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왜 이렇게 우리말을 못 할까요


 올봄에 내려 했으나 아무래도 봄에는 힘들지 않을까 싶은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에 담을 글을 쓴다. 이제 큰 고비는 지났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어른들이 잘못 쓰는 말’ 꼭지를 다 썼으니까. ‘어른들이 잘못 쓰는 말’이란 수천 가지가 아닌 수만 가지나 수십만 가지가 되기 때문에, 이 가운데 삼사백 가지쯤 추려서 갈무리하는 내내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드디어 이 골머리 터지는 글쓰기를 마쳤다. 아마 오늘 저녁이나 다음주부터 아이들하고 푸름이들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를 쓸 텐데, 얼추 쉰 가지 물음을 추리면서 맨 마지막에 내가 쓴 물음 하나를 넣는다.

 “어른들은 왜 이렇게 우리말을 못 할까요?”

 내가 어린이나 푸름이라 할 때에 어른들한테 들려주고 싶은 한 마디이다. 왜 이렇게 어른들은 우리말을 엉터리로 하면서, 우리말을 알맞고 바르게 배우려 하지 않을까요? 우리말을 엉터리로 쓰면서 엉터리로 쓰는 모습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말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책 많이 읽거나 가방끈 길거나 교수이니 국회의원이니 뭐니뭐니 하고 내세운들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4344.2.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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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를 담은 그림책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마주보는 나무하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라보는 나무는 다릅니다. 나무이기는 똑같은 나무이지만, 나무가 뿌리내려 지내는 터전은 사뭇 다릅니다.

 도시사람이랑 시골사람은 다릅니다. 둘은 사람이라는 테두리에서는 같으나, 지내는 보금자리가 다릅니다. 그러나, 도시사람하고 시골사람이 다르대서 어느 쪽이 더 낫거나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도시에서 자라야 하는 나무하고 시골에서 자라야 하는 나무도, 어느 쪽이 더 낫거나 좋다고 말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치고 제 목숨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무는 없습니다. 한국땅 도시에서 자라야 하는 나무는 백 해를 살아남기도 힘듭니다. 한국사람 살아가는 도시는 끝없이 다시 파헤치거나 무너뜨려 개발하는 일이 되풀이됩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자는 집짓기만 하기 때문에, 나무 몇 그루쯤이야 돈으로 사서 심으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쉰 해를 살았건 이백 해를 살았건, 고운 목숨 하나로 나무를 살피지 않는 도시입니다.

 시골이라 해서 나무가 잘 살아남기에 만만하지 않습니다. 땔감으로 베기도 하지만, 이보다 지난 한국전쟁 때 온통 죽고 말아 벌거숭이가 된 멧자락에 아무 나무나 함부로 심는 바람에 이 나무들은 제 결대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흙에 내어 자라난 나무는 많지 않습니다. 나무가 나무다이 살아가기 힘듭니다. 그래도 시골 멧자락에서는 사람들이 이런 뜻으로 심건 저런 까닭으로 심건, 열 해 스무 해 지나면서 저희끼리 씨앗을 내어 천천히 조용히 자랍니다. 사람들이 솎아내기를 하지 않거나 가지치기를 굳이 하지 않는다면, 시골나무는 시골나무 그대로 마음껏 자랍니다.

 도시나무는 걷는 사람한테 걸리적거리거나 오가는 자동차한테 번거로우니까 가지를 자릅니다. 전깃줄에 걸린다느니 건물 창문을 가린다느니 해서 줄기이든 가지이든 뭉텅뭉텅 자릅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도 키가 클수록 줄기가 위쪽으로 올라가기 마련이지만, 시골나무는 키가 크면서 제 스스로 줄기를 위쪽으로 올립니다. 억지로 가지를 잘라내면서 줄기를 위쪽으로 올리지 않습니다. 잎사귀가 햇볕을 더 많이 받아들이려 하니까 위쪽 가지가 아래쪽 가지보다 잎이 우거집니다.

 도시에서는 어린나무를 보기 힘듭니다. 아니, 도시에는 어린나무를 아예 볼 수 없다고 해야겠지요. 시골땅에서 웬만큼 키운 다음 가지치기를 한 젊은나무를 심으니까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무는, 또 도시사람이 ‘나무숲’이라는 수목원을 찾아가서 마주한다는 나무는, 가지가 으레 위쪽에만 남습니다. 어느 나무이든 잔가지가 얼마나 많은데,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나무 잔가지’를 볼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겨울을 난 나무마다 새로 뻗는 가지가 얼마나 많은가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봄이 되기 앞서 도시 공무원들은 ‘가로 정비’라는 이름을 붙여 잔가지며 몸통 아래쪽 가지는 모조리 잘라내거든요.

 그림책에 담기는 나무란,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림쟁이가 그림으로 담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책마을 일꾼이 엮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들여다보는 그림책 나무입니다. 흙에 씨앗을 떨구어 천천히 뿌리를 내리며 새 목숨을 영차영차 일구는 시골나무가 그림책에 담기는 일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무는 흙이 있는 곳에서 살아가지만, 사람은 흙이 없는 곳에서도 살아가는 나머지, 나무와 흙과 햇볕과 바람과 물과 풀과 짐승이 어떻게 얼크러지는가를 도시사람으로서는 헤아리거나 느끼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맙니다.

 그래도 ‘나무 이야기 다룬 그림책’이라도 읽어야 도시사람 마음에 푸른 싹이 틉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이래저래 어수룩하거나 어설픈 자연 그림책이든 나무 그림책이든 가까이해야, 모자라나마 나무사랑 흙사랑 자연사랑 사람사랑을 조금이나마 맛보거나 생각할 만합니다.

 나무다운 나무를 그리지 못하는 도시사람 그림책이지만, 어찌 되든 나무이기는 나무이지, 하고 말할 수 있으니까, 이런 나무를 그린 그림책이라도 만들고 팔며 사서 읽습니다.

 나무는 그림책이 아니라 멧자락에 있습니다. 나무는 사진책이나 도감이 아니라 시골마을이나 우리 집 자그마한 마당에서 살아숨쉽니다. (4344.2.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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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52 : 사람이 쓰는 책


 《일본 만화 현대사》(요시히로 코스케 씀,융성출판사 펴냄,1998)라는 자그마한 책이 있습니다. 만화를 좋아할 뿐 아니라 일본만화를 꽤 읽는다 하더라도 쉽게 읽기 힘든 책이니까 이런 책이 있는 줄 아는 분은 드뭅니다. ‘한국 현대사’조차 잘 모르거나 잘 안 살피는 흐름을 생각한다면, 한국 현대사조차 아닌 일본 만화 현대사 같은 책을 애써 찾아 읽으려는 사람이란 드물 수밖에 없겠지요. ‘한국 만화 현대사’ 같은 책조차 한국사람은 안 읽을 테지만, 이런 책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본 만화 현대사》를 내놓은 출판사는 안 팔릴 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책을 기꺼이 옮긴 셈입니다. 틀림없이 이 작은 책 하나를 읽으며 우리들이 배우거나 살피거나 느낄 대목이 있으니 냈겠지요.

 이 책을 읽는다 해서 일본만화가 걸어온 발자취를 짚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만화밭이 어마어마하게 크거나 넓기 때문에 조그마한 책 하나로 일본만화를 밝힐 수 없습니다. 만화쟁이 한 사람이 걸은 길만 살펴도 두툼한 책 하나가 될 만하거나 넘치거든요. 얇은 책 하나로 일본만화를 다루려 한다면 아주 깊게 파헤쳐 두루 살피는 눈썰미여야 합니다.

 얇은 만큼 금세 책을 읽고 덮습니다. 그리 잘 쓴 책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글쓴이가 남자이다 보니 ‘남자 어린이’가 ‘남자 어른’이 되는 동안 좋아한 만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신문사 기자입니다. 기자라서 글을 못 쓰란 법이 없으나, 기자는 여느 사람들처럼 글을 홀가분하게 쓰지 못합니다. 기자 또한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과 삶과 만화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신문 독자한테 많이 읽힐 글’에 매이기 일쑤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책방에서 만나는 책은 으레 교수·기자·학자·전문가·비평가·작가·교사·유명인사·정치꾼·연예인 들이기 일쑤입니다. 지식과 정보를 쌓아 돈을 벌거나 일자리를 얻는 사람들이 쓴 책이 책방을 뒤덮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 손에서 태어난 책·농사짓거나 기계를 만지는 일꾼 손에서 태어난 책·어린이나 할머니 손에서 태어난 책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수수한 사람들이 쓰는 수수한 책은 싹틀 땅이 없습니다. 작은 사람이 쓰는 작은 책은 뿌리내릴 터전이 없습니다. 지식 있는 사람들이 지식을 다루는 책이 넘칩니다. 정보를 쌓은 사람들이 정보를 가득 담은 책이 쏟아집니다. 삶을 아끼는 책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책이나 살림을 어여삐 꾸리는 사람이나 흙을 알뜰히 일구는 사람이나 아이를 애틋이 돌보는 할머니 같은 사람이 쓰는 책을 마주하기 매우 힘듭니다.

 글쓴이 이름을 돋보이려는 책은 많습니다. 글쓴이 지식과 정보를 선보이려는 책 또한 많습니다. ‘일본 만화 현대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자 기대(30쪽)”를 나누려 하던 데즈카 오사무 님 넋이 튼튼한 뿌리가 되어 이루어졌다는데, 한국땅 책마을과 사람마을이란, 책터와 살림터란, 얼마나 사랑어린 꿈이나 아름다운 빛줄기가 감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344.2.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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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과 책


 아무리 재미있는 책을 손에 들고 읽더라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한강다리 건널 때면 책을 덮습니다. 넓은 한강과 한강 둘레를 뒤덮은 시멘트 건물을 봅니다. 이 시멘트 건물은 뿌연 먼지띠가 곱게 감싸안습니다. 그래서 이곳, 한강을 끼는 서울에서 일하거나 놀거나 사는 사람들은 먼지띠 위로 드넓게 펼쳐진 파란 낮하늘, 하얀 별이 가득가득 반짝이는 까만 밤하늘을 볼 수 없고, 보지 못하다가는, 생각도 안 하고 말거나, 잊어버리기까지 합니다. (4339.2.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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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책 몇 권을 읽다가


 지난주에 서울마실과 인천마실을 하면서 여러 책방에서 동시책을 여러 권 읽었다. 갓 나온 동시책부터 요 대여섯 해 사이에 나온 동시책을 죽 읽는데, 어느 동시책이고 선뜻 책값을 치러 살 만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지난날 이오덕 님이 우리네 동시 문화를 슬프게 꾸짖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도 우리네 동시 문화란 조금도 나아지거나 발돋움하지 못한다. 게다가 섣부르거나 어설프거나 어이없다 싶을 만한 말재주 피우기가 동시인 줄 생각하는 흐름이 걷히지 않는다. 아니, 이런 거품이 더 커진다. 장삿속으로 어린이책을 내놓는다는 출판사가 아니라 하던 꽤 손꼽히는 출판사에서 내놓은 동시책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제는 어린이책 내는 출판사가 한결같이 장삿속을 안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말재주 피우기 동시책을 보란 듯이 내놓으면서 아이들 마음과 머리와 삶을 엉망으로 흐트리는 데에 한몫 하도록 거드는 셈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런 동시는 예전에든 오늘이든 앞으로든 어디에서나 누구이든 쓰기 마련이다. 이런 동시가 책으로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하고, 이런 동시책을 어느 출판사에서 내놓느냐를 따질 일이다.

 조금 더 생각한다면, 말재주를 피우는 동시답지 않은 동시를 쓰는 까닭은, 이러한 동시를 쓰는 사람들 삶하고 이어진다. 삶부터 재주 피우듯 겉치레로 흐른다면, 이러한 삶을 꾸리는 사람이 쓰는 동시는 뻔하다. 삶을 알차게 꾸리는 사람이 동시를 알차게 안 쓸 수 없다. 삶을 즐거이 일구는 사람이 동시를 즐거이 안 쓸 수 없다. 삶을 아름다이 돌보는 사람이 동시를 아름다이 안 쓸 수 없다.

 동시란 말재주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린이시는 말재주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른시 또한 말재주가 아니다. 곧, 시란 말재주가 아니다. 시는 말놀이 또한 아니다. 말놀이를 하면서 시를 쓸 수 있고, 말재주를 부리면서 시를 써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말재주나 말놀이는 시가 아니다. 말재주를 피우든 말놀이를 즐기든, 이렇게 하고픈 사람 마음이지만, 말재주란 재주부리기이고, 놀이란 놀음놀이일 뿐이다.


.. 쏜살같이 헤엄쳐 도망가는 / 송사리 지느러미 / 얇아요 / 꽃나무 둘레에서 잉잉대는 / 꿀벌의 날개 / 참 얇아요 / 얇은 건 부지런해요 / 부지런하니까 얇은 거예요 ..  (ㅊ에서 펴낸 ㅈ시인 동시집 ㄲ에서)


 글을 더 잘 쓰도록 글재주를 갈고닦는다든지, 문학을 더 잘 하도록 문학수업을 받는다 해서 동시를 잘 쓰거나 문학을 한결 잘 하지 않는다. 내 삶을 옳게 깨닫고, 내 삶을 참다이 사랑하며, 내 둘레 사람들 삶을 착하게 어깨동무할 때라야 비로소 내가 쓸 동시이든 문학이든 제자리를 찾도록 이끈다.

 쓰이는 동시나 읽히는 동시나 참 슬프다. (4344.2.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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