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 산하세계문학 15
사라 룬드베리 지음, 이유진 옮김 / 산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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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시렁 151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

 사라 룬드베리

 이유진 옮김

 산하

 2018.7.31.



“선생님, 우리 집 당근들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제가 심은 당근을 그려도 되나요?” 그러자 선생님이 엄한 눈초리로 말한다. “내가 시키는 대로 그려라.” (11쪽)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유한 외삼촌은 그저 평범한 농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도 멋진 그림을 그려내는 요술쟁이였다. (21쪽)


아빠는 우리 세 자매가 모두 가사관리사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정해진 것이다. 이미 정해진 길이라서 큰언니는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나는 싫다. 나는 뻔한 길을 가기 싫다. (37쪽)


몸이 꿈틀거린다. 모든 것을 종이에 옮기고 싶다. 내가 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곳을 떠나려니 조금은 두렵다. 그러나 떠나야겠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야 할 새 한 마리가 내 안에 있으니. (102쪽)



  오늘날 학교에서 그림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교사가 시키는 틀에 맞추어서 그려야 했습니다. 상상화라든지 정물화라든지 초상화라든지 수채화 같은 이름에 따라 그리고, 그림자를 어떻게 그리고, 빛을 어떻게 맞추고 원근법을 살피라고 하는 틀로 그려야 했어요.


  여러 가지를 겪거나 알아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만, 그림을 그릴 틈이 잦지 않은데 수업마다 늘 다른 붓질(표현기법)에 따라 움직이고, 이 붓질로 늘 점수를 매겨서 성적표에 담으니, 스스로 무엇을 헤아려서 즐겁게 그림놀이를 누리는 길을 가로막는 셈이었어요.


  그림에 점수를 매겨도 좋을까요? 그림에 붙이는 값이란 무엇일까요? 그림에 마음을 담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림을 즐기는 눈빛이며 손빛으로 노래할 적에 비로소 그림이 그림답지 않을까요?


  스웨덴 시골자락에서 나고 자란 분이 겪은 어린 날을 바탕으로 엮은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사라 룬드베리/이유진 옮김, 산하, 2018)는 어쩐지 그림이 마음에 끌린 사람이 꿈을 피우려고 무엇을 했는가를 들려줍니다. 이 책에 나오는 어린 가시내는 베타 한손 님(1910∼1994)이라고 해요. 시골자락에서 들밭을 돌보고, 집에서 밥을 짓다가, 어느 만큼 나이가 들면 ‘가사관리사’라고 하는, ‘집일도움이’로 돈을 버는 길만 보라고 하는 터전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가시내는 집일도움이가 되어야 한다면 사내는 무엇이 되어야 했을까요? 아마 공장 일꾼으로 가거나 군인이 되어 싸움터로 끌려가야 했겠지요. 이런 흐름이던 나라에서는 가시내도 사내도 제 꿈을 키우기란, 아니 꿈을 생각하거나 꿈을 입으로 말하기란, 터무니없다고 했을 만합니다.


  요즈음 스웨덴은 사뭇 다를 테지만, 1910∼20년 스웨덴은 ‘교사가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고 합니다. 당근 하나를 그린다고 할 적에, 참말로 모든 당근은 다 다르게 생기기 마련이니, 다 다른 당근을 그릴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여러 당근 가운데 도드라지거나 재미나게 생긴 당근을 그리고 싶기도 하겠지요. 민들레 한 송이를 그리더라도 말끔하게 핀 민들레가 있지만, 한쪽이 일그러진 민들레가 있고, 꽃잎이 수북한 민들레 못지않게 꽃잎이 적은 민들레가 있어요. 봄이 무르익을 즈음 민들레는 꽃잎이 매우 수북하지만, 가을에 다시 돋는 민들레는 꽃잎이 퍽 적습니다. 철 따라 다른 모습이에요. 이 다른 결을 그림에 담는다고 할 적에 이 그림을 읽는 눈썰미는 얼마나 깊거나 넓을까요?


  남이 시키는 길보다는 스스로 꿈꾸는 길로 가고프던 아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또 집에서 여러 일을 치르고 나서, 아버지 앞에서 당차게 제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 뜻을 들은 아버지는 퍽 부드러이 아이 뜻을 받아들였고, 아이는 시골을 떠나 큰도시에서 그림을 배운다고 하는데, 외려 큰도시에 안 머물고 시골로 돌아와서 들밭을 돌보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더군요.


  어린이문학하고 푸른문학 사이에 놓을 만한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인데, 베타 한손 님이 보여준 몸짓은 여러모로 돌아볼 만하다고 여깁니다. 스스로 제 뜻을 밝히는 당찬 몸짓, 모든 그림이며 삶이 태어나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읽는 눈빛, 너른 판에서 그림을 배우고 싶은 꿈, 그리고 이 모두를 하나로 아울러서 스스로 즐거우면서 조용하게 살림을 지어 그림으로 담아내는 길, 이 여럿을 잘 보여주는구나 싶어요.


  배운 것을 무르익혀 새롭게 꽃피우는 걸음걸이였기에, ‘그림을 그저 잘 그리던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바라보며 사랑하는 빛을 그림에 곱게 담아내던 즐거운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두고두고 남을 만하겠지요. 우리 마음에서 깨어나는 새는 우리가 꿈꾸는 데로 홀가분하게 날아오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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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천사 - 가람 햇살동화 2
오카다 준 지음, 손미선 옮김 / 가람문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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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책시렁 214


《꼴찌천사》

 오카다 준

 손미선 옮김

 가람문학사

 2001.11.20.



‘뭐가라니. 이렇게 바보 취급당하는 건 네가 꼴찌라서 그런 거라구.’ ‘괜찮아.’ ‘뭐가 괜찮아. 분하지 않아?’ ‘물론 기분은 좋지 않아. 하지만 그보다는 너랑 얘기하는 것이 더 좋아.’ ‘좋다고?’ 꼴찌천사는 눈을 깜박이며 하지메를 쳐다보았다. ‘하, 하지만 성적이 떨어지면 너희 아빠 엄마가 실망하실 텐데.’ (49쪽)


하지메는 심장이 오므라드는 듯했다. 반에서 성적이 가장 나쁘다고 생각한 하지메에게, 두 번째로 못하는 미유키가 자기 답안지를 보고 쓰라며, 0점이 아닌 점수를 받게 해 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56쪽)


꼴찌천사가 공중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유키, 너 정말 착하구나. 네가 계속 꼴찌를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과연 너를 불쌍하게 생각했었을까?’ 정말 그렇다며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를 마시고 있던 선생님이 움찔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미유키,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하지메의 질문에 미유키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선생님께도 꼴찌천사에 대해서 가르쳐 드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 (118쪽)


“그게 좀 달라. 우리는 점수를 잘 받으려고 가르쳐 준 것이 아니거든. 함께 꼴찌를 하려고 서로 가르쳐 준 것이니까.” (124쪽)



  우리가 어깨동무를 한다면 모든 사람이 첫째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막째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로 달리면 딱히 첫째나 막째로 가를 수 없으니, 다같이 첫째도 되고 막째도 되지만, 무엇보다도 숫자라는 틀을 뛰어넘어서 함께 웃고 놀면서 신나는 나날을 누릴 만합니다.


  어깨를 풀고 먼저 뛰쳐나가는 이가 있다면 이이는 첫째를 하겠지요. 맨 나중까지 뛰쳐나가지 않는 이는 막째가 될 테고요. 이때부터 서로서로 줄서기가 되고, 위랑 아래를 가르는 자리가 생깁니다.


  우리한테는 어떤 길이 아름다울까요? 굳이 줄을 세우거나 숫자를 붙이는 길이 아름다울까요? 구태여 으뜸이나 버금이나 딸림이나 막째를 가르는 이름이 즐거울까요? 위아래도 숫자도 없이 서로 얼크러지면서 새롭게 배우고 웃고 노래하는 잔치마당이나 놀이마당을 열 적에 즐거우면서 아름다울까요?


  어린이문학 《꼴찌천사》(오카다 준/손미선 옮김, 가람문학사, 2001)는 첫째나 둘째, 또 셋째나 넷째 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앙증맞은(?) 천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름이 ‘꼴찌천사’인 만큼 오직 꼴찌인 자리에서만 만날 뿐 아니라, 말을 섞고 서로 바라보며 마음으로 속삭일 수 있어요. 서른 사람이 있을 적에 스물아홉째라 하더라도 꼴찌천사를 못 봐요. 오직 서른째일 적에만 봅니다. 다만, 스물일곱째부터 서른째까지 ‘같이 막째 점수’를 받으면 나란히 꼴찌이니, 이때에는 여러 아이가 꼴찌천사를 만나서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즐겁게 하루를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마땅한 노릇이지만, 꼴찌천사는 첫째나 둘째, 더구나 셋째나 넷째도 못 봐요. 열째나 열다섯째도 못 보지요.


  우리는 오늘 어느 자리에 있는가요? 우리는 오늘 어느 자리에 있고 싶나요? 오늘 스물하나나 스물셋 같은 자리에 있으니 열하나나 열셋 같은 자리로 ‘올라서’려고 동무나 이웃을 밀치거나 밟으려고 하지는 않나요? ‘올라서기’가 너무 끔찍한 줄 온몸으로 느끼면서 느긋하면서 차분하게 맨 뒤쪽 자리에서 조용조용 천사를 만나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으로 웃음수다를 누릴 수 있을까요?


  이야기책 《꼴찌천사》가 다루기도 합니다만, 서른 아이가 있을 적에 서른 아이가 모두 ‘나란히 꼴찌’가 되면, 모든 아이는 꼴찌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자, 생각해 봐요. 서른 아이가 ‘나란히 꼴찌’라면, 거꾸로 ‘나란히 첫째’가 되는 셈이에요. 뒤처지거나 뒤떨어지는 길이 아니라 어깨동무하는 길입니다. 나란히 한걸음이 되면서 서로 돕고 이끌며 돌보는 눈빛을 밝힐 수 있어요.


  생각해 봐요. 막째에 있는 이더러 첫째로 달려오라고 어떻게 부르나요? 첫째에 있는 이가 걸음을 멈추고 막째한테 다가가서 돕고 이끌며 돌보는 길이 맞지 않을까요? 아이는 어른 걸음을 좇을 수 없어요. 아이는 어른 팔심을 따를 수 없어요. 아이더러 어른처럼 몸을 써서 일하라고 시켜도 될까요? 아닙니다. 아이더러 어른이 쓰는 모든 말을 다 알아들으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지요. 어른이 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수월한 길을 찾아야지요. 어른이 아이 눈높이를 살펴서 쉽고 부드러운 말을 고르고 가려서 써야지요.


  경제성장율 아닌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웃음’이나 ‘노래’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길을 헤아려서 나아가야지 싶어요. 더 높은 시험점수는 이제 걷어치우고서, 서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살펴서 아름다운 마을이며 보금자리를 가꿀 노릇이지 싶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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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 종교, 차별, 여성, 법으로 살펴본 혐오 이야기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2
김진호 외 지음, 인권연대 기획 / 철수와영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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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학대”인 대학입시를 그칠 수 있을까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인권연대 기획

 김진호·이찬수·김홍미리·박미숙 글

 철수와영희

 2019.7.30.



무한 경쟁 사회에서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그러면서 자기도 또 누군가를 혐오하는 악순환. 저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주의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45쪽)



  어떤 어버이도 아이한테 “남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요. 절집이나 학교에서도 그렇겠지요? 그런데 나라에서는 어느 나라를 대놓고 “그 나라를 미워하라” 하고 부추기기도 합니다.


  어떤 어버이도 아이더러 “너 스스로를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요. 절집도 학교도 그렇겠지요? 그러나 가만히 보면, 입시 지옥이라는 굴레가 사그라들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아이가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성적이 떨어진다 싶으면 다그쳐요. 떨어진 점수를 높이라고, 높여 놓은 점수를 그대로 이어가라고 닦달을 하고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켜요.



기존 질서가 유지되어 나갈 때 그와 함께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권력이에요. 거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분리해 나갈 때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긍정되고, 정치적 차원에서 얘기하면 그 정점에 있는 권력이 정당화됩니다. (75쪽)



  “이웃을 사랑하자”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어른이나 어버이라도 틀림없이 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자” 하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자꾸 흔들리지 싶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남을 미워하는 길로 휩쓸려요.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깎아내리는 길로 휘둘려요.


  우리는 왜 자꾸 남도 미워하고 우리 스스로도 미워할까요? 인권연대에서 꾀한 이야기밭에서 여러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이 이야기를 갈무리해서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를 엮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한자말로 ‘혐오’란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이 한자말은 ‘미움·미움질’을 가리켜요.



요즘 입시는 거의 청소년 학대 수준이잖아요. 그 안에서 성장한 친구들은 예외 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청년 대상의 강의를 하면서 느낀 점입니다만, 소위 잘나가는 대학의 학생들은 똑똑하지만 자기 검열이 심해요. 교수 눈치를 심하게 봅니다.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찾아볼 수가 없지요. (49쪽)



  아마 다들 알지 않을까요? 대학입시가 ‘입시지옥’인 줄을. 여느 자리에서는 누구라도 ‘입시지옥’이라 말하지만, 아이들이 고등학교 수험생이 되거나 재수생 자리에 서면 슬그머니 ‘대학입시’라고만 말하면서, 이 입시 싸움터에서 ‘우리 아이만 살아남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을 닦달하거나 다그치지는 않는가요?


  이제는 미움질을 멈출 때이지 싶어요. 싸움질도 그칠 때이지 싶어요.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에서도 짚는 대목입니다만, 참말로 대학입시는 “청소년 학대”라는 대목을 제대로 바라보고서 받아들여야지 싶습니다. 청소년뿐 아니라 어린이도 일찌감치 괴롭히는(학대) 짓인 줄 똑똑히 마주하면서 받아들여야지 싶어요.



여성은 늘 변함없이 노동을 해왔습니다. 일을 하지만 ‘일’이라고 불리지 않았죠. 가사 노동이 대표적입니다. (112쪽)



  우리 삶터 어른들이 저지르는 이 미움질하고 싸움질을 끝내지 않는다면,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하고 이웃 아이들이 다같이 괴로워요. 더 높은 점수로 더 나은 대학교로 보내어 더 높은 일삯을 거머쥐도록 내모는 길이 아니라,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즐겁게 꿈을 키우면서 배울 수 있는 터전으로 키를 돌려야지 싶어요. 같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어른들이 키를 돌려야지요. 지옥이 아닌 기쁨누리로, 싸움이 아닌 아름누리로, 미움이 아닌 사랑누리로,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서 키를 돌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하나씩 돌아봐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돈을 안 내는 사람 있나요? 세탁소에 옷을 맡긴 뒤에 돈을 안 치르는 사람 있나요? 호텔에 묵고서 돈을 안 내고 나올 수 있나요? 그런데 왜 집에서는 ‘어머니·곁님(여성)’이란 자리를 ‘막노동 무임금’이 되도록 오랫동안 내몰았을까요?


  같이 일하고 같이 쉬면 모두 풀려요. 같이 살림하고 같이 누리면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이 나라에 떠도는 미움질(혐오)이라는 허깨비를 바로 여느 살림집부터 내쫓을 노릇이지 싶습니다. 하나씩 치우기를 바랍니다. 미움질 아닌 사랑손으로 거듭나기를 빕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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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3·1 운동이 뭐예요? 어린이 책도둑 시리즈 4
배성호.최인담 지음, 김규정 그림 / 철수와영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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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책시렁 212


《선생님, 3·1운동이 뭐예요?》

 배성호·최인담

 철수와영희

 2019.3.1.



양심과 정의를 무기로 남을 원망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질서를 존중함을 여러 번 강조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주장할 것이라는 굳은 다짐도 살펴볼 수 있어요. (39쪽)


학생, 청년, 여성, 노동자, 노인 등 신분이나 성별, 직업에 상관없이 나라를 되찾고자 한 수많은 사람이 있어서 3·1운동은 거대한 물결처럼 일어날 수 있었답니다. (47쪽)


당시 일본 경찰은 “나이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또는 목격함으로써 …… 장래 교육상 큰 문제가 될 것이다.”라는 보고서를 남겼어요. 실제로 3·1운동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은 이후 독립군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어요. (73쪽)



  말없이 바라봅니다. 엉터리 같은 일이 일어나기에 말없이 바라봅니다. 조용히 지켜봅니다. 터무니없는 일이 생기기에 조용히 지켜봅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말없이 바라봅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찾아오고, 어느새 열 사람이며 스무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저 바라봅니다. 엉터리 같은 일을 일으킨 사람을 그저 바라봅니다. 엉터리 같은 일을 일으킨 사람은 몽둥이를 들고서 사람들을 쫓으려 합니다. 그러나 말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저 말없이 섭니다.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그이는 스스로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 줄 알까요? 그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줄, 그이 스스로 수렁에 잠기는 삶으로 가는 줄 깨달을까요?


  《선생님, 3·1운동이 뭐예요?》(배성호·최인담, 철수와영희, 2019)는 1910년대가 저물 무렵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사람들 목소리를 다룹니다. 한국하고 이웃하던 일본은 이 나라를 군홧발로 짓밟았고, 나라 구석을 아주 옭아매었습니다. 이때에 나라가 한 일은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아니, 한 가지쯤은 들 수 있겠지요. 나라지기라는 자라에 있던 이들은 나라를 통째로 팔아먹으면서 이녁 주머니를 두둑히 채우려 했습니다. 사람들 곁에서 함께 평화를 찾으려고 하는 몸짓이 아닌, 사람들하고 멀리 떨어진 채 그냥그냥 권력자 노릇을 하려 했달까요.


  우리는 오늘 ‘3·1운동’이나 ‘만세운동’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이제는 좀 달리 느끼고 보면서 헤아려야지 싶습니다.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은 목소리가 물결을 치면서 너울을 이루었습니다. 주먹이나 총칼을 든 사람들이 아니라, 오롯이 따사로운 사랑이 되기를 바라는 눈빛으로 어깨동무를 했습니다.


  자, 생각해 봐요. 여느 자리에서 풀을 뜯고 씨앗을 심으며 살던 수수한 사람들은 하나가 되는 물결로 어깨동무를 했는데요, 임금이나 권력자나 지식인이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땅임자나 소설가나 권력 한켠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리고 요즈음은 어떠할까요?


  단두대는 몇몇 우두머리 목아지는 칠 수 있으나 삶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고요히 바라보면서 새로운 길을 바라는 촛불 같은, 들불 같은, 별빛 같은 물결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어루만지면서 곱게 바꾸어 냅니다. ‘3·1운동’이라기보다 ‘평화물결’입니다. ‘만세운동’이라기보다 ‘사랑들불’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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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가 마녀래요 - 2단계 문지아이들 6
E.L. 코닉스버그 지음, 윤미숙 그림, 장미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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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시렁 149


《내 친구가 마녀래요》

 E.L.코닉스버그

 윤미숙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0.3.22.



“내가 우스꽝스러운 검정 옷을 입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빗자루를 들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검정 모자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마녀가 아니라는 건 말도 안 돼. 난 핼러윈 날뿐 아니라 언제나 마녀야.” (10쪽)


“정말로 마녀가 되고 싶다면, 별로 힘들 게 없어. 정말로 마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면, 하는 일마다 무지 힘들 거고. 좋아, 싫어?” (37쪽)


이제는 학교를 오가는 일이 하나의 모험이 되었다. 그런 모험을 생각하면 옷을 입는 것마저도 설레었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내가 꼭 딴사람 같다고 말했다. 물론, 나는 다른 아이였다. (49쪽)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마법을 쓰지 말았어야지. 자랑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면 안 돼.” (130쪽)



  1982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라는 곳에 들기 앞서까지는, 마을에서 날마다 신나게 뛰놀면서 누구한테 놀림이나 따돌림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고부터 교사하고 또래한테 놀림을 실컷 받았습니다. 교과서 읽기를 시킬 적에 버벅거렸거든요. 이때에 교사는 버벅거리는 여덟 살 아이를 출석부로 머리를 내리친다든지 비웃거나 놀리는 말을 일삼았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동무도 매한가지였습니다.


  처음 학교에 든 아이들은 누가 교과서 읽기를 잘하든 못하든 멀거니 바라보았어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니 그저 구경만 하는데, 교사란 자리에 있는 이는 ‘잘하느냐 못하느냐’라는 금을 그어서 점수를 매깁니다. 이때에 교사 눈에 들지 못하는, 이른바 ‘못하는’ 아이는 가볍게 손찌검을 받고 놀림말에 막말을 들었어요.


  처음에 얼핏 버벅거렸지만, 이내 더듬더듬이 되고, 내내 말더듬이 됩니다. 놀림말이나 막말이나 손찌검 앞에서 저 스스로 ‘나는 말더듬이로구나’ 하고 여길밖에 없었고, 학교라는 데가 매우 무섭고 싫었습니다. 그때 교사 자리에 있던 어른이란 이들은 왜 끝까지 차분히 조용히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말을 더듬든 버벅이든 왜 놀리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점수매김질을 해야 했을까요? 왜 “천천히 읽어 보렴.”이라든지 “그래그래, 더 천천히 한 마디씩 끊어서 읽어 보렴.”처럼 말하고 달랠 틈을 스스로 내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콩나물시루처럼 바글바글 아이들이 많았다 하더라도 어린이를 구석으로 내몰며 마음에 멍울이 지도록 다그쳐야 했을까요?


  《내 친구가 마녀래요》(E.L.코닉스버그/햇살과나무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0)에는 책이름처럼 스스로 ‘나는 마녀야’ 하고 말하는 아이가 나옵니다. ‘나는 마녀야’ 하고 말하는 아이는 살빛이 검다고 합니다. 이 어린이문학에 나오는 ‘어린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홀로 살빛이 검다지요.


  살빛이 검은 아이는 학교에서 놀림질이나 따돌림질을 받을까요? 이 어린이문학을 읽어 보면 ‘놀림질이나 따돌림질을 받는가 안 받는가’는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합니다만, 가만가만 읽으니 ‘어떻게 놀리거나 따돌리는가’까지 그리지 않았을 뿐, 교사나 또래가 살빛이 검은 아이를 ‘우리 학교에 없는 아이’처럼 여긴다는 대목을 소름이 살짝 돋도록 느낄 수 있더군요.


  그런데 살빛이 검은 아이만 놀림질이나 따돌림질에 갇히지 않아요. 살빛이 하얀 아이도 놀림질이나 따돌림질에 갇힙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사라는 자리에 선 어른이 먼저 나서서 ‘귀엽게 봐주는 몇몇 아이’가 있다 보니, 귀염둥이가 된 몇몇 아이를 뺀 숱한 아이들은 주눅이 들고 뒤로 밀리고 스스로 풀이 죽어 날개를 꺾고 말더군요.


  《내 친구가 마녀래요》를 읽는 내내 제 어린 나날이 떠올라 몹시 힘들었습니다. 아픈 자리를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줄거리라, 끝까지 읽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끝까지 차근차근 읽어낼 수 있었으니, ‘놀림질이나 따돌림질이란 손가락질’을 받는 아이가 스스로 친 ‘나는 마녀야’라는 말 한 마디가 새로워 보이더군요. 누가 나를 놀리건 따돌리건 손가락질하건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말 한 마디가 새삼스러웠어요. 그렇군요. 남이 나를 뭐라 하든 대꾸할 까닭이 없어요. 교사란 어른이 말더듬이를 놀리던 때리든 그런 짓을 안 쳐다보면 되지요. ‘나는 나야. 나는 언제나 나야.’ 하는 마음을 스스로 새기고, 이 말을 늘 스스로 들려주면 되어요.


  어쩌면 글쓴님부터 어릴 적에 놀림질이나 따돌림질을 흠씬 받았겠구나 싶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도 학교라고 하는 곳에서 놀림질이나 따돌림질이나 윽박질이나 손찌검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요즈음 한국은 무척 나아졌으나 고작 스무 해쯤 앞서까지도 이런 슬픈 짓이 흔했어요.


  아이들을 구석으로 몰아세우지 않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나는 마녀야’ 하는 말로 스스로를 지키려고 용을 쓰다가 그만 스스로 제 이름을 잊는 일이 일어나도록 내몰지 않으면 좋겠어요. 아이도 어른도 다같이 ‘나는 나야. 나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나야. 나는 늘 아름답고 노래하고 활짝 웃는 나야.’ 하고 외칠 수 있는 배움터하고 마을하고 보금자리가 되면 좋겠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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