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22] 자리끼



  나는 언제부터 ‘자리끼’라는 말을 들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주 어렸을 적이지 싶습니다. 아버지가 자리끼를 찾으시기에 밤에 물을 가져다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 외가에 놀러갔을 적에도 머리맡에 스텐그릇으로 자리끼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자리끼’라는 낱말은 어릴 적부터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 두 아이와 살아가며 밤에 재우다가 아이가 “물 마시고 싶어.” 하면 아주 어릴 적에는 물을 떠서 건네다가 이제는 아이 스스로 물을 마시도록 합니다. 가끔 큰아이한테 ‘자리끼’라는 낱말을 들려준 적 있지만 자주 쓰지는 않습니다. 큰아이가 갓난쟁이였을 적에 곁님 손이 닿는 가까운 데에 늘 자리끼를 두었습니다. 자다가 잠자리에서 마시는 물을 왜 자리끼라 했을까 늘 궁금한데, 그냥 ‘물’이라 하지 않는 까닭은 마시는 물과 천에 적셔서 아기들 땀을 훔치는 데에 쓰는 물과 다른 여러 가지 말을 잘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문득 느끼곤 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열 살쯤 넘어가면 그때부터 밤에 ‘물’이 아닌 ‘자리끼’를 찾을 수 있겠지요.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꽃밥 먹자 69. 2014.4.23.



  후박나무 그늘이 드리우는 평상으로 밥상을 내놓는다. 후박꽃에 벌이 잔뜩 달라붙어 웅웅거린다. 큰아이가 벌에 한 차례 쏘이고서는 벌 소리만 들어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으나, 함께 앉으면 어떠할까 생각하며 마당에서 밥을 먹는다. 작은아이는 벌에 안 쏘이기도 했지만 벌을 손으로 만지기도 하면서 아무렇지 않다. 큰아이가 맛나게 먹기를 바라며 아침부터 쑥국에 라면을 풀어서 넣고, 밥에 봄까지꽃을 하나 얹는데, 한 술만 뜨고 집으로 들어간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4-04-24 05:59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려서 벌에 쏘인 경험이 있어 벌을 무서워 합니다.
엄마가 된장을 발라주었던 기억도~ ㅋㅋ

내일 저녁모임에 비빔밥 하면서 화단에서 자란 제비꽃을 올려야지 생각했는데,
봄까지꽃을 올려도 이쁘네요.^^

숲노래 2014-04-24 07:48   좋아요 0 | URL
봄에 피는 꽃은 무엇이든
밥에 얹어 꽃밥이 되어
환하고 더 싱그러운 빛이 감돌지 싶어요~ ^^

appletreeje 2014-04-24 08:36   좋아요 0 | URL
보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깨끗해지고 싱그러운 꽃밥상입니다~
다 좋지만 마지막 사진이 '꽃밥'을 먹는 삶을 정갈히 이야기해주는 듯
참 좋네요~*^^*

숲노래 2014-04-24 09:16   좋아요 0 | URL
꽃을 먹으면서
몸에도 마음에도
고운 꽃내음이 깃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요.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손길을 타며 환한 꽃


  시골에서 살아간다고 언제나 새와 벌레와 개구리한테 둘러싸여 아름다운 노래를 듣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텔레비전을 켜거나 라디오를 틀면 새노래도 벌레노래도 개구리노래도 못 듣습니다. 시골에서 산다지만 으레 자가용이나 짐차나 경운기를 몰면 들과 숲에서 들려주는 노래를 못 듣습니다.

  시골에서 일할 적에 농약을 뿌리느라 부산할 적에도 노래를 못 듣습니다. 농약을 뿌리려고 경운기나 기계를 돌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퍼집니다. 촤아아 농약 흩날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퍼집니다. 농약을 맨몸으로 뿌리는 시골 할매와 할배도 있지만, 농약을 뿌릴 적에는 으레 수건과 긴옷으로 친친 감쌉니다. 둘레에서 흐르는 소리를 모두 닫습니다. 게다가 농약을 치면 이 둘레로 어떤 새도 벌레도 개구리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레이철 카슨 님이 “조용한 봄”을 부르짖은 지 예순 해가 훨씬 지났습니다. 곧 일흔 해가 되는군요. 참말 오늘날 시골은 “조용한 봄”입니다. 아니, “고요한 봄”입니다. 아니, “쥐 죽은 봄”입니다. 아니, “소리와 노래가 사라진 무섭고 끔찍한 봄”입니다.

  요즈음은 숲정이가 남지 않습니다. ‘숲정이’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숲을 가리킵니다. 이제 이런 낱말은 쓰임새를 잃습니다. 참말 마을 가까이에 숲이 사라지니까요. 마을 가까이 빈터나 수풀을 그대로 두지 않으니까요. 마을 할배는 마을과 맞닿거나 가까운 빈터나 수풀에 신나게 농약을 뿌립니다. 풀씨가 날린다며 몹시 싫어합니다.

  그런데 말입지요, 끝겨울과 첫봄이 되면 다들 나물을 캐러 들로 숲으로 가요. 이제 시골 할매도 예전처럼 나물캐기를 안 하지만, 냉이와 쑥을 캐러 들로 숲으로 갑니다. 생각해 보셔요. 여느 때에는 엄청나게 농약을 뿌려대고서 냉이랑 쑥은 캐려고 들과 숲으로 간단 말이에요. 우리는 이 땅에 대고 무슨 짓을 하는 셈일까요. 우리는 이 땅에다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셈인가요.

  학교에서 숲을 가르치는 일이 없습니다. 시골학교에서조차 숲을 안 가르칩니다. 어제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를 다녀오는데, 면소재지 고등학교 머스마 넷이 빈 깡통을 아무 데나 휙 던집디다. 너무 어이없어서 자전거를 세우고 네 아이를 불렀습니다. 깡통 주으라고 했습니다. 어른이 보는 앞이니 깡통을 줍더군요. 그러나, 내가 다시 자전거를 몰고 옆을 지나가니 곧바로 깡통을 길에다가, 아니 시골 면소재지 작은 밭뙈기에다 버립니다. 나는 자전거를 다시 멈추어 이 아이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네가 깡통 버린 데는 ‘바로 네 마을이요 네 고향’이라고 얘기하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조차 안 합니다.

  송민혜 님이 쓴 《처음 손바느질》(겨리,2014)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마음이 아파 책을 읽습니다. “제 쓰임이 있는 소품들이라면 아이가 늘 곁에 두고 쓰면서 엄마 사랑을 담뿍 받을 수 있어요(12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저밉니다. 시골 면소재지 고등학교 아이는 어머니 사랑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을까요. 저희 집 마당에다가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릴까요. 저희 집 밭이나 논에다 빈 깡통이나 병을 함부로 던질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쓰레기 버리지 마라’ 하고 가르치거나 얘기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쓰레기를 왜 버리지 말아야 하고, 쓰레기가 무엇이며, 쓰레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거나 얘기하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더 나아가, 시골에서조차 시골아이가 흙을 느끼거나 알도록 가르치거나 얘기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도시에서는 무엇을 할까요? 요즈음 몇몇 학교에서는 ‘학교 텃밭’을 일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몇몇 학교일 뿐입니다. 모든 학교가 텃밭을 일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학교도 모내기로 바쁜 철에 모내기를 거들지 않습니다. 피사리나 가을걷이로 바쁜 철에 피사리나 가을걷이를 거들지 않습니다.

  “느리게 / 한 땀 두 땀 // 빛깔 고르고 / 바늘땀 더하는 재미 // 손꽃 핀다(17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쓸쓸합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손으로 풀을 뽑으며 손으로 낫을 들어 나락을 베지 않고서야 흙도 풀도 나무도 숲도 들도 알 수 없습니다. 뙤약볕을 받으며 밭에서 땀을 흘리지 않고서야 햇볕이 얼마나 고마우면서 대단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비를 맞으며 나물을 뜯지 않고서야 비와 풀이 얼마나 고마우면서 대단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이 땅 아이들은 가을에 대입시험을 치러야 하니 너무 바쁜가요. 이 땅 대학생은 가을에 학교잔치를 하거나 취직시험을 치러야 하니 너무 벅찬가요. 가을에 가을빛을 누리면서 흙내음 맡을 줄 아는 어른(교사·부모)과 아이(학생)가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봄에 봄빛을 즐기면서 풀내음 맡을 줄 아는 사람이 늘면 좋겠습니다.

  손바느질 이야기를 들려주는 송민혜 님은 “청 자투리를 밑으로 덧대고 위쪽으로는 해진 올을 그대로 살려 수를 놓았더니 꽃 한 송이 곱게 피었답니다(31쪽).” 하고 손꽃을 노래합니다. “아이는 자르고 엄마는 바느질, 사이좋게 뚝딱. 안 입는 옷과 자투리 천으로 만든 장식줄(70쪽).” 하면서 손빛으로 춤춥니다. 말 그대로 손길을 타면서 환한 꽃입니다. 꽃 한 송이는 우리 손길을 따사롭게 받으면서 사랑스럽게 피어납니다. 풀 한 포기는 우리 손길을 넉넉하게 받으면서 푸르게 자랍니다. 나무 한 그루는 우리 손길을 살가이 받으면서 싱그러이 큽니다.

  손으로 밥을 짓습니다. 손으로 빨래를 합니다. 손으로 걸레질을 하고, 손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손으로 쓰다듬고, 손으로 머리를 감기며, 손으로 아이들 발을 씻깁니다. 손으로 집을 짓지요. 손으로 옷을 깁지요. 손으로 물레를 잣고, 손으로 절구를 빻아요. 손으로 부침개를 부치고, 손으로 닭둥지에서 달걀을 주으며, 손으로 제비한테 인사합니다.

  “작은 종이 하나에도 내 이야기 곱다시 담고 싶다(11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우리 삶은 작은 눈빛 하나로 밝습니다. 우리 사랑은 작은 손빛 하나로 포근합니다. 우리 꿈은 작은 말빛 하나로 그윽합니다.

  면소재지 머스마는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면소재지 초등학교 아이한테도 과자봉지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 얘기할 적에도 이와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어른이 알려주어도 코앞에서만 줍는 척하고 이내 손을 뒤로 가져가서 슬쩍 떨어뜨리더니 모른 척하더군요. 우리 손은 서로 사랑하려는 손이요, 우리 손은 아름다운 꿈을 지으려는 손입니다.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상한 연립주택
오영진 글.그림 / 창비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335



함께 살아가는 나라

― 수상한 연립주택

 오영진 글·그림

 창비 펴냄, 2008.12.12.



  신문배달을 하며 살림을 꾸리던 지난날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가장 짜증스러운 일은 신문도둑입니다. 신문사지국에 새벽에 몰래 기어들어서 신문을 훔치는 이웃이 있고, 신문배달을 할 적에 자전거를 세우고 아파트에서 돌리면 자전거 바구니에 있는 신문을 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온갖 ‘놈’들이 신문을 훔칩니다. 무엇보다, 신문을 훔치는 이들은 돈이 있습니다. 돈이 있는 이들이 신문을 훔칩니다.


  가장 어이없는 신문도둑은 경찰입니다. 새벽에 동네를 지켜 주니 신문 한 부쯤 으레 가져가도 되겠거니 여깁니다. 아파트에서 새벽바람으로 운동을 하는 아저씨나 할배가 자전거 바구니 신문을 슬쩍하기 일쑤입니다. 어떤 아저씨는 여러 배달부 신문을 골고루 훔쳐서 웃옷 안쪽에 숨깁니다. 바구니에서 신문이 사라진 줄 깨닫고 부랴부랴 뒤를 좇으면 이녁 옷자락에서 여러 신문이 우수수 떨어져요. 어떤 이는 ‘나는 안 훔쳤다. 빈 자전거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가져가서 배달부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둘러댑니다. 그러면서 그 새벽에 만 원짜리를 내밀며 돈을 거슬러 달라 합니다. 만 원짜리 아닌 천 원짜리를 내밀어도 어느 배달부가 새벽에 잔돈을 챙겨서 신문을 돌릴까요.




-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젊은 쉐끼가 남의 집 신문이나 훔쳐! 내놔!” “아무리 집주인이지만 거 말씀이 지나치시네. 훔치다니요! 아저씨 예의를 좀 갖추고 말씀하세요!” “야! 훔치지 않았으면 니가 지금 들고 있는 건 뭔데?” “한집에 같이 살면서 이 정도 정보공유도 못한단 말입니까?” (21쪽)

- “당신이 세입자들을 선동하고 다닌다면서?” “그래요, 훗.”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웬 개수작이야!” “절은 좋은데 굴러들어온 땡중이 문제죠!” (33쪽)



  신문배달부는 신문 한 부 도둑맞으면, 그 한 부 때문에 다시 지국까지 돌아가서 신문을 챙겨서 와야 합니다. 배달부 자전거나 오토바이 바구니에 담긴 신문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돌리는 부수에 맞추어 챙겨서 나오니까요.


  신문이야 도둑맞은 뒤에 다시 갖다 주면 되지만, 우유는 참 큰일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이 신문과 우유를 훔치지 않아요. 돈이 있는 사람이 우유와 신문을 슬쩍하기 일쑤입니다. 신문사에서는 지국에 조금 넉넉히 신문을 갖다 주기에 ‘도둑맞은 신문’을 아침에 다시 갖다 주지만, 우유회사에서는 배달부한테 맞돈으로 우유를 줍니다. 작은 우유팩 하나라도 도둑맞으면 배달부 주머니에서 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전거도 아무렇지 않게 훔칩니다. 누군가 너무 바쁜 나머지 자전거에 자물쇠를 안 채우고 화장실에 들른다든지 가게에 들를 적에, 고 몇 분이나 몇 초 사이에 슬쩍하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자전거 동아리 사람들을 만나면 으레 ‘자전거 도둑맞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참말 누가 자전거를 훔칠까요? 훔친 자전거는 누가 탈까요? 자전거 한 대 훔쳐서 돈을 얼마나 벌까요? 자전거 한 대 훔치면 부자가 될까요?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더라도 훔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내 자전거가 아니니까요. 책방에 가서 책을 훔쳐도 될까요? 책에 자물쇠를 안 채웠으니 슬쩍 가져가도 될까요?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은 말이 될 수 없어요. 책도둑도 도둑일 뿐 아니라, 아주 못된 괘씸한 도둑입니다. 책이 무엇이겠어요. 마음을 살찌우고 생각을 북돋우는 이야기밭인데, 마음을 살찌우는 이야기를 훔쳐서 어떤 마음을 살찌우겠습니까. 인문책을 훔치든 사전을 훔치든, 책을 훔치는 이는 마음그릇이 아주 글러먹은 못된 ‘놈’일 뿐입니다.




- “행복이란 이런 거야. 여보, 당신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이제부터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알아? 음, 좋아 좋아. 저 현수막(황금동 재개발 확정) 하나로 이 동네가 이처럼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워.” (100쪽)

- “뭘 좀 여쭤 볼게 있는데 이 집 앞에 있는 황금비둘기들이 다 뒈져버리면 누가 가장 좋아라 할까요? 아무래도 집주인이 제일 좋아하겠지요.” “이봐, 소설 함부로 쓰지 마!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야! 감히 내 앞에서 시답잖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나불대지 말란 말야!” (161쪽)



  오영진 님 만화책 《수상한 연립주택》(창비,2008)을 읽습니다. 연립주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만화로 담습니다. 연립주택 집임자와 세입자 사이에 툭탁거리는 이야기를 만화로 옮깁니다.


  이 만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이 만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 나라에서 있을 법할까요 없을 법할까요.




- ‘한여름의 아이콘. 나무 그늘 아래 평상, 단돈 천원으로 두 세대 모두에게 만족을 제공한 쮸쮸바에게 별 세 개를 주고 싶다.’ (234쪽)



  함께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대통령 하나가 잘난 나라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게 살아갈 나라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마을입니다. 시장이나 군수나 국회의원이나 무슨무슨 머시기가 잘난 마을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아끼고 돌볼 마을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집입니다. 사내는 하늘이고 가시내는 땅이 아닙니다. 집일은 가시내가 해야 하지 않고, 아이도 가시내가 돌봐야 하지 않습니다. 한집 사람은 서로를 어루만지고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아이 스스로 클 뿐 아니라, 어버이가 다 함께 따사롭게 보살필 노릇입니다.


  길에는 건널목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길을 건너야 할 사람이 있으면 자동차가 스르르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와 할매가 느릿느릿 건너더라도 기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전거도 사람도 자동차도 함께 사이좋게 어울릴 만한 길이어야 길입니다. 자동차만 싱싱 내달리는 곳에는 사람내음과 살내음도 사랑내음도 없습니다.


  풀벌레가 노래하지 않으면 들도 숲도 아닙니다. 새가 찾아들지 않으면 밭도 나무도 아닙니다. 무지개가 드리우지 못하면 하늘이 아닙니다. 별빛이 초롱하지 않다면 밤이 아닙니다. 물고기와 가재와 다슬기가 어우러지지 않는다면 냇물이 아닙니다. 잠자리와 제비와 박쥐와 나비와 벌이 한데 얼크러져 춤추지 않는다면 ‘우리가 마실 바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양에도 사람이 살고 강릉에도 사람이 살며 신안에도 사람이 산다. 서울과 부산에도 사람이 살며, 화순과 담양에도 사람이 산다. 그러면, 사람이 사는 이 땅에서 나오는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는 이 나라 사람 목소리가 어느 만큼 나올까. 신문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이 나라를 이루는 수많은 사람들 목소리나 얼굴이나 웃음이나 눈물은 어느 만큼 나올까. 송전탑 싸움이 있기 앞서도 밀양은 밀양이었다. 핵발전소를 못 들어서게 하려고 싸운 해남과 고흥은 군수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핵발전소와 함께 ‘수천 억 보상금을 타내겠다’고 벼르지 않아도 시골사람 스스로 오순도순 수수하게 잘 살아왔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들, 송전탑이나 핵발전소 없이도 얼마든지 살가이 살아온 사람들 수수하며 투박한 이야기들은 어디에서 듣거나 만나거나 읽을 수 있을까. 신문을 덮고 텔레비전을 끄며 컴퓨트를 쉬게 하면 이야기가 흐른다. 들길을 걷고 숲에 머물면 이야기가 샘솟는다. 밀양을 살며 밀양내기 이야기를 듣듯이, 수원을 살고 문경을 살며 장흥을 사는 이야기가 하나둘 태어날 수 있기를 빈다.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밀양을 살다-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4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8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4년 04월 24일에 저장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