽을지도 모릅니다. 밤이 되어도 편안하고 안전한 잠자리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긴 하지만, 알에서 났을 때부터 새장 속에서만 자란 우리 앵문조에게는 저 넓은 바깥 세상이 얼마나 놀랍고 크고 신기하고 화려했을까요! … “주는 모이만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어 온 새가 아니냐? 늘 편하게만 살아왔거든. 그러니까 제힘으로 먹이를 찾고, 잠자리를 찾고, 또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내고 할 힘이 없단 말이다.” “그렇다면 남의 원조만 받는 사람들은 영영 독립도 못하겠네요?” ..  (18∼19, 90∼91, 92쪽)


 몸뚱이로 보면 틀림없이 어른입니다. 나이로 치면 어김없이 어른입니다.

 그러나 몸뚱이와 나이로만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할아버지·할머니가 될 테지요. 그런데 나이를 많이 먹었대서 나이값을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나이가 어리대서 더 해맑거나 착하거나 깨끗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제 나이에 걸맞게 살아가는 고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살며, 푸름이는 푸름이대로 살아야 합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살아야겠지요.

 어른이 되기 앞서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버이한테서 밥과 옷과 집을 받습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밥과 옷과 집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살림을 가르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삶을 가르칩니다.

 말은 교과서나 교재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살아가며 쓰는 말을 아이한테 고스란히 가르칩니다. 살림은 요리책이나 육아책 따위를 들여다보며 가르칠 수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꾸리는 살림을 아이한테 그대로 가르칩니다. 삶은 무슨 책이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서 배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삶 또한 언제나 어버이 스스로 꾸리는 나날을 낱낱이 보여주며 가르칠 뿐입니다.


.. “이 할머니, 괜히 사람 곯리지 말아요. 이 집에서 안 떠난다고 공사를 중단할 것 같소?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란 말요.” 관청에서 나온 사람이 반은 호령조로 반은 빈정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 노랑나비 한 마리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미 101호 곁으로 날아오다가 못 본 체하고 아래쪽 땅에 붙어서 핀 민들레꽃에 가서 앉았습니다. 노랑나비는 노란 민들레꽃을 얼싸안고 꽃술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민들레야, 넌 참 귀엽구나. 네 꿀은 달기도 하고.” “부끄러워요. 내가 뭐 예쁘기나 해요? 저기 저 장미는 꽃 중에서도 제일 예쁘다던데요.” “모르는 소리 마. 저건 가짜야. 저런 건 백 개 천 개 있어도 소용없단다.” “어째서요?” “저런 생명 없는 꽃이 무슨 꽃이냐. 꽃이란 너처럼 살아 있는 것이라야 해.” ..  (39, 100쪽)


 아이들은 밥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밥하기를 배운 뒤에는 밥상을 차려 젓가락질과 숟가락질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밥상에서는 어떻게 하고, 밥을 먹고 나서 어떻게 치우며 설거지는 또 어찌저찌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밥하기를 할 때에는 날마다 먹는 밥을 어떻게 마련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밥 한 그릇을 차리기까지 어느 만큼 품과 땀과 겨를을 들이는지를 몸으로 배워야 합니다. 먹고 남은 밥쓰레기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또한 몸으로 배워야 합니다. 환경책에 적힌 숫자나 통계로 배울 수 없습니다. 해마다 한국에서 나오는 밥쓰레기만 하더라도 몇 조에 이른다는 숫자를 안다 한들 밥쓰레기를 잘 치울 수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옷을 다 돈을 치러 사서 입는다지만, 옷을 돈으로 사서 입는다 하더라도 단추를 꿰거나 구멍난 데를 기우는 바느질쯤은 누구나 어린이일 때부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웨덴 어린이 “말괄량이 삐삐”는 아홉 살인데, 삐삐하고 함께 살아가는 원숭이가 입는 옷을 삐삐가 손수 뜨개해서 입히고, 말한테도 목도리를 뜨개해서 씌웁니다. 삐삐하고 살가운 동무인 토미와 아니카 또한 스스로 신는 양말이나 스스로 끼는 장갑쯤은 스스로 뜨개질을 해서 마련합니다. 게다가 성탄절 선물로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뜨개옷’을 하나씩 드립니다.

 둘째를 밴 옆지기는 아픈 몸과 마음을 다스리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뜨개질을 합니다. 옆지기한테 뜨개질이란 삶입니다. 취미나 무슨 다른 이름을 붙이는 뭔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내 옷을 내 손으로 마련해서 입어야지, 누구 손을 빌거나 이런저런 돈을 들인다고 다 될 수 없어요.

 손수 하는 일이고, 몸소 꾸리는 삶입니다. 손을 움직이며 배우는 일과 놀이이며, 몸을 써서 하루하루 일구는 삶입니다.


.. 바위는 소나무에게 이렇게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때 군인들의 총을 맞아 이 꼴이 됐단다. 북쪽 군대를 위해 남쪽의 내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남쪽 군대를 위해 북쪽의 내 얼굴이 또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나는 이 상처를 내 훈장으로 생각한단다.” 소나무들은 얘기를 듣고 있다가 마지막 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바위 아저씨, 아저씨는 이쪽도 저쪽도 위해 주었다지만, 어떻게 그렇게만 말할 수 있어요? 아저씨는 이쪽도 저쪽도 괴롭힌 거예요. 아저씨 옆에 있는 군인들은 좋았겠지만 먼 쪽에 있는 군인들은 아저씨 때문에 적을 맞히지도 못하고 총에 맞아 죽었을 거 아녜요? 상처가 무슨 훈장이라고 그러셔요?” 소나무의 불평에 바위는 ‘응!’ 하고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소나무들아,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그런 말을 하겠지만,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 너희들은 모른다.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고 있는 나는 이 땅 이 나라 사람들이 곧 내게 가까운 사람이란다. 이 나라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참 이상한 일이 아니냐? 천 년도 훨씬 전에 싸우는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얘기한 그 총싸움도 같은 이 나라 사람들끼리 하는 전쟁이었어. 왜 그러지? 왜 한나라 사람끼리 싸우는가 말이다. 이 몸에 당한 상처가 모두 나의 훈장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이 나라 사람들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야.” ..  (116∼118쪽)


 이 나라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자라지 못합니다. 이 나라 푸름이 또한 푸름이로서 크지 못합니다. 이 나라 어린이랑 푸름이는 그저 대학바라기 시험기계로 길들여집니다. 열아홉이 되고 스물이 되더라도, 제 손으로 밥 한 그릇 차릴 줄 모를 뿐더러, 텃밭에서 푸성귀를 기른다든지 논에서 벼를 돌본다든지 할 줄을 모릅니다. 바느질이건 뜨개질이건 하지 못하는 채, 빨래며 살림하기며 아이키우기며 도무지 모릅니다. 아니, 어린이와 푸름이가 모르기 앞서, 어린이와 푸름이를 보살핀다는 어른부터 모릅니다.

 어른부터 제 삶이 없습니다. 어른부터 제 삶을 일구지 않습니다. 어른부터 엉망진창입니다. 어른부터 좋은 삶·착한 삶·고운 삶이 무엇인지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돈벌이에 바쁩니다. 어른들은 돈벌이 때문에 빠듯합니다. 어른들은 돈벌이를 하느라 아웅다웅 다툽니다. 어른들은 책 한 권을 손에 쥐어도 돈벌이하고 이어진 책 아니면 들여다볼 줄 모릅니다.

 이런 엉터리 바보 똥개 밥통 멍텅구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거나 돌볼 수 있을까요. 그저 지식덩어리인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무슨 삶을 밝히거나 보여줄 수 있는가요. 지식덩어리 어른은 지식덩어리 아이를 낳습니다. 돈벌이에 매인 어른은 돈벌이에 길든 아이를 만듭니다.


 (2) 이원수 문학을 아이들한테 읽히는 까닭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 작품 열 가지를 그러모은 동화책 《골목대장》을 읽습니다. 1958년 작품부터 1974년 작품까지 골고루 깃든 《골목대장》을 생각하면, 가장 오래된 작품은 자그마치 쉰 해가 지났고, 가장 요새 작품조차 마흔 해 가까이 됩니다.

 퍽 해묵은 작품을 아이들한테 읽히려 하는구나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쓴 지 제법 오래되었다 해서 해묵은 작품이지 않습니다. 1958년에 쓴 동화이기 때문에 2008년에 쓴 동화보다 읽힐 값어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1974년 동화는 2004년 동화만큼 아이들이 사랑하기 어려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빛나는 문학’을 읽혀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한테 ‘새로운 문학’을 읽혀도 좋겠습니다만, 빛나지 않으면서 새롭기만 한 문학이라면 구태여 읽히지 않아도 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아름다운 문학’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재미난 문학’을 읽혀도 좋겠습니다만, 킥킥 웃도록 이끌기는 하되 조금도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담는다면, 이런 글은 문학이라는 이름이나 동화라는 이름이나 하나도 안 어울립니다.


.. 이 할머니는 주막을 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일은 농사일이었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산골의 논밭 뙈기를 조금씩 사 모아 며느리와 같이 농사를 지어 왔다. 마흔이 가까워진 며느리가 곧 숙희의 어머니다. 숙희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그 산밭을 갈고 논을 만지며 살아오는 억척스런 여자였다. 남자가 없는 집안이라 할머니와 며느리와 손녀-여자들만이 살아가는 힘겨운 살림이었다. 그러나 여자 세 사람은 늙은이는 늙었어도, 숙희는 어렸어도, 다 부지런하고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지 않아서 따스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 그렇지만 대대로 물려받아 살아온 집을 버리고 떠나기는 누구나 싫어했다. 땀흘려 가꾸어 온 논밭이 물 속에 잠겨 버리는 것은 누구나 아깝고 원통한 일이었다 … 나라가 남북으로 두 조각이 나서 서로 다니지 못하는 경계선이 바로 길순이가 사는 동네 근처에 생겼던 것이다. 왜 그런 경계선이 생겨야 하는지 길순이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길순이의 아버지도 그 까닭을 잘 몰랐고, 그런 것이 생겨서 장사를 다니기 어렵게 된 것이 괴로울 뿐이었다 ..  (36∼37, 124쪽)


 이원수 님은 온삶을 어린이사랑으로 꾸린 분입니다. 오로지 어린이사랑으로 글을 쓰고 문학을 하며 책을 묶었습니다. 어린이가 어린 나날을 알차고 아름다이 보내면서 빛나는 푸름이로 살아낸 다음, 씩씩하며 튼튼한 어른이 되기를 꿈꾸는 글과 문학과 책을 선물처럼 남기고 1981년에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에는 동심천사주의라든지 반공이라든지 따분한 훈계라든지 깃들지 않습니다.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에는 오직 따뜻한 사랑과 착한 믿음만 깃듭니다. 어린이가 받아먹을 마음밥이란 오직 따뜻한 사랑과 착한 믿음뿐이라 여기며 태어난 이원수 어린이문학입니다. 《골목대장》에 실린 열 가지 이야기 또한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착하며 따스하게 살아가기를 꿈꾸는 넋으로 가득합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고 내 동무를 아끼며 내 살붙이를 보듬을 줄 아는 포근함과 넉넉함이 깊이 스밉니다.

 전쟁을 슬퍼하며 평화를 기뻐하는 착한 사람 눈물을 담습니다. 싸움을 멀리하며 어깨동무를 좋아하는 예쁜 사람 웃음을 담습니다. 흙과 땀과 햇볕을 사랑하되, 돈과 이름값과 힘(권력)을 멀리하는 고운 사람 굳은살을 담습니다.


.. 일요일, 나는 오빠 무덤에 올 때마다 오빠가 죽고 난 뒤 (1960년) 4월 26일에 일어난 일과 그 후의 일들을 오빠한테 얘기하듯 일러 줍니다. 무덤 앞에 앉아서 꼭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하듯이 종알종알 속삭여 줍니다. 속삭여 주어도 속삭여 주어도 마음이 시우너하지는 않았습니다 … 오빠 동무라는 그 학생은 “죽은 사람들의 귀가 땅 위의 일을 지켜 듣고 있듯이, 우리도 땅 위에서 나쁜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보아야 하는 거란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도둑질하는 사람이 생기면 끝까지 그런 사람을 내쫓아야 하니까 말이야.” … “만든 꽃은 오래 가죠. 생명이 없는 것이니까 새삼스레 시들거나 죽거나 할 까닭도 없지요.” ..  (80, 85∼86, 104쪽)


 그런데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시를 썼습니다. 이 나라에 친일시 안 쓴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생각한다면 끔찍하도록 괴로우면서 슬픕니다. 일제강점기에 감옥에서 숨지거나 떵떵거리는 부자라서 친일시 따위야 쓸 일이 없다는 사람들 아니라면 친일문학을 안 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몸이 튼튼하고 마음 또한 튼튼해서 그 어떤 모진 괴롭힘과 들볶음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친일문학에 손을 대고 마는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이원수 님이 당신 친일문학을 뉘우치지 않은 채 죽었다면서 나무랍니다. 어떤 이는 이원수 님이 당신 친일문학을 놓고 딱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반공문학과 동심천사주의가 판치는 슬픈 독재나라(이원수 님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 독재자가 나라를 무섭게 짓누르던 1981년에 흙으로 돌아갔습니다)에서 어린이문학을 곧게 지키려 하면서 당신 티끌을 밝힐 수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림없는 소리로, 이원수 님 친일문학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낱낱이 꾸짖고 밝혀야 합니다. 죄값을 씻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잘못을 밝히면서 죄값을 씻어야지요.

 잘못을 저질렀으니 손목아지나 목아지나 팔다리쯤 뎅겅뎅겅 잘라서 죽이면 되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철부지들은 모조로 산 채로 땅에 파묻으면 되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기에 한결 따스히 타이르며 보듬어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켜보면서 더 사랑해야 합니다. 예부터 미운 아이한테 떡 하나 더 준다고 하던 말을 곱씹어야 합니다. 밉기 때문에, 안타깝기 때문에, 불쌍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고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저지른 잘못을 돌이키지 못한 친일문학자가 한국땅에 몹시 많습니다. 너무도 많습니다. 잘못을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자꾸자꾸 이은 바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한 번 저지른 잘못을 좀처럼 씻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이원수 님 같은 사람이 똑같이 화살을 맞습니다.


.. 무쇠의 일당은 관가에 불손한 놈들이라 하는 말을 듣자, 솔이는 아버지와 솔이도 그러한 죄를 지은 일을 생각하고, 무쇠라는 도둑이 정말 나쁜 사람인지 의심이 들었다. 죄 없는 아버지를 잡아다 생명이 위독할 만큼 때린 관가였다. 관가에 불손하다 하여 아버지는 혹독한 매를 맞지 않았는가? 그런 것 보면 무쇠 일당도, 어쩌면 솔이 아버지가 칭찬할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170쪽)


 잘못은 잘못대로 다스리면서 죄값을 씻도록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늘 그러하지요? ‘네 녀석, 깨진 그릇을 어쩔 테냐? 너, 그릇을 깼으니 네 손목도 깨자!’ 하면서 작두로 손목을 삭둑 자를 어버이나 교사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잘못한 사람한테 잘못을 찬찬히 묻고 스스로 뉘우치도록 하면서 ‘죄를 씻는 길을 걷도록’ 하는 어버이나 교사가 아닌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은 당신 나이 서른두어 살 무렵에 친일시를 썼습니다. 이원수 님은 가난한 채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친일시를 썼습니다. 이러던 1945년, 당신 나이 서른다섯이 될 무렵 해방을 맞이합니다. 해방을 맞이했으나 여느 사람처럼 마음 활짝 열어 기쁨에 젖을 수는 없으나, 당신이 끌어들인 티끌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저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때부터 이원수 어린이문학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당신 스스로 가난한 삶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당신이 저지른 잘못을 씻으려고 슬프며 힘든 길을 말없이 걸어갑니다.

 어떤 이들은 금세 사과글이니 반성문이니를 씁니다. 이원수 님은 이런 종잇장은 한 번도 안 씁니다. 사과글이나 반성문을 썼으면서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원수 님은 반성문이나 사과글이 아니라 ‘어린이문학 작품을 더 바지런히 더 아름답게 쓰는 길’로 우리 앞에서 뉘우쳤습니다. 나라밖 좋은 어린이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미운 새끼오리》나 《장발장》이나 《꿀벌 마야의 모험》이나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비롯해 추리문학이나 공상과학동화 가리지 않고 참으로 많은 나라밖 좋은 어린이문학을 우리 말로 옮겨 우리 아이들한테 읽히면서 당신 스스로 좋은 창작을 내놓고자 온힘을 바쳤습니다. 이러면서 페스탈로치 같은 분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알려주려고 위인전을 쓰거나 나라밖 위인전을 우리 말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 아! 마음은 하느님에게 가 있을까? 가엾은 희수(개)의 마음도 하느님이 데리고 계실까? … 아! 자유를 좋아할 줄 알고 독립을 좋아할 줄 아는 우리 앵문조는 훌륭한 새가 아닙니까? 갇힌 몸으로 아무리 잘 먹고 지낸들 그게 행복한 생활은 아니겠지요! ..  (27, 96쪽)


 나는 한 아이 아버지이자, 곧 두 아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이런 짓을 안 하겠다.’ 하고 입으로 밝히는 일도 해야겠으나, 입으로만 밝히기 앞서 몸으로 밝히고, 삶으로 오래오래 한결같이 지킬 수 있어야 두 아이한테 아버지답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아이를 함께 돌보며 살아가는 옆지기 앞에서도 글이나 말에 앞서 몸과 삶으로 아름답고 착하며 참다이 어깨동무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보람이나 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입으로 읊는 ‘사랑해’도 사랑스럽겠지요. 그렇지만, 참사랑은 애써 말로 나타내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알아챕니다. 몸과 마음으로 느낄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이원수 님이 몸이 아파 병원 침대에 누워 밥을 못 먹고 호스를 코에 찔러 영양분을 넣으면서 글쓰기는커녕 말하기조차 못하던 때에 ‘나오지 않는 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내어’ 당신 따님한테 들려준 마지막말이자 마지막 어린이문학인 동시 〈겨울 물오리〉에 나오는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제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하는 노래처럼 아름다우면서 눈물겨운 반성문이자 사과글은 이 땅에 둘도 셋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살아가며 푸름이답게 크고, 바야흐로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쁜 어른이 되도록 사랑과 믿음을 바쳐야 할 한 사람입니다. (4344.3.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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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2016-04-2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훌륭한 독후감입니다.
같은 책을 읽었는데 어쩌면 이런 독후감이 나올 수 있는건지,
매번 부끄러워집니다.
이원수님에 대한 글까지, 감사합니다.
 
너의 눈이 되어 줄게 따뜻한 책꽂이 1
오오니시 덴이치로 지음, 야마구치 미네야스 그림,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장님 개’를 보살피는 어린이와 할아버지
 [푸른 책과 함께살기 71] 오오니시 덴이치로, 《너의 눈이 되어 줄게》(청어람미디어,2003)



- 책이름 : 너의 눈이 되어 줄게
- 글 : 오오니시 덴이치로
- 그림 : 야마구치 미네야스
- 옮긴이 : 이규원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 (2003.5.21.)
- 책값 : 7500원



 예전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를 함부로 키우지 않았습니다. 개나 고양이를 알뜰히 사랑하거나 개나 고양이를 키울 까닭이 있을 때에만 키웠습니다. 알뜰히 사랑할 수 있는 개나 고양이가 아닌데 섣불리 키우면, 이 개나 고양이가 죽는 날까지 곁에서 지켜보거나 함께 살아내지 못합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까닭이 있어 키우면, 개나 고양이는 그런대로 잘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마냥 귀여워 보이기만 해서 개나 고양이를 기르려 하다 보면, 새끼일 때에는 귀엽다지만 크고 나면 덩치가 너무 커진다든지 ‘말을 안 듣는다’든지 하면서 재미없거나 미워집니다. 사람들 살림집이 시골에서 도시로 많이 옮겨졌을 뿐 아니라, 이제는 아예 처음부터 도시에서만 살다가 죽을 때에도 도시에서만 죽다 보니까, 집에 외롭게 남는 개나 고양이는 그야말로 외로워지다가는 버려집니다. 사람들은 집짐승이라며 개나 고양이를 집으로 들이지만, 정작 어디를 다니거나 일하러 움직이거나 놀러 쏘다닐 때에는 개나 고양이를 집에 두기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개나 고양이가 자꾸 새끼를 낳으면 도무지 모두 맡아서 기를 엄두를 못 내겠지요.


.. 노조미가 강아지를 안아 주었어요. 강아지는 바들바들 떨면서 작은 소리로 낑낑거렸어요. 그 소리는 마치 ‘무서워요. 제발 나 좀 살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  (11쪽)


 예부터 집짐승은 고기를 얻으려고 길렀습니다. 또는 집에서 논밭 일을 할 때에 큰힘을 내어 거들 수 있도록 부리려고 길렀습니다. 고양이는 집에서 기른다기보다 집에 깃드는 쥐를 쫓아 주는 보람으로 먹이를 주면서 고맙게 여겼습니다. 개라는 짐승은 사람한테 잘 길들면서 사람이 집을 비운 뒤에도 집을 지키는 노릇을 해 주었습니다. 개 또한 고기를 얻으려고 기른 짐승이었는데, 이제는 개고기를 얻으려는 개가 아니라 집에서 한식구로 지내는 짐승이 됩니다.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 눈으로는 흙밭을 뒹굴며 집지킴을 해야 할 개를 집안으로 들이는 일이 마뜩찮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도시살림에서는 개가 굳이 집지킴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시라는 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보금자리가 섬처럼 동떨어집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개이든 고양이이든 사람하고 도시에서 살아가자면 몹시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는 나무나 지붕을 잘 타기에 이곳저곳 홀가분하게 누비면서 다른 골목고양이 동무를 사귄다지만, 개는 함부로 풀어서 기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개는 늑대하고 한 핏줄이요, 늑대는 거칠게 싸워서 고기를 얻어야 비로소 목숨을 잇는 들짐승이거든요. 덩치 큰 개를 길에 가만히 풀어서 키운다고 한다면, 동네사람은 두려워 할밖에 없습니다.

 개 또한 목숨이면서 짐승이지만, 개로서는 사람하고 함께 살아가자면 목줄을 안 할 수 없습니다. 목줄을 안 하자면 집안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마음껏 들판을 뛰어다니며 사냥을 해서 살아가던 핏줄을 타고난 개인 만큼, 사람처럼 이곳저곳 돌아다니지조차 못하면서 집안에서만 지내야 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그런데 개는 더없이 착해서 집안에서만 지내면서도 사람하고 잘 어우러집니다. 저 가고픈 대로 마음껏 가지 못하면서도 저하고 함께 지내는 사람 말을 잘 따르며 귀여운 짓을 합니다.


.. “강아지를 기른다고? 노조미, 그럴 수는 없단다.” 노조미는 엄마를 올려다보며 물었어요. “왜 안 돼, 엄마? 이 강아지는 집도 없는데.” “노조미, 아파트단지에서는 애완동물을 기를 수가 없단다. 강아지가 불쌍하긴 하지만 여기서는 안 돼.” ..  (16쪽)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 할 때에는 ‘귀염둥이 장난감’이 아닌 ‘산 목숨’을 키우는 노릇입니다. 산 목숨은 밥을 먹습니다. 산 목숨은 움직여야 합니다. 산 목숨은 똥오줌을 눕니다.

 아기를 낳은 어버이라면 아기를 알뜰히 보살펴야 할 뿐 아니라, 아이가 신나게 뛰어놀거나 움직일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본다든지 함께 손잡고 놀아야 합니다. 이제 밖으로 나왔으니까, 아기 스스로 기고 서고 걷고 밥먹고 뛰라 할 수 없어요. 차근차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하나 보살피며 이끌어야 합니다. 아기가 자라는 동안 누는 똥오줌을 치워야 하고, 똥오줌을 가리도록 가르쳐야 하며, 스스로 밥을 먹게끔 이끌어야 합니다.

 아이도 개도 모두 귀염둥이가 아닙니다. 아이도 개도 모두 장난감이나 놀잇감이 아닙니다. 인형 아닌 산 목숨인 아이이며 개입니다.

 집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든 개를 거두어 돌보든, 우리들은 누구나 ‘산 목숨’이자 ‘산 동무’요 ‘산 살붙이’인 줄을 깨달아야 해요. ‘애완동물’, 곧 ‘귀염둥이 짐승’일 수 없습니다. ‘애완 아이’일 수 없거든요.

 한식구이자 나와 같은 산 목숨인 줄을 똑똑히 느끼면서 어깨동무하지 않고서야 아이이든 개이든 사랑스레 돌보면서 서로를 아낄 수 없습니다. 한식구이자 나와 같이 어여쁜 목숨이라고 찬찬히 느껴야 비로소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이니 무어니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고운 목숨을 내 어버이한테서 선물받았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하여 만난 짝꿍하고 맺은 아이가 얼마나 고마운 선물이요 목숨인가를 가슴 깊이 느껴야 합니다.


..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부탁하고 또 부탁했어요. 강아지를 내버려두면 죽어버릴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너무 아팠던 거예요 … 사카모토 할아버지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어요. 강아지는 불쌍하지만, 규칙은 규칙 아닌가? 그때 노조미가 또박또박 물었어요. “앞 못 보는 사람은 맹도견이 도와주는데, 앞 못 보는 개는 누가 도와주나요?” … 할아버지는 간절한 애원에 가슴이 뭉클했어요.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건 생명이라고 말해 왔으면서,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 강아지를 내버리라고 할 수는 없지.’ ..  (26∼28쪽)


 《너의 눈이 되어 줄게》를 읽습니다. 일본에서는 “目の見えない犬ダン”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입니다. 일본책 이름을 풀자면 “눈이 보이지 않는 개, 단”입니다. 일본책에는 수수한 이름이 붙었으나 한국책에는 좀 ‘아이들이 감동하도록 이끌려는 이름’을 붙였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책이름을 이렇게 새로 붙이더라도 “너의 눈”이 아니라 “네 눈이”이나 “네게 눈이”라 적어야 할 텐데요. 아이들한테 잘못된 말버릇을 심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어찌 되든, 이 책 《너의 눈이 되어 줄게》는 ‘앞 못 보는 개’ 이야기를 다룹니다. 앞을 못 본다며 새끼일 때부터 누군가한테서 버림받은 개를 동네 어린이가 살려내어 알뜰히 보살피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 “단, 기쁜 소식이 있단다. 네 이야기로 만든 그림연극이 올해 최우수상을 받았다는구나. 금메달이라구. 네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사카모토 할아버지는 단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어요 ..  (56쪽)


 버림받은 ‘장님 개’는 아파트단지 어린이가 찾아서 보살핍니다. 그런데 아파트단지에서는 개를 키울 수 없다고 못박습니다. 어른들, 그러니까 아이들 어버이는 개를 내다 버리라고 말합니다. 장님 개를 불쌍히 여기는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딱 한 사람, 아파트단지를 지키는 할아버지 한 분은 ‘규칙은 규칙’이지만 ‘산 목숨을 내다 버릴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저희 집에서 돌아가며 맡아 보살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파트단지 빈터에 몰래 개집을 마련해 돌보면 어떻겠느냐고 생각하지만, 이내 어른들한테 들킵니다. 이때에 아파트단지 지킴이 할아버지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섭니다. 할아버지가 곁에서 개집과 울타리를 마련해서 돌보아 줄 테니까, 아이들이 바라는 대로 장님 개를 우리가 건사하자고 허리 숙여 바랍니다.

 할아버지는 젊은 엄마 아빠 앞에서 기꺼이 허리를 숙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이를 더 먹었달지라도 목숨 하나 앞에서는 똑같은 목숨이기 때문이에요. 어린이들 또한 장님 개를 그저 딱하게만 여긴 채 지나칠 수 있고, 제 엄마 아빠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며 내다 버릴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제 어버이한테 꾸중을 듣더라도 장님 개를 내다 버릴 수 없다고 외칩니다. 장님 개도 똑같이 아름다운 목숨이라고 외칩니다. 이 가녀린 목소리를 아이들 어버이는 듣지 못합니다. 할아버지가 허리 숙여 바라며 바랄 때에 겨우 마음이 움직입니다.


.. 산비둘기들은 번갈아 가며 그렇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아예 전부가 단의 밥그릇으로 몰려와 머리를 집어넣고 콕콕 쪼아먹기 시작했어요. 단은 산비둘기들과 함께 사이좋게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밥을 먹었답니다 ..  (74∼75쪽)


 《너의 눈이 되어 줄게》라는 책을 읽다 보면, 장님 개를 살려낸 몫은 어린이들이지만 장님 개를 보살피며 아낀 몫은 바로 할아버지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먼저 장님 개를 알아보아서 건져내어 돌보려 했다면 아마 아파트단지 한켠 빈터에 개집과 울타리를 마련해서 키우지 못했겠지요. 지킴이 할아버지는 지킴이 노릇을 해야지, 왜 규칙을 어기며 엉뚱한 짓을 하느냐고 한소리를 듣거나 쫓겨났겠지요. 아이들 또한 지킴이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도움을 받지 못했을 테고요.

 이 땅에서 가장 여리다 할 만한 어린이와 늙은이가 장님 개를 지켜 주었습니다. 가장 힘없다 할 어린이와 늙은이가 힘없는 목숨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은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이웃입니다. 힘든 동무를 돕는 사람은 힘여린 동무입니다. 걸음이 어려운 할머니가 지하철 높은 계단에서 힘겨워 할 때에 한쪽 팔을 붙잡거나 한쪽 어깨를 내어주어 도와주는 이는 할머니처럼 몸이 힘들거나 몸이 힘들어 본 사람입니다.

 어린이들이기 때문에 장님 개를 알아봅니다.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장님 개를 따스히 돌봅니다.

 부자라 해서 다 나쁘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서 착한 마음이나 참다운 넋을 자꾸 잃거나 잊습니다. 부자가 되었으면 즐거이 이웃사랑을 하면 좋으련만, 더 큰 부자가 되려고 돈굴리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나는 네 살 딸아이를 돌보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곧 둘째 아이를 맞아들여 집살림을 꾸릴 어버이로서 생각합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 집은 부자로 살아가는 나날은 꿈꿀 수 없기도 하지만, 우리 살붙이들이 사랑스레 살아갈 나날을 꿈꾸면서 조금 더 예쁘며 착하게 어우러지자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착한 어린이로 살아가면서 착한 푸름이로 마음껏 흐드러지도록 곁에서 돕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착한 어른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도록 어버이 노릇을 착하게 하고 싶습니다. 내 몸처럼 네 몸을 생각하고, 네 마음과 내 마음이 살가이 만날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4344.3.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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