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38 ‘차갑다’와 ‘뜨겁다’



  차가우면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뜨거우면 녹아서 날아오릅니다. 차가우니까 땅바닥에 들러붙습니다. 뜨거우니까 어느덧 몸뚱이가 사라지면서 아지랑이가 됩니다. 차가우니까 딱딱한 얼음이 됩니다. 뜨거워서 아지랑이가 된 숨결은 하늘 높이 날아오릅니다. 얼음은 그대로 머뭅니다. 어디로도 안 갑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아지랑이는 이내 구름이 됩니다. 구름이 된 아지랑이는 빗물이 됩니다. 빗물이 된 구름은 하늘을 가르며 땅으로 내려옵니다. 하늘을 가를 적에 바람을 타고 온누리 골골샅샅으로 퍼진 빗물은 냇물도 되고 샘물도 되며 우물물도 되고 바닷물도 됩니다. 골짝물도 되고 시냇물도 되며 가람물도 되지요. 온갖 물로 새로 태어납니다. 온갖 물로 몸을 바꿉니다. 온갖 물로 거듭나는 숨결이 되어요.


  차가워서 얼어붙는 몸은 늘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대로 있기에 ‘고인 숨결’은 아닙니다. 늘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차가워서 얼어붙어도, 이 몸은 바로 내 몸입니다. 차가움을 가득 안은 몸입니다. 차가움을 가득 안아서 무거우니 어느 곳에도 못 가는데, 아직 아무 곳으로도 안 갔을 뿐, 마음속에 따사로운 꿈을 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차가운 몸은 따사로운 마음을 꿈으로 꿉니다. 따사로운 마음으로 태어나서 새롭게 피어나겠다는 꿈을 꾸면서 깊디깊이 잠을 잡니다. 이른바 겨울잠입니다.


  뜨거워서 녹는 몸은 언제나 바뀝니다. 언제나 바뀌니 언제나 흐릅니다. 언제나 하르니 언제나 새롭습니다. 뜨거운 기운은 어느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뜨거운 기운은 모든 곳을 흐릅니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이 되며,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뜨거운 기운은 언제나 모든 것에 스스로 깃들어 모든 것으로 살다가 새로운 모든 것이 됩니다. 뜨거운 것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이른바 꽃이고 열매입니다.


  그런데 뜨거운 기운은 어느 날 문득 ‘다른 새로움’을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짓고, 모든 것이 되며, 모든 것을 하고, 모든 것을 보는 삶에서, 다른 새로움을 한 가지 생각합니다. 언제나 ‘모든 것(온 것)’으로 사는 뜨거운 기운은 ‘뜨거운 기운이 아닌 새로운 것’을 생각해서, ‘삶’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뜨거운 기운이 나아가는 곳은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뜨거운 기운은 삶을 누리면서 모든 것을 짓고 사랑을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이렇게 하면서 문득 한 가지를 새롭게 그리니 바로 ‘죽음’이자 ‘잠(겨울잠)’이요 ‘꿈’입니다. 이제 ‘모두 다 지었’으니까, ‘잠들어서 꿈을 꾸’려고 하지요. 마당에서 놀던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서 밭으로 간다고 할까요. 씨앗이 밭에서 자라 싱그럽게 자란 풀이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다시 겨울을 맞이하면서 흙(밭)으로 돌아간다고 할까요.


  ‘차가운 기운’은 ‘뜨거운 기운’이 바뀐 몸입니다. ‘차가운 기운’과 ‘뜨거운 기운’은 한몸이요 같은 넋입니다. ‘차가운 기운’과 ‘뜨거운 기운’은 한마음이면서 같은 숨결입니다.


  몸이 차갑게 식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은 몸은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흙을 깨웁니다. 죽은 몸에서 나온 넋은 새로운 몸을 찾아서 꿈을 꿉니다. 새로운 몸을 찾는 넋은 꿈을 꾸려고 ‘밤낮누리’로 갑니다. 밤낮누리에 깃들어 꿈을 꾸는 넋은 천천히 온별(온 우주)을 살피면서 새롭게 나아갈 길을 찾습니다.


  넋은 새 길을 찾으면 새 곳으로 가서 새 몸을 입습니다. 넋이 새 몸을 입으면, 새로운 몸은 다시 뜨거운 기운이 돕니다. 아기가 태어나지요.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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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7 ‘짓다’와 ‘지우다’



  짓는 사람은 늘 손수 짓습니다. 지우는 사람은 언제나 남한테 맡깁니다. 짓기에 손수 가꿉니다. 지우기에 언제나 남한테 손을 벌립니다.


  삶은 짓습니다. 삶은 지우지 않습니다. 삶은 짓기에 늘 새롭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일을 좀 잘못했거나 엉터리로 했다고 여겨서 ‘지우려’고 하면 어찌 될까요. 지우려고 한대서 내가 걸어온 길이 사라지거나 없어질까요? 내가 일으킨 말썽이나 잘못을 지우려고 하면 참말 지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발자국이든 굳이 지울 까닭이 없습니다. 이제껏 어떤 길을 걸어왔어도 이제부터 새 발걸음을 지으면 됩니다. 지운다고 없어지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우려고 하면 자꾸 지울 생각에 파묻힙니다. 지우려고 하니까 외려 지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지저분해지고 맙니다.


  새로 지으려고 하면 지울 까닭이 없습니다. 새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짓는 사람은 지난날 어떤 말썽이나 잘못을 일으킨 적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 짓는 마음은 ‘감추거나 숨기거나 없애’려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짓는 마음은 스스로 새로 깨어나려는 마음입니다. 새로 짓는 마음은 스스로 삶을 새로 가꾸어서 돌보려는 마음입니다.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만 한 값을 치러야 하지 않습니다. 아니, 값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그저, ‘값을 치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앞에 놓고 이 아이를 꾸짖거나 윽박지르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얼차려를 줄 수 있습니다만,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따사롭게 타이르면서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안 바라볼 수도 있어요. 잘못을 저지르건 말건, 이 아이가 삶을 새로 짓도록 웃음과 노래로 이끌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을 간다고 해서 더 낫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다 다른 길입니다. 다 다른 길이되, 어느 길은 ‘주눅 드는 길’이고, 어느 길은 ‘가르치고 배우는 길’이며, 어느 길은 ‘사랑으로 삶을 짓는 길’입니다.


  짓는 삶은 새롭습니다. 이제껏 없던 것을 지으니 새롭습니다. 지우는 삶은 낡습니다. 이제껏 있던 것을 그저 붙잡거나 매달리니 낡습니다. 짓는 삶은 늙거나 아프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롭게 깨어나니까 늙을 일도 아플 일도 없지만, 늙음이나 아픔이라는 말을 아예 떠올리거나 그리지 않습니다. 지우는 삶은 늙거나 아픕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면서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을 하니까 늙거나 아플 일만 있습니다. 새로움이 없이 한곳에 고인 채 더 움직이지 않으니 늙거나 아픕니다. 지우는 삶은 언제나 늙음과 아픔만 떠올리거나 그립니다.


  새로운 일을 지으면 새롭습니다. 틀에 박힌 어떤 일을 붙잡으려고 하면 지치거나 괴롭습니다. 새로운 일로 나아가서 기쁘게 맞이하면 참으로 새로우면서 기쁩니다. 새로움과 기쁨을 생각해서 넉넉히 맞아들이니 말 그대로 새롭고 기쁩니다. 이와 달리, 틀에 박힌 어떤 일을 붙잡기만 하면, 이 틀에 박힌 대로 해내야 하니까 아무래도 몸이나 마음이 힘들면서 기운을 많이 쏟아야 합니다. 고단하면서 웃음도 없고 노래도 없어요.


  삶을 짓는 사람이 웃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삶짓기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삶을 지어야 삶짓기입니다. 웃음을 지어 웃음짓기입니다. 노래를 지어 노래짓기입니다. 글을 지어 글짓기입니다. 꿈을 지어 꿈짓기입니다. 사랑을 지어 사랑짓기입니다. 밥을 지어 밥짓기입니다. 집과 옷을 지으면 집짓기와 옷짓기입니다.


  우리는 먼먼 옛날부터 모든 삶을 손수 지었습니다. ‘삶짓기(현실 창조)’란 바로 내가 나답게 홀로서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는 기운찬 발걸음입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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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6 ‘밭’과 ‘마당’



  어느 한 가지가 모인 곳을 ‘밭’이라 합니다. 배추밭이나 무밭이나 능금밭이나 포도밭처럼 ‘밭’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텃밭이라는 데에 온갖 푸성귀를 심거나 가꾸기도 하지만, 밭은 으레 어느 한 가지가 자라기에 너그러운 품입니다. 어느 한 가지가 튼튼하게 자라면서 다른 여러 가지도 이 밭에서 함께 자랄 수 있습니다. ‘마당’은 밭과 달리 모든 것이 모여서 어우러지는 곳입니다. 마당은 놀이터이면서 일터입니다. 마당은 삶터이면서 사랑터입니다. 마당은 이야기터이면서 노래터요 춤터입니다.


  밭은 ‘터’가 아닙니다. 밭은 ‘바탕’입니다. 밭이 있기에 모든 목숨이 자랍니다. 밭이 있어서 모든 목숨이 새로운 숨결을 얻어서 씩씩하게 태어나거나 깨어날 수 있습니다.


  밭에는 씨앗이 깃듭니다. 씨앗을 심는 곳은 밭입니다. 씨앗은 마당에 심지 않습니다. 씨앗을 마당에 심었다가는 그만 밟혀서 죽거나, 눌려서 깨어나지 못해요. 왜냐하면, 마당은 온갖 것이 날뛰거나 춤추면서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밭에 씨앗을 심듯이, 어미는 제 몸과 마음에 씨앗을 심습니다. 마당에서 온갖 것이 어우러지듯이, 아비는 제 몸과 마음을 넓게 펼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어머니는 너른 사랑’이라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어머니는 고운 꿈’이라 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꿈입니다. 아버지가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꿈으로 모든 길을 차근차근 아이(씨앗, 새로운 목숨)한테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제 품에 씨앗으로 심어서 키우는 아이한테 새로운 숨결을 빚어서 베푸는 동안, 앞으로 밤에서 낮으로 나아갈 적에 마음에 담을 꿈을 가르칩니다. 아이는 새로운 씨앗 하나에서 깨어나면서 맨 먼저 고요한 밤인 어머니 품에서 꿈을 물려받습니다.


  꿈을 물려받고 열 달을 자란 목숨이 밤에서 낮으로 나오면서 ‘아기’라는 몸을 입습니다. 이제 아기는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가슴으로 나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품에서 열 달을 자라면서 ‘갓난쟁이’로 웃고 우는 아기를 사랑으로 다스립니다. 다스리지요. 아기가 천천히 아이로 거듭나면서 스스로 뒤집고 기고 서고 걷고 달리고 뛰고 노래하고 춤추고 말을 짓도록 다스리지요. 아버지는 아이가 짓는 모든 삶을 너그럽게 받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지으려는 모든 꿈을 넉넉하게 맞아들입니다. 아이는 아버지 가슴에서 뛰놀면서 해맑게 자랍니다. 아이는 아버지 가슴에서 신나게 뛰고 달리면서 아름답게 자랍니다.


  밭에서 태어난 숨결은 마당에서 큽니다. 밭에서 키운 숨결은 마당에서 홀로섭니다. 밭에서는 홀로서지 못합니다. 밭에서는, 씨앗이 눈을 떠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마당에서는, 눈을 떠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 씨앗이 한껏 춤추고 노래하면서 모든 사랑을 짓고는 어깨동무하면서 누리도록 합니다.


  ‘보금자리’가 되려면 밭과 마당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부동산이나 재산이 되는 집이 아닌, 보금자리가 될 만한 곳에는 밭과 마당이 나란히 있어야 합니다. 밭에 씨앗을 심습니다. 마당에서 뛰놉니다. 밭 한쪽에서 나무가 쑥쑥 오르면서 그늘을 드리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당 한쪽에 살림살이를 놓고 집안을 가꿉니다. 밭일은 어머니 몫입니다. 마당일은 아버지 몫입니다. 밭놀이는 어머니가 물려줍니다. 마당놀이는 아버지가 물려주지요.


  밭도 없고 마당도 없는 도시 사회에서는, 밭도 마당도 헤아리지 않는 아파트에서는, 사람이 사람다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조그마하든 커다랗든, 밭과 마당을 생각해서 우리 보금자리에 마련해야 합니다.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고 어른이 어른답게 살려면, 우리 보금자리에는 ‘집’과 ‘밭’과 ‘마당’이 있어야 합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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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5 밤낮, ‘밤’과 ‘낮’



  한국말에서는 늘 ‘밤낮’으로 말합니다. ‘낮밤’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 이렇게 하루를 세 가지 때로 가르는 한편,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이렇게 다섯 가지 때로 가르기도 하지만, ‘밤’과 ‘낮’ 이렇게 두 가지 때로 가르기도 합니다.


  왜 ‘낮밤’이라 하지 않고 ‘밤낮’이라 할까요. 왜 낮이 앞에 오지 않고 밤이 앞에 올까요. 왜 밤이 뒤에 서지 않고 낮이 뒤에 설까요.


  밤은 낮을 이끕니다. 낮은 밤에서 태어납니다. 밤에서 낮이 비롯합니다. 낮은 밤을 따라서 찾아옵니다. 모든 씨앗은 밤에서 비롯하여 천천히 자라면서 태어납니다. 온갖 씨앗은 밤에서 깨어나서 씩씩하게 기지개를 켭니다.


  밤은 ‘흙 품’이면서 ‘어머니 품’입니다. 풀씨는 흙 품에 깃들고, 사람씨는 어머니 품에 깃듭니다. 다른 모든 벌레와 짐승과 목숨은 어미 품에 깃듭니다. 어미, 곧 어머니, 그러니까 가시내는 ‘밤’입니다. 밤은 모든 목숨을 품에 고요하게 품고 포근하게 보듬으면서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이끌어 새로운 숨결이 되도록 합니다. 이리하여, 밤이 있기에 낮이 있습니다. 밤에서 모든 목숨을 틔워서 낮으로 보내기에, 낮에 눈부신 무지개가 뜨고 노래와 웃음이 퍼져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아비, 곧 아버지, 그러니까 사내는 ‘낮’입니다. 낮은 어떤 목숨도 품에 안지 않습니다. 낮은 갖은 목숨이 저마다 싱그럽게 뛰놀면서 자라도록 북돋웁니다. 밤은 모두 고요히 품어서 새로운 꿈을 꾸도록 이끌고, 낮은 모두 신나게 뛰놀도록 너른 터를 내주면서 사랑을 짓도록 이끕니다.


  밤에 꿈을 꿉니다. 낮에 사랑을 짓습니다. 밤에 고요히 쉽니다. 낮에 신나게 일하거나 놀이를 누립니다. 이리하여, ‘밤낮’입니다. 밤이 있기에 낮이 있고, 낮이 있어서 밤이 있습니다. 밤이 낮을 부르고, 낮이 밤을 부릅니다. 밤이 낮을 낳기에, 낮은 다시 밤을 낳을 수 있습니다. 둘은 늘 함께 있고, 함께 태어나며, 함께 눈을 뜹니다.


  ‘보이드(void)’란 밤이 낮으로 되는 곳입니다. 밤이 낮으로 되는 곳은 밤과 낮이 함께 있으면서 함께 태어나고 함께 눈을 뜨는 곳입니다. 밤낮이 고요히 흐르면서도 신나게 춤추는 곳입니다. 밤낮이 포근하게 뛰놀면서도 새근새근 잠자는 곳입니다. 곧, ‘보이드’는 “밤낮이 있는 누리”이기에, ‘밤낮누리’입니다. 밤이면서 밤이 아니고, 낮이 아니면서 낮인 누리인 밤낮누리입니다. 밤이 낳는 낮이고, 낮에서 새로 깨어나는 밤인 밤낮누리입니다.


  우리는 빛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둠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밝은 낮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밤낮누리’입니다.


  예부터 밤과 낮은 따로 ‘밝음’도 ‘어두움’도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밤과 낮은 어두움이나 밝음이 아닙니다. 그저 밤이고 낮입니다. 왜냐하면, 밤은 지구별에 해님이라는 별이 뒤로 숨은 때, 또는 지구라는 별이 해님이라는 별하고 살그마니 등을 돌린 때입니다. 낮은 지구별에 해님이라는 별이 고개를 방긋 내민 때, 또는 지구라는 별이 해님을 마주보려고 살짝 몸을 돌린 때입니다.


  밤에도 낮에도 해는 똑같이 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해는 똑같이 비춥니다. 그래서 밤이라 하더라도 밝고, 낮이라 하더라도 어둡습니다. “밝은 밤·어두운 밤”이 있으며, “밝은 낮·어두운 낮”이 있습니다. 밤은 ‘어두움’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낮은 ‘밝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밤은 ‘어미 품’이요, 낮은 ‘아비 가슴’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아비 가슴이 아닌 어미 품으로 가야 합니다. 아비는 우리가 신나게 뛰놀면서 사랑을 짓는 마당을 여는 사람입니다. 어미는 우리가 새롭게 꿈을 꾸면서 삶을 일구는 밭을 여는 사람입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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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4. 스스로, 손수, 몸소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혼자 하지 못할 적에 ‘바보’라고 합니다.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스스로 하지 못할 적에도 ‘바보’라고 합니다. 손수 밥을 짓지 못한다거나, 손수 빨래를 못한다고 할 적에도 바보라고 할 만합니다. 바보는 왜 바보일까요? 아직 제대로 모르기에 바보라 할 텐데, 아직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아직 제대로 바라볼 줄 모르기에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대로 못 보고, 제대로 못 하며, 제대로 못 되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제대로 못 보니 스스로 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하지 못하니 남이 도와주거나 남이 맡아서 해야 합니다. 손수 하지 못한다면 삶을 손수 짓지 못합니다. 삶을 손수 짓지 못하니, 살림을 몸소 가꾸지 못해요. 기쁨과 즐거움을 몸소 누리지 못하지요.


  ‘스스로’ 어떤 일을 한다면, 바로 오늘 이곳에서 내가 한다는 뜻입니다. ‘손수’ 어떤 일을 한다면, 하나하나 내가 지어서 가꾸려 한다는 뜻입니다. ‘몸소’ 어떤 일을 한다면, 마음에 담은 생각대로 차근차근 온몸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남이 해 줄 수 없습니다. 밥을 먹건 똥을 누건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몸소 해야 합니다. 물을 마시건 바람을 마시건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몸소 물을 안 마시거나 바람을 안 마시면, 내 목숨은 끊어집니다. 내 삶길은 내가 몸소 걷습니다. 남이 내 삶길을 걸어 주지 않습니다. 내 몸을 스스로 움직여서 내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을 해야 하고, 내가 손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며, 내가 몸소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내가 나로 일어서는 길은 늘 이 세 가지입니다. ‘스스로·손수·몸소’입니다. 스스로 느껴서 바라봅니다. 손수 생각해서 짓습니다. 몸소 움직여서 삶을 누립니다. 보고, 하며, 됩니다. 하면서, 보고, 됩니다. 되도록, 보고, 합니다. 되게끔, 하면서, 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아름다운 님을 품으면서 제 길을 씩씩하게 걷습니다. 4348.3.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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