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미요리의 숲》

 


  만화책 《미요리의 숲》을 서재도서관에서 찾아낸다. 아주 뜻밖에 찾아낸다.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얼결에 찾아낸다.


  틀림없이 이 만화책이 나한테 있는데 어디에 꽂았는지 못 찾겠는걸, 하고 한참 생각한 끝에 다시 장만해야겠다 여겼는데, 그만 이 만화책은 품절되어 다시 살 수 없다. 참 갑갑하고 어려운 일이 되었네 싶으나, 어쩌는 수 없다. 서재도서관에서 찾아내든지, 돈을 들여 이래저래 알아보아 헌책으로 사든지 할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한참 여러 날 생각에 잠기더니, 오늘 작은아이와 서재도서관에 찾아갔다가 아주 눈에 잘 뜨이는 곳에서 《미요리의 숲》 1권과 2권을 찾아낸다. 어쩜 이렇게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있었니. 그야말로 코앞에 두고 한참 못 찾았네. 아니, 내가 너를 여러 날 내내 생각했기에 내 앞에 환하게 나타나 주었니.


  나는 ‘숲’이라는 낱말만 들어가도 눈길이 멎는다. 만화책이든 사진책이든 그림책이든 인문책이든 ‘숲’이라는 낱말에 나도 모르게 사로잡힌다. 내가 태어난 곳은 숲이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몸뚱이를 낳은 내 어버이는 도시에서 나를 낳으셨으나, 내 숨결을 이루는 밑바탕은 숲에서 왔을까.


  나와 옆지기가 낳은 아이들 숨결을 이루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나와 옆지기를 낳은 어버이들 숨결을 이루는 밑바탕은 무엇일까. 이 지구별 사람들이 태어난 밑바탕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전쟁미치광이가 되고, 누군가는 돈미치광이가 되며, 누군가는 권력미치광이가 되기는 한다만, 이 미치광이들 어릴 적이나 갓난쟁이 적을 떠올린다. 어느 미치광이도 처음부터 ‘미친 아이’나 ‘미친 아기’가 아니었다. 모두 사랑스러운 목숨이었고 아름다운 숨결이었다. 미치광이가 되는 까닭이라면, 숲에서 멀어지면서 도시에서 제도권학교 톱니바퀴에 시달리기 때문 아닐까.


  안타깝게도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지고 만 만화책 《미요리의 숲》이지만, 헌책방마실을 할 적에 이 만화책이 보이면, 보이는 대로 더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 ‘내가 사랑하는 숲’을 이야기할 만한 삶을 누리면서 ‘숲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숲을 사랑한 어느 일본 만화쟁이는 예쁘장한 만화책 두 권을 지구별에 선물했고, 나는 또 나대로 우리 숲을 사랑하면서 내 슬기와 깜냥으로 예쁘장하게 빚어 지구별한테 선물할 책을 이루어야지. 4346.1.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부디 1권 2권 모두 예쁘게 다시 나올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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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에 매긴 별점

 


  이억배·이호백 두 분이 빚은 그림책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재미마주,1997)이 있다. 나는 이 그림책을 1999년에 처음 읽었는데, 201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그림책을 읽은 내 느낌이 어떠한가 하고 밝힌다. 돌이켜보면, 지난날에는 내가 이 그림책을 이야기할 만한 마음그릇이 못 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굳이 이 그림책을 이야기할 만한 뜻이 없었고, 오늘은 이 그림책을 말해야 할 뜻이 생겼다 할 만하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라는 그림책에 별점 10점 가운데 1점만 준다. 아마, 나처럼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라는 그림책에 별점을 낮게, 더할 나위 없이 낮게 붙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모두들 나더러 뚱딴지 같은 바보라고 여기지 않을까.


  내가 이 그림책을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돌아보며 느낀 대목을 세 가지 밝혀 본다. 첫째, 그림책 줄거리가 아름답지 못하다. 둘째, 그림책에 쓴 낱말과 말투가 아름답지 못하다. 셋째, 그림책을 이루는 밑넋이 아름답지 못하다.


  힘자랑 수탉 이야기는 재미없다. 힘자랑 어른하고 똑같다. 이 그림책 이야기가 ‘힘자랑 어른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보여주는 흐름이라면, 어느 모로 읽힐 만하리라. 그러나, 바보스러운 ‘힘자랑 어른을 꾸짖는’ 흐름이 아닌데다가, 힘자랑을 못한다고 술에 절어 지내는 바보스러운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보여준다. 넘치는 힘을 왜 ‘자랑’하는 데 써야 하지? 사람살이도 짐승살이도 ‘남 앞에서 자랑하며 권력으로 줄세우기’ 해야 하는가? 아이들이 이런 사람살이를 그림책으로 배우면서 자라야 할까? 빗대는 이야기로 동물우화를 그린다 할 적에, 어른들은 더 꼼꼼히 더 깊이 생각하고 살펴야 한다. 게다가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은 조지 오웰 님 《동물 농장》과 같은 우화처럼 빛나지 못한다.


  한국 창작그림책이지만, 한국말을 아름답게 못 쓰는 대목이 아주 슬프다. 아이들하고 어떤 말로 삶을 빛내야 할까 하는 대목을 생각해야 한다. 아이들한테 이쁘장한 말을 들려줄 까닭이 없고, 아이들한테 엉터리 말을 들려줄 까닭이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여느 자리에서 가장 아름답게 삶을 밝히는 말을 들으며 자라야 아름답다. 글을 쓰는 어른은 다른 무엇보다 한국말부터 슬기롭게 배워야 한다고 느낀다.


  바깥에서 힘자랑 하는 수탉에, 집에서 알낳기 하는 암탉, 이러한 얼거리가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를 이루는 밑넋이다. 수탉도 암탉도 ‘살림’을 꾸리지 않는다. 보금자리를 살찌우는 일을 하지 않는다. 수탉도 암탉도 아이들(병아리)하고 놀 줄 모른다. 채찍질하듯 힘을 키우도록 내몬다든지, 노예가 되듯 알낳기만 하도록 등을 떠민다. 이래서야 무슨 삶이 있고, 무슨 생각이 있으며, 무슨 사랑이 있으랴. 이런 그림책을 읽을 아이들한테 어떤 삶이 자라고, 어떤 생각이 자라며, 어떤 사랑이 자랄까.


  삶을 북돋울 때에 책이다. 생각을 빛낼 때에 책이다. 사랑을 나눌 때에 책이다. 나는 그림책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 하나도 안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러니, 별점 10점 가운데 딱 1점을 줄 뿐이다. 4346.1.1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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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달빛

 


  서울 하늘에는 달과 별이 가려지니, 어른들이 이를 안타까이 여기며, 그림책에 달빛이랑 별빛을 담아 아이들한테 보여주려고 해요. 그러나, 서울 하늘에 달과 별이 가려진들 아랑곳하지 않거나 느끼지 않는 어른이 많아, 조금도 이를 안타까이 여기지 않기에, 그림책에조차 달빛이랑 별빛을 안 담거나 못 담기 일쑤예요.


  어린 나날 시골 밤하늘에서 달빛이랑 별빛을 흐드러지게 누린 기쁨을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어, 그림책에 달빛이랑 별빛을 곱다시 담는 어른이 있어요. 그러나, 어린 나날 시골 밤하늘에서 으레 달빛이랑 별빛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막상 달빛이랑 별빛을 살뜰히 누리지 못한 나머지, 어른이 되어도 아이들한테 달빛이랑 별빛을 물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못하는 어른이 있지요.


  밤이 깊어도 좀처럼 잠들지 않으려는 작은아이를 안고 몇 차례나 마당으로 나와 달빛이랑 별빛을 올려다봅니다. 작은아이는 달놀이를 하니 재미날까요. 작은아이는 별놀이를 하니 신날까요. 어쩌면, 작은아이가 쉬 잠들지 않아 주기에, 나도 작은아이하고 마당으로 자꾸 나와서 자꾸 별바라기를 하고 거듭 달바라기를 할 수 있는지 몰라요. 작은아이를 재운다는 말은 핑계이고, 작은아이한테 들려주면서 나 스스로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도록 자장노래를 맑은 목소리 뽑아 부르는 셈인지 몰라요.


  두 아이 재우다가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까무룩 잠듭니다. 작은아이가 쉬 마렵다 보채며 새벽에 퍼뜩 잠을 깨니 오른팔이 뻑적지근 저립니다. 몇 시간이나 작은아이 팔베개를 했을까. 쉬를 더 누이고 무릎에 앉혀 새 바지를 입힌 다음 다시 잠자리에 눕힙니다. 4345.12.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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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책

 


  나중에 긴글 따로 쓸 생각인데, 긴글에 앞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느껴, 두 아이 재운 깊은 밤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 꿈을 꾸다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적잖은 이들이 이오덕 님 《우리 글 바로쓰기》라는 책을 읽는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읽고 나서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는 이가 드물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은 이녁 나름대로 ‘책을 꼼꼼히 읽었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책은 꼼꼼히 안 읽어도 된다. 무엇을 밝히는 책인지 찬찬히 아로새겨서 내 삶으로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여 슬기와 넋을 빛낼 때에 아름다운가를 깨달으면 된다. 그러니까, 적잖은 사람들이 《우리 글 바로쓰기》를 읽으면서도, 또 읽고 나서도, 스스로 ‘우리 글 바로쓰기’를 못하는 까닭이라 한다면, 꼼꼼히 줄거리를 살피고 이야기를 좇기는 하지만, 스스로 말삶·글삶·생각삶·사랑삶·일삶·놀이삶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너무 마땅한데, 말마디와 글줄만 바로쓸 수 없다. 삶을 바로세울 때에 비로소 말과 글을 바로세운다. 지난날 몇몇 독재자가 ‘한글전용’을 외치기는 했으나, 이들 몇몇 독재자가 외친 ‘한글전용’이란 ‘한글로 담는 한국말을 알차게 가다듬어 쓰기’가 아니라, ‘말을 담는 그릇인 글만 한글로 적는 시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아직도 한국사람 스스로 ‘한글’과 ‘우리 말’이 어떻게 다른가를 가누지 못하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책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쭉 훑으면 ‘책읽기’가 되는 줄 잘못 안다. 이른바 ‘통독’을 한대서 책읽기가 되지 않는다. 통독 여러 차례 한대서 책읽기라 하지 않는다. 한 줄을 읽더라도 알맹이를 짚어 ‘내 것’으로 삼켜야 책읽기가 된다. 한 줄조차 슬기로이 깨닫지 못하고서 한 권을 다 읽는들 무슨 덧없는 짓일까.


  책읽기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내 삶에 맞추어 즐길 책읽기이다. 사진찍기나 글쓰기도 이와 같다. 살림하기와 아이키우기도 이와 같다. 훌륭하게 잘 해내야 할 무엇이란 없다. 스스로 사랑을 기울여 즐길 삶만 있다. 책을 내 삶으로 여겨 하나하나 알뜰살뜰 맛난 밥상 차려 먹듯, 슬기로우며 즐겁게 이야기빛을 누릴 노릇이다.


  그러면, 이오덕 님 《우리 글 바로쓰기》는 어떤 책인가. 아직 한국말을 옳거나 바르거나 슬기롭거나 아름답거나 똑똑히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섣불리 통독하면 하나도 못 배우는 책이다. 내가 쓴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도 이와 매한가지이지만, 이런 책은 아주 더디 읽어야 한다. 하루에 다섯 쪽 읽어도 많이 읽는 셈이다. 하루에 두어 쪽씩 천천히 읽으며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야 한다. 뒷줄거리 궁금해서 빨리 넘기는 소설책하고 다르다. 지식이나 정보를 다루는 책이 아니니까, 이들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천천히 곰삭혀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성경책을 통독한다지만, 정작 성경책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슬기롭게 깨우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경책은 굳이 안 읽어도 된다. 삶을 헤아리도록 도우려는 성경책인 만큼, 내 마음을 읽을 줄 알면 된다. 내 마음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줄 알면 된다. 그러고 나서 내 식구들 마음을 읽고, 내 이웃과 동무 마음을 읽으면 된다.


  이른바 ‘양심’이라고도 하는 내 마음을 읽을 노릇이다. 곧, 나 스스로 ‘내 착한 마음’을 읽고, ‘내 참다운 마음’을 읽으며, ‘내 고운 마음’을 읽으면 된다. 착함과 참다움과 고움은 어디 먼 데에 없다.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 마음읽기를 할 수 있다고 느끼면, 비로소 종이책을 손에 쥐어 ‘다른 이웃이 다른 삶을 일구며 적바림한 다른 이웃 마음’이 알알이 담긴 책이 어떠한 빛인가 하는 대목을 읽으면 된다. ‘마음을 읽는 책’이라고 깨달으면 책읽기가 쉽지만, 마음 아닌 다른 지식조각이나 정보덩어리를 생각한다면 책읽기는 그저 어렵기만 하다. 4345.1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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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함께 읽기 (Brian Lanker)

 


  사진책을 살 적마다 ‘이 사진책을 언제부터 아이하고 함께 들여다볼 만할까’ 하고 헤아린다. 어린 우리 아이들도 들여다볼 만한 사진책이 될는지, 어린 우리 아이들한테는 보여줄 만하지 않은 사진책이 될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상을 받았다고 하는 다큐사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 함부로 보여줄 수 없다. ‘끔찍한 죽음’을 담은 사진이기에 아이들한테 함부로 못 보여주지는 않는다. 보여줄 뜻이나 값이나 보람이 없으면 보여줄 까닭이 없다. 게다가, 다큐사진이라 하면 사람들이 으레 ‘어두운 이야기’만 떠올리는데, 다큐사진은 하나도 어두울 까닭 없다. 밝든 어둡든 대수롭지 않다만,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을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있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라 할 수 있다.


  ‘Brian Lanker’라 하는 미국 사진쟁이 사진책 하나를 장만한 지 한 달 즈음 되는데, 집일에 치여 한 쪽조차 못 펼친 채 마루 한켠에 덩그러니 얹어놓기만 했다. 엊저녁 비로소 책을 펼친다. 처음 장만할 적에는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중에 언제 다시 보겠느냐’ 생각하며 장만했는데, 사진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살피고 보니, 무척 뜻깊은 사진이면서, 매우 마음 기울여 담은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낀다. 혼자서 사진을 죽 넘기다가 큰아이를 부른다. 다섯 살 큰아이더러 “여기 할머니들 사진 볼래. 할머니들이 뭐를 하는 모습일까.” 하고 말하면서 함께 들여다본다. 사진만 보더라도 사진으로 찍힌 이들이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헤아릴 만하다. 사진에 붙인 글을 읽어도 발자국을 알 만하고, 사진에 붙인 글을 애써 안 읽어도 사진으로 삶을 읽을 만하다.


  그러고 보면, 글책이건 그림책이건 사진책이건, 이러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날개를 펼 수 있도록 이야기를 담아야 비로소 ‘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구나 싶다. 겉모양이 책이라서 ‘책’이 되지는 않는다. 알맹이가 어여삐 책이 되어야 ‘책’이다. 밥도, 삶도, 사람도, 사랑도, 꿈도, 믿음도, 겉껍데기로는 따지지 않는다. 모든 자리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속알맹이로 따진다. 가슴 깊이 사랑할 노릇이다. 마음 깊이 아끼며 꿈꿀 노릇이다. 4345.12.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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