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받은 책, 다친 책
누군가한테 책을 빌려줄 때에는 ‘그냥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냥 주는 셈치고 빌려주어야지, 빌려줄 때 모습 고스란히 돌아오리라 생각하면 안 된다고들 말한다.
서울사진축전을 하는 자리에 사진책 300권 남짓 빌려주었다. 책은 열여덟 상자에 담겨 돌아온다. 드디어 돌아와 준다. 상자를 하나하나 끌른다. 내 품을 떠나 숱한 사람들 손길을 타던 책을 그립게 어루만진다. 고맙게 거의 다치지 않은 책이 있다. 다치지 않은 책이란, 서울사진축전에 온 사람들이 ‘거의 안 들춘 책’이란 뜻이다. 다칠 까닭이 없는 번듯한 새책이요 나온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책이나 제본이 망가지고 종이가 찢어지며 뒤틀린 책이 있다. 그만큼 많이 들추거나 읽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1960년대 앞에 나왔던 책들은 하나같이 겉장이 떨어지거나 떨어질락 말락 한다.
누군가한테 빌려준 책이 뜻밖에 나한테 돌아올 때에는 그저 ‘고맙다’고 여겨야 한다고들 한다. 그래, 고맙다. 다쳤을지라도 이렇게 돌아와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우면서 반가운가.
앞겉장과 뒷겉장이 똑 떨어지고 만 1960년대 일본 사진잡지 하나는 큰 비닐에 넣는다. 앞으로 우리 시골 도서관으로 찾아와서 이 사진잡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리라. 내가 웬만해서는 안 보여줄 테니까. 그런데, 사람들 손을 타는 자리가 아닌 유리 진열장 안쪽에 넣기로 한 책조차 앞뒷 겉장이 똑 하고 떨어졌다. 왜? 1950년대에 나온 한국 사진책 하나 몹시 알뜰히 여겨야 한다고 틀림없이 말했는데, 왜?
빌려준 사람이 잘못이다. 빌려간 사람 탓을 할 수 없다. 책은 벌써 망가졌으니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이제부터 이 모습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건사해야 한다. 이 책도 크기에 맞는 비닐을 찾아서 곱게 넣어야지.
내가 그러모은 책으로 내 돈을 들여 도서관을 여는 일이란 참 바보스러운 짓이다. 그냥 나 혼자 조용히 껴안으면 될 노릇인데, 한국 같은 나라에서 개인 도서관을 하는 사람은 다 멍텅구리라 할 수 있다. 한국사람이 책을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보는데. 한국사람이 책을 얼마나 엉터리로 보는데. 한국사람이 책을 얼마나 안 사랑하고 안 아끼는데.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큰 새책방에는 ‘보기책’을 따로 놓기까지 한다. 사람들 손이 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갓 나와 반들반들한 새책에 손때나 손자국이 묻는다든지 책종이가 접힌다든지 하면 상품으로 팔 수 없다. 그러나, 책방마실을 한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책을 함부로 넘기거나 다룬다. ‘값을 치러 사기 앞서’까지는 얌전히 정갈하게 살펴야 할 책인데, 이렇게 하지 않는다. 책방에 마실거리나 먹을거리를 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까닭을 헤아리지 않는다.
여느 헌책방에 가 보면, 책방마실을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숫자가 헌책이라고 책을 마구 다룬다. 새책조차 알뜰히 돌보지 않는 한국사람이니까 헌책이라면 아무렇게나 던지거나 집거나 쥐거나 다루어도 되는 줄 알기 일쑤이다.
책을 아끼는 사람은 헌책이든 새책이든 똑같이 소담스러이 아낀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책보다 헌책을 훨씬 따사로이 사랑한다. 새책방 새책은 언제든지 다시 찍어서 만날 수 있다. 헌책방 헌책은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많다.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을 헌책이랑 언제라도 다시 찍어서 살 수 있는 새책이 함께 있을 때에, 두 가지 모두 같은 책이니까 같이 아낄 노릇인데, 내 손길은 어떠해야 하며 내 눈길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더 값있다기에 더 아끼거나 사랑해야 하지 않다. 더 값있다는 책이 아니라, 더 다치기 쉬우며 더 망가지기 쉬울 뿐 아니라 다시는 찾아볼 수 없도록 보배스럽기 때문에 조금 더 마음을 쏟아야 할 뿐이다. 두꺼운종이도 얇은종이도 같은 종이인 만큼, 종이로서 알뜰히 여겨야 하는데, 얇은종이는 한결 잘 찢어진다. 얇은종이를 조금 더 마음써서 다룰밖에 없다. 몸 튼튼한 사람과 몸 아프거나 여린 사람이 있다면, 몸 아프거나 여린 사람한테 마땅히 더 마음을 쏟거나 사랑을 나눌밖에 없다. (4344.2.15.불.ㅎㄲㅅㄱ)
(책을 이 따위로 들고 보니까 다친다. 무거운 책을 요 따위로 들고 보도록 살아오는 한국사람들은 책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알아채지 않는다. 그러나 행사를 마련한 쪽부터, 책이 다치지 않도록 볼 수 있게끔 책걸상을 넉넉히 마련하지 않았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