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48 가는 말, 오는 말



  나한테서 나오는 말은 내가 손수 길어올립니다. 나한테 오는 말은 네가 손수 길어올립니다. 나는 네 말을 듣고 나서 내 말을 길어올릴 텐데, 네가 어떤 말을 나한테 하지 않더라도 ‘내 말’을 하기 마련입니다. 네가 어떤 말을 했기에 꼭 ‘이 말’을 하지 않아요. 네가 저런 말을 했으니 나도 그에 맞추어 ‘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늘 ‘내가 하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네 모습’에 맞추어 말을 꺼냅니다. 이때에는 ‘정작 내가 하려는 말’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네 모습에 맞추거나 네가 꺼낸 말에 따라서 ‘내 말’을 한다면, 이 말은 ‘휘둘리는 말’이거나 ‘휩쓸리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뱉고 나면 누구나 아차 잘못했구나 하고 느끼면서 스스로 뉘우칩니다.


  우리는 왜 스스로 뉘우칠 만한 말을 할까요?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나와 마주한 ‘너’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너와 마주한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네가 나한테 어떤 말을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하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내 모든 마음을 쏟아서 하려는 말을 바람처럼 들려주어야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은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서 내보낸 구정물은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옵니다. 물 한 방울은 돌고 돌아서 다시 우리 집으로 와요. 내가 버린 쓰레기는 돌고 돌아서 언제나 우리 집으로 옵니다. 한국 옆에 있는 중국에서 모랫바람이 분다는데, 이 모랫바람은 지구별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중국으로 가요. 한국에서 버리는 쓰레기는 바닷물을 타고 일본으로 갑니다. 이 쓰레기는 다시 돌고 돌아서 한국으로 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 탓’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탓하려면 ‘내 탓’을 해야 합니다. 우리 집에서 이루어 둘레로 내보낸 대로 우리 집으로 돌아와요.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고스란히 나한테 와요. 이를 빗대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합니다.


  ‘가는 말’이란 ‘내가 하려는 말’입니다. 남(너)한테 맞추어서 하는 말이 ‘가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나를 제대로 생각하면서, 나를 제대로 사랑하려는 말이 바로 ‘가는 말’이며 ‘내 말’이고 ‘내가 하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아서 사랑하고 깊고 넓게 생각해서 말을 들려준다면, 이 말을 듣는 너(남)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마음을 넓고 깊게 열어 따사로운 사랑을 실어서 들려주는 말’을 들은 너(남)는 어떤 마음이 되어서, 나한테 ‘이녁 말(네 말)’을 들려줄까요? 이녁(너)도 이녁 마음속에서 길어올린 깊고 넓으면서 따사로운 사랑으로 가득한 말을 나한테 들려줄 테지요.


  겉보기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말이 ‘고운 말’이 아닙니다. 마음 깊이 사랑을 실어서 들려주려는 말이 곱습니다. 마음을 넓게 보듬으면서 푸른 꿈으로 짓는 말이 곱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오롯이 너한테 보냅니다. 너는 네 마음을 옹글게 나한테 보냅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사귈 수 있을 때에 어깨동무를 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지 못하면 어깨동무를 못 합니다.


  ‘어깨동무’는 ‘마음동무’입니다. 마음동무는 ‘사랑동무’입니다. 사랑동무는 ‘꿈동무’요 ‘이야기동무’입니다. 꿈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동무는 ‘삶동무’입니다. 아름다운 삶으로 함께 나아가려는 씩씩하고 어여쁜 ‘길동무’입니다. 4348.3.5.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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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7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거움’과 ‘기쁨’은 거의 같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즐거움은 마음이 가벼우면서 좋은 느낌을 ‘내 몸으로 품는’ 모습이고, 기쁨은 마음이 가벼우면서 좋은 느낌을 ‘내 몸 바깥으로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즐거움은 남한테 드러내지 않으면서 가벼운 모습이라면, 기쁨은 남한테 드러나도록 가벼운 모습입니다.


  ‘괴로움’은 마음이 가볍지 못하면서 이곳저곳에 마구 휩쓸리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즐거움·기쁨’은 마음이 가벼운 모습이요, ‘괴로움’은 마음이 무거운 모습입니다. 마음이 가볍기에 ‘홀가분한’ 삶이 되어 즐겁거나 기쁩니다. 마음이 무겁기에 내가 마음을 기울여야 할 곳을 모르는 채 그저 짓눌리기만 하면서 삶이 메마르거나 주눅이 듭니다.


  즐겁거나 기쁠 적에는 몸과 마음이 모두 홀가분하기에, 마치 나비나 새처럼 하늘을 신나게 가르면서 바람을 타고 훨훨 날 수 있습니다. 괴로울 적에는 어느 일이나 놀이를 하든 그저 무거우니까, 힘이 들고 쉽게 지칩니다. 나른하거나 찌뿌둥하면서 짜증이나 골이나 성이 자꾸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괴로우면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바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즐거운 사람은 늘 하늘을 새롭게 올려다봅니다. 기쁜 사람은 언제나 바람을 새롭게 마십니다. 하늘을 새롭게 올려다보면서 늘 하늘빛으로 물듭니다. 바람을 새롭게 마시면서 언제나 고운 숨결로 젖어듭니다. 하늘바람으로 몸을 다스릴 적에는 한결같이 하늘바람으로 지냅니다. 이와 달리,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하늘을 그예 올려다보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움이란 없다고 여깁니다. 새로움은 남이 나한테 주는 선물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속에서 길어올려야 하지만, 이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괴로운 나머지 ‘늘 마시는 바람(숨)’을 느끼지 못해, 바람결도 숨결도 내 것으로 가누지 못해요. 이때에는 내 ‘마음결’이 제대로 설 자리를 잃습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길(눈결)이 됩니다.


  그런데, 즐거움과 괴로움은 ‘한 사람한테 함께 있는 앞모습과 뒷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실마리 때문에 즐겁고, 아주 조그마한 실타래 때문에 괴롭습니다. 아주 작은 눈짓 하나로 즐거우면서, 아주 작은 몸짓 하나 때문에 괴롭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왜 어느 일을 놓고는 즐겁게 받아들이고, 어느 일을 놓고는 괴롭게 여길까요?


  기쁨은 기쁨을 끌어들입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을 끌어들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시샘은 시샘으로 이어집니다. 걸음마다 새로우니 자꾸 새걸음을 걷고, 걸음마다 무거우니 자꾸 제자리걸음입니다.


  ‘즐겁고 싶다’고 생각한대서 즐거운 삶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안 즐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즐거운 줄 모를 뿐입니다. 즐거움을 바라보지 않기에 즐거운 줄 모릅니다.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거나 기쁨을 마주할 수 있으면, 사랑과 꿈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괴로움이 나한테 끔찍하거나 싫은 것이 아니라, ‘괴로움’은 내가 이 삶에서 누리거나 겪는 여러 가지 징검돌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러면서, ‘즐거움·기쁨’도 내가 이 삶에서 찾거나 만나는 여러 가지 징검돌 가운데 하나인 줄 알아차립니다.


  사랑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나중에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따로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 그대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기에 사랑은 늘 아무런 토(조건)를 달지 않’습니다. 아무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일 때에 삶을 제대로 바라봅니다.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사랑일 때에 삶을 제대로 마주하면서, 내가 나답게 섭니다. 다시 말하자면, 즐거움이라서 더 좋거나 낫지 않고, 괴로움이라서 더 나쁘거나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두 가지는 모두 삶을 이루는 조각입니다. 이 조각을 곱게 여겨 녹일 수 있으면, 우리는 찬찬히 가없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4348.3.4.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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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6 ‘걸음마’와 ‘걸음’



  모든 아기는 걸음마를 디디면서 이 땅에 새롭게 서려 합니다. 걸음마는 아직 걸음이 되지 못한 몸짓이지만, 아기는 저를 낳은 어버이처럼 걷겠노라 하는 꿈을 키우니, 씩씩하게 두 다리로 서서 이 땅을 디디려 합니다. 아기는 제 힘을 써서 제 몸으로 우뚝 서려 합니다. 홀로 씩씩하게 서려 합니다. 그러니까, ‘홀가분하’게 서려고 ‘걸음마’를 뗍니다.


  아기가 ‘첫’ 걸음마를 뗀 뒤에는 ‘새’ 걸음마를 떼려고 애씁니다. 걸음마가 날마다 새롭도록 애씁니다. ‘첫걸음마’는 언제나 ‘새걸음마’로 나아갑니다. 걸어 보려고 애쓰고 힘쓰고 용쓰면서 나중에는 드디어 ‘걸음’이 됩니다. 어버이 손을 잡지 않고도 제법 먼 길을 혼자 걸어서 오갈 수 있습니다. 이때에 비로소 ‘걸음’이라고 합니다.


  걸음마를 떼면서 걸음을 할 수 있는 아이는, 맘마를 떼면서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걸음마요 맘마입니다. ‘밥’이 아닌 ‘맘마’입니다. 밥처럼 지어서 밥처럼 먹으라고 하는 맘마입니다. 왜냐하면, 아기는 이가 얼마 안 돋거나 없으며, 아이는 이가 아직 제대로 안 돋았기 때문입니다.


  아기와 아이가 떼는 걸음마는, 어른으로 치자면 ‘훈련’이라 할 만합니다. 어른도 어떤 낯선 일을 처음으로 할 적에는 서툴거나 어수룩합니다. 낯설기에 익숙하지 않아요. 어른도 일손을 익숙하게 하려면 하고 또 하고 다시 해야 합니다.


  손놀림이나 몸놀림이 익숙해지면, 이제부터는 새롭게 하려고 나섭니다. ‘똑같이’ 하려고 나서는 삶이 아닙니다. ‘새롭게’ 하려고 나서는 삶입니다. 아이들이 걸음마를 익히는 까닭은 ‘어른과 똑같이’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어른처럼 걸음을 떼’고 나서 ‘내 나름대로 새롭게 걸음을 지으’려는 뜻입니다. 어른들이 낯선 일을 마주하면서 손놀림과 몸놀림을 익숙하게 가다듬으려 하는 까닭도, 어른들 나름대로 ‘이 일을 새롭게 맞아들여서 새롭게 누리’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걸음마나 맘마를 거칠까요? 왜 ‘훈련’을 할까요? ‘삶짓기’를 하려는 뜻입니다. 삶을 지으려는 뜻으로 ‘걸음마(첫 단추)’를 떼려 합니다. 첫 단추를 꿰면 다음 단추를 꿸 수 있고, 단추를 모두 꿰면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옷입기’는 ‘삶짓기’와 같습니다. ‘걸음 떼기’는 ‘삶짓기’와 같아요. 나한테 찾아드는 새로운 하루(오늘)를 그야말로 새롭게 맞이해서 새롭게 누리려는 마음으로 첫걸음을 떼려 하고, 이 첫걸음이 언제나 새걸음이 되도록 몸을 움직입니다.


  삶을 지으려고 하는 걸음마(훈련)입니다. ‘잘 걷는 선수’가 되려고 걸음마를 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틀’에 갇히려고 똑같은 걸음걸이를 익히려 하지 않습니다. 두 다리를 놀려 제대로 걸으려고 하는 까닭은, 내 마음과 몸을 제대로 다스려서 내 삶을 제대로 지을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걸음이 아닌 걸음마는 여러모로 서툽니다. 아직 삶이 아닌 훈련은 이모저모 서툽니다. 서툴지만 빙긋빙긋 웃으면서 걸음마를 떼려 합니다. 서툴지만 활짝활짝 웃으면서 훈련을 하려 합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삶짓기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우리 모두 삶짓기를 이루는 길로 씩씩하게 새 걸음을 내딛습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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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5 삶은 춤노래



  삶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한마당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틀에 박힌 춤이나 노래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스스로 기쁨을 가꾸어 누리는 춤이요, 손수 즐거움을 지어서 나누는 노래일 때에, ‘삶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한마당’으로 됩니다. 기쁨이 없는 춤이나 즐거움이 사라진 노래라 한다면, 쳇바퀴처럼 똑같은 굴레에 갇혀서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춤과 노래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춤만 출 수 없고, 노래만 부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운차게 추는 춤이라도 노래가 함께하기 마련이고, 아무리 조용하게 부르는 노래라도 춤이 같이하기 마련입니다. 춤과 노래는 늘 함께 있습니다. 둘은 다르게 있는듯이 보이지만, 언제나 하나로 움직입니다.


  오늘날 문명사회에서는 춤꾼과 노래꾼이 연예인이나 대중가수라는 이름으로 따로 있습니다. ‘뒷춤꾼(백댄서)’이라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게다가, ‘입벙긋 노래꾼(립싱크 가수)’마저 있습니다. 춤이면서 춤이 아니고 마는 오늘날 문명사회이고, 노래이면서 노래가 아니고 마는 오늘날 방송과 문화입니다. 이리하여, 제도권 입시지옥 학교에 갇힌 아이들이나 제도권 톱니바퀴 월급쟁이 회사에 갇힌 어른들 누구나, 춤이 아닌 춤과 노래가 아닌 노래에 빠져듭니다. 스스로 굴레에 갇힌 하루이니, 굴레에 가두는 춤과 노래에 젖어듭니다.


  삶을 손수 짓는 사람은 춤과 노래를 손수 짓습니다.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흙을 만지면서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은 사람은, 일하거나 놀다가 언제나 스스로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섯 살 아이도 여든 살 할배도, 일하거나 놀다가 스스러 우러나오는 노래와 춤으로 한판 멋지게 어우러집니다. 이를 가리켜 ‘한마당’이요 ‘한놀이’이요 ‘한마당놀이’라고 합니다. ‘마당놀이’라고도 하고 ‘들놀이’라고도 합니다.


  장작으로 삼을 나무를 하면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지게 가득 나무를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왜냐하면, 제 삶을 제 손으로 지으니, 스스로 신이 나서 노래가 나와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텔레비전도 없었지요. 임금님이 부르라 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는 임금님 손길이 안 닿아요. 책도 글도 모르지만, 흙을 알고 풀과 나무를 알며, 하늘과 바람을 알고, 물과 벌레와 짐승을 모두 아는 ‘숲사람(시골사람)’은 스스로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춤사위를 잇습니다.


  절구를 빻든 베틀을 밟든 노래입니다. 다듬이질을 하든 밥을 짓든 노래입니다. 아이들도 소꿉놀이를 하거나 술래잡기를 하거나 언제나 노래입니다. 삶일 때에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몸짓에서 노래와 춤이 함께 흐드러집니다.


  삶은 춤노래입니다. 춤노래는 삶입니다. 춤꾼이나 노래꾼이 된다면 삶이 아니라 굴레(제도권)입니다. 어느 하나에 얽매이는 모습은 삶과 동떨어집니다. 언제나 모두 아우르고, 늘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합니다. 삶은 두레요 품앗이입니다. 삶은 웃음이요 이야기입니다. 기쁘게 춤추고 즐겁게 노래합니다. 기쁘게 가꾸는 삶이요, 즐겁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밥을 지어 아침저녁을 차리면서 엉덩이를 실룩거리거나 어깨를 들썩입니다. 콧노래가 흐릅니다. 다 함께 까르르 웃으면서 수저를 듭니다. 이야기꽃이 핍니다. 바로 이때에 삶입니다. 삶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춤과 노래는 바로 오늘 이곳에 있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삶이듯이, 아이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춤과 노래입니다. 4348.3.5.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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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4 쓰다



  햇볕이 뜨겁거나 바람이 차서 모자를 씁니다. 돌이나 나무를 다루어 연장으로 갈고닦으면, 이 연장을 써서 새로운 것을 즐겁게 지을 수 있습니다. 하루를 써서 재미난 일을 하고 신나는 놀이를 합니다. 기운을 써서 짐을 나르고 지게를 지며 장작을 팹니다. 마음을 써서 서로 아끼고 헤아리면서 따사롭게 사랑합니다. 애를 쓰고 힘을 쓰니 두레와 울력이 기쁩니다. 나는 너한테 아름다운 말을 쓰고, 너는 나한테 고운 말을 씁니다. 먼저 떠난 이를 기리거나 그리면서 무덤을 쓰고, 몸에 새로운 기운을 북돋우려고 쓴 나물을 캐서 알뜰살뜰 밥을 짓습니다.


  한곳에 쌓은 돈은 쓰면 쓸수록 줄어듭니다. 한곳에 쌓지 않고 차곡차곡 살림을 가꿀 적에는 돈을 쓰고 또 쓰더라도 살림이 줄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은 쓰면 쓸수록 따스해집니다. 사랑은 쓰면 쓸수록 깊어집니다. 꿈은 쓰면 쓸수록 새롭게 자랍니다. 내 몫(밥그릇)만 따지면서 ‘덜기’를 하듯이 쓴다면, 내 몫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내 몫을 따지지 않으면서 즐겁게 어깨동무하는 삶을 헤아린다면, 나는 언제나 쓰고 또 쓰지만 내 몫(밥그릇)이 줄어들지 않아요. 내가 덜어서 너한테 주는 만큼(또는 더 크게) 내 다른 이웃이 나한테 마음을 써서 내 밥그릇(몫)을 채워 줍니다.


  몸이 닳아서 늙는 까닭은 몸을 함부로 쓰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즐거울 일을 찾아서 하지 않을 때에는 몸이 닳아서 늙습니다. 스스로 즐거울 일을 찾는 사람은 삶을 누리는 동안 언제나 모든 일을 홀가분하게 잘 합니다. 나이 여든이나 아흔에도 고깃배를 몰아서 바다에서 그물을 던져서 올릴 수 있어요. 나이 아흔이나 백에도 호미를 쥐거나 괭이를 잡고 흙을 갈아 씨앗을 심을 수 있어요.


  억지로 쥐어짜내려고 한다면 몸이 닳습니다. 억지를 쓰니까 몸이 닳습니다. 마음을 쓰고 사랑을 써서 일을 하고 놀이를 누리면, 내 몸은 닳는 일이 없습니다. 함부로 쓰기에 닳고, 기쁘게 쓰기에 안 닳습니다. 아니, 기쁘게 쓰면 새롭게 태어납니다. 새로운 웃음과 노래로 삶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새로운 마음이니, 한결같이 새로운 생각을 길어올려서, 한결같이 새로운 몸으로 하루를 열고 닫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머리를 잘 쓸 수 있습니다. 어리석거나 어처구니없거나 바보스럽거나 멍청한 짓에 머리를 쓰지 말아요. 검은 꿍꿍이에 머리를 쓰지 말아요. 남을 괴롭히거나 등치거나 들볶는 일에는 머리를 쓰지 말아요. 이웃을 아끼고 동무를 사랑하며 곁님을 어루만지는 몸짓으로 머리를 써요.


  몸은 닳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닳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내 마음이 한결같은 샘물처럼 늘 싱그러이 솟는, 푸르며 맑고 새파란 숨결로 가득한 물줄기와 같다면, 내 몸은 닳지 않습니다. 맑은 생각을 품어서 맑은 마음으로 가꾸면 맑은 몸짓이 되어 맑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잘 써야 합니다. 슬기롭게 써야 합니다. 알맞게 써야 합니다. 기쁘게 써야 합니다. 놀라우면서 새롭게 써야 합니다. 웃음과 노래로 써야 합니다. 춤과 이야기로 써야 합니다. 말 한 마디를 글 한 줄로 쓸 적에는 언제나 ‘삶노래’를 쓸 노릇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쓸 때에 비로소 글이고, 이러한 글을 엮어서 책을 짓습니다.


  사랑을 쓰는 사람은 이내 사랑을 얻어서 즐겁게 나누고는, 이윽고 새로운 사랑을 쓸 수 있습니다. 꿈을 쓰는 사람은 바로바로 꿈을 이루어서, 시나브로 새로운 꿈을 쓸 수 있습니다. 글쓰기는 삶쓰기입니다. 돈쓰기도 삶쓰기입니다. 마음쓰기도 삶쓰기입니다. 모든 ‘삶쓰기’는 ‘사랑쓰기’요, ‘마음쓰기’이면서, ‘생각쓰기’입니다. 4348.3.2.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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