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역에서 2분



  기차역 맞이방에 있기보다는 기차옆 앞마당 나무그늘에 있고 싶습니다.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순천역에서 기다립니다. 앞으로 사십 분쯤 기다려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연필을 손에 쥐고 글을 씁니다. 한창 글을 쓰다가 문득 시계를 살피니 09시 42분. 어라 벌써 이렇게 되었나? 부랴부랴 가방을 어깨에 걸고 등에 메고 하면서 달립니다. 기차표를 보니 09시 44분에 타야 합니다. 2분 남았어? 이야, 바지런히 달려야겠네. 눈썹을 휘날리며 계단을 날아오릅니다. 네, 날아오릅니다. 기차는 제때에 들어와서 제때에 떠나려고 합니다.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오릅니다. 나무그늘 앞마당이 좋아서 그만 글쓰기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면 열 시가 넘도록, 제가 탈 기차가 떠나고 나서도, 까맣게 몰랐을 테지요. 2017.5.24.물.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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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서 이야기잔치



  2017년 들어 처음으로 강의를 나옵니다. 되도록 집에서 봄맞이 흙살림을 할 생각이었지만, 멋지고 즐거운 자리가 있기에 씩씩하게 강의를 나옵니다. 요즈음 한국은 미국 사드와 핵잠수함을 밀어붙이는 트럼프 정책과 맞물려서 전쟁 기운이 감돕니다. 둘레에서는 사드와 핵잠수함을 보고도 전쟁 기운을 못 느끼는 분이 많을 뿐 아니라, 전쟁이 터지겠느냐고 하는 생각을 하는 분이 많아요. 그러나 1조 원에 이르는 미사일에다가 핵잠수함이 함께 움직이는 흐름은 틀림없이 북녘이 남녘을 치도록 부추기는 무서운 모습이지요.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노릇일 뿐 아니라, 먹고살기에 바쁘기에 이런 일에 고개를 돌릴 수 없습니다. 더구나 새 대통령을 뽑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길 수 없지요. 요즈음 일을 놓고서 주한 미국 대사를 찾아가서 이 일을 따진 대선후보는 오직 심상정 한 사람이라는 대목조차 사람들이 못 느낍니다. 다른 후보는 지지율을 높이려고 하는 데에만 마음을 쓰거든요. 고흥에서 포항으로 오는 길에 ‘평화를, 평화를, 오직 평화를’을 마음으로 빌었습니다. 포항 달팽이책방에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길손집에 깃들어 몸을 씻고 옷을 빨래하고 느즈막히 저녁을 먹으면서도 ‘평화를, 평화를, 바로 평화를’을 마음으로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볼 곳은 평화요, 우리가 대통령으로 뽑을 일꾼도 평화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평화를 말하지 않고 안보를 말하는 이는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2017.4.29.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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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앓이



  안 먹던 무언가를 먹으면 꼭 배앓이를 하는 몸입니다. 안 하던 무언가를 할 적에도 으레 배앓이를 하는 몸입니다. 이러다 보니 어릴 적부터 굳이 새로운 일이나 놀이를 잘 안 하려 했지 싶어요. 몸이 무척 고단하니까요. 그렇지만 새로운 일이나 놀이를 이럭저럭 하다 보면 몸은 어느새 나아지고 배앓이가 사라집니다. 낯익거나 입에 자주 대던 밥조차 한동안 멀리하다가 다시 가까이하면 어김없이 배앓이를 하는 몸인 터라 ‘뭐는 못 하고 뭐는 되고’가 저한테는 따로 없어요. 다시 말하자면, 몸은 늘 새로워지려고 배앓이를 하지 싶어요. 묵거나 낡은 일을 내려놓고서 새로운 일로 접어들려 하면, 신나게 배앓이를 하면서 새로운 몸이 되려고 한달까요. 그러니 이 몸을 붙안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틈틈이 배앓이를 해야지 싶어요. 너무 자주 하면 몸이 고될 테니 달포에 한 번쯤 새롭게 나아가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달포마다 새로운 길을 걷고, 달포마다 속을 깨끗하게 비우고, 달포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일어서고, 달포마다 몸도 한결 가벼워지고 …… 구태여 뭔 약을 안 먹어도 몸이 저절로 배앓이를 베풀어 주어 스스로 깨달아요. ‘오늘 나는 무언가 새로운 길을 걸었네’ 하고요. 배앓이가 좀 가라앉으면 아이들 곁에 누우려 합니다. 2017.4.16.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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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걸이



  인천 배다리로 바깥일을 보러 옵니다. 이곳에 있는 ‘배다리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묵습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글을 쓰다가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는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여느 길손집이라면 잠자리에 빗자루나 걸레가 없을 터이나, 이곳 ‘배다리 사랑방’은 배다리마을에서 손수 가꾸는 보금자리 쉼터예요. 마을 분들이 으레 이곳에서 모이거나 쉽니다. 저 같은 길손은 때때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습니다. 여느 길손집이라면 묵는 삯만 치르고 떠나면 그만일 텐데, 이곳은 마치 우리 보금자리하고 같은 쉼터라서 즐거이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큰 거울이 씻는방에 있기에 이 거울도 물때를 말끔하게 벗깁니다. 걸레질을 마치고 걸레를 빨았는데, 널 만한 데가 안 보입니다. 저는 짐가방에 늘 옷걸이를 여럿 챙기며 다녀요. 아이들하고 함께 마실을 나올 적에 저녁에 옷을 빨아서 널려는 뜻입니다. 저한테는 옷걸이가 넉넉히 있으니 가방에서 하나 꺼내어 젖은 걸레를 꿰어 마당에 널어 놓습니다. 제 옷걸이 하나가 이곳에서 아주 조그마한 살림살이 노릇을 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2017.4.1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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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뿌리를 심다가



  밤 한 시 사십오 분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가방을 꾸립니다. 아침 일곱 시 첫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에 가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로 합니다. 새벽 다섯 시 무렵 소리쟁이잎을 썰어 설탕에 재웁니다. 소리쟁이잎은 어제 낮에 뜯어서 씻고 말려 놓은 뒤 저녁에 한창 썰어서 재웠는데, 마개까지 꽉 찼어요. 하루 지나면 조금 숨이 죽어 더 들어가리라 여겼습니다. 참말로 하루(라기보다 몇 시간) 지나니 소리쟁이잎 석 줌을 더 넣을 수 있습니다. 어제 심으려다가 미처 못 심은 파뿌리 다섯을 새벽 여섯 시에 심습니다. 곰밤부리를 호미로 훑어서 자리를 마련하고, 훑은 곰밤부리는 새로 심은 파뿌리 둘레에 고이 깔아 놓습니다. 지난해 봄께 심은 파는 겨울에도 씩씩하게 잘 살았고, 한 해 동안 꾸준하게 새 줄기를 내주었습니다. 지난겨울부터 심은 파뿌리도 저마다 씩씩하게 새 줄기를 올리면서 우리한테 고맙게 새 줄기를 내주어요. 가볍게 다 심고서 들딸기꽃을 바라보고 갓꽃을 바라봅니다. 소담스레 붉은 꽃송이로 온통 잔치를 이룬 동백나무를 바라보다가 직박구리 한 마리가 초피나무 가지에 앉아서 한참 나를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를 듣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면서 오늘 하루를 새롭게 엽니다. 2017.4.1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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