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파헤치듯이 읽는 책



  우물을 깊게 파야 겨울에 안 얼고 여름에 시원합니다. 우물을 파기 앞서 어느 곳이 우물 자리로 마땅하거나 알맞은지 살펴야 합니다. 아무 데나 우물을 판다면, 제아무리 깊게 판들 물줄기를 못 찾습니다. 그러니까, 한길을 오래도록 깊이 살피거나 파헤치는 이들이 외려 눈먼 사람처럼 되는 까닭은, 깊이 파고들 줄만 알지, 삶을 두루 헤아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우물을 파거나 한길을 걷자면, 먼저 삶을 두루 살피거나 넓게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두루 살피지 않으면서 한우물만 판다면, 그야말로 한우물은 팔는지 모르나 삶에는 눈이 멉니다. 삶을 넓게 헤아리지 않으면서 한길만 걷는다면, 그야말로 한길은 걸을는지 모르나 삶은 하나도 모릅니다.


  예부터 스승은 아무렇게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스승은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할 적에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부터 몸소 익히도록 이끕니다. 솜씨와 재주를 처음부터 가르치는 스승은 없습니다. 손놀림이나 손재주를 익히도록 이끄는 사람은 스승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를 돌아보면,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솜씨와 재주만 가르칩니다. 아니, 솜씨와 재주를 키우는 지식만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열여섯 해에 걸쳐 이녁 삶을 스스로 바라보고 느끼면서 깨닫도록 이끌거나 북돋우지 못합니다. 머릿속에 온갖 지식을 가득 채우도록 해서 ‘직업인’이나 ‘기술인’이나 ‘전문가’가 되도록 하는 교사와 교수일 뿐, 아이들이 삶을 두루 헤아리면서 즐겁게 맞아들이도록 이끌지 못해요.


  지식인은 많지만 살림꾼은 매우 드뭅니다. 전문가는 많지만 사랑둥이는 아주 드뭅니다. 교사와 교수는 많지만 일꾼은 무척 드뭅니다.


  삶이 이루어지는 얼거리를 몸과 마음으로 두루 헤아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배웁니다. 사랑이 태어나고 자라는 삶을 몸과 마음으로 고루 돌아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배웁니다. 삶과 사랑을 모르고서는 꿈을 짓지 못합니다. 꿈을 짓지 못하는 사람한테 재주와 솜씨가 있다 한들, 재주와 솜씨를 슬기롭거나 아름답게 다루지 못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일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니는 일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강의나 강좌를 알뜰히 챙기는 일은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과 학교와 강의나 강좌가 우리 삶에서 어떻게 얽히면서 밑바탕이 되는가 하는 대목을 먼저 바라보고 느껴서 깨달은 뒤에 배울 수 있습니다.


  밥과 옷과 집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읽어야 하고,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일굴 줄 알아야 하며, 밥과 옷과 집을 언제 어디에서나 기쁘게 건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대목을 건너뛰면서 학교와 학원만 다닌다면, 우리는 그저 입시지옥에 허덕이는 쳇바퀴 삶을 되풀이할 테지요. 인문책을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삶은 못 지을 테지요. 4348.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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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1 13:04   좋아요 0 | URL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네..그럼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부모는 자식이 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는 부모˝라는 말과도
일맥이 아닐까...합니다.
세상이 변했다 해도 밥을 대신 먹고 배불러 줄 수 없는 것같이...
겨울이나 여름이나 우물의 상시 온도는 같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필요에
의해 변온은 스스로 하고도 우물이 그리 한냥.. 힘을 실어 주는지도 모를 일 입니다.
어릴 때 지하수를 연결한 수도에 물을 틀면
어리던 엹은 수증기..연기 같던..그 물의 마술...오늘도 함께살기 님과 더불어 사는
하루..될 것 입니다. 많이 웃으시길~^^

숲노래 2015-01-11 17:32   좋아요 0 | URL
저희 식구가 사는 마을에는
마을 어귀에 샘터와 빨래터가 있어요.
이곳에 흐르는 물을 보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요.

샘터 물이 겨울에 따뜻한 줄은
시골에서 살며 처음 알았지요.
그래서 예부터 시골에서 한겨울에도 맨손으로 기저귀를 빨 수 있기도 했겠네
하고 돌아보곤 해요.

그러고 보면, 겨울에 얼지 않는 물은
따뜻하기 때문일 테지요...

[그장소] 2015-01-11 17:43   좋아요 0 | URL
저도 체험상 겨울물이 특히 지하수를 쓴 경험자기에..알아요..^^
내 경험은 그런데..그랬단 말이지..하게되는 일반 상식..체험을 뚫지는 못하기에 저는 겨울이면 따듯하다는
그 샘터의 물을 믿어요.다른 이는 몰라도 장담하는 거죠.
경험이 과학을 이기는 것도 있고..증명이 안된다 해도 그기억마저 속일 수는 없다고요..
그런 마을은 보통 우물 정자 가 들어가는 이름을 갖던데..그곳 이름이..궁금해집니다.

얼지않느니..부지런하고 따뜻한 물일 거라고..믿습니다.부러운 곳에..사시는...ㅎㅎ

숲노래 2015-01-11 17:51   좋아요 0 | URL
저희 마을은
전남 고흥 도화면에 있는 동백마을입니다.
마을에 샘터와 빨래터가 두 군데씩 있어요.
이제는 빨래터를 아무도 안 써서
제가 두 아이하고 보름에 한 차례씩
물이끼 걷으려고 청소를 하는데,
한겨울에도 맨발로 들어가서 춥지 않게 물이끼를 걷습니다 ^^

마을 할매도 푸성귀를 다듬을 적에 빨래터로 가지고 와서 하시고요~
 

연필 선물



  내 어릴 적에 둘레 어른은 흔히 연필을 선물해 주었다. ‘공부 잘 하라는 뜻’일 텐데, 다른 고장에서 사는 분들이 다른 고장 문방구나 가게에 있는 ‘우리 동네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연필을 선물해 주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저녁에 신나게 깎아서 이튿날 학교에 가져가서 일부러 연필을 손에 쥐고 가만히 책상맡에 앉으면, 짝꿍이나 동무들이 “야! 그 연필 좀 보여줘!” 하곤 한다. 새 연필 한 자루로 하루가 새로우면서 빛난다.


  아이들과 살면서 연필을 새롭게 쓴다. 아이들이 우리한테 아직 찾아오지 않던 때까지 퍽 오랫동안 연필을 잊고 살았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니, 학교에서는 ‘연필 아닌 볼펜’만 써야 하는 듯이 말했다. 연필은 ‘아이들’이 쓰는 듯이 말했다. 이 물결에 어영부영 휩쓸리면서 서른 해 가까이 연필과 등을 진 채 지냈다.


  큰아이가 요모조모 손을 놀리며 그림놀이를 즐기고 글놀이도 즐기니, 아이 손에 꼭 맞는 연필을 쓰도록 하고, 아이가 연필을 쓰도록 하니 나도 저절로 연필을 자주 쓴다. 바깥마실을 하다가 큰 문방구를 한 곳 보았기에, 냉큼 문방구에 들어갔다. 두 아이한테 선물을 하려고, 도라에몽 연필과 폴리 연필을 장만한다. 여기에 ‘내 연필’도 따로 한 통 장만한다. 나도 도라에몽 연필은 한 자루 갖고 싶으니, ‘내 몫으로 장만한 연필’이랑 ‘도라에몽 연필’ 한 자루를 바꾸자고 해 보아야지.


  연필을 쓰면 볼펜보다 훨씬 가벼우면서, 슥슥 아주 잘 쓸 수 있다. 연필은 눕거나 엎드려서도 쓸 수 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연필은 얼지 않는다. 연필을 손에 쥐면 지구별 어느 숲에서 자란 나무가 나한테 왔을까 하고 꿈날개를 펼친다. 참말 그렇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수업을 듣다가 으레 ‘이 연필이 자라던 깊은 숲’이 떠올라서 한참 꿈에 젖어 수업을 잊기 일쑤였다. 4348.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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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기울이면서 읽는 책



  책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 ‘이야기’를 찾아서 고릅니다. 스스로 찾아서 고른 책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겨를을 내고,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곳에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엎드려서, 스스로 가장 즐거운 눈빛을 밝혀 ‘이야기’를 누립니다.


  그런데,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즐거움이 아닌 책읽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평도서라든지 홍보도서가 되면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습니다. 추천도서와 명작도서라면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습니다. 독후감 숙제나 논술훈련이라면 아름다울 수도 사랑스러울 수도 즐거울 수도 없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나 신문이나 영화 같은 매체는 우리한테 자꾸 ‘유행’이나 ‘사건 사고’ 같은 데에 얽매이도록 할 뿐 아니라, 생각을 안 하고 빨려들도록 이끌지 싶어요. 우리 스스로 마음을 깊이 쓰면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예 휩쓸리거나 휘말리고 맙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책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서 찾고 고르고 읽고 삭이고 누리고 나누지 않는다면, 멍하니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는 몸짓하고 똑같습니다.


  마음을 기울이기에 아름다운 책읽기가 됩니다. 마음을 쏟을 적에 사랑스러운 책읽기가 됩니다. 마음을 들이면서 삶을 지으니 즐거운 책읽기가 됩니다. 책을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즐겁게 읽어서 누리는 사람은, 종이책이 아닌 나무와 풀과 새와 구름과 해와 바람과 흙을 읽으면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즐거움을 맛봅니다. 4348.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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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와 삶짓기



  저녁에도 잠들지 않으려 하면서 책을 더 읽겠다고 하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한 권쯤 더 읽어도 된다고 말하지만, 으레 그만 덮고 이튿날 더 읽기로 하자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밤이란 ‘책읽기’와 견줄 수 없이 뜻깊은 ‘꿈꾸기’를 하면서 오늘 하루를 마감하고 새 하루를 기다리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자리에서는 몸을 가만히 쉬면서 마음이 새로 깨어나도록 북돋웁니다. 하루를 여는 자리에서는 지난밤에 하나하나 그린 꿈을 되새기면서 즐겁게 기지개를 켭니다. 책을 읽는 까닭은 삶을 더욱 슬기롭게 아로새기면서 내 이웃과 동무를 헤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를 더 쌓으려고 읽는 책이 아니라,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길에 동무로 삼을 이야기를 살펴서, 스스로 마음속에서 옳고 바르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슬기를 길어올리도록 이끌려고 읽는 책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언제나 삶짓기를 할 때에 즐겁습니다. 책읽기가 즐겁지 않습니다. 삶짓기가 즐겁습니다. 삶짓기로 이끌거나 삶짓기를 북돋울 때에만 비로소 책읽기가 즐겁습니다. 4347.12.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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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서 배울 수 있는가



  책을 읽을 적에는 ‘책을 배운다’고 느낍니다. 씨앗을 심을 적에는 ‘씨앗심기를 배운다’고 느낍니다. 밥을 지어서 아이들한테 차려서 줄 적에는 ‘밥짓기와 밥차림을 배운다’고 느낍니다. 나무 곁에 서서 줄기와 가지를 살살 어루만지면 ‘나뭇줄기와 나뭇가지를 배운다’고 느낍니다. 조물조물 옷가지를 비벼서 빨래를 하면 ‘빨래를 배운다’고 느낍니다.


  놀이를 다루는 책을 읽기에 놀이를 배우지 않습니다. ‘놀이를 다룬 책’을 배울 뿐입니다. 놀이를 배우려면 몸소 놀이를 해야 합니다. 환경 문제를 건드린 책을 읽기에 환경 문제를 배우지 않습니다. ‘환경 문제를 건드린 책’을 배울 뿐입니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터전을 스스로 돌아보고 살펴서 깨달아야 비로소 ‘환경 문제가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목수는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옷장을 짜야 비로소 ‘목수 일’을 배웁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대서 ‘목수 일’을 배우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인문학을 소리 높여 말하고 여러 가지 인문책이 나옵니다. 인문학 강의를 듣는 사람이 많고, 인문책을 읽는 사람이 많습니다. 강의와 책은 ‘인문 지식을 퍼뜨리는 구실’을 합니다. 그런데, 인문 지식을 머릿속에 담는다고 해서 사회가 달라지거나 정치를 바로잡거나 경제를 옳게 추스르지 않습니다. 책읽기는 언제나 책읽기이지, 삶읽기나 ‘삶 배우기’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입시지옥에 길든 사람은 ‘삶 배우기’를 몸으로 나서서 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먼저 ‘책을 찾아서 지식을 머리에 담으’려 하기 일쑤입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림으로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아야 하고,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모습을 보아야 하며, 본 것을 생각해야 하고, 보고 생각한 것에 이야기를 담아야 합니다. 이러고 나서 붓과 종이를 장만해서 손수 붓을 놀려야 합니다. 이런 기법과 저런 솜씨를 익혀야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글쓰기를 배우든 사진찍기를 배우든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먼저 살피는 사람이 드물고, ‘살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며, ‘살핀 것을 생각해서 이야기를 싣는’ 사람은 더더욱 드뭅니다.


  배우려면 보아야 합니다. 보면서 내 느낌을 키워야 합니다. 내 느낌을 제대로 알아채어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걸어갈 수 있으면, 이때에 비로소 ‘배우는구나’ 하고 깨달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거나 강의를 듣거나 책을 본대서 배울 수 있지 않아요.


  바라보고, 느끼고, 알고, 받아들여서, 살고, 이리하여 이 모두를 아울러서 사랑하고 하루를 기쁘게 지어야 마무리가 될 테지요.


  책을 읽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저 ‘책읽기’일 뿐입니다. 책만 읽고 싶다면 책을 읽으면 되고, 삶을 가꾸거나 읽거나 짓고 싶다면 책을 내려놓고 눈을 떠서 둘레를 살펴본 뒤 온몸을 움직여서 하루를 가꾸거나 읽거나 지으면 됩니다. 4347.12.2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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