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민방위훈련


 내가 살아가는 리하고 이웃마을 리 두 군데를 통틀어 민방위훈련에 와야 하는 사람은 모두 여덟. 이 가운데 다섯 사람이 나왔다. 새벽 여섯 시 비상소집이라 하는데, 시골자락에서 무슨 민방위훈련을 하나. 마을 이장 아저씨는 여섯 시 비상소집이라 하지만 여섯 시 십이 분이 되어서야 슬금슬금 나타난다. 새벽 다섯 시 오십육 분에 마을회관에 나온 나랑 다른 세 사람은 텔레비전을 켜 놓고 멀뚱멀뚱 기다린다. 생각해 보면, 민방위훈련이랍시고 무슨 관제행사를 하니까 마을 남자 어른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기라도 한다. 세 리를 통틀어 고작 여덟 사람밖에 안 된다는 ‘민방위훈련 받을 만한 남자 어른’은 요만큼밖에 안 되지만, 아무튼 이런 관제행사가 있으니 서로 얼굴이라도 들여다본다. 이 관제행사가 없다면 서로서로 한 해에 한 차례라도 얼굴 볼 일이 있을까.

 마을에서 예비군훈련을 받을 만한 더 젊은 남자 어른은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아니, 마을에서 예비군훈련을 받을 만한 남자 어른이 있기나 할까. 마을 젊은이가 있다면 누가 있고, 시골마을에서 이들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까.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여자 어른은 있으려나. 여자 어른은 시골마을에서 무엇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시골 초등학교라 해서 시골 아이한테 농사짓기를 가르치지 않는다. 시골 초등학교 가운데 시골 어린이한테 앞으로 농사꾼이 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일을 맡는 어른은 자가용을 타고 일터로 온다. 학교가 아닌 일터를 오가는 교사들이다. 시골 중·고등학교 또한 교육공무원 일터이지, 배우는 터전은 아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이든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이든 누구나 어디에서나 ‘도시에서 돈을 버는 일자리를 얻어 살아가는 꿈’만 배운다. 시골 중·고등학교 여자 아이들 치마는 도시 여자 아이들 치마보다 훨씬 짧다.

 민방위훈련에 온 마을 남자 어른 가운데 나 혼자만 자전거를 타고 왔다. 다른 남자 어른은 모두 자동차(승용차이든 짐차이든)를 몰고 왔다. 걸어서 온 사람조차 하나 없다.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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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공무원·군대·일꾼·흙


 정부가 서고, 정부를 지키는 공무원이 있으며, 공무원을 이끄는 정치꾼과 법꾼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지킬 군대가 있어야 한다. 논밭이 있고 들판이 있으며 바다와 멧자락이 있으면, 흙을 일구거나 물을 보듬는 일꾼이 있다. 흙을 일구는 사람이 낫이나 호미로 동무를 때리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그물을 짜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 이웃을 들볶거나 못살게 굴지 않는다. 나물을 뜯거나 캐는 사람이 제 살붙이를 따돌리거나 등치지 않는다.

 나는 정부가 싫다. 나는 공무원도 싫다. 나는 군대도 싫다. 나는 일꾼으로 살아가면서 흙을 일구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다. 흙 묻은 호미를 틈틈이 내려놓고 뙤약볕에서 흙 묻은 손으로 책 몇 쪽 넘기면서 멧골자락에서 아이랑 옆지기랑 살아가고 싶다.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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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94


 신문을 읽지 않고 방송을 보지 않으며 인터넷소식조차 살피지 않기 때문에, 나와 우리 집 살붙이는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런데 나와 우리 집 살붙이는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을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우리들은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보금자리와 마을’을 알고 싶을 뿐이다.

 2월에서 3월로 넘어온 요 며칠 사이, 멧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새로 돋는 풀싹이 싱그럽다. 새벽에 민방위훈련을 갔다 오니, 시골 마을회관에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 꽃샘추위이니 무어니 하면서 서울시청 앞에서 날씨가 춥다며 벌벌 떠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꽃샘추위이건 봄추위이건 늦겨울추위이건, 들판과 숲속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다. 우리 집 텃밭에도 새로운 풀싹이 잔뜩 돋았다.

 우리 집 살붙이들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소식을 읽지 않기 때문에,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소식으로 무엇이 나오는지를 하나도 모른다. 어쩌면, 이러저러한 봄얘기로 ‘추위에도 돋아나는 풀싹’을 다루거나 보여줄 수 있겠지. 어디에선가 벌써 달래를 캔다 할는지 모르고, 꽃다지나 돌나물을 캤다고 할는지 모르리라. 이런 이야기도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소식에 나올는지 모른다.

 그러나, 신문에든 방송에든 인터넷소식에든 이런 얘기가 나온들 우리하고는 아무런 이음줄이 없다. 우리는 우리 집 앞 멧기슭에서 봄나물과 봄풀을 보면 되니까. 우리는 아이 손을 맞잡고 천천히 멧길을 거닐며 봄 풀싹을 마주하면 되니까.

 새벽부터 삼십 분 남짓 민방위훈련 긴급소집 때문에 불려가느라 바빴다. 나는 늘 새벽 두 시에서 너덧 시 사이에 일어나서 글을 쓰기 때문에 새벽 여섯 시에 맞추어 마을회관에 가서 이름 스윽 적고 돌아오는 일이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새벽 여섯 시란 한창 머리가 달구어지면서 내 삶과 이야기를 글로 적바림하는 때. 신나게 글을 써야 하는데, 쓰던 글을 얼추 마무리짓고 셈틀을 꺼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회관을 다녀온다.

 집식구는 고이 잠든 채 깨지 않는다. 집식구가 깰까 걱정하면서 살금살금 움직이며 겉옷을 벗는다. 아이 기저귀를 만져 보니 안 젖었다. 아이는 밤새 아직 오줌을 누지 않았다. 조금 뒤 오줌을 누면서 깨려나. 오줌을 누었어도 안 깨면 좋으련만. 오줌을 누었다고 뒤척일 때에 아버지가 얼른 갈아 줄 테니까, 그대로 새근새근 꿈결을 즐기면 좋으련만.

 다시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 모처럼 여러 누리집을 둘러보다가 ‘서울 홍익대학교 청소부’ 이야기를 읽는다. 얼마 앞서 이들 서울 홍익대 청소부들이 파업을 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일이 있었고, 이들 청소부들이 바라던 대로 무언가 뜻을 이루었다 하는데, 제대로 다 이루지는 못한 듯하지만, 이모저모 그동안 못 누리거나 빼앗겼던 권리를 얼마쯤 찾았다고 한다. 쉬는 날이란 없던 청소부한테 조금이나마 쉬는 날이 주어지고, 터무니없이 적은 일삯이 조금이나마 올랐단다. 그래, 일삯이 얼마나 올랐나 했더니 한 달 75만 원에서 94만 원이 되었단다.

 궁금하다. 75만 원이든 94만 원이든, 이 돈에는 ‘4대 보험’이 어떻게 되었을까. 4대 보험 값을 회사(대학교)에서 내주고 75만 원이나 94만 원을 받는지, 이 돈에 4대 보험 값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청소부들이 출퇴근할 때에 드는 찻삯이나 낮이나 저녁에 먹을 밥값은 이 일삯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궁금하다. 청소부들치고 아이 안 키우는 아주머니는 없을 텐데, ‘육아수당’이 이 일삯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궁금하다. 청소부한테도 근속수당이나 연차수당이 있을까. 어느 일터이든 안식년이 있는데, 청소부도 안식년을 받는지 궁금하다.

 75만 원 일삯에서 94만 원으로 자그마치 19만 원이나 한꺼번에 올린다 한다면, 19만 원이라는 돈은 처음부터 제대로 주었어야 하는 돈이다. 더구나, 이제부터 94만 원을 준다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94만 원을 주었어야 한다는 소리요, 이제는 94만 원보다 더 주어야 한다는 소리이며, 얼마든지 더 줄 수 있다는 소리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청소부들이 못 받은 몫을 대학교에서는 알뜰히 돌아보며 제대로 챙겨 주기는 할까.

 나는 생각한다. 대학교 청소부와 대학교 교수는 일삯을 똑같이 받아야 한다. 대학교 청소부와 대학교 교수가 일하는 시간은 같아야 한다. 대학교 청소부가 일할 때에 대학교 교수도 일해야 한다. 대학교 교수가 쉴 때에 대학교 청소부도 쉬어야 한다. 대학교 교수가 밥을 먹는 곳이 따로 있다면, 대학교 청소부가 밥을 먹는 곳이 따로 있어야 한다. 대학교 교수가 느긋하게 쉬는 방이 따로 있다면, 대학교 청소부가 쉬는 방이 따로 있어야 한다. 대학교 교수한테 건물 지킴이나 학생들이 꾸벅 인사를 한다면, 대학교 청소부한테 건물 지킴이나 학생들 또한 꾸벅 인사를 해야 한다.

 대학교 교수도 내 아버지요 어머니이고, 대학교 청소부도 내 아버지요 어머니이다. 대학교 교수도 대학생 아이를 두고, 대학교 청소부도 대학생 아이를 둔다. (4344.3.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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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멧쥐 열네 마리


 지난 한 해 쥐를 열네 마리쯤 잡지 않았나 싶다. 참 지겹도록 자주 잡았다. 그러나 훨씬 많이 잡은 사람이 있을 테고, 쥐잡이를 지겹게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

 잡히는 쥐는 목숨을 잃는다. 잡은 쥐는 끈끈이를 접어 바깥에 내놓으면 밤새 추위에 얼어죽는다. 때로는 다른 멧짐승이 내려와서 끈끈이에 잡힌 쥐를 파먹었다. 어떤 멧짐승이기에 끈끈이 종이까지 갉으면서 잡힌 쥐를 파먹었을까.

 쥐를 잡을 때마다 성호를 긋는다. 너희도 보금자리를 잘못 찾아 이렇게 숨을 거둔다고 말한다. 너희들은 이 사람집이 아니어도 멧자락에 신나게 굴을 파서 잘 살았을 텐데 예까지 올 까닭이 무어냐고 묻는다. 그러나, 멧자락에도 사람 손길과 발길이 깊이 뻗쳐드니까 조그마한 멧쥐마저 이리로 찾아들밖에 없는지 모른다.

 열세 마리쯤 멧쥐를 잡은 뒤로는 다른 쥐는 거의 안 잡힌다. 두 달쯤 지나 비로소 한 마리 잡히는데 아주 조그맣다. 이 한 마리가 잡힌 뒤로 다른 멧쥐는 벽에서 갈갈갈 긁거나 갉는 소리만 내지, 두 번 다시 안 잡힌다. 이제 따사로운 봄이 찾아온다 할 텐데, 이 쥐들은 앞으로도 내처 우리 집 벽에서 살아가려 할 셈일까. 이렇게 답답하고 먹이도 없을 집보다, 보드라운 흙에 굴을 내어 한결 따뜻하면서 살갑게 지내야 저희 멧쥐한테도 좋은 삶이 아닐까.

 멧쥐들아, 너희는 말 그대로 멧쥐인데 이런 보잘것없는 사람집에 머물지 말고, 너르며 시원한 멧자락 보송보송한 흙을 파서 예쁜 굴집을 마련하여 오순도순 살림을 꾸며 주렴. (4344.2.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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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이 녹는 소리


 잠결에 물이 녹는 소리를 들었다 싶어 퍼뜩 깨어난다. 그러나 꿈이었다. 한숨을 쉬고 입맛을 다신다. 옆지기도 잠결에 물이 녹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옆지기 또한 꿈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또 기다린다. 늘 기다리고 언제나 기다리며 자꾸 기다린다.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내 하루하루 삶을 글로 적바림하고 사진으로 남긴다. 따순 봄을 기다리면서 내 글과 사진에 조금 더 따순 기운이 스밀 수 있기를 바란다.

 잠든 아이 이마를 쓸어넘긴다. 깊은 밤 아이가 쉬 마렵다며 깨어나기에 기저귀를 푸니 벌써 오줌으로 젖었다. 오줌을 참다 못해 조금 지리고 일어났을까. 아이는 제 변기에 앉는다. 푸직푸직 소리가 난다. 아하, 요 나흘 동안 물똥을 싸더니 아직 속이 안 좋아서 이렇게 또 자다가도 물똥을 싸는구나. 아이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는다. 한참 똥을 누는 아이를 기다린다. 다 눈 아이를 안아서 밑을 씻는다. 바지를 다시 입힌다. 이제 속이 개운한지 깊은 밤인데 조잘조잘 떠들며 노래까지 부른다. 아이로서는 깊은 밤이건 한낮이건 아침이건 새벽이건 똑같을까. 놀고 싶을 때에 놀고, 잠보다 밥보다 놀이가 더 좋을까.

 아침이 되어 비가 멎는다. 어제는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며 도랑 얼음과 계단논 얼음도 꽤 녹았다. 그러나 다 녹지는 않았다. 아직 비가 찬비인 듯하다. 찬비를 지나 따순비가 되어야, 그러니까 그냥 봄비라 할 비가 아니라 참말로 따뜻한 봄비가 되어 온 들판과 멧자락 얼음과 눈을 스르르 녹일 수 있을 때에 우리 집 겨우내 얼어붙은 물도 녹을 테지.

 똑같은 비라 할지라도 찬비는 얼음을 녹이지 못한다. 똑같은 비인데 따순비는 얼음을 녹인다. 똑같은 가슴이더라도 찬가슴은 사람들 마음을 녹일 수 없겠지. 똑같은 글이더라도 따순글이 될 때에 다른 사람들보다 내 가슴부터 사르르 녹일 수 있겠지.

 이 비가 지나고 비를 몰고 온 매지구름이 물러나면 바야흐로 따스하면서 살랑바람이 부는 파란 봄하늘이 찾아올까 궁금하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거듭 기다린다. 이제 집에서 빨래하고 설거지하며 걸레 빨아 집안 구석구석을 닦고 싶다. (4344.2.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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