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삶이


 지난해 섣달부터 올 사월 첫머리까지 빨래삶이를 못했다. 집물을 못 쓰며 빨래를 다른 집에서 했기 때문이다. 넉 달 만에 빨래삶이를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한다. 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조용하다. 이런 날 이불도 함께 빨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침부터 여러 집일을 하느라 등허리가 쑤셔서 이불빨래는 엄두를 못 낸다. 다가오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둘째한테 쓸 새 기저귀를 삶으면서 이불빨래를 하나하나 할까 생각한다. 아무쪼록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맑은 날씨이기를 바란다.

 나 혼자 살아가던 때에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딱히 즐기지 않았고, 둘이서 함께 살아가던 때에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굳이 즐기지 않았다. 이레를 돌아보며 하루나 이틀쯤 느긋하게 쉰다 여길는지 모르나, 토요일이라서 밥을 굶어도 되거나 일요일이라서 손발을 안 씻고 자도 괜찮지는 않다. 나날이 밥을 먹고 날마다 새 빨래가 나온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날씨가 맑기를 바란다. 꽤 예전이라 할 내 스무 살 적에 신문배달을 하던 때라든지, 군대에 갔다 오고 난 뒤로 다시 신문배달을 하던 때에는 토요일 낮부터 일요일까지 비가 몰아서 오기를 비손했다. 왜냐하면 토요일 낮부터 일요일까지는 신문을 돌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신문을 돌리는 여느 날에 비가 내리면 신문비닐도 많이 써야 할 뿐더러, 비 맞으며 서너 시간씩 신문을 돌리는 일이 몹시 고되다.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홀살이를 하던 때라든지, 이제 딸아이 하나를 돌보며 둘째를 기다리는 내 삶에서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햇볕이 쨍쨍 내리쬐기를 빈다. 왜냐하면 이런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사람들이 어디 놀러다닌다든지 쉰다든지 하면서 나로서도 집일에 더 품과 땀과 겨를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오덕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없다. 아이들과 할 공부를 헤아리며 무슨 이야기를 나눌는지 생각하지 않으면서 집일에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기에 꽤 홀가분하면서 느긋하다. 느긋하게 이불을 빨 수 있고, 홀가분하게 아이를 씻길 만하다.

 몇 시간씩 빨래삶이를 하거나 이불빨래를 하고 나서 마당에 빨래를 잔뜩 널어 놓는다. 잠자리에 까는 평상도 마당에 펼친다. 아이는 마당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아버지 집일을 거든다고 부산을 떤다. 등허리를 톡톡 토닥이면서 이제 좀 기다리면 될까 하고 마당에서 기지개를 켜다가는 걸상 하나를 비워 책 하나 들고 나와 해바라기를 하며 읽으려 하면, 아이도 걸상 하나에 있던 빨래를 옆으로 치우고 영차영차 올라와서 아버지 하는 양을 따라하려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기다린다. 맑은 토요일과 밝은 일요일이 되기를 비손한다. (4344.4.14.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읽기는 힘들지만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달삯을 벌어들이느라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무 살부터 내 삶길을 글쓰기와 사진찍기로 맞추면서 살았다 하더라도 도시에서 글을 써서 돈을 벌기란 몹시 벅차다. 더더구나 나처럼 돈이 되는 글이 아니라 돈이 안 되는 글, 이른바 ‘우리 말 이야기’랑 ‘헌책방 이야기’를 즐겨쓰는 사람이 무슨 글삯을 벌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용하게 굶어죽지 않고 어찌저찌 버티었다. 힘들 때마다 형이 살림돈을 도와주었으니까 버티었다 할 텐데, 날마다 수없이 글을 써대려면 밑천이 있어야 하기에 날마다 이모저모 책읽기에도 여러모로 마음을 많이 썼다.

 시골집으로 옮기고부터는 도시에서처럼 죽기살기로 글을 쓰지 않는다. 다만,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용솟음치는 글을 쓴다. 그나마, 샘솟는 글을 모두 쓴다거나 어느 만큼 후련하게 쓰지는 못한다. 글을 좀 쓰고 싶어도 아이하고 복닥여야 하고, 집일을 해야 하며, 밥을 차려야 하는데다가, 요사이는 시골집 깃든 둘레에 있는 이오덕학교에서 날마다 한 시간씩 책이야기 공부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글조각을 붙잡을 겨를이 거의 없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을 읽지 않는다면 글을 쓰기란 참 힘들다 할 만하다. 글을 쓰는 주제에 책조차 안 읽는다면 무슨 글을 쓴다 하겠는가.

 요즈음, 나는 책을 참 못 읽는다. 그래도 오늘날 여느 사람들과 견주면 꽤 많이 읽는다 할는지 모르지만, 종이책 몇 쪽 넘기기조차 몹시 버겁다. 요 며칠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 읽어 주기도 제대로 못한다.

 등허리가 몹시 쑤셔서 자리에 털썩 드러누운 채 두 눈이 감기기 앞서 몇 가지 책을 넘겨 보곤 했다. 이 가운데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안목,2011)는 꽤 잘 읽혔다. 예전에 처음 나올 때(2005년)에 진작 읽은 책이니 다시 읽어도 잘 읽힌다 할 터이나, 다시 읽으면서도 새로 읽는 느낌이었고, 필립 퍼키스 님 글책은 여러 차례 되읽어도 늘 새삼스럽게 기쁘다.

 생각해 보면, 일이 쌓이고 몸이 힘들기 때문에 이 책 저 책 자질구레하다 싶은 책까지 못 들춘달 수 있다. 참으로 읽어야 할 책을 더 깊이 읽는다 할 만하고, 참말로 아름답구나 싶은 책을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면서 읽는다 할 테지.

 저녁나절, 아이는 제 엄마한테 “빨강머리 보고 싶어.” 하면서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또 보았다. 같은 이야기를 언제나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다시 보는데, 오늘 본 〈빨간머리 앤〉에는 앤이 후두염에 걸린 미니메이를 돌보는 이야기가 흐른다. 빨간머리 앤은 미니메이가 살아난 뒤에 후유 한숨을 돌리면서 마릴라 아주머니한테 ‘세 쌍둥이를 건사하던 일을 겪지 않았다면 미니메이를 보살필 수 없었으리라’ 하고 말하면서, 지난 괴로운 일을 나쁘게만 돌아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 앤은 얼마나 학교를 다니고 싶었으며, 공부를 하고 싶었겠나. 그러나 앤은 학교도 못 다니고 공부도 못하며 어머니나 아버지 사랑 또한 받지 못했어. 그런데 이렇게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낸 나날이 있어서, 좋은 삶동무 다이애나를 사귀고 다이애나 동생인 미니메이를 보살필 슬기를 몸으로 아로새기듯 얻었겠지. 책이란 종이책만 책이라 하겠나. 몸뚱아리 책도 책이고 설거지 책도 책이며 빨래하기 책도 책일 테지. 책을 읽기는 힘들지만, 용케 책하고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그럭저럭 버티며 오늘 하루도 마감하며 이제 슬슬 자리에 누워야겠다. (4344.4.13.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79.28


 운동경기란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주 혼자서 하는 운동경기가 있을까 궁금한데, 골프라 하더라도 골프채를 들고 옮겨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테니스이든 탁구이든 배드민턴이든 코치나 감독이나 도움이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저런 몇 가지 운동경기는 혼자서 뛴다고 얼추 말할는지 모르리라.

 야구라든지 축구라든지 농구라든지 핸드볼 같은 운동경기는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야구는 아홉 사람, 축구는 열한 사람, 농구는 다섯 사람, 핸드볼은 일곱 사람이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곰곰이 따지면, 경기장에 들어선 사람이 아홉이요 열하나요 다섯이요 일곱이요 할 뿐, 뒤에서 받치거나 기다리는 사람은 훨씬 많다. 연습을 할 때에 돕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한국땅 운동경기는 이 나라 사람들한테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기를 바라며 생긴 운동경기가 아니다. 한국땅 ‘프로스포츠’는 관계자 스스로 밝히기도 하듯이, 1980년대 전두환 독재정권 때에 사람들 눈과 마음과 생각을 홀리려고 만들었다. 프로야구이든 프로축구이든 매한가지이다. 여기에 돈벌이라는 꿍꿍이 하나가 곁들여 여러 운동경기가 ‘프로스포츠’로 발돋움한다.

 오늘날 한국땅 배구 대회 또한 프로스포츠요, 돈에 따라 움직인다. 값진 땀이나 즐거운 보람에 앞서 돈과 성적을 높이 여긴다. 돈을 잘 벌어야 하고 성적이 빼어나야 한다. 어찌 되든 1등을 해야 하고, 1등이 아니면 알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1등을 하면 그동안 무얼 어떻게 하든 모두 좋게 토닥인다.

 2010년부터 이어지던 프로배구 대회가 2011년 봄에 마무리된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구단이 끝경기를 치룬다. 둘 가운데 한 쪽이 이기며 1등으로 마무리되는데, 둘 가운데 이긴 쪽에서 ‘아주 잘 한다는 선수 하나’가 맡은 공격 몫은 79.28%. 열 번 팔을 휘둘러 공을 때려야 할 때에 자그마치 여덟 차례 한 사람이 펄쩍 뛰어서 팔을 휘두르며 공을 때렸다는 소리.

 ‘아주 잘 한다는 선수 하나’는 여느 경기에서도 으레 60∼70%쯤 공격을 도맡곤 했다. 끝경기에서는 자그마치 80%가 되도록 공격을 도맡은 셈인데, 이쯤 되면 한국땅 프로배구란 배구라는 이름이 하나도 걸맞지 않은 셈이 아닌가 싶다. 그저 1등을 해야 하고, 어찌 되든 이기기만 해야 하며, 1등과 이기기에 얽매여 선수를 노예처럼 부리든 다른 선수를 들러리처럼 경기장에 세우든 아랑곳할 일이 아닌 셈이 된다. 이런 ‘혼잣놀음’ 경기를 바라보는 사람 또한 1등을 하거나 이기기만 하면 즐거운 노릇이라는 틀에 길들여지거나 익숙해진다. 배구라는 운동경기는 그저 ‘공을 높이 띄워 한 사람이 펑펑 두들겨패듯 맞은편 바닥에 철썩철썩 내리찍으면 그만’인 점수따먹기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야구부끼리 붙는 운동경기부터 끔찍하다. 웬만한 고교야구 대회에서는 예선부터 결선까지 ‘잘 던지는 선수 하나’가 1회부터 9회까지 홀로 던지는 일이 흔하다. 이 선수가 4번 타자까지 한다면 선수 하나로 1등을 거머쥐는 일이 생기는 셈이다.

 작전이란 없는 운동경기이다. 생각이란 없어도 되는 삶이다. 마음도 뜻도 보람도 나눔도 있을 까닭이 없는 이 나라이다. 그예 돈이면 되고, 1등이라는 숫자라면 즐겁다고 말한다. 사랑보다는 아파트이고, 믿음보다는 자가용인 한국이다. (4344.4.11.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홀가분하게 쓸 글


 글 하나 써 주면 좋겠다는 편지가 그제 왔다. 오늘이나 이듬날 인천으로 마실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얼른 일을 끝내야겠다 생각하면서, 새벽녘 편지 하나를 띄운다. 나는 늘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글 하나 쓰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를 적는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한다. 바로 이 자리에서 써 볼까? 곧바로 글을 쓴다. 원고지 20∼25장 사이로 글을 쓰면 좋겠다 했고, 한 시간쯤에 걸쳐 원고지 22장짜리 글을 마무리짓는다. 다 쓴 글을 한 번 죽 읽으면서 잘못 적은 곳 하나를 손볼 뿐, 딱히 더 다듬지 않는다. 이 글을 받은 쪽에서 어찌저찌 고쳐 달라 한다면, 그때에는 새로 써야지. 나는 예전부터 글을 고쳐서 쓰지 못한다. 어느 대목 하나 고쳐 달라 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고치라 하거나, 나 스스로 아예 새글을 쓴다. 좀 모자라거나 아쉬울 글이든 퍽 괜찮거나 좋다 싶은 글이든 나로서는 다 내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쓴 글이든 저렇게 쓴 글이든 나중에 낱권책으로 묶으려고 생각할 때에는 통째로 고쳐쓰기 일쑤이다. 마음이 바뀌기 때문일까. 글쎄, 이는 아니라고 느낀다. 예전에 옆지기한테 제대로 말을 못했는데, 제대로 말을 못한 까닭은 나 스스로 아직 제대로 깨닫거나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잡지사나 신문사 같은 데에 보내는 글은 새로 하나 쓰되 글을 다듬거나 고치지 않으면서 낱권책 글만큼은 고쳐서 쓰는 까닭이란,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글은 ‘꼭 이때까지 느낀 대로 써서 꼭 이때에만 읽고 새기는 글’이다. 낱권책에 싣는 글은 ‘낱권책이 나오는 어느 한때로 그치는 글’이 아니라, 적어도 열 해나 스무 해를 웃도는 글이 된다. 그래서 낱권책을 낸다 할 때에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열 해나 스무 해 앞날까지 돌아보면서 더 가다듬거나 추스른다. 그런데, 낱권책에 실을 글을 이렇게 가다듬거나 추스른다면, 여느 때에 쓰는 글도 이렇게 해야 옳지 않을까. 여느 때에도 열 해나 스무 해 앞서를 헤아리며 조금 더 알뜰히 여미어야 하지 않을까. 찬찬히 생각해 본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느 때에는 여느 때대로 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마음과 몸에 걸맞게만 이야기를 풀고 싶다. 오늘은 오늘 느낌과 삶 그대로만 쓴다. 오늘 하루가 모여 내 삶이 되고, 내 삶은 내 글로 태어난다. 낱권책은 내 삶이라기보다 내 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이다. 선물과 삶은 다르다고 느낀다. 내가 꾸리는 삶으로 오늘 하루를 살거나 살림을 돌본다. 오늘 하루를 살거나 살림을 돌보며 틈틈이 아이 몫을 떼어서 남긴다. 글은 늘 홀가분하게 쓴다. 낱권책 또한 홀가분하게 내 글을 고친다. 아직 엉성한 텃밭이지만, 우리 텃밭에 들이는 땀은 그날그날 들일 뿐 더 들이지 못한다. 날마다 힘닿는 대로만 힘을 들인다. 이듬날 줄 거름을 오늘 줄 수 없다. 다음달 뽑을 풀을 오늘 어찌 뽑겠나. 오늘은 오늘 이야기만을 쓴다. 아직 아이는 깨지 않았으나, 곧 깰 듯하다. 오늘 글쓰기도 이제 곧 마쳐야 할 듯하다. (4344.4.7.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저녁에


 아침 열한 시 오십 분에 읍내에서 나오는 시골버스는 열두 시 오 분 무렵 광벌 큰길가 느티나무 버스역으로 들어오고, 네 식구 장마당 마실을 하고 난 다음 낮 한 시 사십 분 시골버스를 타고 한 시 오십오 분에 광벌 큰길사 느티나무 버스역에 닿아, 꾸벅꾸벅 조는 아이를 안고 걷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잠이 조금씩 깬다.

 아이가 그대로 잠들어 아이를 안은 채 집으로 왔다면 아이는 낮잠을 조금 잤을 테고, 아버지도 낮잠을 조금 자고 나서 저녁을 먹었겠지. 그러나 아이가 졸립고 힘들면서 잠들지 않는 바람에 장마당에서 사온 딸기랑 아침에 남은 밥이랑 허둥지둥 주워먹고는 이내 곯아떨어진다. 오늘 몫 빨래는 이듬날로 미루기로 한다.

 저녁 열한 시가 가까워 잠에서 깬다. 아이도 잠에서 깬다. 아이한테 일어날래 하고 묻는데 그냥 눕는다. 쉬 마려우면 일어나라 하는데 그대로 눕더니 기저귀에 쉬를 하고서 일어난다. 그냥 일어나서 쉬를 하면 덧나니. 왜 기저귀에 쉬를 한 다음에 일어나니.

 곯아떨어지기 앞서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 넷째 권을 다 읽었다. 만화책 《피아노의 숲》 열아홉째 권도 다 읽었다. 만화책 《요츠바랑!》 열째 권은 읽다가 말았다. 몸이 꽤 무거워 눈이 게슴츠레 감길 때에는 만화책이 그럭저럭 읽힌다.

 그러나 몸이 힘들 때라 해서 모든 만화책이 잘 읽힐 수 없다. 만화책이라 잘 읽힌다기보다 여느 책으로서 훌륭하거나 여느 이야기로서 돋보일 때에 몸이 힘들면서도 눈에 더 힘을 주면서 읽는다. 《씨앗의 희망》이든 《숨겨진 풍경》이든 《초원의 집》이든, 언제나 저녁 무렵 온몸이 욱씬욱씬 쑤시며 고단하게 드러눕는 잠자리에서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잠을 미루며 읽었으니까.

 새벽에 맑은 넋으로 책을 읽는다. 저녁에 고단한 넋으로 책을 읽는다. 아침에 기쁜 넋으로 책을 읽는다. 낮에 어수선하고 바쁜 넋으로 책을 읽는다. (4344.4.2.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