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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 홀가분하다, 낱사람 (자유, 개인)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쉽게 ‘자유’라는 낱말울 씁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쓰지만, 어린이도 쓰고,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두루 쓰며, 초등학교나 유치원에서도 흔히 씁니다. ‘개인’이라는 낱말도 곳곳에서 널리 씁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거나 뜻하는지 제대로 모르기 일쑤입니다.

  한국말사전을 보면, ‘自由’를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풀이하고, ‘個人’을 “국가나 사회, 단체 등을 구성하는 낱낱의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한자말은 한국사람이 지은 낱말이 아니고, 일본사람이 서양 문화와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에서 지은 낱말입니다. 일본사람은 이러한 낱말을 지으려고 퍽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서 생각을 기울였고, 한국사람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이 낱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한국사람이 이 낱말을 그대로 따랐다기보다, 일본 정치권력한테 짓눌리는 식민지 종살이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써야 한 낱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일본 정치권력 종살이를 하지 않았으면, 영어로 ‘free’나 ‘personal·individual’을 그대로 썼을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요즈음에는 그냥 영어를 쓰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한자말이 익숙하지 않으면서, 어릴 때에 일찍 영어를 만났으면 영어로 내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환경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green’이라는 영어를 쓰는 사람이 무척 많아요. 중국 한자말 ‘초록’이나 일본 한자말 ‘녹색’이 익숙하면, 이러한 낱말을 쓰고, 영어가 익숙하면 ‘그린’을 쓰지요.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이 익숙한 환경운동 사람은 거의 없어서 ‘풀빛·푸름’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러면, ‘자유’나 ‘프리’란 무엇일까요. 이런 낱말을 사회에서 받아들여 쓰기 앞서, 지난날에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떤 낱말로 이러한 기운이나 흐름을 나타내려 했을까요.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습”일까요? 그러면 “내 마음대로”는 무엇일까요?

  예부터 이 땅에서는 ‘홀가분하다’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홀가분하다’는 “홀로 가볍다”입니다. ‘홀’은 ‘홀짝’을 이루기도 하고, ‘하나(1)’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홀짝’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고 가르는 자리일 테고, ‘하나(1)’를 가리킨다면 그저 하나만 있는 모습입니다.

  그저 하나만 있기에 남을 휘두르지 않고, 내가 남한테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가 있기에 다른 것을 건드리거나 흔들지 않으며, 그저 하나이기에 너와 내가 갈리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홀(홀로)’은 오직 하나가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하나이기에 따로 무게가 없다고 여길 만하고, 이러한 느낌에 ‘가분하다(가볍다)’가 붙습니다. “홀로 가볍게 움직이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생각하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하다”라든지 “홀로 가볍게 있다”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낱말로 가리키려는 뜻이란, 한국말 ‘홀가분하다’로, 이 두 낱말은 “내가 오직 나로 서기에 내가 가볍게 움직이면서 모든 것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이라는 낱말은 “낱 + 사람”입니다. 한국말사전에서도 이 대목을 다룹니다. 그러나, 앞에 엉뚱한 꾸밈말을 붙이지요. ‘낱 + 사람’인 ‘낱사람’은 나라나 사회 따위를 이루는 ‘낱’이 아닙니다. “덩어리에서 떼어낸 하나”가 ‘낱’이고 “하나가 덩어리에서 떨어지면”서 ‘낱’입니다.

  ‘개인주의’라고 할 적에는 나라·사회·모임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나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모습이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낱사람’은 덩어리에서 떨어지는 사람인 한편, 덩어리에서 나를 떨어뜨린 사람입니다. 한덩어리로 있던 곳에서 한 사람을 떨어뜨려서 ‘낱’이 된 사람이고, 한덩어리로 있던 곳에서 나를 녹여서 없애려 하기에 녹아서 없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스스로 떨어져 ‘낱’이 된 사람입니다. 4348.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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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 - 깊이 생각하다



  우리는 누구나 여러모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저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깊이 생각하기도 하며, 얕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넓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좁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크게 생각하거나 작게 생각할 만하고, 함부로 생각하거나 살가이 생각할 만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면, ‘깊은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깊이 생각하기에 ‘깊은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깊은생각’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낱말을 안 쓰기 일쑤입니다.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기를 안 바라는지, ‘깊은생각’이라는 낱말은 안 쓰고 ‘숙고(熟考)’라는 한자말을 써요.


  한자말 ‘숙고’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곰곰이 잘 생각함”을 뜻한다 하고, ‘熟’은 ‘익다’를 가리켜요. 곧, “익은 생각”이 ‘깊은생각’은 셈이니, 익지 않은 날것에 찬찬히 불기운을 넣어서 익히는 일을 빗대어 ‘숙고’라 하고, 익지 않은 생각이 익을 수 있도록 찬찬히 따순 숨결을 불어넣는 일이 ‘숙고’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깊이 할 적에는, 말 그대로 ‘깊은생각’일 수 있으며, ‘익은생각’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로 쓰면 내 마음을 한결 또렷하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저 깊이 생각하기에 ‘깊은생각’이고, 생각이 잘 익어서 따스하도록 하기에 ‘익은생각’입니다. 생각은 ‘넓은생각’이나 ‘너른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큰생각’이나 ‘거룩생각’이나 ‘훌륭생각’이 될 수 있어요.


  생각은 어느 때에 괴롭거나 힘든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때에는 ‘고민(苦悶)’이라고도 하는데, 이 한자말은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애를 태움”을 뜻한다고 해요. ‘苦’는 “괴로움”이고, ‘悶’은 “번민”이에요. 그런데 ‘번민(煩悶)’은 “괴로움”으로 고쳐쓸 한자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밑을 살피면, 한자말 ‘고민’은 “괴로움 + 괴로움”이 될 테지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기에 한자말을 쓰지 않고 살았습니다. ‘고민’이나 ‘번민’ 같은 낱말이 일본을 거쳐서 물결처럼 들어오기 앞서 어떤 낱말을 썼는지 헤아리면, ‘걱정’이나 ‘근심’이나 ‘끌탕’이 있습니다. 될는지 안 될는지 몰라서 애를 태우다가 그만 마음이 괴롭고 마는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인 ‘걱정·근심·끌탕’입니다.


  차근차근 돌아봅니다. 깊이 생각하면 스스로 수수께끼를 풉니다. 실마리를 스스로 얻지요. 수수께끼는 어느 똑똑한 사람이 풀어 주지 않아요. 스스로 똑똑한 마음이 될 때에 수수께끼를 낼 수 있고, 수수께끼를 풀 수 있습니다. 모든 실마리는 나한테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수수께끼를 못 풉니다. 수수께끼를 못 풀기에 수수께끼를 짓지 못해요. 수수께끼를 스스로 짓지 못하는 사람은 실마리를 스스로 못 얻는 사람이고, 실마리를 스스로 못 얻으니, 언제나 괴롭습니다. 괴로운 마음이기에 수수께끼는 늘 어렵기만 하고, 늘 어렵기만 한 수수께끼인 터라 자꾸 맴돌거나 떠돕니다.


  ‘깊은생각’은 한 가지를 놓고 자꾸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는 마음이 됩니다. ‘깊은생각’은 한 가지가 제대로 풀릴 실마리로 나아갑니다. ‘걱정’은 한 가지를 놓고 제대로 돌아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만 게으르고 말아, 실마리를 푸는 몫을 남한테 떠넘기고 싶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괴로운 데로 나아가는 걱정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든 우리 몫입니다. 좋고 나쁨은 없습니다. 다만, 한쪽은 실마리를 푸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괴롭고 아프면서 힘든 길입니다. 4348.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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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 5. 곁님과 옆지기



  곁에 있는 사람이기에 ‘곁사람’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기에 ‘옆사람’입니다. 어디로 가려고 자동차라든지 버스라든지 기차라든지 배를 탄다고 하면, 앉는 자리가 있습니다. 서서 가면 다리가 아플 테니 자리에 앉아요. 이때에 내 옆에 누군가 앉습니다. 아는 사람이 앉을 수 있고, 모르는 사람이 앉을 수 있어요. 아는 사람이 앉으면 서로 빙그레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모르는 사람이 앉으면 가만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옆에 앉는 사람이나 옆에 있는 사람이나 옆에 서는 사람은 그저 ‘옆사람’입니다. 더 반갑다거나 더 놀랍다거나 더 새롭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옆사람’이에요. 옆사람은 나한테 아무것도 일으키지 않고, 나도 옆사람한테 아무것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둘은 그예 같은 자리에 나란히 있을 뿐입니다.


  문득 내 마음이 허전하거나 쓸쓸하거나 아픕니다. 문득 내 마음이 기쁘거나 즐겁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느 마음이든 내가 이 마음을 나누고 싶기에 두리번두리번 살핍니다. 내 곁에서 따사로우면서 포근하고 넉넉하다가 너그러운 누군가를 그립니다. 이제, 내 곁에 ‘곁사람’을 맞아들입니다. 곁사람은 나한테 따사롭거나 포근하거나 넉넉하거나 너그러운 숨결입니다. 이런 사람을 한자말로 가리키자면 ‘친구’입니다. 오래된 한국말로 이런 사람을 가리키자면 ‘동무’입니다. 동무는 언제나 우리한테 ‘곁사람’입니다. 그래서, 동무 가운데에는 어깨동무·씨동무·놀이동무·글동무·노래동무·밥동무·술동무·책동무·꿈동무·배움동무 같은 사람이 있어요. 게다가 동무는 ‘길동무’가 되기도 합니다. 길동무는 어느 때에는 나한테 길잡이가 되는데, 나도 내 길동무한테 길잡이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 기대고 감싸고 아끼기에, 어깨를 겯는 어깨동무인 이 사람은 바로 곁사람입니다.


  수많은 곁사람 가운데 내 마음속에 있는 숨결, 그러니까 내 ‘님’과 같이 오래오래 두고두고 한결같이 아끼면서 섬기고 싶은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사내와 가시내라는 굴레를 내려놓고서 함께 삶을 짓고 싶은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 그리운 사람은 ‘곁님’입니다. 곁님과 나는 한마음이자 한몸입니다.


  ‘옆지기’는 누군가 하면, 내 옆을 둘러싸고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삶을 지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먼발치에서 내 삶을 거드는 이웃이 있어요. 그래요, 이웃이 바로 옆지기입니다. 옆지기는 바로 이웃입니다. 오래된 한국말로 하자면 ‘이웃’이 언제나 옆지기입니다.


 곁님 = 짝꿍 = 동반자

 곁사람 = 동무 = 친구

 옆사람 = 인류 = 지구사람

 옆지기 = 이웃 = 마을사람


  내가 나를 볼 적에 내 둘레를 볼 수 있습니다. 내 둘레를 내가 보면서 나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4348.1.2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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