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107] 씨톨 (유전자, DNA)



  어머니 몸과 아버지 몸에 씨(씨앗)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같은 사람’이면서,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 몸에 깃든 씨는 서로 같으면서 다릅니다. 씨라는 테두리에서는 같고, 한쪽은 ‘받아들이는 씨(어머니)’요 다른 한쪽은 ‘내어주는 씨(아버지)’라는 얼거리에서는 다릅니다. 두 가지 씨가 만나서 한 가지 씨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때에 새로운 목숨이 나오지요.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있던 ‘두 가지 씨’가 하나된 ‘새로운 씨’로 거듭났을 때에 이 땅에 나타납니다. 아직 사람 꼴을 하지 않더라도 어머니 뱃속에는 내 숨결이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천천히 알맞게 꾸준하게 자라면서 꼴을 갖추고, 넋이 깃들며, 이야기를 얻습니다. 어머니는 ‘받아들이는 씨’를 품는 사람이기에 아기를 뱁니다. 아버지는 ‘내어주는 씨’를 품는 사람이기에 언제나 끝없이 내어줍니다. 어머니는 아기 하나만 뱃속에 오래도록 품어서 돌보되, 두 아기까지 돌보도록 젖이 둘이고, 아버지는 언제나 끝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기에 어머니를 여럿 거느릴 수 있습니다. 나는 두 사람(다르면서 같은 두 사람)한테서 물려받은 씨를 간직하면서 꿈을 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갈 길을 어떻게 지으면 재미있고 즐거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한테서 받은 씨이기에, 내 씨는 내 어버이(어머니와 아버지)가 품은 씨와 ‘같으면서 다릅’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씨가 되도록 언제나 새로운 생각을 지어 새로운 마음이 됩니다. 나는 내 씨가 ‘어버이와 같으면서 다른’ 씨가 되도록 내 씨를 바꿉니다. 바꾸어 줍니다. 내가 나로, 내가 나답게 일어서려 합니다. 나는 내가 나로서 나답게 일어설 적에 다치지 않습니다. 내가 나로 일어서기에 모든 것, 이를테면 전쟁이나 재앙 같은 것조차, 나를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르면서 같은 두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씨’에서 ‘씨톨’을 내 생각에 따라 내 마음그물에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내 씨를 이루는 낱낱 씨톨을 내가 스스로 바꾸면서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4348.1.2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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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7 ‘함께살기’와 ‘쇠북꾼’



  나는 스무 살 언저리에 내 이름을 찾았습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이름은 ‘종규’인데, 내 어버이한테서 벗어나고 싶은 꿈을 키우면서 내 이름을 스스로 지었습니다. 그무렵, 그러니까 스무 살 언저리에 내가 스스로 지어서, 그때부터 스무 해 남짓 아끼면서 섬기는 내 이름은 ‘함께살기’입니다.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이름은 ‘종규’는 한자로 ‘鐘圭’로 적습니다. 어버이한테 이 이름이 무슨 뜻이냐 하고 여쭈었을 적에, 어버이는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말해 주지 못했습니다. 어버이는 이 이름을 ‘항렬 돌림자’로 붙였을 뿐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짓지 않았어요.


  한자로 내 이름을 살피면 ‘쇠북(鐘) + 홀(圭)’입니다. 그러니까, “쇠북을 홀로 치는 사람”인 셈이지요. 절집이라든지 서울 종로에 보면 ‘커다란 종’이 있습니다. ‘종’은 한자말이고, 한국말은 ‘쇠북’입니다. 쇳덩이로 지은 북이기에 ‘쇠북’이고 ‘종’입니다.


  어릴 적에는 “쇠북을 홀로 치는 사람”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몰랐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나 스스로 철이 들 무렵 찾아와서 내가 기쁘게 맞아들여서 나한테 붙인 이름 ‘함께살기’는 ‘쇠북꾼’하고는 아주 맞서는 낱말이라 할 만합니다. 하나는 하나요,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입니다. 하나(쇠북꾼)는 ‘1차 의식’이고, 다른 하나(함께살기)는 ‘2차 의식’입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물려준 ‘1차 의식’에서 내가 작은 점을 찾아내어 ‘2차 의식’을 지은 뒤, 나로서는 내 나름대로 ‘엄청나고 새로운 경험’을 여태 스스로 지으며(창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쇠북꾼’과 ‘함께살기’는 다르면서 같은 말이고, 같으면서 다른 말입니다.


  ‘함께살기’는 겉으로 보자면, 겉뜻으로 보자면 “함께 살기”입니다. 속으로 보자면, 속뜻으로 보자면, “함께 보고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꿈꾸고 함께 노래하여 함께 살다”입니다. ‘함께살기’라는 이름에는 일곱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일곱 빛깔 무지개이고, 일곱 가지 조각(씰)입니다. ‘보다’에서 ‘느낌’이 태어나고, ‘생각’이 다시 태어나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꿈’이 자라서 ‘노래’가 되고, 이윽고 시나브로 ‘삶’이 됩니다.


  우리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름은 모두 ‘밭’이요 ‘바탕’이면서 ‘뿌리’입니다. 이러한 밭과 바탕과 뿌리에 씨앗을 심지요. 이 씨앗을 심으면서 ‘내 이름을 내가 손수 새로 짓기’를 할 수 있으며, 이렇게 내 손에 숨결을 담아서 ‘내 이름을 새롭게 처음 지으’면, 내 몸은 어느새 바람이 되어 하늘을 납니다.


  우리는 모두 두 가지 이름이 있는 사람이고, 두 가지 이름은 함께 맞물리면서 흐릅니다. 함께 맞물리면서 흐르는 이름은 서로 아끼고 섬기는 넋이고, 서로 아끼고 섬기는 넋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징검다리를 기쁘게 밟고 노닐면서 자랍니다. 고맙습니다. 4348.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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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 ‘섬·서기·서다’와 ‘진화’



  한자말 ‘진화(進化)’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달하여 감”으로 풀이합니다. 이 풀이말을 읽고서는 ‘진화’라는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자를 낱으로 뜯어서 보면, ‘진화’는 “나아감 + 되다”입니다. 그러니까, “나아가게 되다”를 가리킨다고 할 만한 ‘진화’입니다.


  그러면, ‘영적 진화’라고 하면, 이 말은 무엇을 뜻하거나 가리킬까요? 참 알쏭달쏭하지요. 여러모로 꽉 막힌 말마디이지요. 아무래도 알아차리기 힘들고, 아무래도 알아차리기 힘드니까 이 사람은 이대로 말하고 저 사람은 저대로 말할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낱말 하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에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아서 제대로 알지 못하니,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진화’나 ‘영적 진화’라는 말마디를 쓰고 싶다면, 이 말마디부터 제대로 바라보고서 알아챈 뒤에 써야 합니다. 이 말마디를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말마디를 제대로 읽고 알아서 내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나아가게 되다”란 무엇일까요?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나아가게 된다고 할 때에는, 이제 이곳에 있지 않고 저곳에 갈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진화’는 “머무르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진화’는 ‘감·가기·가다’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머무르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수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진화’이지만, 이 낱말은 한국말로는 ‘섬·서기·서다’입니다. 왜냐하면, ‘일어서다’와 ‘바로서다’를 가리키는 ‘서다’이기 때문입니다. 멈추는 모습을 가리키는 ‘서다’가 아니라 “일어서다 + 바로서다”인 ‘서다’입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 사람들이 사회의식으로 ‘진화·영적 진화’라는 낱말을 쓰는 자리를 살피면, 다음처럼 적어 볼 수 있습니다.



 깨어나기 . 새로 깨어나기

 눈 뜨기 . 눈을 떠서 보기

 태어나기 .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

 거듭나기



  사회의식으로 ‘진화’라는 낱말을 쓰는 사람은 으레 ‘거듭나기’를 가리키는 자리에 씁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거듭나기’라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자꾸 ‘진화’라는 말마디를 엉뚱하게 쓰니까, ‘깨어나기’와 ‘눈 뜨기’와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라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도 그만 뜬금없이 ‘진화’나 ‘영적 진화’라는 말마디를 집어넣을 뿐 아니라 ‘내적 성장’ 같은 일본 한자말을 자꾸 끌어들입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바라보지 못하는 몸이니, 한국말을 잊을 뿐 아니라, 뜻도 모르는 채 이 말 저 말 주워섬기고 말아요.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우뚝 서야’ 이곳에서 저곳으로 한 발짝 내디딥니다.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슬기롭게 서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어디이든 홀가분하게 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말부터 제대로 보면서 ‘아름답게 서야’ 새처럼 바람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면서 내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화’라는 낱말을 쓰고 싶다면, 이 한자말이 ‘서다’를 가리키는 줄 바르게 바라보면서 느끼면 됩니다. 4348.1.2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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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 홀가분하다, 낱사람 (자유, 개인)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쉽게 ‘자유’라는 낱말울 씁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쓰지만, 어린이도 쓰고,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두루 쓰며, 초등학교나 유치원에서도 흔히 씁니다. ‘개인’이라는 낱말도 곳곳에서 널리 씁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거나 뜻하는지 제대로 모르기 일쑤입니다.

  한국말사전을 보면, ‘自由’를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풀이하고, ‘個人’을 “국가나 사회, 단체 등을 구성하는 낱낱의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한자말은 한국사람이 지은 낱말이 아니고, 일본사람이 서양 문화와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에서 지은 낱말입니다. 일본사람은 이러한 낱말을 지으려고 퍽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서 생각을 기울였고, 한국사람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이 낱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한국사람이 이 낱말을 그대로 따랐다기보다, 일본 정치권력한테 짓눌리는 식민지 종살이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써야 한 낱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일본 정치권력 종살이를 하지 않았으면, 영어로 ‘free’나 ‘personal·individual’을 그대로 썼을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요즈음에는 그냥 영어를 쓰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한자말이 익숙하지 않으면서, 어릴 때에 일찍 영어를 만났으면 영어로 내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환경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green’이라는 영어를 쓰는 사람이 무척 많아요. 중국 한자말 ‘초록’이나 일본 한자말 ‘녹색’이 익숙하면, 이러한 낱말을 쓰고, 영어가 익숙하면 ‘그린’을 쓰지요.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이 익숙한 환경운동 사람은 거의 없어서 ‘풀빛·푸름’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러면, ‘자유’나 ‘프리’란 무엇일까요. 이런 낱말을 사회에서 받아들여 쓰기 앞서, 지난날에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떤 낱말로 이러한 기운이나 흐름을 나타내려 했을까요.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습”일까요? 그러면 “내 마음대로”는 무엇일까요?

  예부터 이 땅에서는 ‘홀가분하다’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홀가분하다’는 “홀로 가볍다”입니다. ‘홀’은 ‘홀짝’을 이루기도 하고, ‘하나(1)’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홀짝’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고 가르는 자리일 테고, ‘하나(1)’를 가리킨다면 그저 하나만 있는 모습입니다.

  그저 하나만 있기에 남을 휘두르지 않고, 내가 남한테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가 있기에 다른 것을 건드리거나 흔들지 않으며, 그저 하나이기에 너와 내가 갈리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홀(홀로)’은 오직 하나가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하나이기에 따로 무게가 없다고 여길 만하고, 이러한 느낌에 ‘가분하다(가볍다)’가 붙습니다. “홀로 가볍게 움직이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생각하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하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있다”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낱말로 가리키려는 뜻이란, 한국말 ‘홀가분하다’로, 이 두 낱말은 “내가 오직 나로 서기에 내가 가볍게 움직이면서 모든 것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이라는 낱말은 “낱 + 사람”입니다. 한국말사전에서도 이 대목을 다룹니다. 그러나, 앞에 엉뚱한 꾸밈말을 붙이지요. ‘낱 + 사람’인 ‘낱사람’은 나라나 사회 따위를 이루는 ‘낱’이 아닙니다. “덩어리에서 떼어낸 하나”가 ‘낱’이고 “하나가 덩어리에서 떨어지면”서 ‘낱’입니다.

  ‘개인주의’라고 할 적에는 나라·사회·모임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나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모습이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낱사람’은 덩어리에서 떨어지는 사람인 한편, 덩어리에서 나를 떨어뜨린 사람입니다. 한덩어리로 있던 곳에서 한 사람을 떨어뜨려서 ‘낱’이 된 사람이고, 한덩어리로 있던 곳에서 나를 녹여서 없애려 하기에 녹아서 없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스스로 떨어져 ‘낱’이 된 사람입니다. 4348.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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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 - 깊이 생각하다



  우리는 누구나 여러모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저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깊이 생각하기도 하며, 얕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넓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좁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크게 생각하거나 작게 생각할 만하고, 함부로 생각하거나 살가이 생각할 만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면, ‘깊은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깊이 생각하기에 ‘깊은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깊은생각’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낱말을 안 쓰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기를 안 바라는지, ‘깊은생각’이라는 낱말은 안 쓰고 ‘숙고(熟考)’라는 한자말을 써요.


  한자말 ‘숙고’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곰곰이 잘 생각함”을 뜻한다 하고, ‘熟’은 ‘익다’를 가리켜요. 곧, “익은 생각”이 ‘깊은생각’은 셈이니, 익지 않은 날것에 찬찬히 불기운을 넣어서 익히는 일을 빗대어 ‘숙고’라 하고, 익지 않은 생각이 익을 수 있도록 찬찬히 따순 숨결을 불어넣는 일이 ‘숙고’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깊이 할 적에는, 말 그대로 ‘깊은생각’일 수 있으며, ‘익은생각’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로 쓰면 내 마음을 한결 또렷하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저 깊이 생각하기에 ‘깊은생각’이고, 생각이 잘 익어서 따스하도록 하기에 ‘익은생각’입니다. 생각은 ‘넓은생각’이나 ‘너른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큰생각’이나 ‘거룩생각’이나 ‘훌륭생각’이 될 수 있어요.


  생각은 어느 때에 괴롭거나 힘든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때에는 ‘고민(苦悶)’이라고도 하는데, 이 한자말은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애를 태움”을 뜻한다고 해요. ‘苦’는 “괴로움”이고, ‘悶’은 “번민”이에요. 그런데 ‘번민(煩悶)’은 “괴로움”으로 고쳐쓸 한자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밑을 살피면, 한자말 ‘고민’은 “괴로움 + 괴로움”이 될 테지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기에 한자말을 쓰지 않고 살았습니다. ‘고민’이나 ‘번민’ 같은 낱말이 일본을 거쳐서 물결처럼 들어오기 앞서 어떤 낱말을 썼는지 헤아리면, ‘걱정’이나 ‘근심’이나 ‘끌탕’이 있습니다. 될는지 안 될는지 몰라서 애를 태우다가 그만 마음이 괴롭고 마는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인 ‘걱정·근심·끌탕’입니다.


  차근차근 돌아봅니다. 깊이 생각하면 스스로 수수께끼를 풉니다. 실마리를 스스로 얻지요. 수수께끼는 어느 똑똑한 사람이 풀어 주지 않아요. 스스로 똑똑한 마음이 될 때에 수수께끼를 낼 수 있고, 수수께끼를 풀 수 있습니다. 모든 실마리는 나한테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수수께끼를 못 풉니다. 수수께끼를 못 풀기에 수수께끼를 짓지 못해요. 수수께끼를 스스로 짓지 못하는 사람은 실마리를 스스로 못 얻는 사람이고, 실마리를 스스로 못 얻으니, 언제나 괴롭습니다. 괴로운 마음이기에 수수께끼는 늘 어렵기만 하고, 늘 어렵기만 한 수수께끼인 터라 자꾸 맴돌거나 떠돕니다.


  ‘깊은생각’은 한 가지를 놓고 자꾸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는 마음이 됩니다. ‘깊은생각’은 한 가지가 제대로 풀릴 실마리로 나아갑니다. ‘걱정’은 한 가지를 놓고 제대로 돌아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만 게으르고 말아, 실마리를 푸는 몫을 남한테 떠넘기고 싶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괴로운 데로 나아가는 걱정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든 우리 몫입니다. 좋고 나쁨은 없습니다. 다만, 한쪽은 실마리를 푸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괴롭고 아프면서 힘든 길입니다. 4348.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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