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마법의 신문 기자 동글이의 엽기 코믹 상상여행 2
야다마 시로 지음, 오세웅 옮김 / 노란우산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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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랑 살아가면 신문을 읽지 않는다
 [어린이책 읽는 삶 1] 야다마 시로,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노란우산,2010)



 집에서 아이 아버지는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 어머니도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 집은 종이신문을 받아보지 않거든요. 따로 인터넷을 누비며 누리신문을 읽지도 않습니다.

 집에 따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습니다. 집에 따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으니 방송을 볼 일도 없습니다. 때때로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기는 하지만, 누리방송이나 동영상을 보는 일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나거나 터지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일어나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나라밖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죽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한창 무언가를 많이 배워야 한다고 여기면서 살짝 대학교에 발을 담가 다섯 학기를 다니던 때를 떠올립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에서 배움삯은 내 아버지가 돈을 빌어 마련해 주었고, 대학교 둘레에서 먹고지낼 잠자리는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스스로 장만했습니다. 어쨌든 신문사지국은 밥과 잠을 얻는 곳이요, 일삯이 나오면 이 돈으로 책을 사읽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신문사지국에서 일하니 이곳에서 돌리는 몇 가지 신문은 거저로 읽을 뿐 아니라, 다른 지국하고 신문을 바꾸어 읽곤 합니다. 대학교 다섯 학기를 다니며 신문사지국에서 일하는 동안 날마다 열 가지 ‘중앙일간지’라 하는 ‘서울에서 나오는 큰 신문’을 읽었습니다.

 열 가지 큰 신문에다가 스포츠신문과 경제신문과 영어신문을 날마다 찬찬히 읽는 동안 시나브로 느낍니다. 열 가지 신문을 읽든 스무 가지 신문을 읽든,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모두들 똑같은 일과 사람을 다루며, 똑같은 곳에서 취재를 해서 글을 씁니다. 이름은 중앙일간지이지만, 정작 왜 ‘한복판(중앙)’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일간지를 채우는 이야기는 95퍼센트 ‘서울에서 일어나는 서울 이야기’였거든요.

 열 가지 신문을 날마다 읽으면서, 열 가지 신문마다 글투가 다르고 사진결이 다르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놓고 조금씩 다른 글투와 사진결로 기사를 채운대서 무엇이 달라질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열 사람이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면서도 다 다르게 느끼거나 생각하잖아요. 구름을 바라보든 비를 느끼든, 열 사람은 열 가지 느낌입니다. 열 가지 신문이라면 열 가지 글투가 될밖에 없습니다. 굳이 ‘다른 글투를 느끼자’며 여러 신문을 볼 까닭이 없어요. 이 신문이 못 짚는 이야기를 저 신문이 짚는다든지, 저 신문이 안 다루는 이야기를 고 신문이 다루어야 바야흐로 여러 가지 신문을 보는 보람이 있습니다.


.. 한참 생각한 끝에 ‘벽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벽신문은 커다란 종이에 기사를 적어서 어딘가에 붙이기만 하면 된다. 뉴스거리는 여기저기에 많기 때문에 기사를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제 1호 신문을 만들었다 ..  (5쪽)


 신문이나 방송하고는 금을 그으면서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 책 또한 그닥 많이 읽지 못합니다. 오늘날 여느 사람하고 견주면 많이 읽는 셈일 테지만,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살아가며 책읽기가 줄고, 아이 하나를 낳으며 책읽기는 훨씬 줄며, 아이 둘이 되니 책읽기는 더더욱 줍니다.

 집일을 도맡지만, 집일을 제대로 도맡는다 말하지 못합니다. 옆지기가 잔소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지, 옆지기가 ‘집일이 이게 무어냐?’ 하고 따지면 하나부터 열까지 할 말이 없습니다. 날마다 할 집일을 날마다 옳게 건사하지 못하니, 집일을 도맡느라 하루 열 시간을 넉넉히 쓰더라도 집꼴이 그닥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다든지 신문을 들춘다든지 방송을 뒤적일 겨를이 없어요. 생각해 보면, 집일로 바쁘니 이것저것 챙길 수 없습니다.

 이레째 퍼붓던 비가 하루 그친 다음 다시 비가 퍼붓는가 싶더니, 밤에만 조금 흩뿌리고 날이 살며시 갭니다. 언제 다시 퍼부을는지는 모르지만, 구름이 살며시 걷히면서 햇살이 드리웁니다. 멧자락에서는 멧새 소리가 예쁘게 들리고, 웃마을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당에 나가면 도랑에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빗소리에 잠겨 숨죽이던 소리들이 모조리 깨어납니다.

 갓난쟁이를 안고 마을길을 걷거나 멧길을 거닐 때에 물소리가 콰르르 조르르 들리면, 이 소리를 듣고 갓난쟁이가 참 잘 잡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히면 응애 하면서 곧바로 깹니다. 물소리는 크든 작든 아이를 곱게 재웁니다. 이와 달리, 자동차 소리는 크든 작든 아이를 놀래킵니다. 아이 곁에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가 무엇하고 살가이 사귀도록 해야 좋을까를 몸으로 느낍니다. 아이하고 살아갈 어른으로서 내 하루를 어떻게 다스려야 아름다울까를 마음으로 깊이 되새깁니다.


.. 어떤 사람의 창피스러운 이야기를 신문에 쓰면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아예 신문을 만들 수 없는 건 아닐까? … 나는 가짜 신문 제 1호를 붙였다. ‘이제 두고보라지. 모두들 깜짝 놀랄 거야!’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다. 가짜 신문이라고 분명히 써 놨는데도 사람들은 진짜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 “아예 냉장고를 넣어 두면 편리할 텐데…….”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배 안에 먹거리를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게…….” 아무리 장난 삼아 하는 이야기라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뿐이었다  ..  (19, 24, 45쪽)


 어린이책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노란우산,2010)를 읽습니다. 앙증맞은 그림에 앙증맞은 글이 어우러진 어여쁜 이야기책입니다. 일본에서는 1985년에 나왔고, 한국에서는 2010년에 옮겨집니다. 나는 이 책을 헌책방에서 일찌감치 일본책으로 보았습니다. 그림이 퍽 귀여웁다고 느꼈고, ‘잘 그렸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줄거리는 어떠할는지 모르나, 일본 어린이책을 꽤 많이 옮기는 우리 흐름을 돌아본다면, 퍽 예전부터 옮길 만하지 않겠느냐 싶었으나, 이제서야 한국말로 나옵니다.

 이 이야기책을 쓴 야다마 시로 님은 책끝에 “‘진짜’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먼저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좋아요(81쪽).” 하는 말을 붙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자면, 몸소 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그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 또한 내가 몸소 알아보지 않고서야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직한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믿기도 하지만, 내가 받아들여 즐길 이야기라면, 내 몸으로 겪어야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고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어요.

 몸소 아기를 안아야 아기 느낌을 압니다. 아기를 달래고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주어야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나날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손수 밥을 차리고 손수 밥을 치우며, 손수 빨래를 하고 손수 빨래를 걷어 개야, 비로소 집일이 어떠한가를 깨닫습니다. 걸레를 손수 빨고, 빗자루를 손수 들어야, 집을 돌보는 나날을 알아차립니다.

 입에 넣고 냠냠짭짭 씹어야 밥맛을 압니다. 눈으로 보아서는 밥맛을 모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자면 ‘신문을 읽기’만 해서는 모를 뿐 아니라 ‘내 눈으로 지켜본다’고 해서 알 수 있지 않아요. 더 깊이 스며들어야 해요. ‘삶으로 받아들이도록 몸으로 부대낄’ 때에 천천히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만든 재미있고 멋진 신문을 붙여 주면 이 알림판도 좋아하겠지?’ ..  (6쪽)


 두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두 아이 어버이로서 아이하고 보내는 오늘 하루가 즐겁기에, ‘아이를 키우는 보람과 재미와 힘겨움과 고단함’을 날마다 새롭게 적바림하는 신문이 없다면, 굳이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더라도, 나 스스로 내 아이하고 살아가며 날마다 새롭게 느끼는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며 어여쁩니다.

 아침에 깬 첫째 아이가 새소리를 듣는 멧자락 작은 집이 좋습니다. 첫째 아이가 깨며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에 깬 둘째 아이가 끄응끄응 하면서 옹알옹알 꽁꽁거리며 눈알을 굴리는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좋습니다. 오늘은 비가 없이 아주 후덥지근할 듯합니다. 아침부터 집안 온도가 27도. 이제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둘째 갓난쟁이를 씻기고 집안을 첫째랑 함께 치워야겠습니다. 첫째 아이는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에 나오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돼지’ 그림을 보며 무척 좋아합니다. 네 살 아이는 앞으로 네 살쯤 더 나이를 먹어 글자를 깨치면, 스스로 이 책을 넘기면서 신나게 읽겠지요. (4344.6.28.물.ㅎㄲㅅㄱ)


―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 (야다마 시로 글·그림,오세웅 옮김,노란우산 펴냄,2010.4.3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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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 다섯 남매 태어나서 한글 배울 때까지
박정희 지음 / 걷는책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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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도’ 아닌 ‘사랑’으로 보살필 아이들
 [푸른책과 함께 살기 85] 박정희,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걷는책,2011)



- 책이름 :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 글 : 박정희
- 펴낸곳 : 걷는책 (2011.6.27.)
- 책값 : 28000원



 (1) 효도를 가르칠 수 없어요


 어버이 된 사람은 아이한테 효도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효도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어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효도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전쟁이 터졌을 때에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바치라고 가르치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어느 아이가 되든, 전쟁이 터진 자리에서 목숨을 바치며 다른 사람을 죽이는 짓에 나서면 안 됩니다. 전쟁이란 처음부터 터져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전쟁을 터뜨리는 사람은 권력자이거나 독재자입니다. 권력을 움켜쥐거나 독재를 휘두르는 우두머리가 전쟁을 일으키는데,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야 할 아이들이 총칼을 들고 스스로 바보짓을 하는 군인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 된 사람은 아이한테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은 가르치거나 보여주거나 베풀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누기에 사랑이요 함께하기에 사랑이며 어깨동무하기에 사랑이에요. 아이가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사랑스러운 목숨으로 살아가도록 이끌 사람이 바로 어버이입니다. 내 목숨이 산 목숨이고, 내 산 목숨을 잇자면 다른 산 목숨을 끊임없이 받아먹어야 하는 줄 느끼도록 하는 사람이 바로 어버이예요. 고마운 내 목숨을 아끼면서 내 밥이 되는 다른 목숨 또한 고맙게 여길 줄 아는 사랑을 살과 피와 뼈로 헤아리도록 보살피는 사람이 바로 어버이입니다.


.. 좋은 동화책을 찾아다니다가 구할 수가 없어 직접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 넣은 〈육아일기〉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었다. 꼭 필요한 것만 기록했었는데, 아이들이 한글을 깨우치는 데 큰 몫을 했고, 덤으로 아이들은 모두가 그림 선수가 되었다 … 자식들이 유명한 사람,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스스로의 삶을 즐기는 행복한 어른으로 크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너희 일생을 통해 큰 힘”이 되리라고, 나중에 자식들이 일기를 보면 “자기의 존재가 퍽 고맙고 귀하다고 생각하고 기쁘겠기에” 썼다 ..  (머리말)


 어느 어버이라 하든, 아이한테 목숨을 먹입니다. 목숨 아닌 쇠붙이나 돌덩이나 흙모래나 종이조각이나 돈뭉치나 기름(석유)이나 자동차를 먹일 수 없습니다. 목숨이 깃든 밥을 마련해서 아이를 먹이는 어버이입니다. 쌀이든 보리이든 목숨입니다. 두부이든 콩나물이든 목숨입니다. 미역국이든 된장국이든 목숨입니다. 갈치와 오징어와 돼지불고기만 목숨이 아니에요. 튀김닭과 새우젓만 목숨이 아니지요. 모든 밥은 목숨이고, 사람은 누구나 숱한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예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목숨을 다루며 목숨을 보살피는 어버이는 거룩합니다. 나라에 충성하거나 회사에 근면하대서 거룩하거나 훌륭한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이를 사랑하면서 아이한테 목숨을 깨닫도록 살아가는 어버이가 거룩하거나 훌륭합니다. 수수한 어버이가 거룩하고, 여느 어버이가 훌륭합니다. 날마다 세 끼니 밥상을 꼬박꼬박 차리며 알뜰히 먹이는 어버이야말로 아름답습니다.

 어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목숨을 잇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는 삶입니다. 어버이가 마땅히 할 일이란 넷째도 다섯째도 여섯째도 내 목숨과 같이 네 목숨과 우리 목숨과 너희 목숨을 사랑하며 아끼도록 하는 삶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건사할 일이란 일곱째도 여덟째도 아홉째도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나날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삶입니다.


.. 네(명애,첫딸)가 태어난 집은 이 그림과 같이 ‘꽃집’이었다. 주소는 평양 룡흥리 부영주택 20호였다. 뒤는 솔밭이고 앞은 넓은 들인데, 그 가운데 50호쯤 되는 집들이 나란히 있어 볕과 공기가 참으로 풍부하고 경치는 더 말할 수 없이 좋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집 안팎을 곱게 꾸미셨다. 해바라기, 나팔꽃, 양귀비, 과꽃, 국화, 앵두, 복숭아, 벚, 개나리 들이 화려하게 필 때 나는 얼마나 환희를 느꼈는지, 얼마나 그리고 싶어 애썼는지 모른다 … ‘꽝’, ‘꽝’. ‘야! 무서운 소린데……. “저건 나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나님이 폭탄을 떨어뜨리시는 거야.” “잘못해서 다른 데로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하나님 나라로 가지. 하나님 나라는 아름다운 꽃고 많고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많아요.” “우리 재미있게 피란 가는 장난하자!” 너희들은 이러한 소리를 매일 했고 할아버지는 지붕에서 유엔군 비행기들의 폭격하는 모습을 구경하시고, 나와 순임이는 벼를 매에 갈아 현미밥을 짓고 보리쌀을 곱게 갈아 죽도 쑤고 고구마 순을 다듬어 된장국도 끓이고 하여 무서운 생각은 안 하고 캘캘대며 날을 보냈다 ..  (28, 48쪽)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한테 효도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를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나라에 충성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제가 발디딘 보금자리를 아껴야 합니다. 아이들은 회사나 공공기관이나 학교에 근면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제 일터나 배움터를 좋아해야 합니다.

 사랑할 어버이입니다. 아낄 보금자리요 삶터이자 마을입니다. 좋아할 일터이면서 배움터입니다. 어버이가 하는 말이라 해서 그예 따른다든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라 해서 그저 한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옳고 바른 말을 사랑해야 합니다. 착하고 참다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어버이가 되든 동무네 어버이가 되든, 옳고 바르게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할 뿐입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는 일이 나라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전쟁훈련과 살인훈련에 젊음을 바치는 일이란 더할 나위 없이 바보짓입니다. 군대를 만들어 군대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붓는 나라는 조금도 사랑할 값이나 아낄 뜻이 없습니다. 북녘이든 남녘이든,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군대를 꾸리는데, 두 나라 어느 쪽이든 사랑할 만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군대가 지키지 않거든요. 나라는 흙을 일구는 일꾼이 지키거든요. 나라는 건물을 쓸고 닦는 일꾼이 지키고, 나라는 버스나 기차를 모는 일꾼이 지킵니다. 나라는 집안일을 하며 집살림을 돌보는 일꾼이 지킵니다.

 회사일에 목매달며 새벽부터 밤까지 매이는 일은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회사일을 앞세우고 모든 내 삶을 뒤로 젖히는 삶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도록 돕는 회사가 아니라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한 해에 1억을 주든 한 달에 천만 원을 주든, 돈을 많이 준대서 좋은 회사가 아닙니다. 일하는 터전, 곧 일터인 회사는 사람다이 땀흘려 일하는 곳이어야 하고, 이웃과 내 살붙이를 아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며, 푸나무와 햇볕과 흙과 바람을 돌볼 수 있는 터여야 합니다.


.. 맑게 갠 가을날, 아버지가 미리 “16일쯤 낳게 될 거야.” 한 바로 그날, 외할머니가 남양에 가신 동안에 아버지가 너(현애,둘째)를 받아 주셨다. 학교 가는 아저씨더러 일찍 오라고 부탁하고, 문간방 영자 어머니더러 밥 지어 달라고 부탁하고, 노할아버지께는 방에 불을 때 주십사 여쭙고,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자연의 힘으로 해산이 이루어지려니 하는 침착한 태도로 너를 낳았다. 명애를 낳을 때와는 퍽 달리 쉽게 낳았다. 아저씨가 학교에서 온 다음, 연시와 침시를 사다가 잡수시며 나에게도 물렁한 것으로 골라 주시어 먹던 생각이 난다. 우리는 너를 낳았을 때 “또 딸이야!” 하고 조금 섭섭해 했다. 노할아버지께 “저는 왜 딸만 낳을까요?” 한즉, “응, 괜찮다. 너의 할머니를 닮은 게지. 아들 넷을 내리 낳고 그 다음에 딸 셋, 그리고 또 아들을 둘, 이렇게 낳았단다. 너는 딸부터 시작한 게지.” 하셨다. 아버지는 둘째라고 헌 옷만 주지 말고 새 옷도 꼭 같이 입히라고 하셨다 ..  (58∼59쪽)


 아이를 슬기롭게 키우고 싶은 어버이라면 아이 앞에서 “어버이한테 효도해야지.”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효도는 덕목이 아니고, 미덕 또한 아닙니다. 더욱이, 아이한테 효도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어버이 삶을 아이한테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물려줄 뿐입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사랑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보여주면서 물려줍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착한 매무새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드러내면서 이어줍니다. 고운 넋을 보듬는 어버이로서 고운 넋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밝히면서 나눕니다.


 (2) 사랑은 돈·이름·힘이 아니에요


 인천 화평동에서 수채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가는 박정희 할머님이 쓰고 그린 육아일기를 그러모은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걷는책,2011)를 읽습니다. 2001년에 처음 나온 책이고, 2011년에 새옷을 입고 다시 나온 책입니다. 2001년에 책이 처음 나올 때에 할머님 나이는 여든이었고, 2011년에 새옷 입은 책이 나올 때에 할머님 나이는 아흔입니다. 박정희 할머님이 50∼60년대에 다섯 아이 육아일기를 쓰고 그릴 때에는 이렇게 낱권책으로 태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셨을 테고, 더구나 새삼스레 되펴내 주리라 바라지 않으셨겠지요.

 돋보이는 글이나 그림이 실린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는 아닙니다. 눈부신 글이나 그림이 담긴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또한 아닙니다. 반짝반짝거린다든지 알록달록 어여쁘다든지 새록새록 빛난다든지 하는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도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나누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알뜰히 담은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입니다. 하늘이 내린 고운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여 고운 숨결 그대로 보살피며 아이들 스스로 얼마나 고마운 사랑인가를 느끼도록 돕고픈 마음으로 쓰고 그린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예요.

 2001년에 처음 읽고, 2011년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어여쁜 육아일기가 2021년에도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눌 수 있도록 새책방 책시렁에 예쁘게 꽂힐 수 있을까 헤아립니다.

 2001년에 처음 나온 책은 몇 해 지나지 않아 판이 끊어졌습니다. 헌책방 책시렁에서 힘겹게 찾아내어 둘레에 선물해야 했습니다. 이웃이나 동무한테 이 어여쁜 육아일기를 장만해서 읽으라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헌책방마실까지 하면서 책 하나를 찾아 읽으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셋째 딸로 고운 아기를 주셨을 때부터 그 아기, 즉 인애가 국민학교에 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히 적어 놓았다. 너를 낳은 아버지, 어머니, 또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생각하면 인애가 사는 동안 착한 일꾼이 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자기의 존재가 퍽 고맙고 귀하다고 생각하며, 기쁘겠기에 바쁜 틈을 타서 이러한 글을 써 놓기로 했다. 1956년 6월. 엄마 … 위층에서 떠들면 ‘진찰을 못한다’, ‘좁으니 어서 치워라’, ‘진찰실에는 나가지 말자’ 등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자는 자리도 너무 좁아서 괴로울 지경이었다. 인애가 율목동 집을 그리워하고 경룡이네를 좋아한 것도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좁은 집 가운데서도 빨래를 널게 만든 지붕 위와 위층 큰 다다미방 사이에 있는 좁은 방은, 인애의 소꿉놀이터로 좋았다 ..  (83, 89쪽)


 그러고 보면 여느 사람들은 그림 할머님 이야기를 들을 때에 ‘할머니한테 그림을 배우면 좋겠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막상 할머님한테 그림을 배우러 한 주에 한 번 틈을 내지 못합니다. 박정희 할머님한테서 그림 배우는 삯은 한 달에 오만 원인데, 이 오만 원을 마련하지 못한다거나 한 주에 한 번 말미를 얻지 못해요. 할머님 나이가 여든을 지나 아흔이요, 앞으로 할머님을 몸소 뵈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나날이 그리 길지 않은 줄 살갗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박정희 할머님이 꾸리는 ‘평안 수채화의 집’ 수채화교실은 수채그림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이 배움자리는 물과 물감을 써서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솜씨를 배우는 자리라 할 수 있으면서, 할머니한테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마음’을 함께 익히는 자리입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할머니는 그림 재주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면서 즐기는 마음씨를 스스로 보여주면서 물려줍니다. 그림을 좋아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솜씨가 있더라도 그림을 그릴 수 없고, 그림을 즐기지 못할 때에는 눈앞에 아름다운 삶이 있어도 그림에 담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앎조각이나 학술이론이나 비평이 아닌 온 몸뚱이로 밝힙니다.


.. 순애 네가 이 세상에 나서 제 손으로 글씨를 쓸 줄 알기까지의 일을 몇 가지만 적어 놓아 주련다. 어떻게 낳고 어떻게 자랐나? 어떠한 분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컸나? 그런 이야기들은 순애 너의 일생을 통해 큰 힘이 되리라고 믿는 까닭에서다. 하나님께 순애를 기르라고 명령을 받은 엄마는, 자기의 힘은 몹시 약했으나 온 식구들의 힘을 얻어 크게 앓거나 실수하거나 하지 않고, 똑똑하고 명령하고 재주 많은 순애를 길러 왔으니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 아버지께서 “내가 번번이 받아서 딸만 낳은 것 같으니 전 산파께 수고해 달라자.”고 하셨다. 장작 꺼들이다가 별안간 진통이 시작되기에, 김 외과 간호원으로 있는 전순임 산파에게 기별을 하고 너를 뉠 자리와 입힐 옷들을 준비해 놓고 또 슬슬 장작을 날랐다. 장작을 깨끗이 쌓고 너를 낳았다. 전 산파는 모습도 아름답고 마음도 고운 처녀로 참 정성껏 우리를 도와주었다. 지금은 동서대 약방 주인한테 시집을 가서 아기 엄마가 되었지. 과일이 흔한 때라 너를 씻긴 다음 참외를 대접했다. 할머니도 전 산파와 같이 너를 받아 주시고 첫 목욕을 시킨 다음 하나님께 순산을 감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 넷째 딸로 태어난 순애는 섭섭하기는 했지만 교양 있는 어른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태어났다고 기도를 올리며 엄마는 뜨거운 눈물을 금치 못했다 … 부산에 계셨던 외할아버지께서는 너를 순산했다는 편지를 보시고 ‘아들 딸은 마음대로 낳지 못하는 것이니까 섭섭해 하지 말라.’고 어느 이화대학 출신 엄마의 이야기를 적은 긴 편지를 써 보내 주셨다. 성함은 박두성 씨고 우리 나라 맹인 교육에 공로가 많으신 분이고 많은 동생들을 데리고 교동이라는 섬에서 서울로 나오셔서 활약하시고 교육계와 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치신 분이시다. 노년에는 만성 기관지염과 중풍으로 오래 병객으로 지내셨으나 누구에게나 구슬다운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  (108, 111, 128쪽)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줍니다. 어버이는 사랑 아닌 다른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돈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나 땅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그예 사랑 하나만 물려줍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젖을 물리고 씻기며 재우는 일입니다. 젖을 물리고 씻기며 재우는 동안 노래를 부르고 따스함을 느끼도록 하는 일입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면 몸에 맞는 옷을 마련하거나 얻어서 입히고, 어버이가 여느 때에 늘 쓰는 말을 아이한테 가르치며, 어버이가 어린 날부터 좋아하던 책을 아이한테 들려주거나 읽힙니다.

 어버이 이름값을 아이한테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가 아름다이 믿으면서 일구는 삶을 물려줍니다. 어버이로서 따스하게 돌보며 어깨동무하는 삶을 물려줍니다. 이웃을 믿고 손을 맞잡는 매무새를 물려줍니다. 착한 마음이나 참다운 넋을 물려주지, 잘난 이름이나 못난 이름을 물려주지 못해요.

 흙을 일구는 어버이 곁에서 흙을 일구는 아이가 자랍니다. 자가용을 타며 돌아다니는 어버이 곁에서 자가용을 (고맙거나 미안하다는 마음이나 느낌 없이) 아무렇지 않게 타며 돌아다니는 아이가 자랍니다. 손으로 빨래해서 햇볕 드는 마당에 너는 어버이 곁에서 집일을 손수 거들고파 하는 아이가 자랍니다. 청소기를 쓰고 세탁기를 쓰는 어버이 곁에서 집일을 찬찬히 느끼지 못하면서 손이 하얗게 곱기만 한 아이가 자랍니다.

 어버이가 휘두르거나 거머쥐는 권력을 아이한테 물려주지 못합니다. 아이를 생각하는 어버이라면 권력을 휘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를 아끼고픈 어버이라면 권력을 거머쥐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보살피려는 어버이라면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어야 하고, 아이를 보듬으려는 어버이라면 작고 조용한 집에서 작고 조용한 일을 건사하면서 작고 조용한 나날을 누려야 합니다.

 더 좋다는 학교에 보낸대서 아이가 더 좋다는 앎조각을 거머쥐지 않습니다. 더 낫다는 학원에 넣는대서 아이가 더 낫다는 마음으로 더 나은 앎조각을 움켜쥐지 않습니다. 사람한테서 사람을 배우는 사람인 아이인 터라, 둘레 어른 됨됨이와 마음씨가 어떠하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어버이인 나부터 내 삶을 짚으면서 어른인 내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어떻게 아끼며 누구랑 이웃하며 일구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 네(제룡,아들)가 언제나 자기를 그지없이 사랑해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어떠한 힘든 고비에서도 착하게 행복하게 이겨 나가라고 이 글을 써 주련다. 1962년 2월 엄마 … 6·25동란으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입은 서울 인천 간의 모습은 급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정치는 권력이니 빽이니 하는 말이 흔하게 쓰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시대였다. 어찌하면 권력을 잡아 보나 어찌하면 연줄을 붙드나가 큰 문제거리고 대학 입학, 군대의 의무까지도 우물쭈물 뇌물로 해결이 되는 시절이었다 … 셋째 작은어머니가 마루에 그네를 매어 놓았다고 할머니와 놀러가서는 돌아오기를 싫어하고 꽃을 주면 싫다고 내던지니 여자 아이만 기르던 때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복잡한 한길로 자전거를 밀고 나가기 일쑤고 재게 달아다니 쫓아가기가 힘이 들었다. 넘어져서 콧잔등에 큰 허물이 생긴 것도 너무 재게 달아나서 그랬다. 젖도 다 먹이지 못하게 세차게 빨아서 자꾸만 젖꼭지가 고장나 혼이 났다. 희고 예뻐서 계집애 같다는 말을 늘 들었다 ..  (145, 148, 159쪽)


 그림할머니 박정희 님 삶을 담은 육아일기를 새삼스레 읽으면서 우리 집 두 아이를 가늠합니다. 그림할머니는 ‘고마운 사랑’인 아이를 보살피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림할머니는 ‘착한 믿음’인 아이를 돌보면서 같이 지냈습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힘들거나 홀가분하거나 언제나 복닥복닥 어우러지는 한식구인 아이들입니다.

 우리 집 둘째는 장마철에도 여느 때와 똑같이 기저귀에 똥을 누고 오줌을 눕니다. 장마철에 기저귀가 얼마나 안 마르는데, 갓난쟁이로서는 이런저런 일을 알 턱이 없겠지요. 그런데, 이런 둘째를 바라보며 첫째 때에는 참 용하게 이런 나날을 잘 견디며 받아들였구나 싶고, 두 아이를 키운 내 어버이는 내가 갓난쟁이였을 때에 어떤 마음이요 삶이었을까를 넌지시 톺아봅니다.

 우리 집 첫째는 밤오줌가리기를 하려고 밤 한 시 십 분에 살며시 일으켜서 오줌을 누였더니 두 시가 지나고 세 시가 되도록 다시 잠자리에 들 생각을 안 합니다. 한 시 십 분부터 둘째 기저귀를 빨아 한 시 오십 분에 들여다보니 눈이 말똥말똥한 채 노래를 부르며 놉니다. 낮잠 없고 밤잠조차 제대로 안 자면 아침부터 또 얼마나 무거운 몸으로 칭얼대려나 생각하니 골이 띵합니다. 그렇지만, 아이 어머니도 어릴 적에 첫째와 같았다 하고, 아이 아버지인 저 또한 어릴 적에 틀림없이 이와 같았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우리 아이도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될 때에 저희네 아이한테서 이런 모습 저런 삶 그런 이야기를 똑같이 느끼거나 받아들이겠지요. 그리고, 저희네 어버이인 나와 옆지기가 2001년과 2011년에 나란히 장만한 박정희 할머님 육아일기책 두 권을 나란히 펼치고 읽으면서 삶과 사람과 사랑이 어우러지는 고리를 살포시 느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두 아이 어버이부터 돈을 더 벌거나 이름을 크게 얻거나 힘을 마음껏 부리려는 삶이 아닐 뿐더러, 돈이든 이름이든 힘이든 아무것 없는 삶인데다가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는 좋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니까요. 나는 두 아이 아버지로서 우리 아이한테 예쁜 삶 담긴 고운 책을 사랑스레 물려줄 테고, 아이는 아이 깜냥껏 씩씩하고 다부지게 아이 삶을 사랑스레 즐기면서 누릴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4.6.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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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1
이철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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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손길로 즐거운 일을 가르치고 배워요

―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이철수·박현희·송승훈·배경내·하종강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1.5.16. 12000원



  쓸고 닦는 일을 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청와대이든 국회의사당이든 삼성이나 에스케이 회장실이든 쓸고 닦는 일을 안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여느 살림집이든 높직한 수십 층짜리 시멘트집이든, 날마다 쓸고 닦지 않고서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만하지 않습니다.


  대학교 건물이나 잔디밭이든, 서울 신촌이나 홍대 앞 술집골목이든, 어김없이 쓸고 닦으며 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 청소 일꾼이 없으면 대학교이든 신촌이나 홍대이든 어마어마하게 지저분하겠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버리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입니다. 버리는 사람은, 치우는 사람 아들이나 딸일 수 있습니다. 치우는 사람은, 버리는 사람 아버지나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청소 일꾼을 이 사회에서 깎아내리든 하찮게 여기든, 이 나라 어디에나 청소 일꾼은 대단히 많으며, 이들 청소 일꾼이 없을 때에는 도시 문명 사회는 쓰레기 사회로 나뒹굴고 맙니다.


  청소 일꾼은 아주 적은 일삯을 받습니다. 청소 일꾼은 무척 오래 일합니다. 청소 일꾼 이름을 떠올리거나 되새기는 지식인이나 기자나 정치꾼은 없습니다. 청소 일꾼 이야기를 위인전이나 전기나 평전으로 쓰려는 글쟁이나 사진쟁이는 없습니다.


  청소 일꾼한테는 쉼터가 따로 없습니다. 도심지 길을 쓸고 치우는 일꾼은 길바닥 아무 데나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쉽니다. 땡볕이든 그늘이든 가릴 몸이 안 됩니다. 그나마 몇 분쯤 느긋하게 쉬어도 된다는 겨를이 마땅히 없습니다. 치워야 할 몫은 날마다 못박히지만, 몇 분 일하고 몇 분 쉰다는 말미란 딱히 없습니다. 기계 아닌 사람인 청소 일꾼이지만, 주어진 일만 하도록 내몰립니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라든지, 일터에서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든지, 이들이 집에서 정갈하게 쓸고 닦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밖에서는 지저분해도 안에서는 정갈할는지 모르고, 밖에서는 정갈하다지만 안에서는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예부터 학교에서 학생한테 모든 청소를 맡깁니다. 뒷간부터 책걸상과 교무실과 교장실과 창고까지, 온통 학생이 쓸고 닦으며 치워야 합니다. 너른 운동장에 날리는 비닐봉지나 돌도 주워야 합니다. 학교 문 둘레 널브러진 쓰레기도 치워야 합니다. 교실을 비롯해 골마루 유리창까지 말끔히 닦아야 합니다. 요사이는 옛날처럼 마구 두들겨패지는 않겠지요. 예전에는 국민학교에서도 유리창이나 창틀에 자그마한 티끌 하나 묻으면 어김없이 몽둥이나 빗자루나 주먹발길이 날아오곤 했습니다. 티끌 하나 때문에 청소를 한 시간 더 해야 하기 일쑤였습니다. 즐겁게 하는 청소가 아니라 지겹고 짜증나게 받아들여야 하는 짐덩이였습니다.



.. 나중에 올려 주면 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최저임금 이상으로 돈을 주었어야 하는 거죠. 일자리를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라면서 법이 정한 최저 기준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조건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 학생들 이름표는 왜 이렇게 박음질되어 있을까요? 눈에 띄기 쉬워야 통제하기가 쉽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학생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인식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학생이 죄수와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생각해요 ..  (115, 131쪽/배경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나 학교에서 숱하게 이루어지는 몽둥이찜질은 조금 줄었습니다. 아마 예전처럼 학생한테 끔찍하게 청소를 시킨다면 인권을 짓밟았대서 금세 시끄럽겠지요. 알맞게 함께하는 청소라면 좋습니다. 교사와 학생이 나란히 즐기며 맞아들이는 청소라면 아름답습니다. 학생한테만 억지로 시키는 청소는 늘 나쁩니다.


  교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서기 앞서, 학생은 학교에서 배우는 자리에 서기 앞서, 저마다 살림집에서 쓸고 닦으며 치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초등학교에 들든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들든 대학교에 들든 다르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대서 못할 청소가 아니라, 나이가 어리면 어린 나이에 걸맞게 할 만한 청소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살아가니까 모든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학교라는 곳은 돈벌이를 하는 솜씨나 매무새만 키우는 데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슬기와 매무새를 다스리는 곳이어야 해요.


  돈을 벌어야 하는 까닭은 밥과 옷과 집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돈을 벌어 밥을 사고 옷을 사며 집을 삽니다. 으레 바깥밥을 사먹으며, 저잣거리가 되든 할인마트가 되든 먹을거리를 돈을 치러 장만한 다음 집에서 요모조모 손질해서 먹습니다.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않아요. 돈을 안 벌 수 없습니다. 돈을 안 벌면 굶어죽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돈만 번대서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잠을 잘 수 있지 않습니다.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합니다. 옷을 빨고 널어 말린 다음 개서 갈무리합니다. 바느질을 하거나 뜨개질을 합니다. 집안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끔 돌아봅니다. 늘 새 물건을 사다 쓰지 않고, 헌 물건을 잘 손질해서 오래오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알뜰히 씁니다.


  누구나 집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집에서 살림을 해야 합니다. 어린이나 푸름이라고 해서 집일이나 집살림을 안 하거나 모르는 척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잠을 자잖아요.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어야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집일을 건사할 줄 알고 집살림을 보살필 줄 알아야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집일이 어떠하고 집살림은 어떠한가를 또렷이 깨달아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만합니다. 여자만 해서 될 집일이 아니고, 여자 아닌 남자만 해서 될 집일이 아닙니다. 집식구라면 누구나 할 집일입니다. 집일이 없이는 밥·옷·집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집살림이 있어야 아이키우기·함께살기·사랑하기가 이루어집니다.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집일과 집살림을 배워야 합니다. 영어나 한자를 일찍부터 깨칠 노릇이 아니라, 걸레질과 빨래와 설거지와 개키기와 자리깔기 들을 일찍부터 옳게 배울 노릇입니다. 걷는 매무새와 절하는 몸가짐과 말하는 숨결을 알뜰히 다스릴 노릇입니다. 먼저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틀을 깨우쳐야, 이러한 밑틀을 바탕으로 앞으로 무슨 일을 찾아들여 어떻게 즐기며 살아가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 핀란드의 부자들은 수입의 60%까지, 스웨덴에서는 85%까지 세금으로 내요. 부자들은 그렇게 세금을 많이 내도 여전히 부자예요. 이런 나라들은 기업 경영이 투명해지고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결국 높은 세금이 나라 경제에 유익한 영향을 미쳤어요 …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한국의 대학생들이 자기 부모의 노동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초·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거의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 지위가 높거나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비정상적인 현상이에요 ..  (하종강/178, 192, 197쪽)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철수와영희,2011)라는 책을 읽습니다. 서울 한쪽에 자리한 길담서원이라는 책방에서 마련한 청소년인문학교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마당을 갈무리해서 엮은 책을 읽습니다. 여러 어른이 푸름이 앞에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는구나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따로 마련하는 청소년인문학교가 아닌 ‘여느 집과 여느 학교’에서 먼저 들을 노릇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보금자리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집에서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이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따스히 들려주지 못합니다.


  집에서는 여느 어버이가 들려줄 이야기이고, 학교에서는 여느 교사가 들려줄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살림집과 배움터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따로 ‘청소년인문학교 이야기책’을 엮어야 합니다. 조금 더 헤아려 본다면, 이런 청소년인문 강의가 있기에 ‘집에서 배울 대목을 못 배우는 아이들이 삶을 배우는 길을 마주할 수 있다’고 할 만하지요.


  핀란드와 스웨덴은 부자가 세금을 더 내는 나라가 아닙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사람마다 제 깜냥과 재주껏 ‘일삯을 누릴 줄’ 아는 나라입니다. 세금을 많이 내도 똑같이 부자이지 않습니다. 세금을 많이 내도 똑같이 부자라면, 가난뱅이는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안 내더라도 똑같이 가난뱅이가 되겠지요?


  핀란드와 스웨덴은 가난뱅이가 되든 부자가 되든 푸대접이나 따돌림이나 괴롭힘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누구나 밑삶을 꾸릴 틀거리가 잘 마련되었고, 이러한 밑틀에 따라 돈을 더 벌고 싶으면 돈을 더 벌 수 있고, 아름다운 숲과 사람을 사귀고 싶으면 아름다운 숲과 사람을 사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벌어들이는 돈에서 85%나 세금으로 바치는’ 셈이 아니라, ‘15%를 벌든 1%를 벌든 부자 삶이든 가난뱅이 삶이든 즐거이 맞아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벌어들인 돈 100%를 세금으로 내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는 곳이 핀란드와 스웨덴이라는 뜻입니다.



- 제가 거둔 ‘이철수 표 쌀’이라고 비싸게 사 주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요. 옆집 할아버지 거나 제 거나 똑같은 쌀일 뿐입니다. (26쪽/이철수)


- 인류의 조상은 원래 일을 안 했어요. 풀뿌리, 나무 열매 등 자연물을 채취하며 살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어요. (59쪽/박현희)


- 여러분들도 잘 아는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 씨가 거기에 자원봉사를 갔다 와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고도 감회-부여신궁어조영 봉사 작업에 다녀와서〉라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217쪽)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대한민국 살림집과 배움터에서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일과 살림과 사랑과 삶을 참다이 들려주거나 가르치거나 함께하기란 어렵기만 할 노릇일까요? 앞으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같은 책이 없어도 저마다 집에서 삶을 가르치고 배울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 예쁜 책을 곁에 두면서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철수 쌀과 할아버지 쌀은 똑같지 않을 텐데요. 어느 모로 보면 똑같은 쌀이라 할 수 있지만, 같은 쌀이라 하더라도 논자락 자리에 따라 다 달라요. 같은 마을 논이라 하더라도 흙일꾼마다 논에 바치거나 들이는 땀과 품이 달라요. 약을 안 치는 사람과 약을 더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쌀이란 있을 수 없지요. 다만, 마음으로 고이 여기면서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쌀은 사랑스러운 쌀이 돼요.


  그리고 이원수 님을 놓고 조금 더 깊이 헤아려 보아야지 싶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한 이원수 님은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썼습니다. 〈고향의 봄〉은 이원수 님이 푸름이일 때에 썼고요. 친일시를 쓴 사람 가운데 해방 뒤에 독재정권 해바라기를 안 한 사람은 오직 이원수 님입니다. 친일시를 쓴 사람 가운데 서슬퍼런 독재정권 때에 권력바라기를 안 하면서 민주와 자유와 평화와 평등과 통일을 지키거나 이루려고 땀흘리거나 피흘린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요. 오로지 이원수 님입니다.


  이원수 님은 1980년에 병으로 숨을 거두기 앞서 ‘반성문’을 안 썼을 뿐입니다. 반성문을 쓰지 못하고 죽었대서 이원수 님을 친일작가로만 내모는 일은 너무 섣부른 몸짓이리라 느낍니다. 이원수 님이 해방 뒤에 보인 몸짓이나, 해방 뒤에 아이들한테 들려준 수많은 창작동화와 번역동화는 바로 ‘반성문 쓰기와 같은 삶’이라고 바라볼 만하리라 느낍니다. 1970년대 서울 청계천에서 전태일 님이 몸을 불사르면서 노동자 권리를 외칠 적에, 이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에 씩씩하게 맨 처음으로 쓴 사람은 바로 이원수 님입니다. 요즈음은 누구나 전태일 님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으로 쓰지만 서슬퍼런 독재정권이 휘몰아치던 때에 전태일 님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으로 써서 널리 알리려 한 사람이 이원수 님인 줄 오늘날 푸름이도 잘 알아야지 싶어요. 2011.6.20.달/2016.2.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청소년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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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아셰트클래식 4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리스 포미에 그림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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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때문에 별 다섯을 주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책읽기를 할 수 없다
 [푸른책과 함께 살기 81] 허먼 멜빌, 《모비딕》(작가정신,2010)



- 책이름 : 모비딕
- 글쓴이 : 허먼 멜빌
- 그린이 : 모리스 포미에
- 옮긴이 : 김석희
- 펴낸곳 : 작가정신 (2010.1.25.)
- 책값 : 48000원



 (1) 삶이 없는 사람


 학교를 다니면서 아름다운 삶을 배운 적은 없다고 느낍니다. 학교를 다닐 때에 착한 삶을 배운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참다운 꿈을 배운 적은 없구나 싶습니다. 학교에서는 오직 시험공부만 했으며, 시험점수만 살폈고, 시험등급으로 값이 매겨졌습니다.

 나는 학교가 몹시 못마땅했지만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대학교를 두 해 다니고는 떨쳐나왔습니다. 이들 학교가 아무런 삶을 보여주지 못할 뿐더러 어떠한 삶도 가르치지 못했지만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대안학교가 없던 지난때이니, 제도권학교를 뛰쳐나온들 어찌하겠느냐 생각할는지 모르나, 오늘날 대안학교라 한대서 참말 대안이 될 만한지는 알쏭달쏭합니다. 왜냐하면, 대안학교라면서 제도권학교와 똑같이 교과서를 쓰는 곳이 많습니다. 교과서를 안 쓰는 대안학교라지만, 막상 아름다움과 사랑과 삶과 꿈을 알뜰살뜰 보여주면서 착하게 생각하도록 돕는다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배움터라고 한다면,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자유학교이든 무엇보다도 사랑을 몸소 보여주고 사랑으로 살아가며 사랑을 배우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배움터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없이 지식만 있거나 시험만 있다면, 사랑은 없는데 대안이라고만 한다면 무슨 값이 있거나 어떤 보람이 있을는지요.


.. “스타벅!” “예?” “내 영혼의 배는 세 번째로 항해를 떠난다네, 스타벅.” “예, 선장님은 그걸 원하시겠지요.” “어떤 배는 항구를 떠난 뒤 영영 행방불명이 된다네, 스타벅.” “그건 사실입니다, 선장님. 참으로 슬픈 사실이지요.” “어떤 자는 썰몰에도 죽는다. 어떤 자는 얕은 물에도 빠져 죽고, 어떤 자는 홍수에 죽는다.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도달한 파도 같은 기분일세. 스타벅, 나는 이제 늙었네. 자, 악수하세.” ..  (770쪽)


 더 깊이 생각하면,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학교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습니다. 제도권이든 대안이든 무엇을 보여주는지 궁금합니다.

 가르침(교육)이란 지식을 집어넣는 일이 아닙니다. 가르침이란 삶입니다. 가르침은 삶이기 때문에,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배우는 아이 눈높이에서 헤아릴 때에도 배움은 삶인 터라, 배우면서 가르칩니다.

 교사나 학생이나 서로서로 삶입니다. 삶을 나누는 배움터입니다. 삶을 나누지 않고서는 가르침도 배움도 없습니다. 교과서이든 문학책이든 교재가 되지 않습니다. 교재가 되는 한 가지는 오직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몸가짐이 교재가 되는데, 삶은 ‘교재’가 아닌 ‘삶’이에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학교살이를 어떻게 누리거나 즐기거나 맞아들이느냐에 따라 가르침이나 배움이 달라집니다. 집에서 집살이(집살림)를 어찌 누리거나 즐기거나 맞아들이느냐에 따라 가르침과 배움이 거듭납니다.

 교사가 되든 어버이가 되든, 저마다 나 스스로를 일으켜세워야 합니다. 내 삶을 돌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비로소 삶을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들려주는 지식이나 이야기’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어떻게 살아가며 움직이고 일하느냐’를 살피면서 배웁니다. 어른이 보여주는 모습(삶)이 고스란히 교과서이거나 교재이거나 책입니다. 어른 삶은 아이한테 사람책입니다.
 

.. “아, 스타벅, 이따금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군. 이 늙은 에이해브도 좀더 자주 기댔더라면 좋았을걸.” ..  (761쪽)


 자동차를 즐겨 타는 어른(교사와 어버이 모두)은 아이한테 ‘자동차 즐겨 타기’를 가르칩니다. 자동차를 즐겨 타는 어른 둘레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기름을 안 먹는 자동차’라든지 ‘자동차가 달리며 쓰는 기름과 자동차가 달리며 나오는 배기가스 때문에 더러워지는 삶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주 마땅히 ‘자동차 즐겨 타기’를 할 뿐입니다.

 나이가 열 살이나 되었는데 제 옷가지를 아이 스스로 빨래하지 못한다면, 기계에 집어넣고 단추를 누르는 짓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손을 움직여 빨래하지 못한다면, 이 아이는 열 살을 덧없이 살아온 셈입니다. 나이 열 살이라면 아이 스스로 제 옷을 빨아서 입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열 살 아이는 열한 살 아이보다 힘이 여리고, 열한 살 아이는 열두 살 아이보다 힘이 여리겠지요. 열 살 아이는 열 살 아이대로 빨래를 할 수 있고, 열한 살 아이는 열한 살 아이대로 빨래를 할 수 있어요. 스스로 빨아서 입을 수 있을 만한 옷을 입어야 하고, 스스로 입는 옷을 스스로 빨고 말려 다릴 줄 아는 삶매무새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열 살이 되었는데 스스로 빨래를 할 줄 모른다면, 어른들부터 스스로 제 옷가지를 빨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디에서든, 어른들은 ‘집일을 하는 사람(집일꾼)’을 따로 두기 때문입니다.

 으레 어느 집에서나 아직까지 ‘집일꾼 = 어머니(여자)’입니다. 그런데 집일꾼 몫을 맡는 어머니는 손으로 빨래하지 않습니다. 집식구 빨래는 적어도 세 사람 몫이 나올 테니까 손빨래를 하자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여겨 기계에 집어넣고 단추를 누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집식구가 스스로 제 옷가지를 빨래하지 않으니까, 기계를 빌 수밖에 없습니다. 집식구가 스스로 제 밥그릇을 채우지 않으니까, 집일을 도맡는 어머니(여자)는 힘겹습니다. 참답거나 바른 먹을거리로 나아갈 겨를을 내기는 꿈만 같습니다.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기는 아득할 뿐 아니라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 퀴퀘그는 철학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을 테지만, 우리들 인간이 참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살거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가 철학자를 자처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소화불량에 걸린 노파처럼 위장을 망가뜨린 게 분명하다고 결론짓는다 … 세상 사람들이 우리 고래잡이를 존경하기를 거부하는 주요 이유는 우리 직업이 기껏해야 일종의 도살업이고 그 일터는 온갖 더러움으로 들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도살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기꺼이 존경하는 군대 사령관들도 도살자들이고, 게다가 잔인하기로 이름 높은 도살자들이다 ..  (96, 172쪽)


 나는 학교에서 아무것도 못 배웠습니다. 꼭 하나 학교에서 배웠다면, 학교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가르친다는 지식은 혼자 책을 읽으면 다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깊고 넓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혼자 책읽기를 할 때에 더 빨리 배웁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 한 권을 한 해 동안 쓰지만, 이삼백 쪽이든 삼사백 쪽이든, 얄팍한 책 하나로 이토록 오래 잡고 늘어질 까닭이 없어요.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하루에 천 쪽을 읽어도 모자라거나 아쉬운 판이거든요.

 나는 학교를 떨쳐나온 뒤에 비로소 배웠다고 느낍니다. 학교를 떨쳐나온 뒤에 비로소 책읽기를 배우고, 우리 말글을 배우며, 내 삶을 배웠다고 느낍니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책읽기조차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느 수업이든 교재란 있을 수 없으며, 수업을 하는 때마다 새로운 책을 몇 권씩 가르치거나 배워야 할 텐데, 어느 수업도 이렇게 하지 못했다고 나중에서야 느낍니다.

 학교 교사는 우리 말글을 모릅니다. 학교 교사는 교재나 교과서 지식을 집어넣기에 바쁜 나머지, 바르거나 알맞거나 곱거나 참답거나 착하거나 옳거나 슬기롭게 나눌 우리 말글을 스스로 배우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배우지 않으니 가르치지 못합니다.

 말 또한 지식이 아닌 삶이기 때문에, 삶을 꾸리는 대로 말을 합니다. 삶을 사랑스레 꾸릴 때라야 사랑스레 나누는 말입니다. 삶을 착하게 다스릴 때라야 착하게 주고받는 말입니다. 고운 삶에서 고운 말이지, 메마른 삶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 우리는 크로제 제도에서 북동쪽으로 가다가 보리새우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바다 목장을 만났다. 그 노란색의 작은 생명체는 참고래가 즐겨 먹는 먹이다. 보리새우 떼는 몇 마일씩이나 배 주위에서 파도를 타고 넘실거려서, 우리는 마치 잘 익은 황금빛 밀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밀밭을 헤치며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396쪽)


 삶이 없는 사람이란 살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은 붙었으나 살아간다 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목숨을 먹으면서 제 목숨을 잇습니다. 목숨을 먹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지는 사람입니다. 다른 짐승도 마찬가지이고, 푸나무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모두들 목숨을 먹으며 목숨을 잇습니다. 목숨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삶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목숨을 받아들여 내 목숨을 잇는 줄 깨닫습니다. 다른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여 내 목숨을 아름다이 일구는 나날인 줄을 슬기로이 알아챕니다.

 돌이켜봅니다. 이오덕 님 책을 퍽 어린 나이부터 읽기는 읽었으되 모든 참뜻을 알알이 아로새기며 읽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이오덕 님 책을 읽을 때에 ‘어린 날에 한 번 읽었다’ 해서 ‘나중에 안 읽어도 되는 책’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린 날에는 내 어린 날 깜냥대로 삭이며 읽’고 ‘나이를 더 먹은 뒤에는 나이를 더 먹으며 더 달라진 깜냥대로 아로새기며 거듭 읽’을 책이라고 여겼습니다. 곁에 놓고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되읽어야지, 한 번 읽었으니까 ‘한 번 읽은 책은 이제 다 알아.’ 하는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이오덕 님이 내놓은 책은 한결같이 ‘삶’을 밝힙니다. 삶을 말하고 삶을 다룹니다. 그러나, 이오덕 님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배운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 삶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배우는 이는 아주 드뭅니다. 모두들 이오덕 님 ‘책’을 섬기거나 따르거나 배울 뿐입니다. 이오덕 님 ‘삶’은 살피거나 헤아리지 못합니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에 바친 이오덕 님 나날이란 무엇인가를 참다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냥 글쓰기가 아닌 “삶을 가꾸는” 글쓰기입니다. 그냥 삶 가꾸기 또한 아니요 삶을 가꾸는 “글쓰기”이고 “글쓰기 교육”입니다.

 첫째 아이 똥오줌기저귀 빨래로 세 해를 보내다가 이제 마무리를 짓나 싶더니, 둘째 아이 똥오줌기저귀 빨래로 다시금 세 해를 보내겠구나 생각하면서 삶을 곰곰이 되짚습니다.


 (2) 삶이 없는 책


 소설책 《모비딕》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소설책 《모비딕》을 일컬어 ‘고전’이라 하는데, 이 소설책이 왜 고전인가를 깨닫거나 살피거나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작가정신 출판사에서는 2010년 1월에 그림을 제법 곁들인 48000원짜리 두툼한 ‘완전번역’판을 내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나는 이 책을 장만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5월에 그림을 안 곁들인 20000원짜리 ‘보급’판을 새삼스레 내놓습니다.

 48000원짜리요 그림 곁들인 책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모비딕》에 그림을 곁들여야 할까? 그림을 곁들인 《모비딕》은 더 《모비딕》다울까? 《모비딕》을 48000원짜리 책으로 만들어서 읽혀야 할까? 20000원짜리 《모비딕》도 20000원 값을 하는 《모비딕》이라 할 만할까?


.. 나는 고래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고래의 꼬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머리를 알 수 있겠는가? 게다가 고래는 얼굴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고래의 얼굴을 알겠는가? 고래는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대는 내 뒷부분인 꼬리는 보겠지만,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할 거라고 …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고래는 조용한 기쁨, 빠르고 힘찬 움직임 속에서 맛보는 평화로운 안정감에 싸여 있었다 ..  (527, 744쪽)


 소설책 《모비딕》은 퍽 예전부터 무척 두툼한 책으로 꽤 여러 곳에서 나왔습니다. 이제껏 나온 《모비딕》이 완전번역이었는지 한두 줄 잘라먹은 번역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완전번역이라 해서 더 옹근 책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한두 줄 빼먹거나 살짝 간추린 번역이라 해서 더 모자란 책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완전번역을 읽으면서도 몇 줄을 잊거나 놓칩니다. 몇 줄뿐 아니라 책을 통째로 못 떠올리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안 완전번역’을 읽으면서 알알이 되새기거나, 간추린 번역을 읽으면서 가슴이 촉촉히 젖어듭니다.


.. 이 위험한 바다에 나온 것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고래를 잡으러 온 것이지, 고래의 생계를 위해 고래한테 죽으러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영원히 경뇌유를 쥐어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되풀이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경우든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결국에는 낮추거나 어떤 식으로든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나 연인, 침대, 식탁, 안장, 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깨달았기 대문에, 기름통을 영원히 쥐어짤 준비가 되어 있다 ..  (182, 577쪽)


 한 줄을 읽더라도 내 가슴으로 또렷하게 아로새기며 읽을 문학이요 소설이며 책입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내 가슴으로 따스하게 아로새기며 읽을 삶이요 살림이며 사랑입니다.

 소설책 《모비딕》은 아름다운 삶을 슬프게 받아들인 아픈 사람들 굳은살을 찬찬히 적바림한 이야기책이지 않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돋보이는 글월이나 빼어난 글월은 없으나 한 줄 두 줄 가만히 되새기면서 가슴으로 젖어들 이야기책이라고 할 만하지 않나 하고 느낍니다.

 삶이란 더 돋보이거나 더 모자라지 않습니다. 글이란 더 돋보이거나 더 모자라지 않습니다. 삶만큼 글을 쓰고 삶대로 글을 씁니다. 글대로 삶이고, 삶대로 글입니다. 내가 하는 일대로 삶이고, 내 삶대로 내가 하는 일입니다.


.. “하지만 공작님은 이 고래를 잡은 것과 아무 관계도 없었는데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우리는 죽을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돈도 꽤 썼는데, 공작님만 이득을 보시는 건가요? 우리는 고생만 죽도록 하고, 얻는 건 손에 생긴 물집뿐인가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공작님은 이렇게 악착같이 굴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한가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저는 이 고래에서 제 몫을 받으면 몸져누워 계시는 노모의 고통을 좀 덜어드릴 생각이었는데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공작님은 반의 반, 아니면 반으로 만족하시지 않을까요?” “고래는 공작님의 것이다.” ..  (556쪽)


 삶을 읽을 수 있기에 아름답다 여기면서 두고두고 읽거나 읽히는 소설책 《모비딕》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읽을 수 있는 책이기에, 《모비딕》은 학교라는 곳을 다니는 동안 읽을 수 없다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열대여섯 살은 되어야 비로소 이 이야기책에 깃든 알맹이를 조금씩 빨아먹을 만한데, 열대여섯 살 푸름이는 하루 스물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요. 오늘날 한국땅 열대여섯 살 푸름이는 푸르디푸른 나날에 《모비딕》을 첫읽기로 만날 수 없습니다. 열대여섯 살부터 첫읽기로 만나지 못하기에, 스물대여섯 살에는 《모비딕》을 거듭읽기로 만날 수 없고, 서른대여섯 살에는 《모비딕》을 다시읽기로 만날 수 없으며, 마흔대여섯 살에는 《모비딕》을 고쳐읽기로 만날 수 없습니다.

 열대여섯 살에 입시지옥에 갇힌 사람은 스물대여섯 살에는 다른 지옥에 갇히고, 서른대여섯 살이나 마흔대여섯 살에는 또다른 지옥에 갇힙니다. 쉰대여섯 살이나 예순대여섯 살에는 이렇게 두툼한 책을 읽을 만큼 ‘삶이 넉넉히 안 남았다’고 여기겠지요. 열대여섯 살부터 읽지 못하는 《모비딕》은 부질없습니다. 여러 차례 되읽지 않는 《모비딕》이라면 겉훑기조차 못한다 할 만합니다.

 모든 책은 성경을 읽듯 읽어야 하고, 성경은 여느 책을 읽듯 읽어야 합니다. 삶이 깃들어야 책입니다. 삶을 깃들일 때에 비로소 책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4344.6.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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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6-1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청소년문학 아셰트클래식의 모비딕은 크기도 크기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아직까지 읽을 염두를 못내고 있습니당^^;;;

숲노래 2011-06-14 04:52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서 예전 번역을 찾아서 읽으면 한결 나을는지 몰라요. 새 번역이기에 더 뛰어나거나 좋은 모습은 하나도 못 느꼈어요... 손꼽히는 번역쟁이 작품이지만, 손꼽을 만큼 엉뚱하게 번역한 대목이 꽤 있어요. 어느 곳이 엉뚱한가는 굳이 적고 싶지 않아요. "게으르고 나태하다" 같은 말마디가 쓰인 대목이라든지 하나하나 들자면 천 군데가 넘을 텐데, 이런 말투를 헤아리면 책을 읽을 수 없으니까요...
 
돼지가 있는 교실 - 돼지 P짱과 32명의 아이들이 함께 한 생명수업 900일
쿠로다 야스후미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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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을 길러 목숨을 먹으며 살아간다
 [푸른책과 함께 살기 76] 쿠로다 야스후미, 《돼지가 있는 교실》(달팽이,2011)



- 책이름 : 돼지가 있는 교실
- 글 : 쿠로다 야스후미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 (2011.4.27.)
- 책값 : 12000원



 (1) 말과 삶


 내가 쓰는 말마디가 얼마나 옳거나 바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온 지 아직 스무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열아홉 살 적부터 내 말마디를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나로서는 마흔 살을 접어들어야 비로소 내 말마디를 차분히 돌아보는 나날을 보냈다 여길 만합니다.

 내 말마디를 처음으로 돌아보던 지난날, 내가 쓴 글을 되읽으면서 내 말마디를 살폈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말마디가 어떠한 줄을 못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글을 쓸 때에 입으로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중얼중얼 읊습니다. 글로만 쓰는 글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글입니다. 내 혀로 굴릴 만한 말마디가 아니라면 글로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렇듯 적바림한 글을 가만히 되읽으면서 그동안 말도 모르고 넋도 모르며 삶도 모른 채 살았구나 하고 하루하루 뼈아프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열여덟 해씩이나 내 말마디를 돌아보거나 되짚으며 살았다지만, 아직까지 내 말마디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합니다. 가야 할 길은 한참 멀었고, 사랑해야 할 말은 영 어렴풋합니다.

 곰곰이 돌이킨다면, 고작 열여덟 해를 추슬렀다 해서 옳게 추스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군가 아주 똑똑하거나 빼어난 사람이라면 열여덟 해가 아닌 열여덟 달 추스르더라도 훌륭히 추스른다 할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똑똑하거나 빼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금세 당신 삶과 넋과 말을 아름다이 추스른다 할 만한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 곤충도 뭔가를 먹음으로써 살아간다. 그런 당연한 진리조차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는 돼지를 볼 기회가 평소에는 거의 없다. 동물원에 가도 멧돼지는 있어도 돼지가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슈퍼에 가면 돼지고기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 아이들은 슈퍼에 진열되어 있는 고기가 처음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사진을 보면 무슨 동물인지 이름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을 뿐이다 … 물과 소금의 생명 유무와 더불어, 화학조미료에 생명이 있을까 없을까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  (16, 22∼23, 101쪽)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나는 아주 낯간지럽구나 싶은 말마디가 책에 가득합니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분들은 이 책에 깃든 말마디를 어떻게 느낄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책에 적힌 말마디’가 옳은지 그른지 바른지 어긋났는지를 모를 뿐 아니라 느끼지 않으니 그냥 줄거리만 죽 살피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한자로 된 말이 한국말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나날이 늘어나는 영어가 얼마나 한국말로 받아들일 만한지, 토씨 ‘-의’를 붙이거나 일본 말투 ‘-的’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어설픈 번역 말투라든지 서양 말법에 흔들리지는 않나를 차분히 곱새기는 한국사람은 있기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이 나라 말글을 제대로 안다 하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나 싶기까지 합니다. 예부터 이 겨레가 흙을 일구고 옷을 깁고 집을 짓고 하는 흐름과 삶을 송두리째 잃듯이, 예부터 이 겨레가 서로를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나누던 말을 모조리 잃지는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살아 있는 돼지” 같은 말마디가 참 얄궂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살아 있는 돼지”뿐 아니라 “하지만”도 생각하지 못했고, “-까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라든지 “뭔가를 먹음으로써” 같은 말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딱히 가르치는 사람이 없고, 국어사전을 읽는들 알 수 없으며, 한국 말법을 다루는 책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 말은 “산 돼지”이고, “그렇지만”이며, “-까 하고 궁금해 했다”인데다가, “뭔가를 먹으면서”입니다.


.. 교육에서는 아이의 눈높이에 서야 하고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런 말들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이 중요하다고들 하면서 사실은 교사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대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은 교사가 하고 싶은 일을 아이들의 입을 빌려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니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의견은 아이들이 말했다고 자주적이고, 교사가 말했다고 관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 의견이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173쪽)


 나도 나이를 먹고, 내 아이도 나이를 먹으며, 내 옆지기도 나이를 먹습니다. 나는 나이를 먹는 만큼 더 생각이 깊거나 마음이 넓은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돌아보지만, 그닥 생각이 깊어지지 못하고 마음이 넓어지지 못하는구나 싶어 부끄럽습니다. 스스로 착하게 살아간다면 걱정거리란 없습니다. 스스로 해맑게 살아간다면 근심거리란 없어요. 스스로 예쁘게 살아간다면 골칫거리 또한 없겠지요.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선생님을 두 번 얼굴을 뵌 적이 있고, 한 번은 이오덕 선생님이 과천에 살던 아파트로 찾아갔습니다. 이때가 1998년인가 1999년이었지 싶은데, 두 시간에 걸쳐 꼼짝없이 아무 말을 못하며 이야기만 조곤조곤 들었습니다. 한창 스물다섯 즈음 된 젊은이가 한다는 ‘우리 말글 바로쓰기’에서 어설프거나 어리석은 대목을 넌지시 짚었기 때문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은 이때에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저 앞으로는 두 가지만 고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는 올해부터 생각나지 않고, 한 가지 떠오르는 대목은 ‘가끔씩’이나 ‘이따금씩’은 잘못 쓰는 겹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떠오르지 않으나, 그때에 말씀을 들은 뒤부터 곧장 바로잡았습니다. 이제는 잘 바로잡아서 쓰니까, 어떠한 말투를 내가 잘못 썼는지를 떠올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늘 요 말투 조 말투 낱낱이 다독이면서 바로잡으며 살아가니까, 하나하나 남김없이 떠올릴 수는 없어요. 쌀을 씻든 털옷 빨래를 하든, 예전에는 이러저러하게 잘못 했지 하고 떠올리면서 일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안거나 달랠 때에 지난날에는 이러저러하게 어수룩하게 했지 하고 되새기면서 안거나 달랠 수 없어요. 내 부끄러운 발자취를 잊는다는 모습이 아니라, 부끄럽거나 못났던 멍텅구리에서 조금 덜 부끄럽거나 살짝 덜 못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랑스레 살아갈 길을 헤아리면서, 날마다 더욱 사랑스러운 손길과 마음길이 되도록 힘쓸 때에 즐겁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당신 말마디를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늘 내뱉는 말마디를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참다이 다독이지 않아요.

 나는 생각합니다. 스스로 진보를 외치든 보수를 외치든, 스스로 한나라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민주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을 사랑한다 외치든, 내가 날마다 쓰는 말마디를 옳게 들여다보며 제대로 가다듬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좋은’ 일과 어떤 ‘바른’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말이란 넋이고, 넋이란 삶입니다. 삶을 이루는 넋이며, 넋을 이루는 말이에요. 삶을 일구면서 넋을 일구고, 넋을 일구면서 말을 일굽니다. 말을 돌보면서 넋을 돌보고, 넋을 돌보는 동안 삶을 돌봅니다.

 가장 좋은 길은 진보도 보수도 중도도 아니라고 느낍니다. 가장 좋은 길은 그저 ‘가장 좋은’ 길입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이란 말 그대로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내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사 줄 때에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에요. 이때에는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사 주었을 뿐입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 준다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 주었을 뿐이지, 아이를 사랑하는 길은 아닙니다. 아이한테 밥을 떠먹였으면 아이한테 밥을 떠먹였을 뿐입니다.

 일은 일이고, 살림은 살림이며, 사랑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 사람들은 ‘한국사람으로서 늘 한국말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늘 한국말을 쓰지만 ‘한국말을 생각하면’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한국말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 뿐 아니라 ‘한국말을 사랑하면’서 쓰는 사람은 훨씬 드물어요.


.. 매일 아이들이 짊어지고 오는 책가방 속에는 교과서나 공책이 들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처 다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생활이 빼곡하게 들어 있음을 실감한다 … 이번 회의에 학부모님이 참석하신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나란히 앉도록 자리를 배치해 두었다. 학부모님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가끔은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마유코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모르겠어요.” ..  (21, 186쪽)


 맨 처음, 열여덟 해 앞서 열아홉 살이던 때에 막 ‘우리 말글을 사랑하자’고 다짐하던 때에는 이오덕 선생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가 퍽 해묵었다고 여겼습니다. 좀 고리타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나중에 이오덕 선생님을 한 번 뵙고, 숱한 책을 낱낱이 읽으며, 이오덕 선생님이 남긴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는 동안, 당신 삶과 넋과 말이 하나도 해묵거나 고리타분하지 않다고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당신한테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걸었으며,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신 뒷사람이 해야 할 몫을 애써 당신이 도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뒷사람이 즐거우며 기쁘게 할 일이 무엇이라고 똑똑히 밝히면서 이러한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기란 어렵다 할는지 모르는데,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기란 어려울 뿐입니다. 집살림을 일구거나 흙살림을 일구면서 내 보금자리를 내 손으로 땀흘리며 일구는 사람은 말과 넋과 삶이 하나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살림을 일구지 못해요.


 (2) 꽃과 삶


 올해 들어 할미꽃을 못 보았습니다. 지난여름에 식구들이 인천 골목동네를 떠나 멧골자락 작은 집으로 옮긴 뒤로 품은 꿈 가운데 하나는, 새로 맞이할 봄철에 멧골짝 할미꽃을 기쁘게 만나면 좋겠다였습니다. 이모저모 일거리가 많기도 했고, 집일에 치이면서 짬을 못 냈다고 할 테지만, 할미꽃 없이 봄을 맞이한 이 찜찜하고 서운한 시골살이란 참 슬픕니다.

 그러나, 할미꽃이야 못 볼 수 있지요. 나는 우리 집에서 옆지기와 아이하고 살아가면서 웃음꽃이나 눈물꽃을 볼 수 있잖아요. 비록 들꽃과 멧꽃 예쁘장한 꽃망울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이 작은 집에서 식구들하고 사랑꽃을 피울 수 있으면 좋은 나날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다만, 집에서 살림을 옳게 하고 사랑을 제대로 해야지요.


.. 이렇게 매일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남은 음식물을 모으다 보니, 학교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요리하시는 분께 여쭸더니, 대충, 만든 요리의 10퍼센트는 남는다고 했다 … (돼지)우리를 만드는 데 큰 힘을 발휘한 이번 자금은 아이들이 수집한 폐품을 팔아서 모은 돈인데, 그런 활동도 오랫동안 했다. 실제로 돼지를 키우기 위해서도 자금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P짱이 갑자기 병이 났을 때였다 ..  (44, 81쪽)


 엊저녁 모과꽃을 처음으로 봅니다. 모과나무가 선 줄은 진작 알았으나, 늘 모과꽃은 지나쳤습니다. 아니, 모과꽃이 한창이던 때에 모과나무 앞을 지나간 적이 없지 않았나 싶고, 모과나무 앞을 지나갔어도 이 꽃이 모과꽃이었다고 깨닫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멧길을 오르내리며 늘 바라보는 나무입니다. 모과나무뿐 아니라 꿀밤나무이든 떡갈나무이든 단풍나무이든 두릅나무이든 감나무이든 벚나무이든 화살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오얏나무이든 복숭아나무이든, 가만히 바라봅니다. 올봄에 우리 텃밭 가장자리에 심은 살구나무도 날마다 바라봅니다. 가느다란 막대기 같은 살구나무에 언제 잎이 돋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니 그제부터 드디어 잎이 돋습니다. 집 앞에 가지를 뻗는 감나무도 요 며칠 사이에 바야흐로 새잎을 냅니다. 모과나무도 새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모과나무는 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금세 꽃을 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잎을 낸 지 얼마 안 되었다지만, 풀이든 나무이든 저마다 알맞춤한 때에 꽃을 피웁니다. 들딸기는 지난달부터 진작에 하얀 꽃을 터뜨렸는데, 들딸기는 들판과 멧자락에 아직 푸른 잎새가 없던 때부터 일찌감치 잎을 냈습니다. 다른 풀보다 일찍 잎을 내고 나서 다른 풀보다 일찍 꽃을 냈습니다. 민들레도 냉이도 일찍 잎을 내고 일찍 꽃을 냅니다. 일찍 꽃을 낸 만큼 일찍 씨앗을 내지요. 4월 끝무렵에 한창 꽃을 피우던 단풍나무도 이제 단풍씨를 하나둘 냅니다. 5월 15일쯤 지나면 단풍씨는 후두둑후두둑 신나게 떨어지겠지요. 팔랑팔랑 춤을 추며 단풍씨가 흙으로 가려 하겠지요.

 꽃을 떨군 나무들은 짙은 잎을 뽐내며 싱그러이 자랍니다. 잎이 두툼해지면서 나무는 줄기가 굵어집니다. 사람들은 열매만 생각하지만, 나무는 열매가 아니라 나무 줄기를 생각합니다.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뻗어 나무를 버티며, 더 넓고 많이 잎을 내어 줄기를 굵힙니다. 나무는 열매를 내려고 사는 목숨이 아닙니다. 나무는 흙에 더 튼튼하고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며 기운차게 살아내려는 목숨입니다.


.. 하지만 이름도 지어 주지 않고 가축으로서 돼지를 학교에서 키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설령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역시 애완동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축이라 생각하고 키우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역시 그 가축에게 정을 주었을 것이다 … 목축업을 하는 가정에서는 소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이 붙여진 소가 적당한 크기로 성장하면 트럭에 실려 출하된다. 어른이니까 할 수 있을까? 일이니까 할 수 있을까? 어른은 어떤 마음으로 가축들을 출하시키고 있을까? 그리고 어린이는 왜 안 된단 말인가? 학교에서는 왜 안 된단 말인가? ..  (148∼149쪽)


 어제 낮과 저녁에 모과꽃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렇게 어여쁜 빛깔로 꽃을 틔우는 모과나무인데, 왜 사람들은 모과 열매를 못생긴 녀석이라고 일컫는지 아리송합니다. 모과 열매를 능금처럼 썰어서 먹을 수 있다지만, 모과 열매는 썰어서 먹기보다는 단물이나 술에 재어 모과물이나 모과술로 즐기거나 따로 모과차로 마십니다. 모과 열매를 방에 가만히 두기만 해도 오래도록 모과 내음이 집안에 퍼집니다.

 빛고운 모과꽃은 결고운 열매를 맺습니다. 동그스름해야 사람 눈에는 예쁘장하게 보인다 할 만한지 모르겠으나, 나무한테는 자연한테는 새한테는 바람한테는 흙한테는 햇볕한테는 ‘동그스름한 꼴’이 가장 어여쁜 꼴이지 않습니다. 모든 나무는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모든 꽃과 열매 또한 생김새가 달라요.

 사람은 얼굴이나 몸매를 뜯어고치는 수슬을 하곤 합니다. ‘더 예뻐’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합니다. 얼굴이나 몸매를 뜯어고치는 수술이란 더 예뻐지는 수술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하고 비슷하거나 똑같이 생기려는 마음’으로 하는 수술입니다.

 영화배우나 연예인 아무개를 닮은 얼굴이나 몸매라서 예쁘지 않습니다. 예쁜 얼굴이나 몸매는 마음속 깊거나 너른 밑바닥에서 솟아납니다. 사람들 가슴을 저미는 구성진 노래는 목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뱃속에서 솟구치는 소리입니다. 손가락 놀림으로도 기타나 피아노나 북이나 악기를 잘 켜거나 타거나 치거나 뜯는다 하겠지요. 그러나, 악기를 잘 켜거나 타거나 치거나 뜯는 사람은 손가락 놀림을 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에 온 넋과 삶을 싣’습니다.

 삶으로 우러나오는 결 고운 노래예요. 삶으로 우러나오는 어여쁜 얼굴이에요.


.. 쉬는 날 먹이를 주러 가는 것은 귀찮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가지 않으면 P짱은 굶어야 한다. 그런 갈등 속에서 아이들은 동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책임감을 배워 가고 있었다. 동물을 키우는 데 쉬는 날은 있을 수 없다 …드디어 P짱의 먹이주기를 3학년에게 가르칠 때가 왔다. 지금까지 조금 느슨해져 있던 6학년 2반 아이들도 가르치는 입장이 되자 역시 표정부터가 달라 보인다. 지금까지는 별 관심 없이 P짱을 보았던 3학년 1반 아이들도 P짱을 가까이에서 실제로 보게 되자, 자기들보다 몇 배는 큰 P짱의 덩치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6학년 2반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냄새도, 3학년 아이들에게는 지독한 냄새로 다가왔다 … 미리 먹이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학급에서 내놓은 냄비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남은 음식물을 모아야만 했다. 먹이를 가지러 가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우리 안의 물을 바꿔 주고 똥을 치우고 흙을 갈아 주고 하면서 우리 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  (48, 167∼168쪽)


 나는 우리 아이가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스스럼없이 뛰거나 놀거나 잠들거나 말할 때에 비로소 예쁘다고 느낍니다. 누구 앞에서 재주를 부리거나 재롱을 떨어야 예쁜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 스스로 제 삶결을 아끼거나 좋아하면서 마음껏 뛰거나 놀거나 잠들거나 말할 때에 참으로 예쁜 아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오얏꽃 흐드러진 오얏나무 앞에 서면 오얏 내음이 내 몸을 감쌉니다. 복숭아나무 흐드러진 복숭아나무 옆에 서면 복숭아 내음이 내 몸을 감돕니다. 보리둑 하얀 꽃망울이 흐드러진 보리둑나무 둘레에 서면 보리둑 내음이 내 몸을 휘감습니다.

 빌딩 숲에서는 빌딩 내음이 나를 감싸겠지요. 자동차 물결 사이에서는 자동차 내음이 나를 감돌겠지요. 양복을 빼입은 공무원이나 회사원 둘레에서는 양복 내음이 내 몸을 휘감겠지요.

 내 삶터는 내 마음터이고 내 말터입니다.


 (3) 아이와 삶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달팽이,2011)을 읽습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을 다 읽고 나서, 이 작품으로 빚은 영화 〈P짱은 내 친구〉가 한국말 판으로 나왔는가 살펴보는데,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쉽다고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이들이 6학년이 될 때까지 ‘고기돼지’를 알뜰히 돌보고 키우는 이야기가 수수하게 나온다 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아이들은 ‘귀염둥이 짐승’이 아닌 ‘고기돼지’를 돌보며 키웠지만, 어찌 되었든 고기돼지는 고기돼지인데, 아이들은 고기돼지를 키우더라도 귀염둥이 짐승을 기른 셈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머나먼 옛날부터 집에서 짐승을 기른다 할 때에는 나중에 잡아먹겠다는 마음으로 기릅니다. 닭을 기르든 염소를 기르든 개를 기르든, 나중에 고기로 먹을 만한 짐승을 기릅니다. 사랑스레 기른 소가 늙거나 아파서 죽었을 때에 고기로 안 먹고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더러 듣기도 하지만, 나와 내 집에서 못 먹으면 이웃집에 주어 먹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문명인이 되어서인지 도시사람이 되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짐승을 기르건 푸나무를 기르건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목숨을 건사하려’고 기르는데, ‘먹으려고 흙을 일구거나 짐승을 기르는’ 줄을 쉬 잊고 맙니다. 내가 살려고 볍씨를 심어 벼를 돌본 다음 벼를 거두어 쌀을 얻어 밥을 합니다. 돼지와 소와 개만 목숨이 아니라, 벼와 보리와 상추와 쑥갓과 배추도 목숨입니다. 토마토주스이든 사과주스이든 토마토와 사과라는 목숨에서 얻지, 화학조합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숨을 마십니다. 늘 마시는 물도 목숨이고 바람도 목숨이에요. 목숨 아닌 것을 먹으면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 자연히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가정의 아이들 비율도 줄어들었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겨울에는 히터가 틀어진 방에서 지내는 생활스타일이 아이들에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자연에 둘러싸인 지역에 살면서도,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은 아이들 주변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등하교길에는 풀과 나무와 논과 밭 같은 자연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곤충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 나는 “그럼 아스팔트 밑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요시노부는 아스팔트 밑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요시노부의 말처럼 흙을 밟고 사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  (16, 109쪽)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은 일본 오사카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새내기 교사와 어린 아이들이 돼지 한 마리를 놓고 900일에 걸쳐 함께 지낸 발자취를 담습니다. 목숨을 아끼는 마음을 다스리자면서 학급마다 짐승을 한 가지씩 기르기로 했다고 할 때에, 오사카 새내기 교사는 ‘돼지를 기르자’ 하고 얘기했고, 참말 돼지를 장만해서 기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이든 일본이든, 기를 수 있는 돼지란 ‘고기로 먹을 수 있도록 품종을 바꾼’ 돼지입니다. 여섯 달 만에 살이 디룩디룩 쪄서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을 웃돌도록 하는 고기돼지만 사서 기를 수 있습니다. 더 빨리 살이 찌고, 더 적은 밥(사료)을 먹여도 되는 고기돼지가 되도록 과학자(농학자와 생물학자)가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유전공학이란 이러하니까요. 가만히 살피면, 사람들이 오늘날 먹는 곡식 또한 알곡이 더 알뜰히 여무는 씨앗을 갈무리해서 더 심고 북돋우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꼭 과학이 아니더라도 더 맛나게 많이 먹을 수 있도록 사람 손으로 곡식이며 짐승이며 ‘품종 고치기’를 합니다. 나귀도 노새도 품종을 바꾸거나 고쳤습니다. 고기도 고기라지만, 송아지는 어미소한테서 젖을 얻어먹지 못해요. 어미소한테서 얻는 젖은 오직 사람만 먹습니다. 송아지는 그저 사료만 먹으면서 큽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 끝마무리에서 담임 교사는 돼지를 더 키우지 않고 잡기로 합니다. 아이들은 돼지를 3학년 동생한테 물려주고 학교를 마치겠다며 기나긴 이야기 끝에 마무리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 마무리를 가볍게 뒤엎습니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할 만하고, 교육 또한 아니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민주주의라 할 만하며, 어찌 보니 교육이라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다수결이든 만장일치이든 어린이회의이든 민주주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도나 결정이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아이들이 회의를 열어 ‘우리도 선생님하고 똑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다니기로 했어요!’ 하고 말할 때에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우리도 선생님하고 똑같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겠어요!’ 하고 말할 때에 그대로 받아들이면 민주주의가 될까요. 국가보안법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 같은 법과 제도를 정부가 다루는 모습을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는 까닭하고 한동아리입니다. 아이들이 세 해에 걸쳐 아끼고 사랑한 돼지를 동생한테 물려주어 아끼고 사랑하도록 하는 일이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이 돼지한테 먹이를 주고 돼지를 씻기고 돼지집을 치우는 일이란 더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면, 돼지를 왜 키울까요.


..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이 가축으로 사육되고 있다. 그 동물들이 있어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 내가 지금까지 받아 온 교육에서 죽음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았다 … 식육센터 견학 후에 쓴 아이들의 감상문에는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고도 남을 만큼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25, 37, 125쪽)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하루에 한 끼니를 먹건 네 끼니를 먹건,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으려면 흙을 일구어야 합니다. 내가 내 손으로 흙을 일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흙을 일구어 얻은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장만해야 합니다.

 배나무를 배꽃이 예쁘대서 배꽃이 안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알뜰히 돌보았대서 벼를 안 베고 누런 들판이 되도록 지켜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심어 거둔 콩이 예뻐서 콩을 안 먹고 책상에 올려놓고 모셔 두어도 될 만할까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장만했으면 타야 합니다. 내가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해서 넘어지면 자전거가 다칠까 봐 안 탈 수 없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자전거에 흙탕이 튈까 봐, 바람 부는 날에는 자전거 체인에 먼지가 낄까 봐, 다른 날에는 또 이런저런 까닭 때문에 자전거를 안 타고 집에 모셔 둘 수 없습니다.

 새로 마련한 젓가락이나 밥그릇은 신나게 써야 합니다. 잘 닦아서 말려야 합니다. 예쁘장한 밥그릇이니까 밥을 안 담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수 없습니다. 예쁘다 싶어 장만한 옷이니 예쁘게 입고 돌아다니다가는 즐겁게 빨아서 말린 다음에 다시 입어야 합니다. 예쁜 옷이니 그냥 옷걸이에 걸어 둘 수 없습니다.


.. 아이들은 인생의 목표이자, 그리고 마침내는 뛰어넘어야만 하는 존재인 부모님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 P짱 때도 사실읕 텔레비전에 방송되지 않은, 길고도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아이들과 함께 담담하게 지내 왔던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벤트나 이슈는 그 실천을 화려하게 꾸며 주는 효과는 있지만, 그보다는 소박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바라보는 시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  (190, 244∼245쪽)


 어른들은 살아갑니다. 아이들도 살아갑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키운다고 하지만,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목숨일 뿐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책이나 교과서로 배운다지만, 아이들은 책이나 교과서에 앞서 어른들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예쁜 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식물원에 가두어 놓고 예쁘게 구경하는 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너른 들판을 쏘다니는 싱그러운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때로는 팔다리가 부러지기도 하는 가녀린 목숨입니다. 아이들은 제 가녀린 목숨을 스스로 건사하면서 씩씩하게 이 땅에 두 다리를 디딜 목숨입니다.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였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넘어지거나 까지거나 다치거나 울거나 웃으면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던 목숨입니다.

 《돼지가 있는 교실》은 아무런 가르침(교훈)을 담지 않습니다. 그저, 한 사람 고운 목숨을 어버이한테서 고맙게 선물받아 꾸리는 나날을 어떻게 즐기거나 누릴 때에 아름답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줍니다. 교육책도 환경책도 아닌, 이야기책 《돼지가 있는 교실》이에요. 천천히 새기면서 읽고, 가만히 아로새기면서 마음에 담아, 내 삶을 내가 선 자리에서 알뜰살뜰 일구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으면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4344.5.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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