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빛

나는 말꽃이다 75 더



  더 읽어도 즐겁습니다. 덜 읽어도 즐겁습니다. 더 잘 써도 기쁩니다. 덜 잘 써도 기쁩니다. 아이들이 더 잘생기면 즐거울까요? 이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저는 아이들을 보면서 더 잘생기거나 덜 잘생겼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더 키가 크면 기쁠까요? 이 대목에서도 고개를 갸웃합니다. 키가 크거나 작아서 좋거나 나쁜 일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돈을 얼마쯤 건사하면 넉넉할까요? 스스로 즐겁게 쓸 만큼 있으면 넉넉하고, 스스로 이웃이며 동무하고 나눌 만큼 있으면 넉넉하다고 느껴요. 아이들하고 지내며 눈을 더 자주 더 오래 더 많이 마주쳐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언제 얼마쯤 눈을 마주치든 늘 즐겁게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꿈꾸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넉넉하지 싶어요. 이리하여 책을 더 읽자는 말이 안 달갑습니다. 그렇다고 책을 덜 읽자고 말할 생각이 없어요. 그저 “책을 즐겁게 읽어요”라든지 “책을 사랑으로 읽어요”라든지 “책을 숲에서 읽어요”라든지 “종이책뿐 아니라 마음책도 풀꽃나무라는 책도 비바람하고 해라는 책도 반가이 읽어요” 같은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우리는 길게 살지도 짧게 살지도 않아요. 우리는 잘 살지도 못 살지도 않아요. 언제나 하나, “사랑을 즐겁게” 살아갑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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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말빛

나는 말꽃이다 74 하루글



  하루를 그리면서 여는 새벽은 뜻깊습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는지 스스로 그리는 동안 마음을 다스리고 생각을 짓기 마련입니다. 하루를 누리고 짓는 아침이며 낮은 뜻있습니다. 새벽에 그린 밑틀을 되뇌면서 스스로 놀고 일하고 쉬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하루를 돌아보는 저녁이나 밤은 매우 값집니다. 새벽·아침·낮·저녁을 지나 밤에 이르도록 보낸 오늘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어떠한 마음이었고 생각이었나를 새기지요. 이리하여 ‘하루쓰기(일기)’는, “오늘을 스스로 생각하며 살림한 삶을 사랑하려고 쓰는 글”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하루를 남기는 글”이라고만 하기에는 모자랍니다. “스스로 즐겁게 지으면서 하루를 보낸 이야기를 새롭게 돌아보면서 사랑으로 남기는 글”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발자국(역사)을 남기려고 하루쓰기를 하지 않아요. “곧 어제가 될 오늘을 사랑하려고 쓰는 글”이 되도록 하루쓰기를 한다고 봅니다. 어린이한테 이렇게 알려준다면 참말로 즐거이 하루쓰기를 하지 않을까요? 어른한테도 이처럼 들려준다면 어린이 곁에서 함께 하루쓰기를 하지 않을까요? 하루쓰기를 하는 뜻을 짚어낸다면, 이렇게 하루하루 이야기를 스스로 쓰는 눈썰미가 모여 새글을 엮고, 낱말책을 여미는 숨결이 자랍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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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말빛 2022.2.13.

나는 말꽃이다 73 굶기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돌보면서 낱말책을 엮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열손가락은커녕 다섯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렵다고 느낍니다. ‘말꽃지기(국어사전 편찬자)’는 ‘일감(직업)’하고 멉니다. 국립국어원 벼슬꾼(공무원)이라든지 열린배움터(대학교) 길잡이(교수)로 돈을 버는 사람은 제법 있고, 펴냄터(출판사)에 깃들어 심부름을 하는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만, 여기저기에 안 휘둘리고 오롯이 말을 말답게 말로 바라보면서 새롭게 배우고 보살피는 사람은 참말 얼마나 될까요? 우리말을 사랑하겠노라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일을 해보겠다는 푸름이가 이따금 있기에 살짝 얘기합니다. “우리말을 돌보는 길을 가고 싶으면 적어도 열 해를 굶으면 돼요.” “네? 굶으라고요? 열 해를?” “힘들까요? 힘들면 스무 해를 굶으면 돼요.” “네?” 우리말이든 바깥말(외국말)이든 나라(정부)나 배움길(학맥)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가 이 땅에서 살림을 짓는 사랑으로 살아온 숲을 수수하게 마주하면서 받아들이는 눈빛이어야 ‘말’을 건사합니다. 글님(문필가·작가)이라는 길도 으레 열 해는 굶을 노릇이고, 제대로 스무 해를 굶어야 글빛이 피어난다고 느껴요. 돈을 끊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돈에 눈이 멀면 말글은 다 죽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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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말꽃

나는 말꽃이다 72 칸종이



  예전에는 글책이건 낱말책이건 찍는틀(인쇄기)에 맞추었기에 칸종이(원고지)에 글을 적었습니다. 칸에 맞추어 글씨를 하나씩 틀에 새겼어요. 이제는 따로 찍는틀을 안 쓰기에 칸종이를 쓸 일이 없습니다. 굳이 칸을 맞추지 않아요. 온통 하얀 판을 알맞게 가누어서 글을 여밉니다. 아직 글살림집(문방구)에서 칸종이를 살 수 있습니다만, 머잖아 사라지겠지요. 글씨를 손으로 옮겨쓰는 분이 늘기는 하더라도 칸종이 쓰임새는 확 줄었습니다. 아니, 칸종이에 맞추어 적은 글로 책을 내기란 외려 더 어렵습니다. 칸종이는 지난날 책찍기(인쇄)를 할 적에 빈틈이 없도록 하려고 마련했으나, 요즈음 책찍기 얼개에서는 애먼 종이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래도 아직 한 가지 쓰임새는 있더군요. 칸종이에 글을 적으려면 빨리 못 씁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칸에 넣어야 해요. 칸종이에 적은 글을 읽는 사람도 빨리 못 읽습니다. 글씨를 하나하나 따박따박 짚으며 읽어야 하더군요. 빠르게 치닫는 오늘날 물결을 조금은 늦추려는 칸종이일 만합니다. 아니, 빨리 써서 빨리 읽어치우기보다는, 알맞게 써서 알맞게 읽고 나누며 돌아보는 마음을 알려주는 칸종이라고 해야 어울릴 테지요. 한 칸을 채우듯 하루를 느긋이 알맞게 헤아립니다.


ㅅㄴㄹ


(곳 : 마을책집, 전주 잘익은언어들 2021.9.20.)

(곁 : 책숲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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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말빛

나는 말꽃이다 71 몸



  견디기 힘들다고 느낀 그때 그곳에서 어떻게 견디었는가 하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둘레에서 나이 있는 사람들이 어린(여덟∼열세 살) 저한테 엉큼짓(성폭력)을 일삼던 때에 어떻게 견디었는지, 사내라면 끌려갈밖에 없는 싸움판(군대)에서 높이(계급)를 밀어붙이면서 똑같이 엉큼짓(성폭력)을 해대는 판에 어떻게 견디었는지 돌아보면, 마음속으로 “난 여기에 없어. 이 몸은 내가 아니야. 나는 빛나는 넋으로 저 너머(우주)에 있어.” 하고 생각했더군요. 제 몸을 갖고 노는 사람들(성폭력 가해자)은 탈(인형)을 붙잡을 뿐이라고 여겼어요. 싫어하는 일이나 꺼리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일을 겪으며 살아낸 사람일까요. 비록 엉큼짓을 견디어야 했어도 이 짓을 모두 녹여서 앞으로 다시 안 일어나도록, 아니 사라지거나 멈추도록 조그맣게 씨앗을 심는 일을 그 어린 날과 젊은 날에 한 셈이려나 하고 생각합니다. 내키지 않거나 못마땅하더라도 억지로 해내야 하던 일이 아닌, 그들(가해자)이 하는 짓이 온누리에서 싹 사라지기를 꿈꾸면서 마음속으로 새빛을 지으려고 했던 작은 몸놀림이었나 하고도 생각해요. 몸에 매인다면 겉모습에 매입니다. 마음을 본다면 마음을 사랑합니다. 말글은 늘 마음에 생각을 심으며 태어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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