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가에서 물 뜨기


 - 1 -

 충주에 돌아온 뒤 땀에 전 옷을 벗고 부엌 수도꼭지부터 살핀다. 물이 안 나온다. 틀림없이 날이 풀려서 녹았을 텐데? 펌프 자리로 가서 뚜껑을 열어 본다. 전깃줄이 뽑혀 있다. 누군가 뽑은 듯. 전깃줄을 잇고 수도꼭지를 다시 살핀다. 아무 움직임이 없고 펌프 돌아가는 소리도 안 난다. 지난해 이웃집이 불타면서 펌프 부속도 불탔을까?

 하는 수 없이 윗마을로 올라가 물을 뜨기로. 물통을 가방에 담고 느릿느릿 고갯길을 올라간다. 수도꼭지를 틀면 철철철 나오는 곳에서 뜰까 하다가 아기 오줌줄기보다도 가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샘가에서 물을 뜨기로 한다. 글쎄, 이런 물줄기로 받는다면 어느 세월에 한 통을 받을까 싶지만, 물통 뚜껑을 받쳐서 똑똑똑 떨어지는 물을 몇 방울씩 받으며 조금씩 물통을 채운다.

 쪼그려 앉은 채 물을 뜬다. 아주 조금씩 차오르는 물통이 1/10, 1/7, 1/4, 드디어 반쯤. 몇 분쯤 흘렀을까. 삼십 분도 넘은 듯한데.

 틈틈이 허리를 편다. 고개를 들어 새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며 어느 나뭇가지쯤 앉아 있나 찾아본다. 하지만 아무 새도 안 보인다. 안경을 안 써서 그렇기도 하지만, 내 주먹만큼도 안 되는 조그마한 새들이겠지. 박새, 콩새.

 오랫동안 똑똑 물줄기를 받노라니 물소리 하나하나 퍽 큰소리로 들린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소리도 제법 큰소리로 들린다. 샘터 바닥에 가라앉은 모래를 보고, 물 한 모금 떠서 손가락으로 이닦기를 하고, 따사로운 햇볕을 냠냠 받아먹고, 서늘한 낮공기를 큼큼 들이키고.


 - 2 -

 샘가에서 물을 뜨는데, 윗마을 공동체학교에서 지내는 아이 둘이 개를 풀어서 내 뒤까지 끌고 온다. 이상한 사람이 와서 쫓아내려고 그러나? 그 개는 아주 어린 새끼였을 때부터 가까이서 보아 온 녀석. 이 녀석은 어릴 적 이웃 개한테 잘못 물려서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얼굴을 보면 한쪽으로 뒤틀려 있다. 새끼였을 때는 퍽 불쌍하다고 느꼈는데, 다 자란 뒤 나를 보고 컹컹 짖는 모습을 보면 정나미가 떨어진다. 다른 개들은 나를 보고 안 짖고 안기거나 얌전히 있는데 이 녀석만 짖는다. 하지만 모르지. 개가 짖는 소리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사람 생각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가.

 그나저나 이 아이들은 왜 개를 끌고 내 뒤에 서는가. 할 말이 있으면 입으로 하든가, 보기 싫으면 나가라고 하든가. 이 아이들은 한 마을에, 그것도 바로 위아래에 나뉘어 있는 집에서 사는 사람을 모르는가. 하긴, 나도 이 아이들 얼굴이 낯설다. 아마 서로 얼굴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럴 테지. 어른인 내가 아이들 얼굴을 잊지 않고 떠올린다고 해도, 아이들이 어른 얼굴을 모두 떠올리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자(이 아이들하고 가까이 지낼 일은 없지만 이래저래 스치며 여러 번 보기는 했으니까).

 등 뒤에서 바로 개 짖는 소리를 들으니까 물을 뜨던 손이 떨린다. 파르르.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들한테, 그것도 공동체 대안학교에 다닌다는 아이들한테 도둑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의심을 받고 있으니. 조금 뒤, 이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 가운데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던 아이 하나가 나를 알아보고 “야, 최종규 선생님이야.” 하고 왜들 그러느냐고 이야기. ○○○구나. 히유. 한숨이 나온다. 그렇지만 개를 끌고 온 아이들이 내 이름이 뭔지, 내가 어디에서 사는지,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알 턱이 없을 테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안다 한들 달라질 것 없겠지.


 - 3 -

 한참 물을 뜨다 보니 손과 발이 얼었다. 처음에는 몸에 땀이 후끈후끈 올라왔다. 자전거 타고 살림집에 닿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샘가에서 얼굴 씻고 발 씻을 때 시원함만 느꼈으나, 한참 쭈그려 앉으며 물을 뜨는 동안 허리도 쑤시고 손발도 시리고. 하지만 물통은 언제 찰는지 까마득하고.

 그렇지만 똑똑똑 떨어지는 물줄기를 쏴아아 흐르도록 할 수 없다. 무슨 기계로 빨아들인다한들 더 빨리, 더 많이 나올 수 없다. 그저 지금 이 빠르기대로, 이 흐름대로 받을 뿐이다. 억지를 쓴다고, 꾐수를 쓴다고 달라지겠는가. 조바심을 낸다고, 안달을 한다고 바뀌겠는가. 말없이 기다릴 뿐이다. 그저 있는 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추운 겨울, 물이 얼어붙는 시골집에서는 으레 견뎌야 하는 일이며, 몇 방울밖에 안 떨어지는 물줄기라도 고맙게 느껴야지.

 문득, 물 한 동이 뜨려고 십 리나 이십 리 길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다녀야 한다는 사막마을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과 견주면 나는 얼마나 수월한가. 이만한 물줄기라도 하늘에서 내려준 복이 아닌가.


 - 4 -

 물은 반 조금만 더 받는다. 개 짖는 소리 듣기 싫고, 손발도 많이 얼었다. 밥할 만큼은 떴으니, 이것으로 넉넉하다. 다음에는 자전거 타고 휭 왔다가, 다시 자전거 타고 휭 사라져야지.


 - 5 -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늙은 감나무 옆에서 쉬를 보다. 올해에도 감 몇 알 열어 주시겠지. 내가 이 감나무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시골집에 있을 때 틈틈이 올려다보거나 쓰다듬어 주기, 때때로 오줌을 주기. (4340.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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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책을 사는 즐거움
- 헌책방 책값 느끼기


 책등이나 책 뒤쪽에 책값 딱지를 붙여놓는 헌책방이 있습니다. 연필로 책값 숫자나 기호를 적어 놓는 헌책방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책값 딱지를 안 붙이고, 숫자나 기호도 안 적는 헌책방도 있습니다. 책값 딱지를 붙이는 헌책방에서는, 책손이 책마다 매겨진 제값을 잘 알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책값 딱지를 안 붙이는 헌책방에서는, 이 책이나 저 책이나 다 비슷비슷한 값인데 구태여 책값 딱지를 붙일 까닭이 없다고 느끼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아예 책꽂이마다 책값을 달리해서 꽂아 놓는 헌책방도 있습니다. 헌책방을 열어 꾸려가는 사람들은 모두 다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책값을 붙이는 방법이 저마다 다릅니다. 또한, 책값을 붙이는 방법만큼이나 책값 매기는 잣대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김남주 시인 책에 높은 값어치를 매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키 소설책에 높은 값어치를 매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진책에 높은 값어치를 매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학습지에 높은 값어치를 매길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마음을 더 두는 책에, 자기가 더 좋아하는 책에 높은 값어치를 매깁니다. 장사하는 처지로 본다면, ‘내가 안 좋아해도 남이 좋아하는 책’이라면 높은 값어치를 매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책들도 헌책방 임자가 ‘아는 책’이나 그렇지 ‘모르는 책’에 섣부른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조복성’이 누구인지 아는 헌책방 임자가 어디 있겠으며(책손조차도 거의 모릅니다만), ‘앨런 테인 더닝’이 누구인지 아는 헌책방 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도종환이든 조정래든, 헌책방 임자로서는 ‘헌책방에 들어오는 수많은 책들 가운데 하나를 지은 사람’일 뿐입니다. 책더미 사이에서 눈에 뜨여서 따로 빼낸 뒤 좀더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 놓을 수 있지만, 그냥 책탑을 쌓아 놓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도종환 님 책이라면 시집 칸 한쪽에 그냥 꽂아 놓을 수 있고, 조정래 님 책이라면 소설책 두는 자리에 덩그러니 올려놓거나 쌓아 둘 수 있습니다. 새책 값으로 6000원이 붙은 도종환 님 시집을 헌책방에서 2000원에 팔면 알맞는 값일까요? 1000원이나 1500원에 팔면 싼값일까요? 3000원에 팔면 비싼값일까요? 새책 값으로 9000원이 붙은 조정래 님 산문모음을 헌책방에서 4000원에 팔면 알맞는 값일까요? 3000원만 받아야 알맞을 값일까요?

 그제 강우방 님 산문모음을 5000원 주고 한 권 샀습니다. 다른 헌책방에서는 8000원을 받았을지 모르는 책이고, 어떤 헌책방에서는 3000원이나 4000원을 받았을지 모르는 책입니다. 이 책이 저한테 아주 쓸모있고 소중하다면 8000원이 아니라 1만 원을 불렀어도 조금도 비싸지 않다고, 참 싸다고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재미없거나 따분하거나 값어치없다고 느꼈다면, 3000원이 아닌 거저로 준다고 해도 짐스러워서 안 받겠지요.

 어느 헌책방이든 500원이나 1000원에 파는 책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500원이나 1000원이라는 아주 싼값에 살 수 있는 책은 ‘우리들이 얼마나 즐겁게 만나서 사 읽을 만한 책’이 될까요. ‘우리들이 반갑게 사 읽을 만한 책’이라면, 헌책방 임자가 책 값어치를 몰라서 대충 싸구려로 후려치며 내다 파는 책 사이에 더 많을까요, 아니면 헌책방 임자가 알뜰히 손질하고 책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어 얌전하게 책시렁에 꽂아 놓은 책 사이에 더 많을까요.

 헌책방을 찾든 새책방을 찾든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우리들이 읽을 만한 책은, 우리들이 치러야 할 만한 값이 매겨져 있습니다. 갓 나온 최민식 님 사진책 《인간》(눈빛)은 6만 원 딱지가 붙었습니다. 이 사진책 《인간》은 6만 원이라는 값을 하기 때문에 6만 원이 붙습니다. 조지 레이코프라는 사람이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라는 책은 1만 원이라는 책값이 붙었습니다. 이 책은 1만 원이라는 값을 하기 때문에 1만 원이 붙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알맞은 책값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이 헌책방에 들어온다면, 책값이 헌책방마다 다릅니다. 먼저, 헌책방에 들어오는 값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책이라 해도, ㄱ이라는 헌책방에는 1000원에 들어오고, ㄴ이라는 헌책방에는 500원에 들어오며, ㄷ이라는 헌책방에는 100원에 들어오고, ㄹ이라는 헌책방에는 50원에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ㄱ와 ㄴ은 책값이 어떻게 될까요. ㄷ과 ㄹ은 어떻지요? 1000원에 들어오는 책이라 해도, 들어오기 무섭게 팔린다면 책값은 한결 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즘 우리들이 얼마나 책을 즐겁게 사서 읽고 있는가요. ‘헌책방에 책이 들어오기 무섭게 팔리는’ 오늘날인지, 아무리 좋다고 하는 책도 ‘헌책방 책꽂이에 자꾸자꾸 쌓이기만 하는’ 오늘날인지.

 모든 책에는 그만한 값이 매겨집니다. 먼저, 책에 담긴 글-그림-사진을 풀어낸 글쓴이 땀방울에 값을 매깁니다. 다음으로, 책을 엮어낸 출판사 사람들 땀방울에 값을 매깁니다. 그리고, 책을 죽 늘어놓고 파는 책방 사람들 땀방울에 값을 매깁니다.

 헌책방에 들어가는 책은, 먼저, 책을 내놓은 사람한테 물건값(책값)을 보상해 줍니다. 또는, 고물상이나 폐휴지수집상에서 책을 거두어들인 샛장수한테 물건값을 보상해 줍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들어온 헌책을 매만지고 손질해서 갖추어 놓는 헌책방 임자 품에 값을 매깁니다. 새책에는 새책에 걸맞는 값을 매기고, 헌책에는 헌책에 걸맞는 값을 매깁니다. 새책으로 사든 헌책으로 사든, 우리들 책손이 이 책 하나를 손에 쥐기까지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 품과 보람을 몇 푼 책값에 매겨 놓습니다.

 책을 사는 일은, 책 하나에 담긴 줄거리를 받아들이거나 즐기는 일입니다. 또한, 책 하나 엮어내거나 파는 이들이 들인 땀방울에 보답을 해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에는 되도록 ‘자기 돈을 써서 사서 읽어야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한테 재미나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슬기나 깨달음 들을 넉넉히 건네주는 책 하나를 써내고 엮어내고 팔아 준 이들한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일이 ‘책 사기’거든요. 밥 한 그릇 받아먹으며 농사꾼들 땀방울을 고맙게 느끼는 한편 밥알 하나를 이룬 햇볕과 물과 흙과 바람 앞에 고마움을 느끼듯, 책 하나를 손에 쥐면서 이 책을 이루어 낸 모든 손길과 눈길과 마음길을 고맙게 느낀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 사는 일이 즐겁습니다. 책을 읽는 일 못지않게 책을 사는 일이 즐겁습니다. 누군가 저한테 책을 거저로 선사해 준다면 참 반가운 노릇이기는 한데, 제 주머니돈을 털어서 책을 사는 일보다 기쁘지 못합니다. 어렵사리 모은 돈을 그러모아서 고마운 책 하나 사는 일이란, 좋은 줄거리를 받아먹는 일만큼이나 ‘나도 무언가 했구나’ 싶은 뿌듯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손수 책을 하나하나 사서 읽히는 어버이들을 볼 때면, 참 흐뭇하고 살갑다고 느낍니다. 저 아이들은 벌써부터 ‘책 사는 즐거움’을 느끼고 배우고 몸으로 익히니까요. (4340.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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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를 한다. 보일러를 돌려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한 뒤, 먼저 머리를 감는다. 머리를 다 감을 무렵 비로소 물이 조금 미지근해진다. 머리는 찬물로 감았다. 하지만 빨래를 할 때에는 제법 따순 물이 나온다. 어제부터 담가 둔 긴소매 웃옷 한 벌과 긴바지 한 벌을 빤다. 긴소매 웃옷은 보름 앞서 서울에서 충주로 돌아갈 때 입던 옷. 그때 땀에 흠뻑 젖어서 이제 빨아 입어야 했는데, 시골집은 물이 얼어서 빨래를 못한다. 빨래도 못하고 씻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번 서울 나들이에는 빨랫감을 입고 지고 하며 가지고 왔다. 그제는 시골집에서 입는 두툼한 겉옷 하나를 빨고 면티 하나와 수건도 하나 빨았다. 시골집에서는 난방을 거의 안 하기 때문에 옷을 두툼하게 입는다.

 오늘 빤 빨래도 진작에 빨고 싶었지만 못 빨고 있던 옷들. 이제 면티 하나만 더 빨면 밀린 빨래는 다 하는 셈.

 문득 오랜만에 빨래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렇구나. 겨울이 되어 물이 얼어붙은 뒤로는 땀에 전 옷도 말려서 다시 입곤 했다. 이렇게 입으니 몸이 근질근질 자꾸 가려웠는데,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 땀이 줄줄 흐르면 가려움은 이내 사라지곤 했다.

 빨래도 오랜만, 머리감기도 오랜만. 한 번 말끔하게 빨고 씻으니 몸이 개운. 씻은 뒤 가뿐하다는 느낌이 이러했던가.

 비누를 골고루 문지른 뒤 북북 비벼서 빤다. 홍제동 얹혀지내는 집 뒷간은 크기가 작은데다가 세탁기까지 자리를 차지해서 퍽 비좁다. 그래도 몸을 비틀어 쭈그리고 앉은 채 빨래를 한다. 잿빛 땟물이 줄줄줄 흘러나온다. 물을 틀어 빨래를 헹구고, 다 헹군 뒤 뒤틀어 물을 짠다. 다 짠 뒤 탁탁탁 턴다. 빨래를 털 때 자잘하게 일어나는 김 같은 물방울들. 여름철에는 이 물방울이 팡팡 일어날 때 참 시원하다고 느꼈다. 겨울에는 조금 차갑다고 느끼는데, 따순 물로 빤 다음 터니 따뜻하게 느껴진다.

 다 빤 옷을 벽에 박힌 못에 건다. 다 마른 옷은 걷어서 갠다. 월요일쯤 충주로 돌아갈 텐데, 가는 길에 땀에 흠뻑 젖는 옷이 또 하나 생길 테지. 그 옷은 다음에 서울 나들이를 다시 할 때 또 입어야지. 그리고 서울에 와서 다시 빨래를 해야지. (4340.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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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꾹질이 나온다. 오랜만이다. 반갑구나. 딸꾹질이 멈추지 않으면 끅끅 하면서 다른 일을 하기 번거롭지만, 내가 아직 잘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 딸꾹질 나오는 일도 나쁘지 않다.

 배고프다. 지금은 새벽 네 시 삼십칠 분. 밤새 필름을 스캐너로 긁는 한편 글을 쓰고 있다. 어릴 적부터 밤을 새워 본 적은 딱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거의 밤을 새울 뻔했으나 새벽 다섯 시에 깜빡 잠들어서 못 샌 적이 있고, 할머님 돌아가셨을 때는 새벽 여섯 시까지 허드렛일을 하다가 딱 십오 분을 잔 적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군대에 들어가 이등병 때 곧바로 뛴 겨울훈련 때 밤새워 18시간 행군을 한 적이 있고, 똘아이 중대장을 만나 36시간 동안 쉬지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며 얼차려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군대에서 두 번 밤샌 적이 있는 셈이로군. 이런 내가 지지난주에 한 번, 오늘 또 한 번 거의 밤샘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안 졸리다니. 참 놀라운 일이네. 하지만 배고프다. 밤새 깨어 있으니 배가 출출하다. 그래서 밥통에서 밥을 한 숟가락 퍼서 먹는다. 딱 한 숟가락만. 그리고는 한 시간쯤 다시 글을 쓰다가 다시 한 숟가락 먹고, 또 한 시간쯤 뒤 다시 한 숟가락을. 밥을 한 그릇 가득 채워 먹으면 배가 부를 테지만, 이렇게 배가 부르면 바로 졸음이 쏟아진다. 그런데, 어, 밥을 우물우물 씹고 있으니 딸꾹질이 멎네.

 어제 인터넷새책방 ‘알라딘’에서 편지가 왔다. 내가 쓴 글을 보고 ‘미안하다’면서 적립금 2000원을 보내 주었다는 줄거리를 담았다. 글쎄, 딱히 미안할 일이 있을까. 하지만 미안하다고 느꼈다면 고맙다. 얼굴 안 보고 인터넷으로만 돈을 주고받은 뒤 책을 보내는 마당에, 서로 믿을 수 있도록 하지 않은 잘못을 조금이나마 느꼈다면.

 노래 듣는 기계가 고장난 듯하다. 아니 맛이 갔나? 어제까지는 잘 돌아가더니 오늘은 영 삐리리하다. 테이프를 다 씹어먹을 듯 늘어진다. 기계가 퍽 오래되기는 했는데, 이렇게 삐리리하게 되다니. 심심하다. 그나마 혼자 지내는 시골집에 오직 하나 있는 말동무인데.

 새벽 두 시쯤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구름이 퍽 많이 끼었다. 달이 잘 안 보였다. 조금 앞서 나와 보니 구름이 하늘을 온통 덮었다. 아침부터 눈이 내릴라나? 눈이 내린다면 제법 큰눈이 올 듯한데. 날이 좀 풀릴까 싶더니 다시 꽁꽁 얼어붙을지 모르겠다. 한 달 넘게 물을 못 쓰고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봄까지는 이대로 지내야겠구나. 날이 밝으면 윗마을로 부리나케 올라가 물 한 동이 떠올까? (4340.1.3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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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헌책방 책갈래는 어떻게 나누는가


 책은 우리 손으로 펼쳐서 우리 눈으로 읽는 가운데 우리 머리로 새겨서 우리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다른 이가 책을 쥐어 펼쳐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이 눈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다른 이 머리로 새길 수 없습니다. 다른 이 마음으로 곰삭일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책읽기는 오로지 우리 스스로, 우리 힘만으로 하는 일이나 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어울려 놀 때는, 놀이규칙을 저희들끼리 잡습니다. 놀 곳도 저희들끼리 찾습니다. 놀 사람도 저희들끼리 부르고 모읍니다. 누가 시킨다고 놀 수 있지 않아요. 누가 시킨다고 더 잘 놀 수 있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내켜서 하는 놀이요, 스스로 신나기 때문에 즐기는 놀이입니다.

 반갑게 손에 쥐어 읽을 책이라면 우리 스스로 찾아낼 때, 신나게 뛰면서 이마에 땀이 맺힐 놀이라면 우리 스스로 뒹굴 때 가장 반갑고 좋지 싶습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책이든 놀이든 늘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 즐길 때가 가장 재미나고 뿌듯하고 보람이 있다고 느낍니다.

 널찍한 큰 책방에 가든 도서관에 가든, 가만히 골마루를 누비며 책꽂이를 살피다 보면, 책갈래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우리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따로 누구한테 묻지 않아도 책이 저절로 보입니다. 꽂혀 있는 책에 따라 우리 몸이 맞춰지니까요.

 일본으로 나들이를 떠나거나 인도로 나들이를 떠나거나 이집트로 나들이를 떠날 때는, 일본을 느끼고 인도를 살피고 이집트를 부대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파리를 간다면 파리사람들을 만나고 파리밥을 먹고 싶기 때문입니다. 코펜하겐에서는 코펜하겐에만 깃든 모습을 보고 싶으며, 부다페스트에서는 부다페스트에서만 만날 수 있는 모습과 함께하고 싶겠지요. 책방 교보문고를 간다면 교보문고에서만 느낄 수 있는 책을, 책방 영풍문고를 간다면 영풍문고에서만 만날 수 있을 책을 느낄 수 있다면 가장 좋지 싶어요. 우리가 미국 모습을 느끼고 싶어 일본을 찾지 않잖아요. 이집트에 가서 프랑스밥을 먹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헝가리에 가서 독일 문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고향동무를 만날 때에는 고향에서 나고 자란 살가움을 나눕니다. 학교동무를 만날 때에는 함께 학교를 다니며 부대낀 옛이야기를 나눕니다. 일터동무를 만날 때에는 같은 길을 걸으며 느끼는 온갖 세상과 삶을 나눕니다. 사랑동무를 만날 때에는 서로한테 느끼는 애틋함을 부대낄 테고요.

 새책방을 갈 때에는 새책방 책을, 도서관을 갈 때에는 도서관 책을, 헌책방을 갈 때에는 헌책방 책을 만납니다. 부대낍니다. 손에 쥡니다. 찾고 살피고 헤아립니다. 자연스럽게. 같은 새책방이라지만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다릅니다. 대전 대훈서적과 전주 홍지서림이 다릅니다. 인천 대한서림과 광주 충장서림이 다릅니다. 같은 도서관이라지만 국립중앙도서관과 사직동 도서관과 대학교 도서관은 다 다를 테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헌책방이라지만 서울 청계천과 부산 보수동이 다릅니다.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과 용산에 있는 헌책방이, 대전 원동에 있는 헌책방과 청주 중앙로에 있는 헌책방이 다릅니다. 제주시에 있는 헌책방과 춘천시에 있는 헌책방이 같을까요. 다 다르겠지요.

 꼭 찾아야 할 책이 있어서 쪽지에 책이름을 적어 놓고 찾아간다면, 책방마다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책살림을 꾸리는지 살필 일이 없습니다. 그냥 책이름을 부르고, 그 책이 있으면 사고 없으면 안 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꼭 찾아야 할 책이 아니라, 내 마음을 움직이는 즐거움과 보람을 선사하는 책을, 그러면서 아직 내가 모르는 책을, 어렴풋이 스친 적은 있으나 제대로 속살을 맛보지 못한 책을 찾는 몸가짐이라면, 책방을 찾는 우리들 눈에 들어오는 책이 다릅니다. 책방 나들이도 한결 다릅니다. 널찍한 교보문고에서 서너 시간 또아리를 틀고 책을 살피겠지요. 조그마한 헌책방구석에서 네다섯 시간 쭈그리고 앉아서 책을 살피겠지요.

 넓은 새책방과 도서관이라 해도, 좁은 헌책방이라 해도, 이삼십 분 느긋하게 죽 둘러보면 책갈래를 어떻게 나누었는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은 여기에 있고 저런 책은 저기에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와닿을 책을 바라는 마음으로 둘러보면 온갖 책이 다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사려는 어떤 책이름 몇 가지만 머리에 넣고 있으면 책꽂이가 안 보입니다.

 요즘 사람들 책방 나들이 모습을 지켜보면, 다리품을 팔거나 시간을 들여서 자기가 읽을 책을 찾는 분들이 자꾸자꾸 줄어드는구나 싶습니다. 다른 이들이 추천하고 칭찬하는 책, 흔히 좋다고 하는 책을 찾아서 읽는 일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남들 말이 아닌 자기 말로, 그러니까 남들이 좋다고 하든 싫다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한테 가장 좋을 책을 찾는 눈매와 손길이 자꾸자꾸 사라집니다. 어쩌면, 유행 따라 살고 유행 따라 옷 갖춰 입고 유행 따라 머리 손질 하고 유행 따라 돈버는 일자리 바꾸는 요즘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큼직한 책방 교보문고를 찾아가는 까닭이, ‘교보문고가 갖춘 수많은 책을 두루 구경하기’가 아니라 ‘마일리지 쌓기’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동네책방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주문해서 받아 볼 수 있는 책을 구태여 먼 나들이를 하며 교보문고에서 사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책방에 주문한 뒤 택배로 며칠 뒤에 받아 보는 데에 걸리는 시간과, 동네책방에 전화한 다음 손수 책방을 찾아가서 찾아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견주면 어느 쪽이 더 알뜰할까요. 요새는 동네책방에 책 주문을 넣어도 하루나 이틀이면 책방으로 들어옵니다. 다만, 동네책방에 주문을 넣으면 자기 몸을 움직여야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동네책방이 어디 먼 외딴곳에 있나요. 가게에 장보러 오가는 길에, 일터에 오가는 아침저녁 길에, 동무를 만나러 나들이하는 길에 동네책방에 잠깐 들를 짬이 안 날는지요. 컴퓨터 자판 또닥거리며 주문을 넣는 시간이 참말로 ‘짧’을까요.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 같은 책을 사도 좀더 값싸게 살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책을 값싸게 사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값 싸게 얻는 일에만 마음을 쓴다면, 헌책방 나들이를 아무리 오래도록 많이 즐겨도 ‘싸구려’ 하나만 얻을 뿐입니다. 인터넷책방으로 책을 주문하는 일이 다리품을 덜어 준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마음을 써서 세상을 부대끼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오로지 ‘손쉽게’ 살아가는 길만 느낄 뿐입니다. 헌책방 나들이는, 첫째,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본 책을 사는 일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책이지만, 이 모든 새책이 새책방 책꽂이에 고스란히 꽂히지 못합니다. 팔리면 살아남고 안 팔리면 곧바로 사라집니다. 언론매체에서 눈길을 두며 소개해 주는 책은 그야말로 몇 가지 안 됩니다. 그러면 이 책들은 ‘안 읽을’ 만하기 때문에 소개도 못 받고 팔리지도 못한 채 사라져야 할까요. 헌책방은 이런 모든 책을 푸대접하지 않고 모두 똑같은 대접으로 받아들여 주는 곳입니다.

 둘째,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사서 읽은 뒤 내놓은 책을 샛장수와 헌책방 임자 두 사람이 ‘다시 새숨을 불어넣어 팔 만한 값어치가 있구나’ 하고 느끼며 갖춘 책을 사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보는 눈길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며 품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읽을 책이 다르고 읽어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릅니다. 이 다름이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가로지를 수 있다면 헌책방 책꽂이에 살아남습니다. 쉰 해가 지난 책이라 해도, 책겉이 다 낡은 책이라 해도, 나라밖 말로 된 책이라 해도.

 셋째, 어떤 책을 읽으면 좋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온돈을 주고 사서 보지 않아도 좋도록 나눔을 베푸는 일입니다. 도서관은 책 문화를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이어 주는 곳입니다. 문을 열어 주는 곳입니다. 책을 꼭 돈 주고 사서 읽어야 하지는 않으니까요. 참말 좋은 책인데 비싸서 버겁다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됩니다. 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도서관에서 책 빌려 읽기가 참 어렵습니다. 모든 책을 두루 갖춰 놓고 있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은 얼마나 많은가요. 이리하여 도서관에서마저 버리는 아까운 책을, 한 번 버려지면 다시 찾을 길 없는 책을, 새책방에서 판이 끊어진 뒤 자취를 알 수 없는 책을, 어디에서 만날까요. 어디에서 찾을까요. 바로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이 없다면 ‘판이 끊어진 책’과 ‘도서관에서 버린 책’을 만날 길이란 영영 없어지는 우리 나라입니다. 도서관은 책 살 돈이 없는 우리들한테 고마운 나눔터 몫을 하는데, 헌책방은 마냥 빌려서 읽기만 하기에는 어려운 책을, 그리고 새책보다 눅은 값으로 살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합니다.

 넷째, 소중한 자연 자원을 덜 쓰도록 하며 ‘다시쓰기’ 마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책 한 권을 한 사람만 읽도록 만든다면 자연 자원은 너무나 많이 들어야 합니다. 책 한 권을 두 사람이 읽을 수 있다면,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주머니돈을 털어서 사 읽는 책이라 해도, 나중에 다른 누군가가 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아끼고 돌볼 수 있으면 좋습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는, 우리가 사들인 책이 누구 손에 갈까요. 우리가 살아 있는 날만 생각한다면 자연 삶터는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다섯째, 지역에 읽을거리가 돌고 돌도록 하면서 스스로 지역 문화를 가꾸는 일입니다. 헌책방은, 이 헌책방이 깃든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읽고 즐기는 책이 있는 곳입니다. 지역 헌책방을 보면 그 지역 사람들 책문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동네책방이 잘되는 곳은 헌책방도 잘됩니다. 동네책방이 죽을 쑤거나 사라지는 곳은 헌책방도 죽을 쑤거나 사라집니다. 동네새책방과 동네헌책방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라면 동네 문화, 곧 지역 문화도 따로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돈이 으뜸이요, 이름값 날리며 자기 혼자만 떵떵거리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는 동네새책방과 동네헌책방이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책읽기란, 언제까지나 자기를 낮추며 배우는 일이기 때문에, 책읽는 소리가 조곤조곤 마을을 감도는 곳에는 늘 싱싱한 기운이 감돌고 젊음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책읽는 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술주정 소리와 고기굽는 소리로 뒤덮일 뿐입니다.



 여섯째,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겉보다 속을 살피는 눈길을 가꾸며, 우리 스스로 자기한테 참답게 무게를 두며 돌보고 사랑하고 아낄 곳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즐거운 삶인지 돌아보도록 하는 일입니다. 김치국물이 튀었다고 해서 책 줄거리에 김치국물이 묻지 않으니까요. 낡은 갱지로 찍은 책이라 해서 책 줄거리가 낡아 버리지 않으니까요. 빳빳한 종이에 찍은 책이라고 줄거리도 빳빳해지나요? 곱고 하얀 종이에 찍는 책이라고 줄거리도 곱고 하얗던가요.

 나눌 줄 아는 마음, 기꺼이 자기 것을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언제라도 고개숙일 줄 알며 자기가 모르는 것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배울 수 있는 마음, 껍데기나 유행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곱다시 자기 줏대를 지키며 튼튼하고 다부지게 추스르고 매만질 수 있는 마음을 얻거나 나누는 곳이 헌책방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헌책방들은 저마다 책갈래가 다릅니다. 크기도 다 다른 헌책방이고, 마을마다 책갖춤새도 다를 뿐 아니라, 헌책방 꾸리는 분들 마음과 생각도 다 다릅니다. 이리하여 그 작은 헌책방들도 책꽂이 매무새를 살피자면 느긋하게 이삼십 분 둘러보아야 합니다. 바삐 살피는 눈으로는, 건성으로 스쳐 지나가는 몸으로는, 쪽지에 적은 책이름만 읊으려는 입으로는, 조용히 우리들을 부르는 책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귀로는 헌책방 헌책을 느낄 수 없습니다.

 헌책방 한 곳 책꽂이를 느끼는 일은, 그 헌책방 한 곳을 꾸려나가는 책살림을 보는 일인 한편, 그 헌책방이 깃든 마을 문화를 헤아리는 일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는 책흐름을 짚는 가운데 자기한테 가장 알맞을 책 하나를 건져올려야 하는 몸바침이고, 먼저 임자-샛장수-헌책방 임자 이렇게 세 사람 손길을 느끼는 일입니다.

 헌책방 책갈래 살피는 일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일거리를 찾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으려면 자기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아무 책이나 대충 고를 수 없겠지요? 적어도 한두 시간은 들여서 읽는 책인데, 대충대충 유행하는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할까요? 그럴 바에는 아예 아무 책도 안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자기한테 반가울 책을 찾아서 읽어야 좋잖아요. 자기 삶을 가꿀 책을 찾아서 읽어야 좋잖아요. 자기한테 즐겁고 재미가 넘치는 책을 읽어야 좋잖아요. 남들이 읽어서 좋았다는 책이 아니라, 내가 읽어서 좋을 책을 찾아서 읽어야 좋잖아요. 그러자면, 헌책방 책갈래 나눔은 우리들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 느껴야 합니다. 사람마다 좋아하거나 바라는 책이 다른 만큼, 자기가 좋아하거나 바라는 책은 어느 자리에 얼마만큼 꽂혀 있는지, 얼마나 갖추고 있으며 어느 때에 들어오는지 느껴야 좋습니다. 한편, 자기가 딱히 좋아하지는 않으나 자기 생각과 머리를 가꾸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겠지요. 내 이웃을 느끼듯이, 내 동무를 생각하듯이, 내 어버이와 내 딸아들을 헤아리듯이.

 헌책방 책갈래는 우리들이 사서 읽은 책을 중심으로, 그 다음으로는 우리가 사서 읽은 뒤 기꺼이 내놓는 책을 중심으로 갖추어 놓고 나누어 놓습니다. 헌책방 책갈래가 엉성해 보인다면, 또 흐지부지 어수선해 보인다면, 또 거의 나눔이 없어 보인다면, 이런 모습으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헌책방 책갈래가 퍽 꼼꼼하고 알뜰하며 재미있다면, 이런 모습으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파리에는 파리 문화가 있고 도쿄에는 도쿄 문화가 있습니다. 헌책방에는 헌책방 문화가 있습니다. 신촌 ㅈ헌책방에는 ㅈ헌책방 문화가 있습니다. 노량진 ㅈ헌책방에도 ㅈ헌책방 문화가 있습니다. 인천 ㅇ헌책방에는 ㅇ헌책방 문화가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대구 ㄷ헌책방을 찾아가면서도 ㄷ헌책방 문화를 느끼거나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맛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원 ㅇ헌책방을 찾아가면서도 수원 ㅇ헌책방에만 있는 문화를 돌아보거나 만나거나 부대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만날 수 있는 책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어떤 책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헌책방 나들이를 해서 얻는 보람이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요? (4340.1.2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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