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글 읽기

2014.12.21. 큰아이―산타 할배한테



  산타 할배한테 꼭 오시라는 뜻을 편지로 쓴다. 이루고 싶은 것, 받고 싶은 것을 써서 큰 양말에 넣기도 했는데, 벼리가 잘 자고, 자면서 이 안 갈고, 잘 놀고 잘 웃고 잘 노래하고 잘 자고 밥 맛있게 먹고 …… 한다면서, 산타 할배한테 부디 오시라고 편지를 쓴다. 그래, 네 마음을 다 아셨을 테니 산타 할배는 우리가 잠들어 꿈을 꾸는 사이에 살그마니 다녀가셨으리라 믿는다. 네가 바라는 것은 시나브로 하나둘 이루어질 테야. ㅎㄲㅅㄱ


(최종규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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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118. ‘찍어도 될까요?’ 하고 묻는 말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 길은 여럿입니다. 사진에 찍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몰래 찍는 길이 있을 테고, 사진에 찍힐 사람한테 알리고 찍는 길이 있을 테지요. 사진에 찍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몰래 찍더라도, 미리 ‘찍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은 뒤 허락이나 동의를 받은 뒤에 가만히 기다리다가 찍을 수 있어요. 그리고, ‘찍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은 뒤에 곧바로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에 찍힐 사람한테 알린 뒤에도, 막바로 찍을 수 있지만 며칠이나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찍을 수 있어요.


  그러면,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허락을 안 받고 몰래 찍는 사진이 가장 살갑거나 자연스러울까요? 허락을 받고 슬그머니 찍어서 ‘찍히는 사람이 못 알아챈’ 사진은 어느 만큼 살갑거나 자연스러울까요? 허락을 받기는 했으나 ‘찍히는 사람이 자꾸 사진기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쑥스러워 할 적에 찍는’ 사진은 얼마나 살갑거나 자연스러울까요?


  흔히 ‘초상권’이라고 하는데, 초상권을 쓰도록 허락을 받는 일은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허락을 받고 나서 1분만에 찍어야 하거나 10분 뒤에까지 꼭 찍어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락을 받고 나서 ‘사진을 찍고 싶은 내 마음이나 눈길’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어요. ‘이야, 바로 저 모습이야!’ 하는 모습은 1초 사이에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언제이든 다시 찾아옵니다. 딱 한 번 아니면 못 보는 모습이 있다고도 할 터이나, 우리 삶에서 딱 한 번 아니면 못 볼 모습이란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딱 한 번 아니면 못 볼 모습이라서 미처 허락이나 동의를 안 받고 찍었으면, ‘미리 허락이나 동의를 안 받고 찍었습니다’ 하고 알린 다음 미안하거나 죄송하다고 말씀을 여쭐 수 있어요.


  사진찍기는 ‘내 소유물 만들기’가 아닙니다. 내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들 얼굴이나 모습을 ‘내 창작품’이라고 함부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을 사진으로 찍었다면 초상권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과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마땅합니다. 허락과 동의를 받지 않고 사진을 바깥으로 드러내려 한다면 ‘내 사진기로 찍은 사진은 내 소유물’이라는 얕은 생각을 어설피 보여주는 셈입니다. 지난날에는 필름사진뿐이었기에 ‘사진에 찍힌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찍혔는지 알기 어려웠다면, 오늘날에는 디지털사진이 널리 퍼졌으니, ‘사진에 찍힌 사람’한테 디지털파일을 보여주면서 허락과 동의를 받으면 아주 손쉽습니다. 이만 한 허락과 동의를 받지 않고서 사진기 단추만 눌러댄다면, 우리는 ‘사진 창작’이 아니라 ‘인권 침해 폭력’을 저지른다고 하겠습니다. 4348.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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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놀이 20 - 누나를 태운 세발자전거



  세발자전거를 작은아이가 몬다. 세발자전거가 큰아이가 선다. 큰아이는 동생더러 세발자전거를 몰아 달라 하면서, 한 발을 쓰거나 두 발을 다 쓰면서 뒷바퀴를 굴린다. 작은아이는 아직 누나를 뒤에 태워서 몰 만한 힘은 없지만, 큰아이가 뒤에서 바퀴를 발로 구르면 함께 달릴 수 있다. 4348.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놀이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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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찾아서 창비시선 207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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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9



삶을 찾아서 사랑을 노래하는

― 詩를 찾아서

 정희성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2001.6.5.



  하늘이 날마다 선물을 베풉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이 날마다 선물을 합니다. 자, 나를 바라보면서 웃으렴 하고 손짓하는 하늘이 날마다 곱게 선물을 나누어 줍니다.


  하늘은 무엇을 선물할까요? 빙그레 웃음짓는 이야기를 선물합니다. 하늘은 왜 선물을 할까요?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하루를 열면, 이 따사로운 기운이 온누리를 아름답게 어루만지기 때문입니다.



..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 다섯살 배기 딸 민지 /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  (민지의 꽃)



  하늘이 활짝 열리는 곳을 보금자리로 삼습니다. 하늘이 활짝 열리는 곳을 보금자리로 삼는 사람이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룹니다. 마을에 있는 집은 서로서로 하늘을 나눕니다. 함께 누립니다. 어느 집 한 채만 높다라니 올리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만 차지해야 하는 하늘이 아닙니다. 따순 볕은 골고루 받아야 합니다. 어느 한 집이 높다라니 서면, 그만 이웃은 겨울에 그늘이 지면서 추워요. 몇몇 집이 서로 겨루듯이 높이 오르려 하면, 그만 다른 이웃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싱그러운 바람과 고운 햇볕을 제대로 못 누려요.


  예부터 시골이든 도시이든 옹기종기 모여서 집을 지었습니다. 다 함께 햇볕과 바람을 나누었고, 하늘도 서로 사이좋게 누렸습니다. 내가 즐거울 적에 너도 즐거우며, 네가 즐거울 적에 나도 즐거웠어요. 그런데 차츰차츰 달라지는 사회에서는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법에 따라’ 집을 짓습니다. 너도 나도 집을 높이 올리려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웃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 부자로 살고 싶어서 / 발표도 안한다 ..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정희성 님이 쓴 시를 단출하게 묶은 《詩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200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새파란 겨울하늘을 바라보면서 시를 읽습니다. 새파란 겨울하늘을 함께 누리는 풀과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시를 읊습니다.


  새가 살 수 있는 곳이면 사람도 살 수 있습니다. 새가 살 수 없는 곳이면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제비가 집을 짓는 자리라면 사람도 보금자리를 틀 만합니다. 제비가 둥지를 틀지 않는 자리라면 사람도 보금자리를 가꿀 만하지 않습니다.



.. 한 처음 말이 있었네 / 채 눈뜨지 못한 / 솜털 돋은 생명을 /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 사랑해 ..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이제 서울에는 제비가 찾아가지 않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도 제비를 굳이 바라지 않고 기다리지 않으며 생각조차 않습니다. 부산이나 대구 같은 큰도시는 어떠한가요? 광주나 인천이나 대전 같은 큰도시는 어떠한가요? 제비를 꿈꾸는 아이가 있는가요? 꾀꼬리나 종달새를 동네에서 보고 싶은 아이가 있나요? 두루미나 고니가 내려앉는 커다란 나무가 동네에 아름답게 서기를 바라는 아이가 있나요?



..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 멀리는 못 가고 /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  (同年一行)



  새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시를 쓰지 못합니다.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귀여겨듣지 못하는 사람은 시를 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새는 늘 사랑으로 노래를 하기 때문입니다. 새는 언제나 사랑으로 둥지를 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은 서로 사랑하면서 꿈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마을살이와 동네살이를 북돋우지 못할 적에는, 겉모습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닙니다.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두레와 품앗이로 마을과 동네에 고운 사랑이 바람처럼 흐르도록 하지 못한다면, 몸차림은 사람일는지 모르나 사람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은 시골을 망가뜨렸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불어닥친 뒤부터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을 사랑하도록 이끌지 않은 새마을운동은, 도시로 떠난 사람들한테까지 도시를 도시답게 가꾸면서 사랑하도록 이끌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새마을운동은 사람들 가슴에 있던 사랑과 꿈을 끔찍하게 짓밟았습니다. 사랑과 꿈이 짓밟혀 울부짖던 사람들은 그만 돈에 휘둘리고 졸업장에 휩쓸리면서 이웃을 잊고 그저 다투고 싸우며 악다구니가 됩니다.



..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번을 외우라고 했다 ..  (첫 고백)



  왜 입시지옥을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일까요? 왜 우리 스스로 동무를 ‘맞수’로 삼아서 밟고 올라서려고 할까요? 내가 서울에 있는 손꼽히는 대학교에 붙으려면 너는 밑바닥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네가 서울에 있는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려면 나는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져야 합니다.


  함께 가는 길이 아니라 ‘나 혼자’ 가려는 길입니다. 서로 어깨를 겯으면서 웃고 노래하는 길이 아니라 ‘나 혼자’ 돈과 이름과 힘을 몽땅 거머쥐려는 길입니다.


  입시지옥 수렁에 빠진 아이들은 하늘을 안 봅니다. 낮하늘도 밤하늘도 안 봅니다. 오직 교과서와 문제집만 봅니다. 어버이 얼굴이나 동무 얼굴이나 이웃 얼굴은 바라볼 겨를이 없고, 그저 시험지와 참고서를 볼 뿐입니다.


  이런 바보스러운 나라에서는 하늘이 하늘빛을 잃고, 사람은 사람빛을 잃으니, 시를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바보스럽게 악다구니 다툼질을 벌이기에, 이러한 곳에서는 제비도 꾀꼬리도 종달새도 두루미도 깃들지 못합니다. 새도 못 살고 사람도 못 살아, 그만 몽땅 죽음 구렁텅이로 내달리는 꼴입니다.


  시를 찾는 길은 삶을 찾는 길입니다. 삶을 찾는 길은 사랑을 찾는 길입니다. 사랑을 찾는 길은, 내가 나다우면서 사람답게 아름다우려는 길이요, 사람과 이웃인 새와 풀벌레와 들짐승이 모두 숲에서 푸른 바람을 마시는 길입니다. 4348.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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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484) 전의 5


그는 뛰어난 어학 실력을 보였기 때문에 교수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고, 좀전의 실례를 용서했다

《구위드 다메오/이우석 옮김-무솔리니》(학원출판공사,1989) 167쪽


 좀 전의 실례를

→ 좀 전에 있던 실례를

→ 조금 앞서 저지른 잘못을

→ 바로 앞서 했던 부끄러운 짓을

 …



 ‘좀전’처럼 붙여서 쓰는 분도 있으나 ‘조금 전’을 뜻하는 말마디이니 ‘좀 전’으로 띄어서 적어야 올바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하면서 말쓰임을 살핀다면, ‘前’을 ‘앞서’로 다듬어 “조금 앞서”처럼 적으면 아무 걱정이나 말썽이 없습니다. “바로 앞서”로 적어 보아도 어울리고, ‘앞서’만 넣어도 괜찮습니다. 4341.7.24.나무/4348.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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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교수들은 입을 모아 추켜세웠고, 앞서 저지른 잘못을 봐주었다


“뛰어난 어학(語學) 실력(實力)을 보였기”는 “뛰어난 말솜씨를 보였기”나 “여러 나라 말을 훌륭히 할 줄 알았기”로 손질합니다. 둘 가운데 하나일 테지요. ‘칭찬(稱讚)했고’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추켜세웠고’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실례(失禮)를 용서(容恕)했다”는 “잘못을 덮어주었다”나 “잘못을 너그러이 봐주었다”로 손봅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645) 전의 6


덕수는 그저 놀란 마음에 눈이 동그래집니다. 좀 전의 웃음은 간곳이 없습니다

《강무지-다슬기 한 봉지》(낮은산,2008) 141쪽


 좀 전의 웃음은

→ 조금 앞서 지었던 웃음은

→ 조금 앞서 보여준 웃음은

→ 조금 앞서 같은 웃음은

 …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인다면 어떤 웃음이었는가를 찬찬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많이도 아니고, 넘치게도 아닙니다. 아주 조금만 마음을 기울이고, 눈길을 보내면 됩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니,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펼치지 못합니다. 조금이나마 눈길을 보내지 못하니, 우리 글을 우리 글답게 적바림하지 못합니다.


  조금씩 마음을 기울이면서 우리 누리를 한결 아름답고 밝게 북돋우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조금씩 마음을 바치면서 이웃과 더욱 따뜻하게 어우러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조금씩 마음을 나누면서 숲과 마을과 보금자리를 고이 가꿀 수 있습니다만, 말도 삶도 이웃도 마을도 나라도 살갑게 껴안지 못합니다. 4342.1.6.불/4348.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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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는 그저 놀란 마음에 눈이 동그래집니다. 조금 앞서 같은 웃음은 간곳이 없습니다


‘미소(微笑)’가 아닌 ‘웃음’이라 적은 대목이 반갑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 붙은 토씨 ‘-의’를 넣은 말투는 아쉽습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876) 전의 7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일이다. 열 명 남짓 한 학생들이 강의실 벽에 자신의 작업을 걸었다

《박태희 옮김-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안목,2009) 7쪽


 14년 전의 일이다

→ 열네 해가 지난 일이다

→ 열네 해가 된 일이다

→ 열네 해 앞서 있던 일이다

 …



  ‘14년(十四年)’은 한자로 이루어진 말마디입니다. 저는 이 같은 말마디를 쓰지 않습니다만, 오늘날 우리 둘레 어디에서나 이런 말마디를 손쉽게 듣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말마디로 생각을 나눕니다. 저로서는 이 같은 말마디를 굳이 써야 할 까닭을 못 느낍니다. 그러나 제가 이 말마디를 안 쓴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 모두 이 말마디를 버리거나 털어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십사 년’이 아닌 ‘열네 해’라 말하면서도 내 생각을 넉넉히 나눌 수 있을 뿐입니다.


 14년 전 일이다

 14년이 지난 일이다

 14년 전에 있던 일이다


  이 보기글에서는 한자말 ‘14년’을 그대로 두면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저 토씨 ‘-의’ 하나만 털면 됩니다. 우리는 예부터 이러한 말투로 이야기를 펼쳤고, ‘전(前)’이라는 한자말 없이도 알뜰살뜰 마음을 나타내거나 나누었습니다.


  굳이 딱딱한 말투에 매이지 않아도 되며, 괜히 어줍잖은 말씨에 길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랑편지를 쓰든, 논문을 쓰든, 신문글을 쓰든, 일기를 쓰든 반드시 ‘십사 년’이나 ‘전 + 의’ 같은 말마디를 넣어야 하지는 않을 테지요. 그렇지만 워낙 오래 익숙하게 지냈기에 이 말버릇을 가다듬지 못하겠다면 하는 수 없습니다. 적어도 “14년 전 일이다”쯤으로는 적바림하도록 말씨를 아주 살짝이나마 보듬어 주면 고맙겠습니다. 4342.12.10.쇠/4348.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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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어느덧 열네 해가 지난 일이다. 열 사람 남짓 한 학생들이 강의실 벽에 제 사진을 걸었다


‘지금(只今)으로부터’는 ‘올해로 치면’이나 ‘어느덧’으로 다듬습니다. “열 명(名)”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열 사람”으로 손보아도 됩니다. “자신(自身)의 작품(作品)을”은 “제 작품을”이나 “손수 찍은 사진을”이나 “저마다 찍은 사진을”이나 “제 사진을”로 손질해 줍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89) 전의 8


어머니가 우리 집에 있었던 건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다

《사노 요코/윤성원 옮김-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2010) 9쪽


 10년도 전의 일이다

→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 열 해나 지난 일이다

→ 열 해도 더 지난 일이다

→ 열 해도 더 지났다

 …



  어머니가 열 몇 해 앞서 우리 집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뜻 그대로 말을 하면 됩니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계셨던 때가 벌써 열 몇 해가 되었다”처럼 적을 만합니다. “10년도 전의 일”이라고 적으면 알 듯 말 듯 아리송합니다. 아무래도 ‘더’라는 꾸밈말을 빠뜨렸구나 싶고, 열 해가 더 지났다고 하면 “열 몇 해”가 된 셈입니다. “열서너 해”라든지 “열대여섯 해”라고 적을 수 있을 테지요. “열 해 남짓”이라 적어도 됩니다. 4348.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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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우리 집에 있은 때는 벌써 열 해도 더 지났다


“있었던 건”은 “있었던 때는”이나 “있은 때는”이나 “계신 때는”이나 “계셨던 때는”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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