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2021.2.25.

숨은책 491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김상욱 글

 친구

 1990.10.31.



  애써 들어간 열린배움터(대학교)를 어떻게 그만두어야 우리 어버이가 배움삯(등록금) 때문에 진 빚을 천천히 갚아도 될까 하고 헤매면서 책을 더 팠습니다. 어느 책이든 손에 쥐었습니다. 둘레에서 “그런 쓸개빠진 놈들 책은 왜 읽어?” 하고 말리면 “그 쓸개빠진 놈이 일군 열매를 쓸개 안 빠진 사람이 못 일구니 그놈 책을 읽으며 배워야 하지 않나요?” 하고 대꾸했어요. “이 책 훌륭한데 읽어 보겠나?” 하고 둘레에서 건네는 책 가운데 “겉옷은 훌륭한 척 입지만 알맹이는 영 썩었는걸요?” 하고 대꾸할 책이 많았어요. 쓸개는 빠지더라도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면, 저이는 어떤 넋인지 아리송해요. 쓸개는 있더라도 어쩐지 엉성하거나 서툴면, 이이는 어떤 얼인지 알쏭합니다. “최종규 씨라고 다 잘 하나? 아니지? 글도 책도 똑같아.” 하고 귀띔하는 분이 있어 비로소 무릎을 쳤어요. 배울 적에는 누구한테든 고개숙여 배우고서, 기꺼이 기쁘게 익혔으면 어깨를 펴고서 아름답게 펼 노릇이라고 느꼈어요.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를 쓴 분은 응큼질을 저질러 빛이 바랬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언제부터 노래길을 잊고 새벽별을 잃은 채 응큼질에 마음을 빼앗겼을까요? 글은 좀 못 쓰더라도 쓸개를 찾아야 사람일 텐데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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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1.2.24.

숨은책 489


《젊은 날》

 백기완 글

 화다출판사

 1982.3.15.



  마흔이나 쉰이란 나이를 지나더라도 스스로 마음이 포근하여 새롭게 삶을 사랑하는 씨앗을 푸르게 우거진 숲처럼 품을 줄 안다면 ‘젊은이’라고 느낍니다. 스물 언저리인 나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에 찬바람을 일으켜 꽁꽁 얼릴 뿐 아니라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는 쳇바퀴질로 틀에 갇히는 몸짓이라면 ‘늙은이’라고 느낍니다. 《젊은 날》을 처음 만난 스무 살 언저리에 이 노래책을 참 투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꾸미거나 저렇게 치레하지 않은 “젊은 날”이란 이름을 수수하게 붙인, 더구나 책꼴에 더도 덜도 손대지 않고서 앞쪽은 새하얗게 뒤쪽은 새카맣게 여민 매무새가 퍽 눈여겨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젊은 날이란 눈부시게 새햐안 빛줄기이면서, 고요하게 새까만 밤빛일 테지요. 젊은 날이란 흰눈처럼 겨울을 소복히 덮고서 꿈으로 나아가는 길이면서, 여름철 나무그늘처럼 까무잡잡 시원한 터전일 테고요. 1933년에 태어난 꿈둥이는 2021년에 흰머리 할아버지가 되어 숨을 내려놓았습니다. 얼추 아흔 해를 걸어온 길은 늘 “젊은 날”이었을까요. 나이·돈·힘·이름·얼굴 어느 하나로도 금을 긋지 않으면서 어우러지는 손길을 바란 “젊은 꿈”이었을까요. 젊기에 노래하고, 웃고, 손잡고, 얼싸안으면서 꽃씨를 심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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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1.2.22.

숨은책 487


《혜린이 엄마는 초등학교 4학년》

 한예찬 글

 민홍소이 그림

 가문비

 2011.2.7.



  2021년 2월에 ‘한예찬 동화책’을 책집이며 책숲(도서관)에서 모조리 걷어낸다는 얘기를 얼핏 듣고서 《혜린이 엄마는 초등학교 4학년》을 장만해서 읽었습니다. 2011년에 처음 나오고 ‘2018년 동해시 올해책 후보’로 올랐다더군요. ‘영어·수학 학원 탓에 힘든’ 아이가 ‘무용 학원에서 연예인 꿈을 키우며 즐겁다’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이이가 쓴 다른 동화책을 주섬주섬 살피니 모든 줄거리가 ‘얼굴·몸매를 예쁘게 가꾸어 사랑받기’로 흐르네 싶습니다. 어린이한테 응큼짓을 한 일이 걸려서 붙잡힌 이이는 ‘어린이가 스스로 즐겁게 뛰놀며 삶을 노래하는 꿈’이 아닌 ‘겉몸을 이쁘장하게 꾸며서 돈·이름을 얻고 잘생긴 짝꿍을 사귀는 길’을 어린이책이란 이름을 붙여서 선보였는데, 이이 한 사람만 이렇게 어린이책을 쓰지는 않습니다. 응큼짓이 걸린 이이 책은 책집이며 책숲에서 빼내더라도 ‘어린이한테 삶을 즐겁고 슬기로우며 아름답게 꿈꾸도록 북돋우는 길하고 동떨어진’ 책은 책집이며 책숲에 아직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보는 연속극·영화부터 순 이런 줄거리 아닌지요? 어른 스스로 참꿈·참사랑·참삶이 없이 돈·이름·겉모습에 눈이 멀다면 이런 책은 앞으로 자꾸 나오고, 응큼짓은 안 사라질 테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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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1.2.12.

숨은책 486


《音樂漫筆》

 홍난파 글

 음악예술사

 1938.7.10./1976.1.30.



  1995년까지 〈별빛서점〉이라는 헌책집이 서울 기차나루 언저리에 있었습니다. 〈동성서점〉하고 몇 집 건너 나란히 있었는데, 군대를 다녀오는 사이에 〈동성서점〉은 닫았고 〈별빛서점〉은 〈서울북마트〉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새로 책집지기가 된 분은 서울 기차나루 둘레뿐 아니라 곳곳 헌책집을 단골로 드나들며 책을 사랑하던 분이었고, 이분처럼 책사랑이던 분이 나중에 짝꿍이 되었으며, 책사랑이 두 사람 마음이 모인 아이가 태어났어요. 어느 날 이 책집에서 《音樂漫筆》을 만나는데 책자취에 적힌 해가 아리송합니다. “여기 1938년 첫판이란 셈은 잘못 찍히지 않았나요?” 하고 여쭈니 “아, 홍난파 선생님 첫 책이 그때 나오고 복간판으로 1976년에 나왔나 봐요.” 하고 말씀합니다. 헌책집지기 이야기를 듣고서 그러려니 여기다가도 굳이 이렇게 적을 까닭이 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만나고서 이러구러 열 몇 해가 지나고서 다시 들추어 읽다가 ‘그래, 1938년이란 그때에도 이 겨레한테 노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꽃인가를 들려주려고 글을 쓰고 책을 냈구나’ 하고 돌아봅니다. 참 뒤늦은 생각이지요.  우리는 사랑이기에 짝을 만나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책을 읽고, 서로 이웃이자 동무로 지낼 텐데 말이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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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63


《經濟的인 고기·생선 料理》

 편집부 엮음

 여원사

 1958.12.1.



  어머니나 마을 아주머니는, 생각을 요모조모 하면서 살림을 이모저모 든든히 꾸리면 “참 알뜰하구나” 하고 말하면서 ‘알뜰이’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나 마을 아주머니는 책을 펼 틈이 없이 집 안팎에서 늘 일이 멧더미였는데, ‘여성잡지’라는 책은 으레 다달이 서로 다른 책으로 장만해서 돌려읽었어요. 밥짓기나 살림짓기하고 얽힌 대목은 오리고 헌종이(폐품)를 모을 적에 내놓았지요. 곁딸린 책은 으레 건사하면서 집에 둡니다. 《女苑》 ‘제4권 제12호’ 곁책으로 나온 《經濟的인 고기·생선 料理》를 서울 아현동에 있던 〈문화서점〉에서 만났습니다. ‘경제적’이란 이름이 붙은 곁책을 보노라니 어머니하고 마을 아주머니 말씨가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여성잡지에 물들지 않던 무렵에는 ‘알뜰’이나 ‘살뜰’이라 말했으나 어느새 ‘경제적’으로 바뀌어요. 자주 보고 노상 듣는 말씨가 입에 익기 마련일 테니까요. 《사상계》 같은 잡지는 ‘알뜰히 밥짓기’를 다루는 곁책을 안 냈습니다. 요즈음 인문·사회과학잡지도 그렇지요. 그러나 참된 인문·사회과학잡지라면 ‘밥짓기·옷짓기·집짓기·살림짓기’ 같은 수수한 얘기부터 다뤄야지 싶어요. 평등·평화·인권은 언제나 살림자리부터 싹트거든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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