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아이 247. 2015.1.5. 볼펜순이



  도서관에 찾아온 손님 한 분이 볼펜 한 자루를 주셨다. 책순이는 선물받은 볼펜을 옷자락에 끼우고 다닌다. 걸을 적에도 책을 읽을 적에도 볼펜순이가 된다. 그 볼펜이 마음에 드는구나? 옷자락에 볼펜을 끼우고 다니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이 볼펜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지. ㅎㄲㅅㄱ


(최종규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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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의 평화 공감 르포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애숙 옮김 / 삼천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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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98



너와 내가 이웃이 되려면

― 오키나와 노트

 오에 겐자부로

 이애숙 옮김

 삼천리 펴냄, 2012.8.17.



  우리 집에서는 살림돈을 조금 모으면 으레 ‘오키나와 까만설탕(흑당)’을 장만합니다. 오키나와에서 자라는 사탕수수를 그대로 졸여서 만든 ‘까만 덩어리’는 더없이 맛나고 여러모로 쓰기에 좋습니다. 배고플 적에 먹어도 되고, 기운이 빠졌을 적에 먹어도 되며, 떡볶이를 할 적에 넣어도 됩니다. 사탕처럼 먹어도 맛나지요.


  그런데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진 뒤로 ‘오키나와 까만설탕’을 손사래치는 사람이 꽤 늘었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일본하고 오키나와(류큐)는 서로 다른 나라인데, 후쿠시마 핵발전소하고 ‘오키나와 까만설탕’이 어떻게 이어진다고 그럴까 아리송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일본이고 류큐(오키나와)는 류큐이기 때문입니다.


  정 모르겠다면, 세계지도를 펼치면 됩니다. 세계지도를 펼쳐서 ‘류큐’가 어디에 있고, 류큐섬에 있는 ‘나하’라는 도시가 일본 도쿄나 후쿠시마하고 어느 만큼 떨어졌는지 자로 재 볼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 자로 다시 류큐와 한국이 어느 만큼 떨어졌는지 재 볼 노릇이에요. 류큐섬하고 어느 나라가 더 가깝고 어느 나라가 더 멀까요? 후쿠시마하고 훨씬 가까운 나라는 어디일까요?



.. ‘나는 왜 오키나와에 가는가?’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너는 왜 오키나와에 오는가?’라고 거절하는 오키나와의 목소리와 겹치며 언제나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 본토 일본인은 오키나와 화생방 부대의 위협이 없는 땅에서 원자력잠수함의 자유로운 출입에 대한 방호책을 대충은 갖추고 살고 있다 … ‘과연 원폭 체험은 일본인에게 참 경험이 되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야만 한다. 어쩌면 원폭의 참 경험이라는 인간적 샘물은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갈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  (18, 51, 109쪽)



  일본은 류큐섬을 식민지로 삼다가 미군기지로 내주었다가 일본땅 가운데 하나로 끌어들였습니다. 일본이 류큐섬을 식민지로 삼기 앞서까지 류큐섬은 홀로 아름답게 삶을 이루던 터전입니다. ‘일본에 있는 오키나와’가 아니라 ‘태평양에 있는 류큐’입니다.


  그런데 이 류큐섬 옆에 ‘게라마 줄섬(열도)’이 있고, 게라마섬에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천황을 섬긴다고 하면서 아시아에 전쟁바람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 군대가 류큐섬 사람들을 모질게 괴롭히고 짓밟다가 죽였어요. 이 같은 이야기는 ‘마루키 도시’ 님과 ‘마루키 이리’ 님이 함께 빚은 그림책 《오키나와의 목소리》(꿈교출판사,2013)에도 아주 잘 나옵니다. 어린이가 읽을 수 있도록 엮은 《오키나와의 목소리》를 읽으면, 평화로우며 사랑스럽던 작은 ‘섬나라 류큐’에 어떤 군대가 끔찍하게 몰려들어 온통 잿더미와 주검더미로 만들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류큐사람은 조선사람처럼 ‘일본에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야’ 했고, 류큐사람도 조선사람처럼 나가사키에서 핵폭탄에 맞아서 죽거나 피폭후유증으로 오랜 나날 괴롭게 앓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이라 할 텐데, 일본은 일본이라고 하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그악스럽게 괴롭힙니다. 더 들여다보면, 일본은 일본이라는 테두리 안쪽에서도 저희끼리 따돌리거나 괴롭힙니다.


  한국 사회도 일본 사회와 다르지 않아요. 한국도 한국이라고 하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따돌리거나 괴롭힙니다. 한국으로 오는 ‘제3세계 이주노동자’가 어떤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는지 들여다보면 잘 알 만합니다. 게다가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쪽에서도 학벌에 따라 따돌리고, 지역차별이 크며, 성차별과 신분차별도 끔찍합니다.



.. 오키나와에는 일하러 가서 피폭되어 귀향하거나 원폭 관련 질병에 대한 전문적 치료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수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생존해 있다. 하지만 원폭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방법이 없어서 피폭자들 대부분이 침묵하고 있다 … 나하 군항에서 일하는 잠수부들이 몸에 이상을 호소했다. 코발트-60에 오염된 진흙을 계속 채취하여 체내에 오염을 축적시킨 물고기 틸라피아와 섭조개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미군은 잠수부들의 이상이 방사능과 관련 없다고 단언하고서 그들을 본토 원폭병원으로 보내려던 전군노의 계획을 가로막았다 ..  (29, 48쪽)



  평화를 바라려면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평화를 바라려면 손수 흙을 지어야 합니다. 총이나 칼을 든 평화란 없습니다. 권력을 한손에 거머쥔 채 평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돈주머니를 홀로 꿰찬 채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신분과 계급을 가른 채 평화를 읊는 일이란 덧없습니다.


  전쟁무기가 있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학교에서 삶과 사랑과 꿈은 안 가르치면서 시험성적으로 등급과 계급을 만드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 제국주의 일본도 평화롭지 않았으나, 오늘날 한국 사회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사람을 사람답게 돌보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이웃을 아끼거나 섬기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느니 경제개발이라느니 하고 내세우면서 온 나라를 뒤집어엎는 짓을 잇달아 벌입니다. 한국에서 왜 새마을운동 같은 끔찍한 짓이 생겼고, 이런 새마을운동 깃발은 아직도 펄럭일까요? 한국은 조금도 안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새마을운동 바람이 분 뒤로, 시골을 고향이나 보금자리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고, 아직도 새마을운동 깃발이 펄럭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시골이 시골답게 있을 수 없습니다.



.. 나는 우익이 쳐들어왔다고 쓰고 싶지는 않다. 우익이 방해 연설을 했다는 말도 사용하지 않겠다.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쳐들어온 자들이나 더러운 말을 내뱉는 남자와 내 피가 직접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 오키나와가 미국 군부뿐 아니라 본토 일본인이 새삼 인지한 핵기지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한테 물었다.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그저 씁쓸히 침묵하는 내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일본 복귀는 ‘평화의 거점으로서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  (142, 154쪽)



  오에 겐자부로 님이 쓴 《오키나와 노트》(삼천리,2012)를 읽습니다. 1960년대 끝무렵부터 1970년대 첫무렵 사이에 쓴 글을 엮은 책입니다. 어느덧 마흔 해나 묵은 글인데, 마흔 해를 묵은 글이라지만, 류큐(오키나와)와 일본을 묶는 슬픈 쇠사슬은 제대로 풀렸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사랑스러운 끈이 아닌 그악스러운 쇠사슬이 너무 단단합니다.


  한국사람은 왜 서울로 가려고 할까요? 한국사람은 왜 서울에서 살려고 할까요? 서울이 아니면 부산, 부산이 아니면 대구, 대구가 아니면 인천이나 대전, 또 이런저런 큰도시, 저런그런 큰도시, 오직 도시만 바라보는 얼거리인데, 왜 자꾸 이렇게 나아가려 할까요?


  한국사람은 왜 대학교를 가야 할까요? 대학교 졸업장은 왜 따야 할까요? 왜 꿈을 안 키우고 졸업장만 따려 할까요?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왜 교과서 시험공부만 하고, 삶과 사랑과 꿈을 키우는 공부는 안 하거나 못 할까요?



.. 1903년의 이른바 인류관 사건은 당연히 그런 오키나와에 대한 인식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권업박람회 기간에 학술 인류관이라는 부스에 오키나와 여성 두 사람이 ‘진열’되었다. 그녀들은 곰방대와 야자수잎 부채를 들고 오두막에 앉아 있었고, 채찍을 든 남자가 여인들을 ‘이놈’이라고 부르며 설명했다고 한다 … 볼도저의 굉음, 인류의 진보와 조화를 찬미하는 노랫소리는 그 의문의 목소리를 뭉개고 울려퍼지지만, 언제까지 굉음과 노랫소리를 지를 생각인 것일까 … 오키나와에 대한 무지의 단순화는 의식적인 회피와 냉혹한 일본인의 행태를 보여준다. 아시아에서 침략적으로 날뛰지 않을 때조차 일본인은 단순한 인식을 바탕으로 아시아인을 차별했다 ..  (165, 167, 171쪽)



  너와 내가 이웃이 되려면 서로 무엇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주먹을 휘두르면서 서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나한테 더 있는 돈을 나누려 하지 않으면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배가 고픈 이웃한테 밥 한 그릇 내주지 않으면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내 손에 있는 것을 서로 나누려 하지 않을 적에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서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동무를 하려고 하지 않고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오에 겐자부로 님은 《오키나와 노트》라는 책을 쓰면서 ‘류코와 일본 사이에 맺힌 앙금’을 모두 풀지는 못합니다. 아마 풀 수 없다고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풀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서로 이웃이 되면 앙금이란 없어요. 서로 벗이 되고, 서로 한솥밥 먹는 사이가 되면 어떠한 앙금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왜 류큐에 미군기지를 그렇게 많이 두어야 했을까요? 도쿄 앞바다에 미군기지를 두어야지요. 왜 후쿠시마에 핵발전소를 세웠을까요? 도쿄 한복판에 핵발전소를 세워야지요.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커다란 야구장이나 축구장을 짓겠다면, 서울이나 부산 말고 문경이나 장흥 같은 데에 지어요.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짓겠다면, 서울이나 부산 한복판에 지어요. 대학교가 서울에 이처럼 많이 다닥다닥 모이도록 하지 말고, 서울에는 딱 한 군데만 남기고, 다른 모든 대학교는 군마다 한 군데씩 있도록 해야지요. 모든 길이 서울과 부산으로만 이어지도록 하지 말고, 군과 군 사이를 살가이 잇는 작은 길을 내야지요. 군부대와 전쟁무기를 몽땅 없애고, 군부대와 전쟁무기에 들이던 돈은 이제부터 마을과 삶을 가꾸는 데에 써야지요. 경제개발이나 경제발전은 살포시 내려놓고, 사랑과 꿈을 아이들이 품고 키우면서 일구도록 이끌어야지요. 대외무역에 기대지 말고, 이 나라에서 먼 옛날부터 모든 것을 손수 지어서 손수 누렸듯이, 모든 집·밥·옷을 누구나 손수 지어서 얻고 가꿔서 누리는 길로 나아가야지요.


  댐을 지어 수돗물을 쓰는 얼거리가 아니라, 시골과 도시 어디에서나 냇물을 마시도록 해야지요. 큰 발전소를 짓는 얼거리가 아니라, 집집마다 제몫으로 전기를 만들어서 쓰도록 해야지요.



.. 자신들이 방치하고서 적을 향할 무기를 거꾸로 겨누고 자행한 강간에 대해, 먼저 자신을 속이고는 기만하기 쉬운 타인부터 의심 많은 타인까지 ‘거짓말’로 계속 왜곡시켜 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 눈에 강간이 아름다운 ‘한순간의 사랑’으로 바뀐 것을 발견한다. 둔감한 상상력으로 그는 오키나와 현장에서 오키나와 여성 피해자가 “아니야, 그건 강간이었어!” 하고 소리치며 규탄하는 손가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게라마 집단자결의 책임자도 그런 자기기만과 타자에 대한 기만을 끊임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보상하기에는 너무나 큰 죄 앞에서 그는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살고 싶어 한다. 그는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과 왜곡되는 기억의 도움을 받아 죄를 상대화시킨다. 그리고 자기변호의 여지를 남기려고 과거 사실의 날조에 힘을 쏟는다 … 실제로 지금 재일조선인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의 윤리적 상상력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보라. 지극히 평범한 어리석은 고등학생이 실체도 모르는 것과 연결된 사명감, ‘어떤 고양감’에 휩싸여 조선 학생을 때리는 치졸하고 파렴치한 실상을 보라. ‘전쟁 중에 일어난 여러 사건과 아버지들의 행동’과 똑같은 짓을 신세대 일본인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반복할 때 … 오키나와의 무한한 이의제기의 목소리를 묵살하려고 못 들은 척 하거나 들을 수 있는 귀를 키우지 않는 것은 국가 범죄로 가는 새로운 포석이 아닐까 ..  (184∼185, 189쪽)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비로소 이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비로소 함께 노래하고 웃으면서 춤을 춥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기에 ‘경쟁’이 불거지고 ‘순위’와 ‘등급’이 나타납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쓰레기는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할 때에 먼 옛날부터 곱게 잇던 두레와 품앗이가 저절로 마을마다 되살아날 테니, 굳이 협동조합 같은 것은 없어도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않기에, 스스로 노래를 안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길을 짓지 않기에, 신문과 방송과 책에 휘둘린 나머지, 손수 짓는 삶과 자꾸 동떨어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지 않으면 벼랑까지 그대로 나아가다가 그만 굴러떨어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어야, 바로 이곳에서 아름답고 푸른 숲을 이룹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지 않으면 이 지구별은 그만 꽝 하고 터집니다. 바보스레 걷는 길을 멈추어야, 바로 이 지구별이 온누리에 맑고 밝게 빛나는 사랑스러운 터전으로 거듭납니다. 4348.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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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5-01-1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키나와의 아픈 과거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행프로그램에서도 태평양전쟁당시 일본위 만행이 언급되었습니다. 얼마전 선거때도 오키나와 주일미군이 이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파란놀 2015-01-14 10:49   좋아요 0 | URL
네, 오키나와 역사는 `일본 역사`라고 할 수 없기도 하고,
그곳, 류쿠는
외려 일본보다 한국하고 문화와 삶이
한결 가까이 이어지기도 해요.

가만히 보면, 지도로 볼 적에도
뱃길이 류큐와 한국은 한결 가깝지요.
여름과 겨울에 바뀌는 바람을 타면
그야말로 옛날에는
류큐와 한국은 서로 자주 오갔겠구나 싶어요.

그리고, 두 겨레가 일본한테 끔찍한 짓을 겪기도 했고요..
 
사과 여행
신현림 지음 / 사월의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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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0



오늘 하루를 기쁘게 노래하는 사진

― 사과여행

 신현림 사진·글

 사월의눈 펴냄, 2014.7.23.



  오늘 하루는 기쁨입니다. 왜 기쁨인가 하면, 기쁨이기 때문에 기쁨입니다. 달리 까닭을 붙일 수 없습니다. 기쁨이니 기쁨이고, 기쁨인 하루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쁩니다. 오늘 하루가 기쁨인 줄 아는 사람은 길을 걸으면서 노래를 스스로 부릅니다. 유행노래나 대중노래가 아니라, 저절로 태어나는 가락에 맞추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빙그레 웃습니다. 오늘 하루가 기쁨인 사람은 노래를 부르듯이 도마질을 해서 아침밥을 짓고, 한식구와 함께 기쁘게 밥을 먹은 뒤, 기쁘게 설거지를 하고, 기쁘게 걸레를 빨아서 기쁘게 방바닥을 훔치고, 기쁘게 집일을 건사할 뿐 아니라,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적에도 온통 기쁨물결입니다. 기쁘게 하루를 누리는 사람이 손에 사진기를 쥐면, 기쁨이 묻어나는 사진을 기쁘게 찍습니다.


  오늘 하루는 슬픔입니다. 왜 슬픔인가 하면, 슬픔이기 때문에 슬픔입니다. 달리 토를 달 수 없습니다. 슬픔이니 슬픔이고, 슬픔인 하루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슬픕니다. 슬픈 탓에 노래를 안 부릅니다. 슬프기에 옆에서 누가 노래를 불러도 시큰둥할 뿐 아니라 듣기 싫습니다. 슬픈 사람은 억지스레 겨우 아침밥을 짓고, 한식구가 모여앉는 자리조차 거북합니다. 말 한 마디 없이 꾸역꾸역 밥을 입에 집어넣다가 지겹고 짜증스러운 일을 하느라 고된 아침과 저녁이 됩니다. 집에서 살림을 하든 회사에 가든 밭에서 남새를 돌보든,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은 힘들고 지치며 한숨이 나옵니다. 슬퍼서 힘이 나지 않으니 사진기를 손에 쥐기도 귀찮고, 사진을 찍어야 할 일이 있으면 이맛살을 찡그려 이도 저도 아닌 사진을 찍습니다.



.. 제가 태어나 사과나무 숲을 처음 봤던 날이 기억나요. 그만 흠뻑 반했던 날이요 … 사과는 태양과 바람과 비의 음료수예요. 갈증을 풀고 생의 활기를 주는 사과의 실체는 물이자 사랑입니다 ..





  남이 나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두 내가 그리는 모습이요, 기쁨이든 슬픔이든 스스로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가난하거나 힘들어도 웃고 노래하는 사람이 있고, 배부르거나 돈이 많아도 고단하거나 슬픈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가 사랑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언제나 사랑스럽습니다. 오늘 하루를 사랑으로 느끼니, 이녁은 사진기를 손에 쥐면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묻어나는 사진을 찍습니다. 오늘 하루가 꿈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어떤 사진을 찍을까요? 꿈결 같은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을 찍을 테지요. 오늘 하루가 노래라고 느끼거나 웃음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노래가 흐르는 사진을 찍거나 웃음이 감도는 사진을 찍어요. 오늘 하루가 괴롭다고 느끼면, 사진을 찍을 적에도 괴로운 이야기가 흐릅니다. 마음결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스스로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내 사진이 달라집니다.


  사진을 찍을 때뿐 아니라 사진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기쁜 마음일 때에는 기쁘게 사진을 찍고, 기쁘게 사진을 읽습니다. 슬픈 마음일 때에는 슬프게 사진을 찍으며, 슬프게 사진을 읽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일 때에는 홀가분하게 사진을 찍으며, 홀가분하게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이론을 많이 익힌 사람은 사진이론에 맞추어 사진을 찍거나 읽습니다. 사진역사를 많이 살핀 사람은 사진역사에 맞추어 사진을 찍거나 읽습니다. 이론이나 역사를 따로 안 살피거나 거의 모르는 사람은 이론이나 역사에 맞추어 사진을 찍거나 읽는 일이 드뭅니다.


  어떤 사람은 ㄴ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사진기가 가장 좋다고 여겨 이 회사 사진기만 씁니다. 어떤 사람은 ㅋ이나 ㅁ이나 ㄹ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사진기가 가장 좋다고 느껴 이 회사 사진기만 씁니다. 그런데, 아주 많은 사람들은 어느 사진 한 장이 어떤 사진기로 찍었는지 거의 모르거나 아예 안 살핍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회사 사진기로 얻은 사진인가?’는 사진읽기에서 대수롭지 않고 ‘누가 찍은 사진인가?’도 사진읽기에서 대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 ‘인생은 어디서나 가슴에 사랑을 담는 여행이며, 그 사랑은 사진이 증거한다’라는 제 아포리즘으로 두 작업의 공통점을 말하고 싶어요. 다른 점은 사과밭이 지구의 상징이었다면, 이번에는 사과를 들고 지구를 여행하며 찍은 거죠 ..



  사진이론을 잘 배워야 사진을 잘 읽지 않습니다. 내 마음결이 어떠한가를 똑똑히 느낄 수 있어야 사진을 제대로 읽습니다. 사진실기를 알뜰히 배워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내 마음결이 어떠한가를 또렷이 깨닫고 알아차리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사진을 제대로 찍습니다.


  사진 한 장에는 기쁨이 드러나든 슬픔이 드러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진에 기쁜 이야기를 담을 수 있고, 슬픈 이야기나 아픈 이야기나 놀라운 이야기나 멋진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이든 넉넉하게 담을 만합니다. 어떤 이야기이든 우리 삶을 밝히는 숨결이기에 반갑게 읽습니다.


  기쁜 이야기를 사진에 담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슬픈 이야기를 사진에 담기에 덜 훌륭하지 않습니다. 다큐사진은 아프거나 슬픈 이야기만 담아야 하지 않습니다. 패션사진은 이쁘장하거나 놀라워 보이는 이야기만 담아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진을 찍든, 사진에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담기에 사진찍기요, 이야기를 느껴서 나누기에 사진읽기입니다.



.. 길과 길에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 시와 사람의 이야기가 스며 있어요. 사과를 통해 그곳과 저는 깊이 이어지고 만납니다 … 그들의 사랑을 잊지 않고 싶어 사진 찍었어요 … 사과를 든 왼송르 쭉 뻗어 오른손에 쥔 사진기로 찍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 때가 있어요. 물론 춤출 때처럼 즐겁기도 하고요..




  신현림 님은 능금 한 알과 함께 나들이를 합니다. ‘사과’나 ‘부사’ 같은 이름도 있으나, 한국말은 ‘능금’이고, 먼 옛날 한국말은 ‘멋’입니다. 일본사람은 ‘링고’라는 말을 쓰며, 서양사람은 ‘애플’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떤 말을 쓰든 다 좋습니다. 그저 나라가 다르고 겨레가 다르며 자리와 때가 다를 뿐입니다. 사과이든 능금이든 애플이든 링고이든 멋이든 뭐이든 다 똑같습니다. 《사과여행》에서 신현림 님은 이녁 마음을 나누는 숨결을 곁에 두면서 이야기를 짓습니다. 어디에서나 함께 있고, 어디에서나 함께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함께 꿈꾸는 숨결이 무엇인지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짓습니다.



.. 예술은 속도전에 실려 가는 현재를 브레이크 걸어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심각하게 질문해야 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어요 … 영원을 향해 갑니다 ..




  바람이 불어 능금나무 가지를 살짝 건드립니다. 동이 트고 해가 솟으면서 능금나무를 햇볕이 따사롭게 어루만집니다. 해가 기울고 달이 뜨고 별이 돋으면서 포근한 기운이 능금나무 잎사귀와 꽃망울을 살살 간질입니다. 종달새 두 마리가 살짝 내려앉아 노래합니다. 종달새 두 마리는 푸드득 날아가고, 이내 딱새와 박새와 참새가 사이좋게 날면서 능금나무 둘레를 맴돕니다. 직박구리가 날아와서 능금나무 잎사귀를 갉아먹는 애벌레를 콕 찍어 낚아챕니다. 뭇 새들 부리에서 살아남은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고 천천히 허물을 벗어 고운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로 거듭납니다.


  능금 한 알은 사람도 먹고 벌레도 먹으며 새도 먹습니다. 때로는 다람쥐도 먹고 숲짐승도 먹으며, 흙바닥에 툭 떨어진 능금알을 지렁이나 풀벌레가 먹기도 합니다. 개미도 먹고 달팽이도 먹습니다.


  능금을 먹은 여러 목숨은 능금똥을 눕니다. 능금 냄새가 나는 똥을 누어 흙한테 돌려줍니다. 흙은 능금 냄새가 나는 똥을 받아들여서 한결 기름진 까무잡잡한 고운 흙으로 거듭나고, 이 흙은 다시 능금나무를 살립니다. 능금나무는 능금똥으로 더욱 기름진 흙한테서 기운을 받아들여 줄기를 올리고 새롭게 꽃을 피웁니다.


  삶이 흐르듯이 사람이 자라고 나무가 자랍니다. 잎이 돋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습니다. 열매에는 씨앗이 깃들어 새로운 풀이나 나무로 깨어나고 싶습니다. 사람들 가슴에도 씨앗이 있어, 이 씨앗을 마음밭에 심으면 사랑이 태어나거나 꿈이 태어납니다. 사람이 마음밭에 심어서 태어나는 꿈과 사랑은 ‘시를 쓰고 싶은 꿈’일 수 있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어떤 꿈이든 좋고, 어떤 사랑이든 아름답습니다.


  누군가는 시계를 보면서 때를 읽습니다. 누군가는 해를 보면서 때를 읽습니다. 누군가는 밥내음을 맡으면서 때를 읽습니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안 보고 아무 때도 안 헤아립니다.


  사진책 《사과여행》을 가만히 넘기면서 신현림 님이 손수 지어서 누리는 삶을 떠올립니다. 어떤 빛일까요. 어떤 그림일까요. 어떤 노래일까요. 어떤 웃음일까요. 아마 어느 날에는 기쁜 노래가 가득하고, 어느 날에는 슬프디슬픈 생채기가 불거질 테며, 어느 날에는 마냥 허전하면서 시무룩할 테지요. 홀가분하다가 들뜨거나 설레는 날이 있고, 아이와 손을 맞잡고 신나게 춤을 추는 날이 있을 테지요.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삶을 오롯이 사진 한 장으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늘 즐겁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삶을 알뜰살뜰 사진 한 장으로 여밀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긴긴 겨울이 끝나면 얼어붙은 땅뙈기가 녹으면서 딸기풀이 자라고, 하얗게 딸기꽃이 피는 사월을 거쳐, 빨갛게 소담스러운 멧딸기 익는 오월이 됩니다. 사진책 《사과여행》에 흐르는 푸르고 하야면서 바알간 열매가 애틋합니다. 4348.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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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1-14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저도 보고 싶네요.
˝사과는 순례중이다˝라는 말은 곧 신현림 본인이 순례중이라는 뜻으로 읽혀요, 사과를 통해서요.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파란놀 2015-01-14 09:43   좋아요 0 | URL
대구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소량인쇄로 살짝 태어난
예쁜 사진책인데
중앙매체에서는 소개를 하지 않아서
아마 이 책이 나온 줄 모르는 사람도 많으리라 느낍니다.

얼마 앞서 신현림 님은 `그림책`도 손수 내놓으셨는데
`순례하는 삶`을 누리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러요

수이 2015-01-14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현림씨 사진 좋아해요. 저도 살짝 장바구니로 퐁당_^^

파란놀 2015-01-14 09:44   좋아요 0 | URL
작고 수수한 책에 깃든
작고 수수한 사진과 이야기로
마음에 따사로운 씨앗 한 톨 심으실 수 있기를 빌어요

[그장소] 2015-01-1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인은 이름에서.숲..이..느껴져서..좋아요.

파란놀 2015-01-15 03:48   좋아요 0 | URL
신현림 님은 숲을 사랑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산들보라가 물 넣고 싶었어



  고무대야에 물을 넣고 싶다면서 산들보라가 고무호스를 끌어당긴다. 그래, 너 대견하구나. 그러면 바깥물꼭지에 호스를 이어야지. 바깥물꼭지를 살핀다. 여름에는 아이들 손으로도 끼울 만하지만, 겨울이니 호스가 꽤 딱딱하다. 물꼭지는 내가 끼워서 물을 튼다. 두 아이가 고무대야에 물을 받으면서 춤을 춘다. 4348.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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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5 - 물총을 쏘려고



  물총을 쏘려고 고무대야에 물을 받는다. 그런데 물총이 모두 망가졌다. 그동안 마당에서 아무렇게나 굴린 탓이다. 찬물에 손을 담가서 애써 물을 넣었으나 물총이 안 된다. 어쩌겠니. 그냥 물놀이로 끝내야지. 4348.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놀이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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