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과 글쓰기 3


 살림을 하는 사람이 글을 얼마나 쓰고 책을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사람이 살림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아이를 무릎에 앉히어 그림책을 읽히면서 ‘밥벌이를 하는 글’을 쓰거나 ‘내 마음밥 채운다는 책’을 읽을 수 있나? 다만, 골목마실이나 헌책방마실을 할 적에는 아이를 안고 한손으로 덜덜 떨며 사진을 찍곤 했다. 숨을 이십 초쯤 멈추고 손이 떨리지 않게끔 다스리면서 살며시 단추를 누른다. 사진 한 장 찍고 나면 히유 한숨이 쏟아지면서, 아이가 포근히 안겨 있는가 살핀다. 시골집에서는 아이랑 놀다가 지쳐 떨어져 방바닥에 드러누운 채 아이가 춤추거나 노래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이마저도 삼십 분이 넘어가면 그냥 곯아떨어진다. 아이는 아이대로 더 신나게 뛰어논다. 이제 아이를 재우고픈 마음에 등불 하나 없이 깜깜한 시골길을 손 잡고 거닐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눈다. 머잖아 동생이 태어날 텐데 언니 된 아이가 밥 잘 먹고 잠 잘 자며 마음껏 뛰어놀면 참으로 좋겠다고. 이렇게 등불 하나 없이 깜깜한 때를 ‘밤’이라 하는데, 이러한 밤에는 다들 코 자니 아이도 코 자야 한다고. 아이가 다리 아프다며 안아 달라 할 때쯤 그만 걷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닿으니 아이는 다시금 뛰어논다. 어른은 아이를 이기지 못한다. (4343.1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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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목과 글쓰기


 아이가 어젯밤부터 손목이 아프다며 “아야.” 하면서 운다. 오늘 낮까지 이렇게 울더니, 저녁때에 그 아프다던 오른손목에 시계를 차며 신나게 뛰어논다. 속으로 ‘내 아이이지만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다. 그러나 오른손목이 살짝 저릿한 아픔이 가셨으니 이렇게 놀 수 있겠지. 어제 밤 동안 아프다며 거의 삼십 분인가 이십 분인가 …… 틈틈이 “아부지!” 하면서 내 얼굴을 툭툭 치며 깨우더니. 그래, 생각해 보니 아이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아버지를 깨웠으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밤잠을 못 자고 아이는 아이대로 밤잠을 못 잔 셈이다. 아버지로서는 새벽부터 쌀을 씻어 불려 놓다가 아침에 밥을 안치고, 또 찌개 하나 끓이며 빨래를 하고, 이러며 이부자리 개고 뭐 하고 밥상 차린 다음 밥 먹이고 그러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가을녘 햇살 자리에 따라 마당가에 널어 놓은 빨랫대 자리 옮기고 …… 하면서 죽어나느라 나 혼자 졸음이 쏟아져 괴롭다 노래하지만, 아이 또한 손목이 아프다며 밤새 잠을 못 이루었으니 고단한데 손목이 아픈 탓에 제대로 놀지 못해 더 짜증스러워 투정을 부리고 하겠지. 참 어린 나이부터 애먹는구나. 돌 무렵에 밥상 모서리에 눈썹을 박으며 몇 센티미터 찢어져서 맨살에 마취주사 없이 꿰매지를 않나, 툭하면 넘어지고 박고 까지고. 그나마 아이가 손목이 아프다며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쥐지 못하니 아빠랑 엄마가 떠먹이는 밥을 날름날름 잘 받아 먹어 주었다. 오늘 아침에는 이제까지 함께 밥을 먹어 온 날 가운데 가장 빨리 밥상을 치울 수 있었다. 아, 늘 한 시간은 쉽게 걸리던 밥먹기를 이토록 일찍 끝마칠 수 있다니. 아이가 늘 아프다면 엄마랑 아빠 말을 잘 들어 줄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설핏 했지만,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니까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도 간지러운 몸을 어쩌지 못해 엉덩이 들썩들썩하면서 뛰어놀아야 맞겠지. 앞으로 몇 살 나이까지 이렇게 놀겠는가. 아버지로서, 어버이로서 조금 더 찬찬히 바라보고 마주하며 얼싸안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창 무럭무럭 크면서 말을 제법 익히는 때인데, 더 안고 더 어르며 더 따스히 말을 걸어야 한다고 느낀다. 아이가 어느 한 군데 아프기라도 하면 차라리 내 몸이 아프기를 바라는데, 아이가 아파해 보는 나날을 겪으며 제 몸이 아프듯 제 이웃과 둘레 사람들 몸도 아플 수 있거나 몸이 아플 때에 얼마나 괴로운가를 살갗으로, 온몸으로 잘 삭이거나 받아들여 줄 수 있기를 비손한다. 아이야, 모레까지이든 글피까지이든 늦게늦게까지 오래오래 잠자며 손목이며 다른 곳이며 아픈 자리 싹 씻고 다시금 말괄돼지처럼 개구지게 놀아 보렴. (4343.11.2.불.ㅎㄲㅅㄱ) 


(이렇게 까불며 놀다가 손목을 삐끗한 돼지 한 마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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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와 글쓰기


 아이가 새벽 두 시 반부터 깬다. 잠들 줄을 모른다. 세 시 반이 지나고 네 시 반이 지나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 왜 그럴까. 어디가 아픈가.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꾸었을까. 다섯 시 반이 되니 자리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아빠를 부른다. 엄마는 깊이 잠들어 아이가 불러도 대꾸를 못한다. 한숨을 깊이 내쉬며 되도록 따스한 말씨로 아이를 부른다. “왜, 쉬 마렵니?” 살짝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응, 쉬 마려.” 한다. “그래, 쉬 하자.” 하며 기저귀를 벗기고 오줌걸상에 앉힌다. 아이가 쉬를 눈다. 아이를 품에 안다가 살며시 눕혀 다시 기저귀를 채운다. 기저귀를 다 채운 다음 아이를 번쩍 안고는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아이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이가 너무 칭얼거린다면서, 아빠 몸이 고단하다면서, 이 핑계 저 둘러대기로 아이를 한결 따스히 어루만지지 못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맨 먼저 〈겨울 물오리〉를 부른다. 두 번 더 부른다. 〈한 아이〉를 부르고 〈순복이〉를 부르며 〈우리 어머니〉였나를 부르고 〈우는 소〉였던가를 부른다. 노래이름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노래말도 잘 떠오르지 않아 떠오르는 대목부터 부르고는 다시 처음부터 부른다. 가운데쯤부터 부르다 보면 첫머리가 떠오른다. 〈해바라기〉를 부르고 〈찔레꽃〉이었던가를 부른다. 두 가락쯤은 백창우 님이 노랫말을 붙인 노래이지 싶으나, 다른 모든 노래는 이원수 님 어린이시에 붙인 가락을 붙인 노래이다. 백창우 님이 새로 지은 노래도 괜찮다고 여기지만, 난 다른 어느 노래보다 이원수 님 어린이시에 붙인 노래가 좋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자장노래를 부를 때에는 으레 이원수 님 어린이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를 읊는다(노래를 지으며 시 몇 글월을 조금 바꾸었다). “언제나 일만 하는 우리 어머니, 오늘은 주무셔요. 바람 없는 한낮에, 마룻바닥에. 콧등에 땀이 송송 더우신가 봐. 부채질 해 드릴까. 그러다 잠 깨실라. 우리 엄만 언제나 일만 하는 엄만데, 오늘 보니 참 예뻐요, 우리 엄마도. 콧잔등에 잔주름 들도 예뻐요. 부채질 가만가만 해 드립니다.”,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 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바람 두렵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남 모르게 가만히 먹어 봤다오.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맞으러,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우리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할아버지가 대로 엮은, 커다란 광주리에, 호박만 한 풍선을 천 개쯤 매달고, 쌍둥이 강아지와, 해바라기씨를 가득 싣고, 엄마가 계시는 별을 찾아간다던, 철길 옆 오두막의 눈이 큰 순복이는, 아직도 그 마을에 살고 있을까, 첫 별이 뜰 때부터, 사립문에 기대 서서, 빨간 스웨터 주머니의, 호두알을 부비며, 으음 요즘도 엄마별을 기다릴까.”

 어쩌면 아이한테 불러 준다는 자장노래는 아이한테만 사랑스럽거나 포근한 노래가 아니라, 이 노래를 부르는 어버이 스스로 사랑스럽거나 포근해지도록 이끄는 노래는 아닐까. 어버이라고 안 졸립고 안 지치며 안 힘들겠나. 졸립고 지치며 힘들면서도 기꺼이 자장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힘은 바로 이 노래에 있지 않으려나. 누구보다 어버이 스스로 따스하게 감싸면서, 이 따스함으로 아이를 함께 넉넉히 어루만지도록 이끄는 노래가 자장노래가 아니랴 싶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백창우 님이 새로 지은 노래는 자장노래로 아이하고 함께 즐길 만하기는 어렵고, 한낮에 재미나게 부르며 마음껏 뛰노는 노래로는 잘 어울린다.

 그나저나, 한참 노래를 부르니 아이가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린다. 노래 몇 가락 더 부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리에 눕히며 가슴을 토닥이는데, 아이가 번쩍 눈을 뜬다. “엉? 엉? 아빠 코 자? 코 자?” 하고 말을 건다. (4343.1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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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와 글쓰기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새벽 일찍 하루를 열고 저녁 일찍 하루를 닫는다. 도시에서 살아가던 때, 동네 구멍가게가 가까이 있을 뿐더러 밤 열한 시 넘을 때에도 문을 여니까 목이 마르면 보리술을 산다며 아이를 안거나 업거나 손을 잡으며 밤마실을 나오곤 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제 엄마랑 아빠가 잠들 때까지 잠을 안 자려고 하니까.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살림집과 도서관 달삯을 다달이 꼬박꼬박 치르자면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기운이 다 빠지도록 글을 써야 했다. 이렇게 글을 쓴다 한들 돈을 모으기란 어려울 뿐더러, 쉼없이 사진찍기를 한달지라도 돈이 되기란 빠듯했다. 그래도 벅차며 버거운 살림을 어영부영 꾸렸다. 지치며 고단하지만 그럭저럭 입에 풀을 바르며 살았다.

 시골집으로 살림을 모두 옮긴 지 넉 달을 지나는 이즈음, 도시로 볼일 보러 나갈 일을 모조리 없앴다. 앞으로 새로 일거리를 마련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굳이 도시로 나갈 일이란 따로 없다. 그예 시골집 언저리에서 산을 타며 머물면 된다. 달삯 나갈 걱정이 없고, 달삯을 번다며 아둥바둥하며 글을 써대야 할 근심이 없다. 그러나 도시에서 지낼 때이건 시골에서 지낼 때이건 쉼없이 글을 쓴다. 어차피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든 나한테는 내 할 몫이 있으니까. 새벽부터 저녁까지 틈 나는 대로 글을 끄적인다.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글을 한 줄조차 못 쓴다. 아이가 깨어 있을 때에 아이 엄마가 아이랑 놀아 준다면 글을 조금 끄적이겠지만, 아이 엄마는 아이랑 놀아 줄 만큼 몸에 기운이 많지 않다. 아이랑 아이 엄마랑 고요히 잠든 깊은 새벽에 홀로 살며시 일어나 글을 써야 한다. 아이가 아침부터 신나게 뛰어놀다가 낮에 한숨 코 자 준다면, 나 또한 아이랑 복닥이며 지친 몸이지만 눈을 비비며 글 몇 줄 끄적일 수 있다.

 시골집에서 느긋하게 머무는 나날을 맞이하면서, 지난날 도시에서 바삐 지내며 쓰던 글을 돌아본다. 바삐 지내며 쓴 글이라 해서 모자라거나 덜 떨어지지는 않다. 다만 얽매이거나 억눌린 삶결을 느낀다. 얽매이거나 억눌린 삶결로 글을 쓴다고 어줍잖거나 어설플 까닭이 없다. 얽매이면 얽매이는 대로 풀어내면 되는 글이고,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홀가분히 엮으면 되는 글이니까. 이제 시골살림을 탄탄히 뿌리내리는 몇 해 뒤에 오늘을 돌아본다면, 아무래도 오늘 이곳에서 느끼는 내 지난날 발자취가 아쉽거나 안쓰럽다고 바라보듯, 오늘 내 삶 또한 서너 해 뒤에는 적잖이 아쉽거나 안쓰럽겠지. 아이 하나를 키우며 이토록 복닥이는 삶인데, 아이 둘을 키우며 새삼스레 복닥이는 삶을 맞이한다면 어떠한 느낌일까. 요즈음 삶이 얼마나 느긋하며 한갓지다고 느끼려나.

 하루하루 살아가는 만큼 생각하고 느끼며 글을 쓴다. 나는 내 밥그릇만큼 글을 쓴다. 나는 내 마음그릇답게 글을 쓴다. 내 밥그릇은 가득 찬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반쯤 차지도 않는데다가 한 귀퉁이에 젓가락질 한두 번 하면 텅 비는 밥그릇인 채 글을 쓴다. 내 마음그릇은 얼마나 너그러울까. 내 지난날 글을 되새기노라면, 내 마음그릇 또한 내 밥그릇처럼 썰렁한 채 글을 쓰지 않았나 싶다. 요즈음은 그럭저럭 예전보다는 낫다 여길 만하지만, 예전보다 낫다 해서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빛나거나 좋다고 말하기 부끄럽다. 예전보다 낫다며 흐뭇해 할 수 있는가. 예전이랑 오늘을 견주는 마음그릇이 아닌, 오늘 스스로 곱씹을 때에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빛나거나 좋다고 느낄 마음그릇으로 거듭날 노릇이다. 오늘은 새벽 두 시 반부터 글쓰기를 하며 하루를 열었으니, 새벽 다섯 시 반을 지나는 이때 살짝 눈을 붙이자. 일곱 시나 일곱 시 반에 다시 일어나 마무리를 짓고, 아침 밥상으로는 무엇을 차릴까 생각하며 오늘 하루 아이랑 무엇을 하며 어떻게 놀는지를 헤아리자. 아빠가 글쓰기에만 푹 빠져 있으면 아이도 힘들고 아이 엄마도 힘겹다. (4343.10.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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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잠과 글쓰기


 새벽 네 시에는 일어나야 하루를 알뜰히 열어 알차게 보낸다고 느낀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면 더욱 알뜰살뜰 보낼 수 있을 텐데, 세 시나 두 시부터 일어나 하루를 열면 몸이 좀 찌뿌둥하다. 다섯 시에 일어나면 빠듯하게 몰아쳐야 하니까 적잖이 어수선하거나 벅차다. 새벽 다섯 시를 넘겨 자리에서 일어나면 나로서는 늦잠이다. 나한테는 새벽 네 시부터 하루를 열며 글쓰기를 하는 삶이 가장 알맞고 좋다.

 그런데 아이 하나를 키우는 삶으로서 이맘때가 가장 좋은데, 아이가 둘이라면 어떠하려나.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한테 동생이 생겨 둘째를 첫째와 마찬가지로 돌보고 보듬으며 복닥이며 지내는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면 내 하루는 언제 열어야 좋으려나. 그때에도 새벽 네 시에 느긋하게 홀로 글쓰기를 하며 마음닦이를 할 수 있는가. 아이 하나와 함께 살아가며 빨래감이 비로소 조금 주는구나 하고 느끼는데 다시금 기저귀 빨래 왕창 나오는 아이키우기를 해야 한다고 할 때, 내 글쓰기이며 사진찍기이며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아이 두셋씩 키우면서도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바깥일을 해내는 적잖은 분들을 보면 몹시 놀랍다. 이분들은 언제 책을 읽고 언제 글을 쓰며 언제 밥을 먹으려나. 밥을 입으로 먹을까 코로 먹을까 귀로 먹을까.

 겨울 새벽 하얗게 밝는 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본다. 시골집에서는 새벽이 하얗게 밝아 오더라도 시끄럽지 않다. 도시 골목집에서조차 새벽이 다가올 무렵 얼마나 시끌벅적한지 모른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골목집에 깃든 사람들이 새벽과 아침을 조용하면서 느긋하게 맞이하고파 하는 줄 모르는 듯하다. 큰길에서면 모르되 왜 골목길에서조차 자동차를 그리 거칠고 시끄럽게 몰까.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은 왜 골목길에서도 그리 떠들썩하게 굴면서 지나갈까.

 이제 나무마다 가랑잎을 내고 멧자락에 먹을거리가 떨어질 즈음이 되니, 작은 멧새들이 새벽녘부터 우리 살림집 둘레로 찾아든다. 밤에 잠을 자다 보면 우리 살림집 문에 콩콩 쿵쿵 뭔가 부딪는 소리가 난다. 다람쥐이거나 족제비이거나 오소리이거나 너구리일 테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님은 밀가루를 일부러 문간에 뿌려 놓고 짐승 발자국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단다. 시튼 님이 살던 예전처럼 큰곰이나 늑대나 여우가 이 나라 멧자락에 보금자리를 틀지는 못한다. 고작 몇 가지 멧짐승밖에 없다.

 지난주에 멧자락을 타며 버섯을 딸 때에 고라니 똥을 보았다. 이 나라에서는 멧돼지도 그리 많지 않고 노루나 사슴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 멧돼지 때문에 밭농사 망친다는 곳이 제법 있는데, 지난날을 헤아린다면 요즈음 멧돼지는 멧돼지라고조차 하기 힘들다. 멧돼지가 멧자락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도록 고속철도를 뚫고 고속도로를 내며 공장을 지으니까 어쩔 수 없잖은가.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분들은 이 나라 정부나 건설회사한테 땅을 팔면 안 된다. 농사짓던 땅이나 너그러운 멧자락이 기찻길이나 찻길이나 공장터나 아파트가 되지 못하도록 막아 주어야 한다. 이렇게 막아내지 못하니까 멧돼지가 밭을 파헤쳐 먹이를 얻으려 한다.

 새벽 네 시쯤 하루를 열며 글을 쓰고 있자면, 새소리는 새벽 다섯 시 오십 분이나 여섯 시 십 분 사이에 맨 처음으로 들린다. 여섯 시 반부터 새소리가 꽤 많이 들린다. 겨울을 코앞에 두니까 이즈음 들리는데, 이제 이곳 멧기슭 살림집에서 겨울을 난 다음 새봄을 맞이하고 새여름을 즐길 수 있다면, 그때에는 멧새가 봄이랑 여름에는 언제부터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새 하루를 여는지 남달리 알 수 있겠지. 멧새 모이통을 하나 마련해 볼까. (4343.10.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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