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쓰면 우리 말이 깨끗하다

 (443) 초록의 1


이 나무에서 아름다운 초록의 애벌레를 발견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윤효진 옮김-곤충·책》(양문,2004) 21쪽


 초록의 애벌레를 발견했다

→ 초록 애벌레를 보았다

→ 풀빛 애벌레를 보았다

→ 푸른 애벌레를 보았다

 …



  한자말 ‘초록’을 한국말사전에서는 “풀의 빛깔과 같이 푸른빛을 약간 띤 녹색”으로 풀이합니다. ‘녹색(綠色)’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 초록색”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사전 뜻풀이는 아주 엉터리입니다. ‘초록’을 “푸른빛을 띤 녹색”이라 풀이하면서 ‘녹색 = 초록색’으로 풀이한다면, ‘초록 = 푸른빛을 띤 초록색’인 꼴이니까요.


 초록 물감 → 푸른 물감

 초록 저고리 → 푸른 저고리

 초록의 물결을 이루었다 → 푸른 물결을 이루었다


  한국말은 ‘풀빛’이나 ‘푸름’입니다. 한국말로는 ‘푸르다’라고 하면 됩니다. 더도 덜도 아닌 “푸른 빛깔”입니다. 4339.1.4.물/4348.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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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에서 아름답고 푸른 애벌레를 보았다


‘발견(發見)했다’는 ‘보았다’나 ‘찾았다’나 ‘찾아냈다’로 손질합니다.



초록(草綠) : 풀의 빛깔과 같이 푸른빛을 약간 띤 녹색

   - 초록 물감 / 초록 저고리 / 짙고 연한 서리 빛 초록의 물결을 이루며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801) 초록의 2


포도나무 잎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록의 옷을 입고, 포도넝쿨은 세상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고 있던 1990년 5월이었다

《류기봉-포도밭 편지》(예담,2006) 59쪽


 나뭇잎이 초록의 옷을 입고

→ 나뭇잎이 푸른 옷을 입고

→ 나뭇잎이 푸른 빛을 띠고

→ 나뭇잎이 푸르러지고

 …



  이 글을 쓰신 분은 “초록의 옷”이라 하는데, 이 말투와 비슷하게 “노랑의 옷을 입다”나 “빨강의 옷을 입다”나 “파랑의 옷을 입다”나 “검정의 옷을 입다”나 “잿빛의 옷을 입다”처럼 말할 사람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투는 한국 말투가 될 수 없습니다. 한국말로 제대로 하자면 “노란 옷을 입다”, “빨간 옷을 입다”, “파란 옷을 입다”, “검은 옷을 입다”, “잿빛 옷을 입다”처럼 적어야 합니다.


  나뭇잎이 푸른 빛깔이기에 “나뭇잎이 푸른 옷을 입고”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뭇잎은 푸른 빛깔이니까 수수하게 “나뭇잎이 푸르고”처럼 말하면 됩니다. 4339.11.11.흙/4348.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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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잎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푸른 옷을 입고, 포도넝쿨은 이 땅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던 1990년 5월이었다


‘세상(世上)으로’는 그대로 둘 만하지만 ‘이 땅으로’로 손볼 수 있고, “걸어나오고 있던”은 “걸어나오던”으로 손봅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314) 초록의 3


숲 저쪽의 노란 보리밭은 안개 때문에 뿌옇게 보였습니다. 초록의 나무들도 회색 베일로 가린 듯 희미하게 보였고요

《이마이즈미 미네코,안네테 마이자/은미경 옮김-숲에서 크는 아이들》(파란자전거,2007) 31쪽


 초록의 나무들

→ 푸른 나무들

→ 푸른 옷을 입은 나무들

→ 푸른 빛이 싱그러운 나무들

 …



  나뭇잎이 우거질 때에는 ‘푸른 빛’이 도는 나무라 하겠지요. 한 마디로 ‘푸른 나무’입니다. 나무는 잎사귀가 푸른 빛이니 “잎사귀가 푸른 나무”라고 적어도 되고, “푸른 옷을 입은 나무”라고 적어도 됩니다. 사이에 꾸밈말을 넣어서 “푸른 빛이 싱그러운 나무”라 하거나 “푸른 잎이 고운 나무”라 해도 돼요. 4341.4.16.물/4348.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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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저쪽 노란 보리밭은 안개 때문에 뿌옇게 보였습니다. 푸른 나무들도 잿빛 천으로 가린 듯 흐리게 보였고요


“숲 저쪽의 노란 보리밭”은 “숲 저쪽에 있는 노란 보리밭”이나 “숲 저쪽 노란 보리밭”으로 손봅니다. “회색(灰色) 베일(veil)”은 “속이 비치는 잿빛 천”으로 다듬습니다. 보기글 앞쪽에는 ‘뿌옇게’라 잘 적었으니, 뒤쪽에 나오는 ‘희미(稀微)하게’도 ‘뿌옇게’로 손질하든지 ‘흐리게’나 ‘흐릿하게’로 손질합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36) 초록의 5


하지만 그 초록의 물결 앞에서 / 우리는 왜 진즉 승천해버리지 못했을까

《고재종-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1995) 63쪽


 초록의 물결

→ 푸른 물결

→ 풀빛 물결

→ 짙푸른 물결

 …



  한국말 ‘푸르다’를 찬찬히 쓰지 못하기에, 그만 일본 한자말 ‘녹색’이나 중국 한자말 ‘초록’을 쓰면서 ‘-의’까지 붙이고 맙니다. 그저 한국말 ‘푸르다’를 쓰면 됩니다. “푸른 물결”이라 하면 됩니다. 푸른 빛깔은 한 가지가 아니니 “짙푸른 물결”이나 “옅푸른 물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푸르디푸른 물결”이나 “매우 푸른 물결”이나 “맑고 푸른 물결”이라 해도 잘 어울립니다. 4348.4.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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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푸른 물결 앞에서 / 우리는 왜 진즉 날아오르지 못했을까


‘하지만’은 ‘그러나’나 ‘그렇지만’으로 손보고, ‘승천(昇天)해’는 ‘날아오르지’나 ‘하늘로 오르지’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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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604) 하나, 하나로, 한나라


죄없는 나를 왜 찌르는가 / 나를 꼭 찔러야 / 통일이 되는 줄 아느냐고 외치고

《서홍관-어여쁜 꽃씨 하나》(창작과비평사,1989) 117쪽



  한자말 ‘통일(統一)’을 이 나라에서 쓴 지 얼마나 되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한자로 지은 낱말이니 여느 시골사람은 이런 말을 쓸 일이 없었을 테지요. 나라나 겨레가 여럿으로 쪼개진 자리에서 이러한 낱말을 쓸 테니, 한국에서 이 낱말을 널리 쓴 때라면 아무래도 해방 언저리부터이지 싶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통일’을 찾아보면 “1. 나누어진 것들을 합쳐서 하나의 조직·체계 아래로 모이게 함 2. 여러 요소를 서로 같거나 일치되게 맞춤 3. 여러 가지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음”으로 풀이합니다. 찬찬히 간추리자면 “하나로 모이게 함”이나 “하나가 되게 맞춤”이나 “한곳으로 모음”을 ‘통일’이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나타내는 셈입니다.


 하나되기

 하나로

 한나라


  1980년대에 ‘통일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은 곧잘 ‘하나되기’를 말했습니다. 한자말 ‘통일’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한국말로 쉽게 적으려던 낱말인 ‘하나되기’입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조금 숨통을 트었다고 할 만합니다. 군사독재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조금 걷혔기 때문입니다. 이즈음 온갖 영어가 밀물처럼 밀려들기도 했지만, 한국말을 새롭게 엮어서 즐겁게 쓰려고 하는 물결도 살몃살몃 치기도 했습니다. 이러면서 ‘하나로’라는 낱말이 곳곳에서 불거졌어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여러 곳에서 ‘하나로’를 말했고, 회사이름이나 가게이름이나 물건이름으로 이 이름이 널리 쓰였습니다.


  1970년대에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펴낸 한창기 님은 ‘韓國’이라는 이름은 뿌리가 없다면서, 이 나라와 이 겨레에 참답고 슬기로운 뿌리를 밝히는 이름을 새롭게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면서 빚은 새 이름이 ‘한나라’입니다. 우리 겨레를 일컬어 ‘한겨레’라고 하듯이, 우리 나라를 일컬어 ‘한나라’라고 할 때에 올바르다고 했어요. 이 이름은 2000년대로 넘어선 뒤 어느 정당에서 제 이름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통일이 되는 줄 아느냐

→ 하나가 되는 줄 아느냐

→ 하나로 되는 줄 아느냐

→ 한나라가 되는 줄 아느냐


  한자말 ‘통일’을 쓰는 일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 낱말을 안 써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한테 가장 알맞거나 사랑스러운 낱말을 제대로 지어서 쓰는지 안 쓰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몸 . 한마음 . 한넋 . 한생각

 한나라 . 한누리 . 한별

 한삶 . 한노래 . 한사랑


  ‘하나되기(하나가 되다)’를 생각할 수 있다면, 차츰 가지를 뻗어 “한몸이 되다”와 “한마음이 되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낱말로 추려서 ‘한몸되기’와 ‘한마음되기’도 생각할 수 있어요. ‘한넋’과 ‘한생각’이라는 낱말에다가 ‘한넋되기’와 ‘한생각되기’를 함께 생각해 볼 만합니다.


  정치 얼거리로 따지면 ‘한나라’이고, 지구 얼거리로 따지면 ‘한별’이며, 온누리(우주)로 따지면 ‘한누리’입니다.


  하나로 어우러진 삶이기에 ‘한삶’이 되면서, 한삶에서는 ‘한노래’를 부르고, ‘한사랑’을 나눕니다. 하나로 어우러진 삶으로 나아가면서 쓰는 말과 글이라면 ‘한말’과 ‘한글’이에요.


  때와 곳을 가만히 살피면 “통일이 되는 줄”은 “하나가 되는 줄”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과 ‘하나’가 서로 똑같이 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 저 말 붙이지 않아도 ‘하나’라는 낱말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나눌 만해요.


 하나 . 하나님 . 한 . 한님 . 한동무

 온하나 . 온님 . 온벗 . 온사람


  해를 해님이라 하고 별을 별님이라 하듯이, ‘하나’를 ‘하나님’으로 적을 수 있고, ‘한 + 님’이라는 얼개로 ‘한님’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었으면, 서로서로 ‘한님’이라 부를 수 있고, ‘한동무’로 삼을 수 있습니다. 크게 하나가 되거나 모두 하나가 되었으면 ‘온하나’인 셈이며, 온하나가 된 사람은 서로 ‘온님’이나 ‘온벗’이나 ‘온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4348.4.1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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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8 가는 말, 오는 말



  나한테서 나오는 말은 내가 손수 길어올립니다. 나한테 오는 말은 네가 손수 길어올립니다. 나는 네 말을 듣고 나서 내 말을 길어올릴 텐데, 네가 어떤 말을 나한테 하지 않더라도 ‘내 말’을 하기 마련입니다. 네가 어떤 말을 했기에 꼭 ‘이 말’을 하지 않아요. 네가 저런 말을 했으니 나도 그에 맞추어 ‘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늘 ‘내가 하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네 모습’에 맞추어 말을 꺼냅니다. 이때에는 ‘정작 내가 하려는 말’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네 모습에 맞추거나 네가 꺼낸 말에 따라서 ‘내 말’을 한다면, 이 말은 ‘휘둘리는 말’이거나 ‘휩쓸리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뱉고 나면 누구나 아차 잘못했구나 하고 느끼면서 스스로 뉘우칩니다.


  우리는 왜 스스로 뉘우칠 만한 말을 할까요?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나와 마주한 ‘너’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너와 마주한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네가 나한테 어떤 말을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하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내 모든 마음을 쏟아서 하려는 말을 바람처럼 들려주어야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은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서 내보낸 구정물은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옵니다. 물 한 방울은 돌고 돌아서 다시 우리 집으로 와요. 내가 버린 쓰레기는 돌고 돌아서 언제나 우리 집으로 옵니다. 한국 옆에 있는 중국에서 모랫바람이 분다는데, 이 모랫바람은 지구별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중국으로 가요. 한국에서 버리는 쓰레기는 바닷물을 타고 일본으로 갑니다. 이 쓰레기는 다시 돌고 돌아서 한국으로 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 탓’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탓하려면 ‘내 탓’을 해야 합니다. 우리 집에서 이루어 둘레로 내보낸 대로 우리 집으로 돌아와요.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고스란히 나한테 와요. 이를 빗대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합니다.


  ‘가는 말’이란 ‘내가 하려는 말’입니다. 남(너)한테 맞추어서 하는 말이 ‘가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나를 제대로 생각하면서, 나를 제대로 사랑하려는 말이 바로 ‘가는 말’이며 ‘내 말’이고 ‘내가 하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아서 사랑하고 깊고 넓게 생각해서 말을 들려준다면, 이 말을 듣는 너(남)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마음을 넓고 깊게 열어 따사로운 사랑을 실어서 들려주는 말’을 들은 너(남)는 어떤 마음이 되어서, 나한테 ‘이녁 말(네 말)’을 들려줄까요? 이녁(너)도 이녁 마음속에서 길어올린 깊고 넓으면서 따사로운 사랑으로 가득한 말을 나한테 들려줄 테지요.


  겉보기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말이 ‘고운 말’이 아닙니다. 마음 깊이 사랑을 실어서 들려주려는 말이 곱습니다. 마음을 넓게 보듬으면서 푸른 꿈으로 짓는 말이 곱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오롯이 너한테 보냅니다. 너는 네 마음을 옹글게 나한테 보냅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사귈 수 있을 때에 어깨동무를 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지 못하면 어깨동무를 못 합니다.


  ‘어깨동무’는 ‘마음동무’입니다. 마음동무는 ‘사랑동무’입니다. 사랑동무는 ‘꿈동무’요 ‘이야기동무’입니다. 꿈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동무는 ‘삶동무’입니다. 아름다운 삶으로 함께 나아가려는 씩씩하고 어여쁜 ‘길동무’입니다. 4348.3.5.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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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없애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422) 별도의 1


이럴 때일수록 동요하지 말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방에서 대기하도록 하세요

《류춘도-벙어리새》(당대,2005) 66쪽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 다른 말이 있을 때까지

→ 더 말이 있을 때까지

→ 따로 얘기가 있을 때까지

 …



  한자말 ‘별도’는 “원래의 것에 덧붙여서 추가한 것”이나 “딴 방면”을 뜻한다고 하는데, ‘추가(追加)’는 “나중에 더 보탬”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사전 말풀이는 겹말입니다. “더 붙이거나 넣을” 적에 ‘별도’를 쓰는 셈입니다. 이러한 뜻을 헤아리면 ‘별도’는 ‘더’나 ‘딴’이나 ‘다른’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더 보태는’이나 ‘덧붙이는’을 가리킨다고도 할 만합니다.


 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 방이 따로 마련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별도의 기구에서 다룰 예정

→ 이 일은 다른 곳에서 다루려 함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별도의 적금을 들어 두었다

→ 입학금을 마련하려고 따로 적금을 들어 둘었다

 별도의 잣대

→ 새로운 잣대 / 다른 잣대

 별도로 생각해 볼 문제

→ 새롭게 생각해 볼 일 / 따로 생각해 볼 일


  곰곰이 따지면, ‘별도’는 ‘다를 別 + 길 途’입니다. “다른 길”을 한자로 옮겼을 뿐입니다. 한국말로는 처음부터 ‘다른(다르다)’인 셈이고, 이 같은 얼거리를 찬찬히 읽는다면 ‘별도 + 의’처럼 쓸 일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4338.12.19.달/4348.4.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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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말고 따로 말이 있을 때까지 방에서 기다리도록 하세요


‘동요(動搖)하지’는 ‘흔들리지’나 ‘움직이지’나 ‘술렁이자’나 ‘웅성거리지’로 다듬고, ‘대기(待機)하도록’은 ‘기다리도록’으로 다듬습니다. ‘지시(指示)’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이 자리에서는 ‘말’로 손볼 만합니다.



별도(別途)

1. 원래의 것에 덧붙여서 추가한 것

   - 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 이 문제는 별도의 기구에서 다룰 예정 /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별도의 적금을 들어 두었다

2. 딴 방면

   - 별도의 잣대를 대어 보는 방법 / 이전 계획과는 별도로 생각해 볼 문제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341) 별도의 2


고양이 꼬리는 40% 정도는 고양이에 속해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40%의 별도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권윤주-to Cats》(바다출판사,2005) 41쪽


 40%의 별도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 40%는 다른 넋이다

→ 40%만큼 다른 숨결이 있다

→ 40%는 따로 움직인다

→ 40%는 딴 몸이다

 …



  ‘자아’라는 한자말을 그대로 두려면 “40%는 다른 자아이다”처럼 쓰면 됩니다. ‘자아’를 한국말로 손질하려면 ‘넋’이나 ‘숨결’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고양이 꼬리를 이야기하니까, “따로 움직인다”라든지 “딴 몸이다”처럼 손질해도 잘 어울립니다. 4341.4.30.물/4348.4.10.쇠.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고양이 꼬리는 40%쯤 고양이한테 얽매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40%쯤 따로 제 숨결이 있다


“40% 정도(程度)”는 “40%쯤”으로 손보고, “고양이에 속(屬)해 있지 않다”는 “고양이한테 얽매이지 않는다”나 “고양이와 얽히지 않는다”나 “고양이 몸에 들어가지 않는다”나 “고양이한테 딸리지 않는다”로 손봅니다. ‘자아(自我)’는 ‘넋’이나 ‘숨결’로 손질할 수 있고, “가지고 있다”는 “있다”로 손질합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31) 별도의 3


이 주제들로 별도의 책을 만들지 못했다

《레몽 드파르동/정진국 옮김-방랑》(포토넷,2015) 116쪽


 별도의 책을 만들지

→ 책을 따로 만들지

→ 책을 새롭게 만들지

→ 책을 더 만들지

 …



  어떤 이야기로든 책을 묶습니다. 그런데 이 보기글을 보니, ‘이 주제’로는 책을 묶지 못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주제)로는 책을 묶었을 테지요. ‘이’ 이야기로는 책을 묶었고, ‘다른’ 이야기로는 책을 못 묶었다는 소리입니다. 어떤 이야기로는 책을 묶었으나, 이 이야기로는 책을 ‘더’ 못 묶었거나 ‘새롭게’ 묶지 못했다는 소리도 됩니다. 4348.4.10.쇠.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 얘기들로 책을 더 묶지 못했다


‘주제(主題)’는 ‘이야기’로 손볼 수 있습니다. “책을 만들지”는 “책을 묶지”나 “책을 엮지”나 “책을 내지”나 “책을 쓰지”로 손질합니다. ‘만들다’는 공장에서 물건을 찍는 모습을 가리키면서 써야 어울립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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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602) 쇠북


칼자루와 녹슨 못과 철조망을 녹여서 / 큰소리 울려 퍼지는 / 쇠북 하나 만들려 하네

《서홍관-어여쁜 꽃씨 하나》(창작과비평서,1989) 107쪽



  한국말사전에서 ‘쇠북’을 찾아보면 “‘종(鐘)’의 옛말”로 풀이합니다. 오늘날 쓸 낱말이 아니라고 다룹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오얏’을 찾아보아도 “‘자두(紫桃)’의 옛말”로 풀이합니다. 곰곰이 생각할 일입니다. ‘쇠북’이나 ‘오얏’은 옛말로 다루어야 할까요? 이 낱말이 옛말이라면 얼마나 예스러운 말일까요? 언제부터 이 낱말을 안 썼다고 할 만할까요?


  한국말사전에서 ‘종(鐘)’을 찾아보면 “어떤 시간 또는 시각을 알리거나 신호를 하기 위하여 치거나 흔들어 소리를 내는 금속 기구”로 풀이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둘레에 알리도록 소리를 낼 적에 쓰는 연장이 ‘쇠북’이거나 ‘종’인 셈입니다.


 쇠북 . 가죽북 . 종이북

 큰북 . 작은북 . 모둠북 . 둥글북


  북은 여러 가지로 만듭니다. 쇠로 만들 수 있고, 가죽이나 종이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북은 크게 만들 수 있고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북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고, 둥글거나 세모낳거나 네모낳게 만들 수 있어요. 어떻게 만들려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북이 태어나고, 어떻게 쓰려 하느냐에 따라 새삼스러운 북이 나옵니다.


  여러모로 살피면, 요즈음은 ‘북’을 친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고, ‘드럼(drum)’을 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북잡이’나 ‘북재비’는 찾아보기 어렵고, ‘드러머’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서는 흔히 ‘종지기’를 말하는데, ‘쇠북지기’나 ‘쇠북꾼’이나 ‘쇠북잡이’나 ‘쇠북재비’는 나올 수 없을까 궁금합니다. ‘쇠북소리’나 ‘쇠북노래’ 같은 낱말은 태어날 수 없을는지 궁금합니다. 4348.4.1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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