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16. 놀면서 자라는 말
― 싱그러운 삶에 싱그러운 말

 


  물을 마십니다. 더운 여름날 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 물을 마십니다. 옛날 사람들은 냇물을 마시거나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때로는 빗물을 받아서 마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땅밑으로 깊이 파서 땅밑물을 마십니다. 때로는 댐을 지어 물을 가둔 뒤 물관을 이어 수도물을 마십니다. 누군가는 가게에서 먹는샘물을 사다가 마십니다. 먹는샘물도 땅밑물처럼 땅밑으로 깊이 파서 뽑아올린 물입니다.


  물마다 물맛이 다릅니다. 골짜기에서 흐르는 골짝물과 들판에서 흐르는 냇물은 물맛이 다릅니다. 도시에서 쓰려고 댐에 가둔 물이랑 논에 대려고 못에 가둔 물은 서로 맛이 다릅니다. 같은 땅밑물이라 하더라도 플라스틱병에 담은 먹는샘물하고 시골마을에서 그때그때 뽑아올리는 땅밑물은 맛이 다릅니다.


  돌이켜보면, 옛날에는 물이 더러워질 일 없기에 냇물도 빗물도 즐겁게 마십니다. 굳이 땅밑을 깊이 파헤쳐서 물을 뽑아올리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물이 깨끗한 곳이 아주 많이 줄어든 터라 땅밑물도 좀처럼 마시기 힘들고, 도시와 멀리 떨어진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에 커다랗게 댐을 지어 수도물을 쓰곤 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물을 맑고 정갈하게 지키면,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냇물이나 빗물이나 땅밑물이나 우물물 마실 수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맑은 물 마시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퍽 적어요. 여느 때에 늘 마주하는 물을 맑으면서 시원하게 돌보는 길보다, 돈을 들여서 물을 사다 마시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물이 더러워지고 흙이 망가지면서 날씨가 어지럽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누구나 알듯, 도시 문명 사회가 되면서 공장과 자동차와 발전소 부쩍 늘어 물과 흙이 더러워집니다. 공장은 자꾸 늘고, 자동차 때문에 찻길과 고속도로 자꾸 닦으며, 발전소 새로 짓고 송전탑 자꾸 세웁니다. 골프장과 관광지를 만들기도 하니, 조용하면서 깨끗한 시골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이런 흐름이 깊어지는 만큼, 날씨가 미치지요. 날씨가 미치면서 큰비와 막비가 들이붓습니다. 날씨를 알리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으레 ‘물폭탄’이라 말하는데, 꼭 날씨 때문에 전쟁이라도 터졌다는 듯한 말씨입니다. 어쩌면 전쟁과도 같은 큰비이거나 막비라고 느낄는지 모르겠어요.


  요즈음에는 시골에서조차 무지개를 거의 못 봅니다. 소나기도 거의 못 만납니다. 뭉개구름도 좀처럼 못 봅니다. 날씨가 일그러지면서 몽실몽실 한여름 예쁜 구름이 생기지 못하고, 뭉게구름 생기지 못하니 소나기 찾아들지 않으며, 소나기 찾아들지 않기에 무지개가 뜨지 않아요. 하늘빛이 뿌옇게 되니, 밤하늘 밤별 가득 누리는 시골도 드물어, 미리내를 찾아보기도 어려워요.


  예전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빛 가득 누리던 삶이었기에, 낮달도 밤별도 무지개도 미리내도 늘 보았어요. 책이나 영화에 나오는 낱말이나 모습 아닌 삶으로 한결같이 부대끼는 말마디였어요.


  이제 도시에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랄 빈터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놀이터조차 아파트 있는 데 아니면 없어, 아이들 놀 자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놀이’를 할 틈도 겨를도 자리도 없어요. 요새 아이들은 놀이 아닌 ‘게임’을 해요. 주말이나 방학을 맞이해 ‘레크리에이션’을 배우기도 합니다. 놀이 아닌 게임이 되면서, 게임에서 쓰는 말은 하나같이 ‘game’과 같은 영어요, 어른들은 아예 아이들한테 ‘영어 게임’을 시키며 ‘영어 학습’으로 치닫습니다.


  노는 아이들은 뛰놀면서 놀이동무를 사귑니다. 무더위에도 땡볕에서 신나게 놉니다. 바깥에서 한껏 뛰놀면서 살갗이 까무잡잡하게 바뀝니다. 어른들은 ‘폭염주의보’라느니 하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후끈후끈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아요. 놀이에 폭 빠지면 온통 놀이 생각입니다.


  몸을 놀리면서 몸이 튼튼하게 자랍니다. 몸을 놀리니 몸놀림이 새롭게 거듭납니다. 몸놀림이 거듭나면서 손놀림도 남달리 나아집니다. 몸과 손이 튼튼하게 자라면 마음과 꿈과 생각과 사랑도 튼튼하게 자랄 테니, 마음놀림과 꿈놀림도 나란히 예쁘게 자라겠지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놀리지 않으려 합니다. 아니, 자동차가 너무 많고 자동차 댈 땅이 모자란 탓에 골목이나 빈터가 없어, 아이들이 걱정없이 놀 자리가 없다 할 만합니다. 아이들이 놀 골목이나 빈터가 사라지면서, 어른들도 쉴 자리를 잃고, 어른들은 그나마 집안에 꽃이랑 풀이랑 나무를 두려 합니다. 그릇에 흙을 담아 꽃씨를 심어요. 제법 큰 그릇에는 제법 흙을 많이 담고는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 돌보기도 합니다. 어려운 말로 ‘화초’나 ‘원예’나 ‘분재’라고 하는데, 어느 한자말이든 ‘꽃’을 가리켜요. ‘꽃심기’나 ‘꽃가꾸기’입니다.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외톨이 동물원》(비룡소,2003)이라는 동화책 읽다가 98쪽에서 “이튿날의 일이었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일본사람은 무슨 말을 하건 ‘の’를 붙여요. 이를 잘못 옮기면 ‘-의’를 붙이는 말씨가 돼요. 한국사람 한국말은 “어제 일”이나 “모레 이야기”나 “지난해 모습”이나 “그러께 선물”인데, 일본사람은 이런 말마디 사이에 꼭 ‘-의’를 넣어요. 일본 만화영화 이름은 “紅の豚”이고 “風の谷のナウシカ”예요. 이를 한국말로 옮기면 “붉은 돼지”와 “바람 골짜기 나우시카”입니다. 아이들한테 읽히는 동화책에 어떤 낱말과 말씨를 쓰느냐는 무척 큰 일이에요. 어른들부터 스스로 싱그러운 삶과 싱그러운 말을 아낄 노릇이에요. 그래도 이 글월에서는 ‘이튿날’이라는 낱말을 썼어요. 그다음 날이라서 ‘이튿날’인데, 곰곰이 살피면 ‘이듬날·이듬주·이듬달·이듬해’하고 ‘다음날·다음주·다음달·다음해’처럼 알뜰살뜰 쓸 수 있어요.


  삶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결에 따라 말이 달라요. 즐겁게 놀며 맑은 물 마시고 풀이랑 꽃이랑 나무를 노상 마주하는 삶이라면, 이러한 삶에 따라 싱그럽게 빛나는 말이 태어나요. 놀이동무와 함께 씩씩하게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은 이웃을 살피고 아끼는 마음을 키우며 사랑스럽게 빛나는 말을 가꾸어요. 놀이하는 아이도 일하는 어른도 따사로운 보금자리 누릴 때에 따사로운 마음입니다. 4346.7.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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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17. 햇볕과 햇빛과 햇살
― 사랑스레 쓸 적에 사랑이 퍼집니다

 


  해는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내리쬡니다. 여름에는 몹시 덥다고 느끼는 해요, 겨울에는 참 춥다고 느끼는 해입니다. 그런데, 해가 여름에 덜 내리쬐면 풀도 나무도 곡식도 열매도 제대로 자라지 않아요. 해가 겨울에 더 내리쬐면 풀도 나무도 흙도 땅도 냇물도 제대로 쉬지 못해요. 해는 늘 알맞게 내리쬐면서 지구별을 따사로이 보듬습니다. 철마다 조금씩 다르게 빛과 볕과 살을 나누어 주면서 지구별을 포근하게 감쌉니다.


  황인숙 님 시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문학세계사,2013)를 읽다가 〈나비〉라는 글에서 “노란 셀로판지 같은 햇발 한가운데”라는 대목을 봅니다. 살짝 시집을 덮습니다. ‘햇발’이라는 낱말을 입으로 굴립니다. 햇발, 햇발, 햇발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시인 한 사람이 쓴 낱말 하나 새롭게 빛나는 넋이 됩니다.


  해를 가리키는 낱말을 떠올립니다. 국어사전을 펼치고 해와 얽힌 낱말을 이모저모 살펴봅니다. ‘햇볕·햇빛·햇살·햇발·햇귀’가 있고, ‘햇무리·햇덧·해껏·해거름·해돋이’가 있습니다. ‘해껏’은 “해가 질 때까지”를 뜻하고, ‘햇귀’는 “해가 처음 솟을 때에 퍼지는 빛”을 뜻하며, ‘햇덧’은 “해가 지는 짧은 동안”을 뜻해요. 오늘날 사람들은 ‘햇발·햇귀·햇덧·해껏’ 같은 낱말은 거의 안 쓰지 싶습니다.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해거름·해돋이·햇무리’를 날마다 찬찬히 바라보거나 즐기는 일은 퍽 드물지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처음 학교에 들어 여섯 해를 다니고, 새로운 학교에서 세 해를 다닌 다음, 또 세 해를 다닐 적에, 해와 얽힌 낱말을 찬찬히 들려준 둘레 어른은 없구나 싶어요. 학교나 동네에서 어른들이 ‘햇볕·햇빛·햇살·햇발’이 저마다 어떤 뜻인가를 찬찬히 밝히셔 알려준 적 없구나 싶어요.


  국어사전을 열 가지쯤 펼치고, 또 어릴 적부터 보고 듣고 겪으며 생각한 여러 가지를 헤아리면서, 해와 얽힌 낱말 가운데 네 가지를 새롭게 풀이해 봅니다. ‘햇볕’은 “해가 내리쬐는 볕”입니다. 햇볕을 쬐며 풀과 나무가 싱그럽게 자랍니다. 사람도 다른 목숨도 모두 햇볕을 머금을 때에 튼튼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햇빛’은 “해가 비추는 빛”입니다. 햇빛이 비추기에 어둠이 지나갑니다. 햇빛이 비추면서 모든 숨결이 제 빛깔을 띠어요. 온누리에 빛깔을 입히는 ‘햇빛’입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빛깔은 ‘햇빛’이 있기에 느껴요. ‘햇살’은 “해가 드리우는 빛줄기”입니다. “눈부신 햇살”이라고 해요. 날이 맑으면 햇살을 산뜻하게 느껴요.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드리우는 모습 본 적 있나요? 바로 그 빛줄기가 햇살이에요. 공장이나 자동차 없던 옛날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나 햇살을 느꼈다고 해요. 해가 볕과 빛을 지구별이 내리쬐거나 비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살’이 햇살입니다. ‘햇발’은 “곳곳으로 뻗는 햇살”입니다. ‘햇살’은 한 줄기 빛이라면, ‘햇발’은 골고루 퍼지는 햇살 무리라고 하겠지요. 곧, 해와 얽힌 낱말은 ‘햇볕·햇빛·햇살’로 크게 나누고,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로 찬찬히 가리키거나 밝힌다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햇볕이 비춘다”고 말하면 잘못 말하는 셈이고, “햇빛이 내리쬔다”고 말할 적에도 잘못 말하는 셈입니다. “햇살이 눈부시다”고 해야지, “햇빛이 눈부시다”나 “햇볕이 눈부시다”라 할 수 없어요. 또한, “햇볕이 따갑다”고 해야 맞고, “햇살이 따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해를 얼마나 잘 느낄까 궁금합니다. 하루 가운데 몇 분쯤 해를 듬뿍 맞이할까 궁금합니다. 햇볕이든 햇빛이든 햇살이든, 스스로 해를 바라보면서 신나게 뛰놀아야 비로소 제대로 깨닫거나 느낄 수 있어요. 해를 바라보며 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낱말뜻을 달달 외운다고 하더라도 이 낱말들을 알맞거나 올바로 쓰지 못해요.


  그리고, ‘해’를 높여 ‘해님’이라 합니다. 달을 높여 ‘달님’이라 하고, 별을 높여 ‘별님’이라 해요. ‘햇님’이 아닌 ‘해님’입니다. 사이시옷을 잘못 받쳐 쓰는 분들은 조금 더 헤아리면 돼요. 이를테면, ‘개미님’이나 ‘사마귀님’처럼 말하고 ‘개님’이나 ‘고양이님’처럼 말하지, ‘개밋님’이나 ‘사마귓님’이나 ‘갯님’이나 ‘고양잇님’처럼 말하지 않아요. 해는 해이니까 ‘해님’입니다.


  해가 갈수록 여름이 무덥다 합니다. 땡볕과 불볕은 한결 후끈후끈 달아오른다고 합니다. 가을에도 이 뜨거운 볕이 그대로 이어갈까요. 가을이면 이 뜨거운 볕이 수그러들면서 온누리에 고운 빛을 살포시 내려앉힐까요.


  가을볕은 여름볕처럼 뜨겁지 않기를 빌어요. 가을빛은 여름빛과 사뭇 다르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들한테 들려주리라 믿어요.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춥고 매서운 바람 몰아칠 텐데, 추우면서 매서운 날씨 이어지더라도, 겨울볕 포근히 드리우면서 사람들 보금자리에 따사로운 사랑 나누어 줄 수 있기를 빌어요. 겨울에는 새삼스러운 겨울빛 퍼지면서 온누리가 하얗게 될 테지요. 그리고, 겨울이 저물며 봄이 새롭게 찾아오면 봄볕이 언 땅을 녹이고, 봄빛이 사람들 눈빛을 환하고 맑게 밝히겠지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빛이 곱습니다. 들과 풀밭을 바라봅니다. 푸르게 빛나는 풀빛이 예쁩니다. 여름에 새로 깨어난 사마귀와 메뚜기와 방아깨비가 앙증맞도록 조그맣습니다. 어린 사마귀와 메뚜기와 방아깨비는 무럭무럭 자라겠지요. 풀밭에서 노는 사마귀와 방아깨비는 온몸이 풀빛입니다.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어 풀빛이 누렇게 물들면, 온몸이 풀빛이던 사마귀와 방아깨비는 누렇게 물든 풀잎처럼, 몸빛이 달라질 테지요. 또는 흙빛처럼 흙사마귀와 흙방아깨비 빛깔이 될 테지요.


  우리 사람들은 어떤 빛깔일까요. ‘사람빛’이란, 또 사람들 ‘마음빛’과 ‘생각빛’이란,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빛’이란, 어떤 빛깔 되어 아름다운 이야기로 널리 퍼질까요. 사랑스레 말하면서 사랑이 퍼지기를 빕니다. 4346.8.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

 

'경기문화재단' 사외보에 실으려고 쓴 글인데, 지난 9-10월호에 실었는데 미처 못 올렸네요. 뒤늦게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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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1-06 09:35   좋아요 0 | URL
해를 가리키는 낱말들이 이렇게 예쁘고 많군요~
정말 그런 듯 싶어요. 말이란 그 말을 쓸 때마다 제각기
다르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빛을 우리에게 주네요!
오늘도 함께살기님 덕분에 '사랑빛' 만나 감사드려요~*^^*

숲노래 2013-11-06 10:54   좋아요 0 | URL
해를 가만히 생각하고 보면
더 많은 낱말을 곱게 지을 수도 있어요~

페크(pek0501) 2013-11-06 17:59   좋아요 0 | URL
사외보에 글을 싣고 계시는군요.
이런 뉴스는 꼭 알려야 하는 것이죠. ^^

숲노래 2013-11-06 20:21   좋아요 0 | URL
아직 사외보는 한 군데에만 글을 쓰는데,
곧 여러 군데 사외보에도 글을 써서
일삯도 벌고 아름다운 글도 쓸 수 있으면
참으로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
 

말넋 12. 말을 배운다
― 서로 다른 삶을 말로 주고받는다

 


  예전에는 ‘내가 사는 고장’ 아닌 다른 곳으로 가면 ‘그 고장에서 사는 사람이 쓰는 말’을 배웠습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같은 인천이라 하더라도 내가 먹고 자고 놀고 뛰고 어울리고 하는 마을에서 쓰는 말이랑, 언덕 하나 넘어가는 마을에서 쓰는 말이랑 조금씩 달랐어요. 큰길 건너 이웃한 마을에서 쓰는 말도 달랐고, 버스를 타고 한참 달려서 찾아가는 다른 이웃마을에서 쓰는 말도 달랐어요.


  그렇다고 경상도말과 충청도말과 전라도말 사이에 다르듯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말씨가 살짝 다르고, 말결이 살짝 다릅니다. 말하는 높낮이가 다르고 빠르기가 달라요. 나어린 우리들은 우리 마을에서 놀 적에 딱히 걸리는 일이 없습니다. 한 마을에서 살아가니까요. 한 마을 동무끼리는 어떤 놀이를 하건 말이 같고 놀이를 하는 법(규칙)이 같습니다. 놀이에서 쓰는 말도 같아요. 그런데, 신흥동에서 숭의동으로 놀러가면, 용현동에서 구월동으로 놀러가면, 만석동에서 송림동으로 놀러가면, 화평동에서 전동으로 놀러가면, 저마다 말씨도 말투도 말결도 살짝살짝 다릅니다. 말씨가 다른 만큼 놀이하는 법이 다르고, 놀이에서 쓰는 말이 다릅니다.


  인천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간다든지 어느 시골로 간다면, 또 서로 말과 놀이법이 달라요. 아이들끼리 서로 어울려 놀면서도 말씨와 놀이법이 다르니 곧잘 부딪힙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이렇다 하더라도 저 마을에서는 저렇게 하니, 좀처럼 뜻이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다툼을 벌이다가, “좋아,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마을에서 하는 대로 하고, 다음에는 너희 마을에서 하는 대로 하자.” 하면서, 한 번씩 놀이법을 바꾸며 같은 놀이를 합니다. 술래잡기도, 돌치기도, 구슬치기도, 고무줄놀이도, 공기놀이도, 참말 마을에 따라 고장에 따라 놀이말이랑 놀이법이 사뭇 달랐어요.


  어릴 적에는 왜 이렇게 놀이말이랑 놀이법이 다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다른 줄 몰랐어도 다른 마을이나 고장이 놀러갔으면, 한나절 뒤에는 다른 마을과 고장에서 쓰는 놀이말이랑 놀이법이 익숙합니다. 때로는 다른 마을과 고장에서 하는 대로 노니 새롭고 재미나기도 합니다. 거꾸로, 다른 마을이나 고장 동무들도 우리 마을로 찾아와서 우리 마을에서 하는 대로 놀이말과 놀이법을 바꾸면서 재미나거나 새롭다고 느낍니다.


  삶자리에 따라 말이 다릅니다. 삶에 따라 말이 다릅니다. 곧, 한 고장이라 하더라도 고장을 이루는 조그마한 마을마다 말이 달라요. 전주·청주·해남이라는 고장은 이러한 고장대로 말씨가 다를 텐데, 이 고장에서도 읍과 면으로 들어가면, 읍과 면에서 또 작은 마을로 더 들어가면, 저마다 말씨가 다르지요. 또 작은 마을에서도 냇물 건너와 골짝 건너 더욱 작은 마을에서 말씨가 다르고, 더욱 작은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말이 달라요. 모든 사람은 삶이 다르기에 모든 사람은 이녁 삶에 맞추어 다른 말을 누립니다.


  그러고 보면, 말을 배운다고 할 적에는 ‘삶을 배운다’고 할 만합니다. 삶을 배우려는 뜻에서 말을 배운다고 할 만합니다. 외국말을 배우는 때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핀란드말이나 네덜란드말을 배워 보셔요. 핀란드와 네덜란드를 한결 깊고 넓게 살피며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이 일본말을 배워 일본에서 지내거나 일본을 돌아다닌다면, 훨씬 깊고 넓게 살피며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일본사람도 한국말 배워 한국에 올 적이랑 한국말 모르는 채 한국에 올 적은 아주 다릅니다.


  이효리 님이 쓴 《가까이》(북하우스,2012)라는 책 217쪽을 보면, “나는 사회인이고 연예인이고 채식주의자다.”와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이효리 님은 “채식(菜食)을 즐긴다”고 하는군요. 요즈음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먹을 적에 ‘육식(肉食)’이라고들 하고, 풀을 즐겨먹을 적에 ‘채식’이라 하니, 무슨무슨 ‘주의자’라고도 적는구나 싶어요. 그런데, 채식이란 ‘풀먹기’요, 육식이란 ‘고기먹기’입니다. 한자로 새 낱말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말로 새 낱말 빚을 수 있어요. 따로 한 낱말로 빚지 않는다면 “나는 풀을 먹어요”라든지 “나는 고기를 좋아해요”라든지 “나는 풀 먹는 사람이에요”라든지 “나는 고기를 즐겨먹어요”처럼 말하면 넉넉합니다. 아직 ‘즐겨먹기’는 국어사전에 안 오르는 낱말인데, 앞으로는 이런 낱말도 국어사전에 실으며 즐겁게 쓰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바바라 아몬드 님이 쓴 글을 김진·김윤창 두 분이 옮김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간장,2013)라는 책을 읽다가 286쪽에서 “그 관계 덕분에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대안적인 성인 여자들의 본보기를 마음속으로”라는 글월을 봅니다. “대안적인 성인 여자들의 본보기”라 나오는데, “또 다른 여자 어른들 본보기”라든지 “여자 어른들 새로운 본보기”로 손질할 만합니다. 아무튼, 이 글월에 “기대고 의지(依支)할 수 있는”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외국책 한국말로 옮긴 분들한테 이러한 말투가 익숙하기에 아무렇지 않게 이처럼 글을 쓰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도 한국말을 깊거나 넓게 헤아리지 않으면, 이러한 말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리라 봅니다. 요즈음 한국사람은 이 말투를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이 말투가 올바르거나 알맞는가를 생각하면서 글을 읽을 수 있을까요.

  한자말 ‘의지하다’는 “= 기대다”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대고 의지할”은 겹말입니다. “기댈”로 손질하든지 “기대고 믿을 만한”처럼 적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쓰는 글 한 줄은 이 글을 읽을 사람한테 잘못된 말투를 퍼뜨립니다. 넓게 돌아보지 않고 읊는 말 한 마디는 이 말을 들을 사람들한테 그릇된 말투를 들려줍니다.


  말을 배운다 할 때에는 삶을 배웁니다. 말을 들려주는 일이란 삶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말을 한다면 어떤 삶을 보여주는 셈일까요. 알맞지 않거나 엉뚱한 말을 들려준다면 어떤 삶을 이야기하는 셈일까요.


  사랑스러운 삶을 나누도록 사랑스럽게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삶을 노래하도록 즐겁게 글을 쓰고 말을 하면 더없이 빛나리라 생각해요.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도록 아름답게 글을 쓰고 말을 하면 아주 싱그럽겠지요.


  일부러 말치레를 하지 않아도 돼요. 애써 겉치레로 말옷을 입히지 않아도 돼요. 무언가 그럴듯해 보이는 말을 하기보다는, 스스로 삶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때에 빛나요. 배운 티를 내거나 있는 티를 드러내는 말로는 우리 가슴을 울리지 못해요. 사랑을 속삭이고 즐거움을 노래하며 아름다움을 빛낼 적에 서로서로 가슴이 촉촉히 젖어들어요. 마음밭에 사랑씨앗 한 톨 심으며 글과 말을 따사롭게 짓습니다. 마음자리에 꿈씨앗 두 톨 심으며 글과 말을 정갈히 다스립니다. 4346.10.18.쇠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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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18. 한글날이 공휴일이 된 뜻
― 껍데기인 ‘글’과 알맹이인 ‘말’

 


  2013년부터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됩니다. 달력을 보면 한글날 빛깔이 빨갛게 물듭니다. 공휴일이 되니 사람들이 한글날을 새롭게 다시 기리려나 궁금한데, 사람들이 기릴 만한 날이라 한다면 공휴일이건 국경일이건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기리리라 느껴요. 기릴 만한 아름다운 날은 중앙정부에서 공휴일이나 휴일이나 국경일로 삼지 않아도 ‘기릴 만한 아름다운 날’입니다.


  한글날은 한글을 기리는 날입니다. 한겨레가 쓰는 ‘말’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한글이라는 글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임금님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한글단체에서는 한글날에 세종큰임금 동상 앞으로 가서 꽃을 바칩니다.


  한글날이나 꽃바치기가 뜻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무언가 엉뚱한 데로 잔치와 이야기가 흐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한글이란 무엇일까요.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담는 그릇이 한글입니다. 우리한테 글이 있는 즐거움과 기쁨을 기리려는 한글날입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을 처음 만든 때부터 개화기를 지나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해방 언저리를 지나도록, 이 나라 지식인과 권력자와 공무원은 한글을 업신여겼어요. 모두들 중국글을 빌어 글을 썼지, 한국글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한국글 아닌 중국글 빌어서 글을 쓰니, 저절로 중국말이 스며듭니다. 중국글로 담는 이야기는 중국말로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한자말이 중국글 빌어쓴 버릇 때문에 스며들었습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에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요즈음에는 영어를 마구 쓰는 일을 나무라거나 꾸짖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한국말을 한국글로 안 담고 영어를 한국글로 담으려 하니 나무라거나 꾸짖습니다. 그러면, 한국말 아닌 중국말을 한국글에 담는 일 또한 나무라거나 꾸짖어야 올바릅니다. 더 나아가, 한국글이 한국글답도록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살찌우면서 아낄 때에 아름답지요.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 가리키는 나무가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목백일홍’이라고도 ‘백일홍’이라고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배롱나무’라 하거나 ‘간지럼나무’라 합니다. 꽃은 따로 ‘배롱꽃’이라 합니다. 글로 놓고 보자면 ‘목백일홍’이나 ‘백일홍’도 한글이에요. 그러나 ‘백일홍’처럼 적는대서 한국말이 되지 않아요. 한국말은 ‘배롱꽃’이고 ‘배롱나무’이며 ‘간지럼나무’입니다.


  ‘목’이라 적어도 한글이지만, 한국말이 아닙니다. ‘나무’라 적고 말할 때에 올바른 한글이면서 아름다운 한국말입니다. ‘대지’라 적으면 한글은 되어도 한국말은 못 되어요. ‘땅’이라 적고 말할 때에 한국말다운 한국말입니다.


  말은 ‘말’이라고 가리켜야 올바른 한국글이면서 한국말입니다. ‘언어’처럼 적으면 껍데기와 무늬는 한글이라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한국글이고 엉뚱한 중국말이 됩니다.


  박남일 님이 쓴 글로 빚은 그림책 《뜨고 지고》(길벗어린이,2008) 52쪽을 보면,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물결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메밀꽃이 일고.” 같은 글월이 나옵니다. 물결과 너울과 메밀꽃을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무척 자주 오래 놀았어요. 어릴 적에 ‘메밀꽃’이라는 낱말을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들판에 피는 메밀꽃 아닌 바다에 일어나난 메밀꽃을 보고 들었어요. 바다와 얽힌 낱말을 살핀다면, ‘물결’이 아름다운 한국말이면서 한국글입니다. ‘파도’는 껍데기만 한글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바닷가’와 ‘모래밭’이 아름다운 한국말이면서 한국글이에요. ‘해변’과 ‘해안’과 ‘해수욕장’과 ‘모래사장’은 한국말도 아니고 한국글도 아닙니다.


  다시 공휴일이 된 한글날을 기리는 뜻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이라는 글자에만 눈길을 둘 수 없습니다. 한글이라는 글자에 담는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한글이라는 글자에 담을 한국사람 넋과 삶을 사랑스레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알파벳을 빌어서 쓰더라도 겨레말과 나라말 아름답고 튼튼히 지키는 저 아시아 나라와 중남미 나라를 보셔요. 베트남 겨레가 쓰는 베트남말은 베트남말입니다. 브라질과 칠레와 쿠바가 부르는 노래는 브라질 겨레 노래요 칠레 겨레 노래이며 쿠바 겨레 노래예요. 이들은 글이 없고 나라를 빼앗기며 모진 식민지살이를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말까지 에스파냐말이나 포르투갈말을 써야 하지만, 이러한 글과 말로도 이녁 겨레와 나라 넋·얼을 알뜰히 보여줍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겉보기로만 한글인 글이 아닌, 알맹이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옳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낱말만 예쁘장한 토박이말이 아니라, 낱말과 낱말을 엮는 글월(문장)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깨달아야 합니다.


  껍데기는 한글이라지만, 일본 말투와 번역 말투가 어지럽게 섞인 글을 쓴다면, 이러한 글은 ‘겉보기 한글’이지만 ‘속보기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껍데기 한글날을 기리는 데에서 그칠 노릇이 아니라, 아름다운 알맹이가 될 한국말을 살찌우고 북돋우면서 사랑하고 즐기는 길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이를테면, 한글로 ‘오마이뉴스·프레시안’이나 ‘네이버·다음’처럼 적으면 겉보기로는 한글이지만, 속알맹이로는 한국말이 아니에요. 이들 이름은 모두 ‘ohmynews·pressian’에다가 ‘naver·daum’이라는 외국말이에요. 무늬만 한글로 적어서 보여준대서 한글날을 기리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을 올곧게 추슬러서 아름답게 다스려야 한글날을 기리는 참뜻이 됩니다. 생각을 하고, 생각을 키우며, 생각을 넓힐 때에 비로소 한글날을 한글날답게 아끼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세종큰임금이 한글(훈민정음)을 빚어서 퍼뜨린 일은 틀림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세종큰임금이 왜 한글을 빚어서 퍼뜨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바로, 이 나라 시골마다 흙을 만지며 일구던 수수하고 투박한 여느 사람들이 여느 시골살이를 지키고 가꾸고 살찌우면서 시골말을 아름답게 돌보았기에, 한글(훈민정음)을 빚을 수 있었고, 이 한글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토박이말이란 바로 시골말입니다. 토박이말은 시골사람이 시골마을에서 흙을 만지고 숲을 가꾸며 들을 노래하던 삶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도시문명사회가 된 모습에서 한겨레 토박이말을 아무리 되찾거나 되살리려고 해도 사람들이 제대로 못 쓰거나 잘 몰라요. 도시에서는 흙을 안 만지고 숲과 들을 아끼거나 보살피지 못하니까요. 앞으로 도시에서도 텃밭을 일구고, 도시 한복판에도 숲을 마련해서, 도시사람 스스로 밭과 숲을 노래하며 햇볕과 바람과 비와 눈과 꽃과 풀과 나무와 흙을 사랑할 수 있다면, 시나브로 한글과 한국말 모두 넉넉하고 푸르게 되살아나리라 생각합니다. 4대강사업과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국가보안법과 막개발과 핵발전소 모진 바람이 휘몰아치는 사회에서 한글과 한국말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입시지옥과 재테크와 자동차와 고속도로와 경제성장율에 목을 매다는 나라에서 한글과 한국말은 숨조차 쉬지 못합니다.


  삶길을 열어야 말길이 열립니다. 말길을 열어야 마음길과 생각길을 엽니다. 2013년 한글날을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는 겉치레와 무늬와 껍데기에서만 그치는 ‘한글날 잔치’가 아닌, 속살과 알맹이와 참모습을 가꾸며 살찌우는 ‘한국말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6.10.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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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0. 어머니가 가르치는 말
― ‘어머니젖’ 먹고 ‘어머니말’ 쓴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을 고루 받으며 태어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이를 몸속에 열 달 품으며 돌보지 못해요. 오직 어머니가 아이를 몸속에 열 달 품으며 돌봅니다. 그러나, 어머니 몸속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며 자라는 아이는 모든 말을 듣습니다. 어머니 몸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을 듣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크기요 숨결인 채 어머니 몸속에서 귀를 쫑긋 기울입니다. ‘나(몸속 숨결)’를 낳으려는 두 사람은 어떠한 사랑을 나누며 얼마나 즐겁고 사이좋게 지내는가를 살핍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먹는 밥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먹는 밥입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마시는 바람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마시는 바람입니다. 아이를 밴 어머니가 바라보는 모습은 몸속에서 자라는 숨결이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예부터, 아이를 밴 어버이는 아무 데에서나 살지 않게끔 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가장 아름다운 밥을 먹도록 이끌었습니다. 공장 굴뚝이 무시무시하거나, 자동차 물결이 어지럽거나, 흙땅 없이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인 데에서 몸속 숨결을 돌보도록 하던 옛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를 병원에서 함부로 낳지도 않았어요. 숲이 싱그러이 마을을 보듬는 시골자락 조그마한 집에서 아이를 낳도록 한 옛사람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아이가 바르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터전에서 슬기롭게 배우기를 바라는 어머니라면, 아무 곳에서나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바르게 살 만한 마을을 찾고, 더없이 깨끗하게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바람을 들이킬 자리를 찾습니다. 어버이가 느끼기에 가장 아름답다 싶은 곳에 오순도순 지낼 만한 보금자리를 일구어요.


  오늘날에는 이 같은 ‘보금자리’를 가꾸려 하기보다는, 아이가 커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서울에 있는 이름난 대학교’에 척척 붙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학군’을 찾는 흐름입니다. 이 또한 아이를 생각하는 모습이라면 아이를 생각하는 모습이 되겠으나, 어버이와 아이는 날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살짝 궁금해요. 어버이와 아이는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볼까요? 더 낫다 하는 학군을 찾는 어버이는 이녁과 아이 모두한테 안 즐겁고 안 아름다우며 안 사랑스러운 삶으로 뒷걸음질 하는 셈 아닐까요?

 

  성평등이 많이 이루어진 요즈음이라 하지만, 요즈음에도 집일을 나누어 맡는 아버지가 몹시 드뭅니다. 아기가 태어난 뒤, 어머니와 함께 육아휴직을 해서 갓난쟁이를 함께 돌보려는 아버지란 아주 드뭅니다. 집식구 먹여살릴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있되, 갓난쟁이가 ‘어머니 손길과 사랑’뿐 아니라 ‘아버지 손길과 사랑’을 나란히 받으면서 자랄 적에 싱그럽고 튼튼하며 아름다이 자라는 줄 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어머니 혼자 낳을 수 없는 아이이듯, 어머니 혼자 돌보거나 키울 수 없는 아이입니다.

 

  지난날에는 가부장제도 굳세게 있는 바람에, 퍽 오래도록 ‘아이키우기’를 어머니가 도맡았습니다. 곰곰이 돌이키면, 옛조선이나 고구려나 백제 적에는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고려 적까지도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았으리라 느껴요. 조선으로 넘어오며 사내는 부엌에 얼씬조차 못하게 하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가르치는 모든 몫을 어머니가 맡았지 싶어요. 아이가 커서 글을 익힐 무렵이면 아버지가 나서서 무언가 가르치기도 했을 테지만, 갓난쟁이 적부터 열 살 언저리까지 오직 어머니 혼자 아이를 돌보며 ‘말을 가르친’ 우리 사회였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지난날 어머니는 어떤 삶을 누리며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고 삶을 보여주었을까요. 다 함께 생각해 봐요. 지난날에는 가시내가 서당에 다니기 몹시 어려웠고, 양반 집안이라 하더라도 가시내한테 섣불리 글을 안 가르쳤어요. 한문은 더더구나 안 가르쳤지요. 양반 집안이나 임금 집안이나 사대부 집안이 아닌, 흙을 일구는 여느 집안에서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한문을 몰랐습니다. 고구려나 고려나 조선 적에는 ‘흙을 일구는 사람(농사꾼)’이 99%는 되었으리라 생각해요. 다시 말하자면, 거의 모든 사람이 ‘한문은 모르는 채’ 살았고, 거의 모든 한겨레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어온 겨레말(한국말, 우리 말)만 쓰면서 살림을 꾸리고 마을을 일구었습니다. 양반 집안이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아이를 도맡아 돌볼 적에는 한문이 아닌 겨레말로 돌보며 ‘말을 가르쳤’겠지요.


  지식인이나 임금님 가운데 한글(훈민정음)로 책을 써서 널리 남긴 이는 매우 드물지만, 겨레말이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밑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어요. ‘글로 남은 한글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더라도, 모든 사람들 머리와 마음과 몸에는 ‘기나긴 나날 한겨레가 이은 말삶’이 배었어요.


  부엌일을 하고 밭일을 하며 논일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장작을 패고 군불을 때며 길쌈과 물레질과 베틀질과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빨래를 하고 다리미질을 하며 방아질과 절구질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며 온갖 집안 손질 다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하루 내내 새벽부터 밤까지 쉴 겨를 없이 일을 하는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어머니는 늘 일에 치이며 허리 펼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에 시달리는 어머니들 누구나 언제나 노래를 부릅니다. 이른바 ‘일노래(노동요)’입니다. 저녁에 바느질을 하는 동안 아이들을 무릎맡에 누이고는 조곤조곤 ‘이야기(옛이야기, 전래동화)’를 들려줍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바로 이런 어머니들 노래와 이야기를 듣고 들으면서 자란 어머니가 낳은 숨결입니다.


  현대 물질문명 사회라 하는 2000년대예요. 인터넷과 컴퓨터가 발돋움한 요즈음이에요. 수많은 기계가 있고, 텔레비전과 손전화가 춤추어요. 더 새로운 물질과 문명은 겨레말(한국말)로 나타내거나 가리키지 않아요. 거의 다 영어로 가리키거나 한자말로 옮겨요.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까지 영어노래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는 언제나 어머니한테서 가장 맑고 아름다우며 따사로운 말을 듣습니다. “사랑해. 너를 사랑해.” 어쩌면, 갓난쟁이한테 “아이 러브 유.” 하고 말할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어머니들 누구나 아이 볼을 어루만지며 “사랑해.“ 하고 말합니다. ‘맘마’와 ‘엄마’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가장 쉽고 정갈하며 재미난 겨레말을 하나씩 둘씩 알려줍니다. 아이들은 밥, 옷, 집, 아버지, 동무, 동생, 오빠, 누나, 하늘, 물, 숟가락, 그릇, 마루, 흙, 풀, 나무, 꽃, 바람, 낮, 밤, 아침, 저녁, 노래, 얼굴, 손, 발, ……과 같이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겨레말을 차근차근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습니다. 이 말들이 바탕이 되어 아이들은 말문을 트고 마음문을 열며 생각문을 펼칩니다.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서나 똑같아요.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게 말을 살찌우며 북돋우는 책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4346.10.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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