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43 어제 오늘 모레



  때를 말할 적에는 으레 ‘어제 오늘 모레’ 이렇게 말합니다. 철을 말할 적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말해요. 세 갈래로 나누는 때요, 네 갈래로 나누는 철입니다. 철은 왜 네 갈래인가 하면, ‘심고 돌보고 거두고 갈무리하고’와 같은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세 갈래이고, 하루도 세 갈래입니다. 하루는 ‘아침 낮 저녁’입니다. 하루는 두 갈래나 다섯 갈래도 되기에 ‘아침 저녁’이 되기도 하면서, ‘새벽 아침 낮 저녁 밤’이 되기도 합니다.


  때를 보고, 철을 보며, 하루를 본다면, 내 삶을 볼 수 있습니다. 때를 못 보고, 철을 못 보며, 하루를 못 본다면, 내 삶을 볼 수 없습니다.


  ‘어제’는 내가 오늘을 누리기에 태어납니다. ‘오늘’은 내가 바로 이곳에 있기에 나타납니다. ‘모레’는 내가 오늘을 꿈꾸기에 찾아옵니다. 오늘은 바로 어제가 되면서 모레가 됩니다. 어제는 오늘이면서 모레입니다. 모레는 오늘이면서 어제입니다. 세 갈래 때는 셋으로 나누어서 바라볼 수 있는 한편, 언제나 한몸입니다. 한꺼번에 ‘어제 오늘 모레’로 나뉩니다.


  아 어제였구나 하고 느끼는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아 오늘이네 하고 느끼는 이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아 모레로구나 하고 느끼는 저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여기에 있구나 하고 느껴서 바라보아 알 때에, 우리는 늘 어제와 오늘과 모레가 함께 이루어지는 흐름을 바람처럼 타면서 삶을 짓습니다.


  따로 떨어진 세 갈래 때가 아닙니다. 함게 흐르는 세 갈래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이곳에서 기쁘면, 어제와 모레도 함께 기쁩니다. 오늘 내가 이곳에서 슬프면, 어제와 모레도 함께 슬픕니다. 오늘 내가 이곳에서 웃고 노래하면, 나는 어제와 모레에도 늘 웃고 노래해요.


  내 마음이 오늘 어떠한지 읽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오늘 어떻게 가누려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으로 어떤 삶을 지어서 하루를 누릴 생각인지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제는 머나멀거나 아스라하게 지나간 때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모레는 까마득하거나 머나멀어 언제 올는 지 모를 때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서두를 까닭이 없으면서, 기다릴 까닭이 없습니다. 늑장 부릴 까닭이 없으면서, 다그칠 까닭이 없습니다. 내 걸음걸이를 기쁘게 느끼면서 한 발씩 떼면 됩니다. 내 손길을 즐겁게 느끼면서 한 가지씩 하면 됩니다.


  어제까지 못 했으면 어제까지 못 했을 뿐입니다. 오늘 하면 오늘 할 뿐입니다. 모레에 할 수 있으면 모레에 할 수 있으면 될 뿐입니다. 가만히 바라보면서 흐뭇하게 받아들이면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누립니다. 나는 어떤 일이 서툴지도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오늘 내 걸음을 내딛을 뿐입니다. 내 걸음이 서툴어 보인다면, 나는 아직 걸음마를 떼려고 애쓰는 모습이겠지요. 그러면, 내 모습이 걸음마여도 됩니다. 즐겁게 걸음마를 옮기면서 아장아장 한 발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걸음이 될 테니까요. 걸음마를 떼고 걸음으로 한 발짝씩 옮길 수 있으면, 이제 홀가분하게 뛰거나 달립니다. 한결로 흐르는 삶입니다. 한결같이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4348.3.2.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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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2 이것 저것 그것


  한국말에는 ‘이·그·저’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 말에도 ‘이·그·저’를 가리키는 낱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처럼 ‘이·그·저’가 넓게 가지를 치면서 쓰이는 말은 없다고 느낍니다. 참말 한국말에서는 ‘이·그·저’를 붙여서 온갖 것을 다 나타냅니다. 맨 먼저 ‘이것·저것·그것’이 있어요. 여기에서 재미있는 대목이 하나 있는데, 낱으로 가리킬 적에는 ‘이·그·저’라 하는데, 이 말마디 뒤에 다른 말을 붙이면 ‘이·저·그’로 앞뒤가 바뀝니다.

 이것 저것 그것
 이이 저이 그이
 이곳 저곳 그곳
 이때 저때 그때
 이날 저날 그날
 이쪽 저쪽 그쪽

  곰곰이 생각하면 이 실마리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이’ 하나입니다. ‘이’는 바로 ‘나’입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하나’요 ‘이’이며 ‘나’입니다. ‘처음’에 ‘하나(이·나)’가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새로움’이 싹트고 ‘다른 하나(둘)’가 나오면서 ‘너’가 됩니다. 둘만 놓고 본다면 ‘이것’과 ‘그것’입니다. 이것과 그것은 ‘이때’와 ‘그때’이며, ‘이때’는 ‘오늘’이요, ‘그때’는 ‘어제’입니다. 처음 두 가지는 “오늘과 어제”입니다. 그래서, 둘만 놓고 헤아릴 적에는 “이와 그”입니다.

  “이와 그(오늘과 어제)”일 때에는 아직 안 움직입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나와서 “너와 나”로 되었을 뿐입니다. 이제, 너와 나 사이를 이으면서 새롭게 한 걸음을 내딛을 숨결이 찾아듭니다. 새로운 씨앗이 너와 나 사이에 놓여요. 이리하여, 비로소 ‘저’가 나오고, 저(저것·저곳·저때)는 바로 ‘모레(앞날)’입니다. 이리하여, 이와 그는 처음에 ‘이·그·저’였으나, 이내 ‘이것·저것·그것’으로 자리를 바꾸어요. 오늘(이)이 모레(저)로 가면서 어제(그)가 되거든요.

  나와 너가 있기에 ‘우리’가 태어납니다. 나와 너가 있어서 둘은 ‘우리’로 거듭납니다. 한국말에서는 오직 두 사람이어도 ‘우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낱말은 처음부터 너와 나를 아우르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니와 나 둘이 있을 적에 “우리 언니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어머니와 나 둘이 있을 적에도 “우리 어머니입니다” 하고 말하지요. 게다가 내가 혼자서 사는 집을 말할 적에도 “우리 집입니다” 하고 말해요. 혼자 사는 집이 왜 “우리 집”인가 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너)과 나(말하는 쪽)를 아우르기에 ‘우리’가 되거든요.

  오늘(이)과 어제(그)가 모이기에(만나기에) 모레(저)가 태어납니다. 오늘과 어제를 이어서 모레로 나아갑니다. 나와 너는 우리가 되어 아름다운 숨결로 거듭납니다. 나는 너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기쁜 넋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8.3.2.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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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1 크거나 작다


  두 아이가 있습니다. 두 아이가 나란히 설 적에 키가 같을 수 있고, 한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키가 크거나 작을 수 있습니다. 둘을 놓고 보면 둘이 같거나 다릅니다. 100원이 있습니다. 100원은 99원보다 큽니다. 그러나 101원보다 작습니다. 101원은 100원보다 크지만, 102원보다 작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따지면, 더 큰 숫자나 더 작은 숫자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한 달에 버는 돈이 1000만 원이라고 할 때에 0원이라고 할 때에 어느 쪽이 더 크거나 작지 않습니다. 1000만 원과 999만 원을 대고, 999만 원과 998만 원을 대면서 차근차근 살피면 모두 같거든요.

  생각해 보면 됩니다. 1000만 원을 벌면 기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999만 원을 벌면 안 기쁠까요? 1001만 원을 벌면 더 기쁠까요? 998만 원을 벌면 덜 기쁘거나 안 기쁠까요? 이렇게 1만 원씩 덜면서 0원까지 오고 보면, 이러고 나서 -1만 원과 -1000만 원까지 가 보아도 모두 같아요.

  크기란 틀림없이 있습니다. 어떻게 있느냐 하면, ‘크기’를 생각할 때에는 크기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크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어떠할까요? 네, 크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크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한 아이가 큰지 작은지 따지지 않습니다. 아니, 크기를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으니까, 누구 키가 큰지 아예 알지 못해요. 생각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으니, ‘크기를 생각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한테는 참말로 ‘크기가 없’습니다.

  삶은 ‘크기’로 따지거나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큰’ 집도 없고 ‘작은’ 집도 없어요. 어느 만큼 되어야 큰 집이고 어느 만큼 되면 작은 집일는지 생각해 보셔요. 만 평쯤 되면 큰 집일까요? 그러면, 만하고 한 평이면? 만하고 두 평이면? 만하고 백 평쯤 되는 집이 옆에 있으면 만 평짜리 집도 ‘작은’ 집이 되고 맙니다. 열 평짜리 집이라 해도 아홉 평짜리 집이 옆에 있으면, 열 평짜리 집도 ‘큰’ 집이 되어요.

  삶도 집도 서로 같습니다. 우리는 ‘큰’ 집이나 ‘작은’ 집에 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스스로 살 만한’ 집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여야 하지 않고, 가난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 만한’ 살림을 꾸려야 합니다. 즐겁게 지낼 집에서 살면 됩니다. 즐겁게 가꿀 살림이면 됩니다.

  책을 몇 권쯤 읽어야 많이 읽는다고 할까요? 한 해에 천 권 읽으면 많이 읽는 셈일까요? 그러면 구백아흔아홉 권 읽는 사람은 책을 적게 읽는 셈일까요? 아닐 테지요. 구백아흔여덟 권 읽는 사람은 책을 적게 읽는다고 하지 않을 테지요? 이 숫자대로 한 권씩 덜어 오백 권 …… 삼백 권 …… 백 권 …… 열 권, 한 권에 이릅니다. 이제 0권에 닿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책 많이 읽는 잣대’란 없습니다. 삶을 따지거나 재는 잣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숫자는 언제나 눈속임입니다.

  더 큰 사랑이 없고, 더 작은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면 모두 사랑입니다. 더 큰 선물이 없고, 더 작은 선물이 없습니다. 선물이면 모두 선물입니다. ‘크기’를 따지려 할 적에는 ‘삶’을 못 봅니다. ‘크기’에 얽매이는 사람은 ‘사랑’하고 멀어집니다. ‘크기’를 자꾸 살피면서 붙잡으려 한다면 ‘꿈’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크기는 늘 눈가림입니다.

  큰 꿈이나 작은 꿈은 없습니다. 큰 마음이나 작은 마음은 없습니다. 큰 생각이나 작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있을 것’이 있습니다. 그저 우리 삶이 있고, 사랑과 꿈이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아야 합니다. 눈을 속이거나 가리는 거짓을 벗겨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루 동안 열 마지기 땅뙈기를 야무지게 갈았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열흘 동안 한 마지기 땅뙈기를 겨우 갈았기에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둘은 저마다 제 삶에 맞게 땅을 갈았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며 누군가는 100점을 맞을 테고 누군가는 50점을 맞을 테며 누군가는 0점을 맞습니다. 100점이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점수는 늘 점수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곳은 ‘크기’나 ‘숫자’나 ‘점수’가 아닙니다. 은행계좌나 권력이나 이름값을 볼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람’을 보고 ‘삶’을 보며 ‘사랑’과 ‘꿈’을 보면 됩니다. 보아야 할 모습을 볼 때에 사람이 되고, 보아야 할 삶을 보면서 아낄 때에 삶이 되며, 보아야 할 삶을 보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할 때에 사랑과 꿈이 피어납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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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40 해, 봐, 돼



  모든 일을 합니다. 모든 삶을 봅니다. 모든 사랑이 됩니다. 할 때에 보고, 볼 때에 됩니다. 될 때에 다시 하고, 다시 할 때에 다시 보며, 다시 볼 때에 다시 됩니다. 이윽고 새롭게 합니다. 새롭게 하기에 새롭게 봅니다. 새롭게 보기에 새롭게 됩니다.


  하지 않는 일은 될 수 없습니다. 하지 않으니 안 되기 마련입니다. 하지 않은 일은 볼 수 없습니다. 하지 않으니 되지 않고, 되지 않았기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면, 해야 합니다.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면, 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은 따로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더 재미난 놀이나 더 재미없는 놀이가 따로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든, 할 때에 눈앞에 하나씩 나타나고, 눈앞에 하나씩 나타나기에 천천히 됩니다(이루어집니다).


  생각을 할 때에 볼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을 때에는 볼 수 없습니다. 생각을 하기에, 내가 생각으로 마음에 심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아무런 모습을 심지 않았으니, 아무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생각을 하고, 이 생각이 어떠한 그림인지 찬찬히 봅니다. 마음에 그린 생각을 찬찬히 보면서, 내 넋이 몸한테 이 그림에 따라 움직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내 몸은 내 넋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고, 이렇게 움직이면서 비로소 됩니다. 생각을 하기에, 생각을 보며, 생각이 삶으로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됩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삶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그저 제자리에 멈춥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남이 시킨 일’만 따르다가 죽음길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하는 생각이 아니라면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하는 생각은 언제나 기쁘기에, 이 기쁨을 보면서, ‘기쁜 삶’이 됩니다. 기쁜 삶을 이룹니다. 남이 시키는 일만 할 적에는 ‘내가 바라지 않던 일(내가 생각하지 않던 일)’이기에 어렵습니다. 어려우면서 지겹거나 따분합니다. 어려우면서 지겹거나 따분하기에 고단하거나 고달픕니다. 몸이 닳지요. 몸이 닭으니 어느새 낡아요. 이리하여 죽음길로 갑니다.


  내 삶은 내가 짓습니다. 내 삶은 내가 생각을 해서 마음에 심은 씨앗을 그림으로 환하게 바라보면서, 이 그림을 넋이 몸한테 바람처럼 말을 들려주기에 비로소 삶으로 드러납니다(됩니다). 해야, 보고, 됩니다. ‘해, 봐, 돼(so be it)’입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말합니다. “자, 해 보렴. 다 된단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말합니다. “내가 했어요. 이리 와서 보셔요. 다 됐어요.” ‘해 보면 되는’ 일입니다. ‘해 보기에 되는’ 삶입니다. ‘해 볼 때에 되는’ 사랑이고 꿈입니다. 그저 합니다. 그저 하고 봅니다. 이것을 따지거나 저것을 가리지 말고, 그저 생각부터 합니다. 마음으로 생각부터 하면서 기쁘게 몸으로 합니다. 좋고 나쁨을 따지지 말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합니다. 아름다움을 보려고, 아름답게 되려고, 내 마음에 아름다운 생각을 심습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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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넋 삶'을 읽는 분이 미리 알아둘 대목 :

 이 글은 1번 글부터 차근차근 이어지는 글이니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서 읽으면 실타래가 엉킵니다.

실타래가 엉켜도 그냥 읽으려 한다면

그대로 하셔도 괜찮으나,

말과 넋과 삶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1번 글부터 차근차근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말·넋·삶 39 이야기와 말·글



  귀로 들을 수 있도록 흐르는 결이 있습니다. 이러한 결을 ‘소리’라고 합니다. 소리는 사람이 입으로 낼 수 있고, 손이나 발로 낼 수 있으며, 눈을 깜빡일 적에도 조그마하지만 언제나 소리가 납니다. 연필을 손에 쥐고 종이에 무언가 끄적일 적에도 소리가 납니다. 나뭇잎이 바람 따라 살랑일 적에도 소리가 납니다. 입으로 소리를 질러서 무엇을 알리기도 합니다.


  입으로 소리를 내되, 이 소리에 ‘생각’을 담으면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말’이란 “생각을 담은 소리”입니다. 생각을 담지 않으면 그냥 ‘소리’일 뿐입니다. 생각을 느끼지 못하는 말이 둘레에서 퍼지거나 넘치면, 이때에는 이웃이 들려주려는 생각을 맞아들이지 못하니까 ‘시끄럽다’고 여깁니다.


  “생각을 담은 말”을 ‘귀’가 아닌 ‘눈’으로 읽거나 보도록 그림으로 나타내면 ‘글’이 됩니다. 그러니까, ‘글’이란 “그림으로 담은 말”이면서 “생각을 그림으로 담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멀리 떨어졌으면 말로 생각을 나누기 어렵습니다. 이때에는 종이에 글을 써서 띄웁니다. ‘글월(편지)’이라고 하지요. 인터넷에서 띄우는 글월은 ‘누리글월(누리편지)’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쓴 글을 수많은 사람한테 널리 알리려고 ‘책’이나 ‘신문’을 엮습니다.


  ‘말’이나 ‘글’은 “낱낱으로 떨어진 채 흐르는 생각조각”입니다. 글을 엮어서 글월을 이루듯이, 말을 엮어서 ‘이야기’를 이룹니다. 글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고, 말은 사람과 함께 태어났습니다. “낱낱으로 떨어진 채 흐르는 생각조각”을 엮어서 서로 ‘생각을 널리 주고받으면서 키우거나 북돋우려는 뜻’으로 이야기를 짓습니다. ‘이야기’에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가꾸거나 나누거나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수많은 삶”이 깃듭니다.


  어른이 아이를 낳아 어버이가 되면,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란 삶인 만큼, 어른(어버이)이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줄 적에는 ‘삶을 물려준다’고 할 만합니다. 예부터 이야기(옛이야기, 옛날이야기)는 아이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배울 수 있도록 돕는 ‘말월(조각으로 있던 말을 엮은 꾸러미)’입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자랍니다. 이야기란 ‘마음밥’입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아이만 듣지 않습니다. 다른 어른도 이야기를 함께 듣습니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어른과 아이는 삶을 새롭게 바라보고, 삶을 새롭게 가꾸는 슬기를 더 생각하며, 삶을 새롭게 누리는 길을 다시금 기쁘게 헤아립니다.


  곧,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적에는 ‘이야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야기가 되도록 하지 못하는 말이나 글이라면, ‘낱낱으로 흩어진 채 떠도는 생각조각’이 될 뿐입니다.


  아무 말이나 할 수 없고, 아무 글이나 쓸 수 없습니다. ‘생각을 담은 소리’가 꽃처럼 피어나도록 말과 글을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담은 소리’를 알뜰살뜰 엮어서 ‘이야기꽃’이 되도록 보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잔치’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야기로 잔치를 나누어요. 그리고, 누구나 즐겁고 홀가분하게 생각을 펼치면서 ‘이야기마당’을 엽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려는 뜻으로 이야기마당을 열고, 이야기자리를 마련합니다.


  이야기를 담은 글을 실을 때에 비로소 책입니다. 이야기를 담은 말을 들려줄 때에 비로소 강의요 교육입니다. 이야기가 없이 ‘조각난 지식’만 담는 교과서라면, 이런 교과서로 아이들을 길들이는 학교에서는 ‘사람’이 아닌 ‘종(노예)’을 부리는 셈입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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