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무형광 무표백 종이·휴지 : 글을 그렇게 써대느라 종이를 그렇게 써대고 살면서도 종이를 어떻게 빚는가를 제대로 살핀 지 얼마 안 된다. 곁님이 문득 이야기를 했기에 비로소 깨달았는데, 나한테 핀잔을 하더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책이며 글을 그렇게 껴안는 주제에 어떻게 연필 하나 종이 하나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그렇게 안 쳐다볼 수 있었느냐고. 곰곰이 생각하니, 나 스스로도 놀라운 노릇이다. 어떻게 나는 종이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또 종이에 어떻게 형광물질이나 표백제를 비롯한 화학약품을 그렇게 써대는 줄 하나도 안 헤아렸을까? 아이가 태어나기 앞서 천기저귀를 살피며 이때에 이르러서야 형광물질하고 표백제가 우리를 곳곳에서 둘러싼 줄 알아챘다. 곁님이 덧붙이지 않아도 갸우뚱한 일이 있다. 여느 흰종이가 몽땅 형광물질하고 표백제 범벅이라면, 형광물질이며 표백제를 안 쓴 누런종이(크라프트지 또는 똥종이 또는 갱지)가 값이 눅어야 할 텐데, 오히려 누런종이가 흰종이보다 비싸다. 흰종이는 값이 싸다. 우리는 더 값이 싸고 ‘하얘서 보기 좋다’는 말에 휘둘린 채, 어느새 ‘숲에서 살던 나무하고 가까운 숨결’인 누런종이하고 멀어진 오늘이 되었구나 싶다. 2007.5.1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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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그냥 : 어제 두 분한테 연필을 두 자루 빌려주었는데 못 받은 줄 아침에 깨닫다. 연필을 쓰려고 찾는데 여기도 저기도 없네. 그렇지만 여러 주머니에 연필을 늘 잔뜩 챙겨서 다니기에 두 자루를 돌려받지 못했어도 걱정이 없다. 내 손에서 사랑을 받던 연필은 어느 이웃 손으로 건너가서 새롭게 사랑을 받겠지. 앞으로 새로운 연필이 나한테 찾아올 테니, 내 연필을 그냥 가져간 분이 있더라도 좋다. 내 연필을 그냥 가져간 분은 어쩌면 깜빡 잊었을 테고, 어쩌면 글힘을 얻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내가 쓰던 연필을 이웃님한테 슬쩍슬쩍 드리고서 잊은 척해 볼까 싶기도 하다. 나야 새 연필을 장만하면 그만이니까. 내 곁에서 글힘이며 글사랑을 받은 연필이 고루고루 퍼지면, 글쓰기란 언제나 즐거운 놀이요 살림이자 사랑이라는 기운이 씨앗처럼 차츰차츰 퍼질는지 모른다. 2019.10.1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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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했으니 : 어제 했으니 오늘은 잊거나 미룬다면, 오늘은 ‘죽은날’이 되기를 바라는 셈일까. 어제 하던 길을 오늘은 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쳇바퀴에 뒷걸음이 되기를 꿈꾸는 판일까.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날마다 새로운 하루인 줄 스스로 알아차리면서 날마다 번쩍 눈을 뜨는 기쁨을 누린 그때부터 신나게 새로 하면 될 뿐이라는 말이다. 어제 한 멋진 길을 오늘은 새롭게, 어제 지은 아름다운 길을 오늘은 사랑스럽게, 어제 걸은 즐거운 길을 오늘은 휘파람을 불면서 늘 처음이라는 마음이 되어 하면 넉넉하다. 1993.12.7.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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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 “난 참 자유롭게 사는데?” 하고 말하는 사람이 조용히 있도록,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입을 싹 다물도록 할 만큼 ‘깨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이때에 “난 참 자유롭게 사는데?” 하고 말하던 사람은 그이가 입으로는 ‘자유롭게’를 밝히고 다녔으나 막상 제대로 자유로운 적이 없는 줄, 홀가분한 길이 아니라 ‘남이 보기에 이녁이 나아 보이도록 꾸민 몸짓’이었네 하고 느끼기 마련이다. 자, 이런 판이 벌어진다면, 언제나 두 가지 다음 길이 드러난다. 첫째, 이제는 입으로 “난 참 자유롭게 사는데?” 하는 말을 더는 읊지 않고서 참다이 홀가분하게 노래하는 길을 간다. 둘째, 앞으로도 입으로 “난 참 자유롭게 사는데?” 하는 말을 끝없이 읊을 마음으로 저 ‘깨면’서 사는 사람을 시샘하거나 미워하거나 손가락질하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려고 한다. ‘자유롭게’ 한 가지를 보기로 들었는데, 이 낱말을 ‘진보’라든지 ‘개혁’이라든지 ‘평화’라든지 ‘평등’이라든지 ‘친환경’이란 낱말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매한가지이다. 2001.7.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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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리다 : 처음 말이 태어날 적에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흘렀을 말일 텐데, 어느새 많이 뒤바뀐다. 왜 뒤바뀌거나 뒤틀리는가? 말이 사람한테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빛인 줄 알기에, 사람들이 이 빛을 못 누리거나 등돌리거나 저버리거나 몇몇이 거머쥔다면, ‘말빛을 잊거나 잃은 사람’을 ‘종(노예)으로 부릴 수 있는’ 줄까지 알아챈 이들이 있기에 그렇다. 총칼로 사람을 윽박지르는 이들이 왜 ‘말’을 마구 뒤흔들까? 또 사람들이 막말을 일삼거나 아무 말이나 하는 판을 꾸밀까? 슬기롭거나 어질거나 참한 말을 쓰는 사람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 깨어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레 깨어날 적에는, 그 어떤 총칼도 덧없는 노릇이 된다. 말빛을 잊거나 잃기에 종살이에 허덕인다면, 이들 종은 그저 쳇바퀴에 스스로 갇힌 채 총칼질 우두머리가 시키는 대로 맴돌기 쉽다. 말빛을 바로잡아서 환하게 퍼뜨리는 길이란, 총칼질을 이 땅에서 걷어내는 춤사위이다. 그렇다고 ‘바른말 고운말’을 써야 좋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쓸 말은 ‘맞춤법 띄어쓰기’도 아니자만 ‘바른말 고운말’도 아니다. 오직 ‘아름말 사랑말 슬기말 참말 꽃말’이다. 스스로 아름답게 피어날 아름말을, 스스로 사랑이 샘솟을 사랑말을, 스스로 슬기롭게 살림할 슬기말을, 스스로 참답게 생각하며 꿈꿀 참말을, 스스로 꽃이 되어 어깨동무할 꽃말을 쓰면 된다. 뒤바뀌거나 뒤틀린 결을 하나씩 바로잡으려고 새말을 새로운 삶터인 숲에서 짓는다. 2019.1.1.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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