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13 바라보기·보기



  바라볼 때에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바라보지 않을 때에는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라보기에 내 앞에 무엇이든 있고, 바라보지 않을 때에는 내 앞에 무엇도 없습니다.


  우리 눈은 ‘몸에 달린 눈’만 있지 않습니다. ‘몸에 달린 눈’은 지구라는 별에 사는 이 몸에 맞게 있는 눈입니다. 우리는 이웃이나 동무와 사귈 적에 ‘몸으로 사귈’ 수도 있으나, ‘몸이 아닌 마음’으로 사귈 때에 참다운 이웃이나 동무라고 말합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겉모습으로 사귈 때에는 ‘겉사귐’입니다. 마음으로 사귈 때에 비로소 ‘속사귐’이면서 ‘참사귐’입니다. 이웃이나 동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다른 사람은,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함께 지내는 사이입니다.


  사람과 사람으로서 마음으로 사귄다고 한다면, 우리한테는 ‘몸에 달린 눈’ 말고 다른 눈도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눈일까요? 바로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눈은, 내 이웃과 동무가 어떤 마음인지 읽는 눈입니다.


  왜 우리한테는 ‘마음으로 보는 눈’이 있을까요? 우리 몸뚱이는 ‘몸에 걸치는 옷’처럼 ‘넋이 깃들 수 있는 옷’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움직이는 기운은 바로 넋한테서 비롯합니다. 넋이 생각을 지어서 마음에 심으면, 마음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서 몸이 움직입니다. 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한 사람’으로 오롯이 섭니다.


  ‘보다’는 “눈을 뜰 적에 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헤아려서 알다”를 가리킵니다. ‘바라보다’는 “눈을 떠서 내 앞에 있는 것을 내 마음에 따라 헤아려서 알다”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누구나 처음에는 그냥 ‘봅’니다. 처음에는 그냥 눈을 뜨니까요. 처음에는 그냥 눈을 떠서 이것저것 두루 봅니다. 그저 봅니다. 그저 보다가 비로소 생각을 처음으로 합니다. ‘아, 나는 무엇을 볼까? 이 많은 것 가운데 내가 보려고 하는 모습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나는 스스로 ‘삶짓기(현실 창조)’로 나아갑니다. 그저 내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모습을 ‘쳐다보기’만 하겠는지, 이 모습을 내가 바라는 대로 마주하면서 새롭게 짓는 ‘바라보기’를 하려는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어떤 길로 가겠노라 하고 다짐을 합니다. 생각을 맺으면 씨앗이 나옵니다. 풀과 나무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에 열매와 씨앗을 맺듯이, 사람도 생각을 맺으면 씨앗이 나오고, 이 씨앗을 바람(숨결)에 얹어 마음에 심으면, 이제 내 둘레가 차츰 달라집니다. ‘보기’에서 ‘바라보기’로 나아갑니다.


  한자말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먼저, ‘관찰(觀察)’은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봄”을 뜻한다 합니다. ‘관찰 = 주의하여 살펴봄’입니다. ‘자세(仔細)히’는 ‘낱낱이’를 가리킵니다. 한국말 ‘살펴보다’는 “낱낱이 보다”를 뜻합니다. 그래서, 한국말사전에서 풀이하는 “자세히 살펴보다”는 겹말입니다. 잘못된 풀이입니다. 이 같은 잘못된 말풀이를 깨닫는 국어학자가 없어서 아직도 한국말사전은 엉터리이고, 이런 엉터리 한국말사전을 살펴보는 사람도 제대로 말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주의(注意)’는 “1. 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함 2. 어떤 한 곳이나 일에 관심을 집중하여 기울임”을 뜻한다 합니다. ‘주의 = 마음을 기울임’입니다.


  ‘조심(操心)’은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씀”을 뜻한다 하고, ‘집중(集中)’은 “1. 한곳을 중심으로 하여 모임 2. 한 가지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음”을 뜻한다 해요. 그러니, ‘조심 = 마음을 씀’이요, ‘집중 = 마음을 모음’입니다. ‘주의·조심·집중’은 뜻이 조금씩 다르니, 다 다르게 써도 되는데, 한국말로는 “마음을 기울이다·마음을 쓰다·마음을 모으다”인 줄 알면 됩니다.


  우리는 한국말로 생각하면서 보는 몸짓을 거의 못 익힌 채 어른이 됩니다. 학교와 사회에서는 한국말을 안 가르치거나 못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느 어른이라면 ‘관찰·주의·조심·집중’ 같은 한자말을 익히 쓸 텐데, 이런 한자말을 쓰든 말든, 말뜻을 제대로 알고 써야 합니다. 말뜻을 제대로 모르는 채 이러한 한자말을 쓰면, 그만 스스로 말길이 막혀서 마음길을 열지 못합니다.


  ‘바라보기’를 할 수 있을 때에 ‘살펴보기’를 합니다. 나 스스로 마음을 모아서 하나를 똑똑히 마주할 수 있을 때에 둘레를 두루 볼(살펴보기) 수 있습니다. 둘레를 두루 볼 수 있으면, 이제 ‘올려다보기·내려다보기·둘러보기·되돌아보기·돌아보기·뒤돌아보기·톺아보기’ 같은 여러 가지 ‘보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면서 보아야 됩니다(해 봐 돼). 하면서 보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다. ‘바라보기’란 사람이 사람으로 서는 길에서 맨 먼저 하는 일입니다. 밥을 차리려 하든, 나들이를 나서려 하든, 사랑을 꽃 피우려 하든, 씨앗을 심으려 하든, 옷을 입으려 하든, 내가 나를 바라보아야 실마리를 엽니다. 4348.2.4.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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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2 씨앗


  ‘씨앗’을 심어서 가꾸어야 나중에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꿀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거두지 못합니다. 그러니, 시골지기가 아니더라도 해마다 봄이면 씨앗을 심느라 부산하기 마련입니다.

  ‘씨앗’이 있어야 열매를 얻듯이, 연금술사가 금을 얻으려면 수수한 쇠붙이가 있어야 합니다. 수수한 쇠붙이는 씨앗 노릇을 하면서 금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연금술사 솜씨가 아무리 좋더라도, 손에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못 이루어요. 씨앗이란 모든 것을 이루는 첫걸음이자 바탕입니다.

  그래서 ‘씨앗’이라는 낱말은 “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할 수 있음”을 한자말로 ‘가능성’이라고도 가리킵니다. 그러니, 한자말 ‘가능성’은 한국말로 하자면 ‘씨앗’인 셈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옛말이 있는데, 뿌리는 마음대로 거둔다고 할 수 있고, 뿌리는 손길대로 거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씨앗을 심어도 어떤 사람은 알차게 거두고 어떤 사람은 쭉정이만 거둡니다. 같은 씨앗을 심지만 어떤 사람은 넉넉히 거두고 어떤 사람은 모자라게 거두지요. 왜 그런가 하면, 비료나 거름을 덜 주거나 지나치게 주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어떤 마음과 손길이었으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씨뿌리기와 같다는 뜻입니다. 내가 나한테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 내 삶을 스스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을 씨앗으로 심느냐에 따라 내 하루가 달라진다는 뜻이고, 내 꿈을 스스로 어떻게 지으려 하느냐에 따로 오늘 내 몸짓이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내 말씨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마음씨를 헤아려야 합니다. 내 맵씨(맵시)를 보아야 합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하늘을 가릅니다. 어미나무에서 홀로 떨어진 씨앗은, 그야말로 홀가분한 몸으로 바람을 타면서 어디로든 날아갑니다. 어미나무 곁에 머물 수 있고, 어미나무한테서 아주 멀리 떨어진 데까지 구름과 함께 날아갈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다 기쁩니다. 어디에서든 씨앗은 싹이 틉니다. 이리하여, 씨앗 한 톨은 “무엇이든, 언제나,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를 나타냅니다. 말 그대로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자리(마음밭)에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을 지어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씨앗을 바람(내 숨결)이 실어서 나르지요. 내가 심은 씨앗을 바람이 보살피지요. 내가 심은 씨앗은 바람을 마시면서 크지요. 내가 심은 씨앗은 바람 따라 춤을 추면서 곱게 줄기를 올리고 꽃대를 뻗어 새로운 열매(새로운 씨앗)를 맺지요.

  씨앗은 제 몸을 녹여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씨앗은 단단하고 야무지면서 새까만 알갱이를 ‘허물’처럼 벗고서 새로운 ‘나비’로 태어납니다. 씨앗은 스스로 ‘씨앗이라는 몸’을 벗기에 ‘새로운 열매’가 되는 길에 나섭니다. 먼저 조그맣게 싹이 돋고, 뿌리를 내리며,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우다가, 꽃을 터뜨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씨앗 한 톨에서 우주가 태어납니다. 작은 씨앗 하나에서 온누리가 열립니다. ‘씨앗’은 ‘작은 점’이면서 “할 수 있음(가능성)”이요, ‘첫걸음’입니다. 4348.2.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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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1 뭇느낌



  한국사람이 쓰는 말은 한국이라는 터에서 아주 오랫동안 이어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을 어떤 넋으로 마주하면서 어떤 말로 갈무리햇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토박이말을 살려서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적에, 말과 넋과 삶이 얽힌 실타래를 스스로 풀면서, 생각을 마음에 씨앗으로 심는 얼거리를 손수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정치권력은 으레 종교와 군대 두 가지를 일으킵니다. 종교는 예배당이라는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학교(의무교육)’라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오늘날 현대문명에서는 종교가 ‘예배당’보다는 ‘학교’라는 모습으로 불거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는 성경과 같고,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는 성직자(목사, 신부, 스님)와 같기 일쑤입니다. ‘예배당·성경·성직자’는 ‘학교·교과서·교사’라는 모습으로 살짝 겉만 꾸몄을 뿐입니다.


  정치권력은 군대로 전쟁을 부추깁니다. 정치권력이 종교(학교)와 함께 군대를 두는 까닭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 뒤 허수아비로 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학교)’는 마음을 가두는 쇠사슬입니다. 군대는 몸을 가두는 쇠사슬입니다. 마음이 갇힌 종(노예)이 되고 만 사람들은 몸도 갇히기 마련이니, 나라가 시키는 대로 ‘충성 맹세’를 하면서 목숨을 싸움터에서 버립니다. 이를 마치 ‘희생’이나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우지만, 우리 목숨은 싸움터에서 사라지라고 있지 않습니다.


  정치권력이 종교와 군대로 이웃나라를 잡아먹은 뒤에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 보셔요. 맨 먼저 하는 일이 ‘말’ 바꾸기입니다. 정치권력이 거느린 ‘말’로 이웃나라 사람들이 ‘말’을 바꾸어서 하도록 억누릅니다. 지구별 모든 정치권력은 이웃나라를 식민지(종)로 억누르면서 무엇보다 ‘말’부터 빼앗습니다.


  한국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시골(숲)에서 삶을 손수 지으면서 가꾼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많이 다쳤고, 개화기와 식민지를 지나면서 와르르 무너졌고, 해방과 군사독재를 가로지르는 사이 그만 목숨을 거의 잃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뭇’이라는 낱말은 아주 잊혀진 말이 됩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하느님’이듯이 ‘뭇’이라는 낱말은 ‘잊혀진 말’입니다.



 뭇짐승 . 뭇매 . 뭇발길 . 뭇별 . 뭇사람 . 뭇눈길(뭇시선)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 이럭저럭 몇 가지 ‘뭇’이 겨우 살아남은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참말 겨우 살아남았지요. 오늘날 한국사람이 스스로 한국말을 잊었듯이, 한국말은 간당간당 가까스로 목숨줄만 잇습니다.


  ‘뭇’은 “매우 많은”이나 “모든”을 가리킵니다. 한자에서 ‘萬’이라는 낱말이 “숫자 10000”을 가리키면서 “매우 많은”이나 “모든”을 가리키는 얼거리하고 같습니다. 한국말 ‘뭇’은 “매우 많은”과 “모든”을 함께 가리킵니다.


  그러면, ‘뭇느낌’이란 무엇일까요? 오늘날 쓰는 한자말로 다시 옮긴다면, “모든 감정”입니다. “소중한 경험”이라 할 만한 “모든 감정과 가치판단”이 바로 한국말로 ‘뭇느낌’입니다.


  우리한테 좋거나 싫거나 밉거나 반갑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예쁘거나 지저분하거나 멋지거나 좀스럽거나 이런저런 ‘감정’이나 ‘가치판단’ 같은 느낌이 있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 ‘뭇느낌’에 휩싸인 나날이라는 뜻입니다. 뭇느낌에 휩싸인 나날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말 그대로 ‘뜻깊은 하루(소중한 경험)’입니다. 뜻깊은 하루를 잘 살피면서, 이를 장작불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불꽃을 타고 홀가분하게 하늘을 가를 수 있습니다. 뭇느낌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홀가분한 마음과 몸이 되어 우리 꿈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4348.2.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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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0 철없다·철들다



  ‘철없는’ 사람을 가리켜 ‘철부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철든’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할까요? 철든 사람은 ‘어른’입니다. 철들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아이’입니다. 한국말에는 ‘아이·어른’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낱말은 사람을 나이로 따지지 않습니다. ‘철’로 따집니다. 사람을 나이로 따지는 한국말은 ‘아기·어린이·(푸름이)·젊은이·늙은이’입니다. 사람을 나이로 따지는 이 같은 낱말 가운데 ‘늙은이’는 여러모로 마음을 다치게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이든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거든요. 나이가 들어서 잘못이 아닌데,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철 안 든’ 모습이 바로 ‘늙은이’라는 낱말을 들으면서 ‘싫거나 미운 마음(감정)’이 피어나도록 합니다.


  ‘철’이라는 낱말은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한테 대단히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예부터 지구별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만, 사람은 흙과 함께 살아요. 고기를 먹어도 흙에서 자라는 고기를 잡아서 먹고, 곡식이나 열매나 남새를 먹어도 흙에서 거둔 곡식이나 열매나 남새를 먹습니다. 한겨레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겨레는 ‘철’을 알아야 합니다. 철을 모르면 살 수 없습니다. 철을 알아서,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생각이 깬’ 사람이거나 ‘생각이 열린’ 사람입니다. 제대로 바라보아서 배운 사람이 바로 ‘철든 사람’인 ‘어른’입니다. 제대로 바라볼 줄 몰라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바로 ‘철없는 사람’인 ‘철부지’입니다.


  철을 모르면 겨울에 얼어죽거나 굶어죽습니다. 철이 들지 않으니 봄에 아무 일을 안 합니다. 철을 모르거나 잊은 채 노닥거리기만 하면(놀이가 아닌 노닥거림을 하면), 제 밥과 옷과 집을 손수 건사하지 못합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열 살 언저리가 철이 드는 나이입니다. 열 살은 대단히 뜻있습니다. 그런데, 열 살을 지나 열다섯 살이 되어도 철을 모르면 손수 밥을 못 짓고 옷도 못 지으며 집도 못 짓지요.


  오늘날 사회와 교육과 문화를 보셔요. 중·고등학교를 다닌다는 푸름이(청소년) 가운데 설거지조차 못 할 뿐 아니라 밥도 못 짓는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이 되어도 집살림을 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 철부지이면서 ‘애늙은이’입니다.


  철이 들어야 슬기롭습니다. 철이 들지 않으니 슬기롭지 않습니다. 머리가 좋기만 해서는 살지 못합니다. 똑똑하기만 해서는 밥을 챙겨 먹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람과 해와 물과 흙과 풀과 나무를 모두 제대로 바라보아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철이 들 때에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될 때에 시나브로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길’을 걷습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비로소 사람이 되는 길을 걷습니다. ‘어른’은 사람으로 되는 길을 걸을 만한 몸과 마음이 된 사람입니다.


  아이는 어른으로 자라려 합니다. 어른은 사람으로 가려 합니다. 이러한 흐름과 얼거리가 바로 지구별에서 함께 사는 ‘뭇목숨’이 걷는 길입니다. 4348.1.3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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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9 좋아하다·좋다·그리다·사랑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아주 자주 쓰지만, 정작 말뜻을 제대로 모르거나 한국말사전에조차 엉터리로 말뜻을 달아서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구나 싶은 낱말로 ‘사랑’이 있습니다. 먼저 한국말사전을 보면, ‘사랑’을 “1.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어머니 사랑) 2.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나라 사랑) 3.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이웃 사랑) 4.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사랑을 고백하다) 5.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마음 (사랑을 불태우다) 6. 열렬히 좋아하는 대상 (내 첫 사랑)”처럼 여섯 가지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 풀이 가운데 빠져야 할 풀이가 몇 가지 있습니다. 4번 풀이와 5번 풀이가 빠져야 하지요. 두 가지 풀이는 오늘날에 갑작스레 생긴 풀이일 뿐 아니라, ‘사랑’이 담는 뜻을 아주 흐립니다. 그러면, ‘사랑(사랑하다)’이란 무엇일까요?



1. 어떤 사람·넋·숨결·마음을 무척 아끼고 살뜰히 여기다

 - 아이를 사랑하는 어버이 마음과 어버이를 사랑하는 아이 마음은 같아요

 - 사랑을 고이 담아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놀지요

2. 어떤 것을 무척 아끼고 살뜰히 다루며 즐기다

 - 할머니는 숲을 사랑하고 할아버지는 바다를 사랑하셔요

 - 다 함께 평화를 사랑하면서 어깨동무를 하기를 바라요

3. 서로 깊고 넓게 생각하면서 살뜰히 아끼고 믿다

 -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 나한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4. 이웃이나 동무를 돕거나 따뜻하게 마주하다

 -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따뜻하고 너그럽지요

 - 힘들어 하는 동무한테 손길을 내미는 사랑

5. 애틋하게 귀여운 사람·아기·짐승·숨결을 일컫는 말

 - 할머니는 나를 보면 “우리 사랑” 하면서 부르셔요

 - 우리 집 고양이는 깜찍한 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낱말에는 ‘가치판단’이나 ‘감정’이 깃들지 않습니다.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뜻과 느낌에서 벗어나는 말풀이를 섣불리 ‘사랑’이라는 낱말에 끼워넣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사랑 4’나 ‘사랑 5’는 무엇일까요? 남녀(또는 남남이나 녀녀) 사이에 애틋하게 흐르는 마음은 ‘좋아하다’입니다. ‘사랑 4’로 쓸 뜻이나 느낌이 아닌 ‘좋아하다’로만 적어야 합니다. ‘사랑 5’는 무엇인가 하면 ‘살섞기’입니다.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마음”은 언제나 ‘살섞기’나 ‘살 비비기’나 ‘살갗 쓰다듬기’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모습이나 몸짓은 아주 다른 낱말로 가리켜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이 땅에서는 모두 네 가지 흐름에 따라 마음이 나타납니다. 네 가지 흐름이라고 나눌 만하지만, 어느 흐름이 더 높거나 낮지 않습니다. 그저 흐름일 뿐입니다. 이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1. 좋아하다 

 2. 좋다

 3. 그리다

 4. 사랑(사랑하다)


  ‘좋아하다’는 기쁨과 슬픔이 있는 마음이요, 괴로우며 신나는 느낌이 있는 마음입니다. 아프기도 하다가 즐겁기도 합니다. 시샘이라든지 미움 같은 마음도 있고, 반가움이나 고마움 같은 마음도 있습니다. “서로 이끌리는 마음”이란 ‘좋아하다’입니다.


  ‘좋다’는 ‘좋아하다’와 사뭇 비슷하다 할 만하지만, 한 걸음 나아간 마음을 가리킵니다. ‘좋다’고 할 적에는 느낌(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너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적에는 ‘좋아하다’요, 너를 참으로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훌륭하게 느낀다고 할 적에는 ‘좋다’입니다. ‘좋아하다’라는 느낌일 적에 두 사람은 짝짓기나 살섞기만 할 수 있습니다. ‘좋다’라는 느낌일 적에 두 사람은, 이를테면 ‘한결같은 믿음(영원한 우정)’이 됩니다.


  ‘그리다’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서로서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리하여, 님을 그린다고 말하고, 꿈을 그린다고 말하며, 그대를 그린다고 합니다. ‘좋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마음이 바로 ‘그리다’입니다. ‘그리다’라는 마음이 될 수 있으면, 두 사람은 서로 거룩합니다. 서로 차분하게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좋아하다’와 ‘좋다’와 ‘그리다’를 지나서 넷째 흐름입니다. ‘사랑’이 되면, 가치판단이나 감정이나 사회의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름다움과 거룩함까지 넘어서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가없이 넓으면서 끝없이 깊은 마음결이 바로 ‘사랑’입니다.


 1. 좋아하다 → 짝짓기 . 살섞기

 2. 좋다 → 믿는 마음 . 차분한 생각

 3. 그리다 → 거룩한 숨결 . 아름다운 빛

 4. 사랑(사랑하다) → 가없는 넋 . 너른 바람


  사회나 문학이나 종교나 정치나 교육이나 예술 같은 곳에서 함부로 잘못 쓰는 ‘사랑’이라는 낱말에 휩쓸리거나 휘둘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아무 자리에나 아무렇게나 쓰는 낱말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좋아하다’라는 느낌으로 가리켜야 하는 데에서 으레 ‘사랑’이라는 낱말을 함부로 씁니다.


  덧붙인다면, ‘좋아하다’일 때에는 ‘팬클럽’입니다. 팬클럽은 자칫 ‘우상’이나 ‘아이돌’이 되고 맙니다. 예배당에 다니는 퍽 많은 분들은 ‘아무개 팬클럽’처럼 종교에 휘둘립니다. 정당선호도 조사나 국민투표는 거의 ‘좋아하다’ 테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믿는 마음”이나 “차분한 생각”을 가리키는 ‘좋다’는 종교하고 동떨어집니다. 성직자나 교사 가운데 ‘좋아하다’를 넘어선 사람은 여러모로 똑똑합니다. 어느 한쪽에 안 치우치지요. 이런 분들은 삶을 ‘좋다’라는 눈길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다’일 적에는 둘레를 환하게 밝히는 빛이 우리한테서 저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님 그리기’를 할 줄 아는 마음인 사람은 참으로 거룩하다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마음이 된다면, 모든 것을 녹이기에, 아픔도 미움도 모두 녹입니다. 사랑일 수 있을 때에, 예부터 흔히 일컫는 “할머니 손은 약손”이 됩니다. 바로 사랑스러운 손길이기에 아픈 데를 깨끗하게 낫게 해 줍니다. 사랑으로 지은 밥이 사람을 살리고, 사랑으로 들려주는 말이 생각과 마음을 곱게 보듬습니다. 4348.1.3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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