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33 ‘바보’와 ‘멍청이’



  바보와 멍청이는 다릅니다. 둘이 같은 뜻이라면, 굳이 두 가지 낱말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둘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낱말로 씁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바보’를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합니다. ‘바보’라는 낱말을 풀이하면서 ‘멍청하다’라는 낱말을 씁니다. 그리고, ‘멍청이’라는 낱말을 풀이하면서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해요. ‘바보’는 ‘어리석’으면서 ‘멍청하다’고 하는데, ‘멍청이’는 ‘어리석’으면서 ‘아둔하다’고 합니다. ‘아둔하다’는 “슬기롭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다”고 합니다. ‘둔(鈍)하다’는 다시 “깨우침이 늦고 재주가 무디다”나 “작이 느리고 굼뜨다”를 뜻한다고 해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익히거나 살피려고 한국말사전을 뒤적이면, 어쩐지 바보스러워지거나 멍청해지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말풀이는 돌림풀이에다가 서로 뒤죽박죽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부터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어느 자리에 어떻게 썼는지 마음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따로 한국말사전이 없던 때에, 국어학자도 없던 때에, 교육이나 학교나 학문도 없던 때에, 어떻게 ‘말’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물려주면서 오늘 이때까지 이을 수 있었는가를 돌아보고 헤아리며 생각해야 합니다.


  ‘바보’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멍청이’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생각이 흐르거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보’는 생각이 흐린 사람이 아닙니다. ‘바보’는 조금 어리석거나 못날 수는 있어도 생각이 흐린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에 푹 빠져서 다른 일은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을 놓고도 ‘바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딸 바보”라고 하지요. “책만 보는 바보”라든지 “야구만 좋아하는 바보”라든지 “학문은 잘 하지만 집안일은 못 하는 바보”처럼 씁니다. 이런 자리에 ‘멍청이’라는 낱말을 넣어 보셔요. 도무지 안 어울립니다. “딸 바보”는 있어도 “딸 멍청이”는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바보’는 아직 제대로 모르는 사람일 뿐이기에, 앞으로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직 제대로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없던 탓에 제대로 모를 뿐인 사람이 ‘바보’입니다. 이와 달리, ‘멍청이’는 제대로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도 못 알아채는 사람을 가리켜요. 둘레에서 아무리 가르치거나 알려주어도 못 알아듣고 못 알아내는 사람이 바로 ‘멍청이’입니다.


  ‘바보’는 스스로 애써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멍청이’는 생각과 머리가 흐리기 때문에 스스로 애써야 하는 줄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이’는 넋이나 얼이 빠진 채 있기 마련입니다. 넋이 빠진 채 있으니, 옆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채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해요.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바보’는 “배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멍청이’는 “배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보’한테는 아직 가르칠 만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바보인 사람 스스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한데, 바보가 바보인 까닭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애쓰면 저도 바보에서 벗어나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되는 줄 모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바보입니다. 그래서, 바보 곁에는 바보를 일깨울 동무나 이웃이 있어야 해요. ‘멍청이’인 사람은 이웃이나 동무가 아무리 많아도 “스스로 마음을 닫아걸어서 제대로 못 보는 눈이 흐린 사람”인 탓에 배울 길도 가르칠 길도 막힙니다.


  내가 스스로 깨어난 사람이라면, 나는 슬기로우면서 철든 ‘어른’입니다. 내가 스스로 깨어나지 못했으면 바보이거나 멍청이일 텐데, 내가 바보라면, 나도 슬기를 깨치고 셈이 트며 철이 들어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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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2 ‘배우다’와 ‘가르치다’



  받아들여서 몸에 붙도록 할 때에 ‘배운다’고 합니다. 내가 아닌 남이 알도록 이끌 때에 ‘가르친다’고 합니다. ‘알도록 하’는 일만 놓고 ‘배우다’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면서 “몸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삭여서 내 것으로 삼는다”고 할 적에 비로소 ‘배우다’라는 낱말을 씁니다. ‘가르치다’라는 낱말도 이와 같아요. 사회나 학교에서는, 남이 무엇을 알도록 이끌 때에 으레 ‘가르치다’라 하지만, 내 둘레에 있는 남들이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삭여 이녁 것으로 삼”도록 이끌 때에 비로소 ‘가르치다’입니다. 내가 너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네가 이 이야기를 찬찬히 받아들여서 마음으로 삭여 네 것으로 삼으면, 나는 너를 가르쳤다고 할 만하지만, 네가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삭이지도 않아서 네 것으로 안 삼거나 못 삼으면, 이때에는 가르쳤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때에는 그저 ‘말했다’고만 합니다.


  학교에서는 어른이 ‘가르치’고 아이가 ‘배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가르치다·배우다’라는 낱말을 섣불리 쓸 수 없습니다. 교사 자리에 서는 어른은 그저 ‘말하’기만 합니다. 교사로서는 언제나 ‘말’을 들려줄 뿐입니다. 학생 자리에 서는 아이가 이 ‘말’을 귀여겨들으면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다음에 스스로 삭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가르치다·배우다’가 이루어집니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 비로소 가르칩니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으면, 더 많이 알건 모두 알건 아무도 못 가르칩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가르칠’ 사람을 부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배우려는 사람한테 걸맞’다 싶은 사람을 불러서 ‘가르쳐’ 줄 수 있도록 이끕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모두 ‘배우는 쪽’에서 일으키는 몸짓이요 삶입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처음에는 그저 ‘말’을 할 뿐이지만, 배우려는 사람이 기쁘게 받아들여서 삭이는 얼거리가 되면, 아하 그렇구나 ‘가르침’이란 이렇구나 하고 ‘배웁’니다. 다시 말하자면, 배우려는 사람은 ‘가르침’을 끌어내고, 가르치려는 사람은 ‘배움’을 끌어당깁니다. 배우는 사람은 늘 가르칠 수 있으며, 가르치는 사람은 늘 배울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슬기롭거나 철이 든 교사(어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늘 많이 배우’거나 ‘가르치는 동안 언제나 새롭게 배운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를 더 살펴야 합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을 주고받는 일은 가르침이나 배움이 아닙니다. 삶을 물려주고 물려받는 사랑이 바로 가르침이요 배움입니다. 지식은 퍼뜨릴 수 없습니다. 지식은 물려줄 수 없습니다. 오직 삶만 퍼뜨리고, 삶만 물려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 어떤 씨앗을 심고, 씨앗이 어느 만큼 자랄 적에 갈무리를 하느냐 하는 대목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은 ‘삶짓기’를 물려주고 물려받는 일입니다. 이는 지식이 아니고 철학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르침과 배움은 어떤 슬기를 물려주거나 물려받는 사람이 스스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끄는 이야기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몇째 서랍에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일은 ‘알리다’쯤 됩니다. 저녁에 텔레비전에서 어떤 방송이 흐른다고 말하는 일도 ‘알리다’쯤 됩니다. 신문에 나오는 사건이나 사고 같은 이야기도 그저 ‘알리다’일 뿐입니다. 내가 읽은 책에서 재미난 대목을 말할 때에도 그냥 ‘알리다’입니다.


  가르치거나 배울 적에는 ‘말’을 빌기도 하지만, 아무 말이 없이 몸으로 가르치거나 배우기 일쑤요, 으레 마음으로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사랑으로 가르치거나 배우기도 하고, 믿음으로 가르치거나 배우기도 합니다. 삶을 물려주거나 물려받기에 가르침이면서 배움입니다. 삶을 다룰 때에 비로소 가르침이요 배움입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거의 모든 학교교육과 인문지식은 가르침이나 배움하고 크게 동떨어지거나 아예 끈조차 안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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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1 이승에서 저승으로



  우리가 있는 이곳은 ‘이곳’이면서 ‘이승’입니다. ‘이 삶’입니다. 우리가 가는 저곳은 ‘저곳’이면서 ‘저승’입니다. ‘저 삶’입니다. 이 삶을 마치면 저 삶으로 가는데, 알아보기 좋도록 ‘삶’과 ‘죽음’으로 가르곤 합니다. 삶을 마치면 죽음이 되는 셈인데,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다른 삶’입니다. 죽음은 다르면서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승·저승’ 두 가지 말을 씁니다.


  이곳이 있기에 저곳이 있습니다. 이곳이 없다면 저곳은 없습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이곳’이라고 이 한 자리를 밝혀서 말하기 때문에, ‘이 한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는 ‘저곳’입니다. 그리고, 이 한 자리가 ‘이곳’이 되기에, 이곳은 모든 것이 처음 태어나는 자리요, ‘바탕’이자 ‘뿌리’이고 ‘밑’입니다. 이곳에서 비롯하는 ‘저곳’이니, 저곳은 ‘다른 곳’이면서 ‘새로운 곳’이요 ‘나아가는 곳’입니다.


  왜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까요? 왜 우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까요? 왜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갈까요? ‘다른 이야기’를 누리려는 뜻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으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저곳이 태어나거나 깨어나거나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그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안 태어나고 안 깨어나며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에 얌전히 있으면 ‘우리 목숨’조차 안 태어나고 안 깨어나며 안 생깁니다. 우리가 이곳(이승)에서 비로소 걸음을 처음으로 내딛기에 저곳(저승)이 생기면서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깨어나며 생깁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첫발을 내디디니 ‘새 목숨’이 태어나서 ‘내’가 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려는 까닭은 오직 하나, ‘이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누리려고 이 땅(이곳, 이승)에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새롭게 지으려고 이곳(이승, 이 땅)에서 삶을 이룹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기쁘게 나누려고 이승(이 땅, 이곳)에서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바로 내가 ‘삶’이자 ‘목숨’이고 ‘숨결’이기에 ‘바람’이며 ‘넋’입니다. 바로 나는 삶·목숨·숨결·바람·넋을 한껏 누리면서 숱한 이야기를 지어서 갈무리한 뒤, ‘죽음’이자 ‘빛’이자 ‘어둠’이자 ‘씨앗’으로서 ‘온누리’가 됩니다. 첫걸음을 내딛어서 새걸음으로 나아갈 적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적에, 삶에서 죽음으로 옮길 적에, 바로 나는 죽음·빛·어둠·씨앗·온누리입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나오듯이, 이승에서 저승이 나옵니다. 이러면서 둘은 늘 하나입니다. 이승 따로 저승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승과 저승은 하나이면서 다른 하나이고 새로운 하나입니다.


  삶이 두렵거나 무섭지 않듯이 죽음이 두렵거나 무섭지 않습니다. 그저 새로운 길이기에 ‘낯설’ 뿐입니다. 낯설기에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고 깨어나며 생깁니다.


  돌고 돌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짓습니다.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엮습니다. 똑같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가꿉니다. 4348.2.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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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0 춤추는 물결



  물결은 언제 어디에서나 춤춥니다. 물결이 물결인 까닭은 춤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과학으로도 밝히는데, 물은 그릇에서 바닥에 쏟을 적에는 한곳에서 다른 한곳으로 흐릅니다. 이와 달리 물은 ‘갇힌 어느 한곳’에서는 위아래로 움직일 뿐입니다. ‘물이라고 하는 결’을 보여줄 뿐입니다.


  요즈음은 ‘물결’이라는 낱말보다 ‘파도(波濤)’라는 한자말을 쓰는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만, ‘파도’란 ‘물결’을 한자로 옮긴 낱말일 뿐입니다. 한국말사전 뜻풀이를 보면 “파도 = 바다에 이는 물결”입니다. 게다가 ‘물결’에 뜻풀이를 달 적에 “(2) 파도처럼 움직이는 어떤 모양이나 현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처럼 적기도 해요. 아주 오락가락하는 뜻풀이요, 엉터리 뜻풀이입니다.


  그러나 한국말사전을 엮은 국어학자는 말뜻과 말결을 모르기 때문에 이처럼 뜻풀이를 답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 ‘물결’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도 넋과 말과 삶을 제대로 모릅니다. 왜 그러할까요? ‘파도’라는 낱말을 쓸 적에는, ‘물이라고 하는 결’과 ‘물에 이는 결’을 헤아리거나 살피지 못합니다. 오직 ‘물결’이라고 쓸 때에만 비로소 ‘물 + 결’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해서 몸으로 느낍니다.


  물결이 칠 적에 물은 늘 그곳에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 안 갑니다. 숨을 쉬는 내 모습을 그려 보셔요. 숨을 쉴 적에 바람은 어디에 가지 않습니다. 내 몸도 어디에 가지 않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숨은 그대로 있습니다. ‘숨결’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몸을 이루는 살점은 ‘살결’입니다. 손가락으로 살을 눌렀다가 떼어 보셔요.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짐을 들 적에도, 일을 할 적에도, 물을 만질 적에도, 걸상에 앉거나 자리에 누울 적에도 ‘살’은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언제나 이곳에 있습니다. 다른 데로 안 갑니다.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살이기에 ‘살결’을 느낍니다.


  착한 마음과 나쁜 마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마음이 여러 모습으로 바뀔 뿐입니다. 이리하여, 예부터 우리 겨레는 ‘마음결’을 말합니다. 마음결이 ‘한결’같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마음씨’를 곱게 갖추도록 애썼어요. 마음씨란 ‘마음에 심는 씨’입니다. 마음씨를 심어서 마음결이 한결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잠을 자면서 몸을 쉬고, 앞으로 할 새로운 일을 꿈으로 짓습니다. 그러면 ‘꿈결’은 무엇일까요. 꿈은 어디 먼 나라에서 나한테 찾아오지 않습니다. 모든 꿈은 내가 스스로 짓습니다. 내가 스스로 지은 꿈이 언제나 내 삶으로 드러납니다. ‘꿈결’을 가꾸는 내 넋을 깨달을 수 있으면, 내 ‘삶결’은 바로 꿈결 따라 바뀌는 줄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해가 뜨고 집니다. 햇빛이 바뀝니다. 햇빛을 제대로 살피는 사람이라면 ‘빛결’을 알아채서,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거두어, 언제 갈무리하면 알맞을는지를 압니다. 노래를 부를 적에도 그렇지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노랫가락을 다스릴 줄 압니다. 이른바 ‘노랫결’을 어루만질 수 있을 때에 노래를 아름답게 부릅니다.


  물결이 춤춥니다. 물결은 ‘요동(搖動)치’지 않습니다. 물결은 춤춥니다. 춤은 ‘틀에 박힌 몸짓’이 아닙니다. 언제나 다르고 언제나 새로우며 언제나 즐거운 춤사위입니다. 연예인이나 대중가수가 ‘똑같은 몸짓’을 보여주려고 몸을 괴롭히면서 억지스레 보여주는데, 수많은 연예인이나 대중가수는 ‘똑같은 몸짓’이 ‘춤사위’라도 되는듯이 억지를 부리니 뼈와 뼈마디가 모두 닳거나 낡아요. 이와 달리, 늘 새롭고 다르며 즐겁게 춤을 추는 사람은 여든이나 아흔 살이 되어도 홀가분하게 춤사위를 놀립니다. 그래서, ‘물결’은 ‘춤춘다’고 합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언제나 한결같기에 물결은 춤춥니다.


  내 몸이 튼튼하려면, 내 살결을 살피고, 내 숨결을 가다듬으며, 내 마음결을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이 아름다우려면, 내 꿈결을 새롭게 지으면서, 내 말결을 슬기롭게 가다듬어서, 내 하루가 푸른 노랫결로 흐르도록 기운을 모두어야 합니다. 삶은 언제나 물결칩니다. 삶은 언제나 물결처럼 춤춥니다. 4348.2.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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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9 그물



  고기를 낚으려고 그물을 짭니다. 그물을 촘촘히 짜야 고기를 낚습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촘촘히 짜듯이, 사람은 그물을 촘촘히 짜야 바닷물이나 냇물에 그물을 드리워서 고기를 낚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짤 적에 아무렇게나 짜지 않습니다. 촘촘히 짜는 거미줄인 한편, 아름답게 짭니다. 왜 아름답게 짤까요? 빈틈이 나오지 않도록 짜려면 저절로 아름다운 무늬가 됩니다. 어느 한쪽도 허술하지 않도록 짜면서 튼튼하도록 짜려면 참말 아름다운 결이 되고, 금과 줄과 모습이 됩니다.


  사람이 짠 그물도 몹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그물이란 없습니다. 그저 촘촘하거나 그저 튼튼하기만 한 그물은 없습니다. 가장 수수하거나 투박한 무늬나 결이라 하더라도, ‘그물빛’과 ‘그물결’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사랑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지요. 한 땀씩 찬찬히 짠 그물을 바라보셔요. 이 그물을 손으로 가만히 어루만져 보셔요. 냇물고기와 바닷물고기가 이 그물에 걸려서 잡힐 만합니다. 고기가 비늘이나 몸을 다치지 않도록 거뜬히 낚을 만합니다. 고기를 낚으면서 물은 모두 새어나가도록 할 만합니다.


  그물은 오직 고기를 낚습니다. 물을 낚지 않습니다. 그물은 오직 고기를 낚아서 올립니다. 물은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거미줄은 오직 먹이를 잡습니다. 바람을 잡지 않습니다.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면서 춤을 추는 거미줄은 바람결을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파란 빛깔이 되는데, 파란 빛깔로 춤추는 거미줄은 날벌레와 풀벌레가 ‘거미줄’인지 알아채지 못할 만하지요. 냇물이나 바닷물에 드리우는 그물도 거미줄과 같아요. 물과 하나가 되어 물결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그물입니다. 물고기는 그물을 거리끼거나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물도 바닷물이나 냇물에 깃든 수많은 돌이나 이끼나 플랑크톤 가운데 하나로 여깁니다. 그물 안팎을 가만히 드나들다가 그만 그물에 낚입니다.


  사람 몸은 그물과 같습니다. 사람 몸은 거미줄과 같습니다. 겉보기로는 한 덩이로 된 살갗이요 뼈요 살점이요 피톨이라고 볼 만하지만, 깊이 파고들어서 살피면, 사람 몸은 아주 촘촘하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거미줄이나 그물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신경망(神經網)’ 같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신경망’이라는 한자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바로 ‘마음그물’을 가리킵니다. 우리 마음은 그물처럼 촘촘하면서 튼튼하고 아름답게 짜여서, 누가 보아도 사랑스럽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짓는 모든 생각은 바로 이 ‘마음그물’에 깃듭니다. 우리가 짓는 생각은 마음으로 들어가서 몸을 움직이는 말이 됩니다. 마음이란, 마음그물이란, 생각을 받아들여서 고운 빛으로 바꾸어 주는 보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마음그물이란, 생각을 낚아서 맑은 바람으로 거듭나도록 북돋우는 숨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물을 이루는 벼리가 튼튼하기에 삶을 짓습니다. 몸과 마음을 이루는 그물은 벼리가 하나하나 모여서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4348.2.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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