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비가 쏟아지는 날 : 아이랑 풀밭이나 마당에서 비를 흠씬 맞으면서 놀아 보자. 자전거도 비를 맞추면서 빗물로 씻어 주자. 비가 오는 날은 온 집이 다 씻는다. 지붕도 마당도 씻고, 나뭇잎도 풀잎도 씻는다. 하늘도 마을길도 씻지. 이렇게 다 씻 주는 비이니, 우리 몸을 아주 말끔히 씻을 만하리라. 더구나 몸을 씻는 사이에 마음까지 저절로 씻는다. 2010.9.4.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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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죽다 : 꿈에서 죽는 일이란, 우리가 낡은 틀을 하나 깨고서 새로 일어난다는 뜻이지 싶다. 꿈에서 죽는 일이 두렵거나 무섭다면, 꿈이기 때문에 우리가 안 바라는 일은 언제나 모두 그자리에서 바꿀 수 있으니, 꿈에서 안 죽고 싶으면, 아니 죽었더라도, 그 죽은 몸을 되살려 내면 되겠지. 참말로 꿈이기에, ‘아, 내가 죽었네?’ 하고 생각한 뒤에, ‘자, 그럼 죽은 몸을 살려 볼까?’ 하면서 스스럼없이 일으키면 어느새 ‘꿈에서 죽었던 몸이 새롭게 일어나서 움직이’곤 한다. ‘뭐야, 죽었잖아!’ 하고 슬퍼하거나 싫어하거나 괴로워하거나 힘들어하거나 미워하거나 꺼리면, 이 기운은 찝찝하게 이어간다. 누구나 꿈에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꿈에서 마주하는 죽음은, 우리 몸에 깃들던 시커먼 기운 가운데 하나를 고이 떠내보내는 일이니, 이 시커먼 기운이 사라진 마음을 찬찬히 돌볼 수 있도록 고요히 몸을 다스리면 좋으리라. 확 깨어나야 하는 일이 있기에 꿈에서 자꾸 죽는다. 2019.10.2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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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게 : 푸르게 우거진 곳에서 지내면 아이도 어른도 마음이며 몸이 확 달라진다. 푸르지 않은 곳에서 지내면 아이도 어른도 마음이며 몸이 또 다른 길로 확 달라지지. 어느 곳이 우리 넋을 푸르게 가꿀까? 어느 곳에서 우리 넋은 ‘안 푸르게’ 될까? 2011.8.7.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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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일 뿐 : 겪어 보면서 달라질까? 겪는대서 달라질까? 아니지 싶다. 겪기에 달라진다기보다, 이제 그만 겪고서 새로운 길을 겪는 쪽으로 갈 뿐 아닐까? 신물이 나도록 겪었어도 그 신물나는 짓을 끊거나 멈추지 않는다면, ‘신물이 나는데에도 이 신물이 나는 마음으로도 거듭 겪는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겪지 않았는데에도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오늘 이 삶이 아닌 어제 그 삶에서 겪어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 예전 삶에서 예전 몸으로 다 겪은 일은 굳이 이곳에서 다시 겪지 않겠지. 진보라느니 보수라느니 갈라서 툭탁거리지만, 이들 가운데 진보다운 진보나 보수다운 보수가 있는지 아리송하다. 둘 다 쇠밥그릇을 거머쥐고서 저희 자리를 얼마나 튼튼히 지키느냐 하는 담쌓기를 ‘해보는(겪는·경험)’ 길만 치닫지 싶다. 그들은 그들대로 그들 삶길이 수렁이나 벼랑인 줄 모를 수 있고, 그 수렁이나 벼랑이 오히려 짜릿짜릿하다면서 못 멈출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아닌 나는? 오늘을 본다. 새벽에 밝아 오는 빛을 본다. 바야흐로 깨어나서 노래하는 새를 만난다. 늦가을 마른풀은 매우 보드라워서 도무지 신을 꿸 수 없다. 맨발로 마른풀을 밟으면서 나무 곁에 선다. 감나무야, 넌 간밤에 무엇을 보았니? 모과나무야, 넌 지난밤에 어디를 돌아다녔니? 후박나무야, 넌 한밤에 어떤 별빛을 품었니? 내가 스스로 겪고 싶은 길이라면, 이 별에서 온갖 나무하고 마음으로 이야기하면서 나무마다 나무다움을 살살 북돋우면서 아끼고 싶은 하루라고 느낀다. 2018.10.20.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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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창조론 : (한국) 학교에서는 ‘진화론’ 하나만 가르치면서 ‘창조론’은 엉터리라고 몰아붙인다. 문득 궁금해서 사전을 뒤적이니, 사전에도 ‘진화론·진화설’은 올림말로 다루되 ‘창조론·창조설’은 아예 없다. 가만 보면 (한국) 학교는 외곬로 치닫는 교과서에 갇히기 일쑤이다. 아직 한국 학교만 양자물리학조차 거의 안 가르치다시피 하는데, 따지고 보면 못 가르칠 만하지 싶다. 양자물리학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길잡이라면 아이들한테 엉터리로 들려주거나 뜬금없는 지식을 퍼뜨릴 테니까.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모두 ‘론(論)’이다. 그저 ‘말’이나 ‘생각’일 뿐이란 소리이다. 나는 ‘진화론’을 거의 믿지 못한다. 왜 못 믿는가 하면,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 터전은 조금도 ‘진화·진보’를 못하지 싶으니까. 보라, 이 나라가 얼마나 진화하거나 진보했는가? 이 꼴을 진화나 진보로 여길 만한가? 그렇게 진화나 진보를 잘했기에 한국은 지구에서 자살율이 끔찍하게 높은가? 게다가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가장 많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가 한국인데, 무슨 얼어죽을 진화나 진보인가? 배움터가 배움터답게 나아가도록 틀을 마련하는 우두머리란 보이지 않는다. 고작 대학입시 틀을 바꿀 뿐이다. 대학교 앞에서 줄세우기 하는 데에서 멈출 뿐인 이 나라 얼마나 진화하거나 진보했는가? 독재자 몇을 끌어내렸더라도 ‘탈을 쓴 새로운’ 독재자가 바보짓을 그대로 잇는다면, 이는 진화도 진보도 아니라고 느낀다. 그렇다고 ‘창조론’을 믿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하나, “모든 삶은 우리가 스스로 지어서 누린다”고 느낀다. 내가 스스로, 네가 스스로, 우리가 스스로, 이 모든 지구라는 별을 지어서 저마다 다른 삶을 누리지 싶다. 그러니 거듭거듭 생각한다. 어떤 나라를 짓고 싶니? 어떤 별을 짓고 싶니? 어떤 보금자리를 짓고 싶니? 어떤 나다운 사람으로 나아가는 사랑을 짓고 싶니? 2019.10.22.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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