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터 뒤지기


 어제와 오늘 집안을 치운다. 다 치우지 못한다. 여느 때에 꾸준히 돌보았다면 애써 날을 잡아 집안을 치울 일이 없었을 터이나, 여느 때부터 집안을 제대로 건사하지 않았으니 날을 잡아 집안을 치운다 하더라도 제대로 치우지 못하고 여러 날이 걸리고 만다. 앞으로 며칠 더 치워야 비로소 조금 건드렸다 할 만하리라 느낀다.

 자질구레하며 쓰잘데없는 물건을 치우고, 이곳저곳에 흩어 놓던 물건을 갈무리하면서 생각한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꾼이란 얼마나 대단하며 고마운 사람일까. 밥을 차려 주는 사람과 함께, 쓰레기 치우는 사람은 참으로 고마우며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새삼 느낀다.

 그러고 보면, 밥을 하는 일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는 사람은 으레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곧 살림꾼이었다. 나는 집안일을 도맡고는 있으나, 나 스스로 살림꾼이라고는 여기지 못한다. 옆지기도 내가 살림꾼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보기로도 살림을 못하고, 옆지기가 생각하기에도 살림을 ‘안 한’다.

 살림하기란 밥하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밥을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몫을 해야 비로소 살림꾼이다. 그런데, 밥을 해서 차린다 할 때에 얼마나 옳고 좋은 밥을 얼마나 옳고 바르게 차리느냐를 살펴야 한다. 밥으로 차릴 먹을거리는 어떻게 일구거나 얻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고, 밥을 차리고 치울 때에 어떻게 하는가 또한 헤아려야 한다.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쓰레기터를 뒤진다. 집은 집인데, 틀림없이 살림집은 살림집인데, 살림을 엉망으로 내팽개치듯 살아온 사람이기에 쓰레기터를 뒤지고야 만다. 밤을 잊으면서 쓰레기터를 뒤질까 하다가 그만둔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이듬날 또 새 하루를 열어야 하고, 아이와 옆지기와 내가 먹을 밥을 차려야 하며, 이렁저렁 또 하루일을 해야 하니까.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은 건드렸으니, 이쯤에서 몸을 쉬면서, 이듬날에는 어디를 어떻게 손을 대어 치우면 좋을까를 곱씹는다. (4344.3.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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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서랍에서 튀어나온 묵은 40만 원


 책상서랍을 갈무리한다. 여러 해 동안 거의 돌보지 않고 이것저것 집어넣기만 한 책상서랍을 갈무리한다. 책상서랍을 쓸 일이 없는 나는 자잘한 물건을 끊임없이 집어넣기만 하니까, 나한테는 튼튼한 종이상자만 있으면 된다. 굳이 책상서랍에 자질구레한 물건을 처박을 까닭이 없다. 서랍 하나는 내 몫으로 남기고 다른 칸은 차근차근 비운다. 옆지기가 책상서랍을 쓸 수 있게끔 비운다.

 책상서랍을 비우다가 돈을 찾는다. 두 가지 돈을 찾는다. 흰봉투에 담긴 돈은 봉투마다 20만 원에서 2∼3만 원쯤 모자란다. 거의 40만 원이 되는 돈이 불쑥 튀어나온다.

 40만 원 가까운 이 돈은 나로서는 허리띠 조르는 살림이면서 뒷날을 손꼽으며 아낀 돈이었을 테지. 돈 만 원이 아쉬운 살림을 벌써 몇 해째 꾸리는가. 돈 만 원이 아니라 돈 천 원 없어 숨막히던 날이 꽤 길었으니까, 이렇게 큰 돈이 책상서랍에서 잠자던 일이란 참 딱하고 안쓰럽다.

 그런데 이 돈이 그때그때 내 손에 쥐어졌더라도 내 살림은 넉넉했을까. 이 돈이 그때그때 내 손에 쥐어졌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책값으로 모조리 날아가지 않았을까. 어려운 살림이면서도 책상서랍에 고이 묻었으니까 오늘까지 남을 수 있지 않았는가.

 이 돈을 언제 얻었는가 곱씹는다. 먼저, 봉투 하나. 이 봉투는 지난해 여름에 우리 살림집을 인천에서 시골로 옮길 때에 받은 돈. 돈도 마땅히 없으며 도서관 책짐을 옮기느라 짐차며 사다리차며 일꾼이며 이백만 원 즈음 써야 했으니, 이 돈 걱정으로 참 빠듯했는데, 우리 식구를 걱정해 준 고마운 이웃 아주머님이 봉투에 이십만 원이나 넣어 주셨다. 이 가운데 이만 원만 빼서 쓰고는 책상서랍에 넣었나 보다.

 다음 봉투 하나. 다음 봉투는 세뱃돈으로 받았던 봉투. 셋째 작은아버지가 몇 해 앞서 설날에 세뱃돈으로 건넨 봉투이다. 언제였을까. 만 원짜리가 새돈으로 바뀌던 해에 받은 봉투인데, 이 봉투에는 만 원짜리 석 장이 빈다. 아마 이십만 원을 주셨을 텐데 3만 원만 빼내어 쓴 듯하다. 만 원짜리 새돈이 갓 나오며 반닥반닥할 뿐더러 돈 번호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열일곱 장이다.

 새돈이 들어오면 손이 떨려 못 쓰는 내 삶을 돌아본다. 내 삶이 이러다 보니, 이 엄청난 세뱃돈을 못 쓰고 서랍에 고이 모셨나 보다. 옆지기하고 함께 살기 앞서부터 책상서랍에서 잠든 돈이다. 앞으로는 이 돈을 쓸 수 있을까. 앞으로는 이 묵은 새돈을 깰 수 있을까.

 나는 책방에서 책을 사며 책값을 치를 때에는 가장 깨끗한 돈을 내민다. 다른 가게에서는 덜 깨끗한 돈을 내민다. 지갑에 만 원짜리이든 오천 원짜리이든 천 원짜리이든 빳빳한 차례에 따라 넣는다. 책값을 치를 때에는 맨 뒤에 놓은 가장 빳빳한 종이돈부터 골라서 내민다. 똑같은 돈이라 하더라도 나로서는 헌책방이건 새책방이건, 내 마음밭을 살찌울 고마운 책을 장만하는 마당인 만큼, 책값보다 넘치는 돈을 낼 주머니는 못 되고, 모자라나마 가장 깨끗한 돈을 내밀기만 한다.

 그나저나 40만 원에서 5만 원이 빠지는 돈이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나는 틀림없이 책을 사려 하겠지. 그동안 침만 바르던 나라밖 훌륭한 사진책을 사려 할 테지.

 그러나, 이러면 안 된다. 이 돈만큼은 내 책을 사는 데에 쓰지 말자. 우리 옆지기가 서너 해 앞서부터 노래를 부르던 리코오더를 사자. 내 국민학교 적 학교 앞 문방구에서 천 원인가 이천 원인가에 팔던 싸구려 플라스틱 리코오더가 아니라, 음계와 화음을 또박또박 잘 잡으며 고즈넉한 소리꽃을 피우는 좋은 리코오더를 장만하자. 그러고 나서 아이 몫으로 조금 남겨야지. 나중에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저 하고픈 무언가 있을 때에 쓰라며 얼마쯤 빼서 따로 모아야지. (4344.3.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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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만큼 읽는 책


 책을 더 많이 읽어 보았기에 새로운 책을 마주할 때에 한결 잘 읽어내지는 않습니다. 책을 덜 읽었기에 새로운 책을 맞이하면서 제대로 못 읽어내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읽는 만큼 읽는 책입니다. 누구나 느끼는 대로 느끼는 삶입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빈틈없이 잘 읽어내는 사람이 있으나, 언제나 빈틈없이 잘 읽어내지는 않습니다.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게 읽어내는 사람이 있지만, 늘 어수룩하게 읽어내지는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만큼 사람을 만나고, 어제오늘 살아온 만큼 이야기를 나누며, 모레글피 살아가고픈 만큼 책을 받아들입니다.

 글쓴이나 그린이 넋을 고스란히 톺아보는 일도 즐겁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 넋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도 즐겁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 넋을 엉뚱하게 읽는다면 좀 슬프거나 안쓰럽지만, 옳게 읽을 줄 모르는 사람한테 옳게 읽으라 말하거나 잡아당길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옳게 읽을는지 모르나, 언제까지나 옳게 안 읽으며 살아갈 수 있어요.

 익숙한 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익숙한 대로라기보다 나 스스로 좋아하거나 몸에 맞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좋아한대서 참으로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올바르거나 착한 길은 아닙니다. 내 몸에 맞다고 여긴대서 거룩하거나 예쁘거나 슬기롭거나 참다운 삶은 아니에요.

 아름다운 삶을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삶을 아름다이 일구기란 참 어려운지 모릅니다. 아니, 어렵습니다. 내 무게를 내려놓고 내 자리를 내주며 내 이름을 지울 줄 알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삶을 좋아합니다. 더 귀담아들을 줄 알고, 더 들여다볼 줄 알며, 더 몸을 맡길 줄 알 때에 내 삶을 아름다이 일굽니다.

 그렇지만, 내 무게를 내려놓거나 내 자리를 내주거나 내 이름을 지울 줄 안다면, 아름다운 삶을 좋아하기란 참 쉽습니다. 더 귀담아듣기를 즐기거나 더 들여다보기를 반기거나 더 몸을 맡기며 흐뭇해 한다면, 좋아하는 삶을 아름다이 일구기란 몹시 쉬워요.

 읽는 만큼 읽는 책이지, 아는 만큼 읽는 책일 수 없습니다. 읽는 만큼 읽는 책이기 때문에, 사는 만큼 일구는 삶입니다. 살고자 애쓰는 대로 살아갑니다. 살려고 마음쓰는 대로 살아냅니다. 못할 일이란 없으며, 안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할 만한 일이 가득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오늘 맞아들여 읽는 책으로 고맙습니다. 속속들이 알아챈다거나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샅샅이 읽어야 기쁜 책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한 줄을 읽어도 즐겁고, 열 줄을 읽어도 기쁘며, 한 권을 통째로 읽어도 고맙습니다. 읽지 못해도 나쁘지 않을 뿐더러, 여러 날 먼지만 쌓이도록 해도 괜찮습니다. 책을 읽으려는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바쁜 나날인데 어찌하겠습니까. 아이가 함께 놀자며 손을 잡아끄는데 책을 어찌 펼치겠습니까. 고단한 몸을 얼른 누여 쉬고픈데 책을 어떻게 넘기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모든 책을 낱낱이 읽을 수 없으며, 반듯하게 책상맡에 앉아 차분히 읽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틈을 쪼개어 읽습니다. 국을 끓이면서 살짝 손을 놓고 히유 한숨을 돌리는 겨를에 한두 줄 겨우 읽습니다. 밥과 찌개와 반찬 세 가지를 불에 올리고 이래저래 바지런히 손을 쓰다가 1분쯤 틈이 나서 손을 쉴 때에 한 쪽이나마 책을 펼칩니다. 버스나 택시를 모는 일꾼은 신호등에 걸린 1분이나 2분을 살려 책 한두 줄 읽을 수 있겠지요. 하루에 1분씩 한 달에 30분이고, 한 해에 365분입니다. (4344.3.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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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개잡지, 헌책방잡지, 어린이잡지


 한국에서 나오는 뜨개잡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사람 손으로 만들고 한국사람이 마련한 뜨개법을 다루는 뜨개잡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우리 말 잡지’는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일구는 ‘헌책방 잡지’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스스로 참 어설프며 어리숙한 깜냥인 줄 알지만, 제때에 짠짠짠 내놓지 못할 뿐 아니라 여느 새책방에 내놓지조차 못하지만 ‘우리 말 잡지이자 헌책방 잡지’를 혼자서 만든답시고 바둥거립니다.

 우리 나라에도 자전거잡지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사람이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즐기는 자전거 이야기를 다루는 자전거잡지는 없습니다. 도시에서 골목동네 가난한 사람이 호젓하게 자전거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든지, 신문을 돌리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삶을 담는 자전거잡지 또한 없습니다. 쌀집자전거로 흔히 아는 짐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눈물과 웃음을 다루는 자전거잡지조차 없어요. 돈으로 사들여서 돈으로 타는 ‘놀러다니는’ 이야기로만 어우러진 자전거잡지만 있습니다.

 한국에도 생태와 환경을 다루는 잡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생태사랑 환경사랑으로 거듭난다든지, 여느 시골자락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 눈높이에서 쉬우며 맑은 말마디로 수수하게 빚는 환경잡지는 없습니다.

 교육잡지는 여럿입니다만, 막상 어린이 손으로 일구는 교육잡지라든지 어린이가 즐거이 읽을 교육잡지란 없습니다. 제도권 울타리에 깃든 교육잡지나 제도권 울타리 바깥에서 싸우는 교육잡지만 있습니다.

 책을 말하는 잡지란 있을까요. 그토록 수많은 출판사가 수많은 책을 낼 뿐 아니라, 책 만들어 돈 톡톡히 버는 출판사 또한 꽤 많은데, 막상 ‘책을 말하는 책잡지’는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합니다.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책을 쓰신 분이 있습니다만, 당신들끼리 당신 울타리에서 복닥거리는 책마을에서 맴도는 책잡지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 푸름이 어린이가 제 삶을 예쁘게 사랑하거나 아끼는 어여쁜 책잡지가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린이교육잡지라든지 어린이학습잡지라든지 어린이교양잡지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이삶과 어린이놀이와 어린이꿈을 꾸밈없이 들려주는 잡지는 없습니다. 왜 아이들한테 무엇이든 애써 가르치려고만 하나요. 왜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지 못하나요. 아이들 몸과 나이에 걸맞게 심부름과 일을 즐기도록 어깨동무하는 이야기를 잡지로 묶기란 그토록 어려운가요.

 가만히 보면, 한국에는 팔림새에만 눈길을 두는 만화잡지가 몇몇 있으나, 만화를 만화다이 돌보는 만화잡지는 없다 할 만합니다. 사진을 사진 그대로 껴안는 사진잡지는 힘겹게 태어났어도 이내 숨을 거둡니다. 삶으로 스미는 사진을 북돋우는 사진잡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겉멋든 예술과 껍데기를 벗지 못하는 다큐멘터리 허울에 슬프게 얽매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 엉터리라서 참다운 잡지가 발붙이지 못하는 우리 나라라 할 수 없습니다. 잡지를 사서 읽을 사람부터 슬기롭지 못하니까, 잡지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슬기를 그러모으지 못합니다. 잡지를 사서 읽을 사람부터 제 삶을 옳게 사랑하면서 예쁘게 일구지 못하니까, 잡지다운 잡지가 태어나더라도 금세 기운이 꺾이며 사라지고야 맙니다.

 뜨개질은 취미일 수 없는 삶이고, 사진찍기이든 글쓰기이든 만화나 영화나 교육이나 환경이나 자전거나 모두 아름다운 우리 삶입니다. 삶을 느끼지 못하거나 삶을 깨닫지 않을 때에는, 이 나라에 잡지다운 잡지가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4344.3.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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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은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싶은 길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길에 따라 사람들이 읽으려고 하는 책이 달라집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고 싶은 길에 따라 내가 읽으려고 하는 책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내 아이를 사랑하고 싶다면, 내 아이와 함께 읽을 책을 먼저 고릅니다. 내 아이를 한결 깊이 사랑하는 길을 걷고 싶다면, 굳이 내 아이와 읽을 책을 고르기보다 아이 손을 맞잡고 놀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딱히 책이 없더라도 내 아이를 사랑하는 길을 얼마든지 신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에 몰려들어 살아갑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골 터전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살아도 더 큰 도시로 들어가려고 애씁니다. 더 큰 도시에서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찾으려고 힘씁니다. 더 작은 도시로 가거나 시골마을로 가려고 마음쓰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해서 즐겁게 모는 사람은 자가용을 장만해서 즐겁게 모는 길에 걸맞게 책을 고릅니다. 또는, 책 따위란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도시에서 빽빽히 밀리는 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리는 사람은 커다란 도시에서 빽빽히 밀리는 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리는 길에 따라 책을 살핍니다. 또는, 책이란 아예 생각할 수 없이 고단합니다.

 여성해방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는대서 남녀평등을 이루는 길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여성해방 이야기 지식을 더 쌓는 일하고 남녀평등 이루는 길은 같지 않습니다. 삶은 삶이고 지식은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요리책을 많이 읽어 이 요리 저 요리를 안다 한들, 맛집을 많이 다녀 맛난 밥으로 무엇이 있다고 안다 한들, 나 스스로 밥을 차리지 않는다면 이 모든 지식은 지식으로 그치지, 삶으로 이어가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맡을 몫이란 교과서나 교재에 담긴 지식을 아이들이 머리속에 더 많이 가두도록 내모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 스스로 지식을 바란다면 아이 스스로 바라는 지식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서 스스로 갈고닦도록 돕는 일이 교사가 할 몫입니다. 아이가 지식을 찾으려 할 때에 지식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며, 지식 하나가 태어나기까지 어떠한 길을 거쳐야 하는가를 찬찬히 밝히는 일이 교사가 할 몫입니다. 교사는 아이들한테 지식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란 교재나 교과서에 모두 담겼으니까요. 교사는 몸으로 삶을 보여주면서 삶을 물려줄 뿐입니다.

 이른바 ‘진보대연합’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아무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말로 진보가 크게 하나가 되는 일인지, 아니면 진보이든 아니든 크게 하나가 되는 일인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이러한 이름을 내거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름대로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일 텐데, 이렇게 굵직한 이름 하나로 모여서 ‘아무개 반대’를 이루는 일만 하겠다는 소리이지, 정작 ‘진보를 이루는 어떠한 일’이라든지 ‘우리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어떠한 일’이라든지 ‘진보이든 보수이든 누구이든 즐겁고 예쁘며 착하게 살아가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자리에서 ‘아무개 반대’를 이루겠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다만, ‘아무개 반대’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아무개 반대’를 할 만하며, 아무개를 반대하는 일로도 좋은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아무개를 반대하면서 내 삶은 어느 쪽으로 어떻게 무엇이 나아지거나 좋아질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삶을 어느 쪽으로 어떻게 나아가도록 하고 싶은가요.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얼른 죽어서 거꾸러지기를 바라는가요.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한결 아끼거나 사랑하면서 이이가 착하거나 참다운 길을 걷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가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따사롭고 믿음직하게 살아가도록 도우면서, 저마다 옳고 바르면서 어여쁜 길을 씩씩하게 걷는 데에 내 몫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가요.

 ‘진보 어깨동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루어질 만한 일이란 ‘평화 어깨동무’나 ‘평등 어깨동무’나 ‘일자리 어깨동무’나 ‘통일 어깨동무’나 ‘책읽기 어깨동무’나 ‘영화사랑 어깨동무’나 ‘집살림 어깨동무’입니다. 나 스스로 집살림부터 책읽기와 일자리를 거쳐 평화로운 삶을 어깨동무할 때에 바야흐로 진보 어깨동무이지, 처음부터 진보 어깨동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원의 집》 둘째 권을 읽으면, “아빠는 다시 시냇가로 가서 물을 길어 왔고, 그동안 메리와 로라는 엄마를 도와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37쪽).”는 대목이 나옵니다. 다섯 식구 작은 살림은 ‘엄마가 물을 길어’ 올 수 있고 ‘아빠가 아침을 차리며 두 딸아이가 아빠를 도와 밥을 하든 엄마를 도와 물을 긷든’ 할 수 있습니다. 밥을 하는 평화와 ‘아직 학교는 가 본 적 없는 어린 아이들이 집일을 거들며 함께 밥을 하고 함께 밥을 먹는’ 사랑이 깃드는 나날이 곧 책이면서 삶이고 사랑이면서 믿음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진보나 보수로 나누지 않고, 착한 사랑은 좌파나 우파로 가르지 않으며, 참다운 책이란 어린이와 어른 모두 흐뭇하게 맞아들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고픈 사람은 매우 드문 듯합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앞으로도 한국사람치고 삶과 사랑과 책을 예쁘게 하나로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아침에 안친 밥냄비에서 밥내음이 솔솔 납니다. 이제 밥상을 행주로 닦고 수저를 놓아야겠습니다. (4344.3.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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