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릇


  학교마다 급식실이 있어요. 급식실은 밥을 먹는 곳이에요. 그런데 밥을 먹는 곳이라면 ‘밥 먹는 곳’처럼 이름을 붙일 만하지 않을까요? 이를 줄여서 ‘밥터’처럼 쓸 수 있을 테고요. ‘급식’이라는 한자말은 “식사를 공급함”을 뜻해요. ‘식사’라는 한자말은 “밥”을 뜻하고, ‘공급’이라는 한자말은 “주다”를 뜻해요. 그러니 말뜻으로 치자면 급식실은 “밥 주는 곳”인 셈이에요. 급식실을 두는 학교를 보면 ‘퇴식구(退食口)’ 같은 푯말을 붙이는 데가 있어요. “빈 그릇을 내놓는 구멍”을 뜻한다는 ‘퇴식구’인데, 밥을 다 먹고서 ‘빈 그릇’을 갖다 두는 곳이라면 ‘빈 그릇’이라 적은 푯말을 붙일 적에 알아보기가 한결 나아요. 집에서 밥을 먹을 적에 어머니나 아버지가 “빈 그릇은 개수대에 놓으렴” 하고 말하지요. “퇴식하게 개수대에 놓으렴”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학교에서 ‘밥 먹는 곳’을 두고 ‘밥터’ 같은 이름을 쓰지 않으니 ‘빈 그릇’ 같은 이름도 쓸 줄 모르는구나 싶어요. 집에서 빈 그릇을 두면서 설거지를 하는 자리는 ‘개수대’라 하고, ‘싱크대(sink臺)’라고 하는 말은 일본에서 건너왔습니다. 4349.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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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눈이



  한국에서는 ‘백설공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화와 만화영화가 있어요. 이야기책에서도 만화영화에서도 으레 ‘백설공주’라는 이름만 쓰니 우리 입에는 ‘백설 + 공주’라는 말마디가 익숙해요. 그러면 백설공주는 왜 ‘백설’이라는 공주인지 생각해 본 일이 있을까요? ‘백설’은 ‘흰눈’이나 ‘하얀눈’을 가리키는 한자말이에요. 겨울에 내리는 눈이라면 모두 하얗겠지요. 굳이 ‘흰눈’이나 ‘하얀눈’처럼 쓰지 않아도 돼요. 그렇지만 눈이 내릴 적에 모두들 “흰 눈이 내리네”라든지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네”처럼 말해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한자말 ‘백설’은 나오고 ‘흰눈’이나 ‘하얀눈’은 없어요. 한국말이 없는 한국말사전이니 알쏭달쏭하지만, 아무튼 백설공주는 한국말로 하자면 ‘흰눈공주’나 ‘하얀눈공주’인 셈이지요. 그래서 살갗이 눈처럼 하얗다고 하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흰눈이’나 ‘하얀눈이’ 같은 이름을 써 볼 만해요. ‘하얀이’라고 해 볼 수도 있어요. 살갗이 까맣다면 ‘까만이’가 될 텐데, 숲에 있는 고운 흙은 까무잡잡한 빛이랍니다. 숲흙은 밭흙하고 달라 빛깔이 까매요. 그래서 ‘까만흙이’ 같은 이름도 써 볼 수 있고, ‘까만밤이’ 같은 이름도 쓸 수 있습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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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76] 늘사랑



  가을이나 겨울에도 푸른 잎사귀를 매단 나무를 가리켜 ‘늘푸른나무’라고 해요. 이 늘푸른나무 가운데 잎이 넓은 나무는 ‘늘푸른넓은잎나무’입니다. 늘푸른나무 가운데 밑동에서 잔가지가 많이 나는 나무는 ‘늘푸른떨기나무’입니다. 늘푸른나무 가운데 키가 죽죽 뻗는 나무는 ‘늘푸른큰키나무’예요. 잎이 늘 푸르게 우거져서 늘푸른나무이듯이, 고단하거나 힘든 날이 있어도 씩씩하거나 의젓한 사람이 있으면 ‘늘푸른마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곱고 따스한 사랑을 나누는 이웃이 있으면 ‘늘사랑’을 나눈다고 할 만해요. 즐거울 때에도 슬플 때에도 꿈을 가슴에 꼭 품으면 ‘늘꿈’을 품는다고 할 테고, 당찬 몸짓으로 가시밭길을 헤치는 동무한테는 ‘늘기쁨’이 넘친다거나 ‘늘웃음’으로 노래한다고 할 수 있어요. ‘늘푸른-’을 붙이듯이 ‘늘하얀-’을 붙여서 ‘늘하얀마음’이라 하면 어떤 마음일까요? ‘늘하얀웃음’은 어떤 웃음일까요? ‘늘하얀눈’이라면 여름에까지 녹지 않는 히말라야를 떠올릴 만할까요? 우리는 ‘늘노래’인 마음결이 될 수 있어요. ‘늘고운’ 마음으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고, ‘늘착한’ 마음씨가 될 수 있습니다. 4349.1.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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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75] 새해에 기쁨을 지어요



  새해를 맞이하면 서로 새롭게 절을 합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절을 하기도 하고, 손을 내밀면서 웃는 눈짓을 나누기도 하며, 소리 높이 외치는 말로 즐거운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하고 인사말을 하기도 하는데, 요즈음은 “새해 복 많이 지으셔요” 하는 인사말을 하기도 합니다. 남이 주는 ‘복’을 받으려 하기보다 스스로 ‘복’을 지어서 누리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복’이란, 그러니까 ‘기쁨’이란 남이 선물로 줄 때에도 피어날 테지만 스스로 힘써서 새롭게 지을 때에 한결 곱고 눈부시게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에 주고받는 인사말을 그야말로 새롭게 지어서 쓸 수 있어요. “새해에 기쁨을 지어요”라든지 “새해에 기쁨 듬뿍 지으셔요”라든지 “새해에 언제나 기쁨을 지으면서 웃어요”라든지 “기쁨 짓는 새해 누리셔요”라든지 “기쁨을 지으며 노래하는 새해 되셔요” 같은 인사말을 새롭게 지을 수 있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새롭고 재미난 생각을 담아서 활짝 웃는 인사말을 새삼스레 지을 수 있어요. ‘기쁨짓기’를 하자는 새해입니다. 4349.1.1.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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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174] 걸어 봐



  같은 생김새나 말소리라 하더라도 뜻이나 느낌이 아주 다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입으로 읊는 ‘말’하고 들판을 달리는 ‘말’은 생김새가 같지만 아주 다른 낱말이에요. 낮이 지나고 찾아오는 ‘밤’하고 나무에 맺는 열매인 ‘밤’은 생김새나 말소리가 같아도 아주 다른 낱말이고요. 이리하여 이런 여러 말을 섞어서 말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걸어 봐” 하고 읊는 말을 생각해 봐요. “걸어 봐” 하고 누군가 말한다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두 다리로 길을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르나요? 전화를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르나요? 모자를 옷걸이에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르나요? 싸움을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르나요? 다짐을 하려고 손가락을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르나요? 내기를 걸어 보거나 돈을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르나요? 문을 꼭 잠그려고 자물쇠를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르나요? 넘어지도록 다리를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르나요? 이야기를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를 만한가요? 밥을 끓이려고 솥을 걸어 보라는 뜻이 떠오를 수 있을까요? 말소리나 생김새는 같아도 뜻이 다른 말을 들려주는 놀이를 하면서 생각을 넓히거나 마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4348.12.3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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