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28 ‘풀잎빛’과 ‘나뭇잎빛’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살던 사람은 언제나 ‘흙’을 보았고, ‘흙’을 생각했으며, ‘흙’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지 않고 흙을 만지지 않는 사람은, 도시에서 으레 ‘토양(土壤)’을 말합니다. 시골에서 풀을 밟으면서 살던 사람은 언제나 ‘풀’을 보았고, ‘풀’을 생각했으며, ‘풀’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지 않고 풀을 밟지 않는 사람은, 도시에서 흔히 ‘잡초(雜草)’나 ‘화초(花草)’를 말합니다.


  이리하여, 예부터 이 땅에서 삶을 지으며 조용히 살림을 가꾸고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본 사람은 홀가분하게 ‘흙내음·흙빛·흙집’을 말하고 바라보며 돌보면서 ‘풀내음·풀빛·풀밥’을 말하고 바라보면서 돌봅니다. 이와 달리, 이 땅에서 살기는 하되 손수 삶을 짓지 않거나 도시에서 정치나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다루는 사람은 ‘농업(農業)’을 말하는 한편, ‘초록(草綠)’과 ‘녹색(綠色)’을 말합니다.


  숲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쓰는 ‘숲말’은 ‘풀빛’입니다. 숲말을 쓰던 이 나라 한겨레는 한국사람이니, 한국말도 ‘풀빛’입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 모두 중국을 섬기면서 중국에서 받아들인 중국말은 ‘초록’이고, 일제강점기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다가서며 떡고물을 챙기다가 일본을 거쳐 서양 학문을 받아들인 지식인이 쓰는 일본말은 ‘녹색’이며, 해방 뒤 미국을 앞세운 서양 문화에 온마음을 사로잡힌 사람들이 쓰는 영어는 ‘그린(green)’입니다.


  곰곰이 살피면, 한국사람은 자그마치 네 가지 말을 씁니다. 한국말(숲말) ‘풀빛’을 비롯해서, 중국말 ‘초록’과 일본말 ‘녹색’과 영어 ‘그린’을 함께 써요. 하나를 가리키는 낱말이 ‘네 나라 말’로 네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풀빛’이라고 하면, 이 풀빛은 “풀잎 빛깔”입니다. 풀잎 빛깔 가운데 “여름에 보는 풀잎 빛깔”이라고 할 만합니다. 여름에는 풀잎 빛깔이 거의 그대로 있어요. 잣대나 표준으로 삼는 ‘풀빛’은 수많은 풀잎 빛깔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리하여, ‘풀빛’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봄풀빛·여름풀빛·가을풀빛·겨울풀빛’이 다 다릅니다. 봄에는 갓 돋은 보들보들 여리면서 옅은 빛깔입니다. 여름에는 짙푸른 빛깔입니다. 가을에는 살그마니 누렇게 바래는 빛깔입니다. 겨울에는 샛노랗거나 싯누렇게 바래어 시든 빛깔입니다.


  봄에도 갓 돋은 싹이라면 ‘싹빛’이나 ‘풀싹빛’입니다. 그리고, 풀마다 빛깔이 다 다르니, ‘민들레잎빛’과 ‘씀바귀잎빛’과 ‘봄까지꽃잎빛’과 ‘별꽃나물잎빛’과 ‘돌나물잎빛’과 ‘갓잎빛’과 ‘배춧잎빛’과 ‘당근잎빛’처럼 다 다른 풀빛을 헤아릴 수 있어요. 이러한 풀잎빛도 철마다 다르니, ‘봄민들레잎빛’과 ‘여름민들레잎빛’처럼 갈라서 쓸 수 있지요.


  나뭇잎 빛깔도 ‘풀빛’으로 아울러서 가리킵니다. 그러나, 나뭇잎은 나무에 달린 잎사귀 빛깔인 만큼, 따로 ‘나뭇잎빛’처럼 쓸 수 있어요.


 풀빛 = 풀잎빛 + 나뭇잎빛


  다시 말하자면, ‘풀빛 → ㄱ. 풀잎빛 ㄴ. 나뭇잎빛’처럼 풀빛을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뭇잎빛도 ‘봄나뭇잎빛·여름나뭇잎빛·가을나뭇잎빛·겨울나뭇잎’으로 더 나눌 수 있어요.


  모든 풀잎빛과 나뭇잎빛을 아울러서 ‘풀빛’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바탕말이 되는 ‘풀빛’을 곰곰이 들여다보면서 넓고 깊게 살피면, 끝없이 펼쳐지는 수많은 풀빛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풀빛은 그저 한 가지 풀빛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풀빛이 잇달아 우리 곁으로 스며드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갖 풀빛을 맞아들이려 한다면, 우리 스스로 숲말(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풀잎 빛깔이기에 풀빛인데, 이 낱말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초록(중국말)’이나 ‘녹색(일본말)’이나 ‘그린(영어)’ 같은 낱말을 함부로 섞어서 쓰면, 생각날개를 조금도 못 펼칩니다.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헤아릴 때에 비로소 온갖 풀빛이 마음껏 나래치면서 퍼집니다.


  하나 더 헤아린다면, 풀 가운데 사람이 먹는 풀은 따로 ‘푸성귀·남새·나물’로 나누기도 합니다. 사람이 손수 심는 ‘남새’라는 풀은 ‘남새빛’이 되고, 들과 숲에서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서 돋는 ‘나물’이라는 풀은 ‘나물빛’이 되며, 남새와 나물을 아우르는 ‘푸성귀’라는 풀은 ‘푸성귀빛’이 되어요. 게다가 들나물은 ‘들나물빛’이고 멧나물은 ‘멧나물빛’입니다. 봄나물은 ‘봄나물빛’이 되고, 겨울나물은 ‘겨울나물빛’이 될 테지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을 가리키는 ‘숲’을 바라보면서 ‘숲빛’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숲말을 쓰는 우리들은 숲빛을 바라봅니다. ‘봄숲빛’을 바라보고, ‘여름숲빛’을 바라보지요. 수많은 푸른 빛깔을 얼싸안을 수 있을 때에, 내 몸과 마음은 푸르게 흐르는 바람이 됩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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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7 ‘조바심’과 ‘두려움’



  어떤 일을 서두르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서두르려 할까요? 서두르지 않으면 일이 안 되리라 여기니까 서두릅니다. 그러면, 서두르면 일이 될까요? 서두르기에 일이 잘 될까요? 네, 서두를 때에 일이 될 수 있고, 서두르기에 일이 잘 될 수 있어요. 때에 따라 다릅니다. 빠르게 움직이기에 일이 될 수 있고, 찬찬히 움직이면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두른 탓에 일이 안 될 수 있지요. 너무 빠르게 움직인 나머지 일이 엉클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할 적에 서두르거나 늑장을 부리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모든 몸짓은 우리가 하려는 일에 알맞게 흐릅니다. 그래서, 서두른다면 서두르는 몸짓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으면 되고, 늑장을 부릴 적에도 늑장을 부리는 몸짓을 가만히 살펴볼 수 있으면 됩니다. 다만, 두 가지 마음이 깃들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조바심’입니다. 둘째, ‘두려움’입니다.


  ‘조바심’은 지레 걱정을 담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아직 하지 않았고, 아직 움직이지 않았으나, 먼저 걱정이나 근심을 담는 마음이 바로 ‘조바심’입니다. 비슷한 말로 ‘조마거리다·오마조마하다·조마조마하다’가 있습니다. 이 세 낱말은 마음을 졸이거나 태우면서 흔들거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벌벌 떠는 모습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떨리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왜 떨릴까요? 잘못될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떨립니다. 왜 잘못될까 하고 생각할까요? 스스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요, 스스로 믿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나를 스스로 바라볼 줄 모르기 때문이요, 내가 나를 차분히 마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기에 나를 믿지 못하며, 내가 나를 알려고 하지 않으니 자꾸 잘못되겠거니 하고 지레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조바심’은 걱정과 근심을 끌어들이는 마음입니다. 이리하여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스스로 흔들거리거나 벌벌 떱니다. ‘두려움’은 잘못을 스스로 생각해서 짓는 마음입니다. 아무도 아무 말을 안 했고, 아무도 아무 짓을 안 했으나, 그저 스스로 믿지 못하는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마음이 되어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거나 무너집니다.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아무 일을 못 합니다.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무 일을 안 합니다. 조바심을 내기에 스스로 흔들거리거나 떨다가 무너집니다. 두려움을 품기에 스스로 못 믿고 스스로 풀 길을 바라보지 않다가 어느새 스스로 무너집니다.


  무너지는 모습은 두 가지이지만, ‘무너졌다’는 대목에서는 두 가지가 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도 두 가지 있다고 할 만합니다. 첫째, 내 마음에 걱정과 근심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무너질 일이 없습니다. 둘째, 내 마음에 잘못되겠거니 하는 생각을 심지 않으면 무너질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다스릴 적에 기쁘거나 즐거울까요? 나는 내 삶을 어떻게 바라볼 적에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까요?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짓거나 가꿀 적에 꿈을 이룰까요? 바로 ‘조바심(걱정·근심)’과 ‘두려움(잘못)’이 아니라 ‘사랑’과 ‘꿈’을 생각하고 품으면서 보듬을 노릇입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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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6 넉넉하고 너그러우니 넓다



  마음이 큰 사람은 이웃과 동무를 얼마든지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크지 못한 사람은 이웃과 동무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받아들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마음이 크기에 이웃과 동무를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살가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크지 못한 탓에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내가 나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그만 잊기 일쑤입니다.


  ‘넉넉하다’는 “마음이 크고 시원하다”를 뜻합니다. “남을 만큼 많다”를 가리키며, “어느 자리가 크다”를 가리킵니다. 이리하여, “살림이 제법 넘쳐서 남을 만큼 남다”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부자’는 바로 “넉넉한 사람”입니다. 다만, 부자 가운데 구두쇠나 자린고비나 깍쟁이가 있을 뿐입니다.


  ‘넉넉하다’에서 ‘너그럽다’가 갈립니다. ‘넓다’도 함께 태어납니다. 마음이 크고 시원한 사람은 생각을 한결 크고 시원하게 트거나 열 수 있고, 생각을 한결 크고 시원하게 트거나 열기에 언제나 환하면서 눈부신 슬기와 빛과 셈으로 나아갑니다.


  넉넉하거나 너그럽거나 넓은 사람은 ‘네가 나한테서 하나를 빌거나 얻으려’ 하면 하나를 줄 뿐 아니라 둘을 주기도 하고, 아예 몽땅 주기도 합니다. 몽땅 주면 나한테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여길는지 모르나, 넉넉한 사람은 새롭게 마음그릇을 채웁니다. 너그러운 사람과 넓은 사람도 새롭게 마음자리를 채우고 마음밭을 가꿉니다. 네가 나한테서 빌리거나 얻어도 좋으며, 네가 나한테서 모두 가져가도 좋다고 하는 품이 바로 넉넉함이요 너그러움이며 넓음입니다. 푸고 또 퍼도 다시 풀 수 있습니다. 푸고 자꾸 퍼도 새롭게 풀 수 있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언제나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은 마르지 않거든요. 꿈을 키우는 사람도 언제나 꿈을 키웁니다. 꿈은 끝나지 않습니다.


  마르지 않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나눌 수 있기에 넉넉합니다. 마르지 않도록 언제나 철철 넘치게 가꾸거나 새롭게 지으니 너그럽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나와 이웃과 동무 모두 웃고 노래할 터전을 일구니 넓습니다.


  넉넉함은 숫자로 따지지 않습니다. 이 만한 숫자가 되어야 넉넉하지 않아요. 너그러움은 부피로 살피지 않습니다. 이쯤 되어야 너그럽지 않지요. 넓음은 크기로 재지 않습니다. 이 크기는 넓고 저 크기는 좁다고 하지 않을밖에요.


  햇볕은 늘 넉넉합니다. 햇살은 늘 너그럽습니다. 햇빛은 늘 넓습니다. 넉넉하기에 웃음이 자라고, 너그럽기에 노래가 흐르며, 넓기에 춤이 샘솟습니다. 넉넉하기에 일마다 기쁘고, 너그럽기에 놀이가 재미나며, 넓기에 삶이 신납니다. 샘물이 겨울에도 얼지 않는 까닭은 쉬지 않고 끝없이 솟으면서 흐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샘물처럼 흐릅니다. 샘물은 한겨울에 따스하고 한여름에 시원합니다. 사랑은 누구한테나 고루 아름답게 스밉니다.


  마시고 마셔도 바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싱그러우면서 푸르게 흐르는 바람입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온몸에 파란 기운을 그득 담았다면, 이제부터 나는 넉넉하고 너그러우면서 넓은 삶으로 거듭날 기운을 새롭게 펼칩니다.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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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5 세면서 생각하다



  ‘세다’라는 낱말은 소리값이 같으면서 여러 갈래로 씁니다. 먼저 “머리카락이 세다”처럼 쓰고, 다음으로 “얼마나 있는지 세다”처럼 쓰며, 마지막으로 “힘이 세다”처럼 씁니다. 이 가운데 “얼마나 있는지 세다”는 움직씨이고, 이를 이름씨로 바꾸면 ‘셈’이 됩니다. ‘세다’에서 ‘셈’으로 꼴을 바꾸면, 이 낱말은 “콩알을 셈하다”뿐 아니라 “값이 맞는지 셈을 하다”나 “네 셈이 맞는구나”라든지 “너희 셈이 깊구나”라든지 “셈을 옳게 따지다”라든지 “씨앗을 심고 갈무리하는 셈이 잘 들다”처럼 쓰임새가 늘어납니다. ‘세다 → 셈’인데, ‘셈’에서 다시 ‘셈하다’가 나오기도 합니다.


  ‘세다’와 ‘헤아리다’는 뿌리가 같습니다. ‘헤아리다’는 ‘헤다·혜다’에서 갈린 말입니다. 이 낱말들 ‘세다·헤다·혜다·헤아리다’는 밑뜻이 “어느 만큼 있는지 보다”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만큼 있는지 보기에, 숫자가 얼마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다·헤다·혜다·헤아리다’는 내 앞에 있는 것을 똑똑히 보거나 또렷하게 보는 모습을 나타내려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똑히 보거나 또렷하게 보기에 ‘제대로 가를’ 수 있고 ‘올바로 살필’ 수 있지요.


  이리하여 이 낱말은 ‘생각’이라는 낱말이 태어나게 이끕니다. ‘생각’이란 우리가 머리를 써서 마음속에 그리는 이야기일 텐데, 이는 ‘그릴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지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느끼고 보고 하나하나 가르거나 살피면서 생각이 태어난다’는 얼거리입니다.


  ‘셈’이라는 낱말은 “씨앗을 심고 갈무리하는 셈이 잘 들다”처럼 쓰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셈’은 ‘슬기’와 같습니다. ‘슬기’는 바르며 알맞고 또렷하게 어떤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아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으면 ‘셈·슬기’가 드는 흐름입니다. 아무것이나 머리로 지어서 마음에 생각을 그린대서 셈이 들거나 슬기가 들지 않습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아서 제대로 생각할 때에, 비로소 셈이나 슬기가 듭니다. 생각하는 사람일 때에 철이나 셈이 들지만, 생각을 바르며 알맞고 또렷하게 할 때에 철이나 셈이 들어요.


  올바로 생각하는 사람이 철이 듭니다. 올바로 생각해서 철이 드는 사람이 삶을 짓습니다. 옳고 바르고 헤아리는 사람이 셈이 듭니다. 옳고 바르게 헤아려서 셈이 드는 사람이 삶을 지을 길을 또렷하게 그립니다.


  ‘컴퓨터’라는 것이 한국에 들어올 적에 적잖은 이들은 이를 ‘셈틀’이라는 이름으로 쓰자고 했습니다. 조선일보라는 신문에서는 ‘컴퓨터’ 이름을 새로 짓는 ‘국민 설문조사’를 정부와 함께 했고, 이때에 나온 ‘국민 공모’ 이름은 ‘슬기틀’이었습니다. 말밑을 찬찬히 살피면 ‘셈틀 = 슬기틀’이고, ‘슬기틀 = 셈틀’입니다. 어느 이름을 쓰든 똑같습니다. 다만, ‘셈틀’은 컴퓨터라는 것을 처음 들여올 적에 과학자와 기술자가 손수 지은 이름이고, ‘슬기틀’은 신문사와 정부가 엄청나게 광고와 홍보를 해서 애써 지은 이름입니다. 이 가운데, 여느 자리에 있던 여느 사람이 지은 ‘셈틀’이라는 낱말은 아직 목숨을 잃지 않고 이럭저럭 이 낱말을 듣거나 아는 사람이 있으나, ‘슬기틀’이라는 낱말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부에서 아무리 이 낱말을 퍼뜨리려고 하더라도 뒷받침하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를 세고 둘을 세면서 너와 나를 제대로 봅니다. 너와 나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길이기에, 이 눈길은 차츰 자라서 깊거나 너른 생각으로 뻗고, 이 생각을 가다듬고 추스를 때에 셈·슬기·철로 자랍니다. 4348.2.23.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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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4 하나 둘 셋



  한국사람은 ‘셋’이라는 숫자를 무척 아낍니다. 둘이나 넷이나 하나가 아닌 ‘셋’을 그야말로 섬깁니다. ‘셋’이라는 숫자를 쓰자면, ‘하나’와 ‘둘’이 앞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셋’이라는 숫자를 사랑하는 한국사람은 ‘셋’만 외따로 쓰지 않습니다. ‘하나·둘·셋’을 나란히 씁니다.


  ‘하나·둘·셋’은 ‘처음·가운데·끝’입니다. ‘하나·둘·셋’은 ‘어제·오늘·모레’입니다. ‘하나·둘·셋’은 ‘너·나·우리’입니다. ‘하나·둘·셋’은 ‘이곳(여기)·저곳(저기)·그곳(거기)’입니다. ‘하나·둘·셋’은 ‘아이·철들기·어른’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둘·셋’은 ‘삶·바람(숨결)·죽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둘·셋’은 ‘어둠·해님(별님)·빛’입니다. 그예 ‘하나·둘·셋’은 ‘씨앗·나무(풀)·열매’이지요.


  모든 것은 두 갈래로 짝을 이룹니다. ‘짝꿍’이요 ‘짝지’입니다. 그런데, 두 갈래로 짝을 이루는 것은 모두 사이에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자면 ‘둘’이지만, 찬찬히 헤아리면 언제나 ‘셋’입니다. 이를테면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갈래로 우리 길을 나눈다 할 테지만, ‘삶·죽음’ 둘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언제나 바람(숨결)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빛도 이와 같아요. 어둠과 빛 두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어둠과 빛 사이에는 늘 ‘해님(별님)’이 나란히 있습니다.


  하나와 둘과 셋이라는 얼거리로 나아가는 삶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다(하나)’와 ‘보다(둘)’와 ‘되다(셋)’라는 세 가지 낱말을 씁니다. 한국말에서는 이 세 낱말이 어느 곳에서나 반드시 깃드는, 가장 자주 쓰는 낱말입니다. 세 낱말이 없으면 한국말을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세 낱말이 있어야 모든 한국말이 태어납니다.


  사내와 가시내, 또는 가시내와 사내가 만나서 두 씨앗이 만날 적에 새로운 목숨이 태어납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어우러져야 새로운 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얼핏 보면 ‘사내와 가시내’ 또는 ‘가시내와 사내’ 두 짝이지만, 이 사이에는 늘 ‘둘이 만나도록 잇는 숨결(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두 씨앗이 만나자면 ‘사랑’이라는 숨결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 숨결은 이윽고 ‘아기’라는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두결(양자)’은 하나와 다른 하나만 있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두결을 바라보는 님(관찰자)이 있어야 움직입니다만, 두결을 바라보는 님이 생각을 심어서 씨앗으로 날릴 ‘바람(숨결)’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느끼지 못하면서 느껴야 하는 한 가지가 늘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 있기에 비로소 ‘두 가지 결’은 ‘새로운 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입니다. 한국사람은 예부터 늘 ‘아침·낮·저녁’으로 하루를 갈랐습니다. 세 때 사이나 앞뒤로 ‘새벽·밤’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하루를 가르는 세 때는 ‘아침·낮·저녁’입니다. 이 또한 ‘하나·둘·셋’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대목이 있으니, 한국사람한테 ‘밥때’는 ‘아침·저녁’ 두 가지일 뿐입니다. 일을 하든 놀이를 하든 무엇을 하든 ‘아침저녁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아침 = 아침밥’이기도 하고, ‘저녁 = 저녁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낮 = 낮밥’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셋’과 ‘두결(양자)’이 서로 얽히는 수수께끼이자 실마리입니다.


  두결은 늘 두결이지만, 두결을 이루는 셋이라는 얼거리입니다. 그리고, 셋이라고 하는 얼거리는 언제나 셋이지만, ‘바람 타고 찾아온 씨앗(삶)’을 받으면 셋은 언제나 둘로 바뀝니다(삶짓기를 이룹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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