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은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싶은 길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길에 따라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이 달라집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고 싶은 길에 따라 내가 읽으려고 하는 책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내 아이를 사랑하고 싶다면, 내 아이와 함께 읽을 책을 먼저 고릅니다. 내 아이를 한결 깊이 사랑하는 길을 걷고 싶다면, 굳이 내 아이와 읽을 책을 고르기보다 아이 손을 맞잡고 놀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딱히 책이 없더라도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을 얼마든지 신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에 몰려들어 살아갑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골 터전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살아도 더 큰 도시로 들어가려고 애씁니다. 더 큰 도시에서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찾으려고 힘씁니다. 더 작은 도시로 가거나 시골마을로 가려고 마음쓰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해서 즐겁게 모는 사람은 자가용을 장만해서 즐겁게 모는 길에 걸맞게 책을 고릅니다. 또는, 책 따위란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도시에서 빽빽히 밀리는 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리는 사람은 커다란 도시에서 빽빽히 밀리는 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리는 길에 따라 책을 살핍니다. 또는, 책이란 아예 생각할 수 없이 고단합니다.

 여성해방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는대서 남녀평등을 이루는 길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여성해방 이야기 지식을 더 쌓는 일하고 남녀평등 이루는 길은 같지 않습니다. 삶은 삶이고 지식은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요리책을 많이 읽어 이 요리 저 요리를 안다 한들, 맛집을 많이 다녀 맛난 밥으로 무엇이 있다고 안다 한들, 나 스스로 밥을 차리지 않는다면 이 모든 지식은 지식으로 그치지, 삶으로 이어가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맡을 몫이란 교과서나 교재에 담긴 지식을 아이들이 머리속에 더 많이 가두도록 내모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 스스로 지식을 바란다면 아이 스스로 바라는 지식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서 스스로 갈고닦도록 돕는 일이 교사가 할 몫입니다. 아이가 지식을 찾으려 할 때에 지식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며, 지식 하나가 태어나기까지 어떠한 길을 거쳐야 하는가를 찬찬히 밝히는 일이 교사가 할 몫입니다. 교사는 아이들한테 지식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란 교재나 교과서에 모두 담겼으니까요. 교사는 몸으로 삶을 보여주면서 삶을 물려줄 뿐입니다.

 이른바 ‘진보대연합’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아무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말로 진보가 크게 하나가 되는 일인지, 아니면 진보이든 아니든 크게 하나가 되는 일인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이러한 이름을 내거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름대로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일 텐데, 이렇게 굵직한 이름 하나로 모여서 ‘아무개 반대’를 이루는 일만 하겠다는 소리이지, 정작 ‘진보를 이루는 어떠한 일’이라든지 ‘우리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어떠한 일’이라든지 ‘진보이든 보수이든 누구이든 즐겁고 예쁘며 착하게 살아가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자리에서 ‘아무개 반대’를 이루겠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다만, ‘아무개 반대’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아무개 반대’를 할 만하며, 아무개를 반대하는 일로도 좋은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아무개를 반대하면서 내 삶은 어느 쪽으로 어떻게 무엇이 나아지거나 좋아질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삶을 어느 쪽으로 어떻게 나아가도록 하고 싶은가요.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얼른 죽어서 거꾸러지기를 바라는가요.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한결 아끼거나 사랑하면서 이이가 착하거나 참다운 길을 걷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가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따사롭고 믿음직하게 살아가도록 도우면서, 저마다 옳고 바르면서 어여쁜 길을 씩씩하게 걷는 데에 내 몫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가요.

 ‘진보 어깨동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루어질 만한 일이란 ‘평화 어깨동무’나 ‘평등 어깨동무’나 ‘일자리 어깨동무’나 ‘통일 어깨동무’나 ‘책읽기 어깨동무’나 ‘영화사랑 어깨동무’나 ‘집살림 어깨동무’입니다. 나 스스로 집살림부터 책읽기와 일자리를 거쳐 평화로운 삶을 어깨동무할 때에 바야흐로 진보 어깨동무이지, 처음부터 진보 어깨동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원의 집》 둘째 권을 읽으면, “아빠는 다시 시냇가로 가서 물을 길어 왔고, 그동안 메리와 로라는 엄마를 도와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37쪽).”는 대목이 나옵니다. 다섯 식구 작은 살림은 ‘엄마가 물을 길어’ 올 수 있고 ‘아빠가 아침을 차리며 두 딸아이가 아빠를 도와 밥을 하든 엄마를 도와 물을 긷든’ 할 수 있습니다. 밥을 하는 평화와 ‘아직 학교는 가 본 적 없는 어린 아이들이 집일을 거들며 함께 밥을 하고 함께 밥을 먹는’ 사랑이 깃드는 나날이 곧 책이면서 삶이고 사랑이면서 믿음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진보나 보수로 나누지 않고, 착한 사랑은 좌파나 우파로 가르지 않으며, 참다운 책이란 어린이와 어른 모두 흐뭇하게 맞아들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고픈 사람은 매우 드문 듯합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앞으로도 한국사람치고 삶과 사랑과 책을 예쁘게 하나로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아침에 안친 밥냄비에서 밥내음이 솔솔 납니다. 이제 밥상을 행주로 닦고 수저를 놓아야겠습니다. (4344.3.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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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바늘과 좋은 책


 바느질이나 뜨개질에 익숙한 사람은 바늘이 안 좋아도 잘 쓴다는 이야기를 옆지기가 들려준다. 그러고 보면, 손이 안 보인다 할 만큼 잽싸게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는 분을 곁에서 지켜보면 이분들이 꼭 좋은 바늘을 쓰지만은 않는다. 그저 당신한테 익숙하며 길이 잘 든 바늘을 쓴다. 좋다는 바늘이 익숙하면 좋다는 바늘을 쓰고, 안 좋다는 값싼 바늘이 익숙하면 안 좋다는 값싼 바늘로 옷을 뜬다.

 사람들 누구나 ‘좋다고 하는 책’이나 ‘훌륭하다 여기는 책’이나 ‘아름답다 손꼽는 책’을 읽으면 참으로 즐거울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면, 제아무리 좋다고 하는 책이나 훌륭하다고 여기는 책이나 아름답다고 손꼽는 책을 잔뜩 장만해서 읽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좋은 삶을 일구지 못하거나 조금도 훌륭하게 살아가지 못하거나 하나도 안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도 좋은 넋을 북돋우지 못할 뿐 아니라 좋은 말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훌륭하다는 책을 참 많이 읽었다지만 훌륭한 얼이나 훌륭한 글을 길어올리는 사람이 퍽 드물다. 아름답다는 책을 잘 안다지만 막상 살림살이를 아름다이 일구지 못하는 사람은 참말 얼마나 많은가.

 바늘이 좋다면 바느질을 더 잘할 수 있다. 좋은 책을 곁에 두면서 살아가면 더 나은 생각과 마음을 살찌울 수 있다. 그렇지만, 썩 안 좋은 바늘로도 내 아이와 살붙이를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 옷을 뜰 수 있다. 책 한 권 읽지 못하는 살림이라 하지만, 착한 사랑과 고운 믿음으로 이웃과 동무하고 어여삐 어깨동무하거나 품앗이하는 사람이 많다. 좋은 바늘,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좋은 가방끈, 좋은 옷, 좋은 책은 좋은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라든지 바른길이 될 수 있는가. (4344.3.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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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사람들


 땅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넘치다가는 원자력발전소가 터진다. 끔찍하다 싶은 일 세 가지가 잇따른다. 일본 후쿠시마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원자력발전소가 터지면서 방사능에 곧바로 맞은 사람들은, 방사능이 바람과 물에 섞이기 때문에 이 바람과 물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은, 또 방사능을 쐬지 않거나 방사능이 섞인 바람과 물을 마시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제 고향마을로 돌아가서 고향집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방사능으로 물든 흙을 일구며 곡식이나 푸성귀를 거둘 수 있을까. 방사능이 내려앉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원자력발전소 터진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딱지는 앞으로도 이어질 텐데, 이들이 도쿄로 옮기거나 훗카이도로 옮긴다 한들, 제대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후쿠시마 마을이라는 딱지 때문에 후쿠시마 사람들을 마주 바라보기 거북하다든지 손을 잡는다든지 하기 싫다며 손사래치는 사람들이 차츰차츰 나타나지 않을까. 아니, 벌써부터 제법 많지 않을까.

 체르노빌 사람들이라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드리마일 사람들이라 하면 어떻게 여길까.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한국땅 시골마을 사람들이라 하면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원자력발전소 옆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이 덥혀진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사람이 꽤 많다. 발전소 쪽에서는 ‘온배수’라 하고, 흔히 ‘열폐수’라 하는, 몹시 뜨거운 물로 물고기를 길러 바다에 풀어놓는다고도 한다.

 예부터 영광 하면 영광굴비라 했으나, 이제는 영광 하면 영광원자력발전소이다. 원자력발전소에서는 35%만 전기로 쓰고 10%는 굴뚝으로 버려지며 55%는 열폐수로 버린단다.

 골이 띵하다. 영광에서 마시는 바람과 후쿠시마에서 마시는 바람과 서울에서 마시는 바람은 얼마나 깨끗하며, 우리 몸에 좋다 할 수 있을까. 영광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무슨 물을 마시며, 후쿠시마에서 살아야 할 사람은 어떤 물을 마셔야 하며,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은 물을 마시는가. (4344.3.1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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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봄 새 나비와 새 개구리


 오늘부터 드디어 이불 빨래를 한다. 손으로 빨까 생각했는데 옆지기가 이오덕학교에서 빨래기계를 빌려서 쓰자고 말한다. 요즈음 가뜩이나 기운이 많이 떨어졌다고 느끼기에 옆지기 말을 듣기로 한다. 빨래기계를 빌리는 김에 이불을 두 채 빨자고 생각한다.

 가장 때 많이 탄 이불부터 두 채를 안고 빨래감과 설거지거리를 안고 멧길을 오른다. 계단논 얼음은 아직 다 안 녹았다. 학교 헤엄터에도 얼음이 아직 그대로이다. 이러니 우리 집 물도 아직 안 녹을 테지. 그런데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린다. 어, 어, 벌써 나비인가? 저녁이 되면 퍽 쌀쌀한데 나비가 이렇게 팔랑거려도 괜찮은가.

 빨래기계 앞에 선다. 이불을 한 채씩 넣고 대야로 물을 부으며 비누를 골고루 문지른다. 단추를 누르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기계를 들여다보니 멈췄다. 왜 멈추었을까. 다시 단추를 누른다. 돌아간다. 씻는방에 가서 빨래를 한다. 빨래를 하고 나서 능금을 씻는다. 능금과 빨래를 통에 담고 빨래기계 있는 데로 간다. 빨래기계가 또 멈췄다. 빨래기계를 만진 지 너무 오래된 탓일까. 아니, 나는 빨래기계를 만진 적이 없나. 요새 빨래기계는 단추 몇 번 누르면 다 되는 듯한데, 아닌가. 다시 단추를 이래저래 누른다. 이번엔 제대로 돌아가려는 듯하다. 한 시간 육 분 걸린다고 불이 깜빡인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 마친 빨래감을 들고 집으로 내려온다. 옆지기가 수제비 반죽을 한다. 아이가 옆에서 알짱알짱하면서 거들겠다고 나선다. 함께 밥을 먹고 나서 아이가 또 더럽힌 옷 두 벌을 벗겨 빨래하러 올라간다. 빨래기계 있는 데로 가니 빨래가 다 되었다. 아이들이 노는 철봉대에 이불을 하나씩 펼쳐서 넌다. 아이 옷가지 두 벌을 새로 빤다.

 아침부터 해바라기를 시킨 이불은 방으로 들인다. 방과 마루를 옆지기하고 함께 치우고 이래저래 쓸고 닦기를 더 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나가기로 한다. 오늘은 장날이라서 반찬감을 좀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읍내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숨을 헐떡이는데 왼편 비탈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 이곳에서는 벌써 개구리가 깼나.

 어제 집식구들 다 함께 읍내마실을 나올 때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골버스라 할지라도 차에 타면 멧개구리 깨어나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이렇게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걷지 않고서야 이른봄 첫 개구리 울음소리를 맞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읍내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르막에서 다시금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 구불구불 멧길을 걷는 아저씨 하나 보인다. 아저씨도 개구리 소리를 함께 듣겠구나. (4344.3.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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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53 : 사람을 쓰는 책


 아이들하고 책을 읽습니다. 집에서는 어린 딸아이하고 책을 읽고, 집 바깥으로 나오면 멧골학교 아이들하고 책을 읽습니다. 우리 살림집 위쪽으로 멧길을 따라 올라가면 멧기슭에 이오덕학교가 있고, 이곳에서 어린이랑 푸름이하고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하고 읽는 책은 어른인 제가 고릅니다. 어른인 제가 아이들하고 읽는 책을 고른다고는 하지만, 저 스스로 읽으며 참으로 좋다고 느낀 책이기에 아이들하고 함께 읽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저부터 찬찬히 읽으면서 마음이 넉넉해지거나 따스해진다고 느끼는 책을 아이들하고 함께 읽습니다.

 아이들 나이를 헤아리니, 아이들은 저보다 서른 살쯤 어립니다. 나이가 조금 많은 푸름이는 저보다 스물세 살쯤 어립니다. 스물세 해 앞서나 서른 해 앞서를 돌아봅니다. 그무렵 나한테 책을 읽어 준 어른이 있었나 궁금합니다. 아주 없지는 않으나 아주 드물었습니다. 어린 나한테 책을 읽어 주려는 여느 어른이나 학교 교사는 몹시 드물었습니다. 아니, 나한테뿐 아니라 내 동무한테도 책을 읽어 주는 어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우리한테 하는 일이라고는 교과서와 참고서와 자습서와 문제집을 던지는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교과서부터 문제집까지 우리 머리에 쑤셔박습니다. 때때로 처넣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서울에 있으며 손꼽힌다는 대학교에 우리들을 더 몰아넣어야 학교이름이 한결 빛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몽둥이를 옆에 끼든 주먹이나 손바닥이나 군화발로 우리를 꾸욱꾸욱 누르든 하면서 시험성적 잘 나오는 시험기계로 우리들을 길들였습니다. 이러니, 책 읽어 주는 어른은 없었어요.

 그런데, 멧골학교 아이들한테 《얘들아 내 얘기를》(새벗,1986)이라는 이원수 님 수필책을 한 꼭지씩 읽히다 보니,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내 국민학생 때 곧잘 들었다고 떠오릅니다. 어느 분인지 떠오르지 않으나, 공부 때에 우리가 졸립다 하거나 힘들어 하면 으레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무렵에는 《얘들아 내 얘기를》에 실린 이야기인 줄 몰랐고,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글을 어린이를 가르치는 어른이 맑으면서 힘찬 목소리로 들려줄 때에 졸음이 싹 가셨습니다. 그래서 멧골학교 어린이한테 이원수 님 동화도 함께 읽힙니다. 요사이에는 《골목대장》(한겨레아이들,2002)을 조금씩 읽힙니다. 어제 함께 읽은 동화에는 “아! 자유를 좋아할 줄 알고 독립을 좋아할 줄 아는 우리 앵문조는 훌륭한 새가 아닙니까? 갇힌 몸으로 아무리 잘 먹고 지낸들 그게 행복한 생활은 아니겠지요(96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1961년에 일제강점기를 되새기며 쓴 동화를 2011년을 살아가는 어린이가 깊이 받아들이리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어린이들이 마음밭에 ‘착한 꿈을 키우고픈 어른이 뿌린 사랑씨’ 하나를 심을 수 있으면, 차츰차츰 자라며 나중에 알차며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으리라 믿어요. 책은 한 사람이 참말 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북돋우고자 한 사람이 기쁘게(또는 슬프게) 살아온 땀방울을 담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4344.3.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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