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23 ‘처음’과 ‘시작’



  “준비(準備), 시작(始作)!” 하고 외치는 말투는 일본 말투입니다. 일본사람은 “요이(ようい) 땅!”이라 말하는데, 여기에서 ‘요이’만 한자말로 바꾼 말투가 “준비, 땅!”입니다. ‘땅’은 총소리를 가리키는 일본말이고, 총소리를 가리키는 한국말은 ‘탕’입니다. 그러니까, ‘준비’라는 낱말이나 ‘시작’이라는 낱말은 모두 일본사람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삶을 나타내거나 가리키거나 드러내거나 나누려고 주고받던 말마디입니다.


  한국사람은 어떤 낱말을 빌어서 삶을 나타내거나 가리키거나 드러내거나 나누었을까요? 한국사람은 “하나, 둘, 셋!” 하고 외쳤습니다. 또는 “자, 하자!”나 “자, 해 보자!” 하고 외쳤어요.


  한자말이면서 일본말이라 할 ‘시작’이라는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는 ‘처음’이라는 소리입니다. 다시 한국말사전에서 ‘처음’을 찾아보면,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맨 앞”으로 풀이합니다.


  ‘처음’을 풀이한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맨 앞 = 처음’일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이 이야기가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풀어서 밝히지는 못하는 한국말사전입니다.


  ‘처음’이라는 낱말은 ‘첫무렵’이나 ‘첫머리’나 ‘첫걸음’처럼 차츰 쓰임새를 넓힙니다. ‘첫발’이라든지 ‘첫째’라든지 ‘첫물·첫밗·첫딸·첫손·첫손가락·첫이레’처럼 쓰기도 해요. ‘첫봄·첫여름’이나 ‘첫인사·첫말·첫사랑’처럼 쓰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살피면, 한국말 ‘처음’은 “맨 앞”일 뿐 아니라 “우두머리”이기도 하고 “새로움”이기도 하며 “놀라움”이나 “훌륭함”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길(가능성)을 여는 몸짓”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갑’니다. 누구나 ‘처음으로 내딛’습니다. 처음으로 말 한 마디를 뱉어야 이야기를 이룹니다. 처음으로 씨앗 한 톨을 심어야 풀싹이 돋고 나무가 자랍니다. 우리 마음자리에 생각을 하나 드리울 때에 비로소 모든 삶을 이룹니다. “처음 = 맨 앞”이라고 풀이하는 오늘날 한국말사전은 ‘틀리지 않’으나 ‘옳거나 맞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 = 열다”로 밝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길을 여는 얼거리를 보여주거나 밝히는 자리에서 쓰는 낱말인 ‘처음’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이제 시작해 볼까?”라든지 “언제 시작하지?”라든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같은 말을 곧잘 씁니다. 아무 자리에나 함부로 ‘시작’이라는 일본 한자말을 집어넣습니다.


  일본 한자말이기에 안 써야 하지 않습니다. ‘시작’이라는 낱말을 슬기롭게 다룰 줄 안다면, 이 낱말은 얼마든지 쓸 만합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함부로 엉성하게 쓰기만 한다면, 이 낱말 때문에 우리 생각은 ‘처음부터 막힙’니다. 한국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시작’이라는 낱말을 처음 쓴 때는 지식인이 백 해쯤 앞서일 테고, 여느 사람은 고작 서른 해나 쉰 해밖에 안 됩니다. 이 대목을 놓친다면, 말넋이나 삶넋을 조금도 못 헤아립니다.


  우리는 예부터 “이제 해 볼까?”나 “언제 하지?”나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처럼 말했습니다. 자, 제대로 바라보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시작’이라는 일본 한자말이 깃들 때와, ‘오롯이 한국사람 말투’로 읊을 때에 느낌이나 뜻이나 생각이나 흐름이나 결이나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살펴야 합니다. ‘처음’을 여는 우리들은 늘 ‘하다(한다)’라는 낱말을 끌어들여서 씁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하다”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보다”입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되다”입니다. 하고, 보니, 됩니다. 이 실타래를 엮는 징검돌 같은 낱말이 바로 ‘처음’입니다.


  처음으로 눈을 뜹니다. 처음으로 생각을 합니다. 처음으로 숨을 쉽니다. 처음으로 몸을 움직입니다. 처음으로 씨앗을 심습니다. 처음으로 서로 마주봅니다. 처음으로 일어섭니다. 처음으로 웃습니다. 처음으로 노래합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사랑을 피워서 처음으로 삶을 짓습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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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2 휘파람·바람·파람



  예부터 한겨레는 바람을 잘 읽었습니다. 흔히 뱃사람만 바람을 잘 읽은 줄 잘못 여기는데, 뱃사람뿐 아니라 뭍사람이나 멧사람이나 들사람 누구나 바람을 잘 읽어야 합니다. 바람을 잘 읽지 못하면 씨앗을 심거나 뿌리지 못합니다. 바람을 잘 읽지 못하면 애써 빨래를 해서 옷가지나 이불을 널었다가 죄 소나기에 흠뻑 적시고 맙니다.


  바람을 읽는 사람은 구름을 읽습니다. 구름을 읽는 사람은 비를 읽고, 아침과 저녁을 읽습니다. 손목시계나 괘종시계가 있지 않아도, 바람을 읽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때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기에 이 지구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차립니다.


  바람을 읽지 못하면 옛사람은 아마 모두 죽었을 테지요. 이를테면, 모든 숲짐승과 풀벌레는 바람을 매우 잘 읽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바람을 못 읽으면 ‘내 몸내음’을 바람에 실려 퍼뜨리니, 큰 짐승이나 벌레가 나를 잡아먹고 말아요. 범이나 이리나 늑대한테서 살아남으려고 할 적에도 바람을 읽어야 합니다. 예부터 숲길이나 멧길을 다닐 적에는 맞바람으로 다녔지, 등바람으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바람이란 무엇일까요? 바람은 모든 냄새를 실어 나릅니다. 바람은 모든 물기를 실어 나릅니다. 바람은 모든 숨결과 기운을 실어 나릅니다. 그래서 바람을 읽는 사람은 숨결과 기운을 읽는 사람입니다. 바람을 읽는 사람은 나한테 밥이 될 것을 읽을 뿐 아니라,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립니다. 버섯도감을 펼쳐야 ‘먹는버섯’인지 아닌지 알아채지 않습니다. 바람을 읽을 적에, 코와 온몸으로 버섯 기운을 느껴서 ‘먹는버섯’인지 아닌지 알아챕니다.


  어떤 목숨이든 바람을 마실 적에 숨결을 잇습니다. 바람을 목으로 넘겨야 숨이 살지요. 들과 숲에서 흐르던 바람은 내가 스스로 기운을 내어 맞아들일 적에 내 숨결이 되고, 내 목숨을 이룹니다. 내가 스스로 바람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람은 그냥 떠도는 기운일 뿐입니다. 내가 스스로 바람을 맞아들이기에, 바람은 내 숨결이 되면서 내 목숨을 이루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보금자리를 닦기 마련입니다. 저마다 제 마음이 맞는 자리에 삶터를 짓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늘 새롭게 마실 만한 바람이 흐르는 곳에 제 보금자리나 삶자리나 일자리나 놀자리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삶은 어떤 바람을 마시려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바람을 몸으로 받아들이면, 아주 빠르게 온몸을 돕니다. 바람 한 줄기는 빛과 같은 빠르기로, 또는 빛보다 더 빠르다 싶은 움직임으로 우리 몸을 휘돕니다. 우리 몸을 휘돈 바람은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바람이 들고 나는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는 사람들 스스로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합니다. 다만, 바람이 아주 빠르게 들고 나기에 우리는 모두 살아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몸밖(살갗)을 휘감던 바람 가운데 내가 스스로 기운을 내어 맞아들인 바람이 우리 몸속(내장과 뼈와 살)을 휘돌면서 빠져나옵니다. 바람은 늘 바람입니다. 산소도 이산화탄소도 아닙니다. 바람은 늘 바람입니다. 이 바람을 어느 만큼 내 몸이 맞아들여서 삭일 수 있느냐에 따라 내가 낼 수 있는 힘이 달라집니다. 바람을 오롯이 맞아들여서 온몸을 활활 태울 수 있으면 엄청난 힘이 솟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맞아들이지 못해 온몸이 불타오르지 못한다면, 아파서 앓아눕는 모습이 되지요. 아파서 드러누운 사람은 누구나 숨을 제대로 못 쉬어요. 아픈 사람은 바람을 제대로 못 마십니다. 튼튼한 사람은 숨을 아주 빠르게 거칠게 신나게 재미나게 기쁘게 많이 들이마십니다. 우리는 ‘밥’이 아닌 ‘바람’으로 움직이는 몸입니다. 바람이 있어야 헤엄을 치고 일을 하며 연장을 다루고 손을 놀리고 생각을 짓습니다. 잘 모르겠다면 운동선수를 보셔요. 운동선수는 운동하는 사이에 밥을 먹지 않습니다. 땀을 많이 흘려 물을 마시기는 하지만, 운동선수는 바람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운동량이 달라집니다. 여느 일꾼도 이와 같아요. 숨(바람)을 어떻게 골라서 한꺼번에 힘을 모아 연장을 다루느냐에 따라 일매무새가 달라집니다. 시골에서 호미나 삽이나 괭이로 땅을 쫄 적에도 숨(바람)을 찬찬히 골라야 정갈하면서 수월하게 논밭을 갈 수 있습니다.


  휘감던 바람이 휘돌며 나올 적에 휘파람이 됩니다. 바람에는 아무 빛깔이나 무늬가 없다고 할 만한데, 우리가 올려다보는 하늘은 늘 파랗습니다. 바닷물은 하늘빛을 받아들여 하늘처럼 파랗습니다. 바람에는 아무 빛깔이나 무늬가 없다지만, 하늘을 이루는 기운이 바로 바람이기에, 바람빛은 파랑이라 할 만합니다. “파란 바람”을 마시는 몸이고, 우리 몸이 파란 바람을 마시다 보니, 우리 몸을 이루는 얼거리는 “파란 거미줄”과 같습니다. ‘파람’은 ‘휘파람’을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한겨레 뱃사람은 ‘새·하늬·마·높’이라는 곳이름(방향 낱말)을 썼습니다. 한국말로는 새(동)와 하늬(서)와 마(남)와 높(북)입니다. 어느새 이 한국말은 자취를 감추고 마는데, 이 한국말이 자취를 감추도록 ‘동서남북’이라는 한자말만 쓰게끔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이 내모는 까닭이 있으리라 느낍니다.


  네 갈래 바람 가운데 마녘(남녘)에서 부는 바람은 ‘마파람’입니다. ‘마바람’이 아닙니다. 왜 남녘바람만 ‘파람’일까요? 오늘날 사람으로서는 아주 오래된 낱말에 얽힌 수수께끼를 알 수 없지만, 남녘바람이 어떤 기운인가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남녘바람이란, 그러니까 너른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와서 여름과 첫가을을 밝히면서 보듬는 바람입니다. 이 땅에 따스하고 넉넉한 기운을 북돋우는 바람이 ‘마파람’입니다.


  휘파람은 무엇일까요? “노래가 되는 바람”이 휘파람입니다. 내가 스스로 받아들여서 내뿜는 바람을 노래로 바꿀 적에 ‘휘파람’입니다. 우리 삶터는 마파람을 마시면서 싱그러운 숲으로 피어나고, 우리 몸은 휘파람을 불면서 새롭게 깨어납니다. “파란 바람”이 들과 숲을 푸르게 가꿉니다. “파란 바람”이 우리 몸과 마음을 푸르게 짓습니다. 4348.2.2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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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1 고요누리



  고요한 곳에는 소리도 몸짓도 없습니다. 고요한 터에는 노래도 춤도 없습니다. 고요한 자리에는 눈물도 웃음도 없습니다. 고요한 삶에는 이야기도 사랑도 없습니다. 그런데, 고요한 곳에는 이 모두가 함께 있습니다. 어찌 된 셈일까요?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누리에 모든 것이 함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이 새롭게 자랍니다. 모든 것이 없기에 어느 것이든 새롭게 태어납니다. 어떠한 것이든 홀가분하게 내려놓아 씨앗이 되도록 땅에 심었기에, 이 땅에서는 이 모든 새로운 숨결이 천천히 거듭납니다.


  ‘고요누리’입니다. 고요누리는 ‘가능성’이자 ‘제로포인트’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점이면서 모든 것이 싹틀 수 있는 바탕입니다. 씨앗이면서 온누리입니다. 삶이면서 죽음입니다.


  우렁차게 지르는 소리라야 다른 사람이 듣지 않습니다. 말 없는 말을 마음속에 담아도 모든 사람이 듣습니다. 꽥꽥 목청을 돋아야 저 먼 데까지 소리가 퍼지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마음자리에 고요한 숨결을 씨앗으로 심으면, 이 씨앗은 별누리 모든 숨결한테 한꺼번에 퍼져서 그야말로 기운차고 곱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몸짓이 되어야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몸짓으로 보여주어야 삶을 밝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 이곳에서 바로 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몸짓이 있더라도 이 몸짓을 이끄는 생각이 없으면 부질없는 움직임이나 몸짓일 뿐입니다. 나 스스로 키우거나 살찌우거나 북돋우거나 보듬는 생각이 없다면, 어떠한 움직임이나 몸짓도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이 땅에 씨앗을 심지 않고 비료와 농약과 항생제를 뿌리고 또 뿌린들 아무것도 안 돋습니다. 이 땅에 씨앗을 심지 않고 물만 주거나 볕만 잘 들도록 한들 어떠한 것도 안 나옵니다.


  이 땅에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비료도 농약도 항생제도 끌어들이지 마셔요. 이러한 것은 어느 한 가지조차 없어도 됩니다. 씨앗을 틔워서 키우는 기운은 비료도 농약도 항생제도 아닙니다. 종교도 철학도 교육도 학문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예술도 ‘사랑’이라고 하는 씨앗을 틔우지 못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씨앗도, ‘이야기’라고 하는 씨앗도, 노래와 춤과 웃음이라고 하는 씨앗도, 다른 어느 것으로도 틔우지 못합니다.


  고요한 넋이 되어 심는 씨앗에서 모든 것이 자랍니다. 고요한 숨결이 되어 바라보는 씨앗 한 톨을 이 땅(마음)에 심기에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씨앗 한 톨은 늘 기다립니다. 씨앗 한 톨은 이 씨앗을 우리가 손수 이 땅(마음)에 심는 날까지 고요하게 기다립니다. 씨앗 한 톨은 내 손길을 거쳐서 바람을 타고 이 땅(마음)으로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내 손길과 바람을 누린 씨앗은 흙(땅/마음) 품에 안겨서 포근하면서 아늑하게 잠듭니다. 포근하고 아늑하게 잠들면서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꿈을 꾸기에 ‘씨앗’이라고 하는 허물을 비로소 벗으면서 ‘나비’로 깨어나듯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첫누리(1차 의식)가 새누리(2차 의식)입니다. 첫걸음(비기닝)이 새걸음(어드밴스)입니다. 첫걸음을 떼는 첫누리에서 한누리(1차 단계)를 밟습니다. ‘한누리’는 아름답지요. 좋음과 싫음도, 미움과 살가움도, 전쟁과 평화도, 아이낳기와 살곶이도, 지구별 사회에서 일어나거나 터지는 모든 일과 놀이는 다 아름답지요. 그러나 한누리에만 머물 수 없어요. ‘두누리(2차 단계)’로 갑니다. 차분한 곳인 두누리로 갑니다. 사회를 이루고 모임을 엮습니다. 두누리는 한누리와 대면 한결 낫다 싶지만, 두누리에만 머물 수 없어요. 해님이 깃드는 ‘세누리(3차 단계)’로 갑니다. 세누리에서 살짝살짝 놀라운 모습을 엿볼 수 있을 텐데, 세누리에만 머물 수 없어요. 우리는 기쁘게 ‘네누리(4차 단계)’로 갑니다. 네누리에서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사랑을 마주합니다. 너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인 사랑을 마주하고, 너와 나는 둘이지만 하나인 사랑을 만납니다. 이윽고 내 몸과 마음에서 온힘을 뽑아내는 터전인 ‘닷누리(다섯누리/5차 단계)’로 갑니다. 닷누리에서 마음껏 힘껏 새로움을 누립니다. 이윽고 ‘엿누리(여섯누리/6차 단계)’로 갑니다. 힘이 아닌 차분한 숨결로도 얼마든지 모든 것을 이루면서 다스릴 수 있는 거룩한 빛을 만납니다. 이리하여 ‘일곱누리(7차 단계)’에 닿습니다. ‘고요누리(제로포인트)’에서 씨앗 한 톨을 심은 우리는 한누리부터 일곱누리까지 찬찬히 걷습니다. 고요한 일곱누리에 닿아서 가없고 끝없는 누리에서 부는 바람을 쐽니다.


  바람을 먹고 바람을 마십니다. 바람을 불러 바람노래가 됩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바람누리’에서 우리가 가는 곳은 지구라는 별이 깃든 ‘온누리’요, ‘별누리’입니다.


  가슴에 빛을 담습니다. 빛누리에 섭니다. 빛은 ‘까만누리’에서 새롭게 퍼집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씨앗 한 톨이 되는 고요누리에 닿습니다.


  한누리는 흙누리입니다. 두누리는 꽃누리입니다. 세누리는 해누리입니다. 네누리는 하늘누리입니다. 다섯누리는 알(열매)누리입니다. 여섯누리는 꿈(구름)누리입니다. 일곱누리는 씨(씨앗)누리입니다. 홀가분하게 흐르고, 신나게 오가는, 고운 하루입니다. 삶을 마음껏 누려요. 우리 ‘삶누리’를 기쁘게 가꾸어요.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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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0 온눈



  오늘날 한국에서 나오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온’을 “전부의”나 “모두의”로 풀이합니다. 아주 잘못된 풀이라 할 수 있고, 아주 그릇된 풀이라 할 만하며, 아주 엉터리로 붙인 풀이일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은 이런 낱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40년에 나온 《문세영 조선어사전》을 살피면, ‘온’을 “= 온통”으로 풀이합니다. 이 또한 어설픈 뜻풀이라 할 테지만, 오늘날 한국말사전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면 ‘온통’은 무엇을 가리키는 낱말일까요. ‘온통’은 첫째, “있는 모두”를 가리킵니다. 둘째, “쪼개거나 나누지 않은 덩어리”를 가리킵니다. 쪼개거나 나누지 않은 덩어리란 무엇일까요? “오롯한 것”이요, 한자말로 하자면 “온전한 것”이나 “완전한 것”입니다.


  ‘온통·온’은 왜 ‘오롯한(온전한/완전한)’ 것일까요? ‘온’은 숫자로 ‘100’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숫자 ‘100’은 한자로 ‘百’이기도 하고, ‘百’이라는 한자는 숫자로 ‘100’일 뿐 아니라 빈틈이 없는 모습(새하얗다)을나타내고, 오롯이 있거나 옹글게 있는 모습을 가리켜요. 한국말 ‘오롯이’는 한자말 ‘온전(穩全)’과 같고, 한국말 ‘옹글게’는 한자말 ‘완전(完全)’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이니, 이 땅에서 오랜 옛날부터 쓰던 한국말부터 제대로 바라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넋에 깃드는 숨결을 제대로 마주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한국말 ‘온’으로 숫자 100을 가리키려는 한국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작 백(100) 해 사이에 한국말 ‘온’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참으로 재미난 노릇입니다. 고작 ‘100’ 해 사이에 ‘온’이라는 숫자말이 사라지니까요. 왜 그러할까요? 왜 100이라는 숫자만 지나가도 우리는 우리가 수만 해에 이르도록 즐겁게 쓰던 말을 잃거나 잊을까요?


  종(노예)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이 이끄는 대로 휘둘리거나 휩쓸리면서 갇히거나 눌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끄는 대로 가지 못하고, 남이 이끄는 대로 ‘남이 시키는 짓’만 하면서 내 삶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백 해라는 나날은 사람을 슬기롭게 바꿀 수 있기도 하면서, 사람을 바보스럽게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지난 백 해에 걸쳐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잃거나 잊으면서 바보가 되었다면, 오늘부터 앞으로 백 해에 걸쳐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찾거나 헤아리면서 슬기로운 이슬떨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온’이라는 낱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잊도록 정치권력이나 사회제도나 학교교육이 자꾸 짓밟거나 들볶습니다. 이리하여, 요사이는 ‘백’이라는 한자말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하는 흐름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라 하더라도 ‘온통·온갖’ 같은 자리에서 ‘온’이 살아남습니다. 사회의식을 우리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이들은 한국사람한테 한자말을 억지로 쓰도록 밀어붙이고, 이에 따라 ‘전심(全心)’과 ‘전력(全力)’ 같은 한자말을 쓰라고 시키지만, ‘온마음’과 ‘온힘’이라는 한국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있으니, 국립국어원에서는 ‘온힘’을 사전 올림말로 다루지만 ‘온마음’은 사전 올림말로 일부러 안 다루어서 ‘온 마음’처럼 띄어서 써야 한다고 밝힙니다. 이 대목을 깊이 들여다보면 무척 무시무시한 꿍꿍이가 있는 줄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몸은 우리 마음에 따라 움직이기에, ‘마음’을 가리키는 낱말을 사람들이 덜 쓰거나 안 쓰거나 잘못 쓰거나 엉터리로 쓰도록 이끌면, 사람들 몸도 엉터리로 흐르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에는 ‘온마음’이라는 낱말도 안 실리지만, ‘온넋’이나 ‘온얼’이나 ‘온뜻’이나 ‘온머리’나 ‘온삶’이나 ‘온사랑’ 같은 낱말도 안 실립니다. 게다가 ‘온누리’와 ‘온나라’조차 한 낱말로 일부러 안 삼습니다.


  ‘온누리’란 무엇일까요? 오롯한 누리이자 옹근 누리입니다. 모자람도 빈틈도 없는 누리와 나라가 ‘온누리·온나라’입니다. ‘온누리’는 ‘우주(宇宙)’를 가리키는 오래된 한국말이기도 합니다. 왜 그러한지는 앞서 밝혔듯이, ‘모든 누리’가 ‘온누리’이니 ‘모든 터’를 가리키는 한자말 ‘우주’는 한국말로 ‘온누리’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뜻이 더 있어요. ‘온누리’는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누리입니다. 전쟁도 미움도 다툼도 시샘도 없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만한 누리가 온누리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낱말을 정치권력이나 사회제도나 학교교육은 몹시 싫어하고 사람들이 못 쓰게 가로막습니다.


  ‘온힘’을 다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언제나 ‘온마음’을 씁니다. 온마음을 써야 온힘을 낼 수 있습니다. 몸에서 온힘을 내자면, 먼저 마음에서 ‘온기운’을 써야 합니다. 온마음을 쓰면서 이웃과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눈을 뜨려 합니다. 모든 귀를 열려 하며, 모든 꿈을 꾸려 합니다. 이리하여, 온기운은 온힘을 내도록 이끌어서, ‘온눈’과 ‘온귀’가 됩니다. 온눈을 뜨는 사람은 ‘오롯한 눈(완전한 눈)’을 뜨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제3의 눈’을 뜨는 셈이고, ‘제3의 눈’이란 바로 ‘온눈’입니다.


  그런데 사람한테는 ‘셋째 눈’만 있지 않습니다. 셋째 귀도 있어요. 그래서 ‘온귀’입니다. 셋째 눈과 귀가 있으니, 셋째 몸과 머리와 팔과 다리가 있을 테지요. 이 모두 ‘온몸·온머리·온팔·온다리’입니다. 오롯이 모든 것을 쓰는 삶이란 ‘온삶’이고, 온삶일 때에는 뇌를 100퍼센트 씁니다.


  자, 이제 실마리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할 만합니다. 뇌를 100퍼센트 쓰는 일이란, 뇌를 ‘온(100)’으로 쓰는 일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정치권력과 사회제도와 학교교육으로 똘똘 뭉친 사회의식은 한국사람이 ‘온’이라는 낱말을 잊거나 잃도록 몰아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막아야, 이 나라 사람들 모두 종이 되어서 ‘정치권력과 사회의식이 시키는 짓’만 되풀이하는 굴레에 갇히거든요. 이 나라에서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배우는 얼거리는 하나도 없이, 영어 바람에 미치고 한자 지식에 짓눌리도록 하는 까닭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온꿈’과 ‘온사랑’으로 퍼집니다. 모든 것을 바라볼 뿐 아니라 꿰뚫어볼 수 있으니, 아무것에도 안 휘둘리면서 내 길을 갑니다. 온눈으로 바라보면서 온길을 걷습니다.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온빛’이 흐릅니다. 온빛이 흘러서 ‘온어둠’이 조용히 잠듭니다. 온어둠에서 새로운 삶이 태어납니다. ‘온새’라고 하지요. 온통 새롭기에 ‘온새’입니다. 온빛을 받아 온어둠에서 온새로 나아가는 온삶일 때에, 우리는 저마다 ‘온사람’으로 섭니다. 홀가분하게 삶을 짓기에 온사람이 되니, 온넋은 온바람을 타고 온곳(온갖 곳/모든 곳/온전하거나 완전한 곳)에 온씨(온갖 씨앗/모든 씨앗/온전하거나 완전한 씨앗)를 뿌립니다. 이제 온별(온 우주에 있는 별)에 환한 무지개가 뜹니다. 온겨레(온별에 있는 모든 사람)가 어깨동무를 합니다. 온나라를 이룹니다. 작은 점 ‘온’에서 비롯하여 ‘온나라’로 갑니다. 4348.2.1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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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9 그대로 있기



  ‘그대로 있기’는 쉽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할 적에, 참말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을 수 있을 텐데, 이때에 한번 생각할 노릇입니다. ‘쉬지 않고 움직이기’와 ‘그대로 있기’ 가운데 어느 쪽이 쉽거나 어려울까요? 쉬지 않고 움직이기가 어려울까요, 그대로 있기가 어려울까요?


  쉬지 않고 움직이는 까닭은 우리 몸은 ‘고인 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늘 새롭게 움직일 때에 새롭게 피어나면서 살아나기에 ‘움직여야’ 합니다. 이와 맞물려서 ‘그대로 있기’를 하는 까닭은, ‘내가 오늘 이곳에서 어떻게 있는가’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움직일 때에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지 알 수 없습니다. 내 참모습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면, 내가 지으려고 하는 삶이 어느 때에 어느 곳에서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나한테 말합니다. “그대로 있어. 그대로 가. 잘 되든 안 되든 그대로 해. 네 모습 그대로 다 괜찮아. 나를 스스로 봐.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봐. 내가 가는 이 길을 그대로 가. 내 삶을 그대로 바라봐. 그대로 있으면서 그대로 사랑해. 나는 나야. 내가 사랑하는 나를 그대로 바라보면서, 나한테 찾아오는 바람을 그대로 마시고, 그대로 뱉어.” 하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있’도록 두면서 바라볼 수 있으면, 나는 너를 ‘그대로 있는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길이라면,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을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볼 적에 내 이웃을 그대로 바라볼 뿐 아니라, 내가 선 이 보금자리와 마을과 삶터를 그대로 바라보면서 헤아리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보지 못할 적에는 이 보금자리도 이 마을도 이 삶터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얼거리나 속내나 허물을 하나도 못 헤아리고 못 깨닫습니다.


  내가 나를 ‘그대로 있’도록 둘 때에, 비로소 철이 듭니다. 그대로 있는 모습을 바라볼 때에 바람을 느끼고 햇볕을 느끼며 물과 흙과 풀을 느낍니다. 그대로 있기에 그대로 보고, 그대로 보기에 그대로 알며, 그대로 알기에 그대로 철이 들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대로 갑니다. 잘 하거나 못 하거나 따지지 않고 그대로 갑니다. 호미질이나 낫질을 처음 하느라 서툰 사람더러 ‘이렇게 해야 잘 하지!’ 하고 다그칠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그대로 하면서 나아가도록 지켜볼 뿐입니다. 늘 그대로 삽니다. 어제는 어떻게 해야 했고 그제는 어찌저찌 해야 했다고 뉘우칠 까닭이 없습니다. 어제와 그제는 지나간 내 발자국이니, 나는 오늘 이곳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면 됩니다. 옳거나 그르거나 가리지 않고 그대로 삽니다. 꼭 들어맞는 한 가지 길만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잘 들어맞지 않아도 스스로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해 보는 동안, 처음에는 어렴풋하던 그림이 비로소 환하게 트입니다. 노상 그대로 생각합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금을 긋지 않습니다. 똑똑하거나 앞서가는 사람 꽁무니를 좇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내가 선 곳에서 바람을 마시고 햇볕을 쬐며 물을 먹습니다. 나는 내가 선 곳을 기쁘게 가꾸는 길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대로 가다 보면 가시밭길이 나올 수 있고, 벼랑길이나 막다른 곳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대로 가면 됩니다. 돌아가야 하면 돌아가면 됩니다. 그대로 돌아가면 됩니다. 잘못 짚었으면 잘못 짚은 대로 바라보고 느껴서 깨달은 뒤, 이제부터 잘못 안 짚으면 됩니다. 때로는 밥을 태울 수 있고, 때로는 꼬두밥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넘어져서 무릎이 깨질 수 있고, 때로는 빈털털이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돈이 왕창 들어올 수 있으며, 때로는 곁님이 입맞춤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삶을 그대로 바라보고 맞아들입니다. 내가 겪어야 하고 치러야 하며 맞이해야 할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얼싸안습니다.


  처음부터 익숙하게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퍽 오랫동안 익숙하지 않아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대로 하면 됩니다. 공부도 훈련도 도무지 앞날이 안 보이거나 제자리걸음 같다 하더라도 그대로 하면 됩니다. 배운 그대로 하고, 본 그대로 하며, 안(깨달은)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대로 나아가면서 하나씩 새롭게 느낄 수 있고, 하나씩 새롭게 느끼기에, 시나브로 철이 듭니다.


  내가 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못미더우면 나를 ‘못미더운 그대로’ 바라보셔요. 어느 대목이 못미더운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바라보셔요. 내가 스스로 못미덥다고 해서 고개를 돌리면, 나는 내가 스스로 어느 대목에서 못미더운지 하나도 알 수 없고, 하나도 알 수 없으면 실타래를 하나도 풀 수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믿음직하면 나를 ‘믿음직한 그대로’ 바라보셔요. 어느 대목이 믿음직한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대로’ 바라보셔요. 내가 스스로 믿음직하다고 해서 그냥 지나가면, 나는 내가 스스로 어떻게 믿음직한지 제대로 알 수 없고, 제대로 알 수 없으면 내가 나한테 새로운 수수께끼를 낼 수 없습니다.


  나를 생각하면서 그대로 갑니다. 내가 선 이곳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갑니다. 내가 있는 이곳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갑니다. 그대로 하면 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한국말을 그대로 쓰면서 살면 됩니다. 미국사람은 미국에서 미국말을 그대로 쓰면서 살면 됩니다. 미국이 마음에 들면 미국에 가서 미국말을 하면 되고, 한국이 마음에 들면 한국에 그대로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말을 하면 됩니다. 이도 저도 아닌 곳에서 헤매지 말고, 나를 그대로 보고 생각하고 살피고 받아들이고 마주하면서, 내 삶길을 그대로 두면 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천천히 사랑꽃이 핍니다. 4348.2.1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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